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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known Pleas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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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known Pleasures는 Joy Division의 스튜디오 데뷔앨범이다. 이 앨범은 스트로베리 스튜디오에서 1979년 4월 1일에서 17일에 걸친 짧은 기간 동안 녹음을 마치고 그 해 6월 15일 팩토리 레코드사를 통해 영국에서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앨범 수록곡 중에서 싱글도 발매되지 않았고 – 홍보를 위해 “Transmission” 싱글이 발매되긴 했다 – 차트에 진입하지도 못했다. 1976년 결성되어 Warsaw라고 불리기도 했던 이 포스트펑크 밴드의 경력이 1980년대가 시작되기도 전에 끝날 것 같은 불안한 출발이었다. 물론 정규 앨범을 두 개밖에 내지 못할 정도로 활동기간이 길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은 걸작으로 남게 되었고 Joy Division 역시 시대를 대표하는 펑크 밴드로 평가받게 되었다.

이 앨범 이전에 밴드가 내놓은 앨범은 자신들이 프로듀스하여 1978년 내놓은 EP An Ideal for Living이었다. 이 앨범 덕분에 그들은 Tony Wilson의 지방 뉴스쇼 Granada Reports에 1978년 9월 출연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밴드의 매니저 Rob Gretton은 Wilson에게 Factory Records 레이블에서 Joy Division의 앨범을 내자고 제안하였다. 의기투합한 이들은 영국 스톡포트에 있는 스트로베리 스튜디오에서 작업에 착수한다. 프로듀서는 Martin Hannett이었다. Hannett은 Peter Hook의 표현처럼 “최고의 요리사”로서 Joy Division의 뛰어난 재료를 가지고 솜씨 좋게 요리를 만들었다. 그는 유리병을 깨부수는 소리, 스낵을 먹는 소리 등 평범하지 않은 음향효과를 첨가하여 곡에 세련미를 가미했다.

Hannett이 창조해낸 “공간감이 넓은 광활한 사운드”에 대한 밴드 멤버들의 의견은 엇갈렸다. Sumner는 “우리는 흑백의 그림을 원했는데 마틴이 색깔을 집어넣었다.”고 비판했다. Hook은 “난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음악이 마치 Pink Floyd같았다”라고 말했다. Morris는 이와는 다른 의견이었다. “Unknown Pleasures를 듣고 행복했다. 당시의 내 논지는 두 가지는 – 레코드를 듣는 것과 공연에 가는 것 –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Curtis도 프로덕션에 만족해했다. 2006년 인터뷰에서 Hook은 회고했다. “분명 당시에는 내가 원하는 사운드가 아니었다. 그러나 마틴이 일을 잘 했던 것은 이제 알겠다. 이에 관한 다른 대안은 없었다. 마틴 해넷이 조이디비전의 사운드를 창조하였다.”라고 인정하였다.

작가 Chris Ott는 앨범의 이름이 Marcel Proust의 Remembrance of Things Past에서 따온 것 같다고 말하였다. 앨범 커버는 Peter Saville이 맡았는데, 유명한 펄서 CP 1919의 전자파동의 이미지가 사용되었다. Saville은 흑백의 이미지를 뒤집어 검은 배경에 하얀 선의 파동 그래프가 그려진 유명한 커버를 완성하였다. 앨범은 1쇄로 1만 장을 프린트하였다. 판매량은 신통치 않았다. 하지만 LP에 수록되지 않은 홍보용 싱글 “Transmission” 이 발매되자 앨범은 전량 팔렸다. 당시 총 판매량은 1만5천 장 정도였고 차트 진입에 실패했다. 하지만 1980년 5월 Curtis가 자살하고 두 번째 정규앨범 Closer가 발매되는 등의 과정을 거쳐 재발매된 앨범은 그해 8월에 차트 71위에 진입하여 한참을 머물렀다.

평론가들의 이 앨범에 대한 평이 “불투명한 선언(opaque manifesto)”이나 “황량한 악몽의 사운드트랙(bleak nightmare soundtrack)”이라 평할 만큼 이 앨범은 황량한 상실감으로 메워져 있다. 앨범 발매 이후 1년이 되지 않아 자살을 선택한 이언 커티스의 심신에 걸친 극도의 불안감이 앨범에 고스란히 녹아들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Joy라는 단어를 밴드 명에 쓰고 Pleasures란 단어가 앨범 명에 쓰인 것 치고는 너무나 역설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미스터리하고 음습한 보컬이 조급증이 느껴지는 연주나 특수효과와 함께 공감감이 넓은 음악 안에서 메아리칠 때, 그 공간에서 느껴지는 것은 이언 커티스의 거대한 공허감이라는 점이 이 앨범의 매력이자 – 결말을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 가슴 아픈 부분이다.

