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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 시드니루멧의 강력한 힘과 후광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무엇 하나 쉽지 않은 테마들이 그야말로 유기적으로 팽팽하게 연결되어 저마다 빛을 발하고 있다. TV가 현대 매스미디어에서 차지하는 중심적 역할,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시스템의 중심 다국적기업의 존재감,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바라보고 만난 남녀의 이유 있는 불륜, 청춘을 바친 직장을 떠나는 직장인의 자아상실, 반문화의 상업화를 통한 자본주의의 놀라운 생존력, 시청률이라는 정체불명의 숫자놀음을 감싸고 벌어지는 비정한 인간관계 등 따로 떼놓아도 장편영화 한편이 너끈히 나올 소재들이 이 영화 한편에 경이롭게 담겨있다. 그러면서도 산만함이 없이 떡하니 중심이 분명하다. 모든 배우들은 자신이 맡은 역할에 분명한 색깔을 부여하고 있다. 특히 의욕 넘치는 젊은 중역 다이애나 역의 패이더너웨이와 노련한 보도부장 맥스 역의 윌리엄홀덴의 연기는 동선 자체도 훌륭한 연기다 싶을 정도로 치밀하고 섬세하다.

UBS 의 인기 앵커였던 하워드빌은 시청률이 떨어지자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쫓겨날 판이다. 오랜 직장동료이자 같은 방송국의 보도부장 맥스슈마허는 술김에 방송에서 자살한다고 말하면 시청률이 올라갈 것이라고 농을 건넨다. 다음날 뉴스에서 하워드는 정말 방송에서 자살하겠다고 선언해버린다. 방송국이 발칵 뒤집힌 가운데 센세이셔널리즘을 추구하는 다이애나크리스틴슨은 UBS를 합병한 CCA의 점령군 프랭크해킷을 설득해 하워드의 뉴스를 버라이어티쇼로 전환시켜버린다. 시청자에게 일종의 대리만족을 주는 효과덕분에 하워드빌쇼는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된다. 저널리즘을 훼손하였다고 생각한 맥스는 회사를 때려치우고 다이애나는 더 힘을 얻어 극좌 테러리스트의 테러 장면을 시리즈로까지 제작한다. 그 와중에 둘은 연인사이가 된다.

이제 TV는 더 이상 솔직해질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치부마저 상업화시키는 ‘반문화의 상업화’의 정점에 오르게 된다. 하워드빌은 방송중에 CCA가 아랍계 자본에 먹힐 것이라며 애국적 호소를 하게 되자 회사중역들은 그의 무한질주에 분노를 느낀다. CCA의 최고경영자 젠슨은 그를 불러 민족과 민주주의는 실종된 지 오래며 그 자리를 다국적기업이 채우고 있음을 일갈한다. 다국적기업이라는 새로운 신 내림을 받은 하워드는 점점 더 자기 폐쇄적으로 침몰해가고 젠슨을 제외한 나머지 중역들은 그의 존재에 심각한 위기를 느낀다. 완벽한 시나리오, 완벽한 배역, 완벽한 완급조절 등 Dog Day Afternoon 등과 함께 시드니루멧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걸작이다.

