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w in High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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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rissey – Pitchfork Media, CC BY-SA 4.0, Link

Morrissey가 통산 11번째 솔로앨범을 냈다. Paul Weller나 David Byrne과 같은 다른 거물들 이외에 수퍼밴드의 프론트맨을 떠난 이후 이만큼 솔로 작업을 많이 한 이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만큼 나름 다작의 뮤지션이다. 앨범을 내는 주기도 2~3년에 한 개씩 낼만큼 – 가장 인터벌이 길었던 것은 1997년 Maladjusted와 2004년 You Are The Quarry 사이의 7년 – 성실하다.

신작은 여태의 Morrissey의 다른 앨범이 그렇듯 도발적이다. 일단 앨범 커버가 도발적이다. 갓 10대가 넘었을 듯한 소년이 도끼를 들고 있는 사진이 커버를 장식하는 바람에 HMV를 포한한 몇몇 소매업자가 처음에는 디스플레이를 거절했다는 소문도 있다(HMV는 이 의혹을 부인했다.) 멜로디에 담긴 가사도 도발적이다. The Smiths 시절의 그런 촌철살인에는 못 미치지만 특유의 냉소는 여전하다.

Stop watching the news!
Because the news contrives to frighten you
To make you feel small and alone
To make you feel that your mind isn’t your own
“Spent the Day in Bed” 중에서

The Smiths 시절의 히트곡 Panic을 연상시키는 – Burn down the disco! Hang the blessed DJ! – 이런 가사를 비롯하여 많은 가사들이 부조리한 현실을 노래하고 있다. 특히 이색적인 것은 그간 정치적 이슈에 대해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던 그의 이력과 달리 Who Will Protect Us from the Police? 나 Israel과 같은 곡에서는 베네수엘라와 이스라엘 상황을 노래하고 있다.

한편 음악적으로는 여태의 앨범에 비교할 때 “가장 모험적인 시도를 한 앨범”이라는 것이 평이 있는가 하면 “나쁘진 않지만 여태의 팬 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앨범이라는 평도 있다. 평은 그래서인지 엇갈린다. 둘 다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어느 평론가의 말마따나 “전형적인 모리씨 앨범(Standard Morrissey Album)이다. 그렇기에 팬들은 즐겁고 그를 잘 모르는 이는 ‘아 그런가’하고 지나가면 될 일이다.

만화 캐릭터로 만나는 80년대 팝아이돌

웹서핑하다가 만난 페이지인데 80년대 팝아이돌을 만화로 그려놓은 여러 이미지가 올라와 있어 공유합니다. 가만 보면 어릴 적 즐겨 보던 뮤직라이프 – 일본 팝잡지를 베낀 잡지였죠 – 에서 보던 친숙한 이미지들이 많아요. Peter Burns, Martin Fry, Boy George, Duran Duran, Wham!, Japan, Hanoi Rocks 등이 눈에 띄네요

[번역] 40년이 지난 후, Talking Heads의 가장 가치 있는 멤버는 여전히 가장 낮게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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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an-Luc – originally posted to Flickr as Talking Heads, CC BY-SA 2.0, Link

Carrie Courogen(원문 보기)

당신이 토킹헤즈의 대표곡들을 들을 때면 그 음악에는 하나의 두드러진 공통점이 있다. : 티나 웨이마우스(Tina Weymouth)의 훵키하고 멜로디 넘치는 베이스라인. 그가 없었다면 “Psycho Killer”나 “Burning Down The House”, 그리고 “Once in a Lifetime”이 없었을 것이다. 즉시 알아들을 수 있는 그루부는 곡의 가사가 사라지는 순간에도 우리의 뇌 속에 스며들어 있다. Jay-Z에서부터 최근에는 셀레나 고메즈(Selena Gomez)에 이르기까지 계속 샘플로 사용되고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던 것은 웨이마우스의 베이스라인이지만 이것들을 창작해낸 그의 역할은 아직까지 거의 논의되고 있지 않다.

