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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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enda Lee” by Decca Records – Billboard, page 1, 28 August 1965.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넓은 의미에서 pop은 듣기편한 멜로디와 반복되는 부분(보통 가사와 코러스에서), 그리고 청취자가 그러한 요소에 정신을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간결하게 짜여진 곡구조를 가진 모든 음악을 의미한다. Pop Music은 19세기 이래 미국에서는 매우 수익성높은 산업분야로 인식되어왔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의미가 약간 변모해 Rock & Roll 시대 이후에 형성된 스타일을 의미하게 되었다. 일단 레코드 산업의 보다 많은 보수적인 요소들이 새로운 음악적 지형을 형성해나가는데 ’60년대 초기에 부상한 팝은 틴아이돌에 의해 구사되는 보다 가볍고 부드러운 락의 대안의 형식을 띄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팝은 Rock의 비트와 어레인지먼트에 영향을 받았고 래디오에서도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팝은 락과는 거리가 멀다. 팝의 본질적인 요소는 작곡과 스튜디오 작업과 같은 숙련된 작업이 주된 요소였지 락의 에너지와 자세같은 것은 애초에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60년대가 끝나갈 무렵 팝은 Psychedelia나 Blue-eyed Soul에 일정한 영향을 받게 된다. ’70년대에 들어서 팝은 Burt Bacharach와 같은 뛰어난 싱어/쏭라이터들의 활약으로 말미암아 더욱 말랑말랑해져갔다. ’60년대 주요 팝아티스트는 Beach Boys, Four Seasons, Everly Brothers, Association, Rascals, Righteous Brothers, Walker Brothers, Petula Clark 등을 들 수 있다. 이외에도 팝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는 작곡가 Burt Bacharach, 프로듀서 Phil Spector 등을 들 수 있다. ’70년대의 주요 팝아티스트는 Carole King, Carpenters, Gilbert O’Sullivan 등이 있다.
유사한 스타일 :

Country-Pop, Instrumental Rock, Folk-Pop, Adult Contemporary, Soft Rock, Motown, Merseybeat, Pop/Rock, Bubblegum, Teen Idol, Brill Building Pop, Space Age Pop, Nashville Sound/Countrypoli, Mod, Reggae-Pop, British Trad Rock, French Pop, Freakbeat, AM Pop, Early British Pop/Rock, Pop Underground

주요앨범들 :

The Righteous Brothers: Anthology 1962-1974 [1989]
Brenda Lee: Anthology, Vols. 1 & 2 (1956-1980) [1991]
The Zombies: Singles A’s & B’s [1990]
Roy Orbison: For the Lonely: 18 Greatest Hits [1988]
The Beatles: With the Beatles [1963]
Grant King: Let Love Out [1995]
Del Shannon: Greatest Hits [Rhino] [1990]

AllMusic 참조

Once(2006)

이 영화에서는 개인적으로 참 반가운 배우가 출연한다. 주인공 Glen Hansard가 바로 그다. 비록 그의 이름은 알지 못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인 The Commitments에서 키타 주자 Outspan 역을 맡았던 배우기 때문이다. The Commitments 가 1991년 작이고 이 영화가 2006년 작이므로 15년 만에 다시 영화에 출연한 셈이다. 세월은 거스를 수 없는 법. 천진난만하던 외모가(당시 얼굴 보기) 이제 많이 연륜이 묻어나온다(지금 얼굴 보기).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실연에 아픔을 간직한, 그리고 음악을 사랑하는 한 아일랜드 남자가 우연히 피아노를 즐겨 치는 체코 여자를 알게 되고 서로의 교감을 나누며 데모 음반을 한 장 완성한 후 각자의 삶을 찾아 떠난다는 내용이다.

음악 하는 이들을 모아서 음반을 완성하는 과정이 얼핏 앞서 언급한 The Commitments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The Commitments가 밴드의 구성에서 빚어지는 웃음과 갈등을 여러 캐릭터의 시선을 통해 다면적으로 엮어가는 반면 이 작품은 거의 주인공의 개인적 실연의 경험과 역량에 의존하는 편이다. 스타일 면에서 The Commitments 가 우스운 비극이라면 Once는 서글픈 희극이라 할 수 있다.

Alaistair Foley는 이 작품에서 The Commitments에서 거의 드러나지 않았던 키타 실력과 노래 실력을 맘껏 선보인다. 오히려 너무 음악이 ‘맘껏’ 연주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깔끔하고 매력있는 음악 영화다.

게이팝

들어가며

일반인 내가 하이텔의 동성애 모임인 “또사모”에 과감하게 가입하기까지는 하나의 작은 사건(?)이 원인이 되었다. 내가 몸담고 있던 음악동호회에서 여름을 맞이한 여름 특집감상회를 어떤 주제로 할까 고민하던 차에 내가 제안했던 ‘게이 아티스트 특집’이 의외의 반발에 부딪쳐 무산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한국이 문화적 폐쇄주의 사회라는 것은 철들기 시작한 사춘기 시절부터 체험하고 있었지만 대다수가 X세대라 일컬어지는 20대 초반, 더욱이 외국의 음악을 폭넓게 접해오며 좀더 개방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한 그 모임에서마저 “사회에 민감한 문제로 우리 동호회의 이미지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반대 주장이 만연되어 있다는 사실은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큰 충격이었다.

어려서부터 가요보다는 팝 음악을 좋아했던 나는 1980년대 전 세계를 휩쓸었던 뉴웨이브에 매료되었고, 전세계 소녀 팬들의 연인이었던 듀란듀란(Duran Duran), 컬처클럽(Culture Club) 역시 나의 우상이며 연인이었다. 1980년대 뉴웨이브의 유행은 유니섹스(Unisex)의 열풍을 몰고 왔었다. 빨간 립스틱, 짙은 마스카라, 하얗게 화장한 얼굴, 나풀거리는 블라우스 등은 그 당시 뉴웨이브 밴드들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10대 초반부터 이러한 뉴웨이브 밴드에 관심을 가졌던 나는 그래서인지 어려서부터 동성애에 대한 놀라움이나 반감이 없었다. 계속 음악에 관심을 기울이고 정보를 수집하면서 뛰어난 음악성으로 인정받는 많은 영국 아티스트들 중에 상당수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개인적으로 그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보다는 그들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밝히고 난 직후의 매스컴이나 팬들의 반응이 더 흥미로웠던 것이 사실이다.

팝 음악계 게이 아이콘의 역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가장 대표적인 영국의 게이 아이콘(Gay Icon)을 꼽는다면 1960년대 후반 영국에서 빛을 보기 시작한 글램락에서부터 시작한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를 들수 있다. 호리호리한 몸매, 뚜렷한 윤곽의 얼굴, 짙은 화장, 몸매가 드러나는 원피스도 마다하지 않는 그의 과감함은 그 당시 기성세대들에게 큰 충격이었고 젊은 세대들에게는 신선한 충격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의 이러한 이미지는 1980년대 뉴웨이브 밴드들에 의해 좀더 과감한 형태로 재창조되기도 했다. 데이비드 보위는 Bisexual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에티오피아의 국민영웅인 세계적인 슈퍼모델 ‘이만’의 남편이지만 그는 첫번째 부인(첫번째 부인도 양성애자로 알려져 있다)과의 사이에서 현재 20대 중반의 장성한 아들을 하나 두고 있기도 하다. 과거 영국의 주간지에 부인과 함께 주말이면 게이 바에 함께 손잡고 들어가서 나올 때는 따로따로 동성 파트너와 손잡고 나와서는 하루 밤을 따로 보낸 후 아침에 집으로 귀가한다는 기사가 실린 적도 있었고, 그의 부인이 남편과 믹 재거(Mick Jagger. 롤링스톤즈 리드보컬)가 한 침대에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기자들에게 토로하기도 할 정도였다. 데이비드 보위와 더불어 동성애자(혹은 이성애자)로 알려져 있는 영국의 거물급 아티스트로는 엘튼 존(Elton John), 조지 마이클(George Michael), 그리고 그룹 퀸(Queen)의 리드보컬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등이 있다.

1960-70년대의 대표적인 Gay Icon이 데이비드 보위였다면 1980년대에는 ‘여자보다 더 예쁜’ 컬쳐클럽의 보이 조지(Boy George)를 빼놓을 수 없다. 컬쳐(Clture Club)의 드러머와 연인 사이였던 그는 데뷔 후 몇 년간은 공식석상에서 동성애자가 아니냐는 질문에 “I never sleep with man”이라는 강한 어조로 동성애자임을 적극 부인하고 나섰으나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한 직후의 인터뷰에서 수줍으나 상기된 표정으로 “I love you America! You realize a real drag-Queen when you see one.”라는 한마디 말로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공식석상에서 밝힌 셈이 되었다. 후에 그는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힘들었던 시간을 회상하며 세상에 공개한 후의 홀가분함을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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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bian Angels” by Diricia De Wet from Johannesburg, South Africa – Lesbian Angels
Uploaded by ZH2010.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1980년대 후반의 변화

1980년대 초반의 뉴웨이브가 겉치장을 위주로 음악에 담겨진 메시지와는 상관없이 ‘보여주는’ 게이 문화를 대표했다면, 1980년대 후반에서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영국의 synth-pop(일렉트릭 기타, 드럼, 베이스보다는 프로그래밍 된 드럼과 신디사이저를 주로 사용한 팝)을 구사하는 몇몇 게이밴드들은, 외모로 보여주는 것보다는 노래에 담긴 메시지로서 Gay-pop의 한 주류를 형성해 왔다고 할 수 있다. Gay-pop을 정의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티스트 자신들과 그 아티스트와 그들의 음악을 추종하는 팬들의 섹슈얼리티에 있다. 아티스트 자신이 게이임을 밝힌 경우 그들의 음악을 gay-pop으로 분류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느 아티스트의 팬들의 대다수가 게이라면 그들의 음악은 Gay-pop으로 분류된다. 대표적으로 예쁜 외모와 매력적인 몸매가 음악성보다 강조되어졌던 소년 그룹(‘테이크뎃’이나 ‘보이존’)들은 멤버들의 섹슈얼리티와는 상관없이 겉으로 드러나는 열광적인 소녀 팬들 이외에 20세 이상의 남성 게이 팬들도 상당한 숫자였기에 Gay-pop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렇게 아티스트 자신이나 그들의 팬들의 섹슈얼리티 외에 중요한 음악 자체에도 나름대로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 특징이라면 런던의 언더그라운드 게이클럽이나 바에서 단골로 흘러나오는, 춤추기에 적당하고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빠른 템포, 서정적이며 흥겨운 분위기의 멜로디, 무겁지 않은 베이스라인, 뛰어난 가창력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보컬 등이 대표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주목할 만한 사실로 Gay-pop그룹의 대부분은 자신들이 게이라는 사실을 대중에게 공개해왔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기존 팬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게이라는 사실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고, 이러한 대중 앞의 공개는 오히려 새로운 팬들을 확보하는 촉매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게이라는 사실만으로 하루아침에 등을 돌리는 팬들도 물론 있었다(이러한 예는 남성 팬들에게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대표적인 Synthpop그룹으로 자신들이 게이임을 밝히고 활발히 활동하는 펫 샵 보이즈(Pet Shop Boys), 이라주어(Erasure)등은 대표적인 영국의 Gay-pop 아티스트들로 손꼽힌다.

