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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one Roses 武道館 公演 2017.4.22

‘살면서 언젠가 한번은 보고 싶다’란 생각했던 여러 콘서트 – 토킹헤즈 등등 – 중 하나를 이번에 도쿄 무도관에서 보게 됐다. 2017년 4월 22일 있었던 The Stone Roses의 콘서트. 작년에 계획됐었던 콘서트였고 티켓까지 구입해서 우편으로 받았지만, 불의의 사고로 – 유력한 설이 드러머 Reni의 부상설 – 콘서트가 취소됐다. 거기에다 열 받았던 게 티켓을 내 돈으로 다시 일본에 반송시켜야 환불을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 암튼 그때는 그래서 돌장미 콘서트 대신에 새질서 콘서트로 슬픔을 달래야 했다.

이번에는 ‘다시 공연이 취소되진 않겠지’라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일본에서 공연을 할 예정이었던 Echo & The Bunnymen의 프론트맨 이언 맥컬록이 – 아마도 점증되는 한반도의 전쟁 위기에 대한 공포 때문에 – 공연을 펑크 내고 도망가는 장면이 공연에서 목격됐다는 트윗을 보고 ‘아니 이거 다시 악몽의 재연이??’라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그래서 금요일 출발의 일정에도 혹시 결항에 대비해 금요일 공연이 아닌 토요일 공연 티켓을 – 이틀간의 공연이었다 – 구매하는 등 만전을 기했다.

공연장은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공연장의 하나인 부도칸(武道館). 건물 이름대로 무도대회가 자주 열리는 곳인지라 벽보에도 각종 무도대회의 포스터가 많이 걸려있었지만 – 그리고 무대 상단에는 일장기가 – , 뮤직러버에겐 역시 음악공연으로 유명한 장소일 뿐이었다. 4시 입장인데 3시쯤 도착했을 때에도 이미 많은 팬들이 몰려들어 기념품을 구입하고 공연을 알리는 플래카드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었다. 단 두 장의 정규앨범을 낸 80년대 밴드가 이 정도의 관중동원력이 있다는 것, 역시 아이콘은 아이콘이었다.

다섯 시로 예정된 공연은 다섯 시 십오 분쯤 시작됐다. 이러저러한 구차한 멘트 없이 바로 I Wanna Be Adored로 시작된 공연은 중간 중간의 짧은 일어를 섞은 Ian의 감사인사를 제외하고는 한 시간 반 가량을 – 멤버 소개도 없이 앵콜도 없이 – 1집 위주에 2집의 수록곡을 간간히 섞어 성실하게 공연해주었다. John Squire는 팬들의 “존~조~온~”의 애절함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하게 신발만 보며 연주해서 – 딱 한번 엄지를 척 들어줬다 – 슈게이징의 원로다운 무대매너를 보여주었다.

뭐 팬들의 입장에서야 노래를 엑기스로 불러주는 만큼 더 좋은 선물이 어디 있겠는가? – 그런데 거기에다 Ian은 공연 초반 흔들던 막대 탬버린을 앞좌석에 던져주더니 이후로도 한 대여섯 개는 더 던져주고 Reni는 공연 후 드럼스틱과 입었던 조끼를 던져주는 왕대박 선물을 – 암튼, 이십대로 보이는 이들부터 오십대 이후로 보이는 이들까지 세대를 초월해서 돌장미의 노래에 환호한 공연이었고, Made of Stone에서는 일본 공연에서는 흔치 않았을 것 같은 떼창 장면까지 연출하였다.

여담으로 내 왼쪽에 서있던 – 좌석제였으나 공연 시작하자마자 모두 일어나 자리에 앉질 알았다 –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의 청년은 좀 크리피했는데 모두들 춤을 추며 공연을 즐기는 와중에 묵묵히 서 있다가 돌장미 2집 수록곡을 연주할 때만 아이폰을 들어 비디오를 찍곤 했는데 그마저도 살짝 보니까 John만 줌인하여 찍고 있었다. 오다쿠는 장르도 매우 스페시픽하다곤 하는데 그의 장르는 아마도 돌장미 2집의 John 의 기타 연주가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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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왔다


기념촬영하는 팬들


돌장미 등장


공연


Ian 의 막춤


John? Jesus?

