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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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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303 Front View” by Steve Sims – Steve Sims.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롤랜드 TB-303 베이스라인(The Roland TB-303 Bass Line)1은 롤랜드가 1982년에서부터 1984년까지 약 18개월 동안 1만여 개의 제품을 생산한 시퀀서가 내장된 베이스 신디싸이저다. 이 제품은 현대 일렉트로닉 댄쓰 음악의 발전에 핵심적인 기여를 했다. 이 제품은 당초에 홀로 연습하는 기타리스트의 연주에 도움을 주려는 목적으로 상품화되었다. 그렇지만 정작 이 제품은 시카고의 DJ들과 일렉트로닉 뮤지션들이 새로이 진화하고 있던 하우스 뮤직 장르에 이 제품을 사용하면서 인기를 얻게 된다. 스코틀랜드의 포스트펑크 밴드 Orange Juice가 발표해서 1983년 영국 싱글 차트 8위까지 오른 “Rip It Up”은 이 신디싸이저를 사용한 최초의 영국 내 히트곡이 된다. 그 전인 1982년 Charanjit Singh는 TB-303과 TR-808을 이용하여 작업한 Synthesizing: Ten Ragas to a Disco Beat를 내놓았다. 1987년 Phuture가 “Acid Tracks”라는 12인치 싱글을 내놓는데 이 곡은 소위 Acid House 장르의 최초의 곡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후 잘 알려진 애시드 사운드는 전형적으로 TB-303을 활용한 사운드가 주를 이루어 이 장르에서 TB-303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영국의 빅비트 아티스트 Fatboy Slim은 1996년 “Everybody Needs a 303″을 데뷔 싱글로 내놓으며 이 제품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TB-303의 역사에 관한 다큐멘터리
Charanjit Singh – “Raga Bhupali” (1982)
Jesse Saunders – “On and On” (1984)
Phuture – “Acid Tracks” (1987)

Synth Britannia

브리태니아(The Britania) 시리즈는 BBC Four가 2005년부터 시작한 다큐멘터리다. 이 다큐멘터리는 영국에서의 음악 장르의 진화나 이러한 대중음악 문화의 다양한 모습을 다룬다. 가끔씩 다른 나라의 음악이나 코믹북과 같은 다른 대중문화를 다루기도 한다. 이 시리즈 중에 Synth Britannia가 2009년 10월 16일 방영됐다. 이 에피소드는 신디싸이저를 기본으로 하는 영국 일렉트로닉 음악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1부 “Alienated Synthesists”는 1970년대의 Prog Rock이나 영화 Clockwork Orange 사운드트랙에서의 신디싸이저 사용에서 시작하여 크라우트락과 펑크락에 영향을 받은 영국의 노동계급 젊은이들이 사용할 수 있는 적절한 신쓰 키보드의 발전, 그리고 J.G. Ballad와 같은 작가의 디스토피아 Sci-Fi의 등장, 그리고 Mute 레코드사의 형성과 이어지는 신쓰팝의 성공 등을 다루고 있다.

2부 “Construction Time Again”은 1980년대 초 씬스팝이 실험적인 포스트펑크에서 주류 팝시장으로 접어다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무명밴드가 재조명을 받고 차가운 신디싸이저에 따뜻하고 쏘울풀한 보컬로 무장하거나, Mellotron이나 E-mu Emulator 등과 같은 샘플러로 무장한 신진 밴드가 등장하는 과정을 다룬다. 그들은 Depeche Mode, The Human League, Heaven 17, Cabaret Voltaire, Soft Cell, Yazoo, OMD, Eurythmics, Ultravox, Kraftwerk, Pet Shop Boys and New Order 등이다.

비디오 보기
IMDB의 다큐멘터리 소개

Latin Rock 등 장르 설명

Latin Rock (라틴 록)

라틴과 록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음악. 일종의 퓨전 음악인데, 이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1969년에 데뷔 앨범을 발매하여 1년만에 2백만장의 판매 기록을 세웠던 6인조 그룹 산타나의 창설자이며 멕시코 태생인 카를로스 산타나(Carlos Santata)이다. 재즈맨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퓨젼이 이룩된 라틴 재즈와는 달리 라틴 록은 그룹들의 주도적인 역할에 의해서 퓨젼이 이루어진 것인데, 그 중요한 역할을 한 그룹들에는 캄보 그룹들인 엘치카노(El Chicano), 창고(Chango), 세귀다(Seguida) 등이 포함된다.

East-coast rock (이스트코스트 록)

  미국의 동해안을 기점으로 발생한 록을 가리킨다. 동해안의 중심은 뉴욕이며, 따라서 아티스트들의 주요 활동지역도 뉴욕이다. 뉴욕 언더그라운드  록계로부터 등장한 뉴욕 뉴웨이브 계통과, 보스턴을 중심으로 한 아메리컨  프로그레시브의 움직임이 이스트코스트 록을 대표하고 있다.

drug music (드럭 뮤직)

환각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음악, 또는 드럭에 의한 환각체험을 자아내는 듯한 음악. 사이키델릭 사운드에 가깝다.

Downer Rock

사운드의 우울한 분위기와 메시지의 병적인 상태에 의해서 한정 지어지는 록의 한 분파. 주요 연주인들에는 블랙 새버스(Black Sabbath), 블러드로드(Bloodrod), 그리고 MC 5 등이 포함된다.

Barouque Rock (바로크 록)

1967년과 ’68년 사이에 생겨났으나 금방 소멸해 버린 록 음악의 한 형태. 원래는 리코더(recorder), 플루트, 하프시코드가 만들어 내는 바로크 모들 뮤직(Baroque modal music)의 사운드를 록 비트에 결합시키려는 시도로 출발하였다.  이러한 분야의 그룹으로는 아르스노바(Ars Nova), 크리설리스(Chrysalis), 뉴욕 스트링 앙상블(New YorkString Ensemble), 그리고 뉴욕 로큰롤 앙상블(New York Rock andRoll Ensemble)등이 있다. 바하의 칸타타 <Sleepers Awake>를 각색한 프로콜하름의 <A Whiter Shade of Pale>이 바로크 록의 대표 곡이라 할 수 있다.

Attitude Rock (애티튜드 록)

1960년대 중반에 출현한 난해한 부류의 록 뮤직.  애티튜드 록은 주어진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 의해서 야기된 감정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범주의 작곡가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비평, 공격, 저항뿐만 아니란 자신의 감정과 성찰에 대한 탐구에도 관심을 가졌다

british hard rock (브리티쉬 하드 록)

1970년경 영국에서 일어난 록. 리듬 앤 블루스를 바탕으로 하면서보다 힘차고 속도감이 있으며, 큰 음향으로 연주된다. 리듬앤 블루스라고는 해도 형태를 완전히 바꾸어서, 드라마틱한 멜로디를 전개하여,기타리스트를 주로 내세운 사운드와, 고음부를 강조한 보컬의 특징을가지고 있다. 아메리칸 하드 록과의 결정적인 차이는, 보다 무겁고보다 끈끈한 느낌을 주는 것인데, 대표적인 그룹으로는 딥 퍼플,레드 제플린 등이 있다.

Afro rock (아프로 록)

아프리카의 음악에 영향을 주었거나 영향을 받은 록을 전체적으로말한다. 이전에는 아프리카의 영향을 받은 아메리카의 흑인 뮤지션들의 사운드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지만, 오늘날에는 아프리카의 유능한 뮤지션의 대두가 두드러져서, 아프리카 사운드에 대한 말로 변화하고 있다.

New Wave (뉴 웨이브)

광란적인 사운드와 기괴한 머리 모양, 복장, 난폭한 무대 매너 등 펑크 스타일의 부정적 요소를 제거하고 서정미를 강조하여 초기 록큰롤의 흥취가 느껴지는 70년대말 펑크 이후 새롭게 등장한 록.
  카즈(the cars), 조 잭슨(Joe Jackson), 붐타운 래츠(Boomtown Rats),폴리스(Police), 클래쉬(clash), 블론디(Blondie), 칩 트릭(cheapTrick) 등이 뉴웨이브의 대표적 아티스트들이다.

Aleatory Rock (에일리어토리 록)

칼하인츠 스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 밀튼 배빗(MiltonBabbit), 존 케이지(John Cage) 같은 전위적인 작곡가들은 음악적인 법칙과 상식에서 벗어난 우연성 작곡 (chance composition, randomcomposition)을 시도하였다. 에일리어토리(Aleatory)란 말은 ‘도박과 주사위’와 관련 있는 라틴어,
‘aleator, alea’에서 유래된 것으로 ‘우연성 음악’을 뜻한다. 실제로 러시아계 미국인 죠셉 실린저는 우연성기법의 기본형으로 숫자들을 사용하였으며 존 케이지는 동양악기인 칭(Ching)을 사용하기도 했다. 혹자는 신서사이저나 컴퓨터, 테이프 반복 진행을 사용하기도 한다. 비틀즈나 프랭크 재퍼는 이러한 형태의 음악을 시도한 바 있다.

