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Karate Kid

The poster shows an elderly man looking at a teenager. In the background, the teenage stands on stop of a small wooden pole doing a karate stance at a beach. Below, the tagline reads "He taught him the secret to Karate lines in the mind and heart. Not in the hands". The films titles, credits, and rating is printed below the tag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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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년 만에 가라데키드를 다시 보고 있다. 일단 영화를 제작한 미국에서도 큰 인기를 끈 작품이고 서양 영화를 추종하던 우리나라에서도 나름 인기를 얻었다. 다만 당시는 가라데가 일본 무술이었고 이를 추종하는 영화는 일본 영화가 아닐지라도 배척받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차마 개봉을 금지하지 못했지만, ‘가라데키드’라는 원래의 이름 대신 ‘베스트키드(Best Kid)’라는 매우 애매하고 어색한 이름으로(심지어 문법도 틀렸다) 국내에서 개봉했다.

그런데 오늘 몇백 년 만에 다시 영화를 보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 영화의 원작자들은 이 영화를 일뽕 영화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남주 다니엘에게 가라데를 가르쳐주는 미야기 상. 너무나 유명한 캐릭터다. 그런데 사실 미야기 상은 본인을 일본인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스스로를 오키나와인이라고 생각했다. 다니엘과 미야기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때 미야기는 오키나와의 위치를 알려준다. “차이나 히어, 저팬 히어, 오키나와 히어.”

더 나아가서 가라데에 대한 미야기의 태도도 인상적이다. 영화에서 미야기는 다니엘에게 가라데는 중국의 무술이라고 가르친다. karate에서의 te는 손을 의미하고 kara는 ‘빈(empty)’이라는 의미인데 이 모든 것은 중국의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한다. 다시 말해 다니엘에게 미야기가 가르치는 무술은 중국의 무술이고 그의 출신지는 일본이 아닌 오키나와다.1 다니엘이 영화 내내 욱일기 문양의 헤어밴드를 하고 있지만, 그건 일본 군국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80년대, 이 영화를 배급한 미국 영화사나 이를 수입한 한국 영화사나 당연히 그렇게 인식했겠고, 오늘날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이 영화는 사실은 일뽕 영화가 아닐 수도 있다. 미야기 상은 다니엘에게도 이야기하지만, 미국 이민 2세로서 참전용사다. 그 와중에 아내와 아이를 잃은 아픈 추억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딱히 일본을 좋아했을 이유도 없다.2 그러니 미야기 선생이 다니엘에게 가르친 것은 군국주의가 아닌 자립정신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주 다니엘의 역할을 맡은 랄프 마치오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그는 1961년생 배우로 영화에서의 고딩의 역할을 맡았을 당시 그의 나이는 22~23세였다. 서양인들이 급격하게 노화되는 것을 감안할 때 그의 동안은 역대급이다. 그 후 이 영화의 스핀오프인 코브라카이에 등장하는 그의 모습을 봐도 그의 동안은 역대급이다. 복 받은 얼굴이다. 코난쇼에서 그의 이름의 정확한 발음 등을 두고 코난과 그의 베프가 다툰 에피소드도 너무 재밌다.

  1. 이게 현재까지 실제로 알려진 가라데의 역사적 기원이기도 하다
  2. 게다가 그는 아무로 나미에처럼 일본이 아닌 오키나와 출신의 원주민이다.

To Live & Die in LA

형사물의 전형을 제시한 걸작인 1971년작 프렌치커넥션(The French Connection)의 감독 윌리엄 프레드킨(William Friedkin)이 1985년 내놓은 형사물이다. 그런 면에서 프렌치커넥션은 매우 1970년대스럽고 이 영화는 또한 매우 1980년대스럽다. 두 작품 모두 대도시를 배경으로 한 비정한 범죄스릴러라는 장르의 본질에 여전히 충실하고, 특유의 스릴 넘치는 자동차 레이스도 빼놓지 않았고,1 형사인 남자 주인공이 무모하리만치 수사에 집착한다는 설정은 유사하지만, 시대가 변한 만큼 영화의 스타일과 사운드트랙 등이 많이 바뀌었다. 주인공인 리차드 챈스(Richard Chance)는 더 야비해졌고, 음악은 프렌치커넥션의 째즈 음악에서 80년대 뉴웨이브로 바뀌었다.