섹슈얼리티에 상관없이 전 세계적으로 사랑 받고 있는 대표적인 그룹인 펫 샵 보이즈는 엘튼존, 퀸의 프레디 머큐리와 더불어 ‘거물급’ 게이 뮤지션에 속한다. 닐 테넌트와 크리스 로우의 Pet Shop Boys는 한때 두 멤버 사이의 염문설도 있었으나 인터뷰에서 서로가 서로의 취향이 아니라는 농담조의 발언으로 자연스럽게 그 염문설을 부인하기도 했다. 솔직하고 담담한 가사로 삶과 사랑뿐만 아니라 전쟁, 기아 등의 사회문제를 노래하기도 하는 펫 샵 보이즈 음악의 큰 특징은 오케스트레이션과 신디사이저를 기본으로 한 친숙하며 흥겨운 멜로디에 묻어 나오는 서정성과 우울함이다. ‘흥겨움과 우울함’, 이 두 가지가 자연스럽게 공존하기란 어려운 일인데 이들은 이 두 가지를 그들의 음악 속에 자연스럽게 조화시키고 있다.

게이 이미지의 보편화

Gay의 영어 사전적 뜻은 Light-hearted, cheerful, brightly coloured. 즉 ‘흥겨움, 즐거움, 밝음’이다. 선진사회의식의 대표 격인 영국 사회에서조차도 동성애자들은 기득권을 쥐고 있는 이성애자들 중심의 기존 사회로부터 눈에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외면, 멸시, 차별 등을 받아 왔음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Pet Shop Boys의 ‘즐거우나 서정적이고 우울한’ 분위기의 음악은 이러한 사회성향에 비추어 자연스레 형성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현 시대 예술의 여러 분야에서 팝 음악처럼 다양한 섹슈얼리티를 큰 저항이나 거부감 없이 폭넓게 수용하는 분야도 드물다. 아티스트 개인의 섹슈얼리티와는 상관없이 Homosexual, Bisexual, Transsexual의 이미지는 매우 보편화 되 있다. 특히 최근 제작되는 뮤직비디오에서는 이러한 성향이 뚜렷하게 보여진다. 팝 음악은 여러 가지 문화 형태 중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시대별로 그 당시 진보적인 젊은이들의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과 욕구를 표출하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미 팝 음악의 큰 줄기로 떳떳하게 자리 잡고 다른 분야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Gay-pop은 단지 음악으로서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도 ‘소수’로 차별대우를 받는 전 세계 동성애자들의 작은 목소리를 크게 높일 수 있는 효과적인 매체로서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출처

Rock ‘N Roll

록의 역사는 50년대부터다. 종래 서구의 팝은 음악형식면에서 서투른 마디 2부형식에 ‘달빛’ ‘별자리’ ‘장미’ ‘입맞춤’ 운운의 상투적 구절이 노랫말에 자주 등장했고, 전기악기는 사용하지 않았으며, 섹스, 사회문제, 종교 같은 주제는 멀리하는 게 보통이었다. 우울함과 비참함으로부터 도피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에 저항하는, 즉 웃음과 슬픔이라는 양면성을 가진 블루스는 흑인들만의 음악이었고, 소박하고 서민적이며 방랑과 이혼, 삼각관계, 음주 등을 노랫말에서 과감하게 다루었고, 전기기타, 드럼, 스틸기타를 사용했던 컨트리 앤 웨스턴은 촌스런 시골뜨기 음악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세계대전을 전후해 태어나 자본주의의 풍요를 누리면서 자란 50년대의 서구 젊은이들은 음악적 취향에 있어 기성질서에 저항했다. 이들은 멜로디 위주의 스탠더드 팝 대신 강한 비트의 음악에 몰두했다. 55년 빌 헤일리가 나타나 컨트리 앤 웨스턴밴드에서 리듬 앤 블루스를 커버한 레코드 ‘Shake Rattle & Roll’, ‘Rock around the Clock’을 발표했다. 듣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손뼉을 치거나 춤을 추게 할 수 있는 노래들이었고 그 동안 젊은이들이 어디서도 들을 수 없던 폭발음이었다. 특히 ‘Rock around the Clock’은 영화 ‘폭력교실(Blackboard Jungle)’의 주제가로 사용되어 그 해 여름 8주 연속 차트 1위를 독주하는 대히트를 기록했다. 영화가 교내폭력을 그린 것이었으므로 이때 록큰롤음악 역시 틴에이저의 반항과 비행, 그리고 폭력과 관계된 음악이라는 이미지가 확고부동하게 심어졌다.

뒤이어 56년에는 남부 가난한 촌뜨기 트럭운전수 출신의 엘비스 프레슬리가 나타나 로큰롤 광풍을 주도했다. 니그로의 사운드와 니그로의 감각으로 노래할 수 있었던 최초의 백인이었던 그의 음악 속에서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은 역동적인 결합을 이루었다. 그의 육감적인 목소리와 관능적인 허리율동은 기성세대에겐 지탄, 젊은이에겐 환호의 대상이었다. 그 외에도 50년대 중엽에는 척 베리, 리틀 리차드 등의 록큰롤음악이 쏟아져나왔는데, 이러한 음악은 모두 간단한 멜로디에 단순한 코드, 전기기타의 연주, 요동치는 듯한 리듬감, 터져나오는 듯한 에너지, 거칠게 절규하듯 부르는 격렬한 보컬과 다이나믹하게 몸을 움직이는 율동 등을 특징으로 했다.

그러나 엘비스는 60년대 이후 연예인이 돼갔고 음악도 부드러운 팝발라드로 바뀌었다. 엘비스 팬들은 그를 쫓아갔지만, 그는 더 이상 로큰롤의 황제가 아니었다. 60년대초 미국과 영국에서 엘비스와 클리프 리처드가 로큰롤에 등을 돌리고 트위스트가 창궐하면서 로큰롤은 사그라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는 비틀즈를 위한 혁명전야였다. 음악산업의 변방이라 할 리버풀과 함부르크의 욕설이 난무하는 뒷골목에서 자신들 음악을 가꿔온 영국노동자계급출신의 더벅머리청년그룹 비틀즈는 무작정 질러대는 고함소리 하나로(?) 64년 미국공략을 단숨에 끝냈다. 록의 모든 장르를 실험한 이 신화적인 그룹은 70년 팬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며 훌쩍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이후 비틀즈를 필두로 수십여개의 영국 그룹들이 물밀 듯이 미국으로 몰려들었다. 더 후, 롤링 스톤즈, 야드버즈, 크림, 핑크 플로이드 등 비틀즈 이후 록 흐름의 주도권을 최근에 이르기까지 영국이 쥐게 된 근원이다.

64년 비틀즈의 상륙에 즈음해 미국에서는 버클리대학을 시작으로 성 정치 등에 관한 터부를 타파할 것을 주장한 Free Speech Movement을 비롯, 수년동안에 걸쳐 미국사회를 뒤흔든 학원투쟁과 도시흑인폭동, 무장봉기, 베트남반전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자유정신의 최정점은 산타나, 더 후, 제퍼슨 에어플레인, 지미 헨드릭스, 존 바에즈 등이 참가한 69년 8월 우드스탁이었는데, 40만명이 구름처럼 몰려든 이 페스티벌은 폭우로 진흙탕이 되었지만 팬들은 열광했다. ‘fuck’을 계속 외치며 ‘베트남에서 죽음을’이라는 노래를 처절하게 선창한 컨트리 조에 이어 지미 헨드릭스는 미국 국가를 늘어지게 변주하며 저 위대한 미국의 이상에 야유를 보냈다. 정치적 저항과 낭만적 쾌락주의가 뒤섞인 히피즘적 반문화운동이 록과 결합한 최고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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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vis Presley promoting Jailhouse Rock” by Metro-Goldwyn-Mayer, Inc.
Reproduction Number: LC-USZ6-2067
Location: NYWTS — BIOG – The Library of Congress retrieved 3d02067r.jpg from Jailhouse Rock..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이 즈음 로스앤젤레스에서는 UCLA의 영화학과 학생들이 도어즈를 결성해 키보드 중심의 사운드, 양친살해를 암시하는 노랫말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앤디 워홀(미국 팝아트의 기수로 록뮤지션들의 많은 재킷을 디자인함) 밑에서 헤로인중독에 관한 노래를 기타의 금속성 소음에 맞춰 노래했다. 디트로이트에서는 급진적 정치운동에 관계한 매니저가 이끌던 그룹 엠시파이브가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이때부터 록은 전자악기의 비중이 더 커졌고, 앰프로 증폭되고 일렉트릭 장치에 의해 변형된 음은 폭력적이라 할 정도로 크고 자극적인 것으로 변해갔다. 지금까지의 록음악을 록큰롤이라 한다면 이후의 록음악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록이라 부른다.

그러나 70년대로 넘어가면서 미국은 혼란스러웠던 사회변동에서 벗어나 서서히 평정을 되찾았고, 록에 대한 상업적 침탈, 마약, 지미 핸드릭스와 짐 모리슨과 제니스 조플린 등의 잇따른 죽음 등으로 록은 다시 쇠잔해지는 듯했다. 이때 비틀즈와 바톤터치하듯 나타난 영국의 레드 제플린, 제프 백, 크림 이상 세 그룹(이들은 모두 야드버즈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전기기타의 금속음을 강조하고 공격적인 비트의 연주를 굉음과도 같이 증폭시켜 들려주는 하드록을 연주했다. 이 밖에 블랙 사바스, 딥 퍼플, 주다스 프리스트, 퀸 등 메탈밴드들은 음악적 완결성이 뛰어난 메탈을 연주했으며, 특히 딥 퍼플은 클래식 요소를 하드록 속에 끼워넣는 노력으로 상당한 호응을 얻었고 퀸은 치밀하게 계산된 듯한 아름다운 무대를 보여주었다. 이들은 기타의 파괴적이고 기교적인 연주, 그리고 악마적이고 남성적인 면모의 과시와 함께 완벽에 가까운 최고 수준의 연주를 자랑했으며 노래는 허무의 색채를 풍겼다.

또한 69년 킹크림슨을 필두로, 키보드를 많이 사용하고 클래식, 재즈, 현대음악의 요소를 자유자재로 섭취하며, 기존의 단순한 록리듬에 풍요로운 변박자를 도입하고, 신디사이저 등 새로운 악기를 사용한 ‘프로그레시브록’이 탄생했다. 특히 에머슨 레이크 앤 팔머는 능란한 키보드 테크닉을 과시했고, 핑크 플로이드는 현대사회의 소외와 신경증을 소재로 하여, 사이키델릭 사운드와 공상과학적 음악, 웅장한 일렉트로닉 사운드로 아방가르드적이면서도 완성도 높은 독창적 세계를 보여주어 지성인들에게 인기를 누렸다.

이들에 반발, 76년 영국에서 섹스 피스톨즈가 등장한다. 펑크의 도래, 록 안에서 또 한 번의 반항이었다. 상업화한 메탈스타들을, 정교한 록음악을 비웃으며, 그리고 영국 자본주의 위기를 반증하듯, 섹스 피스톨즈는 냉소적이고 반상업적인 노래로 일관했다. 제멋대로 불러젖히고 노래에 전혀 소질이 없을뿐더러 배우는 데도 도무지 흥미가 없었던 이들은 찢어지는 목소리로 욕설을 퍼부었지만 청중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곧 펑크밴드의 힘은 고갈되고 겉멋만이 덜렁 남게 되기도 했다.