Andy McCluskey의 Unknown Pleasures에 관한 사연

OMD의 Andy McCluskey가 좋아하는 앨범 들에 관한 이야기 중 Joy DivisionUnknown Pleasures에 관한 사연을 번역하여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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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asvegas의 첫 앨범 이전에, Unknown Pleasures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락 앨범이었다. 내 아들은 열다섯 살에 락음악에 빠져 들었는데 불행하게도 그는 미국에 살고 있었고 – 그의 엄마와 나는 헤어졌다 – 우리는 몇 년 전에 여행을 하기도 했다. 그는 위대한 Nirvana를 사랑했었고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내게 Linkin Park와 Limp Bizkit을 들려주었고 나는 “왜?”라고 물었고 그는 “베이스와 드럼이 좋아요”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USB 케이블을 내 폰에 꽂아 Unknown Pleasures를 틀고서는 “이제부터 30년 전에 연주된 드럼과 베이스를 들을 텐데, 다 듣고 네가 빌어먹을 Limp Bizkit을 다시 듣고 싶다고 말한다면 난 너를 차 밖으로 걷어차 쫒아내겠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드럼부터 시작했는데 – 왜냐하면 그는 Stephen Morris를 정말 좋아했기 때문에 – Unknown Pleasures는 정말 드럼에 관한 모든 것이었다. 그건 당신의 기초적인 록 드러밍과 같지 않다. 그는 균열적인 패턴으로 드럼을 친다. Stephen Morris는 정말로 일종의 원형을 창조했다. 그 다음에 Hook의 베이스다. – 대부분 노래에서 빌어먹을 리드 베이스 기타인 – 이 앨범에서 사실상 Hook의 베이스 연주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Barney가 화낸 것이 이상할 것 없다. 왜냐하면 기타는 저 멀리 던져지고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컬의 방해가 되었다. – 당신은 드럼과 베이스와 Curtis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기타는 좌측과 우측에서 약간의 색조만 더할 뿐이다. 내 아들은 베이스 플레이어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베이스 주자여서가 아니라 Peter Hook이 너무 빌어먹게 쿨했기 때문이다. 너무 웃긴 게 Hook이 샌디에고에서 출판 싸인 행사를 가졌을 때 아들이 그를 보러 갔었다. James는 “엄마가 당신에게 안부 전해달래요.” 그는 이어나갔다. “네?”, “네. 당신이 엄마가 열일곱 살일 때 Pretty In Pink 시사회에서 그녀를 돌봤다는데요.” 겉으로는 Hook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그는 계속했다. “너 내 아들은 아니지 그지?” 그리고 내 아들은 “저는 Andy McCluskey의 아들이에요. 당신이 Pretty In Pink 시사회에서 그가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 그 여자친구를 돌봤다는 이야기에요.” 그리고 Hook는 대답했다. “오 예!! 휴!!” [미친 듯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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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개의 상징적인 앨범 커버에 관한 뒷이야기 : Talking Heads의 Speaking In Tongues

Robert rauschenberg speaking in tongues talking heads.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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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것은 고전적인 커버라기보다는 예술계의 괴짜에 가깝다. 그렇지만 이것이 오늘날의 채색으로 인쇄되어 제공되곤 하는 특판 레코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미상을 수상한 Talking Heads의 Speaking In Tongues의 예술작업은 청록색, 심홍색, 노란색으로 인쇄된 파운드 사진들(found photos)로 점재(點在)되어 있다. 모든 것들은 라우센버그(Rauschenberg)1가 1967년 내놓은 조각 “리볼버”를 근거로 하였는데, 이 작품은 관람자가 스위치를 켜면 중심축을 중심으로 도는 다섯 개의 플렉시글래스 디스크로 구성되어 있다. 제조상의 어려움 때문에 LP는 5만 개 한정판으로 인쇄됐고 높은 가격의 수집품목이 됐다. Byrne은 많은 이들이 도움으로 그 앨범을 디자인했다.

겹치는 작업의 비주얼 효과를 얻기 위해 라우센버그는 보프리(Beaupré)가 “있는 그대로 그리고 비유적으로 농축적인 화려한 색채의 비닐 레코드”라고 정의한 바, 아세테이트2위에 콜라주 작업이 된 사진들을 인쇄했다. 문자 파편들은 거친 패턴들을 별도의 섹션으로 분할하였고, 각각의 부분을 다음 것들로부터 구분하기 어렵게끔 이상한 각도로 형태들이 교차한다. David Byrne의 음악 스타일과 많이 유사하게도 결과는 혁신적이었으며 손쉬운 범주화를 거부하는 테크닉의 혼합이었다. Byrne은 타임스에 “Bob 주위에 있는 것은 종종 어떤 종류의 황홀한 약물 상태에 있는 것과도 같아요. 그는 그의 주위에 이들에게 상자 바깥을 생각하도록 영감을 줄 뿐 아니라 상자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게 하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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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팝아트 예술가 Robert Rauschenberg
  2. 투명 플라스틱 필름