우선 캐스팅을 칭찬해 줄 만하다. 일단 챈스 역에는 훗날 히트 드라마 CSI의 “길반장“으로 인기를 얻게 될 윌리엄 패터슨(William Petersen)이 호연을 펼친다. 길반장의 후덕함이 아닌 젊은 시절의 샤프한 미모와 기럭지로 열혈 형사의 역할을 잘 수행한다. 악역에는 이미 그 한해 전에 ‘불의 거리(Streets of Fire)’에서 신선한 악당 캐릭터를 선보인 윌리엄 데포(Willem Dafoe)가 맡았다. 챈스의 파트너 존 부코비치(John Vukovich) 역에는 왜소하고 소심하게 생긴 존 팬코우(John Pankow)가 맡았다. 처음에는 약간 미스캐스팅이 아닌가 싶었지만, 그의 캐릭터 변화를 고려할 때 훌륭한 캐스팅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외에 각종 조연급도 훌륭한 연기력을 가진 배우들이 잘 포진되어 있다.

한편, 챈스의 그의 파트너 존 부코비치의 파트너십 스타일은 좀 독특하다. 프렌치 커넥션에서는 지미 도일과 소니 그로소의 파트너십 다소 고지식할 정도로 끈끈한 파트너십 스타일이었다. 더티해리에서의 해리의 파트너 치코 곤잘레즈는 그를 도우려다 살벌한 형사의 세계를 알게 되자 형사를 그만 둘 정도로 나약한 스타일이었다. 리셀웨폰의 마틴 릭스와 로저 머터프는 인종적으로나 성격이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오히려 케미가 되어버리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존은 챈스보다는 더 정공법을 선호하는 강직한 스타일이지만, 결국 집착하고 있는 범죄의 해결을 위해서는 손에 피를 묻히는 일도 서슴지 않는, 그리고는 종국에는 챈스와 악독하게 닮아가는 진화형(!) 스타일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마지막으로 음악 이야기를 해보자. Wang Chung이 전체적인 음악을 맡았기에 사실상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은 듀오의 세 번째 정규 앨범이다. 1985년 9월 30일 게펜(Geffen)에서 발매되었다. 타이틀곡인 To Live and Die in LA는 앨범의 첫 번째 싱글로 발매되었고, 미국 빌보드 핫 100 에서 41위까지 올랐다. 썩 훌륭한 성적은 아니었지만, LA라는 하드보일드한 범죄의 도시의 이글거리는 야자수 풍경과 매우 잘 어울린다. 그들을 선택한 이는 그룹의 노래 중 Wait와 Dance Hall Days를 특히 마음에 들어 한 프리드킨 감독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캐치한 뉴웨이브 사운드 덕분에 이 영화는 또 하나의 대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역시 80년대의 인기 범죄물이었던 마이애미바이스를 생각나게 한다.

  1. 감독이 말하길 프렌치 커넥션을 만들 당시 누군가 조언하길, 뭘 하든 반드시 자동차 레이스는 집어넣으라고 조언했고 그 조언에 따라 만든 장면이 영화 역사상 가장 훌륭한 레이스로 남게 되었다.

마이애미바이스 두 번째 시즌 감상 완료

엊저녁에 80년대의 아이콘이 차곡차곡 담겨 있는 형사 시리즈물 마이애미바이스(Miami Vice)의 두 번째 시즌 마지막 에피소드 Sons and Lovers를 감상했다. 전에 모든 시즌의 에피소드가 담겨 있는 블루레이 전집을 구매하여 틈나는대로 감상하고 있는 애청 TV쇼다. 전집을 구매한 지는 꽤 되었는데 엊저녁처럼 가끔 생각날 때마다 “아껴” 보는 바람에 이제야 두 번째 시즌을 마칠 수 있었다.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백인 남주 쏘니 크로켓(James “Sonny” Crockett)이 아니라 그의 파트너인 흑인 남주 리코 텁스(Ricardo “Rico” Tubbs)다. 리코는 이 형사물 첫 에피소드 당시에는 뉴욕의 형사였다. 그런데 마약상이자 불구대천의 원수 에스테반 칼데론(Esteban Calderone)이 역시 형사였던 그의 형 라파엘(Rafael Tubbs)을 살해하고 달아나자 그를 쫓아 마이애미로 온 것이다.