레드 제플린을 정점으로 한 하드록 열기가 점차 식어갈 즈음, 하드록이 답답하다고 느낀 젊은이들은 80년대초 스트레이트한 요소를 더욱 높이고 강도에서도 날카로운 금속성 톤을 전개하는 헤비메탈 음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하드록에 대한 더 강한 반란이었다. 그리고 80년대 중반 메탈리카가 등장하면서 메탈은 드디어 주류의 위치로 부상했으며 슬레시 메탈, 데스 메탈 등으로 점차 분화해 나갔다.

메탈이 천하통일한 그 시점인 90년대 시애틀에서 출현한 너바나는 전통적인 사운드를 복고풍이나 짬뽕스타일로 표현한 얼터너티브록을 들고 나오면서 록 지평을 뿌리부터 흔들어 놓았다. 너바나의 얼터너티브를 계기로 탈장르시대가 열렸고 하나의 곡을 한 장르로 구분짓는 것이 어렵고 의미도 없게 되었다. 그리고 너바나의 얼터너티브는 음악장르의 구분을 뛰어넘어 하나의 문화운동으로까지 퍼져나갔다.

록은 그러나 너바나 이후에도 계속 발전, 70년대 영국에서 탄생된 펑크가 90년대 들어 주류로 자리매김하면서 네오펑크시대를 열었고, 최근엔 얼터너티브 이후 전자, 기계음으로 가득찬 테크노가 점차 힘을 얻고 있는 형국이다.

http://www.fortunecity.com/tinpan/morrissey/612/

언더그라운드, 인디펜던트, 하드코어

이는 대학 라디오 방송을 자주 타고 또 대학생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직업적 록 밴드나 뮤지tus의 음악을 가리킨다. 이 컬리지 록의 환경이 주류 팝/록 음악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에 대한 ‘대안’ 구실을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얼터너티브’라는 형용사가 붙은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에 대학가에서 인기를 끈 록 음악은 상업 라디오 방송이나 MTV 등의 대중 매체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 음반사를 통한 음반 판매 및 배급망과는 전혀 다른 경로를 통해 유통되는 언더그라운드(혹은 인디펜던트) 뮤지션들의 음악이었다. 1980년대 초반 이후 미국에서는 하드코어 씬을 비롯한 인디 씬이 각 지방의 언더그라운드 하위 문화로 폭넓게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들은 1970년대 펑크 운동의 음악적 영향과 에토스를 계승하면서 주로 지역 클럽에서의 공연을 통해 실력을 축적했고 자신들만의 독립 음반사(흔히 ‘인디 레이블’이라고 부르는)를 설립해 음반을 제작했으며, 주류 음반 시장과는 다른 독자적인 배급망을 수립하기도 했다. 

따라서 컬리지 록 방송, 언더그라운드 클럽, 인디 레이블, 하드코어 배급망, 이 네 가지의 접속이 얼터너티브 록의 모태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얼터너티브 록을 분류하면서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몇 가지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얼터너티브 씬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활동했던 R.E.M.이나 U2 같은 밴드가 어째서 때로는 얼터너티브에 포함되거나 그 선조격으로 언급되곤 하는가라는 문제 같은 것인데, 이 두 밴드는 모두 1980년대 대학 라디오 방송의 인기 스타였으며, 특히 R.E.M.의 경우 1980년대 말까지는 클럽공연과 인디 레이블을 통한 음반 발매를 지속했던 ‘언더그라운드 밴드’에 속했기 때문에 이런 식의 분류가 아주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학가와 언더그라을드의 하위 문화로서 록은 단지 얼터너티브의 모태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얼터너티브는 언더그라을드에서 지상으로 을라왔을 때 비로소 출현했고, 그때서야 고립적인 하위문화의 경계를 넘어서게 되었다. 거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1980년대 록을 ‘죽였던’ 상업주의의 화신 MTV였다.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으료 취임한 해이기도 한 1981년에 설립된 MTV는 당대의 사회 분위기에 걸맞는 문화적 첨병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다. MTV의 가장 큰 관심사는 팝 음악에서 불쾌하고 거친 요소들을 깨끗이 쓸어 내는 것, 다시 말해 청년 문화를 근절시키는 것이었다. 일찍이 MTV를 장식했던 듀란 듀란, 컬처 클럽 등은 글램과 펑크의 이미지에서 거칠고 공격적인 요소를 거세한 채 적절히 팝적으로 조합한 것이다. MTV의 보수성이 단적으로 잘 드러나는 것은 혹인 및 흑인 음악에 대한 태도였는데, 심지어 마이클 잭슨조차 단지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만으로 상당 기간 비디오 방영을 거부당하다가, 잭슨의 소속사인 CBS의 으름장에 못 이겨 간신히 방송을 탈 수 있었다 물론 잭슨의 대히트 덕분에 MTV는 일약 세계 최대의 대중 음악 매체로 부상할 수 있었고, 그의 인기가 시들해지고 있는 지금까지도 아낌없는 ‘충성’을 바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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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dova REM concert July 22 2003 blue” by Flickr user Stark (Stefano Andreoli) – http://www.flickr.com/photos/scaccia/39502728/.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1980년대 내내 마이클 잭슨, 마돈나, 왬 등의 팝 스타들을 양산했던 MTV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당시 미국에서 ‘유일하게’ 형성된 반 문화라고 할 수 있는 혹인 게토의 힙합 문화를 수용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1990년대에 들어서자 MTV는 니르바나 등 이른바 시애틀 그런지 밴드들을 필두로 한 얼터너티브 록을 본격적으로 보급하는 데 앞장서기 시작했다. 1980년대 보수주의와 주류 팝 문화의 선봉에 섰던 MTV가 1990년대에 ‘얼터너티브 네이션으로 변모한 까닭은 무엇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새로운 록 음악이 대중에게 파고들어 돈벌이가 된다는 계산이 분명 깔려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런 상업적 계산이야말로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그런 식의 해답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즉, 문제는 왜 또다시 록 음악이 대중, 특히 청년 대중을 사로잡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아마도 좀더 폭넓은 사회 문화적, 정치적 맥락에서 청년 문화가 차지한 위치로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 영미권의 1980년대가 사회, 정치, 경제, 문화적인 모든 측면에서 레이건-대처로 상징되는 신보수주의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록 음악 연구자 토니 커시너는 <대중 음악과 사회>라는 잡지에 기고한 논문에서 청년 집단 내부에서도 보수적 경향이 지배적이었으며 이는 신우익 운동과 청년 공화주의자 혹은 청년 레이건주의 집단으로 표상 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1980년대의 보수주의와 현란한 주류 팝 문화간에 어떤 직접적인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명시적인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다분히 그런 혐의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앞서 말한 하드로어 씬을 구성한 뮤지션들은 비교적 일찍부터 이런 보수주의-팝 문화에 반발했던 젊은이들에 속한다. 적어도 이들에게는 마이클 잭슨과 로널드 레이건이 동일선상에 놓여 있는 적이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들이 정치적 급진주의와 더불어 반 팝적인 이데올로기, 즉 듣기 편한 멜로디와 대중적인 스타덤을 강력 하게 거부하는 태도를 견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80년대 중후반 이들의 국지적 출현은 억눌리고 소외당한 채 불만에 싸여 있는 젊은이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점차 팬들을 확보했지만, 대중적인 현상이 되기에는 아직도 여전히 고립 분산적인 활동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결국 그런 방식에 한계를 느낀 몇몇 밴드가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을 맺고 주류 음반 시장으로 치고 올라왔다는 것, 그리고 사회 정치적으로는 공화당 정권으로 상징되는 보수주의가 후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맞물리면서 1990년대 록 음악과 청년 문화의 르네상스를 알리는 사건들이 속속 일어나게 된 것이다.

출처불명

Smiths, The

내가 스미쓰를 처음 접한 것은 영화 Pretty in Pink의 싸운드트랙에서였다. 이 OST에 삽입된 Please please please let me get what I want라는 긴 이름의 이 노래는 그들의 서정적인 음악적 감성을 잘 표현해주는 곡으로 눈밭에서 반코트를 입은채 서있는 그들의 흑백사진과 오버랩되면서(아마도 이 사진 같긴 한데) 오랫동안 여운을 남겨주는 곡이었다. 모리쎄이의 시적인 가사와 자니마의 발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애절한 키타 사운드는 이들 음악의 핵심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고딕락의 우울한 자화상과 이언커티스(Joy Division)의 표정이 묻어나는 듯한 그들의 음악적 천재성으로 인해 한동안 영국 음악계에 등장하는 신진밴드들은 이들과 비교되지 않으면 안되는 일종의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했다. 이제 모리쎄이는 예전의 샤프한 모습에서 적당히 살집이 잡힌 늙수구레한 아저씨의 모습으로 변한채 미국에서 하드코어 밴드를 이끌고 있고 자니마는 뉴오더의 버나드섬너와 함께 일렉트로닉으로 활동하여 인기를 얻었으며 현재는 자신의 밴드를 이끌고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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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ithsPromoPhoto TQID 1985” by Scanned promotional photograph. Licensed under Fair use via Wikipedia.

퍼온글(출처불명)

스미쓰는 82년 봄 맨체스터 출신의 두 남자, 모리세이(본명 Steven Patrick Morrissey)와 자니 마(본명 John Maher)에 의해 결성되었다. 그해 여름 데모 작업을 위해 드러머인 사이먼 볼스탠크로프트(Simon Wolstencroft)와 녹음을 했지만 그는 스미쓰의 일원이 되기를 거부했다. 후에 사이먼은 폴(The Fall)에 들어갔고, 결국 스미쓰에 합류한 마이크 조이스(Mlke Joyce)와 함께 맨체스터 리츠에서 데뷔 공연을 가졌다. 베이스가 없던 스미쓰는 82년 말 스미쓰의 평생 동반자인 앤디 러크(Andy Rourke)를 만났는데 그는 자니와 함께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스미쓰의 첫 싱글 ‘Hand In Glove’는 차트에 오르지 못했지만 83년의 두 번째 싱글 ‘This Charming Man’은 영국 차트 30위에 오르는 실력을 과시했다. 곧장 미국 투어에 오른 네 명은 새로운 싱글 ‘What Difference Does It Make?’를 발표하고 12위에까지 올랐다. 모리세이는 자주 성(性)의 개념을 무너뜨리는 가사를 썼는데, 그의 동료 자니의 기타 사운드는 이런 모리세이의 든든한 지지자 역할을 하였다. 한편 1집의 엔딩곡인 ‘Little Children’은 60년대에 일어났던 끔찍한 살인사건의 피해자인 어린 아이들에게 바치는 레퀴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를 비난했고 스미쓰는 언론의 표적이 되어 곤혹을 치뤄야만 했다. 다행히 피해자 측의 모리세이에 대한 변론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이후 스미쓰와 모리세이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에피소드로 남았다.

스미쓰는 미국의 R.E.M이나 벡(Beck)처럼 대학가의 유명한 컬트 밴드가 되어가고 있었다. 86년 메이저 레이블인 EMI로 이적한 후 영국 투어를 하던 중, 자니가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의 공백을 크래이그 개넌(Craig Gannon)이 대신하였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법적인 문제로까지 불거지게 되었다. 브릭스톤 아카데미에서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스미쓰의 영국 공연은 더 이상 실현되지 않았다. 자니는 더 이상 스미쓰에 남아있고 싶어하지 않았다. 음악적인 방향이 달랐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에게는 휴식기간이 필요했다. 이들의 미래는 너무나 불투명했으며, 결국엔 87년 8월 공식적으로 해산을 선언했다. 이전에 마지막으로 발표된 앨범은 [Strangeways, Here We Come]으로 같은 해 나왔고, 이듬해 [Rank]가 발표되면서 스미쓰의 잔존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멤버들은 각자 세션맨으로서 분주하게 활동했고, 모리세이 또한 화려한 싱글 데뷔를 하였다.