Southern Rock (서던 록)

1970년대 초 올맨 브러더스 밴드와 함께 록 음악계에 대두한 것이 서던 록이다. 미국 남부 출신의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들고 나왔다 하여 ‘서던 록’이라 이름 붙여진 이 사운드는 70년대전반에 걸쳐 특히 미국의 남부에서 유행했다. 사이키델릭 사운드의 영향이 남아 복잡한 사운드가 팝스계를 누비던 시기에 서던 록은 록의 원류 즉 리듬 & 블루스와 컨트리& 웨스턴에서 그 사운드의 기초를 찾고자 노력했다. 그것은 뿌리로의 그리고 록의 본 모습으로의 귀환이었다. 그러므로 서던 록은 그 내용면에서도 미국 남부인들의 소박하고 낙천적인 인생관과 남부 특유의 지역색으로 인한 비극적 운명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서던 록의 핵심이라면 록큰롤의 기원인 소울과 컨트리의 정신을 다시 한번 되돌리려 한 데 있다.

West Coast Rock (웨스트 코스트 록)

미국의 서해안을 기점으로 하여 발생한 록을 가리킨다. 캘리포니아사운드라고도 한다. 서해안의 중심은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리스인데, 주로 여기서 생성된 록을 말한다.

사운드 면에서는 컨트리 뮤직의 흐름을 받은 것이 많으며, 코러스등에 그 특징을 가지고 있다. 1960년대 후반의 히피 무브먼트에 의해 부각된 미국의 새로운 사운드의 개념. 웨스트 코스트 록의 대표적인 그룹들로서는, 제퍼슨 스타쉽, 클리톤즈, 또 그레이트풀 데드, 이글스 등을 꼽을 수 있다.

Psychedelic Rock (사이키델릭 록)

60년대 중반 이후 미국에서는 기성 질서와 개념을 타파하고자 하는 히피들이 등장해 갖가지 문화 운동을 주도했다.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확산된 이 문화운동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당시 미국이 깊이개입했던 월남전에 대항하는 ‘꽃의 시위'(Flower Movement)와 ‘드럭무브먼트'(Drug Movement)를 들 수 있다.

이들 문화운동은 특히 마마스 & 파파스의 ‘꿈 속의 캘리포니아'(California Dreamin’)와 스코트 매킨지의 ‘샌프란시스코에서는머리에 꽃을 꽂으세요'(San Fransisco Wear Some Flowers In YourHair) 두 곡의 노래에 의해 이미지가 정착되었고 전세계의 히피들이’사랑과 평화'(Love & Peace)의 메시지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몰려드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곡이 도화선이 되어 샌프란시스코에 번졌던 록 뮤직이 사이키델릭 록이었다.

사이키델릭 록 뮤직을 하는 아티스트들은 반전과 인류애와 평화를주장하며 환각제 등을 사용하는 음악을 선보였다. 조명효과를 이용하는 화려한 라이브 무대에서 블루스 록을 기반으로 하여 재즈나전위음악적 요소를 표현하기도 했다. 특히 제퍼슨 에어플레인은관능적인 메시지 송으로 록 음악에 불가사의 한 힘을 주며 과거의가치관을 타파해 갔다.

환각제에 의한 사이키델릭한 음을 표현한다 하여 ‘애시드 록'(AcidRock)이라고도 불리며 제퍼슨 에어플레인 외에 그레이트 풀데드등의아티스트가 있다.

Theater Rock (시어터 록)

무대의상, 행동 또는 풍채 등의 매력이나 이상스러움 또는 익살스러움에 의해서 관객을 놀라게 하거나 즐겁게 만드는 것을 뜻하는 용어.
1974년에 데뷔를 한 4인조 그룹인 키스(Kiss)는 수염난 고양이, 은색눈빛의 우주인, 입술을 내밀은 모양, 그리고 흡혈귀등으로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짙은 분장을 하였다.
1980년에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가 그들의 새 앨범, [The Wall]중에서 발췌한 곡들을 연주하는 동한 한 패거리는 벽돌을 한장씩 쌓아서 35피트x210피트의 대형 벽판을 만들었다. 시어터 록은 이러한 모든 시각적 요소들을 포용하며 단순한 흥행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충격을 주기 위해서 폭력이나 불건전한 행위까지도 자행한다. (*Glitter Rock: Shock Rock란 참조)

Teenage Rock (틴에이지 록)

하나의 장르라기 보다는 록큰롤 발달 과정의 한 단계로 봐야 할이 틴에이지 록은 엘비스 프레슬리가 출연한 후인 1957년부터 약 5년간 지속되다가 로큰롤 음악이 포크 록, 프로페스트 록, 포에틱 록(Poetic Rock), 사이키델릭 록, 등의 형태로 복잡하게 개발되었고,밥 딜런(Bob Dylan)과 비틀즈의 출연을 보게 되는 시대에 이르러서는사라지게 되었다.

Shock Rock (쇼크 록)

록 그룹들이 그들의 공연에서 관객들에게 큰 충격을 줄 목적으로 폭력이나 섹스의 해프닝으로 치닫는데, 그러한 공연의 록 음악을 일컫는 말이다. 앨리스 쿠퍼(Alice Cooper)는 팬티 스타킹과 검은 타이츠를 입고 구렁이와 춤을 추거나 장난감 인형들을 처형하고 토끼들을 죽이고 하는 행위가 대표적인 예.

Protest Rock (프로테스트 록)

프로테스트 록은 가사의 주제적인 문제나 정신적인 자세 또는 이념등과 결부된 개념의 말이다. 프로테스트 록은 1960년대에 월남전 반대, 인종차별 반대, 반핵 등의 사회적인 운동의 일환으로서 개발되었다. 밥 딜런(Bob Dylan)은 필 오크스(Phil Ochs), 탐 팩스튼(TomPaxton), 피트 시거(Pete Seeger)등이 선구자이다.
레이버, 스톨러, 그리고 스펙터의 <Spanish Harlem> (1961)을 비롯,크리스탈즈 그룹의 히트곡이 되었던 진 피트니(Gene Pitney)의 <He’sa Rebel> (1962), 1965년에 1위의 히트곡이 되었던 배리 맥과이어(Barry McGuire)의 <Eve of Destruction>, 그리고 돈 맥클린(DonMcLean)의 <American Pie>(1972) 등이 모두 프로테스트 곡들의 예이다.

Progressive Rock (프로그레시브 록)

프로그레시브 록은 록 음악의 한 분야나 범주 라기보다는 오히려1964년에 비틀즈의 등장에서 비롯된 60년대를 통한 하나의 록 연주 추세로 보아야 할 것이다. 녹음을 위한 새로운 기계들이 개발되는 것과때를 같이 하여 록 그룹들은 갖가지 음향변조기계와 새로운 전기 악기류, 신서사이저 등 새로운 장비들을 사용하게 되었다.
프로그레시브 록의 추세는 초기 로큰롤의 사운드나 최소주의 악기편성과는 달리 복잡성이 따르는 스튜디오 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Poetic Rock (포에틱 록)

1960년대에 록 음악의 가사들은 밥 딜런과 비틀즈와 함께 그 주제의깊이와 이미지의 신선함 그리고 표현의 우아함이 포함되어 있었다. 시와 결부된 이 요소들은 각기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조니 밋첼(Joni Mitchell), 닐 영(Neil Young), 로라 니로(Laura Nyro), 잭슨브라운(Jackson Browne), 제임스 테일러(James Taylor), 캐롤 킹(Carole King), 랜디 뉴먼(Randy Newman), 폴 사이먼(Paul Simon),캣 스티븐스(Cat Stevens) 그리고 레오나드 코헨(Leonard Cohen) 등의곡에서 발견된다. 특히 코헨은 1968년에 록 싱어겸 작사가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인정받는 소설가이며 시인이었다.

No Wave Rock (노 웨이브 록)

펑크와 뉴 웨이브에서 파생된 록 음악의 하나로서 그 경향은 극단적인 비상업주의로 흘렀으며 비직업적인 음악가들에 의해서 음악이 만들어지는 것도 포함되었다.

Italo-American Rock (이탈로-어메리컨 록)

어떤 스타일이나 장르를 뜻하는 말이 아니고 뉴 저지의 이탈리아인 지역으로부터 나온 일군의 그룹들인 브롱크스(the Bronx), 크레스츠(the Crests),디온 앤 벨몬츠(Dion & the Belmonts), 프랭키 밸리 앤 더 포 시즌스(Frankie Valli & the Four Seasons), 영 래스컬스(the Young Rascals)등의록을 단순히 지칭하는 말이다. 후에 출현한 이 부류의 그룹들에는 블루스마구즈(the Blues Magoos), 바닐라 퍼지(Vanilla Fudge), 그리고 제이 앤 디아메리컨즈(Jay & the Americans)등이 있다.