Pumping Iron

동명의 책의 저자이기도 한 George Butler가 Robert Fiore 와 함께 공동으로 감독한 1976년산 다큐멘터리다. 바디빌딩의 이면에 대한 관찰기이면서 인간의 끊임없는 경쟁심에 대한 관찰기이기도 하다. 1975년 바디빌더 아놀드슈왈제네거는 이미 바디빌딩 계에서 신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에서 혈혈단신으로 건너온 그는 프로 바디빌딩의 최고를 가리는 미스터 올림피아에서 벌써 5년 동안이나 1등을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승리를 위한 그의 집착이 얼마나 강했는지는 작품 곳곳에 배치된 인터뷰에서 설명되고 있는데 그는 대회를 위하여 경쟁자에게 잘못된 조언을 하는가 하면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않는 냉혹함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어느 리뷰에는 몇몇 장면이 조심스럽게 연출되기도 했다니 사실여부는 모르겠다). 여하튼 이런 그에게는 수많은 도전자가 있었고 그 중 하나는 떠오르는 바디빌더 루 페리그노도 있었다. 극성스러운 아버지의 혹독한 훈련으로 몸을 다져가는 이 어린 바디빌더는 신화에 도전하지만 매번 실패하고 만다. 마침내 아놀드는 6번째 미스터 올림피아의 자리를 차지하고는 은퇴를 선언하여 루의 재도전은 물거품이 되고만다. 스포츠를 소재로 하고 있는 등 여러 면에서 1994년 작 Hoop Dreams 와 비교될 수 있다. Hoop Dreams 는 흑인주거지역에서 NBA 의 꿈을 키우고 살아가는 두 소년의 관찰기이기 때문이다. 다만 Hoop Dreams 가 좀 더 사회모순을 입체적으로 조명한 반면에 Pumping Iron 은 바디빌딩에 대한 일반의 선입견을 없애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신화가 된 아놀드의 심층적 취재보다는 그의 아름다운 근육들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그 후 그들의 행보다. 아놀드는 ‘코난’과 같은 몇 개의 바보 같은 영화에 출연한 이후 액션 영화의 단골주인공에서 마침내 캘리포니아 주지사라는 거물이 되었다. 루는 헐크로 출연하여 큰 인기를 얻었으나 이후의 작품출연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Aguirre, der Zorn Gottes(아귀레, 신의 분노 : Aguirre, the Wrath of God)

마른 걸레를 짜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의 영화이다. 감독은 극한상황에 인간을 배치해놓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실험을 하고 있는 듯하다. 심하게 말해서 배우들에게 스페인의 잉카 정복에 관한 영화를 찍겠다고 속이고 거친 숲속과 물가로 몰아내어 마치 실험쥐처럼 그 반응을 즐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마치 2001년작 Das Experiment 가 소재를 삼았다는 실존의 그 인간실험처럼 말이다. 실제로 영화해설을 찾아 읽어보니 주연을 맡은 클라우스 킨스키는 총으로 감독을 위협하며 촬영을 중단해줄 것을 요구했다고까지 하니 배우들의 고생이 상상이 간다. 극에 몰입을 방해할 정도로 이런 감정이 들었던 것은 정말 배우들의 고통이 뚝뚝 묻어나올 정도로 생생한 화면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큐멘터리를 보는듯한 역동적이고 거친 화면은 이미 낙오되어버린 상태이면서도 그 안에서 정치놀음을 벌이는 구제불능의 인간군상을 여과 없이 비추고 있다. 클라우스 킨스키의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은 극의 긴장감을 높이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이 지루한 강 여행기를 끝까지 보게 만드는 버팀목이다. 자신의 딸과 결혼하여 순수한 피를 유지하겠다는 독백 장면은 히틀러를 은유한 것이라는 것이 중론인데 개인적으로는 히틀러를 광기의 산물이라 보지 않기 때문에 감독이 의도하였건 하지 않았건 간에 그러한 입장에 동조할 수 없다. 강가를 여행하며 겪는 모험담을 다룬 점에서 같은 해 나온 또 하나의 걸작 Deliverance 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후에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다. 어쨌든 감독 헤어조그는 같은 로케이션에서 이 위험한 짓을 10년 후 Budden Of Dreams를 통해 다시 한 번 자행하였으니 지독한 새디스트다.

The Pursuit of Happyness

이 영화는 여러 면에서 ‘Erin Brockovich’의 흑인 남성 버전이라 할만하다. 어린 자식들을 부양해야 하지만 배움도 없고 재주도 없었던 에린이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성공하게 되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그 영화처럼 이 영화 역시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던 Chris Gardner 라는 흑인 남성이 주식중개인으로 성공한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이다.