Clo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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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 Division Closer” by Source. Licensed under Wikipedia.

Closer는 영국의 포스트펑크 밴드 Joy Division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발매된 스튜디오 앨범이다. 1980년 7월 18일 레코드 레이블 Factory를 통해 발매된 이 앨범은 리드 싱어 Ian Curtis가 자살로 생을 마친 두 달 후에 발매되어 그의 유작이 되었다.(그의 삶과 죽음은 Anton Corbijn의 영화 Control을 통해 재조명되기도 했다) 유명한 앨범 재킷은 Martyn Atkins와 Peter Saville이 맡았다. 사진은 Bernard Pierre Wolff의 작품으로 이탈리아 제노아에 있는 한 가족 묘지를 찍은 사진이다. 묘지 사진을 쓰자는 아이디어는 Peter Saville의 아이디어로 Ian의 죽음을 전해들은 Peter가 그의 죽음을 기리고자 낸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Martin Hannett이 프로듀스한 이 앨범은 오프닝 트랙의 제목이기도 한 J.G. Ballard의 소설 The Atrocity Exhibition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Ian은 사실 그 소설을 읽기 전에 이미 대부분 곡의 가사를 다 썼다고 한다. 어쨌든 이 앨범은 그룹의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지워질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준 걸작 앨범이 되었다. 한 평론가가 “고딕락의 어둠의 일격(dark strokes of gothic rock)”이라고 표현한 이 앨범은 이후 고딕락, 이모(emo), 인디 뮤지션들에게 수많은 영감을 주는 앨범으로 남게 되었다. 12인치 LP로 발매된 앨범은 영국 앨범 차트 6위까지 올랐고 호주에서는 4주간 1위에 머물렀다.

Chuck Berry의 펑크밴드들에 관한 생각

Chuck Berry이 1980년 펑크 잡지 Jet Lag과 인터뷰를 가졌다. 베리는 “요즘 아이들이 듣는 것”에 관한 그의 생각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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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ck Berry 1971” by Universal Attractions (management) – eBa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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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ack.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The Sex Pistols’ “God Save the Queen”:

그 녀석들은 대체 무엇에 화가 나있는 것인가? 기타 연주나 진행은 내 것과 같다. 백비트도 좋다. 보컬 대부분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니가 화가 나 있으면, 최소한 사람들이 네가 뭐에 화가 나있는지 알게 해야 할 것이다.

The Clash’s “Complete Control”:

처음 것과 비슷하게 들린다. 리듬과 코드 진행은 잘 어울린다. 이 친구 노래 부를 때 인후염에 걸린 거냐?

The Ramones’ “Sheena is a Punk Rocker”:

괜찮은 곡이다. 이 친구들 덕분에 내가 처음 시작했을 때가 떠오른다. 나 역시도 코드 세 개밖에 몰랐다.

The Romantics’ “What I Like About You”:

마침내 춤출 수 있는 것이네. 추가로 주어진 내 리프 몇 개가 섞인 육십 년대 음악처럼 들린다. 이게 신곡이라 그랬었나? 난 이 곡을 많이 들었다. 이런 야단법석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Talking Heads’ “Psycho Killer”:

펑키(funky)한 곡이다. 확실히. 베이스가 아주 맘에 든다. 좋은 조합에 흐름도 아주 좋다. 싱어는 아주 안 좋은 무대공포증의 경험이 있는 것처럼 들린다.

Wire’s “I Am the Fly”, Joy Division’s Unknown Pleasures:

그래 이것들이 소위 새로운 것들이다. 전에 들은 적이 없는 곡이다. 이 곡은 BB와 Muddy가 시카고의 오래된 원형경기장의 백스테이지에서 연주했을 것 같은 오래된 블루스 잼처럼 들린다. 악기는 틀릴지 모르지만 실험정신은 같다.

원문보기

Nicky Wire가 뽑은 명반 10선

주) 지금은 문을 닫은 음악사이트 changgo.com에 올라왔던 글을 전재합니다.

