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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 Shop Bo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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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shopboys turku finland 1997a” by Mrdisco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Neil(본명: Neil Francis Tennant, 54년 생)과 Chris(본명: Christopher Sean Lowe, 59년 생)는 1981년에 만나 서로가 추구하는 음악성이 유사함을 알고 처음에는 West End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그 전에 Neil은 1 TV Books나 Smash Hits 같은 대중지의 기자였으며 Chris는 밴드 활동을 하며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했었다. 그 후 ’83년 미국의 댄스 뮤직 프로듀서이며 작곡, 편곡에 능한 Bobby Orlando을 만나 레코드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Neil의 나이가 31세 이었을 때 Neil은 본격적으로 음악을 하기위해 싱글을 발표했었던 레이블 Epic을 떠나 ‘Parlophone’으로 이적하면서 Smash Hits (매주 50만부 이상씩 팔리는 최고 부수의 청소년용 음악 잡지)을 떠났다.

명 프로듀서 Stephen Hague (New Order, Siouxie & The Banshees, Erasure의 프로듀서)의 터치로 재 녹음된 싱글 “West End Girls”는 단숨에 영국 차트 No.1 그 후 미국, 캐나다 등을 휩쓸며 세계 각국에서 1위를 기록했다. (이 곡은 최근에 East 1 DJ Space 등 여러 밴드들에 의해 리메이크 됨) 1위를 차지한 기분이 어땠냐는 질문에 “그냥 아무렇지도 않다. 그저 차 한잔 마시는 기분이다.”라고 쉽게 말하는 대단한 배짱을 지닌 Pet Shop Boys는 그 후로도 여러 번 차를 마시는 기분을 경험했다. 즉 No.1 싱글 들을 포함한 수많은 히트 곡 들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love Comew Quickly, opportunities로 시작되어 heart, It’s A Sin, always On My Mind를 지나 최근의 dj Culture와 was It Worth It?까지 무려 20여 곡 정도를 히트시켰으니 대단하다 아니할 수 없다.

앨범 “Please”, “Actually”, “미니 LP Disco”, “Introspective”, Behaviour” 그리고 베스트 앨범 “Discography” 그리고 앨범 타이틀을 한 단어로 만드는 실험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은 앨범 타이틀을 간단하고 별 뜻 없어 보이지만 실은 복합적인 의미로 쓸 수 있는 단어들로 만든다. 간단하나 그 앨범의 성격에 적합하고 자주 일상 생활에서 쓰이는 단어들이다. 온갖 비웃음을 들으며 30세가 넘는 나이에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프로 아티스트의 길로 들어서 결국 최정상의 위치에 군림할 줄이야 그 누가 알았으랴만은, 그의 이러한 성공은 닐을 따르는 많은 후배 아티스트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면 그 보상을 받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다. ’87년 Pet Shop Boys는 BPI Awards에서 west End Girls로 최우수 싱글상을 수상했고 또한 Ivor Novello Awards에서 같은 곡으로 Best International Hit 상을 수상했다.

Pet Shop Boys는 Music Video에도 대단한 정성을 들인다. “Television”, “It Couldn’t Happen Here”, “Live” 싱글 모음인 “Videography”까지 이들의 비디오는 위트 있고 때로는 차가운 느낌과 함께 조롱 섞인 말, 보통의 비디오와는 틀린 분위기와 전개방식, 연극적 구성, 다루기 꺼리는 AIDS나 Homo Sexual, Prostitution 등을 주제로 한 풍자적인 것들이 많다. 비디오에 관계된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함께 그 동안 음반을 제작하면서 많은 행운이 따랐다. 최고의 프로듀서들인 Stephen Hague, Julian Mendelsohn, Lewis A. Martinee, Trevor Horn, Harole Faltermeyer, Brother In Rhythm 등이 기꺼이 Per Shop Boys의 음악 제작에 참여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모두 좋게 나타났다.

어느 정도 자신들의 능력에 확신을 갖게 되자 이들은 주위에서 물밀듯이 밀려오는 제작 참여 요청을 신중히 고려, 서서히 다른 아티스트들의 음반제작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88년 영국 밴드 Eighth Wonder의 첫 히트 싱글 I’m Not Scared를 쓰고 프로듀스 해 주었으며, 싱글 what Have I Done To Deserve This에 참여한 Dusty Springfield에게 고마움을 느껴 Dusty의 새 싱글 nothing Has Been Proved를 ‘Julian Mendelsohn’과 공동으로 프로듀스 해 주었고 ‘Liza Minelli’의 싱글 losing My Mind에 이어 앨범 “Results”를 ’89년에 역시 Julian과 함께 제작했고 Dusty의 새 싱글 in Private를 제작했고 앨범 “Reputation”의 절반 가량을 담당했다.