Instrumental Rock (인스트루멘틀 록)

보컬이 없이 악기로만 연주되는 록을 말하며 전기 오르간이나 전기 기타또는 테너 색소폰에 관심이 집중되었던 시기인 1959년에서 1963년 사이에 그전성기를 이루었다.

God Rock (갓 록)

종교적 성향을 띤 작품을 일컫는 말. 1967년에 일렉트릭 프룬즈(the Electric Prunes)는 헤브루 기도문에 근거를 둔 작품인 [Releaseof an Oath]와 [The Kol Nidrei]에 이어서 [Mass in F Minor]을 녹음하였다. 갓 록의 또 다른 그룹인 어소시에이션(the Association)도[Requiem for the Masses]라는 앨범 하나를 녹음했다. 밥 딜런의1979년도 앨범 [Slow Train Coming]과 1980년도 앨범 [Saved]는그리스도 교인으로서 다시 태어났다는 그의 생각을 담은 것으로서역시 갓 록에 포함시킬 수 있겠으나, 갓 록이 아닌 지저스 록(Jesus Rock)으로 분류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Glitter Rock (글리터 록)

70년대 초에 영국인 폴 가드(Paul Gadd)가 예명으로 사용했던 개리글리터(Gary Glitter)라는 이름에서 따온 록의 한 분파 이름. 그는무대 공연의 한 부분을 시각적인 면에 중점을 두어 구경거리를 연출하는 록 연주인들 중의 선두주자였다. 이상하고 기상천외한 의상과 분장, 머리 모양, 무대 도구들, 그리고 익살스런 행동 등 온갖 수단을동원하여 음악적 프로그램에다 시각적인 면을 더한 것이 글리터 록의특징이었다. 이러한 시각적인 면의 범위를 넘어서 폭력과 섹스를 가미하여 단순한 흥행의 차원을 넘어 선 것은 쇼크 록(Shook Rock)이라고 하고, 이 두 유형의 시각적인 록을 포괄하는 의미로는 시어터 록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Fusion Rock (퓨전 록)

재즈 그룹이 록 음악을 시도하거나 록 그룹들이 재즈를 연주하려고 시도하던 1970년대의 실험적인 혼합 음악을 지칭하는 용어. 록과 라틴 리듬이 결합된 것도 역시 퓨전 록에 속한다.

Experimental Rock (익스페리멘틀 록)

록의 한 스타일이나 그 범주를 말할때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로서 실험적 록 음악을 뜻하며 우연성 록, 전위 록, 클래식록, 그리고 전자 록 등이 이에 속한다.

Euro rock (유로 록)

영국 이외의 유럽 여러 나라에서 발생한 록을 한때 유로 록이라고했다. 유로 록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 되었으며, 실제로 오늘날에도계속되고 있는데, 그 절정을 이룬 것은, 네덜란드의 포커스가 영국으로 진출하여, 1972년의 멜로디 메이커지인 팝 폴, ‘브라이티스트호프’에서 1위로 선정된 것을 계기로, 이탈리아의 PFM, 독일의탠저린 드림이나 크라프트 베르크 등이 세계로 진출하여 성공을 거둔것이라고 하겠다. 유로 록이 전성기를 이룰 무렵, 그 중심지는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의 3국이었으며, 음악적으로는 다양한스타일을 형성했는데, 그 대부분은 한때 영국에서 번영을 누린프로그레시브 록의 영향을 받아, 클래식이나 현대 음악을 바탕으로하는 언더그라운드적인 록이었다.

Sob Rock (소브 록)

하나의 장르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노래부르는 스타일과 결부된 말로서 흐느끼며 울부짖는 블루스곡의 레코드를 단순히 일컫는 말이다.

swamp rock (스왐프 록)

스왐프는 ‘습지, 늪’이란 뜻으로서, 서든 록계의 음악, 특히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사운드를 가리킨다. 델라니 & 보니,리온 러셀,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 등의 사운드를 말한다.

Space Rock (스페이스 록)

우주 탐사의 개념에 근거한 록의 한 분야. 외계를 암시하는 사운드의 부수적인 사용과 함께 스페이스 록은 공상 과학 음악이었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 실질적인 업적을 이룩한 사람은 1973년에 앨범 [SpaceOddity]를 발표한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 였다.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도 그들의 밀리언 셀러 앨범 [Dark Side of the Moon](1973)에 이 주제를 다루었고 그 기념으로 런던의 천문관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출처불명

80년대 헤비메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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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das Priest Retribution 2005 Tour“.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뉴 웨이브 열기 비집고 헤비메틀 재등장

  70년대 신디사이져의 등장으로 잠시 전성기를 뉴뮤직에게 넘겨줬지만, 메틀 밴드들이 기피해 오던 신디사이져를 도입해 과감한 시도를 한 밴드도 적지 않았다. 바로 프로그래시브 메틀이라는 장르를 만들었던 것이다.

  1980년 레드 제플린은 존 본햄을 잃고 추락하였고, 리치 블랙모어는 여전히 변덕스럽게 레인보우의 멤버를 갈아대고 있었다. 오지 오스본이 떠난 블랙 사바스는 레인보우를 나온 보컬리스트 로니 제임스 디오를 받아들여 과거의 영광을 재현해 보려고 했지만 팬들은 새로운 블랙 사바스의 사운드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키스의 요란한 화장도 더 이상 얘깃거리가 되지 못했고, 유라이어 힙은 아직 활동하고 있지만 팬들은 이미 그들을 과거 시제로 얘기하고 있다.

  AC/DC, 반 헤일런, 주다스 프리스트, 트라이 엄프 등이 공연과 앨범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헤비메탈의 명맥을 잇는 정도로 여겨졌고 핑크 플로이드의 《Wall》과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Guilty》는 이들의 활약을 그늘에 묻어버렸다.

  70년대를 뜨겁게 했던 디스코의 열기 속에서도 끈질기게 맥을 이어온 헤비메틀은 이제 팝 음악의 변두리에서 벗어나지 못 할 것으로 보였다. 디스코가 지난다음 다시 락의 황금기가 올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비웃는 듯 팝 뮤직의 대세는 뉴 웨이브 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헤비메틀의 새로운 역사는 그때 막 시작의 움직임을 보였다.

  헤비메틀사의 대부분이 영국에서 시작 되었듯이 새로운 역사도 영국에서 시작 되었다. 펑크나 뉴 웨이브 밴드들에게 빼앗겼던 클럽의 무대에 다시 헤비메틀 밴드들이 나타난 것이다. 신진세력인 데프 레퍼드와 아이언 메이든의 등장은 헤비메틀 매니아의 주 연령층인 10대들과 비슷한 나이여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신진밴드의 등장으로 활력을 얻은 헤비메틀은 이제 화려한 영광을 되찾을 결정적인 찬스를 노리고 있었다.

  1983년 데프 레퍼드는 앨범 《Pyromania》을 가지고 미국 시장의 공략에 나섰다. 영국 팬들의 넋을 빼놓은 그들은 세계 최대의 음악시장인 미국을 정복함으로써 세계를 손아귀에 쥐려는 야망을 실현시키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때 마침 휘몰아친 마이클 잭슨의 열풍에 그만 그 야망은 실패를 하고 말았지만 《Pyromania》라는 제목처럼 미국에서 새로운 헤비메틀의 붐에 불을 붙이는 데는 충분한 것이었다.

  뒤를 이어 등장한 콰이어트 라이어트의 앨범 《Metal Health》는 마이클 잭슨의 열풍을 비집고 올라서서 정상을 정복함으로써 본격적인 헤비메틀의 시대를 다시 열어놓았다. 콰이어트 라이어트의 성공은 팝스계를 다시 헤비메틀 쪽으로 돌려 놓았으며 바야흐로 헤비메틀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락은 하나의 음악이며 또 하나의 사회현상

  헤비메틀 붐으로 60년대부터 활동하며 지금까지 살아남은 많은 밴드들이 다시 각광을 받고 있지만 이 붐의 주역은 역시 데프 레퍼드나 콰이어트 라이어트, 아이언 메이든, 머틀리 크루 같은 신진세력이다. 아이언 메이든이 7년의 경력을 갖고 있을 뿐, 그들은 거의가 밴드를 결성한지 3~4년에 불과한 그야말로 풋나기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60년대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 온 헤비메틀의 정신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고 그 위에 신선한 감각을 불어넣고 있다.