David Byrne의 토킹헤즈 재결합에 대한 최근 견해 급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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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킹헤즈가 1991년 영원히 해산한 이후 이 미국의 락커들의 완전체로서의 재결합은 가능성이 낮거나 거의 없는 것이었다. 2002년의 분기별 락앤롤 명예의 전당의 사전 행사에서의 운좋은 출연자로서의 짧은 공연과 제리 해리슨, 크리스 프란츠, 티나 웨이마우스의 재결합에 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프론트맨이었던 데이빗 번은 지속적으로 경멸 섞인 톤으로 이를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The Creative Independent 와의 새 인터뷰에서 이 주제에 대한 번의 입장은 다소 부드러워졌다. 그는 인터뷰 하는 이가 그 주제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잠정적인 재결합의 장단점에 대해 언급하였다.

“내가 하고자 하는 다양한 일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을 위해 경계를 늦추지 않을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예를 들어 토킹헤즈의 재결합은 어떤 세대에 있어서는 또는 많은 다른 세대들에게 있어서는 믿을 수 없이 성공적인 것이겠지요.” 그는 설명을 이어갔다. “돈도 많이 벌 수 있을 테고 관심도 얻겠죠. 또한 아마도 많은 다른 일을 하고 있던 어떤 이에게는 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멀리 퇴보하는 일이기도 해요.” 그러한 상대적인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번은 궁극적으로 긍정적인 면을 취하지 않았다. “내 생각에는 무언가를 희생해야 합니다. 돈이 되었든 명성이 되었든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좀 많이 하기 위해 가질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되었든 말입니다.” 그는 말을 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당신은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어요.” 그래서 이제 어느 곳으로도 향하지 않는 길(a road to nowhere)이 되었다. 불행하게도.

Bros 재결합?

이 기사에 따르면 원년 멤버 중 하나인 베이시스트 Craig Logan은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하튼 공연장에서 다시 그들의 노래가 울려퍼진다면 무척 신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George Michael: 제조업화된 음악 산업 내에서의 보기 드문 신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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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iversity of Houston Digital Library – http://digital.lib.uh.edu/u?/p15195coll6,268, Public Domain,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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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노트 : Clay Cane 는 “Live Through This: Surviving the Intersections of Sexuality, God, and Race,”의 저자이다.

2016년 크리스마스에 우리는 또 한방 먹었다. 조지 마이클이 53세의 나이로 심장 질환으로 보도된 원인으로 인해 갑자기 세상을 등졌다. 소셜미디어는 그의 히트곡들 “Father Figure,” “Faith”, “Praying for Time” 등으로 그를 회상하느라 북새통이 되었다. 조지 마이클은 신과도 같은 목소리, 뛰어난 작곡 능력, 죽이게 잘 생긴 얼굴의 팝스타 이상의 인물이었다.

Georgios Kyriacos Panayiotou 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조지는 음악이 인종적으로 분리되고 주류의 문화가 가혹할 정도로 반(反)동성애적인 시절에 유명세를 얻은 백인, 남성, 동성애자, 쏘울 가수였다. Justin Timberlake, Robin Thicke, Sam Smith 그리고 많은 다른 이들은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 마이클처럼 이들도 팝 가수들이 아니다. 그들은 R&B 가수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백인이기 때문에 “팝”으로 분류되고 있다.

R&B를 부르는 백인 가수가 된다는 것의 특혜는 — 또한 지겨울 정도로 팝음악 방송에서 틀어대는 — 종종 음악 산업에서 인지를 못하곤 한다. 음악에는 언제나 깊은 차별이 존재하였다. 음악 산업은 Billie Holiday, Dinah Washington, John Lee Hooker 와 같이 레이블을 부자로 만들어주지만 그들 자신은 몇 푼밖에 쥐지 못하는 “인종 레코드”로부터 구축됐다. 한편 Pat Boone 또는 Elvis Presley와 같은 백인 아티스트들은 원래 흑인 아티스트들이 부른 노래를 불러대며 몇 백만 달러를 벌었다. R&B 싱글 차트조차 1982년부터 1990년까지 기이하게도 “Hot Black Singles”라고 이름 붙여졌다.