Nicky Wire : Manic Street Preachers의 베이시스트

THE BEATLES
Revoler(Parlophone, 1966)

♬ 내가 비틀즈를 알게된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들의 곡들은 멜로딕하고 꽤 괜찮다. 당신이 더 극단적인 사운드를
원하더라도, 그들의 다양성과 거침없는 가사에 대해 점차적으로 깨닫게 된다. 나는 이 앨범이 이러한 장점을 완벽하게 모아놓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The White Album]도 사랑하지만 그것은 다소 과대평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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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LASH
London Calling(CBS, 1979)

♬ 본 작품은 전생을 통틀어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앨범이다.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의 사운드 색은 이 앨범의 영향을 받고 있다.
클래시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던 것 같다. 여기에는 그렇게 다양한 음악이 있고, 그렇게 잘 프로듀싱되었으며 환상적인 가사가
있다. 아트워크 또한 놀랍다. 그것은 롤링 스톤스(The Rolling Stones)의 [Exile On Main Street]
만큼이나 좋다. 하지만 우리가 [London Calling]을 들으며 자라왔기 때문에 이 앨범이 더 우위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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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 DIVISION
Unknown Pleasures(Factory, 1979)

♬ 웨일즈에서 사는 것은 가장 끔찍한 일일 것이다. 많은 비가 내리는 꽤 고립된 곳. 그들의 전작을 살펴보면 꽤 파워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언 커티스(Ian Curtis)는 놀라운 뮤지션이다. 앨범의 가사는 내가 결코 들어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많은 면에서 꽤 불안정하였다. 한계를 깨뜨리는 데 있어서 이언 커티스는 대부분의 락 싱어보다 훨씬 뛰어났다. 아트워크 또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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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M
Fables Of The Reconstruction(IRS, 1985)

♬ 이것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들었던 앨범이다. 잊혀진 R.E.M의 시대. 인터뷰에서 그들은 항상 자신들이 정말로 끔찍하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것을 싫어했지만 나는 ‘Driver 8’, ‘Maps And Legend’, ‘Green Grow The
Rushes’를 사랑한다. 다만 내가 자주 연주하는 것들. 사랑스런 앨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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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NS N’ ROSES
Appetite For Destruction(Geffen, 1987)

♬ 퍼블릭 에너미, 건즈 앤 로지스는 모두 약 1988, 89년 정도에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서로 완전히 다른 음악색을 띠고
있었지만 모두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었다. 나는 마력적인 락큰롤을 하였던 건즈 앤 로지스를 사랑하였다. ‘Sweet Child
O’ Mine’, ‘Welcome To The Jungle’, ‘Paradise City’, ‘Rockeet Queen’….
그것들은 모두 나의 기억에 각인되어 있다. 워런트(Warrent), 포이즌(Poison), 머틀리 크루(Motley Crue)와
같은 소프트메틀 밴드들이 있던 미국에서 그들은 실제적인 락큰롤 밴드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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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ONE ROSES
The Stone Roses(Silvertone, 1989)

♬ 이 앨범은 나의 지난 대학시절을 회상하게 한다. 이 밴드는 몇몇 공연을 가졌고 레코드 계약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앨범이 나왔을 때 우리는 완전히 다른 시대에 있었다! 이때에 놀라운 1960년대 사이키델릭 팝 앨범을 냈던 것이다. 당시 우리는
미친 듯한 펑크음악을 만들고 있었다! 우리는 항상 그것을 연주하였지만 그것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정말로 그것에 의해
따돌림을 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를 더 노력하게 만들고 목적의식을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문화적인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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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 ENEMY
Fear Of A Black Planet(Def Jam, 1990)

♬ 제임스는 항상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을 사랑하였고 끊임없이
연주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Fear Of A Black Planet’, ‘Who Stole The Soul’, 그리고 특별히
놀라운 곡들이라고 생각하는 [Burn Hollywood Burn] 만큼이나 그것에 빠져들진 않았다. 나는 이 두개의 앨범들이
NWA의 [Straight Outta Compton]과 함께 랩 역사상 중요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어떤 밴드의 곡을
카피할 수 없다는 것은 그 밴드가 아주 훌륭한 밴드라는 증거일 수 있다. 그리고 누구도 퍼블릭 에너미를 카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
음악은 랩뮤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빠르고 환상적인 가사를 갖고 있다. 랩은 현재 꽤 엉성한 R&B로 변형되기도 하였고
매우 퇴폐적이 되었다. 70년대 락뮤직과 비슷하게 그것은 여자, 마약 돈으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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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RVANA
In Utero(Geffen, 1993)

♬ [Nevermind]가 나의 베스트로 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In Utero]는 우리가 꽤 불안정한 어떤 것을 필요로
했던 때 우리의 삶의 한 때를 요약하고 있다. 사람들은 너바나의 사운드가 얼마나 놀라웠던가를 잊고 있다. 이 앨범에는 존
보남(John Bonham)이나 낼 수 있음직한 최고의 드럼사운드가 있다. ‘All Apologies’는 전생을 통틀은 나의
베스트 곡들 중 하나가 되었다. 커트는 락의 신이고 너바나는 90년대를 대표하는 미국 최고의 밴드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를 만나본
적이 있냐구? 아니다. 솔직히 나는 실망하는 경우가 생길까봐 존경하는 사람과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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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 FURRY ANIMALS
Fuzzy Logic(Creation, 1996)