  60년대에 락이 탄생했을 때 사람들은 그 새로운 음악을 두고 여러가지로 말을 했지만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그것도 우연히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 전쟁에 대한 격렬한 증오, 기존 도덕에 대한 도전, 정체된 사회에 대한 좌절감 등이 뭉쳐서 히피가 생겨나기도 하고 스튜던트 라워가 전 세계를 휩쓸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음악은 모던 포크와 락이었다. 모던 포크는 반항적이고 심각한 내용의 가사로, 락은 에너지 넘치는 사운드로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다. 통기타의 반주로 노래를 하던 모던 포크는 70년대를 고비로 락의 급류에 휘말리게 되었고 락은 팝 음악의 한부문에서 팝 음악의 대명사처럼 불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남녀간의 사랑얘기나 부르던 비틀즈도 70년대에 가까워지면서는 반항적인 내용, 정치적인 가사, 나중에는 신비주의적인 경향의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변화를 보였다. 그 중에서도 일렉트릭 기타를 내세워 힘에 넘치는 사운드를 들려 주던 하드 락은 젊은이들의 넘치는 혈기에 꼭 맞는 것이었다. 레드 제플린, 딥 퍼플,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 같은 이름은 젊은이들에겐 바로 우상이었고 기타를 잡은 젊은이라면 누구나 어떻게 하면 더 큰소리로 더 거칠게 연주할 수 있을까를 연구하던 시절이었다.

  하드 락은 어느 시기엔가 그 금속성의 기타소리에 걸맞게 헤비메틀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제는 헤비메틀 밴드로 불리는 새로운 밴드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새로운 유행도 시대가 변하면 낡은 것이 되듯이 70년대 초반을 지나며 사회의 혼돈이 가라앉자 그와 함께 락도 서서히 그 힘을 잃어 가기 시작하였다. 락은 하나의 음악이기도 했지만 하나의 사회현상이기도 했던 까닭이다. 거치고 소용돌이치는 세상에서 태어나 그 속에서 인기를 얻었던 락이 조용해진 세상에서 계속인기를 얻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80년대의 헤비메틀은 무엇이 다른가?

  우선 곡의 길이가 짧은 것을 들 수 있다. 예전의 헤비메틀 밴드들은 거의 8~10분, 심지어는 13~15분이나 되는 긴 곡을 앨범에 수록하곤 했다. 더군다나 공연무대에서는 더 길어지기 일쑤여서 기타솔로가 한없이 이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곡들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 헤비메틀 앨범들은 거의 10곡정도를 수록하고 있다. 그 만큼 곡의 길이가 짧아져서 5분이 넘는 곡이 드물다. 공연에서도 연주의 변화를 주기는 하지만 기타솔로라든지 키보드 솔로를 넣는 짓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리고 60, 70년대 헤비메틀 밴드들은 대부분 걸출한 스타를 중심으로 모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딥 퍼플은 존 로드와 리치 블랙모어, 레드 제플린에는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 블랙 사바스에는 오지 오스본, 유라이어 힙에는 데이빗 바이런과 켄 헨슬리가 있었다. 그들은 스타를 중심으로 밴드를 이끌어 나갔고 스타들이 빠진 밴드는 인기의 대열에서 낙오되었다.
  그러나 80년대 헤비메틀 밴드는 거의 스타를 갖고 있지 않다. 물론 스타를 키워 낼 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었겠지만 팬들도 밴드의 사운드를 더 좋아하는 부류로 바뀐 것 같다.

  80년대 헤비메틀의 또 다른점은 기교적으로 단순해졌다는 점이다. 데프 레퍼드 같은 밴드의 음악에는 레드 제플린의 음악에서 들을 수 있었던 복잡한 코드의 진행이나 딥 퍼플의 클래식한 선율 따위는 애시당초 없었다. 어떤 면으로는 그들이 1960~70년대 헤비메틀 밴드보다는 혹시 락큰롤에서 직접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이다. 그러나 거칠고 강력하게 터져 나오는 기타, 두드려 부수는 드럼, 쇠사슬 처럼 철커덕 거리는 베이스, 목이 터져라 질러대는 샤우트 창법을 들어보면 그들의 음악도 분명 헤비메틀이다.

  밴드마다 거의 한결같이 키보드가 눈에 띄지 않는 것도 다른 점이다. 60, 70년대 밴드도 기타의 사운드를 정면에 내세운다는 것은 요즘의 밴드들과 다를 바가 없지만 그래도 밴드에 키보드를 제외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딥 퍼플의 존 로드라는 불세출의 키보디스트가 있었고 유라이어 힙에서 켄 헨슬리의 역할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따로 키보디스트가 없었던 레드 제플린에서도 베이시스트 졸 폴 존스의 키보드 실력은 전문 키보디스트를 뺨칠 정도였다. 그들은 하몬드 오르간과 당시 인기를 끌기 시작하던 신디사이져의 연주로 헤비메틀의 사운드를 훨씬 풍부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요즘 활동하는 헤비메틀 밴드에서는 키보디스트를 찾기가 힘들다. 있다면 마이클 쉥커 그룹이나 레인보우, 화이트 스네이크 정도일까. 이 중 레인보우와 화이트 스네이크가 딥 퍼플에서 갈라져 나온 밴드이고 더우기 화이트 스네이크의 키보드 주자가 전 딥 퍼플의 존 로드라는 사실은 꽤 흥미롭다. 바꾸어 말하면 신진 헤비메틀 밴드는 거의 키보디스트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1960~70년대 헤비메틀과 80년대 헤비메틀의 방향을 더욱 극명하게 시사해 주고 있다. 1960~70년대만 해도 헤비메틀이 만들어져 나가는 과정에 있던 시대였다. 그 당시의 락 밴드들은 블루스, 락큰롤, 클래식, 컨트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향을 받았던 경험이 있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새로운 음악을 창조하는데 몰두했었기 때문에 한마디로 락이라고 해도 무척이나 여러 향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딥 퍼플이나 레드 제플린, 유라이어 힙 같은 밴드의 음악이라도 전형적인 헤비메틀의 곡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심지어는 어커스틱 기타의 반주로 노래하는 발라드풍의 곡도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시도를 하는 가운데 풍부한 표현력을 지닌 키보드는 커다란 역할을 해냈다. 헤비메틀은 이런 가운데 탄생한 한 부류에 불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메틀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준 것은 그 중에서 전형적인 헤비메틀 사운드였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화려하고 깊이있는 소리를 내는 키보드가 오히려 헤비메틀 특유의 직설적인 표현을 하는데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인식되었는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밴드가 5인조이면 의례 기타, 보컬, 키보드, 베이스, 드럼의 편성이었지만, 요즘의 헤비메틀 밴드는 오히려 트윈 기타를 채용하고 있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있다.

  기타의 연주에서도 꽤 변화를 보이고 있다. 블루스나 락큰롤의 영향이 짙게 베어 있었던 초기 헤비메틀 기타리스트들의 연주에 비해 요즘의 기타리스트들은 헤비메틀 기타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독자적인 스타일을 확립해 놓고 있다. 솔로 연주에서 멜로디의 전개와 리듬 감각을 중요시 했던 선배들에 비해 빠른 속도의 손가락 놀림과 깊게 디스토션이 걸린 사운드, 전체적으로 힘과 스릴에 넘치는 연주를 들려주는 것이 80년대 헤비메틀 기타리스트들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곡이 짧아서 듣기에 부담이 줄었고 한두 사람보다는 밴드자체가 인기를 끄는 경향이 있으며 곡의 구성이나 기교가 단순해져 있고 키보드가 배제된 상태에서 기타가 사운드의 핵심을 이루고 있으며 기타의 연주 스타일도 헤비메틀 특유의 스타일을 갖고 있다는 것을 80년대 헤비메틀의 특징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http://tai88.hihome.com/80year.htm

LA Metal

원래 미국의 HR 씬은 뉴욕을 중심으로 한 이스트코스트(East Coast) 사운드와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한 웨스트코스트(We st Coast)로 구분되어 발전하였는데, 70년대부터는 AEROSMITH, KISS를 맹주로 한 동부세력이 득세하였다. 그러나 78년 VAN HALE N의 등장으로 L.A.와 캘리포니아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특히 80년에 들어서는 영국의 N.W.O.B.H.M.의 영향으로 M TL EY CR E, QUIET RIOT, RATT라는 3대 밴드를 주축으로 ROUGH CUTT, W.A.S.P.등 일단(一團)의 신진 밴드들이 대거 출현하였으니 이 거대한 흐름을 지역적 이름을 따서 L.A. Metal이라 부른다.(처음에는 L.A.를 위시한 캘리포니아 출신의 밴드를 L.A. Metal 이라고 했으나 후에는 지역은 틀려도 ‘L.A. Metal과 같은 성향의’ 밴드도 L.A. Metal로 집어넣었다.)