웨이마우스의 기념비적인 “Psycho Killer”의 리프에 기초해서 만든 고메즈의 “Bad Liar”가 발매되자마자 평론가들은 데이빗 번(David Byrne)이 그 영향력있는 샘플에 기여한 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식적인 승인에 초점을 맞추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프론트맨을 뒷받침했던 여성이 종종 그러했던 것처럼 웨이마우스에 대한 평가 역시 일종의 부가적인 영역이었다.

66살의 웨이마우스 또한 명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난 그런 것에 대해 내 자신이 별로 개의치 않는다고 생각해요. 내가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죠.” PAPER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웨이마우스가 한 발언이다. “난 여전이 여기 있고 내 할 일을 해요. 결론적으로는 그게 진정한 모든 것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인식하는가가 아니라요.”

최근의 인터뷰에서 토킹헤즈의 드러머인 (그리고 웨이마우스의 남편) 크리스 프란츠(Chris Frantz)는 “토킹헤즈에서 티나 웨이마우스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그저 또 다른 어떤 밴드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왜 그가 그렇게나 중요한 역할을 했던 어떤 밴드의 유산에서 그는 서서히 배제된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

평론가들은 종종 웨이마우스가 킴 고든(Kim Gordon)에서 에스터 하임(Este Haim)에 이르기까지 많은 여성 베이스 연주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하곤 한다. 그러나 다른 더 많은 이들에게는 아니다. 사람들은 그가 (프란츠와 함께) 번의 난해한 아이디어를 리듬 섹션의 범위 내에서 캐치하고 상징적인 팝뮤직으로 변환하는 비법을 발견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의 프로파일을 심도 있게 적지 않는다.

그의 베이스라인은 밴드의 맥박이 되고 다운타운 펑크를 새로운 어떤 사운드로 만들어냈다. : 팔리아먼츠(Parliament)와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의 쏘울이 넘치고 훵키한 즉흥곡과 캐롤 케이(Carol Kaye)의 견실한 락음악의 춤추기 쉬운 컴비네이션. 이 사운드는 확실하게 쭉 뻗어나가는 멜로딕 훵크에서 아프리카에 영향받은 복합적인 리틈의 댄스 음악에 기초한 날카로운 그루브에 이르기까지의 넓은 스펙트럼을 커버했다. – 그와 프란츠가 후에 그들의 영향력있는 그룹 Tom Tom Club으로 개발했던 그 사운드.

그러나 웨이마우스에 대해 쓸 때에 그는 기껏해야 유머 감각 없이 잔소리가 심한 여자에서 심지어 번에 초점을 맞춘 이들에 의해 “락의 레이디 맥베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묘사되면서도 그의 음악가적 기질은 무시되어 왔다. 이러한 수사는 드문 것이 아니다. – 단지 그들이 창출하는데 기여했던 역사로부터 지워지고 있는 여성 아티스트들의 더 커다란 문제의 징후에 불과하다. 그들은 자주 흑과 백의 극단적인 개성으로 묘사되곤 하고, 그들의 성별(gender)이 언급되고 –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재능 있는 – 혹은 남성 평론가들의 렌즈를 통해 철저한 관찰된 중에 제대로 형성된 남성 동료들의 그늘 속의 배역으로 정의된다.

데이빗 바우맨(David Bowman)의 2002년 전기 This Must Be The Place : The Adventure of Talking Heads in the 20th Century를 보자. 그는 번을 이 이야기에서 겸손하고 친근한 주창자(protagonist)이자 진정한 영웅으로 묘사하면 반면, 웨이마우스를 묘사하길 적대자(antagonist), “다소 예민한”, “카톨릭 성인의 분위기가 나는, 또는 비극적으로 다리를 저는 프리마 발레리나. 또는 앤디 워홀을 저격했던 발레리 솔라니스(Valerie Solanis).”1 이 정도는 바우먼이 친절한 것이다. 나중에 그는 그를 “로체스터(Rochester)의 아내, 미친 인간”으로 비유하고 그의 기억들을 “유해하다”고 규정했다.