자니는 프리텐더스(Pretenders)와 더더(The The)에서 기타맨으로 활약하다가 버나드와 함께 시작한 일렉트로닉에서 다시 한번 부활을 꿈꾸었다. 그는 과외활동으로 브라이언 페리, 토킹 헤즈, 빌리 브래이그, 커스티 맥콜, 팻샵 보이즈, 스텍스, 그리고 반데라스에 이르는 다양한 뮤지션들과 함께 작업하며 경력을 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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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글(출처)

70년대 말 펑크의 소진과 함께 뉴 웨이브 팝이 영국 대중음악계를 휩쓸 무렵, 주류 팝 시장은 신시사이저가 주도하는 전자 음악의 홍수로 80년대 팝 음악시장의 모습을 갖춰나간다.울트라복스, 휴먼 리그같은 밴드들이 표방한 신스 팝은 이윽고 듀란 듀란, 컬처 클럽, 왬 등의 아이돌 스타들에 의한 세련된 포장으로 변신한다. MTV의 등장은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의 전환을 가져왔고, 주류 팝 시장에선 음악성보다는 외모와 무대 매너로만 음악인의 자질을 판가름하는 경향이 점차 농후해 졌다.

여기서 소개할 80년대 맨체스터 사운드는 바로 이런 당시 영국 주류 팝 시장의 소모적이고도 치열한 ‘음악 팔리기’에 대해 저항하며 맨체스터라는 영국 북부의 공업 소도시를 거점으로 활동한 인디 밴드들의 음악 스타일을 통칭해서 말한다. 영국 내에서 보면 한갓 지방도시에 불과한 이 지역을 거점으로 바로 본격적인 영국 얼터너티브 록 씬의 맹아가 형성되었다.

맨체스터 내의 밴드들은 그들만의 ‘지역성’을 통해 자신들만의 독특한 음악 색깔을 지니려고 했고 80년대 영국 얼터너티브의 발화점으로서 바로 이 맨체스터를 꼽는데는 별 이견이 없을 듯 하다. 80년대 당시 활동하던 맨체스터 출신 밴드들 중 가장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했던 밴드들론 스미스, 뉴 오더, 제임스 등이 있었고, 이들의 직계 영향 하에 등장한 ‘매드 체스터(일명 미친 맨체스터들)군단-스톤 로지스.해피 먼데이스, 인스파이럴 카펫, 살란탄 UK-들은 바로 위에 언급한 세 밴드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90년대 등장한 오아시스, 블러, 스웨이드, 펄프와 같은 쟁쟁한 브릿팝 그룹들 역시 바로 이 맨체스터 사운드에서 직,간접으로 그 음악적 영향을 흡수했다 볼 수 있다.

이 글에선 맨체스터 사운드를 대표하는 중요한 두 거목 스미스와 뉴 오더를 소개한다. 이들 그룹은 각각 ‘기타-팝’과 ‘신스 팝’이라는 음악 스타일을 통해 영국 내의 ‘인디 팝’ 운동의 선두를 담당한 밴드들이다. 이 두 밴드는 펑크와 90년대 브릿 팝을 연결 시키는 중요한 가교로서 거론되곤 한다. 앞으로 두 편으로 나눠서 진행 될 본 내용에서 먼저 ‘스미스’에 대해 알아본다.

The Smiths – 그들의 음악에 대해서…

스미스의 음악을 ‘기타 팝’이라고들 한다. 이는 당시 영국 내 대중 음악 상황과 연관되어서 붙어진 명칭인데, 당시 영국 팝 음악 시장을 주도하고 있던 스타일은 신시사이저와 시퀸서가 만들어 내는 전자음 위주의 음악이었다. 스미스의 음악은 당시 이런 주류 음악 산업의 배경 대한 신선한 대안을 드러내고 있었다.
팀의 핵인 보컬 모리시와 기타리스트 자니 마는 밴드의 지향점을 규정한다.

팀에서 작사와 보컬을 맡고 있는 모리시[본명 스티븐 패트릭 모리시(Morrissey);1959-]는 천부적인 언어 능력을 소유한 음악인 이전의 문학도이다. 그의 정신적인 우상이기도 한 제임스 딘을 닮은 창백한 이미지는 입 안에서 구르는 듯한 맬랑꼴리한 느낌의 보컬과 결합하여 기존 록 음악의 ‘샤우트’한 거친 록 음악 특유의 마초쉽과는 거리가 멀었다. 모리시의 공연을 보면서 ‘록 스타’라는 이미지는 오간데 없고 ‘동네 이웃의 친한 오빠’라는 친근한 이미지로서 다가온다. 그저 길을 지나치다가 쉽게 마주치는 그런 수줍은 청년 말이다.

그의 노래는 멜로디가 있다. 다시 말해 모리시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된다. 모리시의 보컬은 결코 넘치거나 나서지 않는다. 답답할 정도로 제한된 음정 폭(3도에서 길어야 5도)에서 보컬을 구사한다.

그의 보컬은 스미스의 음악 전체에서도 일관된 성격을 유지한다. 그는 명백한 ‘팝’주의자이다. 그의 음악적 자양분은 멀리는 50년대 버디 할리가 보여준 록커빌리의 이미지에서 60년대 크루닝 창법을 통한 스탠더드 팝, 걸 그룹, 그리고 70년대 쇼킹한 스테이지 매너를 과시한 뉴욕 돌스와 데이빗 보위의 글램, 그리고 섹스 피스톨스의 폭력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모리시의 가사 속엔 사춘기 소년의 ‘어찌할 줄 몰라 망설이는’듯한 수줍음(추억의 책갈피 마냥)과, 제임스 딘의 ‘이유 없는 반항’ 마냥 독설 어린 객끼, 여기에 문학도다운 탁월한 언어 감각이 오밀조밀하게 거미줄처럼 짜여 있다. 흔히 들을 수 있는 팝 음악의 ‘남녀 상열지사’류의 가사도 모리시에겐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론 처절할 정도로 비수를 품은 폭력성은 그의 또 다른 면모이다. 그는 한 때 펑크 매니아라고 자처할 정도로 어린 사춘기 시절 펑크 음악에 매료됐었다. 뉴욕 CBGB 출신 뉴욕 돌스의 팬 클럽 회장까지 역임한 그는 어느 누구보다 펑크의 출현을 반겼었다. 밴드 내에선 그렇게도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노래를 부르던 그이지만 한편으론 ‘섹스 피스톨’이 보여준 ‘파괴의 본능’이 그의 가사 속에 녹아 있다.

기타와 작곡을 맡고있는 자니 마[본명: 조니 마어(Johnny Marr) ; 1963- ]는 밴드내의 음악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의 기타 소리는 록 음악 특유의 디스토션 사운드와는 거리가 먼 크린 톤의, 맑게 울리는 기타 소리이다. 손가락으로 기타 줄을 하나하나 튕겨가며내는 소리는 울리는 소리다. 그의 연주는 한음 한음이 또렷하다. 필요 없는 음의 낭비란 찾아 볼 수 없고 정갈하고 깔끔하다. 일렉기타 또는 어쿠스틱 기타를 번갈아 가며 사용하는 그의 기타소리를 두고 평론가들은 ‘쟁글쟁글(기타의 소리를 두고 표현하는 말)한 기타 소리가 나는 기타 팝’이라고들 한다.

자니 마의 기타는 지저분하고 거친 록의 본연의 느낌과 거리가 있다. 크린 톤의 기타 음은 기존 밴드 내에서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쟁쟁한 기타리스트의 이미지와는 확연히 다른, 단지 모리시의 보컬을 든든히 받쳐주는 반주자의 역할에 가깝다. 리듬 웍이 강조되는 그의 기타 연주는 롤링 스톤의 키스 리처드에 비견될 수 있다. 베이스 주자인 엔디 루어크와 드러머 마이크 조이스의 연주 역시 파묻혀 버리지 않고 정확하고 또렷이 들린다. 과거 아트 록 그룹 록시 뮤직이나 재즈 록 밴드 스틸리 댄의 음악에서 느끼는 스튜디오 작업의 정확함과 치밀성이 스미스의 음악에도 살아있다. 각각의 소리가 조화롭게, 그러면서도 어느 하나 무시됨 없이 명료하게 들려온다.

이런 자니 마가 제시한 스미스의 음악 방향은 모리시의 음악관과 판이하다. 자니 마의 연주에 밀도를 둔 치밀한 스튜디오 작업을 선호하는 반면 모리시는 ‘엘리트’ 적이며 권위적인 록의 기존 이미지’를 증오하는, ‘팝’ 순수주의자이다. 스미스만의 독특한 색깔이란 바로 이들 모리시와 자니 마가 보여준 ‘앤티 록’과 ‘앤티 팝’간의 묘한 긴장관계의 존재일 것이다. 그들이 보여준, 결코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이런 밴드 내의 국면은 분명 본격적인 영국 얼터너티브 씬의 출발을 알리는 심상치 않은 징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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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들 이야기(출처 : 자스보이 jassboy@hanmail.net )

그들의 활동은 1982년부터 1987년까지 만5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다. 자니 마와 모리시의 묘한 대립관계는 인디 음악계가 배출한 훌륭한 성과였을지 몰라도, 팀의 지속에는 확실히 걸림돌로 작용했다. 이들은 활동한 기간동안 4장의 정규 앨범과 3장의 베스트, 미발표 모음곡 집을 내놓는다. 그리고 몇몇의 앨범에 미수록된 싱글들을 활동 기간 내내 발표한다.

그들이 발표한 곡들은 영국 내에서 싱글 차트의 중상위권을 유지하면서 자국 내의 고정 팬을 확보할 정도의 반응을 보여줬던 스미스였지만 이들의 음악은 미국에서는 미미한 반응을 가져왔다. 아마도 그들의 음악에서 표방하는 “영국적인 상황”의 강조는 미국인들에겐 낮설고 어렵게 받아졌으리라 생각된다. 더군다나 그들이 표방한 ‘팝’이라는 음악 번지수는 미국 인디 씬이나 미국 내 인디 음악을 틀어주던 거개의 대학 교내 방송국에서 결코 반길만한 것이 못 되었다. 더군다나 미국 문화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들어내는 모리시의 가사는 미국인들에게 그다지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리라 본다.

The Smith – (1984)

메이저 급 음반사의 도움 없이 ‘러프 트레이드’ 라는 인디 레이블을 통해 나온 그들의 데뷔 음반은 브리티시 얼터너티브의 출현을 예고했다. 앨범이 나올 당시 영국 주류 음악 씬이 신시사이저로 치장된 기계 음이었던 반면에 이들의 음악은 지극히 소박하고 투명했다. 물론 스트링이나 피아노가 가세된 ‘틴 팬 앨리’ 류의 팝 음악이 아닌 과거 초기의 비틀즈나 롤링 스톤즈가 그랬듯이 ‘밴드 편성의 팝’이었다. 롤링 스톤지와의 인터뷰에서 자니 마는 ‘우리가 이런 음악을 시도하기 전에는 아무도 이런 식의 기타 반주에 멜랑꼴리한 팝 음악을 연주하는 밴드들은 없었다’고 얘기한다.