L.A. Metal의 특징은 외모 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무스와 스프레이로 부풀린 머리, 화려한 화장, 가죽 점퍼와 청바지라는 전통적인 의상을 벗어 던지고 산뜻한 T 셔츠와 스판바지, 가죽조끼로 무장한 이들은 음울하고 남성적인 HM의 이미지를 밝고 명랑한 여성적인 것으로 변모시 켰다. 물론 사운드 자체는 전형적인 브리티쉬 HM이었지만 N.W.O.B.H.M에 비해서는 기타리스트의 중요성이- 조지 린치, 워렌 디마 티니, 제이크 E. 리는 밴드의 후광이나 인기와는 별도로 자신들의 입지를 세웠다.- 부각된 것이었고, 그위에 약간의 미국적인 현실, 허장성세(?)도 가미된 HM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이라면 이 L.A. Metal은 하나의 장르만이 아닌 잡다한 수많은 분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가장 과격한-무대에서 날고기를 씹는 충격적인 매너를 보여준 W.A.S.P.에서부터 블루스적인 취향의 GREAT WHITE, 파워메틀 밴드인 ARMORED SAINT, 달콤한 여성취향의 POISON, 가장 전형적인 L.A. Metal의 특성을 가진 M T LEY CR E, RATT, 그리고 지역적 음악적으로 전혀 달랐지만 L.A. Metal에 집어넣는(?) BON JOVI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밴드를 포 섭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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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 Jovi 1” by Rosana PradaFlickr.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결과적으로 이러한 다양성으로 L.A. Metal은 80년대의 주도권을 쥘 수가 있었던 것이고 나아가서는 88년 {그래미}에 HM/HR부분이 신설된 것으로 상징되는 ‘HM의 시민권 획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물론 혹자(或者)에 따라서는 “L.A. Metal은 상업적이다”, “인기위주로 나아갈 뿐 철학이 없다”는 등의 비난을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 고 L.A. Metal은 탄생이래 언더그라운드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던 HM을 밝은 태양 아래 인도했고 대중적인 인지도를 넓혔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조류였다고 할 수 있다.
문자 그대로 로스앤젤레스와 그 위성도시를 중심으로 한 메틀이라는 뜻이 첫째요, 두번째로는 ‘L.A.메틀적인’ 정취를 가진 밴드의 음악을 가리킨다. 즉 쾌락적이고 감각적인 미국적인 기질에잘 어울리는 메틀인 것이다. L.A.는 연예도시인지라 물론 밴 드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그 대부분이 소녀취향의 팝 밴드였다(물론 DOORS는 제외하고서라도..) 그러던 중에 VAN HALEN의 등장 은 많은 뮤지션들의 관심을 로큰롤로 이끌었다. 그리고 영국에서 불어온 N.W.O.B.H.M.의 영향은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는데, 故랜디 로즈가 이끌던 QUITE RIOT, LONDON, REGS DIAMOND등이 불씨를 지폈다고 한다.

그러나 본격적인 L.A.메틀의 신호탄은 8 1년 데뷔한 M TLEY CR E부터였다. 경쾌하면서도 박력있는 8비트의 로큰롤을 기반으로 한 사운드와 활력이 넘치는 에너지,현실 적인 가사는 그대로 L.A.메틀의 표준이 되었고, 이후 RATT, ROUGH CUTT, BLACK N’BLUE, DOKKEN, GREAT WHITE, GUNS N’ROSES, POISON, WARRENT, L.A. GUNS, FASTER PUSSYCAT, BANG TANGO, SLAUGHTER등이 차례로 등장하면서 점차 대세를 잡아갔다. 무 엇보다 L.A.메틀의 공적은 매니아·언더그라운드 취향에 머물던 HM을 음악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키웠다는 것에 있다 . 물론 여성 취향이라거나 인기에 영합한다, 내용이 없다라는 비난도 없지는 않았지만서도 그때까지 영국에 빼앗겼던 HM의 주도 권 내지는 뿌리깊은 열등감을 해소했다는 점에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출처불명

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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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enda Lee” by Decca Records – Billboard, page 1, 28 August 1965.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넓은 의미에서 pop은 듣기편한 멜로디와 반복되는 부분(보통 가사와 코러스에서), 그리고 청취자가 그러한 요소에 정신을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간결하게 짜여진 곡구조를 가진 모든 음악을 의미한다. Pop Music은 19세기 이래 미국에서는 매우 수익성높은 산업분야로 인식되어왔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의미가 약간 변모해 Rock & Roll 시대 이후에 형성된 스타일을 의미하게 되었다. 일단 레코드 산업의 보다 많은 보수적인 요소들이 새로운 음악적 지형을 형성해나가는데 ’60년대 초기에 부상한 팝은 틴아이돌에 의해 구사되는 보다 가볍고 부드러운 락의 대안의 형식을 띄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팝은 Rock의 비트와 어레인지먼트에 영향을 받았고 래디오에서도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팝은 락과는 거리가 멀다. 팝의 본질적인 요소는 작곡과 스튜디오 작업과 같은 숙련된 작업이 주된 요소였지 락의 에너지와 자세같은 것은 애초에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60년대가 끝나갈 무렵 팝은 Psychedelia나 Blue-eyed Soul에 일정한 영향을 받게 된다. ’70년대에 들어서 팝은 Burt Bacharach와 같은 뛰어난 싱어/쏭라이터들의 활약으로 말미암아 더욱 말랑말랑해져갔다. ’60년대 주요 팝아티스트는 Beach Boys, Four Seasons, Everly Brothers, Association, Rascals, Righteous Brothers, Walker Brothers, Petula Clark 등을 들 수 있다. 이외에도 팝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는 작곡가 Burt Bacharach, 프로듀서 Phil Spector 등을 들 수 있다. ’70년대의 주요 팝아티스트는 Carole King, Carpenters, Gilbert O’Sullivan 등이 있다.
유사한 스타일 :

Country-Pop, Instrumental Rock, Folk-Pop, Adult Contemporary, Soft Rock, Motown, Merseybeat, Pop/Rock, Bubblegum, Teen Idol, Brill Building Pop, Space Age Pop, Nashville Sound/Countrypoli, Mod, Reggae-Pop, British Trad Rock, French Pop, Freakbeat, AM Pop, Early British Pop/Rock, Pop Underground

주요앨범들 :

The Righteous Brothers: Anthology 1962-1974 [1989]
Brenda Lee: Anthology, Vols. 1 & 2 (1956-1980) [1991]
The Zombies: Singles A’s & B’s [1990]
Roy Orbison: For the Lonely: 18 Greatest Hits [1988]
The Beatles: With the Beatles [1963]
Grant King: Let Love Out [1995]
Del Shannon: Greatest Hits [Rhino] [1990]

AllMusic 참조

게이팝

들어가며

일반인 내가 하이텔의 동성애 모임인 “또사모”에 과감하게 가입하기까지는 하나의 작은 사건(?)이 원인이 되었다. 내가 몸담고 있던 음악동호회에서 여름을 맞이한 여름 특집감상회를 어떤 주제로 할까 고민하던 차에 내가 제안했던 ‘게이 아티스트 특집’이 의외의 반발에 부딪쳐 무산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한국이 문화적 폐쇄주의 사회라는 것은 철들기 시작한 사춘기 시절부터 체험하고 있었지만 대다수가 X세대라 일컬어지는 20대 초반, 더욱이 외국의 음악을 폭넓게 접해오며 좀더 개방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한 그 모임에서마저 “사회에 민감한 문제로 우리 동호회의 이미지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반대 주장이 만연되어 있다는 사실은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큰 충격이었다.

어려서부터 가요보다는 팝 음악을 좋아했던 나는 1980년대 전 세계를 휩쓸었던 뉴웨이브에 매료되었고, 전세계 소녀 팬들의 연인이었던 듀란듀란(Duran Duran), 컬처클럽(Culture Club) 역시 나의 우상이며 연인이었다. 1980년대 뉴웨이브의 유행은 유니섹스(Unisex)의 열풍을 몰고 왔었다. 빨간 립스틱, 짙은 마스카라, 하얗게 화장한 얼굴, 나풀거리는 블라우스 등은 그 당시 뉴웨이브 밴드들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10대 초반부터 이러한 뉴웨이브 밴드에 관심을 가졌던 나는 그래서인지 어려서부터 동성애에 대한 놀라움이나 반감이 없었다. 계속 음악에 관심을 기울이고 정보를 수집하면서 뛰어난 음악성으로 인정받는 많은 영국 아티스트들 중에 상당수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개인적으로 그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보다는 그들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밝히고 난 직후의 매스컴이나 팬들의 반응이 더 흥미로웠던 것이 사실이다.