♬ 나는 다만 이 앨범을 사랑한다. 내가 그것에 관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환상적인 작품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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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SIVE ATTACK
Mezzanine(Vergin, 1998)

♬ 매시브 어택은 댄스라는 장르로 다루기에는 꽤 다른 모습이다. 대신 그들은 모든 종류의 음악과 모든 종류의 스타일을 섞어
놓았다고 생각한다. ‘Risingsun’은 가장 희귀한 곡이다. 많은 방면에서 1990년대의 대표급 밴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의 곡은 영국에서 진행되는 음악들을 절충하는 듯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우리의 곡들을 믹스하기도 하였고
블러(Blur)의 데이먼(Damon)도 그들과 이와 같은 일을 하였다. 나는 그들이 다양한 영국문화의 환상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펑크의 자기부정에 대한 단상

역시 블로깅은 재밌다. 아래 글들은 이른바 Punk Spirit 에 관한 일련의 커뮤니케이션을 시간 순으로 나열해본 링크들이다. ‘웅크린 감자’님이 펑크적이지도 않은 빅뱅은 펑크 흉내 내지 말라고 화두를 꺼내셨고, ‘민노씨’가 ‘웅크린 감자’님의 훈계가 모순되게도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대안을 찾고 있다고 비판하셨고, ‘히치하이커’님이 “다만 실제로 국내 음악신에서 아이돌이란 위치에 있는 이들이 얼마나 자율적으로 음악을 하고 있는진 궁금하긴” 하다며 민노씨의 글을 첨언하셨다.(비판은 아닌 것 같고) 그리고 이에 대해 민노씨가 또 “펑크는 궁극적으론 자신을 부정하고, 극복하고, 역먹이려는 정신이라고 나는 감히 이야기하고 싶다”라고 첨언하셨다.



펑크 음악을 즐겨듣는 나에게는 참 흥겨운 주제다. “펑크는 궁극적으로 자신을 엿 먹이려는 정신”이라는 민노씨의 멘트도 왠지 공감이 간다. 그것 아마 아래와 같은 이유때문 일 것이다.(너무 냉소적일지 몰라도…)


시장 지배를 위한 음악 산업의 전략은 정밀하게 발전되어 왔다. 시장은 그들이 장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주기적으로 해결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주장이다. 레코드 회사들은 인디펜던트들의 활동으로 드러난 시장 수요에 가끔 부응하기도 하지만 보통 그들은 시장을 교묘히 조작하고 가능한 선택을 제한한다. 이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대중적 취향이다. 한편으로 대중은 항상 혁신에 응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대중적 취향은 항상 장사꾼들에 의해 현혹되기도 한다. 불만스러운 요구들이 쌓여 마침내 터져 나올 때까지 기업은 대중적 취향 위에 군림하다가 인디펜던트들에 의해 이 욕구는 상업화하고 다시 이는 기업의 의해 매수된다. 그러나 의문점은 어디에서 그러한 새로운 요구들이 생겨나는 것인가? 왜 시장 통제는 대부분 효율적이지만 가끔씩은 그렇지 않은가? 대중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는가? 항상? 가끔씩? 이 장에서 얘기하고 싶은 요점은 록이 제작되는 상업적 프로세스는 본질적으로 상호 모순적이라는 것이다.[록음악의 사회학 사운드의 힘, 사이먼 프리스, 권영성/김공수 옮김, 한나래(1995), pp 128~129]


어쨌든 모든 예술행위는, 급기야 모든 (정치적, 경제적, 사상적) 행위는 다른 이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전달되지 않는 한에는 지가 무슨 랭보였든, 피카소였든, 커트 코베인이었든, 트로츠키였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지 않게 된다. 그 점이 체제순화적인 행위에서야 갈등을 빚을 일이 없겠으나 체제모순적인 행위에서는 그 자체가 모순이 된다. ‘이거 시발 체제는 좆같은데 그걸 알리려면 체제 안으로 들어가야 되다니’라는 독백을 바로 윗 글에서 사이먼 프리스가 시장과 인디펜던트의 관계를 비유로 들며 어렵게 설명해주었다.