평론가들은 종종 디테일을 대충 묘사한다. 번이 밴드에서의 그의 역할을 위해 그를 세 번 오디션했다고 한다. – 다른 멤버들에게는 요구하지 않았던 것. 2015년의 다큐멘터리 Girls in Bands에서 그는 번이 그에게 “여성에게 위험한 곳이기에 이 큰 세상에서 진정한 여성의 역할은 없다”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일이 꼬일 때마다 번은 웨이마우스를 탓했다. “데이빗이 불안해할 때마다 내가 그의 괴롭힘 대상이었다. 그가 일이 잘 안 풀릴 때마다 그에 대해 날 괴롭히곤 했어요. 내내 내겐 고통이었죠.” 그는 바우먼에게 자세히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티나 웨이마우스는 그가 대체로 그의 다른 여성 등료들과 다르게 그렇게 확신을 주는 인물이 아니어서 충분한 신뢰를 얻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잘 해낸 것, 음악을 연주하는 것의 더 이상을 능가하고 싶지 않아요.” 1979년 Creem에서 그가 한 말이다. “난 여성임을 이용하지 않았는데 그런 것들을 아껴두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죠.”

그는 임신 중에도 토킹헤즈의 공격적인 세계 공연에 따라나섰던 여성이고, 진통 중에도 베이스 트랙을 녹음했다. 데이빗 번의 그늘에서 라이브를 하는 것과 같은 거친 진실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던 여성이다. : “몇 해 동안” 로스엔젤레스타임스에 그가 한 말이다. “사람들은 내게 데이빗에 대해서만 물어봤고, 난 대답을 잘 했었죠.”

그는 가혹하도록 충성을 했고 대단히 신뢰할 만 했으나 팡파레를 원하지 않았다. 밴드를 하는 것은 프란츠의 꿈이었다. 그가 도쿄의 레드불뮤직아카데미(Red Bull Music Academy)에서의 2014년 강연에서 회고하길 그는 거의 2년 동안 베이스 주자를 찾아 헤맸다. 결국 아무도 나서지 않았고 웨이마우스는 밖에 나가서 거의 그만큼 큰 베이스를 사왔다. 그리고 밴드에 끼어들었다.

“밴드가 첫 라이브를 할 때까지 난 단지 5개월 동안 베이스를 연주했어요.” 같은 강연에서 그가 설명했다. “난 정말 펑크였던 셈이죠. 철저한 독학자였어요. 수업을 듣지도 않았죠. 아무도 어떻게 연주하는지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그는 구멍을 발견하고 어떻게 다른 사람의 요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여성들이 몇 세기동안 보답을 바라지 않고 해온 일이다. 밴드 멤버들이 그들의 초기 시절을 회상할 때 그들은 그가 번과 프란츠와 함께 온방이나 목욕탕도 없는 상업용 다락에서 살며, 그들에게 음식을 만들어주고, 머리를 잘라주고, 공연장까지 운전을 해주고, 베이스 주자와 로드 매니저라는 이중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회고한다.

티나 웨이마우스는 선구자였고 그 영향력은 특히나 여성들에게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남아있다. 그는 그만의 길을 지치지 않고 나아가고 있고, 프란츠와 새 음악을 만드는 와중에 멘토역을 하거나 더 젊은 아티스트들과 협업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좋았던 것 하나는 내가 여성이어서 겪었던 문제에 대해 한번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에요.” 1981년 The Face에서 그가 한 말이다. “나는 똑 같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다른 이들을 의기소침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난 그 길이 오르막을 오르는 수레처럼 보이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실제론 그랬지만요.”
여성은 때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비록 웨이마우스가 스스로 주목받는 것이나 여성으로서의 시도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했던 것이 상황을 복잡하게 하긴 했지만 말이다. 이것은 일종의 캐치22(catch-22)다. “나는 언제나 페미니스트였어요.” PAPER에서 그가 한 말이다. “난 단지 언제나 그 질문을 받는 것이 싫었어요. 그건 나를 ‘날 바라볼 때 생각나는 것이 그게 다에요? 여성으로서? 날 아티스트로 보지 않아요? 날 뮤지션으로 보지 않아요?’라는 질문에 가두는 것이에요.”