또한 Neil의 음악에 큰 영향을 주었던 밴드인 New Order 출신의 Bernard Sumner와 The Smiths의 Johnny Marr가 만든 프로젝트 밴드 Electronic의 앨범에도 참여 getting Away With It과 parience Of A Saint에 게스트 보컬로 한 몫을 했으며 영화 “Cool world” 삽입곡인 Electronic의 싱글 disappointed에도 참여하였으며 최근에 인기를 끌었던 영화 Crying Game의 사운드트랙에 참여하여 영화를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진정한 엔터테이너, 대기만성형의 천재들 Pet Shop Boys 이제는 너무나도 친숙한 이름이 되어버린 영국밴드 Pet Shop Boys. 이들은 기존의 음악계에 파문을 일으키며 등장한 센세이셔널한 듀오이다. 대중적인 인식으로는 고급스럽지 않은 댄스 뮤직을 고급스럽게 만들었으며 심각하지 않았던 가사를 심각하게 하였고 사회성 짙은 메시지를 통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는 얼마 안 되는 의식 있는 아티스트들의 하나이다. Pet Shop Boys는 아마도 대부분의 국내 팝 팬들에게는 외국에서 큰 히트를 몇 개 기록한 평범한 댄스 뮤직 밴드로 인식되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위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는 훨씬 높은 곳에 있다. 그것은 이들의 히트곡들의 차트 순위 외에도 비평가들의 격찬,콘서트에서의 대단한 열기, 팬들의 환호가 다른 밴드들과는 비교가 안되게 크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출처 : http://user.chollian.net/~sory1316/

디스코그래피

1986 Please (EMI America)
1987 Actually (EMI America)
1988 Introspective [US] (EMI America)
1990 Behavior (EMI America)
1993 Very (Capitol)
1993 Relentless (Parlophone)
1994 Very/Relentless (EMI America)
1994 Seriously [CD/Vinyl Single] (Capitol)
1996 Bilingual (Atlantic)
1999 Nightlife (Sire)
1999 Nightlife [Limited Edition] (Sire)
2000 Mini (EMI)
2000 Bilingual (Sire)
2002 Release(Parlophone)
2005 Back to Mine(DMC)
2005 The Battleship Potemkin(EMI)
2006 Fundamental(EMI)
2006 Concrete [live](EMI)
2008 Concrete: In Concert at the Mermaid Theatre [live](EMI)
2009 Yes(Astralwerks)
2012 Elysium
2013 Electric
2016 Super
2020 Hotspot

링크
팬페이지
그들의 음악파일을 얻을 수 있는 곳
The Pets Files

Pet Shop Boys 소개글 하나

“난 PSB를 좋아해”
“그래? 그 사람들 게이 아닌가?” (그리고는 수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상대편)

현대사회의 유행이나 흐름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특히 연예산업은 ‘변화’가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으면 대중들이 외면하기 때문이다. 몇십년간 음악활동을 하면서 꾸준히 음악성을 인정받고 있는 아티스트들도 마찬가지이다.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변화하려고 노력한다. 현 팝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대에 맞는, 그리고 아티스트의 특성을 살린 그러한 음악적 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이러한 변화가 요구되는 가운데서도 PSB는 1980년대 초반부터 신디사이저를 이용한 디스코/테크노 사운드를 주무기로 치열한 팝시장의 경쟁에 나서서 큰 성공을 거두며 현재까지도 단 한번의 음악적 외도 없이 그 음악만을 고집해오고 있다. 그 결과로 현재 Synth Pop계에서 PSB의 존재는 매우 독보적이다.