82년 클럽 라이브 무대를 통해 데뷔한 이들은 83년 러프 트레이드를 통해 첫 싱글 “Hand in Glove”를 내놓으면서 영국 음반 시장에 공식적으로 데뷔한다. 가사 내용 중 ‘호모 섹슈얼리티를 나타냈다는 점이 논란이 된 이 곡으로 바야흐로 언더그라운드 씬의 ‘스미스 열풍’을 예감케 한다. 소녀 취향의 팝 넘버인 그들의 두 번째 싱글 “This Charming man”은 영국 팝차트 25위까지 진출한다. 모리시의 창백하고 풋풋한 이미지는 소녀 팬들의 모성애를 자극했다. 그러나 아동 학대 내용을 다룬 “Reel around fountain”과 무어인(북 아프리카 아랍인과 베르베르족의 혼혈 인종)의 손에 살해 당한 아이를 보고 절규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린 “Suffer little Children”에서 보듯 그들의 음악이 표현 대상은 핑크빛 사랑 타령을 넘어 추악하고 암울한 사회 현실마저 적나라하게 투영시킨다. 커다란 뿔태 안경을 끼고 보청기를 낀 채 수선화를 뒷 주머니에 꽂고(스미스 시절 모리시의 전형적인 무대 매너)무대에 등장하는 모리시가 우스꽝스럽지 몰라도 그의 가사에서 보이는 세상에 대한 시선은 냉정하다.

Meat is murder – (1985)

모리시의 ‘채식주의’선언의 계기가 된 음반. 만인의 화제로 떠오른 그들의 두 번째 앨범은 전작 앨범의 노선을 그대로 유지한다. 성과면에선 전작에 비해선 다소 뒤떨어졌다. “That joke isn’t funny anymore”가 싱글 커트 됨.

The Queen is Dead – (1986)

그들의 대표적인 명반으로 꼽히는 수작. ‘여왕은 죽었다’라고 하는 앨범 타이틀에서 느끼듯이 전작들에 비해서 거칠게 몰아치는 첫 트랙부터 본 앨범의 진가를 기대하게끔 한다. 영국 왕실의 부패를 꼬집으며, 왕실의 실상을 모리시의 탁월한 글쓰기 실력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아마도 “The queen is dead” 만큼 자니 마와 모리시의 특성의 뚜렷이 대비를 지닌 곡도 없을 것이다. 강한 백 비트에 실릴 우렁찬 기타 리프는 단순한 코드 진행과 반복되는 패턴으로 지속되지만 어느 스미스 싱글보다도 강렬하다. 단연 자니 마의 기타 연주는 본 곡에서 가히 압권이다. 앨범 시작을 강한 파워로 몰아 부친 이 곡을 통해서 스미스의 음악적 뿌리가 펑크에 있음을 다시금 증명한다.

스미스의 특기인 전형적인 팝 역시 “I know it’s over”에서 들려주는 멜랑콜리한 보컬은 여전하다. 스트링 편곡이 선명한 본 앨범의 첫 싱글 커트 곡인 “There is a light never go out”와 “The boy with the thorn in his side”는 모리시가 표방하는 “영국의 특수성”으로 비쳐진다. 그는 그의 가사를 통해 영국의 인종문제, 계급, 사회 부조리를 그만의 위트와 수사법으로 표현하고 있다.”Queen”이라는 명사의 쓰임에서 보듯이 그의 노래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영국 사회이다.

그의 가사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 이런 그의 글 쓰기에서 나타나는 상황적 고려의 필요성 때문일 것이다. 자니 마의 기타 연주는 이전보다도 훨씬 다채롭다. 어쿠스틱과 일렉트릭 기타를 번갈아 가며 만들어내는 사운드가 돋보이는 “Bigmouth Strikes Again”를 비롯 50년대 록커빌리 사운드의 숨결이 느껴지는 “Vicar in a Tutu”에서도 자니 마의 기타 연주는 유난히 돋보인다. “There is a light never go out”와 “The boy with the thorn in his side”에서 보여준 세련된 편곡 솜씨는 ‘스미스’의 음악이 ‘과연 기타 팝’임을 여실 없이 증명한다.

스미스의 모든 것을 유감없이 드러낸 본작은 그들의 1집,2집 앨범을 들은 스미스 팬이었다면 ‘정말로 이젠 모든 것을 거침없이 드러냈다”라는 표현이 어울릴만한 확실한 그들의 음악 색깔을 규정한다.

“Strangeway-Here We come” – (1987)

본 앨범을 내기 바로 직전 스미스는 갑작스런 해산을 선언한다. 이미 전작 “The Queen is dead”를 제작할 당시부터 자니 마와 모리시와의 밴드 내 분열은 표면화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둘 간의 음악 성향 차이로 인해 팀 해산을 맞는다. 모리시는 자니 마의 외도( 그는 당시 록시 뮤직에 있던 브라이언 페리나 밀리 브래그와 음악적 교류를 나눴다)가 못 마땅했고, 자니 마 역시 모리시의 60년대 팝 음악에 심취한 태도가 못 마땅했었다. 둘 사이의 음악적 견해차는 결국 본 앨봄 발매를 몇 주 앞두고 자니 마의 밴드를 떠나겠다는 선언으로 이어진다. 모리시는 주저 없이 팀을 해산하고 솔로 활동에 나서게 된다. “I started Something I couldn’t finish”와 “Last night I dreamt that someday loved me”가 싱글로 커트 됨.

Single Collection

이외에도 정규 앨범엔 포함되어 있지 않으나 싱글로 발표되어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Panic”은 미국 문화로 범벅된 영국의 상황을 인종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을 각오를 갖고 만든 곡이다. “DJ를 교수형에”라는 독설 찬 그의 항변은 그가 미국 문화에 대해 가지고 있는 반감의 정도를 말해준다. “Heaven knows I’m Miserable now”는 영국 내의 사회문제인 실업을 모리시의 위트 어린 가사로 표현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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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앨범
1984 The Smiths Sire
1985 Meat Is Murder Sire
1986 The Queen Is Dead Sire
1987 Strangeways Here We Come Sire

링크
Fan Page
다음의 스미쓰 카페
morrissey-solo.com/
Johnny Marr의 공식싸이트
elmoz의 팬페이지
haine의 팬페이지
Smithyteria
Johnny Marr 키타탭
자니마, 80년대를 회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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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게시판에서 떠들었던 이야기들

[지나가다] [불평]ah you jassboy -whatever you are- so much to answer for… This sounds half-baked, or half-hearted at its best! 그리고 정정: 무어인이 아니라 60년대 맨체스터에서 있었던 엽기 연쇄살인사건인 무어스 머더(Moors Murder)를 말하는 것. 무어(스)는 그 지방 외곽의 황량한 들판을 지칭. -11월10일-
[lupin] 예전 로저 샤툭이 샤드백작-후작인가? 가 무어스 살인사건과 테디번디 살인사건의 원인 제공자라 했는데 그무어스가 그 무어스군요.. -11월10일-
[lupin] 윗글 쓰신분 =자스보이님딴엔 정성껏 동아 대 백과사전 찿아가며 쓰신 무어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지나가다님의 글을 읽고 다시보니 참 쓸쓸 하네요.. -11월10일-
[lupin] 스미스의 패닉은 들을때마다 딴나라당 선거 유세에 쓰이면 딱이겠다는 생각이…hang the dj,hang the dj -11월10일-
[moz] Hang the blessed DJ~ 한때 제 시그내춰로 쓰기도 했던 문구였습니다. 아~ 토요일 날도 좋은데 저녁때 웬 생일파리에 딸려나가야 하는군요. 고양이 산책이나 시켜야 겠다. -11월10일-
[moz] 선거캠페인쏭 말이 나와서 생각난건데 한때 부쉬녀석(애비부쉬)이 선거캠페인쏭으로 토킹헤즈의 Dont worry about the government를 썼다는군요. 이에 토킹헤즈 측은 it’s bullshit이라고 짤막하게 논평하였답니다. -11월10일-

New Order

Promotional images of New Order in 1985; clockwise from top left: Bernard Sumner, Stephen Morris, Peter Hook, Gillian Gilbert
By Trevor Key, Peter Saville; Distributed by Qwest RecordsLansure’s Music Paraphernalia, Public Domain, Link

1980년 영국 맨쳐스터에서 결성

멤버 : Peter Hook, Stephen Morris, Bernard Sumner, Gillian Gilbert

1.뉴 오더(new order)1의 전신- 조이 디비젼(joy division)2

섹스 피스톨즈와 클래쉬가 이루었던 영국 음악계의 펑크(punk)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원래 정치적 색채가 짙은 무브먼트의 성격으로 시작되었던 펑크는 주류 팝 씬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었기 때문에 상업적인 성공을 기대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었고 결국 스스로 다시 언더그라운드화 되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아직 섹스 피스톨즈의 여파가 남아있던 1977년, 바르샤바(warsaw)라는 이름으로 처음 음악활동을 시작했던 Joy Division은 비록 그 활동 기간이 3,4년 밖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포스트 펑크의 새로운 대안인 뉴웨이브의 서막을 열었던 밴드였다. 조이 디비젼은 79년에 맨체스터의 팩토리 레코드(소위 맨체스터 사운드라 부르는 일단의 음악적 흐름을 조성했던 그 레코드사-뉴오더, 더 스미스,3 스톤 로지스 등이 팩 토리 레코드와의 밀월관계로 유명하다)와 계약을 맺고 첫 싱글 ‘Transmission’과 데뷔 앨범’Unknown Pleasures’를 발표했다.

이 앨범은 곧 비평가들로부터 대대적인 찬사와 지지를 받았고 이후에 발매된 싱글 역시 많은 지지를 받았다.그러나 1980년 5월 18일,대망의 두번째 앨범 ‘Closer‘가 미국 시장으로 진출하기 하루전 보컬리스트이자 팀의 핵심적인 존재였던 이안 커티스가 돌연 목을 매 자살하고 만다.급격한 건강 악화와 영국 팀으로서 미국 시장에 진출한다는 심리적인 압박감이 그를 자살로 내어 몰았던 것이다. 이안 커티스의 죽음 이후, 조이 디비젼은 두장 짜리 회고앨범인 ‘Still’을 발매하고 공식적으로 해산된다.

2.새로운 대안- 뉴 오더(New Order)

너바나가 커트 코베인의 자살 이후 해산되었듯이 조이 디비젼도 이안 커티스의 죽음으로 해산되었지만,이들은 너바나처럼 뿔뿔이 흩어지지는 않았다.조이 디비젼의 잔류 멤버였던 버나드 섬너(기타)와 피터 훅(베이스),스티븐 모리스(드럼)는 새로 운 여성 키보디스트 질리언 길버트(당시 스티븐 모리스의 애인이자 현 부인)를 영 입하여 80년, 새로운 그룹인 뉴오더를 탄생시켰다.

뉴 오더는 초기에는 펑크의 기운이 많이 남아있는 사운드를 들려주었으나 차츰 일 렉트릭 사운드와 기타 락의 균형 잡기에 노력하였고 결국 그들 만의 독특한 뉴웨이브 사운드 구축에 성공한 그룹이다.이들은 그당시 독일 전자 음악계의 대부격이었 던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와 아방가르드 전자 음악으로 유명한 아트오브노이즈(Art Of Noise)의 영향으로 신서사이저와 시퀀서 등을 적극 도입하였지만 분명히 이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뉴 오더는 다분히 비상업적이었던-학구적이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듯한-크라프트베르크나 아트 오브 노이즈와는 다르게 상업적으로도 뛰어난 음악을 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들의 음악이 단지 돈을 위해 양산해내는 ‘땐스’뮤직이라는 말은 아니다.4) 뉴 오더는 각종 일렉트릭 악기의 도입과 수많은 댄스 플로어 용의 리믹스 싱글 작업을 통해서 대중에게 강하게 어필했지만,이들의 음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적 댄스뮤직’으로 불릴 만큼 충분히 비주류 적이다.바로 이런점이 이들의 음악이 단순한 댄스 뮤직으로 매도되지 않고 10년 이상이나 활동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뉴 오더는 비록 국내에서는 그 이름값을 다 못하고 있지만,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십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일렉트릭 팝의 최대 약점인 말랑말랑 한 사운드에도 불구하고-최고의 뮤지션으로 칭송받고 있는 것이다.