침묵을 지키는 것은 제자들이 그를 베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또한 그를 또 하나의 미스터리로 만든다. 그래서 그 앞에 지나갔던 많은 여성들처럼, 그 역시도 편견에 사로잡힌 비평가들의 투사와 남성들의 속 좁은 생각을, 그의 영향력이 단지 하나의 주석으로 축소되는 것을 참아왔다. 늘 그랬으니까.(Same as it ever was)

  1. 미국의 급진적 여성주의자. 앤디 워홀 미수사건의 범인으로 유명하다.

World Be G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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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urce (WP:NFCC#4), Fair use, Link

Erasure가 통산 열일곱 번째로 내놓은 스튜디오 앨범 World Be Gone이 2017년 5월 19일 영국에서 Mute 레코드사를 통해 발매됐다. 총 10곡이 수록된 이 앨범은 올뮤직으로부터 별 다섯 개 중 별 세 개 반, 파이낸셜타임스로부터 별 다섯 개 중 네 개, Newsday로부터 A, 워싱턴포스트로부터 “긍정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등 대체로 평론가들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2016년에 녹음된 이 앨범의 프로듀싱은 Erasure와 Matty Green이 맡았다. Andy Bell은 급변하는 현대의 정치 환경이 이 앨범 제작에 영향을 줬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점차 깨어나고 있어요. 사람들이 이 앨범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앨범 수록곡의 중간에 자리 잡은 “Still It’s Not Over”는 각국에서 공격받고 있는 동성애자의 권리에 관해 가스펠 풍으로 노래하고 있다.(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비극이 현재진행형이다) 어쨌든 Erasure는 이 노래에서도 “The universe is big enough and there’s room for the two of us”라고 읊조리며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앨범의 대미를 장식하는 10번째 트랙 “Just a Little Love”는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럼에도 더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빠른 템포의 곡으로, 개인적으로는 80년대의 Erasure에 가장 가까운 곡이라 여겨지는 곡이다.

1. “Love You to the Sky”
2. “Be Careful What You Wish For!”
3. “World Be Gone
4. “A Bitter Parting”
5. “Still It’s Not Over”
6. “Take Me Out of Myself”
7. “Sweet Summer Loving”
8. “Oh What a World”
9. “Lousy Sum of Nothing”
10. “Just a Little Love”

The Stone Roses 武道館 公演 2017.4.22

‘살면서 언젠가 한번은 보고 싶다’란 생각했던 여러 콘서트 – 토킹헤즈 등등 – 중 하나를 이번에 도쿄 무도관에서 보게 됐다. 2017년 4월 22일 있었던 The Stone Roses의 콘서트. 작년에 계획됐었던 콘서트였고 티켓까지 구입해서 우편으로 받았지만, 불의의 사고로 – 유력한 설이 드러머 Reni의 부상설 – 콘서트가 취소됐다. 거기에다 열 받았던 게 티켓을 내 돈으로 다시 일본에 반송시켜야 환불을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 암튼 그때는 그래서 돌장미 콘서트 대신에 새질서 콘서트로 슬픔을 달래야 했다.

이번에는 ‘다시 공연이 취소되진 않겠지’라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일본에서 공연을 할 예정이었던 Echo & The Bunnymen의 프론트맨 이언 맥컬록이 – 아마도 점증되는 한반도의 전쟁 위기에 대한 공포 때문에 – 공연을 펑크 내고 도망가는 장면이 공연에서 목격됐다는 트윗을 보고 ‘아니 이거 다시 악몽의 재연이??’라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그래서 금요일 출발의 일정에도 혹시 결항에 대비해 금요일 공연이 아닌 토요일 공연 티켓을 – 이틀간의 공연이었다 – 구매하는 등 만전을 기했다.

공연장은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공연장의 하나인 부도칸(武道館). 건물 이름대로 무도대회가 자주 열리는 곳인지라 벽보에도 각종 무도대회의 포스터가 많이 걸려있었지만 – 그리고 무대 상단에는 일장기가 – , 뮤직러버에겐 역시 음악공연으로 유명한 장소일 뿐이었다. 4시 입장인데 3시쯤 도착했을 때에도 이미 많은 팬들이 몰려들어 기념품을 구입하고 공연을 알리는 플래카드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었다. 단 두 장의 정규앨범을 낸 80년대 밴드가 이 정도의 관중동원력이 있다는 것, 역시 아이콘은 아이콘이었다.