팬들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suede가 우리나라에 알려지지 않았을 때 그 광팬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 분 왈 제발 우리나라에서 유명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단다. 자신을 메인스트림에 쩔어있는 국내 팝팬들과 차별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그런데 그 팬은 suede 가 영국 음악씬에서 명성을 얻지 않았다면 그들의 이름을 알기나 했겠는가. 그것이 음악‘시장’에서의 팬(특히 오덕후스러운)들의 딜레마일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상호모순’이 가장 비극적으로 표출된 사례는 Joy Division의 이언 커티스나 Nirvana의 커트 코베인의 자살이 아닐까 싶다. The Clash 를 비롯한 상당수의 펑크 밴드들도 자신의 이데올로기, 상업주의, 팬들의 모순된 요구 속에서 긴장감과 자기부정 속에서 괴로워했고 말이다.(이러한 자기부정은 자본주의 정치체제로 편입한 좌파정당의 평당원들 사이에서 꽤나 심각한 고민거리다) 결국 민노씨 이야기처럼 ‘끊임없이 자기부정을 하는 펑크 정신’이 온존하여 음악계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면 좋겠지만 당사자에게는 상당한 스트레스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엄청난 펑크관련 블로그 하나 소개

추.


예전에 NHK에서 밴드 경연대회를 본적이 있는데 모히칸 머리를 하고 웃통을 벗은 엄청난 녀석이 보컬을 맡은 펑크밴드의 공연도 있었다. 이 보컬, 사회자의 단상까지 들고 나와서는 무대를 개판으로 만들어버렸다. 문제는 공연이 끝나고 난 후인데 단상을 죄송스럽다는 표정으로 들고 가 정중히 내려놓고 ‘스미마센’하며 인사를 꾸벅 하는 것이었다. 그때 일본 애들 중엔 펑크밴드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New O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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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11 New Order live” by myself – 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1980년 영국 맨쳐스터에서 결성

멤버 : Peter Hook, Stephen Morris, Bernard Sumner, Gillian Gilbert

1.뉴 오더(new order)의 전신- 조이 디비젼(joy division)

섹스 피스톨즈와 클래쉬가 이루었던 영국 음악계의 펑크(punk)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원래 정치적 색채가 짙은 무브먼트의 성격으로 시작되었던 펑크는 주류 팝 씬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었기 때문에 상업적인 성공을 기대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었고 결국 스스로 다시 언더그라운드화 되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아직 섹스 피스톨즈의 여파가 남아있던 1977년,바르샤바(warsaw)라는 이름으로 처음 음악활동을 시작했던 Joy Division은 비록 그 활동 기간이 3,4년 밖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포스트 펑크의 새로운 대안인 뉴웨이브의 서막을 열었던 밴드였다. 조이 디비젼은 79년에 맨체스터의 팩토리 레코드(소위 맨체스터 사운드라 부르는 일단의 음악적 흐름을 조성했던 그 레코드사-뉴오더,더 스미스,스톤 로지스 등이 팩 토리 레코드와의 밀월관계로 유명하다)와 계약을 맺고 첫 싱글 ‘Transmission’과 데뷔 앨범’Unknown Pleasures’를 발표했다.

이 앨범은 곧 비평가들로부터 대대적인 찬사와 지지를 받았고 이후에 발매된 싱글 역시 많은 지지를 받았다.그러나 1980년 5월 18일,대망의 두번째 앨범 ‘Closer’가 미국 시장으로 진출하기 하루전 보컬리스트이자 팀의 핵심적인 존재였던 이안 커티 스가 돌연 목을 매 자살하고 만다.급격한 건강 악화와 영국 팀으로서 미국 시장에 진출한다는 심리적인 압박감이 그를 자살로 내어 몰았던 것이다. 이안 커티스의 죽음 이후,조이 디비젼은 두장 짜리 회고앨범인 ‘Still’을 발매하고 공식적으로 해산된다.

2.새로운 대안- 뉴 오더(New Order)

너바나가 커트 코베인의 자살 이후 해산되었듯이 조이 디비젼도 이안 커티스의 죽음으로 해산되었지만,이들은 너바나처럼 뿔뿔이 흩어지지는 않았다.조이 디비젼의 잔류 멤버였던 버나드 섬너(기타)와 피터 훅(베이스),스티븐 모리스(드럼)는 새로 운 여성 키보디스트 질리언 길버트(당시 스티븐 모리스의 애인이자 현 부인)를 영 입하여 80년,새로운 그룹인 뉴오더를 탄생시켰다.