결국 리코는 시즌 중반에 에스테반을 추격하여 그를 제거하고 형의 복수를 완수한다.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이 과정에서 사랑에 빠진 안젤리나(Angelina)가 우연히도 에스테반의 딸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안젤리나는 리코의 곁을 떠나고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에서는 리코를 해치우려는 자가 있는데 그가 바로 에스테반이라는 괴소문이 횡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눈앞에 나타난 이는 에스테반이 아니라 안젤리나였다. 실은 리코를 죽이려는 자는 에스테반의 아들이자 안젤리나의 남동생이었던 올란도 칼데론(Orlando Calderone)이었고 안젤리나는 이를 리코에게 알려주려 온 것이었다. 리코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을 데리고서 말이다. 도망가라는 안젤리나의 경고를 무시하고 리코는 올란도와의 일전을 준비하게 된다. 기쁨과 분노의 감정이 섞인 채로.

시즌의 대미를 장식하는 에피소드인지라 수차례의 폭발 장면이 나오는 등 스케일도 크다. 그리고 리코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두 개의 곡이 꽤 비중 있게 쓰였다. Roger Daltrey의 After the Fire와 Phil Collins의 Long, Long Way to Go. 두 거장 뮤지션의 노래가 흐르는 동안 리코는 안젤리나와의 즐거웠던 추억과 쓰라린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이 에피소드는 온전히 리코 텁스의 것이었다.

Mad Max : Fury Road 感想文

A man muzzled, standing and pointing a gun in one direction. A woman crouched beside him pointing her gun in the opposite direction. The title in large letters fills back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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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여름 영화팬들에게는 뜻밖의 선물이 안겨졌다. 1970~80년대를 풍미했던 Mad Max 시리즈의 4편이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전편보다 더 강력한 하드코어 액션과 탄탄한 시나리오, 그리고 시대선도적인 페미니즘 세계관까지 얹어져서 그야말로 ‘정치적으로 올바른 말초신경 자극 헤비메탈 무비’가 탄생하여 최고의 수작으로 남을 가능성이 커졌다. 올해 일흔이 되신 조지 밀러 님께서 이 정도의 박력과 진보적인 세계관으로 무장하고 계신 것을 보니 나이 탓만 하고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질 따름이다.

지금 온라인에서는 “이 영화는 페미니즘 영화다”, “아니다. 너희들의 오버이고 페미니즘 영화가 아니다”, “국내의 얼치기 꼴페미와는 다른 진짜 페미니즘 영화다” 등 페미니즘 함유량을 두고 말이 많지만 이 글에서 그 논쟁에 숟가락을 얹을 생각은 없다. 다만 예술이란 사회적 맥락과 수용자의 시각에 상호 조응하여 메시지가 전파되거나 발전하기 때문에 기계적 규정화는 큰 의미가 없다는 의견을 말해두고 싶다. 발표 당시에는 여성 해방적 메시지를 담고 있던 ‘오만과 편견’이 오늘 날에는 로맨틱 코미디가 된 것이 그 좋은 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의 테두리에 두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그 장르를 뛰어넘는 ‘로드 무비’로서의 미덕을 살펴보고 싶다. “분노의 도로”라는 부제가 붙은 만큼 이 영화는 길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 여정 상에서 캐릭터들이 정신적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로드 무비 고유의 본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희한하게 뭉친 구성원들은 서로 반목하고 조력하다가 어느덧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스스로의 정신적 굴레로부터도 치유된다. 그러한 면에서 영화는 ‘스탠바이미’나 ‘델마와 루이스’와 닮아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임모탄 조의 씨받이” 중 막내인 치도를 들 수 있다. “The Fragile”이라는 예명이 붙을 만큼 연약해서 탈출을 포기했다고 했던 그녀는 급기야 사령관 퓨리오사가 임모탄 조를 처치하는데 도움을 줄만큼 성장하게 된다. 맥스 역시 여정을 통해 마음의 치유를 받는다. 환상으로 나타나던 딸의 모습은 그를 옳은 길로 인도하고 최후에 미소 짓게 만든다. 이미 없어져 버린 “녹색의 땅”을 찾아 헤매고 소금사막을 건너려던 퓨리오사는 결국 시타델로 돌아가자는 맥스의 조언을 수용하며 고통을 우회하지 않고 직시하게 된다.