80년대 초 샌프란시스코에서 휴대용 엑스레이 촬영기를 판매하며 생계를 꾸려가던 Chris Gardner(Will Smith). 그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사내아이가 있었지만 쪼그라들어만 가는 생계로 인해 아내와의 갈등은 심해지고 마침내 아내는 그의 곁을 떠나고 만다. 어릴 적부터 수학적 재능이 있었던 Chris 는 어느 날 주식중개인의 인턴쉽에 도전하지만 정식사원으로 채용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난관이 버티고 있었고 그나마 인턴 기간에는 보수마저 없었다. 유일한 호구책인 엑스레이 촬영기는 이런 저런 사람들에게 도둑맞고 되찾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급기야 세무당국에게 밀린 세금을 차압당하여 무일푼이 된 그는 여관에서도 쫓겨나 아이와 함께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몸을 누이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져가던 그의 인생은 마침내 인턴기간 동안 보여준 그의 능력에 대해 회사가 정식채용으로 보상함으로써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이 영화에서는 재미있는 두 개의 물건이 등장한다. 하나는 앞서 말한 휴대용 엑스레이 촬영기이고 또 하나는 80년대를 풍미했던 이상한 정육면체 장난감 루빅스큐브이다. 엑스레이 촬영기는 Chris 와 그의 가족에게 있어 애증의 상징이다. 그 뛰어난 성능에 혹한 Chris 가 판매를 위해 전 재산을 쏟아 구입했을 당시 그것은 가족에게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의사들에게 일종의 사치품으로 간주되었던 그 물건의 부진한 판매는 가족에게 갈등과 고통의 상징으로 돌변한다. 그리고 마침내 아내가 떠나고 파산한 Chris 에게 그것은 마지막 삶의 희망이 된다. 부피가 큰 재봉틀과 같은 외양을 가진 이 물건을 항상 들고 다니던 Chris 의 모습에서 우리는 애정과 증오가 반복되는, 그러면서도 차마 떨쳐 내버리지 못하는 우리 삶의 그 어떤 고단한 일상을 발견하게 된다.

반면 일종의 고도의 수학적 지식이 요구되는 장난감이었던 루빅스큐브는 단 한번의 등장으로 Chris 에게 천재일우의 기회를 제공하는 물건이 되었다. Chris 가 끈질기게 매달렸던 증권회사의 유력한 임원 Jay Twistle 은 Chris 와 함께 탄 택시 안에서 루빅스큐브를 맞추려고 노력한다. 이것을 본 Chris 가 혼신의 힘을 다해 루빅스큐브를 맞추자 Twistle 은 이 고졸 학력의 흑인을 남다른 눈빛으로 바라보고 마침내 인턴쉽의 기회를 준다. 이를 통해 루빅스큐브는 Chris 에게 단순한 장난감이 아닌 자신의 능력을 검증하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고단한 일상에서도 토마스 제퍼슨이 천명한 ‘행복추구권’의 행사를 위해 노력했던 그의 구세주는 국가의 공적부조나 그의 아내가 아닌 엉뚱하게도 루빅스큐브였다는 사실이 인생의 아이러니로 다가온다.

많은 사람들이 휴대용 엑스레이 촬영기와 같은 어리석은 선택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훨씬 적은 사람들이 루빅스큐브와 같은 기회를 잡게 된다. 인생의 사닥다리에 매달린 수많은 사람들이 Chris 의 루빅스큐브와 같은 기회를 잡게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한 개인에게는 해피엔딩이지만 절대다수의 빈자들에게는 일종의 동화같은 무용담일 뿐이다. 가난한 미혼모에서 해리포터의 작가로 일약 억만장자가 된 조앤롤링이나 수학적 재능을 바탕으로 인생역전을 이루어 낸 Chris 와 같은 이들이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행복추구권은 존재하는 것이고 이는 사회의 조화로운 발전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1년 전에 머물렀던 영화의 배경 샌프란시스코에서 보았던 수많은 홈리스들도 역시 그러한 행복추구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음을 다시 한 번 곱씹게 하는 영화였다.

p.s. Chris 의 아들 역을 맡은 꼬마는 다름 아닌 Will Smith 의 아들 Jaden Smith 라고 한다. 오디션에 뽑히기 전까지 Will Smith 의 아들임을 밝히지 않았다고 하니 연기재능은 역시 어디로 새지 않았던 모양이다. 영화의 말미에 한 흑인 남성이 Chris 부자의 곁을 지나가는데 그가 바로 실제 인물 Chris Gardner 라고 한다.

