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보관물: 60년대

[펌]Monthy Python

몬티파이돈과 관련되어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이라곤

1. 무차별적으로 퍼부어지는 받고 싶지 않은 이메일을 유래는 명확히 모르지만 ‘스팸메일’이라고 부르는 것.

2. 몬티파이돈과의 과거력은 모르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12 몽키즈(12 Monkeys)’, ‘바론의 대모험(The Adventures of Baron Munchausen)’, ‘피셔킹(The Fisher)’, ‘브라질(Brazil)’ 등의 영화감독, 테리 길리엄(Terry Gilliam)은 알 것이다.

몬티 파이튼(Monty Python)은 한 사람이 아니라, 다섯 명의 영국인과 한 명의 미국인으로 구성된 영국의 코메디 집단이다.

이들은

마이클 팔린(Michael Palin)
테리 존스(Terry Jones)
존 클리스(John Cleese)
그레헴 채프맨(Graham Chapman)
에릭 이들(Eric Idle)
테리 길리엄(Terry Gilliam)

으로…

마이클 팔린(Michael Palin), 테리 존스(Terry Jones), 존 클리스(John Cleese), 그레헴 채프맨(Graham Chapman), 에릭 이들(Eric Idle)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릿지 대학가에서 당시 레뷔(revue)라는 시사 풍자 익살극 공연을 통해 유명해지면서 코메디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테리 길리엄(Terry Gilliam)은 미국의 삽화가/만화가로 이들의 TV 프로그램 ‘나는 서커스(Flying Circus)’에서 애니메이션을 담당하고 이후 이들의 영화들에서 대본 및 감독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1969년 10월 5일부터 1974년 12월 5일까지 영국 BBC 방송에서 방영된 ‘몬티 파이튼의 나는 서커스(Monty Python’s Flying Circus)’로 활동을 시작하여 이후 다수(?)의 영화를 제작했다.

몬티 파이튼의 나는 서커스(Monty Python’s Flying Circus)
뭔가 완전히 다른 것(And Now for Something Completely Different)(1972)
몬티 파이튼과 성배(Monty Python and the Holy Grail)(1975)
브라이언의 일생(Life of Brian)(1979)
인생의 의미(The Meaning of Life)

이들의 코메디는 매니아층이 형성되어 있을 만큼 컬트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건전한 사고방식에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들이 느끼기에 불쾌하거나 혐오감을 느낄 수 있는 내용 또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기상천외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종교, 성차별, 민족감정, 인종차별과 같이 타부시 되어온 소재들을 대놓고 다루기도 하고 개걸스레 먹다가 배가 터져죽는 장면을 묘사하는 등 매우 지저분하거나 불경스러운 소재들을 자유롭게 다루고 있다. 로빈 윌리엄(Robin William), 짐 캐리(Jim Carrey) 등 미국의 유명 코메디언들도 이들의 팬이며, 미국의 유명 TV 코메디 프로그램 ‘토요일 밤 라이브(Saturday Night Live)’도 ‘나는 서커스(Flying Circus)’의 형식을 빌려왔다고 볼 수 있다.

출처 : http://altamira.egloos.com/470425,  http://www.intriguing.com/mp/

 

Charade

휴가지에서 남편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며 이혼하겠다고 호언장담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더니 집은 텅텅 비어있고 남편은 차가운 시체가 되어 있다면? 바로 그 꼴을 아름다운 여인 레지램버트(오드리햅펀)가 당하게 된다. 황당해 하는 그녀 앞에 매력적인 이혼남 피터죠슈아(캐리그랜트)가 나타났고 그녀는 그에게 연정을 느낀다. 한편 CIA의 정보원이라는 버튜모어는 남편이 CIA의 돈을 가져갔다며 그 돈을 찾아올 것을 주문하고 남편의 옛 전우였다는 세 남자 역시 레지램버트를 같은 이유로 협박한다.  그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히치콕의 그것을 닮아 있다. 더구나 극 중반쯤 되면 그 돈이 어디 있는지 범인이 누구인지 대충 짐작될 정도로 반전이 그리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나름대로 스타 시스템을 이용하여 관객이 보기 편하도록 성의껏 만든 오마쥬 역시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특히 서늘한 아름다움의 소유자 오드리햅펀이 등장하니 말이다. 지방시의 심플한 파스텔톤의 의상들이 그녀의 전성기 미모를 받쳐주고 있다. 음악은 헨리맨시니가 맡았으니 오드리햅펀의 바로 직전 작품인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스릴러 버전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La jetée