그들이 86년 두 번째 싱글 ‘West End Girls’를 들고 나와서 미국 차트 1위를 차지하던 때 필자는 갓 중학교 1학년이었다. 그 당시 유일하게 빌보드 차트를 소개해주던 ‘2시의 데이트’의 애청자였던 나는 그들의 노래를 듣고는 단번에 반해버렸다. 잔잔한, 어찌 들으면 힘없이 중얼거리는 듯한 보컬, 그러한 보컬을 탄탄히 받쳐주는 영국식 테크노 사운드. 당시 미국 팝을 주로 듣던 나로서는 새로운 경험이었지만 곧 듀란듀란, 컬쳐클럽등 영국의 뉴웨이브 사운드에 마음을 뺏긴 나는 더 이상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1994년, 미국에 잠시 머물면서, 틈만 나면 레코드가게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어느 날 우연히 플라스틱마저 온통 주황색으로된, 매우 눈에 띄는 시디케이스를 진열대에서 발견하고는 무심코 집어들고 그것이 바로 펫샵보이즈의 그 당시 최신앨범인 였다. 그 앨범에서 가장 유명했던 싱글 ‘Go West’의 사운드가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손에 들었던 앨범을 내려놓을까 하다가 특이한 케이스를 보고 구입을 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은 광(狂)적인 팬이 되어 있다니 참 아이러니 하다. 아무튼 우연히 그렇게 집어든 시디에 온통 정신을 빼앗겼고, 그제야 펫샵보이즈의 이전 앨범들에게도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디스코/테크노만을 꾸준히 추구해온 그들의 음악세계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음을 깨달았다.

보컬을 담당하는 1954년생의 Neil Tennant는 역사를 공부한 사학도이고, 키보드를 연주하는 Christopher Lowe는 1959년생으로서 건축을 공부했다고 한다. 그들은 81년도에 팀을 결성했고 1983년 프로듀서 Bobby Orlando를 만나 첫 녹음을 하는데 그때 녹음한 곡이 ‘One more chance’와 ‘Opportunities’ 그리고 ‘West end girls’였다. 이들의 음악은 곧 런던을 중심으로한 영국의 클럽과 디스코에서 많은 팬들을 확보하게 되고 1985년에 그들은 EMI와 계약, 첫 싱글 ‘Opportunities’ (Let’s make lots of money)를 발표하게 되나 마이너 히트에 그치고 만다. 그 다음해 다시 발표한 싱글 ‘West end girls’로 영국을 비롯한 유럽, 그리고 마침내는 미국마저 정복하게 된다. 1986년 봄에 발표된 그들의 첫 앨범 에서의 음악적 방향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Synth pop(신디사이저를 위주로한 테크노팝)이 바로 그것이다. 그후 1987년 국내에도 잘 알려진 싱글 ‘It?s a sin’을 필두로한 앨범 , 그리고 1988년의 앨범 에서의 싱글 ‘It?s alright’, ‘Always on my mind’, ‘Domino dancing’ 등 역시 데뷔 당시의 음악적 성향을 그대로 간직한 앨범들이었다. 펫샵보이즈의 천재성이 가장 잘 드러난 앨범은 아마도 1990년 발표한 앨범 가 아닌가 싶다.

게이로 커밍아웃하다.

이 앨범에서는 히트싱글인 ‘Being boring’과 ‘So hard’에서 나타난 우수에 찬 테크노 사운드가 압권이다. 흥겨운 테크노사운드 외에도 그 뒤에 숨겨진 어두운 색깔 역시 간과 할 수 없는 그들의 인기 요인이다. 이러한 암울하고 우수에 서린 사운드에는 분명히 원인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필자 나름대로 열심히 그들의 자료를 모아보았다. 그러던 가운데 충격적인 소식 하나가 눈에 띄었다. 바로 닐 테넌트와 크리스 로우가 대중 앞에 자신들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당당히 발표한 것이다. 어떤 아티스트가 음악을 만들 때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것이 내면의 표출이 아닐까한다. 본의든 아니든 그 아티스트의 음악에는 그 아티스트의 생각과 자아가 담겨있는 것이다. 그들의 사회 비판적인 가사와 우울한 테크노사운드, 동성애를 노래한 사랑 노래등은 Gay문화가 잘 발달한 영국사회에서도 어쩔 수 없이 외면당하고 비판당해야 하는 동성애자로서,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1991년 그들은 이제까지의 활동을 결산하는 의미의 히트곡 모음집인 를 발표했다. 그들이 게이임을 떳떳이 밝힌 후에 그들은 앨범 의 발표로 이제까지 음악적 방향의 큰 전환을 꾀한다.