조이 디비젼이 그랬던 것처럼 역시 맨체스터의 팩토리 레코드와 계약을 맺은 이들은 조이 디비젼의 음악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스타일의 데뷔작인 ‘Movement’를 81년에 발표했다. 82년에 싱글 ‘Temptation'(영화 트레인 스포팅에도 삽입됨)을 공개하여 대대적인 찬 사를 받은 이들은 83년에 또다른 싱글 ‘Blue Monday’를 발표하고 두번째 앨범인 ‘ Power, Corruption And Lies’를 발표하였다.뉴 오더는 이 두 번째 앨범을 통해 다분히 펑크적 잔재가 남아있었던 조이 디비젼 시절의 음악적 모습을 청산하고 기타 락과 신서사이저 댄스 뮤직과의 균형미를 이루는데 성공한다. 85년에 세 번째 정규 앨범인 ‘Low Life’를 발표한 이들은 신서사이저 사운드를 강화하고 드럼 머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등 보다 일렉트릭 사운드에 치중한 모습을 보 여준다. 86년에 발표한 앨범 ‘Brotherhood’는 기타 파트가 강한 멜로디 위주의 사운드를 선 보여 어쿠스틱과 일렉트릭의 공존을 시도했다.

87년,뉴오더는 그동안 자신들이 발표했었던 싱글들과 B면 수록곡,그리고 미발표곡 들을 한데 모아서 더블 컴필레이션 앨범인 ‘Substance’를 발표한다.사실상 그들의 첫 번째 베스트 앨범이자 싱글과 리믹스 작업에 치중하는 이들의 음악적 스타일을 한 번에 꿰뚫어볼수 있는 작품으로서 미국 시장에서도 놀라운 반응을 얻었다.이 앨 범에는 국내에서도 인기가 좋았던 곡인 ‘Bizarre Love Triangle'(호주 출신의 뮤 지션 프렌테가 리메이크한 노래)은 물론 ‘1963’등 그들의 히트 싱글들과 조이 디비젼 시절의 미발표곡 ‘Ceremony’,’In A Lonely Place’등이 수록되어 있다. 89년 발표한 하우스 뮤직 스타일의 6번째 앨범 ‘Technique’를 통해 또다시 인기 몰이에 성공한 이들은 90년 영국 월드컵 축구팀 응원가인 ‘World In Motion’을 발표 하여 영국 싱글 차트 첫 정상을 차지했다.

90년대 들어서 이들은 공식적인 활동을 그만두고 얼마 동안 팀 멤버들의 독자적인 프로젝트 밴드 결성으로 팀이 해체된 것 아니냐는 의문까지 제기되었다.버나드 섬너 는 영국의 국민적 락그룹 더 스미스의 기타리스트였던 자니 마와 함께 일렉트로닉이라는 하우스 뮤직 스타일의 밴드를 만들었고,피터 훅은 Revenge를,그리고 스티븐 모리스는 질리언 길버트와 함께 The Other Two라는 프로젝트 밴드를 각각 만들어 각자 활동에 전념했다.(버나드 섬너는 90년에 발표되었던 데뷔작 ‘Electronic’ 에 이어 96년에 크라프트베르크의 전 멤버였던 칼 바튼과 함께 두번째 앨범 ‘Raise The Pressure‘를 발표했고 피터 훅은 Monaco란 밴드를 결성해서 데뷔 앨범 ‘Music For Pleasure’를 발표했다.)

그렇지만 93년 이들은 그동안의 각종 루머들을 일축시키며 새로운 앨범을 내놓았고 ‘Republic’이라는 이름의 이 앨범은 뉴오더의 앨범 중 처음으로 국내에 라이센스 발매되었다.(이들은 이 앨범부터 레코드사를 이적하여 지금은 런던 레이블로 앨범을 발매하고 있다.) 94년과 95년 두장의 베스트 앨범을 발매한 이들은 올해 7월 재결성 공연과 함께 새로운 활동을 시작할 예정이다.

From ThaDogg


그들에 관한 다른 글 : 출처

우울한 신스 팝의 대명사- 뉴 오더

뉴 오더가 제시한 ‘새로운 질서’란 기존의 펑크적 요소에다 가공할 만한 댄스 비트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독특한 신스-팝이었다. 이들은 조이 디비전에서 들려준 무겁고 암울한 고딕 사운드 대신 시퀸서와 드럼 머신, 신시사이저를 도입한다. 80년대 내내 이들이 주력했던 음악은 다름 아닌 ‘디스코!’ 하지만 이 천덕꾸러기 같은 댄스뮤직조차 뉴 오더를 통해 위트와 재치 넘치는 연주력이 십분 발휘된 독특한 신스팝으로 재창조된다.

무거운 베이스음이 곡 분위기를 주도해 가는, 음울한 분위기의 펑크 내 하위장르인 고딕을 주창하며 70년대 말 등장한 ‘조이 디비전(Joy division)’은 다름 아닌 이 ‘뉴 오더’의 전신 밴드였다. 미국 공연을 앞둔 1980년 5월 그룹의 핵심인 보컬 이언 커티스의 자살은 곧바로 ‘조이 디비전’의 종언을 의미했다. 조이 디비전의 나머지 맴버들인 버나드 섬너, 피터 훅, 스테판 모리슨은 여성 멤버 이언 길버트를 영입 ‘뉴 오더’를 결성하기 이른다. 그러나 그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라며 다소간의 음악적 방황을 겪게 된다.

♬ Sound Chek Box ♪♩

  • Temptation(1982)
  • Blue Monday(1982)
  • Age of Consent
  • Confusion(1984)
  • Perfect Kiss(1985)
  • Subculture(1985)
  • Bizarre Love Triangle(1986)
  • True Faith(1987)
  • Round & Round”(1989)

그들의 첫 앨범 ‘Movement(움직임-1981)’는 기존 조이 디비전 스타일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의 첫 싱글 “Ceremony(의식-1981)”는 조이 디비전의 짙은 그림자가 여전히 깔려있음을 말해준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분명 과거 조이 디비전과의 단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 싱글로 발표된 “Temptation(유혹-1982)”은 이들의 뚜렷한 변화를 진행되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나중에 선보일 그들의 음악에서처럼 전자음 비중이 두드러지진 않지만 비트감은 이전보다 훨씬 힘차게 뻗어나가고 곡 분위기도 예전 ‘Movement’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밝다. 버나드 섬너와 피터 훅이 만드는 기타와 베이스간의 하모니가 돋보인다.

하지만 뉴 오더의 존재를 전 세계에 알릴 수 있었던 건 바로 그들의 대표작 “Blue Monday(우울한 월요일-1982)”였다. 뉴 오더의 본격적인 음악 이정표는 바로 이 “우울한 월요일”을 통해 확립된다. 새로 구입한 드럼 머신과 시퀸서의 작동을 시험해 보는 과정에서 탄생한 우울한 월요일은 신시사이저와 드럼 머신이 시종 일관 주요 멜로디와 리듬을 만들어 낸다. 매혹적인 인트로가 신시사이저에 실려 나오는 동안 어느새 디스코 특유의 말 달리는(?) 리듬이 넘실대며 버나드 섬너의 어눌하고 거친 보컬이 뒤를 잇는다. “오늘 당신의 기분은 어떠십니까?”하며 잠시 생각을 할때 쯤 간간이 들이는 피터 훅의 ‘둥당당당’ 하며 울리는 베이스음은 ‘조이 디비전아 안녕!’하고 작별인사를 한다.

마치 지난날 고딕과의 애증을 대변하는 듯. 영국 내에서만 300만장이 팔린 이들의 “우울한 월요일”싱글은 영국 팝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이라는 명예로운 기록을 수립하기 이른다. 이듬해 발표된 ‘power, Corruption, & Lie(권력, 부패, 그리고 거짓말-1983)’은 “유혹”과 “우울한 월요일”에서 들려준 음악 재료가 오밀조밀 짜여있다. 버나드 섬너의 기타는 “Age of Consent”에서 보듯 그루브 감이 넘실댄다. 전자음이 그다지 화려하게 느껴지진 않지만 그들이 달성한 “변화의 증거”가 물신 풍긴다.

연이은 싱글 “Confusion(혼돈-1984)”과 “Perfect Kiss(완벽한 입맞춤-1985)”, 그리고 “Subculture(하위 문화-1985)”등에선 우울한 월요일을 능가하는 경쾌한 신스 팝을 들려준다. 전자 음의 비중은 훨씬 높아지고 리듬은 보다 치밀하고 경쾌하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신스 팝은 어둡고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다. “완벽한 키스” 종반부에서 들려준 휘몰아 치는 듯한 신사사이저 음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몽환감을 느끼게 한다.

패션 쇼 배경음악으로도 자주 쓰이는 “Bizarre Love Triangle(기이한 삼각관계-1986)”에 지금까지 발표한 싱글들과 미 발표곡들, 그리고 “True Faith(진실한 믿음-1987)”라는 신곡이 수록된 우수한 컬렉션 앨범 ‘Substance’는 뉴 오더가 전형적인 싱글 밴드임을 증명한다. 미국 팝 시장에 그들의 존재를 본격적으로 알리게 된 계기가 된 본 앨범의 신곡 “진실한 신념”은 영국 차트 1위 등극의 영광을 밴드에 선사한다. 조이 디비전에 이어 뉴 오더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전 세계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그들이 남긴 것들- 매드체스터의 산파자

이들의 활동 전반기에 발표된 싱글들에서 발견되는 점은 버나드 섬너의 보컬은 결코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멤버 각자의 기량이 균등하게 조화된 신스 팝이 그들의 특징이다. 80년대 초 인기를 누리던 대부분의 신스팝 그룹들이 ‘노래’라는 부분에 비중을 뒀던 반면 이들의 음악은 철저히 ‘4인조 밴드 편성’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멤버들의 사진들로 일관된 “Low life-1985” 앨범 자킷 디자인은 그들의 음악만큼이나 이색적이다. ‘음악을 들어달라는 무언의 요구’와도 같은 이들의 의도는 분명 주류 음반 시장의 관행과는 거리가 있다. 더군다나 보컬을 맡은 버나드 섬너는 지나치게 의기양양(?)하게 들려 청자로 하여금 거부감마저 준다.

뉴 오더가 남긴 음악은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두 장르-펑크 록과 댄스 팝-간의 온전한 화학반응을 일궜다는 평가로 집약될 수 있다. 뉴 오더는 스미스와 더불어 향후 90년대 브릿팝으로 이어지는 영국 얼터너티브 록음악의 형세를 예견케 해준 맨체스터 출신의 밴드였다. 그들이 개척한 “우울한 신스팝”은 맨체스터 내에서 카다란 반응을 몰고 왔고, 89년부터 91년 사이에 뉴 오더의 출신지역인 맨체스터를 중심으로 형성된 “매드 체스터 군단(일명 미친 매드체스터들)”의 직접적인 영향력으로 작용한다.