뉴 오더는 초기에는 펑크의 기운이 많이 남아있는 사운드를 들려주었으나 차츰 일 렉트릭 사운드와 기타 락의 균형 잡기에 노력하였고 결국 그들 만의 독특한 뉴웨이브 사운드 구축에 성공한 그룹이다.이들은 그당시 독일 전자 음악계의 대부격이었 던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와 아방가르드 전자 음악으로 유명한 아트오브노이즈(Art Of Noise)의 영향으로 신서사이저와 시퀀서 등을 적극 도입하였지만 분명히 이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뉴 오더는 다분히 비상업적이었던-학구적이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듯한-크라프트베르크나 아트 오브 노이즈와는 다르게 상업적으로도 뛰어난 음악을 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들의 음악이 단지 돈을 위해 양산해내는 ‘땐스’뮤직이라는 말은 아니다.) 뉴 오더는 각종 일렉트릭 악기의 도입과 수많은 댄스 플로어 용의 리믹스 싱글 작 업을 통해서 대중에게 강하게 어필했지만,이들의 음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적 댄스뮤직’으로 불릴 만큼 충분히 비주류 적이다.바로 이런점이 이들의 음악이 단순한 댄스 뮤직으로 매도되지 않고 10년 이상이나 활동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뉴 오더는 비록 국내에서는 그 이름값을 다 못하고 있지만,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십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일렉트릭 팝의 최대 약점인 말랑말랑 한 사운드에도 불구하고-최고의 뮤지션으로 칭송받고 있는 것이다.

조이 디비젼이 그랬던 것처럼 역시 맨체스터의 팩토리 레코드와 계약을 맺은 이들은 조이 디비젼의 음악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스타일의 데뷔작인 ‘Movement’를 81년에 발표했다. 82년에 싱글 ‘Temptation'(영화 트레인 스포팅에도 삽입됨)을 공개하여 대대적인 찬 사를 받은 이들은 83년에 또다른 싱글 ‘Blue Monday’를 발표하고 두번째 앨범인 ‘ Power,Corruption And Lies’를 발표하였다.뉴 오더는 이 두 번째 앨범을 통해 다분 히 펑크적 잔재가 남아있었던 조이 디비젼 시절의 음악적 모습을 청산하고 기타 락 과 신서사이저 댄스 뮤직과의 균형미를 이루는데 성공한다. 85년에 세 번째 정규 앨범인 ‘Low Life’를 발표한 이들은 신서사이저 사운드를 강화 하고 드럼 머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등 보다 일렉트릭 사운드에 치중한 모습을 보 여준다. 86년에 발표한 앨범 ‘Brotherhood’는 기타 파트가 강한 멜로디 위주의 사운드를 선 보여 어쿠스틱과 일렉트릭의 공존을 시도했다.

87년,뉴오더는 그동안 자신들이 발표했었던 싱글들과 B면 수록곡,그리고 미발표곡 들을 한데 모아서 더블 컴필레이션 앨범인 ‘Substance’를 발표한다.사실상 그들의 첫 번째 베스트 앨범이자 싱글과 리믹스 작업에 치중하는 이들의 음악적 스타일을 한 번에 꿰뚫어볼수 있는 작품으로서 미국 시장에서도 놀라운 반응을 얻었다.이 앨 범에는 국내에서도 인기가 좋았던 곡인 ‘Bizarre Love Triangle'(호주 출신의 뮤 지션 프렌테가 리메이크한 노래)은 물론 ‘1963’등 그들의 히트 싱글들과 조이 디비 젼 시절의 미발표곡 ‘Ceremony’,’In A Lonely Place’등이 수록되어 있다. 89년 발표한 하우스 뮤직 스타일의 6번째 앨범 ‘Technique’를 통해 또다시 인기 몰이에 성공한 이들은 90년 영국 월드컵 축구팀 응원가인 ‘World In Motion’을 발표 하여 영국 싱글 차트 첫 정상을 차지했다.

90년대 들어서 이들은 공식적인 활동을 그만두고 얼마 동안 팀 멤버들의 독자적인 프로젝트 밴드 결성으로 팀이 해체된 것 아니냐는 의문까지 제기되었다.버나드 섬너 는 영국의 국민적 락그룹 더 스미스의 기타리스트였던 자니 마와 함께 일렉트로닉이 라는 하우스 뮤직 스타일의 밴드를 만들었고,피터 훅은 Revenge를,그리고 스티븐 모리스는 질리언 길버트와 함께 The Other Two라는 프로젝트 밴드를 각각 만들어 각자 활동에 전념했다.(버나드 섬너는 90년에 발표되었던 데뷔작 ‘Electronic’ 에 이어 96년에 크라프트베르크의 전 멤버였던 칼 바튼과 함께 두번째 앨범 ‘Raise The Pressure’를 발표했고 피터 훅은 Monaco란 밴드를 결성해서 데뷔 앨범 ‘Music For Pleasure’를 발표했다.)

그렇지만 93년 이들은 그동안의 각종 루머들을 일축시키며 새로운 앨범을 내놓았고 ‘Republic’이라는 이름의 이 앨범은 뉴오더의 앨범 중 처음으로 국내에 라이센스 발매되었다.(이들은 이 앨범부터 레코드사를 이적하여 지금은 런던 레이블로 앨범을 발매하고 있다.) 94년과 95년 두장의 베스트 앨범을 발매한 이들은 올해 7월 재결성 공연과 함께 새로운 활동을 시작할 예정이다.