팝 음악계 게이 아이콘의 역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가장 대표적인 영국의 게이 아이콘(Gay Icon)을 꼽는다면 1960년대 후반 영국에서 빛을 보기 시작한 글램락에서부터 시작한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를 들수 있다. 호리호리한 몸매, 뚜렷한 윤곽의 얼굴, 짙은 화장, 몸매가 드러나는 원피스도 마다하지 않는 그의 과감함은 그 당시 기성세대들에게 큰 충격이었고 젊은 세대들에게는 신선한 충격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의 이러한 이미지는 1980년대 뉴웨이브 밴드들에 의해 좀더 과감한 형태로 재창조되기도 했다. 데이비드 보위는 Bisexual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에티오피아의 국민영웅인 세계적인 슈퍼모델 ‘이만’의 남편이지만 그는 첫번째 부인(첫번째 부인도 양성애자로 알려져 있다)과의 사이에서 현재 20대 중반의 장성한 아들을 하나 두고 있기도 하다. 과거 영국의 주간지에 부인과 함께 주말이면 게이 바에 함께 손잡고 들어가서 나올 때는 따로따로 동성 파트너와 손잡고 나와서는 하루 밤을 따로 보낸 후 아침에 집으로 귀가한다는 기사가 실린 적도 있었고, 그의 부인이 남편과 믹 재거(Mick Jagger. 롤링스톤즈 리드보컬)가 한 침대에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기자들에게 토로하기도 할 정도였다. 데이비드 보위와 더불어 동성애자(혹은 이성애자)로 알려져 있는 영국의 거물급 아티스트로는 엘튼 존(Elton John), 조지 마이클(George Michael), 그리고 그룹 퀸(Queen)의 리드보컬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등이 있다.

1960-70년대의 대표적인 Gay Icon이 데이비드 보위였다면 1980년대에는 ‘여자보다 더 예쁜’ 컬쳐클럽의 보이 조지(Boy George)를 빼놓을 수 없다. 컬쳐(Clture Club)의 드러머와 연인 사이였던 그는 데뷔 후 몇 년간은 공식석상에서 동성애자가 아니냐는 질문에 “I never sleep with man”이라는 강한 어조로 동성애자임을 적극 부인하고 나섰으나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한 직후의 인터뷰에서 수줍으나 상기된 표정으로 “I love you America! You realize a real drag-Queen when you see one.”라는 한마디 말로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공식석상에서 밝힌 셈이 되었다. 후에 그는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힘들었던 시간을 회상하며 세상에 공개한 후의 홀가분함을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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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bian Angels” by Diricia De Wet from Johannesburg, South Africa – Lesbian Angels
Uploaded by ZH2010.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1980년대 후반의 변화

1980년대 초반의 뉴웨이브가 겉치장을 위주로 음악에 담겨진 메시지와는 상관없이 ‘보여주는’ 게이 문화를 대표했다면, 1980년대 후반에서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영국의 synth-pop(일렉트릭 기타, 드럼, 베이스보다는 프로그래밍 된 드럼과 신디사이저를 주로 사용한 팝)을 구사하는 몇몇 게이밴드들은, 외모로 보여주는 것보다는 노래에 담긴 메시지로서 Gay-pop의 한 주류를 형성해 왔다고 할 수 있다. Gay-pop을 정의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티스트 자신들과 그 아티스트와 그들의 음악을 추종하는 팬들의 섹슈얼리티에 있다. 아티스트 자신이 게이임을 밝힌 경우 그들의 음악을 gay-pop으로 분류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느 아티스트의 팬들의 대다수가 게이라면 그들의 음악은 Gay-pop으로 분류된다. 대표적으로 예쁜 외모와 매력적인 몸매가 음악성보다 강조되어졌던 소년 그룹(‘테이크뎃’이나 ‘보이존’)들은 멤버들의 섹슈얼리티와는 상관없이 겉으로 드러나는 열광적인 소녀 팬들 이외에 20세 이상의 남성 게이 팬들도 상당한 숫자였기에 Gay-pop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렇게 아티스트 자신이나 그들의 팬들의 섹슈얼리티 외에 중요한 음악 자체에도 나름대로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 특징이라면 런던의 언더그라운드 게이클럽이나 바에서 단골로 흘러나오는, 춤추기에 적당하고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빠른 템포, 서정적이며 흥겨운 분위기의 멜로디, 무겁지 않은 베이스라인, 뛰어난 가창력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보컬 등이 대표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주목할 만한 사실로 Gay-pop그룹의 대부분은 자신들이 게이라는 사실을 대중에게 공개해왔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기존 팬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게이라는 사실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고, 이러한 대중 앞의 공개는 오히려 새로운 팬들을 확보하는 촉매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게이라는 사실만으로 하루아침에 등을 돌리는 팬들도 물론 있었다(이러한 예는 남성 팬들에게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대표적인 Synthpop그룹으로 자신들이 게이임을 밝히고 활발히 활동하는 펫 샵 보이즈(Pet Shop Boys), 이라주어(Erasure)등은 대표적인 영국의 Gay-pop 아티스트들로 손꼽힌다.

섹슈얼리티에 상관없이 전 세계적으로 사랑 받고 있는 대표적인 그룹인 펫 샵 보이즈는 엘튼존, 퀸의 프레디 머큐리와 더불어 ‘거물급’ 게이 뮤지션에 속한다. 닐 테넌트와 크리스 로우의 Pet Shop Boys는 한때 두 멤버 사이의 염문설도 있었으나 인터뷰에서 서로가 서로의 취향이 아니라는 농담조의 발언으로 자연스럽게 그 염문설을 부인하기도 했다. 솔직하고 담담한 가사로 삶과 사랑뿐만 아니라 전쟁, 기아 등의 사회문제를 노래하기도 하는 펫 샵 보이즈 음악의 큰 특징은 오케스트레이션과 신디사이저를 기본으로 한 친숙하며 흥겨운 멜로디에 묻어 나오는 서정성과 우울함이다. ‘흥겨움과 우울함’, 이 두 가지가 자연스럽게 공존하기란 어려운 일인데 이들은 이 두 가지를 그들의 음악 속에 자연스럽게 조화시키고 있다.

게이 이미지의 보편화

Gay의 영어 사전적 뜻은 Light-hearted, cheerful, brightly coloured. 즉 ‘흥겨움, 즐거움, 밝음’이다. 선진사회의식의 대표 격인 영국 사회에서조차도 동성애자들은 기득권을 쥐고 있는 이성애자들 중심의 기존 사회로부터 눈에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외면, 멸시, 차별 등을 받아 왔음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Pet Shop Boys의 ‘즐거우나 서정적이고 우울한’ 분위기의 음악은 이러한 사회성향에 비추어 자연스레 형성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현 시대 예술의 여러 분야에서 팝 음악처럼 다양한 섹슈얼리티를 큰 저항이나 거부감 없이 폭넓게 수용하는 분야도 드물다. 아티스트 개인의 섹슈얼리티와는 상관없이 Homosexual, Bisexual, Transsexual의 이미지는 매우 보편화 되 있다. 특히 최근 제작되는 뮤직비디오에서는 이러한 성향이 뚜렷하게 보여진다. 팝 음악은 여러 가지 문화 형태 중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시대별로 그 당시 진보적인 젊은이들의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과 욕구를 표출하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미 팝 음악의 큰 줄기로 떳떳하게 자리 잡고 다른 분야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Gay-pop은 단지 음악으로서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도 ‘소수’로 차별대우를 받는 전 세계 동성애자들의 작은 목소리를 크게 높일 수 있는 효과적인 매체로서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출처

Rock ‘N Roll

록의 역사는 50년대부터다. 종래 서구의 팝은 음악형식면에서 서투른 마디 2부형식에 ‘달빛’ ‘별자리’ ‘장미’ ‘입맞춤’ 운운의 상투적 구절이 노랫말에 자주 등장했고, 전기악기는 사용하지 않았으며, 섹스, 사회문제, 종교 같은 주제는 멀리하는 게 보통이었다. 우울함과 비참함으로부터 도피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에 저항하는, 즉 웃음과 슬픔이라는 양면성을 가진 블루스는 흑인들만의 음악이었고, 소박하고 서민적이며 방랑과 이혼, 삼각관계, 음주 등을 노랫말에서 과감하게 다루었고, 전기기타, 드럼, 스틸기타를 사용했던 컨트리 앤 웨스턴은 촌스런 시골뜨기 음악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세계대전을 전후해 태어나 자본주의의 풍요를 누리면서 자란 50년대의 서구 젊은이들은 음악적 취향에 있어 기성질서에 저항했다. 이들은 멜로디 위주의 스탠더드 팝 대신 강한 비트의 음악에 몰두했다. 55년 빌 헤일리가 나타나 컨트리 앤 웨스턴밴드에서 리듬 앤 블루스를 커버한 레코드 ‘Shake Rattle & Roll’, ‘Rock around the Clock’을 발표했다. 듣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손뼉을 치거나 춤을 추게 할 수 있는 노래들이었고 그 동안 젊은이들이 어디서도 들을 수 없던 폭발음이었다. 특히 ‘Rock around the Clock’은 영화 ‘폭력교실(Blackboard Jungle)’의 주제가로 사용되어 그 해 여름 8주 연속 차트 1위를 독주하는 대히트를 기록했다. 영화가 교내폭력을 그린 것이었으므로 이때 록큰롤음악 역시 틴에이저의 반항과 비행, 그리고 폭력과 관계된 음악이라는 이미지가 확고부동하게 심어졌다.