Dreamgirls

어쩌면 뮤지컬 영화야말로 가장 헐리웃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장르라 할 것이다. 비록 그 출발은 런던을 중심으로 한 유럽권이었지만 영화화 등을 통한 상업성에 있어서는 단연 미국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영화는 프로파간다라기보다는 ‘환상의 실현’이라는 생각을 가진 – 어쩌면 가장 교묘한 프로파간다일지도 – 영화인들은 선술집 극장쇼에 스토리를 집어넣으면서 발전한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스크린에 끌어들이면서 일상에 지친 관객들에게 꿈과 환상을 전달했다.

유성영화의 등장은 헐리웃 뮤지컬의 전성기를 예고하는 기술적 발전이었다. 이에 따라 브로드웨이 등에서 수혈을 받아 MGM을 중심으로 거칠 것 없이 발전해오던 헐리웃 뮤지컬 영화는 이후 사실주의적인 영화장르의 발달, 뛰어난 뮤지컬 배우들의 쇠락, 조지거쉰과 같은 뛰어난 뮤지컬 작곡자들의 사망 등으로 말미암아 비인기 장르로 전락하고 만다. 하지만 Bill Condon 은 시카고, 드림걸스 등을 통해 뮤지컬이 아직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82년 초연한 동명의 뮤지컬을 스크린에 옮긴 이 영화는 흑인음악의 메카 모타운과 인기 흑인 여성 트리오 슈프림즈의 실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따라서 영화 속 캐릭터들은 실존인물인 모타운 설립자 베리고디주니어, 슈프림즈의 리더 다이아나로스, 약물중독으로 사망한 마빈게이 등과 오버랩되고 있다. 극 후반으로 가면서 영화의 주연으로 급부상하는 에피는 슈프림즈의 싱어 플로렌스 발라드를 대변하고 있다. 극적 구성에 있어서는 다른 장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탄한 것이 뮤지컬의 특성인 반면 이 영화에서는 한 신인그룹의 성장과 갈등, 비정한 음악 비즈니스 계의 단면, 이후 극적반전 등을 통해 나름대로 탄탄한 스토리를 지니고 있다.

극중 레코드사의 사장인 커티스테일러주니어는 비주류인 흑인음악을 주류로 끌어올리는데 일조를 한 반면 비즈니스를 위해 소속가 가수들에게 독재를 휘두르는 야누스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Phantom of the Paradise에서 Swan 이 지녔던 악마성을 고스란히 전해 받았다 할 수도 있겠다. 뮤지컬이 은연중에 백인음악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면 이 영화는 흑인음악을 소재로 하고 있는 만큼 당연하게도 R&B를 주조로 하는 정열적인 흑인음악이 전편에 걸쳐 펼쳐진다.

극 초반 지미얼리 – 에디머피가 연기했는데 썩 훌륭했다 – 가 부르던 정열적인 댄스곡에서부터 팝이 가미된 드림걸스의 음악 등 오늘날 대중음악의 주류로 자리잡은 흑인음악의 소사(小史)가 귀를 흥겹게 한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확 잡아당기는 ‘훅(hook)’이 부족한 게 흠이다. 이 작품에는 제이미폭스, 비욘세놀즈, 에디머피 등 현재 흑인 연예계를 주도하는 주요스타들이 대거 출연하고 있다. 하지만 신데렐라는 단연 이 영화를 통해 연예계에 데뷔한 – 아메리칸아이돌에서 불운하게 그랑프리를 놓친 – 제니퍼허드슨이다.