영화라기보다는 한편의 영상소설처럼 느껴진다. 주인공이 사랑했던 여인의 잠자리 장면이 잠깐 동영상으로 비춰지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장면이 흑백 스틸컷으로 처리된 과감한 형식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또 장르는 SF다.  서로간의 증오로 인해 지구를 파괴해버린 그 어느 미래. 아무것도 남겨진 것이 없는 세상에서 과학자들은 과거와 미래로 가서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자 한다. 그 통로는 사람들의 꿈. 과학자들은 선택된 죄수들 중에서 그 임무를 수행시키려는 실험을 진행시키고 주인공은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그 임무를 수행한다. 그 임무 중에 만난 과거의 여인과 사랑에 빠진 주인공은 자신들의 세계로 오라는 미래의 인간들의 제안을 무시하고 과거로 돌아가 그녀와 재회하려 한다.  슬프기 그지없는 라스트신을 간직한 이 영화는 테리 길리엄에 의해 12Monkeys 라는 이름으로 부활한다.

Murder Most Foul

Murder Most Foul FilmPoster.jpeg
Murder Most Foul FilmPoster” by The cover art can be obtained from Movieposterdb.com.. Licensed under Wikipedia.

Agatha Christie의 Mrs. McGinty’s Dead 을 원작으로 한 1964년 작. Margaret Rutherford가 Agatha 의 유명한 캐릭터 Miss Marple 을 연기했는데 이 작품은 그녀가 Miss Marple 로 연기한 세 번째 작품이라고 한다. 여기서 잠깐 말하자면 개인적으로는 이 수다스럽고 경망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Margaret Rutherford 여사의 Miss Marple보다는 좀더 품위 있고 신중했던 Joan Hickson 여사의 – BBC 의 연작에서 출연했던 – Miss Marple 이 더 맘에 든다. Miss Marple 은 자신이 배심원으로 참여했던 사건에 의심을 품고 좀 더 파고들기로 마음먹는다. 살해당한 Mrs. McGinty 가 어느 극단의 누군가를 협박했다는 사실을 알아낸 그녀는 극단에 몰래 입단하여 단원들의 뒤를 캐고 마침내 진실을 밝혀낸다. 원작의 문제이겠지만 역시 Agatha 특유의 맛깔스러운 스토리 설정은 마음에 들되 다만 스토리 전개가 다소 산만하고 억지스러운 측면도 있어 비슷한 설정의 ‘쥐덫’에 한참 뒤진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긴 해도 느슨한 일요일 오전 여유로운 마음으로 즐기기에는 더없이 어울리는 흑백 스릴러다.

Aguirre, der Zorn Gottes(아귀레, 신의 분노 : Aguirre, the Wrath of God)

마른 걸레를 짜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의 영화이다. 감독은 극한상황에 인간을 배치해놓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실험을 하고 있는 듯하다. 심하게 말해서 배우들에게 스페인의 잉카 정복에 관한 영화를 찍겠다고 속이고 거친 숲속과 물가로 몰아내어 마치 실험쥐처럼 그 반응을 즐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마치 2001년작 Das Experiment 가 소재를 삼았다는 실존의 그 인간실험처럼 말이다. 실제로 영화해설을 찾아 읽어보니 주연을 맡은 클라우스 킨스키는 총으로 감독을 위협하며 촬영을 중단해줄 것을 요구했다고까지 하니 배우들의 고생이 상상이 간다. 극에 몰입을 방해할 정도로 이런 감정이 들었던 것은 정말 배우들의 고통이 뚝뚝 묻어나올 정도로 생생한 화면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큐멘터리를 보는듯한 역동적이고 거친 화면은 이미 낙오되어버린 상태이면서도 그 안에서 정치놀음을 벌이는 구제불능의 인간군상을 여과 없이 비추고 있다. 클라우스 킨스키의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은 극의 긴장감을 높이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이 지루한 강 여행기를 끝까지 보게 만드는 버팀목이다. 자신의 딸과 결혼하여 순수한 피를 유지하겠다는 독백 장면은 히틀러를 은유한 것이라는 것이 중론인데 개인적으로는 히틀러를 광기의 산물이라 보지 않기 때문에 감독이 의도하였건 하지 않았건 간에 그러한 입장에 동조할 수 없다. 강가를 여행하며 겪는 모험담을 다룬 점에서 같은 해 나온 또 하나의 걸작 Deliverance 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후에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다. 어쨌든 감독 헤어조그는 같은 로케이션에서 이 위험한 짓을 10년 후 Budden Of Dreams를 통해 다시 한 번 자행하였으니 지독한 새디스트다.