다섯 시로 예정된 공연은 다섯 시 십오 분쯤 시작됐다. 이러저러한 구차한 멘트 없이 바로 I Wanna Be Adored로 시작된 공연은 중간 중간의 짧은 일어를 섞은 Ian의 감사인사를 제외하고는 한 시간 반 가량을 – 멤버 소개도 없이 앵콜도 없이 – 1집 위주에 2집의 수록곡을 간간히 섞어 성실하게 공연해주었다. John Squire는 팬들의 “존~조~온~”의 애절함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하게 신발만 보며 연주해서 – 딱 한번 엄지를 척 들어줬다 – 슈게이징의 원로다운 무대매너를 보여주었다.

뭐 팬들의 입장에서야 노래를 엑기스로 불러주는 만큼 더 좋은 선물이 어디 있겠는가? – 그런데 거기에다 Ian은 공연 초반 흔들던 막대 탬버린을 앞좌석에 던져주더니 이후로도 한 대여섯 개는 더 던져주고 Reni는 공연 후 드럼스틱과 입었던 조끼를 던져주는 왕대박 선물을 – 암튼, 이십대로 보이는 이들부터 오십대 이후로 보이는 이들까지 세대를 초월해서 돌장미의 노래에 환호한 공연이었고, Made of Stone에서는 일본 공연에서는 흔치 않았을 것 같은 떼창 장면까지 연출하였다.

여담으로 내 왼쪽에 서있던 – 좌석제였으나 공연 시작하자마자 모두 일어나 자리에 앉질 알았다 –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의 청년은 좀 크리피했는데 모두들 춤을 추며 공연을 즐기는 와중에 묵묵히 서 있다가 돌장미 2집 수록곡을 연주할 때만 아이폰을 들어 비디오를 찍곤 했는데 그마저도 살짝 보니까 John만 줌인하여 찍고 있었다. 오다쿠는 장르도 매우 스페시픽하다곤 하는데 그의 장르는 아마도 돌장미 2집의 John 의 기타 연주가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을 해본다.

셋리스트 보기


드디어 왔다


기념촬영하는 팬들


돌장미 등장


공연


Ian 의 막춤


John? Jesus?

My Life in the Bush of Gho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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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urce, Fair use, Link

어제와 오늘 My Life in the Bush of Ghosts를 감상했다. 이 앨범은 어릴 적 소위 “빽판”으로 가지고 있었으나 앨범 전곡을 감상했던 기억은 없다. 앨범의 앞의 몇 곡만 듣고 레코드 장에 처박아두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Talking Heads 유의 뉴웨이브 음악을 기대하고 샀던 터라 어린 마음에 아랍 풍의 연주곡이 지루했거나 당황스러웠던 모양이다.

Brian Eno와 David Byrne이 Talking Heads는 그대로 남겨둔 채 공동 작업을 통해 완성한 이 앨범의 제목은 Amos Tutuola라는 작가의 1954년 소설의 제목에서 따왔다고 한다. 소설은 읽어본 적 없지만, 어쨌든 수록곡들은 앨범 제목과 얼추 비슷한 분위기로 몽환적이고 이국적이다. 가사가 있는 곡도 있지만, 특별히 가사에 깊은 의미를 둔 것 같지는 않다. Eno의 Ambient 시리즈만큼 철저히 미니멀리즘적이지는 않지만, 가사 역시 연주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의미를 가지는 듯하다.

한편, 녹음 작업은 주로 Fear of Music(1979)의 순회공연과 Remain in Light(1980)의 녹음 사이에 진행됐다고 한다. 출시는 다소 지연됐는데 앨범에 쓰인 많은 샘플들의 지적재산권을 해결하는데 시일이 소요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하튼 앨범은 1982년 출시되었고 출시 당시에는 다양한 비평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렉트로닉과 앰비언스, 그리고 제3세계 음악이 연결된 무정형 스타일의 선구적인 작업”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명반으로 자리매김했다. Eno 스스로는 이 앨범을 “싸이키델릭 아프리카의 영상”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