첫 출연작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탄탄한 연기력과 가창력을 통해 일약 헐리웃의 차세대 스타로 떠올랐는데 영화계는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비롯한 여러 영화제의 수상으로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축하해줬다. 다만 극 중반 그녀가 부르는 솔로곡 And I Am Telling You I’m Not Going 의 애절함에 많은 비평가들이 극찬을 하였는데 개인적으로는 너무 길어서 지루했다. 아무튼 이 영화 한편으로 헐리웃이 전전(戰前)에 그랬던 것처럼 또 다시 뮤지컬의 전성시대를 구가하리라 보긴 어렵지만 적어도 하나의 메이저 장르로서의 체면치레는 계속 이어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P.S. 영화의 헤피엔딩과 달리 플로렌스 발라드는 팀에서 축출된 후 불운한 인생을 살다가 32살의 어린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멤버들 간의 불화도 해소되지 않았다.

Match Point

내가 우디 알렌에게 기대하는 두 가지 것, 즉 냉소적 유머와 뉴욕이 이 영화에는 없다. 그리고 영국식 악센트와 비극적인 사랑이 그 빈 공간을 채우고 있다. 나는 이 영화를 이틀에 걸쳐 감상했다. 전반부는 흔해 빠진 삼각관계의 연애담이다. 성공을 갈망하는 야심찬 젊은이, 그의 매력에 반한 부잣집 아가씨, 바람둥이인 그녀의 오빠, 그리고 야심찬 젊은이의 뜨거운 눈길을 견뎌야 하는 미국에서 온 금발의 ‘그녀의 오빠’의 애인. 후반부를 봐야 하는 이틀째 이대로 영화가 계속 상투적으로 간다면 우디 알렌의 영화라 할지라도 끝까지 참고 봐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면서 영화를 감상하였다. 결국 예상대로 빗나간 사랑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마침내 부잣집 아가씨 클로이와의 결혼하여 성공의 사다리를 타게 된 야심찬 젊은이 크리스는 사랑(love)과 욕망(lust)은 다른 것이라며 이미 남이 되어버린 ‘그녀의 오빠의 전(前)애인’ 노라 라이스와 육체적 유희에 빠져든다. 제어할 수 없는 심성의 소유자인 노라(그녀의 오빠의 애인)[스칼렛 요한슨]의 독기어린 이혼요구에 크리스는 드디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려는 생각을 하게된다. 결말은 이야기해줄 수 없지만 만약 내 예상대로 결말이 나지 않았더라면 대단히 실망스러웠을 뻔했다. 역시 우디 알렌만이 보여줄 수 있는 ‘냉소’가 있어야 ‘우디 알렌 표 영화’라는 스탬프를 찍을 수 있을터이니 말이다. 테니스공과 반지, 그리고 마약중독자의 커넥션이 이어지는 순간. 그러나 반드시 지적해야 할 한 장면. 그가 나 빗속을 뛰쳐나간 노라와 이를 뒤쫓아 간 크리스가 보리밭에서 격정에 휩싸여 섹스를 하는 그 장면이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둘 다 진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락한 장소도 아닌 비오는 보리밭에서 비에 축축이 젖었을 그 청바지를 정성과 시간을 들여 벗고도 여전히 정욕이 남아 있을 만큼 그렇게 그 둘이 뜨거웠을까 하는 의문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Forbidden Pl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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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biddenplanetposter” by Copyrighted by Loew’s International. Artists(s) not known. – http://wrongsideoftheart.com/wp-content/gallery/posters-f/forbidden_planet_poster_01.jpg.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어릴 적 이 영화를 ‘주말의 명화’에서 보고 느낀 충격은 ‘혹성탈출’의 마지막 장면만큼이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행성에서 멸망한 고도문명이 궁극적으로 창조해낸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은 이전의 다른 영화에서 느낄 수 없었던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나이가 들어 다시 본 느낌역시 어릴 적 그 느낌을 좆고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 착안하여 구상된 스토리라인은 이미 “문명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란 무엇일까” 라는 철학적 물음에 도달하고 있었다. 고도의 문명 속에서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를 추구했던 멸망한 인종 크렉 Krel. 그들이 무었을 위해 문명을 건설했고 어떠한 것에 의해 멸망을 자초해갔는가는 고도의 문명을 컨트롤할 수 있는 정신적 성숙함이 수반되지 않고서는 문명을 지탱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다. 영화를 보고나서 언뜻 그들의 어리석음이 이해가 되지 않지만 한때 핵무기 경쟁을 통해 온 세상을 핵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었고 지금도 가장 문명화된 언어로 가장 야만적인 전쟁을 정당화하고 있는 세련된(?) 문명인들의 이중적인 행태를 보고 있자면, 어쩌면 이 영화는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주문을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1956년 당시 최고의 특수효과를 사용하여 만들어진 이 영화는 이후 스타트랙 등 여러 공상과학영화에 간과할 수 없는 영향력을 미쳤다. 특히 루비라는 로봇 캐릭터는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는 고전적인 디자인.