80년대 후반 영국 인디 록계의 기억되는 한가지 사건은 댄스 클럽에 불어닥친 “에이시드” 열풍이었고 영국 내에서 몽환적인 하우스 음악의 인기는 주류 록 음악 시장과의 차별 점으로 부각된다. 인디 록계에서도 매드 체스터를 중심으로 이 “에이시드 열풍”의 동반자로 나서게 되었고 이에 뉴 오더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이 설립한 인디 레이블인 팩토리 레코드 회사와 별도로 출신 지역 맨체스터에서 ‘하시엔다’라는 클럽을 운영하면서 맨체스터 출신의 인디 밴드들에게 무대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 곳을 기점으로 인디록과 에이시드 하우스 비트와의 화려한 결합음모는 싹이 트고 있었다.

피터 훅이 프로듀서로 참여한”스톤 로지스”나 뉴 오더의 팩토리 레이블 소속이었던 “해피 먼데이”와 같은 매드체스터를 대표하는 밴드들 역시 뉴 오더의 직간접의 영향을 받으며 등장하게 된다. 그들의 89년작 ‘Tehchnique(기량)’ 앨범은 이런 “에이시드-하우스” 뮤직의 영향을 온전히 반영한다.”Round & Round”(둥글게 둥글게-1989)는 전형적인 하우스 뮤직 구성을 갖고 있다.

그들은 어디에…-개인 프로젝트 활동

하지만 그들의 명성과는 달리 뉴 오더 내부에선 심심치않게 들려온 멤버간의 음악적 견해차는 활동 전반을 통해 전편에 언급한 스미스에 못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그들의 모습을 보기란 여간 힘들다. 공식적인 뉴 오더의 음반은 95년에 발매된 그들의 88년-94년까지의 후반기 싱글 베스트 모음집 이후 아무런 새 음반 발매 소식이 없는 상황이다. 해체설도 없지 않아 나돌긴 했지만 아직까진 공식적인 표명이 없는 상황이다. 사실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뉴 오더의 공백은 곧 개인 프로젝트 활동의 진행’을 의미했다. 90년대 들어 이들의 소위 “따로 또 같이”활동 형태는 지금까지 계속된다. 버나드 섬너는 전편에서 언급된 기타리스트 자니 마와 ‘일렉트로닉’이라는 테크노 팝 그룹을 결성하여 현재까지 3장의 앨범을 발표해놓은 상황이다. 피터 훅은 ‘Monacco’라는 프로젝트 음반을 발표하고, 스테판 모리슨과 이언 길버트(둘은 부부임)는 ‘The other two’란 그룹을 만들어 활동 중이다.

-자스보이-  jassboy@hanmail.net )
The ROCKER™ by InterMuz.com since, 2000.

스튜디오앨범 디스코그래피
1981 Movement
1983 Power, Corruption & Lies
1985 Low-life
1986 Brotherhood
1987 Substance
1989 Technique
1993 Republic
2001 Get Ready
2005 Waiting for the Sirens’ Call
2013 Lost Sirens
2015 Music Complete

링크
the Official site
World in Motion
Taxbox23

  1. 이름의 기원설 1) “새로운 건축 질서”에 대한 신문 기사에서 (Jenny Turner) 2) 또 다른 가볍게 가려진 나치 언급. 조이 디비전 참조 (Roderick) 3)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1993년 New Order Story 비디오에서 Barney와 Gillian은 나치 언급에 대한 농담을 던졌지만, 진지해져서 그 이름을 논리적인 것으로 보았다고 말했다 (melshgeek)
  2. 카롤 체틴스키(Karol Cetinsky)의 사도마조히즘 소설 “인형의 집”에서… 조이디비전은 강제로 추방된 여성들이 휴가를 이용해 나치 장교들에게 매춘을 하도록 강요받은 오두막집이었다
  3. 남이 쓴 글이니 남겨둔다면 팩토리와 스미쓰 사이에 어떤 “밀월관계”가 있었는 지는 좀 의문이다.
  4. ㅇㅇ? 클래프트베르크와 아트옵노이즈가 상업적인 땐스뮤직??

80년대, 이런 음악도 있다.

From left to right: Damon Krukowski, Naomi Yang, and Dean Wareham
By Provided by the former members of the band, Fair use, Link

Date : 2001-09-29
Writer : 조은미  
jamogue@tubemusic.com
Illustrator : 조미영 narara@tubemusic.com

9월 초 VH1은 ‘Top Eighty Of The 80s’이란 이름 아래 80년대 대표적인 80곡을 선정하여 발표했다. 그들의 선정 기준은 80년대 혁신적이고 중대했던, 그리고 많은 논의가 이뤄졌던 곡들을 중심적으로 다룬 것. 당연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음악들이 여기 80곡에 포함돼 있다.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마돈나(Madonna)로 대표되는 MTV 시대의 리더들을 비롯해, 80년대 메탈 씬의 굵직한 흐름을 이뤘던 데프 레퍼드(Def Leppard), 포이즌(Poison), 본 조비(Bon Jovi), 스키드 로우(Skid Row)와 같은 LA 메탈 밴드들, 그리고 뉴 웨이브 후기에 등장한 컬쳐 클럽(The Culture Club), 듀란 듀란(Duran Duran), 아하(A-Ha)와 같은 로맨티시즘 밴드들이 그들이다. 그 나머지 80곡을 이루는 이들 역시 고개를 끄덕끄덕할 만한 이름들이다. 그리고 프로그레시브 일렉트로닉 밴드 아트 오브 노이즈(Art Of Noise)나 실험적인 펑크 밴드 큐어(The Cure)와 같은 영국 밴드와 미국 언더그라운드 펑크 밴드 데보(Devo), 그리고 1980년 [Boy]를 통해 등장한 U2의 이름은 그 주요 흐름의 바깥에서 만날 수 있는 특별히 반가운 이름들이다.

그러나 80년대 모든 음악이 MTV와 댄스 팝, 로맨틱 뉴 웨이브, 팝 메탈로 채워졌던 것은 아니다. 가장 대중적인 음악이 성공한 음악이었던 80년대에도 실험적인 음악은 존재했다. 이미 얼터너티브의 원천이 80년대 초부터 형성 되기 시작했으며, 언더그라운드, 인디 씬에서는 메인스트림과는 별도의 특징적인 사운드가 마련되고 있었다. VH1의 선정 리스트에는 R.E.M.의 이름은 빠져 있다. R.E.M.의 대중적인 성공은 90년대 이르러 두드러졌지만 현재 시점에서 80년대를 되돌아 볼 때 그들은 이미 중요한 밴드였다. 즉, VH1의 ‘Top 80’ 선정 기준은 현재로부터 과거를 되돌아 보는 관점이 아니라, 당시 가장 대중적이고 성공적이었던 곡들에 중점을 둔 것이다. 그렇기에 80년대 영국 음악의 주요 흐름을 이뤘던 슈게이징이나 80년대 중후반 미국 언더그라운드에서 움트기 시작한 노이즈/드림 팝 등도 이 리스트에서는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느 시대나 인디, 언더그라운드 씬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 적합한 예로 들 수 있는 것은 이제 누구나 알고 있는 너바나(Nirvana)일 것이다. 인디 레이블 서브 팝(Sub Pop) 출신의 너바나는 90년대 초 록 씬은 물론 문화 전반에 걸쳐 메인스트림을 주도했다. 언제나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는 인디, 언더그라운드(적인) 음악을 듣는 일은 메인스트림에서 듣지 못했던 남다른 사운드를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이 열 장의 앨범이 80년대 그러한 음악을 온전히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례가 될 뿐이다. 많은 아티스트의 이름과 그들의 앨범이 여기서 또 누락되기는 마찬가지다. 뉴 오더(New Order)나 R.E.M 등 역시 꼭 거론해야겠지만 되도록 국내에 소개가 덜 된 아티스트를 중심으로 (너무도 단촐한) 10장을 선정했다.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것은, ‘Top 10’이 아니라 ‘열 개의 추천작’일 뿐이라는 점이다.

Cocteau Twins [Treasure] (1984)
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가장 독특한 밴드 중 하나인 콕토 트윈스(Cocteau Twins)의 세 번째 정규 앨범. 로빈 거스리(Robin Guthrie)의 부드럽게 흐느적거리는 기타, 사이몬 레이몬드(Simon Raymonde)의 낮은 베이스 연주, 그리고 여성 보컬리스트 엘리자베스 프레이저(Elizabeth Fraser)의 아련한 보컬이 어우러져, 어두운 듯하면서도 신비로운 사운드를 연출해 낸다. 낮은 베이스 연주와 달리 엘리자베스의 보컬은 대기를 부유하는 듯하다. 관능적인 듯하면서 짙은 허무의 인상을 드리우고 있는 그녀의 보컬은 여러 번의 보컬 더빙을 통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며, 때로는 모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다양한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는 보컬리스트 중 하나. 이러한 인상은 앰비언트적인 요소가 덧입혀지면서 더욱 짙어진다. 콕토 트윈스는 마이 블루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를 비롯한 드림 팝 밴드들처럼 노이즈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장 최면적인 사운드를 들려주는 이들은 일련의 드림 팝 밴드들 중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초창기 콕토 트윈스는 다소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듯한 사운드를 들려줬지만 이 앨범을 거치면서 그들은 한결 멜로디컬하고 부드러워진 사운드를 들려준다. 이 앨범은 콕토 트윈스가 그들의 독특한 사운드의 완성 단계에 접어든 시점에 놓인 앨범. 몽환적이고 모호한 사운드, 그리고 매혹적인 보컬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이 그들 초창기의 황폐한 느낌을 완전히 저버린 것은 아니다. 초기처럼 청자들을 시험에 빠져들게 하는 혼잡한 사운드는 아니지만 앨범 저변을 이루는 또 하나의 줄기는 황폐함이다. 그 때문일까. 콕토 트윈스의 사운드는 각 앨범마다 큰 변화를 거치지 않고 일관된 흐름을 지니고 있다.

Smiths [The Queen Is Dead] (1986)
80년대 영국 인디 팝을 말할 때 빠질 수 없는 이름, 그래서 이제는 국내 팬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밴드, 스미스(The Smiths). 특히 이들은 당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가장 신망을 얻었던 밴드 중 하나다. 국내 팬들에게는 보컬리스트 모리시(Morrissey)가 더욱 잘 알려진 이름이지만 기타리스트 쟈니 마(Johnny Marr)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모리시가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스미스의 가사를 전담했다면 쟈니 마는 명석한 작곡력으로 그것을 완성 지었다. 그러나 이들 화려한 콤비도 오래 가지 못했고 1987년 쟈니 마가 스미스를 떠나면서 밴드는 해체됐다. 이 앨범은 팀이 와해되기 전에 발표한 앨범으로 가장 스미스 사운드에 충실한 앨범. 해체까지 얼마 안 남은 상황이었지만 이 앨범에서 스미스는 비약적인 사운드를 보여주는데, 그들의 어떤 앨범보다도 가장 록킹한 사운드를 담고 있다.