From ThaDogg

3. 이름의 기원

Joy Division :
From a sadomasochistic novel “The House of Dolls” by Karol Cetinsky.. Joy Divisions were lines of huts in which deported women were forced to prostitute themselves to Nazi officers on leave. [Bobo]

New Order :
1) From a newspaper article about the “new order of architecture”. [Jenny Turner]
2) Another thinly-veiled Nazi reference. C.f. Joy Division. [Roderick]
3) Depending on how you look at it, on 1993’s New Order Story video, Barney and Gillian cast jokes about the Nazi reference thing, but then got serious and said that they looked at the name as a logical thing [melshgeek]

4. 다른 글

http://www.intermuz.com/theRocker/noiz_box/NOISE6.asp

우울한 신스 팝의 대명사- 뉴 오더

뉴 오더가 제시한 ‘새로운 질서’란 기존의 펑크적 요소에다 가공할 만한 댄스 비트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독특한 신스-팝이었다. 이들은 조이 디비전에서 들려준 무겁고 암울한 고딕 사운드 대신 시퀸서와 드럼 머신, 신시사이저를 도입한다. 80년대 내내 이들이 주력했던 음악은 다름 아닌 ‘디스코!’ 하지만 이 천덕꾸러기 같은 댄스뮤직조차 뉴 오더를 통해 위트와 재치 넘치는 연주력이 십분 발휘된 독특한 신스팝으로 재창조된다.
무거운 베이스음이 곡 분위기를 주도해 가는, 음울한 분위기의 펑크 내 하위장르인 고딕을 주창하며 70년대 말 등장한 ‘조이 디비전(Joy division)’은 다름 아닌 이 ‘뉴 오더’의 전신 밴드였다. 미국 공연을 앞둔 1980년 5월 그룹의 핵심인 보컬 이언 커티스의 자살은 곧바로 ‘조이 디비전’의 종언을 의미했다. 조이 디비전의 나머지 맴버들인 버나드 섬너, 피터 훅, 스테판 모리슨은 여성 멤버 이언 길버트를 영입 ‘뉴 오더’를 결성하기 이른다. 그러나 그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라며 다소간의 음악적 방황을 겪게 된다.

♬ Sound Chek Box ♪♩

Temptation(유혹-1982)
Blue Monday(우울한 월요일-1982)
Age of Consent(합의의 시대)
Confusion(혼돈-1984)
Perfect Kiss(완벽한 입맞춤-1985)
Subculture(하위 문화-1985)
Bizarre Love Triangle(기이한 사랑의 삼각형-1986)
True Faith(진실한 믿음-1987)
Round & Round”(둥글게 둥글게-1989)

그들의 첫 앨범 ‘Movement(움직임-1981)’는 기존 조이 디비전 스타일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의 첫 싱글 “Ceremony(의식-1981)”는 조이 디비전의 짙은 그림자가 여전히 깔려있음을 말해준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분명 과거 조이 디비전과의 단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 싱글로 발표된 “Temptation(유혹-1982)”은 이들의 뚜렷한 변화를 진행되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나중에 선보일 그들의 음악에서처럼 전자음 비중이 두드러지진 않지만 비트감은 이전보다 훨씬 힘차게 뻗어나가고 곡 분위기도 예전 ‘Movement’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밝다. 버나드 섬너와 피터 훅이 만드는 기타와 베이스간의 하모니가 돋보인다.

하지만 뉴 오더의 존재를 전 세계에 알릴 수 있었던 건 바로 그들의 대표작 “Blue Monday(우울한 월요일-1982)”였다. 뉴 오더의 본격적인 음악 이정표는 바로 이 “우울한 월요일”을 통해 확립된다. 새로 구입한 드럼 머신과 시퀸서의 작동을 시험해 보는 과정에서 탄생한 우울한 월요일은 신시사이저와 드럼 머신이 시종 일관 주요 멜로디와 리듬을 만들어 낸다. 매혹적인 인트로가 신시사이저에 실려 나오는 동안 어느새 디스코 특유의 말 달리는(?) 리듬이 넘실대며 버나드 섬너의 어눌하고 거친 보컬이 뒤를 잇는다. “오늘 당신의 기분은 어떠십니까?”하며 잠시 생각을 할때 쯤 간간이 들이는 피터 훅의 ‘둥당당당’ 하며 울리는 베이스음은 ‘조이 디비전아 안녕!’하고 작별인사를 한다. 마치 지난날 고딕과의 애증을 대변하는 듯. 영국 내에서만 300만장이 팔린 이들의 “우울한 월요일”싱글은 영국 팝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이라는 명예로운 기록을 수립하기 이른다. 이듬해 발표된 ‘power, Corruption, & Lie(권력, 부패, 그리고 거짓말-1983)’은 “유혹”과 “우울한 월요일”에서 들려준 음악 재료가 오밀조밀 짜여있다. 버나드 섬너의 기타는 “Age of Consent(합의의 시대)”에서 보듯 그루브 감이 넘실댄다. 전자음이 그다지 화려하게 느껴지진 않지만 그들이 달성한 “변화의 증거”가 물신 풍긴다.
연이은 싱글 “Confusion(혼돈-1984)”과 “Perfect Kiss(완벽한 입맞춤-1985)”, 그리고 “Subculture(하위 문화-1985)”등에선 우울한 월요일을 능가하는 경쾌한 신스 팝을 들려준다. 전자 음의 비중은 훨씬 높아지고 리듬은 보다 치밀하고 경쾌하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신스 팝은 어둡고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다. “완벽한 키스” 종반부에서 들려준 휘몰아 치는 듯한 신사사이저 음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몽환감을 느끼게 한다.