시타델을 탈출했다가 결국 무수한 희생을 치르면서 다시 원점인 시타델로 돌아온 꼴이 되고 말았지만 – 게다가 그들의 접수한 권력을 어떻게 써먹을 것인지에 대한 궁리도 없지만 – 정신적으로는 모두들 성장하고 치유를 받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여정이었다. 그리고 시타델로의 회군은 개개인의 성장이 일반대중으로까지 전파될 수 있는 가능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발전적이다. 또한 부발리니 여전사 할머니가 보관하고 있던 씨앗이 시타델에 온전히 옮겨졌다는 점에서, 그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미덕을 갖추고 있는 영화지만 또한 영화의 액션에 대한 상찬을 빼놓을 수는 없다. 우리는 이 영화가 지니고 있는 ‘정치적 올바름’이 영화가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풍성한 액션으로 멋지게 포장되어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무성 영화가 우리가 현재 쓰는 영상언어 문법을 만들어냈다고 믿는다”고 감독이 이야기했듯이 이 영화는 자질구레한 배경 설명을 과감히 생략하고 그 시간을 액션으로 채워 넣었다는 점에서 무성영화의 미덕을 성실하게 재현하고 있다. 특히 감독이 언급한 버스터 키튼의 작품 중에서 ‘The General’과 닮았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텔마와 루이스’와 ‘The General’을 오버랩시킨 영화다.

영어로 쓴 The Dark Knight Rises 감상문

그저께 “The Dark Knight Rises”를 아이맥스로 감상했다. 전작보다 실망스러운 작품이라 특별히 리뷰를 쓰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영작 연습 사이트에 글 쓸 주제를 찾다보니 결국 리뷰를 쓰게 됐다.(그것도 영어로!) 원어민의 도움으로 수정된 글을 여기에 (귀찮아서) 재번역 없이 올려둔다. 

I saw “The Dark Knight Rises” the day before yesterday. I concluded that the movie has been somewhat overvalued. The film surely is a great movie for entertainment purposes. Once you, however, try to read some metaphors being reflected from the real world, you would have difficulties with the work because the points of view of the director are not so profound and are shallow. Although Christopher Nolan currently is one of the hottest movie directors in the industry around the world and has made some great films like “The Dark Knight” and “Inception”, his latest work failed to reach the level that his previous works archived in my humble opinion. The weakest point of the film is the disappointing character of the enemy of Batman. Without Heath Ledger, Nolan had to give up on the ‘Joker’ character and create a new character. The result is ‘Bane’, who came from an underground prison and argued that he tried to liberate the people of Gotham City. This character looks like a heroic revolutionary leader of the 3rd world or ‘Occupy Wall Street’ movement. Bane’s purpose is surely different from that of ‘Joker’ because Joker only wanted to create chaos in Gotham City for fun. But Bane’s actions and intentions are getting confused as he obsesses about a neutron bomb to blow up the city. His contradictory actions resulted from the director’s obsession with giving the movie a unique twist. As a result, a character which could have been a fantastic one in the trilogy of Batman became an ordinary character. Also, the movie became just a normal action film just like ‘Die Hard’ revoking an old-fashioned patriotism.

Thief of Bagdad

초기 헐리웃의 자본력과 기술력을 느끼게 해주는 환타지 대작. 아라비안나잇이 가지고 있는 여러 설정, 즉 착한 왕자, 사악한 마법사, 어여쁜 공주, 호리병 속의 거인, 나는 양탄자 등 이 당시의 첨단기술 및 자본과 결합되어 비슷한 유의 영화의 전형을 탄생시켰다.