이제까지의 그들의 어두운 일면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밝고 긍정적인 사운드를 들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 비판에 초점을 두었던 그들의 메시지는 좀더 과감하게 자신들의 삶과 사랑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미국 게이 밴드의 대명사인 Village People(YMCA로 유명한)의 ‘Go west’를 리바이벌한 곡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서 West는 San Francisco를 의미한다는 의견이 지배적) 앨범 는 또 한번 세계적으로 Pet Shop Boys 열풍을 일으켰고 히트곡 ‘Go west’, ‘I wouldn’t normally do this kind of thing’, ‘Can you forgive her’ 등은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한 뮤직비디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수작들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1995년에는 그 동안 발표한 싱글의 b-side에 수록해왔던, 그들의 천재성이 번득이는 다소 실험적인 테크노로 구성된 2장짜리 앨범 로 비평가들에게 인정을 받으며 한편 팬들에게는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후 세계 순회공연, 데이빗 보위 등과의 음악활동 등의 재충전의 기간을 마치고 1996년에 최근 앨범인 을 발표, 서정적인 멜로디가 돋보이는 ‘Before’와 밝은 분위기의 ‘Se a vida e’가 히트를 기록했다.

PSB에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라이브 공연이다. PSB는 기타,드럼, 베이스, 키보드, 보컬로 이루어진 전통적인 밴드가 아니고 99% 프로그래밍과 반복에 의지한 Synth Pop밴드이기 때문에 무대에는 항상 덩그러니 키보드 하나가 놓여져 있을 뿐이다.

PSB가 라이브를?

첫 세계공연이었던 ‘Performance’에서 PSB는 이 빈 공간을 뮤지컬을 연상시키는 실험적인 내용의 ‘연극’으로 채웠다.

이들의 이러한 시도는 ‘PSB가 라이브를?’ 이라며 비관적으로 바라보았던 비평가들 사이에서 큰 호평을 받았고 뮤지션들의 라이브가 반드시 큰 볼륨의 음악과 흥분한 팬들로 이루어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것이었다. 대부분의 게이 뮤지션들이 앨범자체에는 그다지 그들의 성향을 드러내지 않지만 팬들과 직접 호흡하는 공연에서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보여주기 마련이다. 앨범 Very발표 후 가진 세계공연 ‘Discovery’는 ‘Performance’와는 달리 전용 콘서트 구장에서 벌인 대규모의 공연이었다. 10여명의 남녀댄서들이 거의 나체로 등장하여 동성애를 연상시키는 춤동작을 선보이는 등 이 공연에서 PSB는 매우 게이적인 성향을 보여준다. Bilingual발표 이후 런던의 Savoy극장에서 작은 규모로 가졌던 공연 ‘somewhere’에서도 남성흑인 댄서 한 명이 등장하는데 예외 없이 여성으로 분장했다가 남성으로 분장했다가 하면서 무대를 꾸며나간다.

현재 PSB가 진행중인 프로젝트중 게이 커뮤니티에 의미 있는 것이라면 1950년대 당시 찰리 채플린에 견주될 정도로 연극과 음악, 영화 등에 있어서 두각을 보인 만능 엔터테이너였던 영국의 Noel Coward 추모앨범 <20th century blues>(이 앨범은 Noel Coward가 만든 곡들을 엘튼존, 폴 메카트니, PSB등의 거물급 뮤지션들이 다시 녹음한 앨범이다)의 기획을 Neil Tennant가 맡았다는 것이다. Noel Coward는 당시 시대가 시대인 만큼 대중에 공개되길 꺼려했지만 그 자신은 게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여 년이 넘는 활동기간동안 꾸준히 자신들의 음악만을 고집해온 Pet Shop Boys. 그래서 그런지 그들의 85년 데뷔앨범이나 최근의 앨범이나 사운드나 구성 면에서는 아무런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이다. 가히 시대를 초월한 그들의 음악세계에 존경심을 감출 수 없다. PSB는 모르긴 몰라도 게이 커뮤니티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밴드가 아닐까 생각한다. David Bowie나 Elton John과 같은 거물급도 있지만 사실 그들은 ‘일반을 가장한 이반’의 이미지가 강하다. 노래 내용도 평범한 일반들의 것이고 그들의 생활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소문도 그들 주위에 허다했다. 하지만 PSB는 가십으로 유명한 런던연예계에서 성실한 게이뮤지션으로서 자신들의 삶과 사랑을 노래하면서 범 세계적인 인기를 얻으며 현재도 쉬지 않고 창작활동을 하는 거의 유일한 밴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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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팝

들어가며

일반인 내가 하이텔의 동성애 모임인 “또사모”에 과감하게 가입하기까지는 하나의 작은 사건(?)이 원인이 되었다. 내가 몸담고 있던 음악동호회에서 여름을 맞이한 여름 특집감상회를 어떤 주제로 할까 고민하던 차에 내가 제안했던 ‘게이 아티스트 특집’이 의외의 반발에 부딪쳐 무산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한국이 문화적 폐쇄주의 사회라는 것은 철들기 시작한 사춘기 시절부터 체험하고 있었지만 대다수가 X세대라 일컬어지는 20대 초반, 더욱이 외국의 음악을 폭넓게 접해오며 좀더 개방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한 그 모임에서마저 “사회에 민감한 문제로 우리 동호회의 이미지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반대 주장이 만연되어 있다는 사실은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큰 충격이었다.