Noz W Wodzie(물속의 칼, 1962)

로만 폴란스키의 장편데뷔작. 안드레이 부부가 보트 여행을 가던 도중 한 청년이 히치하이킹으로 둘과 동승하게 된다. 안드레이는 청년에게 보트 여행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여 어울리지 않는 셋의 보트 여행이 시작된다. 처음 안드레이가 청년에게 베풀었던 부르주아적인 너그러움은 차차 한 마리 암컷을 두고 수컷 두 마리가 벌이는 팽팽한 성적 긴장감으로 발전한다. 안드레이는 계급적 우월함을 무기로 청년을 몰아세우고 자존심강한 청년은 그런 그에게 노골적으로 반항한다. 카메라는 이러한 셋의 긴장감을 인물의 원근배치를 통해 적절히 통제한다. 마침내 갈등은 폭력적인 양상으로 발전한다. 필립 노이즈 감독의 Dead Calm를 연상시키는 삼각구도이지만 노이즈의 그것이 보트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증폭되는 공포의 경험에 집착하고 있다면 이 작품은 역시 그 한정된 공간에서 더욱 밀도가 높아지는 계급적 갈등과 성적 긴장감을 다루고 있다. 깔끔한 영상배치와 재즈 음악이 잘 어우러지는 소품이다.

참고글

The Sand Pebbles

Sound Of Music 으로 유명한 Robert Wise 감독이 Richard McKenna의 원작을 바탕으로 하여 Sound Of Music 을 제작한 이듬해인 1966년 만든 반전(反戰)영화이다. 시대는 1926년 혼란기의 중국에 정착 중인 San Pablo 라는 군함 – 선원들은 이 이름 대신에 조약돌이란 뜻의 Sand Pebbles 라고 부른다 – 에 배속된 Jake Holman(Steve McQueen)은 군인정신 투철한 군인이라기보다는 자신이 맡은 배의 엔진에만 관심이 있는 엔지니어를 자처한다. 여정 중에 만난 아름다운 여인 Shirley Eckert(Candice Bergen)에 연정을 느끼기도 하지만 반사회적이고 냉소적인 성격 탓에 극 초반 더 이상의 로맨스는 진행되지 않는다.또한 이러한 그의성격 탓에 동료들 중에서도 유일한 친구는 Frenchy(Richard Attenborough)뿐이었고 함장인 Collins(Richard Crenna)와도 충돌을 빚곤 한다. 

193분이라는 긴 상영시간 동안 화면에는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는 중국의 혼란상을 배경으로 국민당 군인 등 중국인과 미군과의 갈등, Mailey라는 중국여인과 Frenchy 의 가슴 아픈 사랑, Jake 와 Shirley 와의 만남, Jake 의 억울한 누명과 이로 인해 빚어지는 선상반란의 긴박감 등이 적절히 배치되어 극적긴장감을 유지한다. 영화는 표면상으로 중국인 폭도들의 잔인함과 Collins 함장의 강직한 군인정신, 또는 신사도를 대비시켜 자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으로 포장하고 있으나 또 다른 이면에는 전쟁의 비참함과 부질없음을 깔면서 이 영화의 제작당시 자행된미국의 베트남 침공을 에둘러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헐리웃 주류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감독과 작품 자체의 한계로 인한 타협으로 보이는데 Jake가 영화 말미 함장의 명령을 거부하고 무정부주의적 성향의 선교사를 두둔하며 자신에게는 맞서 싸울 적은 없다고 선언하는 부분에서 감독의 제작의도를 읽을 수 있다. 

극중 등장한 San Pablo 호는 실존했던 군함이 아니라 미국과 스페인 간의 전쟁에서 쓰였던 미군전함 Villa Lobos 를 모델로 홍콩에서 제작된 것이라 한다. 당시까지 중미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아 홍콩과 대만 등지에서 촬영되었다. Steve McQueen 은 이 작품에서의 호연 덕택에 생애 유일하게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絞死刑(Death By Hanging)