The Departed

잭니콜슨, 마틴쉰, 레오나르도디카프리오, 맷데이몬, 마크왈버그, 알렉볼드윈. 한 연기 한다는 이 양반들이 죄다 모여 만든 남성성 짙은 하드보일드 영화다. 홍콩영화 무간도를 마틴스콜세스가 리메이크한 이 영화는 Face Off, 첩혈쌍웅 등에서 오우삼이 즐겨 다뤘던 두 영웅의 정 반대의 삶을 통해 정체성에 혼란을 일으키는 상황을 소재로 하고 있다. 서로 다른 조직에 스파이로 들어간 두 사람의 엇갈린 운명이 선명하게 대비된다. 대사의 절반이 욕이고 장면전개는 불친절하다 싶을 정도로 이리 저리 건너뛴다. 한 가지 궁금한 것. 디카프리오가 데이몬의 연인에게 주었던 그 노란 봉투의 내용은 왜 끝내 공개되지 않았을까? 도중에 결말이 바뀐 것인지?

African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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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pyright 1952 United Artists Corp.” – Scan via Heritage Auctions. Cropped from original image., Public Domain, Link

생각해보니 물에서의 모험을 다룬 영화만 해도 하나의 계보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Mutiny On The Bounty’, ‘Dead Calm’ 등 바다에서의 모험을 다룬 영화도 꽤 되거니와 이 작품을 비롯하여 ‘Deliverance’, ‘아귀레, 신의 분노’, ‘River Wild’, ‘Cafe Fear’ 강가에서의 모험을 소재로 한 영화도 나름대로 적잖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은 물이 영화제작에 주는 여러 가지 장점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은 일단 공간을 한정시킴으로써 극의 밀도를 높이는데 일조한다. 한정된 공간에 놓인 인간들은 하나의 사건에 좀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이는 극의 긴장감을 높인다. 이 작품에서는 광산노동자 Charlie Allnut(Humphrey Bogart)과 선교사의 여동생 Rose Sayer(Katharine Hepburn)이라는 두 어울리지 않는 신분이 빚어지는 갈등과 애정이 낡은 통통배라는 한정된 공간으로 말미암아 증폭된다. 또한 물은 평화와 공포라는 이중적인 감정을 제공한다. 드넓고 조용한 물줄기는 평화스러우면서도 등장인물들에게 휴식을 제공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급해지는 물살은 거대한 자연의 폭력성과 이에 수반되는 등장인물들의 갈등을 암시한다. 결국 이 두 가지 감정이 교차되면서 결말은 흔히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닫는데 이 작품의 경우에는 결국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신분상의 차이를 뛰어넘은 사랑으로 귀결된다.

1914년 독일 점령지역인 동아프리카에서 오빠와 함께 선교를 하고 있던 Rose 가 1차 대전에 휘말리면서 Charlie 와 함께 겪게 되는 모험담을 다룬 영화로 명장 John Huston 이 C.S. Forester 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로맨스와 모험, 그리고 애국주의가 적당히 뒤섞인 대중관객의 취향에 딱 좋은 작품이다.제국주의 강대국들의 덧없는 싸움으로 인해 피폐해지는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반성이나 애정 따위는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Humphrey Bogart 는 이 작품으로 그 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Aguirre, der Zorn Gottes(아귀레, 신의 분노 : Aguirre, the Wrath of God)

마른 걸레를 짜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의 영화이다. 감독은 극한상황에 인간을 배치해놓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실험을 하고 있는 듯하다. 심하게 말해서 배우들에게 스페인의 잉카 정복에 관한 영화를 찍겠다고 속이고 거친 숲속과 물가로 몰아내어 마치 실험쥐처럼 그 반응을 즐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마치 2001년작 Das Experiment 가 소재를 삼았다는 실존의 그 인간실험처럼 말이다. 실제로 영화해설을 찾아 읽어보니 주연을 맡은 클라우스 킨스키는 총으로 감독을 위협하며 촬영을 중단해줄 것을 요구했다고까지 하니 배우들의 고생이 상상이 간다. 극에 몰입을 방해할 정도로 이런 감정이 들었던 것은 정말 배우들의 고통이 뚝뚝 묻어나올 정도로 생생한 화면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큐멘터리를 보는듯한 역동적이고 거친 화면은 이미 낙오되어버린 상태이면서도 그 안에서 정치놀음을 벌이는 구제불능의 인간군상을 여과 없이 비추고 있다. 클라우스 킨스키의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은 극의 긴장감을 높이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이 지루한 강 여행기를 끝까지 보게 만드는 버팀목이다. 자신의 딸과 결혼하여 순수한 피를 유지하겠다는 독백 장면은 히틀러를 은유한 것이라는 것이 중론인데 개인적으로는 히틀러를 광기의 산물이라 보지 않기 때문에 감독이 의도하였건 하지 않았건 간에 그러한 입장에 동조할 수 없다. 강가를 여행하며 겪는 모험담을 다룬 점에서 같은 해 나온 또 하나의 걸작 Deliverance 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후에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다. 어쨌든 감독 헤어조그는 같은 로케이션에서 이 위험한 짓을 10년 후 Budden Of Dreams를 통해 다시 한 번 자행하였으니 지독한 새디스트다.