어려서부터 가요보다는 팝 음악을 좋아했던 나는 1980년대 전 세계를 휩쓸었던 뉴웨이브에 매료되었고, 전세계 소녀 팬들의 연인이었던 듀란듀란(Duran Duran), 컬처클럽(Culture Club) 역시 나의 우상이며 연인이었다. 1980년대 뉴웨이브의 유행은 유니섹스(Unisex)의 열풍을 몰고 왔었다. 빨간 립스틱, 짙은 마스카라, 하얗게 화장한 얼굴, 나풀거리는 블라우스 등은 그 당시 뉴웨이브 밴드들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10대 초반부터 이러한 뉴웨이브 밴드에 관심을 가졌던 나는 그래서인지 어려서부터 동성애에 대한 놀라움이나 반감이 없었다. 계속 음악에 관심을 기울이고 정보를 수집하면서 뛰어난 음악성으로 인정받는 많은 영국 아티스트들 중에 상당수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개인적으로 그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보다는 그들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밝히고 난 직후의 매스컴이나 팬들의 반응이 더 흥미로웠던 것이 사실이다.

팝 음악계 게이 아이콘의 역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가장 대표적인 영국의 게이 아이콘(Gay Icon)을 꼽는다면 1960년대 후반 영국에서 빛을 보기 시작한 글램락에서부터 시작한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를 들수 있다. 호리호리한 몸매, 뚜렷한 윤곽의 얼굴, 짙은 화장, 몸매가 드러나는 원피스도 마다하지 않는 그의 과감함은 그 당시 기성세대들에게 큰 충격이었고 젊은 세대들에게는 신선한 충격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의 이러한 이미지는 1980년대 뉴웨이브 밴드들에 의해 좀더 과감한 형태로 재창조되기도 했다. 데이비드 보위는 Bisexual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에티오피아의 국민영웅인 세계적인 슈퍼모델 ‘이만’의 남편이지만 그는 첫번째 부인(첫번째 부인도 양성애자로 알려져 있다)과의 사이에서 현재 20대 중반의 장성한 아들을 하나 두고 있기도 하다. 과거 영국의 주간지에 부인과 함께 주말이면 게이 바에 함께 손잡고 들어가서 나올 때는 따로따로 동성 파트너와 손잡고 나와서는 하루 밤을 따로 보낸 후 아침에 집으로 귀가한다는 기사가 실린 적도 있었고, 그의 부인이 남편과 믹 재거(Mick Jagger. 롤링스톤즈 리드보컬)가 한 침대에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기자들에게 토로하기도 할 정도였다. 데이비드 보위와 더불어 동성애자(혹은 이성애자)로 알려져 있는 영국의 거물급 아티스트로는 엘튼 존(Elton John), 조지 마이클(George Michael), 그리고 그룹 퀸(Queen)의 리드보컬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등이 있다.

1960-70년대의 대표적인 Gay Icon이 데이비드 보위였다면 1980년대에는 ‘여자보다 더 예쁜’ 컬쳐클럽의 보이 조지(Boy George)를 빼놓을 수 없다. 컬쳐(Clture Club)의 드러머와 연인 사이였던 그는 데뷔 후 몇 년간은 공식석상에서 동성애자가 아니냐는 질문에 “I never sleep with man”이라는 강한 어조로 동성애자임을 적극 부인하고 나섰으나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한 직후의 인터뷰에서 수줍으나 상기된 표정으로 “I love you America! You realize a real drag-Queen when you see one.”라는 한마디 말로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공식석상에서 밝힌 셈이 되었다. 후에 그는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힘들었던 시간을 회상하며 세상에 공개한 후의 홀가분함을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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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bian Angels” by Diricia De Wet from Johannesburg, South Africa – Lesbian Angels
Uploaded by ZH2010.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1980년대 후반의 변화