Sonic Youth [Daydream Nation] (1988)
뉴욕 아방가르드 씬의 대표적인 밴드 소닉 유스(Sonic Youth). 이 앨범은 많은 사람들이 소닉 유스의 대표작으로 여기는 작품이다. 6, 7분대의 곡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는, 70분이 넘는 대작에 가까운 앨범. 전위 예술을 방불케 하는 난해한 사운드를 특징으로 삼고 있는 소닉 유스의 실험적인 태도는 이 앨범에서도 변함없지만 단촐한 앨범 커버처럼 그 어느 때보다 귀에 잘 들어오는 연주를 들려준다. 전작들에 비하며 상당 부분 난해한 사운드가 정제돼 있는 느낌. 물론 ‘Silver’와 같은 펑크 지향적인 사운드나 3부작 ‘Trilogy’와 같은 곡은 여전히 소닉 유스의 기본은 실험성에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XTC [Skylarking] (1986)
70년대 중반 결성돼 영국 인디 씬을 변함 없이 지켜온 밴드 중 하나. 비치 보이스(Beach Boys)와 비틀스(The Beatles) 풍의 60년대 팝/록으로부터 영향 받은 XTC는 70년대 말 뉴 웨이브의 영향까지 받은 사운드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신디사이저의 쓰임새나 비치 에브뉴 보이스(Beech Avenue Boys) 보컬 역시 뉴 웨이브적인 감수성을 품고 있다. 진지하고 실험적인 사운드를 애호하는 이들에게 이들의 음악은 다소 유치증에 걸린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60년대 팝적인 감각과 기타 사운드를 적절히 섞은 사운드만큼은 언제 들어도 경쾌하다. 거기에 혼과 스트링이 더하여진 사운드의 묘미도 쏠쏠하다.

Meat Puppets [Meat Puppets II] (1983)
소닉 유스와 함께,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이 흠모했던 밴드 중 하나로 알려지면서 뒤늦게 국내에도 알려진 미트 퍼펫츠(Meat Puppets)의 두 번째 앨범. 매번 커트 커크우드(Curt Kirkwood)의 아트웍으로 채워지는 앨범 자켓으로도 흥미를 갖게 되는 밴드다. 이 앨범에는 너바나(Nirvana)가 커버하기도 했던 ‘Plateau’가 수록됐다. 너바나처럼 3인조 밴드인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들의 사운드와 너바나 사이에서 충분한 공통점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기타와 보컬을 맡고 있는 커트 커트우드의 보컬마저도 흡사 [Unplugged] 앨범에서의 커트 코베인과 닮은 듯하다. 이 곡을 들어보면 커트 코베인이 가능한 원곡의 느낌을 헤치지 않으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쉽게 무엇이다, 정의 내릴 수 없는 독특한 사운드를 담은 이 앨범은 밴드 지향적이기보다는 싱어 송라이터의 앨범에 가깝다. 얼터너티브, 그런지의 노이지 기타는 이 앨범에서도 이미 드러나고 있지만 결코 과도함은 없다. 마치 닉 케이브(Nick Cave)의 온화해진 우울하고 느린 펑크를 듣는 듯하다.

The Jesus & Mary Chain [Psychocandy] (1985)
벨 앤 세바스찬(Belle & Sebastian)을 통해 이제는 결코 낯설지 않은, 영국 대중음악의 또 다른 중심지 글래스고우 출신의 지저스 앤 메리 체인(The Jesus & Mary Chain), 그들의 데뷔작이자 곧 마스터피스. 지저스 앤 메리 체인은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과 함께 80년대 영국 슈게이징 팝을 이끌었던 글래스고우 출신의 밴드. ‘Just Like Honey’, ‘The Hardest Walk’, ‘You Trip Me Up’와 같은 곡들은 지저스 앤 메리 체인의 사운드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곡들이자 슈게이징 사운드의 전형을 보여주는 곡들이다.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음울한 사운드와 달리, 다소 멜랑콜리하지만 팝의 감각에 충실한 멜로디 라인은 듣는 사람의 귀를 부담 없게 한다.

Yo La Tengo [Ride The Tiger] (1986)
사실 욜 라 텡고(Yo La Tengo)는 80년대 중반에 결성된 90년대의 밴드라 하는 것이 더 옳을 듯하다. 더군다나 이들은 여전히 미국 인디 씬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밴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인디 씬의 많은 기타 팝 밴드에게서 들을 수 있는 쟁글쟁글거리는 기타 리프는 이 앨범에서도 변함 없다. 이제 미국 인디 씬의 거장이 되어버린 그들이지만 이 데뷔작을 발표할 당시만 하더라도 별반 다를 것은 없이, 소박하고 단순하고 귀여운 사운드를 들려준다. [I Can Hear the Heart Beating As One]과 같은 보다 진중해진 후기 드림 팝 사운드를 기대했다면 이 앨범은 쟁글 팝 사운드에 더욱 가깝다.

My Bloody Valentine [Isn’t Anything] (1988)
슈게이징(Shoegazing)을 논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의 두 번째 앨범. 단 세 장의 정규 앨범에서 이들의 대표작을 논할 때 가장 많은 표를 받는 것은 마지막 앨범인 [Loveless]다. 소음과도 같은 기타 노이즈를 빼면 이들 사운드의 절반이 날아가 버릴 정도로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주요 토대는 기타 노이즈다. 그러나 이들의 기타 노이즈는 노이지함 그 자체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닌, 공간적인 개념으로 다가온다. 즉, 이들 음악의 바탕을 이루거나 혹은 뒷배경이 되는 토양인 것. 가끔은 지나치게 귀에 거슬리는 듯한 기타 노이즈에 예민해질 수 있으나 몽환적인 선율에 귀를 기울인다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앨범이다.

Galaxie 500 [On Fire] (1989)
미국 인디 팝 씬의 주요 아티스트로 떠오른 데이몬 앤 나오미(Damon & Naomi)의 전신이었던 갤럭시 500(Galaxie 500)의 두 번째 앨범. 현재 데이몬 앤 나오미는 슬로우코어 위주의 멜랑콜리한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다. 그것은 모하비 3(Mojave 3)를 연상 시킬 정도로 부드럽고 상냥하지만, 갤럭시 500 시절 이들의 사운드는 그보다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며 또한 더욱 실험적이었다. 데이몬 앤 나오미가 따스한 인간미를 느낄 수 있는 어쿠스틱 포크에 가까운, 가사 전달 위주의 싱어 송라이터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 달리, 갤럭시 500은 사운드적인 측면에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데이몬 앤 나오미의 사운드의 연장선 상에 놓인 앨범이라 여긴다면 그것은 완전히 오해다.

Bauhaus [Mask] (1981)
포스트 펑크 씬의 큐어(The Cure)와 조이 디비전(Joy Division)으로부터 파생된 고스 록(goth rock)의 영향권 아래 놓여있는 바우하우스(Bauhaus)의 두 번째 앨범. 장대한 바로크 풍의 편곡과 우울한 신디사이저, 프로그레시브한 기타 연주 등, 언뜻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요소들이 함께 하는 이들의 음악은 결코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것은 70년대 프로그레시브의 왕국이었고 이후 큐어와 조이 디비전과 같은 밴드들이 영국에 존재했기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오프닝 트랙 ‘Hair Of The Dog’부터 듣는 이를 주춤거리게 하지만, 훵키/사이키델릭한 기타 리프, 스토리텔링하는 듯한 보컬을 지닌 ‘Passion Of Lovers’와 ‘Of Lillies And Remains’ 그리고 초창기 펑크의 잔향이 남아있는 ‘Dancing’ 등은 아주 낯설지 만은 않다. 고딕적인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는 이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장애물로 놓여있지만, 이 앨범은 80년대 영국 음악의 또 다른 면을 들여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College Rock

근본적으로 College Rock은 Alternative Rock의 태동기(1983 ~ 84)에서부터 대학가의 라디오을 주도했던 Alternative Music을 일컫는 개념이다. 대부분의 College Rock은 New Wave, Post Punk, 그리고 초기 Alternative Rock의 복합적인 영향아래 놓여있었다. 대부분의 College Rock 밴드들은 초기에 New Wave가 그랬듯이 메인스트림에서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비록 보다 예술적이긴 했지만 Post Punk만큼 실험적이거나 분파적인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많은 미국 밴드들이 그들의 뿌리를 Punk나 Hardcore에 두기는 했지만 모든 College Rock 밴드가 그렇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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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BG” by Matthew Jording from Brooklyn, NY, USA – DSC03697.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초기 밴드들중 주요한 두 밴드는 각각 미국과 영국에서 Guitar-pop을 선도하고 있었던 R.E.M과 Smiths이다. 그럼에도 College Rock의 음악적 테두리는 보다 넓다. 그 범위는 대략 미국측에서의 Hardcore적인 언더그라운드 락씬(Sonic Youth, the Minutemen, the Meat Puppets, Dinosaur Jr., the Replacements), 영국에서의 New Wave 생존자들(XTC, Robyn Hitchcock, They Might Be Giants, the Violent Femmes, Camper Van Beethoven, the Pixies), 지적인 포크락(Billy Bragg, 10,000 Maniacs), 그들의 음악에 팝적인 요소를 가미한 포스트펑크락커(the Cure, Siouxsie & the Banshees), 씬써싸이저에 기반한 댄쓰팝 밴드(New Order, Depeche Mode), 그리고 귀를 찢는듯한 키타 소음에 팝훅을 뒤섞은 밴드(the Pixies, the Jesus & Mary Chain)에 이르기까지 소위 지적인 청취자가 좋아할만한 갖가지 조류의 인디펜던트 음악을 아우르고 있었다.

이후 메인스트림의 편입된 스타들은 U2, Peter Gabriel, Sting 등을 들 수 있다. College Rock의 전성기는 역설적으로 이후 Nirvana가 1991년 메인스트림을 격파하면서 끝을 맺었다. 대학가의 래디오 선곡은 메인스트림의 그것과 흡사해졌고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얼터너티브/인디 밴드들은 땅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버렸다.

주요앨범들

The English Beat: I Just Can’t Stop It [1980]
Jane’s Addiction: Ritual de lo Habitual [1990]
Tracy Chapman: Tracy Chapman [1988]
Marshall Crenshaw: Marshall Crenshaw [2000]
XTC: Fossil Fuel: The XTC Singles 1977-1992 [1996]
Sonic Youth: Sister [1987]
Violent Femmes: Violent Femmes [1983]

AllMusic 참조

Alternative D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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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ectronic band” by Johnny_Marr.jpg: shokophoto
Bernard-sumner-berkeley-1987.png: Andwhatsnext
derivative work: JD554 (talk) – Johnny_Marr.jpg
Bernard-sumner-berkeley-1987.png.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Alternative Dance는 Alternative 혹은 Indie Rock의 예민하고 멜로딕한 곡구조와 일렉트로닉 비트, 씬써싸이저, 샘플러와의 결합에 의해 생성되었다. 또한 포스트디스코 댄쓰뮤직씬에서 클럽을 기반으로 한 장르이다. 팝에 기반을 둔 많은 Alternative 가수들이 몇년에 걸쳐 이러한 음악스타일을 실험하였는데 이는 클럽문화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스타일은 주로 영국에서 많이 시도되었는데 ’80년대 초반 Kraftwerk 스타일의 Synth-pop과 음울한 포스트펑크의 결합이 그 선구적 시도였다면 ’80년대 말의 Manchester 씬과 EMF, Jesus Jones등의 Punk’ N Roll은 그 절정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90년대 들어서는 Acid House, Trip-Hop 등으로 파생해나갔다.

주요 앨범들
The Stone Roses: Stone Roses [1989]
EMF: Best of EMF: Epsom Mad Funkers [2001]
Electronic: Electronic [1991]
Wolfgang Press: Legendary Wolfgang Press & Other Tall Stories [1985]
Pop Will Eat Itself: This Is the Day…This Is the Hour…This Is This! [1989]

AllMusic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