Paths Of Gl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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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pyright 1957 United Artists Corporation.” – Scan via Heritage Auctions. Cropped from the original image., Public Domain, Link

개인적으로는 영화 감상할 때 롱테이크니 트래킹샷이니 하는 현란한 영상문법보다는 내러티브에 빠져드는 편이다. 영화에서의 영상기법이나 소설에서의 문체는 그 자체로도 감상포인트이긴 하나 역시 매력적인 이야기를 꾸며주는 양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탠리큐브릭의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그 시각적 요소의 탁월함과 현란함은 그 자체로도 매료될만한 마법을 지니고 있다.

개미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진격하는 장면이나 참호 속을 시찰하는 장면은 유사한 장면의 연출에 있어 고전으로 남을만한 – 또는 지금 재탕을 해먹어도 여전히 매력적일만한 – 표본으로 남을 교과서적인 사례이다. 물론 지나친 비주얼함이 극의 집중에 방해가 될 만도 하나 적어도 개인적으로 그로 인해 내러티브를 따라가는데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대표적인 반전(反戰)영화로 자리매김하였고 프랑스 군인에 대한 – 또는 군대 체제에 대한 – 신랄한 시각으로 말미암아 1975년까지 프랑스에서 상영이 금지되었다는 이 작품은 큐브릭의 영화이력의 이정표로 인정되고 있는 역작이다. 그의 개인사적으로도 의미있는 작품일 수도 있는데 영화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여배우 Susanne Christian 은 그의 평생의 반려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최대의 격전지였던 서부전선에서 사령관 역할을 하고 있던 Broulard 장군은 개인영달을 위해 가능성 없는 개미고지의 점령을 명령하고 Dax 대령은 이 부조리한 상황에서 부하들의 피해를 뻔히 알고도 진격명령을 내린다. 일부 부하들이 진격을 거부하는 바람에 결국 진격은 막대한 피해만 남긴 채 실패한다. 분노한 Broulard 장군은 희생양을 위해 무고한 사병 셋을 군사법정에 회부한다.

전직 변호사였던 Dax 대령은 그들을 변호하지만 법정에는 기소장도 없었고 증거제출도 거부한 채 사병들에게 사형을 언도한다. 그 와중에 Broulard 장군의 용서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명령이 양심적인 장교의 고백에 의해 밝혀지지만 군부는 사형언도를 취소 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 내용을 Broulard 장군의 축출에 활용한다. 이러한 더러운 암투에 Dax 대령은 진저리를 치지만 부하사병들이 포로로 잡힌 한 독일소녀의 노래에 나지막한 허밍으로 동참하는 모습에서 새로운 희망을 얻게 된다.

명백히 잘못된 명령임에도 이에 복종하였으나 이내 부하들을 감싸기 위해 희생양을 자처한 Dax 대령의 캐릭터는 선과 악의 명확한 이분법보다는 고뇌하고 끊임없이 부유하는 나약한 인간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평가들의 호평을 얻었다. 그럼에도 말미부분에 암시되는 새로운 희망은 약간 작위적인 면이 없잖다. 차라리 부하사병들이 독일소녀의 노래를 함께 따라 부르기보다는 그녀를 더 그악스럽게 약 올렸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위와 아래에서 모두 배신당하는 Dax 대령의 모습이 더 드라마틱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