1980년대 초반의 뉴웨이브가 겉치장을 위주로 음악에 담겨진 메시지와는 상관없이 ‘보여주는’ 게이 문화를 대표했다면, 1980년대 후반에서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영국의 synth-pop(일렉트릭 기타, 드럼, 베이스보다는 프로그래밍 된 드럼과 신디사이저를 주로 사용한 팝)을 구사하는 몇몇 게이밴드들은, 외모로 보여주는 것보다는 노래에 담긴 메시지로서 Gay-pop의 한 주류를 형성해 왔다고 할 수 있다. Gay-pop을 정의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티스트 자신들과 그 아티스트와 그들의 음악을 추종하는 팬들의 섹슈얼리티에 있다. 아티스트 자신이 게이임을 밝힌 경우 그들의 음악을 gay-pop으로 분류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느 아티스트의 팬들의 대다수가 게이라면 그들의 음악은 Gay-pop으로 분류된다. 대표적으로 예쁜 외모와 매력적인 몸매가 음악성보다 강조되어졌던 소년 그룹(‘테이크뎃’이나 ‘보이존’)들은 멤버들의 섹슈얼리티와는 상관없이 겉으로 드러나는 열광적인 소녀 팬들 이외에 20세 이상의 남성 게이 팬들도 상당한 숫자였기에 Gay-pop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렇게 아티스트 자신이나 그들의 팬들의 섹슈얼리티 외에 중요한 음악 자체에도 나름대로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 특징이라면 런던의 언더그라운드 게이클럽이나 바에서 단골로 흘러나오는, 춤추기에 적당하고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빠른 템포, 서정적이며 흥겨운 분위기의 멜로디, 무겁지 않은 베이스라인, 뛰어난 가창력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보컬 등이 대표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주목할 만한 사실로 Gay-pop그룹의 대부분은 자신들이 게이라는 사실을 대중에게 공개해왔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기존 팬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게이라는 사실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고, 이러한 대중 앞의 공개는 오히려 새로운 팬들을 확보하는 촉매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게이라는 사실만으로 하루아침에 등을 돌리는 팬들도 물론 있었다(이러한 예는 남성 팬들에게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대표적인 Synthpop그룹으로 자신들이 게이임을 밝히고 활발히 활동하는 펫 샵 보이즈(Pet Shop Boys), 이라주어(Erasure)등은 대표적인 영국의 Gay-pop 아티스트들로 손꼽힌다.

섹슈얼리티에 상관없이 전 세계적으로 사랑 받고 있는 대표적인 그룹인 펫 샵 보이즈는 엘튼존, 퀸의 프레디 머큐리와 더불어 ‘거물급’ 게이 뮤지션에 속한다. 닐 테넌트와 크리스 로우의 Pet Shop Boys는 한때 두 멤버 사이의 염문설도 있었으나 인터뷰에서 서로가 서로의 취향이 아니라는 농담조의 발언으로 자연스럽게 그 염문설을 부인하기도 했다. 솔직하고 담담한 가사로 삶과 사랑뿐만 아니라 전쟁, 기아 등의 사회문제를 노래하기도 하는 펫 샵 보이즈 음악의 큰 특징은 오케스트레이션과 신디사이저를 기본으로 한 친숙하며 흥겨운 멜로디에 묻어 나오는 서정성과 우울함이다. ‘흥겨움과 우울함’, 이 두 가지가 자연스럽게 공존하기란 어려운 일인데 이들은 이 두 가지를 그들의 음악 속에 자연스럽게 조화시키고 있다.

게이 이미지의 보편화

Gay의 영어 사전적 뜻은 Light-hearted, cheerful, brightly coloured. 즉 ‘흥겨움, 즐거움, 밝음’이다. 선진사회의식의 대표 격인 영국 사회에서조차도 동성애자들은 기득권을 쥐고 있는 이성애자들 중심의 기존 사회로부터 눈에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외면, 멸시, 차별 등을 받아 왔음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Pet Shop Boys의 ‘즐거우나 서정적이고 우울한’ 분위기의 음악은 이러한 사회성향에 비추어 자연스레 형성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현 시대 예술의 여러 분야에서 팝 음악처럼 다양한 섹슈얼리티를 큰 저항이나 거부감 없이 폭넓게 수용하는 분야도 드물다. 아티스트 개인의 섹슈얼리티와는 상관없이 Homosexual, Bisexual, Transsexual의 이미지는 매우 보편화 되 있다. 특히 최근 제작되는 뮤직비디오에서는 이러한 성향이 뚜렷하게 보여진다. 팝 음악은 여러 가지 문화 형태 중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시대별로 그 당시 진보적인 젊은이들의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과 욕구를 표출하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미 팝 음악의 큰 줄기로 떳떳하게 자리 잡고 다른 분야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Gay-pop은 단지 음악으로서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도 ‘소수’로 차별대우를 받는 전 세계 동성애자들의 작은 목소리를 크게 높일 수 있는 효과적인 매체로서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출처