p.s. 지난번 The Day The Earth Stood Still 의 포스터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포스터에 로봇이 아리따운 여인을 안고 있는 장면을 포스터로 썼다. 물론 로봇 루비는 극중에서는 여인을 안지 않았다.(혹시 휴식시간 중에는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역시 흥행을 고려한 제작사의 눈속임이리라.
p.s. 2 이 영화의 남자주인공은 ‘총알 탄 사나이’ 시리즈의 Leslie Nielsen 이다. 형편없이 망가지던 그 영화를 보면 ‘금단의 혹성’에서의 모습이 쉽게 연상되지 않겠지만 분명 그는 그 작품에서 신중하고 핸섬한 사령관으로 나온다. 물론 우스꽝스러운 표정도 짓지 않는다.

The Life and Death of Peter Sellers(2004)

배우는 배우 자신을 표현하는 것일까? 다른 이의 인생을 위해 배우 자신을 죽여야 하는가? 언젠가 인터뷰에서 게리올드만은 후자의 뉘앙스로 말한 적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라면 Peter Sellers 는 가장 위대한 배우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영화는 영국영화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코미디 배우로 칭송되는 피터셀레스 Peter Sellers 에 관한 전기영화다. 래디오쇼의 인기성우로 활약하다 영화계에 데뷔한 피터셀레스의 영화인생과 개인적인 삶이 적절히 안배되어 있는 이 영화에서 감독은 피터셀레스가 마치 질 좋은 캔버스처럼 영화 속 캐릭터의 전달에 천재적인 능력을 지닌 반면 피터셀레스라는 개인의 모습은 공란으로 남겨버리는 그런 배우로 묘사하고 있다.(실제로 우리는 핑크팬더에서의 피터셀레스와 닥터스트레인지러브에서의 다중적인 피터셀레스 간에 피터셀레스라는 배우의 독특한 공통점을 찾기 어렵다.) 영화에서는 피터셀레스 자신도 그러한 자신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결국 그가 빼어들은 야심작은 말년에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캐릭터가 등장하는 Being There 였다. 위대한 코미디언이었지만 위대한 배우로 기억되고 싶었던 피터셀레스는 1980년 7월 24일 심장발작으로 숨을 거둔다. 영국, 미국 합작으로 Stephen Hopkins 의 2004년작

The Quiet Earth

아침에 눈을 떴는데 세상에 나만 홀로 살아남아있는 경우를 상상해 본적이 있는가? 이 영화가 그렇다. 과학자 Zac Hobson 이 어느 날 눈을 떠보니 평온한 기운과 달리 무언가 달라져있었다. 주변에 인기척이 없는 것이다. 거리에도 상점에도 그가 근무하는 연구소에도……. 지구상의 생명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원인은 바로 자신이 실험했던 새로운 에너지 발굴실험 탓이었다.