극은 한 사형수 R의 교수형이 처해지는 장면의 묘사로 시작된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밧줄에 매달린 R은 의식은 잃었지만 여전히 심장이 뛰고 있었다. 당황한 참관인들(교도관, 검사, 신부, 의사 등)은 그를 죽이기 위해 다시 살리는 희극에 뛰어든다. 그러나 의식을 되찾은 R은 자신이 R임을 깨닫지 못하고 참관인들은 R의 성장배경과 그가 저지른 강간살인을 재연하며 R이 R임을 깨닫게 하려고 노력을 기울인다. 재일 한국인이었던 R의 어두웠던 가정환경, 그의 범행동기, 살인 당시의 상황이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극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R은 결국 자신 스스로는 사형을 받을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자부하지만 국가의 또 다른 범죄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모든 사형 받을 이들을 대신해 사형을 받겠노라고 스스로의 죽음을 순교로 정의하고 교수형으로 사라져간다. 결국 어쩌면 이 모든 사형을 둘러싼 참관인들의 해프닝은 R이 교수형을 받으며 아래로 추락하는 찰나의 순간에 꾸었던 꿈일지도 모른다. 루이스 브뉘엘 스타일의 실험적인 코미디 형식을 빌려 실제 있었던 재일 한국인에 대한 사형을 다룬 이 영화는 사회적 징벌로써의 사형의 부적절함, 재일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무지와 편견, 스스로 살인자였던 일본이 또 다른 살인자를 처벌하는 모순 등 무거운 사회적 주제를 한 편에 소화해내고 있다.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사회적 이슈를 나름의 시각으로 펼쳐내어 대가로 인정받은 오시마 나기사는 진정한 범죄자는 전쟁으로 국민들을 내몰아 수만 명을 살인한 국가임을 고발하고 있다. 재일 한국인 R의 역은 실제 한국인인 윤윤도가 열연하였다. P.S. 전기의자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미국에서는 1950년대 실제로 사형수가 형집행 후에도 살아남은 일이 있었다. 부실한 전기의자의 성능 탓이었다. 사형수는 같은 범죄로 두 번 처벌받을 수 없다며 사형을 재개하지 말 것을 청원하였으나 기각되고 두 번째 전기의자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는 미성년자인 흑인이었다.

오시마 나기사에 대해 알아보기

A Shot in the Dark

어느 부유한 사업가의 저택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살인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사건보고를 받는 경찰서의 고위간부 드레퓌스에게 보고자는 ‘재앙’이라는 표현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살인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재앙은 바로 그 사건의 담당 형사로 클루조 형사(피터 셀레스)가 배정되었다는 사실.

그들의 걱정대로 클루조 형사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분수에 빠지고 코트에 불을 내고 마침내 이층에서 떨어지는 등 온갖 사고를 몰고 다닌다. 때마침 도착한 드레퓌스는 그를 사건에서 제외시켜버리지만 고위층의 압력으로 말미암아 다시 클루조가 사건을 담당한다.

같은 해 만들어진 유명한 코미디물 Pink Panther 를 통해 창조된 캐릭터 클루조 형사를 재활용한 일종의 속편 성격의 작품으로 전편에 버금가는 피터 셀레스의 완벽한 슬랩스틱 연기를 통해 유쾌한 웃음을 선사하고 있다(물론 피터 셀레스는 자신의 캐릭터가 이렇게 정형화되어 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What Ever Happened to Baby Jane?

What Ever Happened to Baby Jane? (1962).jpg
What Ever Happened to Baby Jane? (1962)” by The poster art can or could be obtained from Warner Bros. Pictures.. Licensed under Wikipedia.

캐시 베이츠가 Misery에서 식칼로 관객들을 위협하기 28년 전에 이미 베티 데이비스가 특유의 그 가공할(!) 눈매 하나만으로도 – 이 시점에서 Bette Davis Eyes 를 BGM으로? – 관객을 넉아웃시켰다. Kiss Me Deadly 등으로 B급 무비의 거장으로 떠오른 로버트 알드리치의 1962년 작으로 연예계에 종사하던 자매의 갈등이라는 독특한 소재로 이 몸서리치는 공포영화를 창조해냈다.

Baby Jane 은 춤과 노래의 신동으로 가족의 자랑거리임은 물론 자신을 캐릭터로 한 인형이 나올 정도의 아역스타이다. 그런 그녀를 무대 뒤에서 바라보는 언니 Blanche 는 분노의 눈물을 삼킨다. 세월은 흘러 둘이 성인이 되었을 즈음에 상황은 역전이 되었다. Blanche 는 최고의 흥행배우로 성장했고 Jane 은 천덕꾸러기 싸구려 배우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언니 Blanche 는 그런 동생을 감싸준다. 그러던 어느 날 끔찍한 교통사고 Blanche 가 하반신 불수가 되면서 그녀의 연기 인생을 막을 내린다. 사람들은 Jane 이 질투심에 일으킨 사건이라고 수군거린다. 세월이 흘러 초로의 여인들이 된 자매는 한집에 살면서 옛 추억을 곱씹으며 세월을 보내지만 어느 날 Jane 의 행동이 이상해지면서 영화는 급반전하게 된다.

가족이라는 테마를 공포영화의 소재로 사용한 감독의 가치전복적인 발상이 놀라운 영화이지만 그러한 반문화적인 쾌감에만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탄탄한 구성과 배우들의 신들린 연기 – 특히 김완선보다 더 무서운 눈의 소유자 베티 데이비스의 연기는 너무 사실적이어서 눈살이 찡그려질 정도다 – 등에 힘입어 독특하고 매혹적인 한편의 가족공포물의 걸작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또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충격적인 라스트신은 그 충격이 가히 찰턴 헤스턴이 절망에 무릎을 꿇어야 했던 ‘혹성탈출’ 급이라 할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