Frankie Goes To Hollyw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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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kie Goes to Hollywood in London cropped” by Jane McCormick Smith – Jane McCormick Smith.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1970년대 중반 런던의 패션디자이너이자 Bondage Wear(주로 성적소수자들이 성행위시 입는 가죽끈으로 된 복장(?) : 역자주) 판매상이었던 Malcolm McLaren은 밴드를 하나 조직하였다. 그는 그 밴드에서 취미삼아 노래를 부를 생각이었으나 곧 매니저를 선택하는 쪽으로 선회하였다. McLaren은 밴드의 이름을 Sex Pistols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다. 그들의 음악이 아주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들의 성난 듯한 행동은 즉각 언론의 관심을 끌었고 God Save The Queen은 영국 챠트 1위까지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이 시기에 이미 British Radio는 그 곡을 금지곡 리스트에 올려놓고 있었다.

80년대 팝씬이 70년대 중반의 펑크시대와 다소 거리가 있는 가벼움의 시대라 할 수 있지만 80년대 팝씬의 몇몇 현상들은 이러한 Sex Pistols의 성공스토리와 상당히 비슷했다. 다만 이 시기 막후 지휘자는 Trevor Horn이었다. The Buggles와 Yes에서 활동했던 그는 이미 ABC의 음반을 능숙하게 프로듀싱하여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는 1983년 Frankie Goes to Hollywood를 발견하고 그들의 자유분방한 힘과 적당한 오만함, 그리고 성적 에너지의 발산에서 상업적인 잠재력을 발견하고 그들의 프로듀서를 자청하고 나섰다.

‘Frank Sinatra가 헐리우드에 가다’라는 낡은 잡지의 헤드라인에서 그룹명을 딴 이들은 보컬리스트 Holly Johnson, 기타리스트 Brian Nash, 드러머 Peter Gill, 베이시스트 Mark O’toole, 그리고 여기에 마지막으로 보컬리스트 Paul Rutherford가 가담하여 5인조 진용으로 출발하였다.

20대가 갓 넘은 이들 다섯 사내들은 가죽옷을 입고 삐뚤어진 섹스의 이미지를 노출하여 BBC로부터 방송 금지를 당해야 했지만 Relax와 Two Tribes를 1984년 7월 14일자 영국 챠트에 나란히 1,2위에 올려 놓으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두 곡 모두 넘버 1을 차지하는 영국에서의 대히트에 이어 미국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비디오로 발매된 Two Tribes는 링에서 레이건 대통령과 소련의 체르넨코 서기장이 싸우는 장면과 닉슨 대통령과 케네디의 묘사가 적나라하게 펼쳐져 화제가 되었으나, 영국에서 심야 이전 방영이 전면 금지되고 미국 TV에서는 재편집 방영되는 사태를 빚었다. 이들은 이 후 1985년 1월에 Relax를 재발매하여 또다시 히트를 기록하였고 4월에는 Welcome To The Pleasuredome를 크게 히트시켰다.

Frankie는 2년뒤 두번째 앨범 Liverpool을 내놓았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신통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Sex Pistols가 그랬던것처럼 그토록 열광적인 반응은 차갑게 식어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Frankie가 Relax에서 써먹었던 Sex에 대한 주제는 Prince와 Madonna가 써먹기 시작했다.

디스코그래피
1984 Welcome to the Pleasuredome ZTT/Island
1986 Liverpool ZTT/Island
2000 Maximum Joy: 2000 Remixes Import