이제 그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황한 그는 이리저리 인간을 찾아 헤매다 이내 단념하고 혼자뿐인 세상에서 물질적 욕구를 폭식하는 쪽을 택한다. 그러나 그마저 이내 질려버리고 또다시 헤매다 결국 한 여인과 – 그가 사랑에 빠진 – 경계심이 강한 남자를 만난다.

세상에 셋 뿐인 인간관계. 그 기묘한 관계 속에서 서로 갈등하고 반목하고 사랑하다가 결국 Zac Hobson 은 지구를 온전히 원 상태로 돌려놓는 도전을 감행한다.

과학맹신주의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보다는 찰튼헤스턴의 ‘혹성탈출’이나 대니보일의 ‘28일 후’ 처럼 인간이라는 존재의 부재에 의한 공포감을 극대화하는 쪽에 더 강조를 한 작품이라는 것이 감상포인트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이 영화의 원작이 베스트셀러였다는 사실, 악마로 불린 패션잡지 편집장이 실제인물을 모델로 했다는 사실 등 이 영화에 대한 기초적인 사실을 모른 채 감상하였다. 애초에 패션 쪽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영화속잡지 이름이 제법 즐겨보았던 리얼리티쇼 ‘프로젝트 런웨이’와 같다는 점, 프라다의 창업주 이하 그 가문이 전통적으로 공산당 지지자라는 곁가지 가십거리만을 안 채 영화를 보았다.

영화 자체는 킬링타임용으로 손색이 없었다. 악마와 순진한 소녀라는 설정은 고전동화에서 익숙한 설정이었고 워커홀릭과 그 배우자와의 갈등은 젠더가 전도되었을 뿐 통상의 드라마에서 흔히 보던 구도였기 때문에 각 에피소드의 소결론을 짐작하는데 방해되는 요소도 없었고 역시나 예상했던 바대로 이야기는 결말을 맺는다. 또 여주인공 앤헤더웨이의 처진 눈매가 그녀의 패션과 제법 잘 어울린다는 것도 영화를 흥겹게 볼 수 있는 매력포인트였다.

다만 군데군데 감상의 흐름을 막는 억지스러운 설정이 눈에 거슬렸는데 특히나 결국 패션업계가 속물 부르주아지의 사행심을 갉아먹고 사는 산업일 뿐이라는 결말부분에 대해서는 다소 의아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전문가로서의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편집장 머랜더도 일갈하였듯이 패션업계의 선구자들이 갈고닦아놓은 미적감각이 결국 패션 문외한의 취사선택에 일조하였고 기왕에 옷을 입을 바에야 가격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당초의 앤헤더웨이의 촌스런 패션보다 나중에 입은 패션들이 훨씬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 사실인데, 단순히 패션계 한 거장의 추한 모습 때문에 패션계 전체가 싸잡아 욕을 먹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리고 결말이 이러할 영화에 패션업체들이 왜 옷을 협찬했을까 등의 의문점이 남았다. 결국은 그녀가 선택하는 언론계 역시 양아치도 많고 속물도 많은 세상 아닌가? 언론계에 입문한다고 다시 촌스러운 패션으로 회귀할 필요가 있는가?

요컨대 이 영화에서 나름 펼치려 했던 ‘정치적 올바름’ 철학이 남자 배우자에게의 사과라는 남존여비적인 화해 – 차라리 이 남자배우의 혐오스러운 헤어스타일과 구리구리한 티셔츠가 더 짜증난다 – , 패션계에서 일했던 나름의 노하우에 대한 철저한 부정으로 굳이 표현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공감이 되질 않았다.

차라리 머랜다를 떠나서 자신만의 패션레이블을 만든다는 결말은 어땠을까? 동대문에 점포라도 하나 내서 새로 시작하는 결말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