뒤이어 56년에는 남부 가난한 촌뜨기 트럭운전수 출신의 엘비스 프레슬리가 나타나 로큰롤 광풍을 주도했다. 니그로의 사운드와 니그로의 감각으로 노래할 수 있었던 최초의 백인이었던 그의 음악 속에서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은 역동적인 결합을 이루었다. 그의 육감적인 목소리와 관능적인 허리율동은 기성세대에겐 지탄, 젊은이에겐 환호의 대상이었다. 그 외에도 50년대 중엽에는 척 베리, 리틀 리차드 등의 록큰롤음악이 쏟아져나왔는데, 이러한 음악은 모두 간단한 멜로디에 단순한 코드, 전기기타의 연주, 요동치는 듯한 리듬감, 터져나오는 듯한 에너지, 거칠게 절규하듯 부르는 격렬한 보컬과 다이나믹하게 몸을 움직이는 율동 등을 특징으로 했다.

그러나 엘비스는 60년대 이후 연예인이 돼갔고 음악도 부드러운 팝발라드로 바뀌었다. 엘비스 팬들은 그를 쫓아갔지만, 그는 더 이상 로큰롤의 황제가 아니었다. 60년대초 미국과 영국에서 엘비스와 클리프 리처드가 로큰롤에 등을 돌리고 트위스트가 창궐하면서 로큰롤은 사그라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는 비틀즈를 위한 혁명전야였다. 음악산업의 변방이라 할 리버풀과 함부르크의 욕설이 난무하는 뒷골목에서 자신들 음악을 가꿔온 영국노동자계급출신의 더벅머리청년그룹 비틀즈는 무작정 질러대는 고함소리 하나로(?) 64년 미국공략을 단숨에 끝냈다. 록의 모든 장르를 실험한 이 신화적인 그룹은 70년 팬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며 훌쩍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이후 비틀즈를 필두로 수십여개의 영국 그룹들이 물밀 듯이 미국으로 몰려들었다. 더 후, 롤링 스톤즈, 야드버즈, 크림, 핑크 플로이드 등 비틀즈 이후 록 흐름의 주도권을 최근에 이르기까지 영국이 쥐게 된 근원이다.

64년 비틀즈의 상륙에 즈음해 미국에서는 버클리대학을 시작으로 성 정치 등에 관한 터부를 타파할 것을 주장한 Free Speech Movement을 비롯, 수년동안에 걸쳐 미국사회를 뒤흔든 학원투쟁과 도시흑인폭동, 무장봉기, 베트남반전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자유정신의 최정점은 산타나, 더 후, 제퍼슨 에어플레인, 지미 헨드릭스, 존 바에즈 등이 참가한 69년 8월 우드스탁이었는데, 40만명이 구름처럼 몰려든 이 페스티벌은 폭우로 진흙탕이 되었지만 팬들은 열광했다. ‘fuck’을 계속 외치며 ‘베트남에서 죽음을’이라는 노래를 처절하게 선창한 컨트리 조에 이어 지미 헨드릭스는 미국 국가를 늘어지게 변주하며 저 위대한 미국의 이상에 야유를 보냈다. 정치적 저항과 낭만적 쾌락주의가 뒤섞인 히피즘적 반문화운동이 록과 결합한 최고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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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vis Presley promoting Jailhouse Rock” by Metro-Goldwyn-Mayer, I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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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cation: NYWTS — BIOG – The Library of Congress retrieved 3d02067r.jpg from Jailhouse Rock..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이 즈음 로스앤젤레스에서는 UCLA의 영화학과 학생들이 도어즈를 결성해 키보드 중심의 사운드, 양친살해를 암시하는 노랫말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앤디 워홀(미국 팝아트의 기수로 록뮤지션들의 많은 재킷을 디자인함) 밑에서 헤로인중독에 관한 노래를 기타의 금속성 소음에 맞춰 노래했다. 디트로이트에서는 급진적 정치운동에 관계한 매니저가 이끌던 그룹 엠시파이브가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이때부터 록은 전자악기의 비중이 더 커졌고, 앰프로 증폭되고 일렉트릭 장치에 의해 변형된 음은 폭력적이라 할 정도로 크고 자극적인 것으로 변해갔다. 지금까지의 록음악을 록큰롤이라 한다면 이후의 록음악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록이라 부른다.

그러나 70년대로 넘어가면서 미국은 혼란스러웠던 사회변동에서 벗어나 서서히 평정을 되찾았고, 록에 대한 상업적 침탈, 마약, 지미 핸드릭스와 짐 모리슨과 제니스 조플린 등의 잇따른 죽음 등으로 록은 다시 쇠잔해지는 듯했다. 이때 비틀즈와 바톤터치하듯 나타난 영국의 레드 제플린, 제프 백, 크림 이상 세 그룹(이들은 모두 야드버즈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전기기타의 금속음을 강조하고 공격적인 비트의 연주를 굉음과도 같이 증폭시켜 들려주는 하드록을 연주했다. 이 밖에 블랙 사바스, 딥 퍼플, 주다스 프리스트, 퀸 등 메탈밴드들은 음악적 완결성이 뛰어난 메탈을 연주했으며, 특히 딥 퍼플은 클래식 요소를 하드록 속에 끼워넣는 노력으로 상당한 호응을 얻었고 퀸은 치밀하게 계산된 듯한 아름다운 무대를 보여주었다. 이들은 기타의 파괴적이고 기교적인 연주, 그리고 악마적이고 남성적인 면모의 과시와 함께 완벽에 가까운 최고 수준의 연주를 자랑했으며 노래는 허무의 색채를 풍겼다.

또한 69년 킹크림슨을 필두로, 키보드를 많이 사용하고 클래식, 재즈, 현대음악의 요소를 자유자재로 섭취하며, 기존의 단순한 록리듬에 풍요로운 변박자를 도입하고, 신디사이저 등 새로운 악기를 사용한 ‘프로그레시브록’이 탄생했다. 특히 에머슨 레이크 앤 팔머는 능란한 키보드 테크닉을 과시했고, 핑크 플로이드는 현대사회의 소외와 신경증을 소재로 하여, 사이키델릭 사운드와 공상과학적 음악, 웅장한 일렉트로닉 사운드로 아방가르드적이면서도 완성도 높은 독창적 세계를 보여주어 지성인들에게 인기를 누렸다.

이들에 반발, 76년 영국에서 섹스 피스톨즈가 등장한다. 펑크의 도래, 록 안에서 또 한 번의 반항이었다. 상업화한 메탈스타들을, 정교한 록음악을 비웃으며, 그리고 영국 자본주의 위기를 반증하듯, 섹스 피스톨즈는 냉소적이고 반상업적인 노래로 일관했다. 제멋대로 불러젖히고 노래에 전혀 소질이 없을뿐더러 배우는 데도 도무지 흥미가 없었던 이들은 찢어지는 목소리로 욕설을 퍼부었지만 청중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곧 펑크밴드의 힘은 고갈되고 겉멋만이 덜렁 남게 되기도 했다.

레드 제플린을 정점으로 한 하드록 열기가 점차 식어갈 즈음, 하드록이 답답하다고 느낀 젊은이들은 80년대초 스트레이트한 요소를 더욱 높이고 강도에서도 날카로운 금속성 톤을 전개하는 헤비메탈 음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하드록에 대한 더 강한 반란이었다. 그리고 80년대 중반 메탈리카가 등장하면서 메탈은 드디어 주류의 위치로 부상했으며 슬레시 메탈, 데스 메탈 등으로 점차 분화해 나갔다.

메탈이 천하통일한 그 시점인 90년대 시애틀에서 출현한 너바나는 전통적인 사운드를 복고풍이나 짬뽕스타일로 표현한 얼터너티브록을 들고 나오면서 록 지평을 뿌리부터 흔들어 놓았다. 너바나의 얼터너티브를 계기로 탈장르시대가 열렸고 하나의 곡을 한 장르로 구분짓는 것이 어렵고 의미도 없게 되었다. 그리고 너바나의 얼터너티브는 음악장르의 구분을 뛰어넘어 하나의 문화운동으로까지 퍼져나갔다.