링크
frankiespleasuredome.co.uk

Eras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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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asure-andy-vince-wolfgangs-np” by Nancy J Price, Andwhatsnext at en.wikipedia – Originally from en.wikipedia; description page is/was here..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부드럽고 경쾌하게 시작되는 이레이저의 사운드는, 그 이름에서 주는 느낌과 실제 성향과는 약간 다르다!? 우선 신서사이저를 사용했다는 자체에서(밴드가 그것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는지는 나중의 문제로 남겨두자), 이미 우리에게 입력된 고정관념은, 따뜻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물론 반문할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신스팝 사운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을 때는, 이레이저라는 그룹은(물론 밴드가 아닌 듀오다) 테크노 밴드 일거라는 확신 아닌 확신에 차있었고, 신서사이저를 이용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디페시 모드의 빈스 클락이라는 선입견을 대입시켜 또 다른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레이저는 (디페시 모드와는 다른) 신스팝을 지향하고 있으며, 팝이라는 단어를 더 크게 써 넣어야 할 것 같은 사운드를 가지고 있는 듀오였다. 펫 샵 보이즈라는 듀오는 알아도, 이레이저라는 이름을 댈 경우 머리를 도리질 칠 사람은 적어도 전자보다는 훨씬 많을 것이다. 이레이저는 그만큼 대중적으로 확실하게 알려진 듀오는 아니다. 그렇다고 저 구석에서 먼지 털듯 끄집어 낼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벌써 디스코그래피를 길게 열거해야 될 정도의 경력을 자랑하는 이들은, 1985년 그룹 야주(Yazoo)와 디페시 모드(Depeche Mode)의 송라이터 빈스 클락(Vince Clarke)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레이저 전에 빈스가 생각한 새로운 프로젝트의 앨범은 10명의 싱어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한마디로 빈스 클락이 지휘하는 컴필레이션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10명이나 되는 싱어를 항상 거느릴 수는 없는 일이었고, 곧 오디션을 거쳐 앤디 벨(Andy Bell)을 영입했다.

물론 저 유명한 뉴 로맨스 최고의 권위자 디페시 모드의 빈스 클락에 의해 결성되어졌다는 데서 어느 정도 주위의 관심을 끌었겠지만, 이 듀오는 데뷔부터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였다. ‘Sometimes’ 같은 경우는 UK차트에 입성하자마자 2위에 오르는 쾌거를 낳았을 정도였다. ‘Drama!’, ‘Blue Savannah’, ‘Chorus’, ‘Love To Hate You’, 그리고 ‘Breath Of Life’와 같은 노래는 당시 유명한 보컬/신서사이저 듀오 펫 샵 보이즈와 나란히 라이벌 관계를 성립시키기도 했다. 소포모어 징크스에 걸려서 넘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으며, 앞날은 뻥 뚫린 고속도로였다. 1992년에 정규앨범이 아닌 EP [Abba-esque]마저 굉장한 바람을 불러일으킬 정도였으니, 이레이저라는 듀오가 내뿜는 매력은 듣지 않아도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실력이 된다고 쳐도 이들의 그칠 줄 모르는 승승장구에는 지독스런 운도 따랐던 것이 틀림없으리라….

1995년 드디어 변화는 찾아왔다. 빈스와 앤디의 실험적인 앨범 [Erasure]가 그것이었는데, 이 앨범은, 팬들은 둘째치고라도 이레이저 본인들에게도 놀라움을 가져다준 앨범이었다. 바로 70분 짜리 아트락 컨셉트 앨범으로, 어둡고 대담한 사운드 그리고 이들 듀오의 무형의 측면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아트락이라니! 당혹스러운 것은 당연했으나, 이전 상황에 비해 자신들도 의외라고 생각할 만큼의 플러스로 작용할 뿐이었다. 한번쯤의 외도는 신선한 것인가. 여러 장의 앨범을 발표하고, 매번 그 방향성에 있어서 어디로 튈지 몰랐다면 이레이저가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었을까. 물론 앨범발매를 목전에 둔 당시 상황에서는, 항상 관심의 대상으로서, 늘 새로움의 추구/발전의 양상을 꾀한다는 평가를 받았겠지만, 본인들 스스로에게 있어 부담감은 얼마나 컸을 것이며, 중심을 이루는 잣대는 어디로 갔는지에 대해 또 얼마만큼의 생각을 했어야 될 것인가. 결국 방향성에 있어 주체적인 잣대를 형성하고 있다면, 한번쯤의 전환도 필요하고 또 신선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막 이레이저는 바람을 쐬고 돌아왔다. 이번 앨범의 타이틀만 보고서도 대충 짐작은 했었다. [Loveboat]라…. 강한 팝적 성향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선에서는 특유의 사운드를 흘릴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이번 앨범의 초점이다. 매력을 끼워 맞추자니 좀 억지스럽긴 하지만, 그만큼 편안하게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평범하다는 것이 다소 아쉬움으로 남기는 하지만….

이하 중략, 핫뮤직 2000년 12월호 참조.

디스코그래피

1986 Wonderland (Sire)
1987 The Circus (Sire)
1988 The Innocents (Sire)
1989 Wild! (Sire)
1991 Chorus (Sire)
1992 Club (Mute)
1994 I Say I Say I Say (Mute/Elektra)
1995 Erasure (Elektra)
1997 Cowboy [US] (Elektra)
2000 Cowboy [Import Bonus Tracks] (EMI)
2000 Loveboat (Mute)

링크

VH.com
Fan Site
Erasure : Love B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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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asure Lin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