“흑인”음악과 “백인”음악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Prince, Michael Jackson, Whitney Houston이 깨부쉈다. 조지 마이클은 R&B에서 찾아낸 또 하나의 백인 아티스트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쏘울 사운드”를 만들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다. 그는 노력하지 않고도 쏘울풀했다. 저스틴 팀버레이크에게 씌워졌던 비난처럼 문화적으로 남용하려는 흔적은 전혀 없었다. 그는 “도시의 여장자(urban drag)”에 있지도 않았고 흔치 않은 흑인 프로듀서와 계약을 맺지도 않았다. 그는 다른 흑인 아티스트들처럼 – 말년의 Teena Marie처럼 – 쏘울풀했을 뿐이다.

1988년 조지 마이클은 빌보드의 “탑 블랙 앨범”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 최초의 백인 아티스트가 됐다. 또한 “One More Try”로 “블랙” 차트에서 1위를 마지막으로 차지했는데, (이제는 Hot R&B/Hip-Hop Songs로 이름이 바뀐) 그 다음 백인 아티스트는 2007년 “Lost Without U”를 부른 로빈 티클이다. 1980년대의 흑인 커뮤니티에게 조지 마이클은 프린스나 Janet Jackson처럼 그들의 사운드트랙이었다. 더욱이 그는 흑인다움을 연기하지 않은 자생적인 아티스트이자 싱어이자 작곡자이자 프로듀서였다. 이는 영감과 적절함의 차이다.

조지 마이클의 명성은 LGBT 커뮤니티에게 가장 소름끼치던 그 시기에 다시 한 번 찾아온다. AIDS 위기. 잘 알려져 있다시피 Ronald Reagan은 이미 수십만 명의 사람이 이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두 번째 임기의 말까지 AIDS 위기를 인정하지 않았다. 슬프게도 게이나 퀴어라는 것은 AIDS와 동일시되었다. 그러므로 조지 마이클과 같은 팝스타에게는 “외치고 자랑스럽다(out and proud)”라는 여지는 없었다. 그는 음악 산업의 옷장 안에 갇혔다.

그러나 “Freedom! ’90″에서 그는 가죽 재킷으로 엉덩이를 흔들어대던 이전의 이미지에 불을 댕겼다. 명백하게 밝힌 것은 아니지만 조지 마이클은 이 히트곡의 가사를 통해 스스로를 해방시켰다. “난 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기로 했어. / 네가 알아야 할 무언가가 있어. / 내가 너에게 그것을 말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 / 내 속 깊은 곳에 뭔가가 있어. / 내가 되어야 할 그 어떤 존재가 있어.” 조지 마이클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 자신이 되기로 결정했다.

1998년 마이클은 비버리힐스의 공원에서 잠복경찰과의 “추잡한” 행동으로 체포되었을 때 공식적으로 아웃팅 당했지만, 이 가수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는 1998년 비디오 “Outside”에서 이 사건을 비웃었다. 그가 이성애자가 아니란 사실이 크리스털처럼 투명해지자 조지는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몰랐을까 하는 등의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 진실한 당신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보상은 늘 없다. 그 뒤로 몇 년 동안 그는 마약, 체포, 건강 문제와 같은 보도에 질질 끌려 다녔다.

조지 마이클은 그의 성적기호로 인해 배척되었고 그를 무자비하게 스토킹하는 미디어에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2005년 이 가수는 게이와 이성애자들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미디어에서의 게이는 이성애자를 편안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고 자동적으로 이에 대한 나의 반응은 내가 더럽고 음란한 f****r 이고 당신은 그 사실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은 감당을 못해요.”

분명히 조지 마이클이 없이 샘 스미쓰, Adam Lambert, 또는 오늘날의 다른 많은 공개적으로 퀴어인 아티스트가 있을 수 없다. 샘 스미쓰는 언젠가 마이클에 대해 말한 바 있다. “나는 조지 마이클에 대한 기이하고도 시들지 않는 애정을 가지고 있다. 그는 내가 하는 일을 왜 하고자 했는지에 대한 이유다.”

나는 사람들이 미묘한 차이가 있는 조지 마이클의 유산에 대해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는 단순한 팝스타가 아니었다. 그는 쏘울풀했고 아티스트들이 제조업화된 음악 산업에서 진정한 자아로의 길을 닦는 정체성을 교차했다는 점에서 혁신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