록은 그러나 너바나 이후에도 계속 발전, 70년대 영국에서 탄생된 펑크가 90년대 들어 주류로 자리매김하면서 네오펑크시대를 열었고, 최근엔 얼터너티브 이후 전자, 기계음으로 가득찬 테크노가 점차 힘을 얻고 있는 형국이다.

http://www.fortunecity.com/tinpan/morrissey/612/

언더그라운드, 인디펜던트, 하드코어

이는 대학 라디오 방송을 자주 타고 또 대학생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직업적 록 밴드나 뮤지tus의 음악을 가리킨다. 이 컬리지 록의 환경이 주류 팝/록 음악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에 대한 ‘대안’ 구실을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얼터너티브’라는 형용사가 붙은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에 대학가에서 인기를 끈 록 음악은 상업 라디오 방송이나 MTV 등의 대중 매체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 음반사를 통한 음반 판매 및 배급망과는 전혀 다른 경로를 통해 유통되는 언더그라운드(혹은 인디펜던트) 뮤지션들의 음악이었다. 1980년대 초반 이후 미국에서는 하드코어 씬을 비롯한 인디 씬이 각 지방의 언더그라운드 하위 문화로 폭넓게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들은 1970년대 펑크 운동의 음악적 영향과 에토스를 계승하면서 주로 지역 클럽에서의 공연을 통해 실력을 축적했고 자신들만의 독립 음반사(흔히 ‘인디 레이블’이라고 부르는)를 설립해 음반을 제작했으며, 주류 음반 시장과는 다른 독자적인 배급망을 수립하기도 했다. 

따라서 컬리지 록 방송, 언더그라운드 클럽, 인디 레이블, 하드코어 배급망, 이 네 가지의 접속이 얼터너티브 록의 모태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얼터너티브 록을 분류하면서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몇 가지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얼터너티브 씬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활동했던 R.E.M.이나 U2 같은 밴드가 어째서 때로는 얼터너티브에 포함되거나 그 선조격으로 언급되곤 하는가라는 문제 같은 것인데, 이 두 밴드는 모두 1980년대 대학 라디오 방송의 인기 스타였으며, 특히 R.E.M.의 경우 1980년대 말까지는 클럽공연과 인디 레이블을 통한 음반 발매를 지속했던 ‘언더그라운드 밴드’에 속했기 때문에 이런 식의 분류가 아주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학가와 언더그라을드의 하위 문화로서 록은 단지 얼터너티브의 모태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얼터너티브는 언더그라을드에서 지상으로 을라왔을 때 비로소 출현했고, 그때서야 고립적인 하위문화의 경계를 넘어서게 되었다. 거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1980년대 록을 ‘죽였던’ 상업주의의 화신 MTV였다.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으료 취임한 해이기도 한 1981년에 설립된 MTV는 당대의 사회 분위기에 걸맞는 문화적 첨병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다. MTV의 가장 큰 관심사는 팝 음악에서 불쾌하고 거친 요소들을 깨끗이 쓸어 내는 것, 다시 말해 청년 문화를 근절시키는 것이었다. 일찍이 MTV를 장식했던 듀란 듀란, 컬처 클럽 등은 글램과 펑크의 이미지에서 거칠고 공격적인 요소를 거세한 채 적절히 팝적으로 조합한 것이다. MTV의 보수성이 단적으로 잘 드러나는 것은 혹인 및 흑인 음악에 대한 태도였는데, 심지어 마이클 잭슨조차 단지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만으로 상당 기간 비디오 방영을 거부당하다가, 잭슨의 소속사인 CBS의 으름장에 못 이겨 간신히 방송을 탈 수 있었다 물론 잭슨의 대히트 덕분에 MTV는 일약 세계 최대의 대중 음악 매체로 부상할 수 있었고, 그의 인기가 시들해지고 있는 지금까지도 아낌없는 ‘충성’을 바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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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dova REM concert July 22 2003 blue” by Flickr user Stark (Stefano Andreoli) – http://www.flickr.com/photos/scaccia/39502728/.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1980년대 내내 마이클 잭슨, 마돈나, 왬 등의 팝 스타들을 양산했던 MTV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당시 미국에서 ‘유일하게’ 형성된 반 문화라고 할 수 있는 혹인 게토의 힙합 문화를 수용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1990년대에 들어서자 MTV는 니르바나 등 이른바 시애틀 그런지 밴드들을 필두로 한 얼터너티브 록을 본격적으로 보급하는 데 앞장서기 시작했다. 1980년대 보수주의와 주류 팝 문화의 선봉에 섰던 MTV가 1990년대에 ‘얼터너티브 네이션으로 변모한 까닭은 무엇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새로운 록 음악이 대중에게 파고들어 돈벌이가 된다는 계산이 분명 깔려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런 상업적 계산이야말로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그런 식의 해답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즉, 문제는 왜 또다시 록 음악이 대중, 특히 청년 대중을 사로잡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아마도 좀더 폭넓은 사회 문화적, 정치적 맥락에서 청년 문화가 차지한 위치로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 영미권의 1980년대가 사회, 정치, 경제, 문화적인 모든 측면에서 레이건-대처로 상징되는 신보수주의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록 음악 연구자 토니 커시너는 <대중 음악과 사회>라는 잡지에 기고한 논문에서 청년 집단 내부에서도 보수적 경향이 지배적이었으며 이는 신우익 운동과 청년 공화주의자 혹은 청년 레이건주의 집단으로 표상 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1980년대의 보수주의와 현란한 주류 팝 문화간에 어떤 직접적인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명시적인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다분히 그런 혐의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앞서 말한 하드로어 씬을 구성한 뮤지션들은 비교적 일찍부터 이런 보수주의-팝 문화에 반발했던 젊은이들에 속한다. 적어도 이들에게는 마이클 잭슨과 로널드 레이건이 동일선상에 놓여 있는 적이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들이 정치적 급진주의와 더불어 반 팝적인 이데올로기, 즉 듣기 편한 멜로디와 대중적인 스타덤을 강력 하게 거부하는 태도를 견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80년대 중후반 이들의 국지적 출현은 억눌리고 소외당한 채 불만에 싸여 있는 젊은이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점차 팬들을 확보했지만, 대중적인 현상이 되기에는 아직도 여전히 고립 분산적인 활동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결국 그런 방식에 한계를 느낀 몇몇 밴드가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을 맺고 주류 음반 시장으로 치고 올라왔다는 것, 그리고 사회 정치적으로는 공화당 정권으로 상징되는 보수주의가 후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맞물리면서 1990년대 록 음악과 청년 문화의 르네상스를 알리는 사건들이 속속 일어나게 된 것이다.

출처불명

College Rock

근본적으로 College Rock은 Alternative Rock의 태동기(1983 ~ 84)에서부터 대학가의 라디오을 주도했던 Alternative Music을 일컫는 개념이다. 대부분의 College Rock은 New Wave, Post Punk, 그리고 초기 Alternative Rock의 복합적인 영향아래 놓여있었다. 대부분의 College Rock 밴드들은 초기에 New Wave가 그랬듯이 메인스트림에서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비록 보다 예술적이긴 했지만 Post Punk만큼 실험적이거나 분파적인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많은 미국 밴드들이 그들의 뿌리를 Punk나 Hardcore에 두기는 했지만 모든 College Rock 밴드가 그렇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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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BG” by Matthew Jording from Brooklyn, NY, USA – DSC03697.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초기 밴드들중 주요한 두 밴드는 각각 미국과 영국에서 Guitar-pop을 선도하고 있었던 R.E.M과 Smiths이다. 그럼에도 College Rock의 음악적 테두리는 보다 넓다. 그 범위는 대략 미국측에서의 Hardcore적인 언더그라운드 락씬(Sonic Youth, the Minutemen, the Meat Puppets, Dinosaur Jr., the Replacements), 영국에서의 New Wave 생존자들(XTC, Robyn Hitchcock, They Might Be Giants, the Violent Femmes, Camper Van Beethoven, the Pixies), 지적인 포크락(Billy Bragg, 10,000 Maniacs), 그들의 음악에 팝적인 요소를 가미한 포스트펑크락커(the Cure, Siouxsie & the Banshees), 씬써싸이저에 기반한 댄쓰팝 밴드(New Order, Depeche Mode), 그리고 귀를 찢는듯한 키타 소음에 팝훅을 뒤섞은 밴드(the Pixies, the Jesus & Mary Chain)에 이르기까지 소위 지적인 청취자가 좋아할만한 갖가지 조류의 인디펜던트 음악을 아우르고 있었다.

이후 메인스트림의 편입된 스타들은 U2, Peter Gabriel, Sting 등을 들 수 있다. College Rock의 전성기는 역설적으로 이후 Nirvana가 1991년 메인스트림을 격파하면서 끝을 맺었다. 대학가의 래디오 선곡은 메인스트림의 그것과 흡사해졌고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얼터너티브/인디 밴드들은 땅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버렸다.

주요앨범들

The English Beat: I Just Can’t Stop It [1980]
Jane’s Addiction: Ritual de lo Habitual [1990]
Tracy Chapman: Tracy Chapman [1988]
Marshall Crenshaw: Marshall Crenshaw [2000]
XTC: Fossil Fuel: The XTC Singles 1977-1992 [1996]
Sonic Youth: Sister [1987]
Violent Femmes: Violent Femmes [1983]

AllMusic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