패션 쇼 배경음악으로도 자주 쓰이는 “Bizarre Love Triangle(기이한 사랑의 삼각형-1986)”에 지금까지 발표한 싱글들과 미 발표곡들, 그리고 “True Faith(진실한 믿음-1987)”라는 신곡이 수록된 우수한 컬렉션 앨범 ‘Substance’는 뉴 오더가 전형적인 싱글 밴드임을 증명한다. 미국 팝 시장에 그들의 존재를 본격적으로 알리게 된 계기가 된 본 앨범의 신곡 “진실한 신념”은 영국 차트 1위 등극의 영광을 밴드에 선사한다. 조이 디비전에 이어 뉴 오더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전 세계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그들이 남긴 것들- 매드체스터의 산파자

이들의 활동 전반기에 발표된 싱글들에서 발견되는 점은 버나드 섬너의 보컬은 결코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멤버 각자의 기량이 균등하게 조화된 신스 팝이 그들의 특징이다. 80년대 초 인기를 누리던 대부분의 신스팝 그룹들이 ‘노래’라는 부분에 비중을 뒀던 반면 이들의 음악은 철저히 ‘4인조 밴드 편성’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멤버들의 사진들로 일관된 “Low life-1985” 앨범 자킷 디자인은 그들의 음악만큼이나 이색적이다. ‘음악을 들어달라는 무언의 요구’와도 같은 이들의 의도는 분명 주류 음반 시장의 관행과는 거리가 있다. 더군다나 보컬을 맡은 버나드 섬너는 지나치게 의기양양(?)하게 들려 청자로 하여금 거부감마저 준다.

뉴 오더가 남긴 음악은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두 장르-펑크 록과 댄스 팝-간의 온전한 화학반응을 일궜다는 평가로 집약될 수 있다. 뉴 오더는 스미스와 더불어 향후 90년대 브릿팝으로 이어지는 영국 얼터너티브 록음악의 형세를 예견케 해준 맨체스터 출신의 밴드였다. 그들이 개척한 “우울한 신스팝”은 맨체스터 내에서 카다란 반응을 몰고 왔고, 89년부터 91년 사이에 뉴 오더의 출신지역인 맨체스터를 중심으로 형성된 “매드 체스터 군단(일명 미친 매드체스터들)”의 직접적인 영향력으로 작용한다.

80년대 후반 영국 인디 록계의 기억되는 한가지 사건은 댄스 클럽에 불어닥친 “에이시드” 열풍이었고 영국 내에서 몽환적인 하우스 음악의 인기는 주류 록 음악 시장과의 차별 점으로 부각된다. 인디 록계에서도 매드 체스터를 중심으로 이 “에이시드 열풍”의 동반자로 나서게 되었고 이에 뉴 오더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이 설립한 인디 레이블인 팩토리 레코드 회사와 별도로 출신 지역 맨체스터에서 ‘하시엔다’라는 클럽을 운영하면서 맨체스터 출신의 인디 밴드들에게 무대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 곳을 기점으로 인디록과 에이시드 하우스 비트와의 화려한 결합음모는 싹이 트고 있었다.

피터 훅이 프로듀서로 참여한”스톤 로지스”나 뉴 오더의 팩토리 레이블 소속이었던 “해피 먼데이”와 같은 매드체스터를 대표하는 밴드들 역시 뉴 오더의 직간접의 영향을 받으며 등장하게 된다. 그들의 89년작 ‘Tehchnique(기량)’ 앨범은 이런 “에이시드-하우스” 뮤직의 영향을 온전히 반영한다.”Round & Round”(둥글게 둥글게-1989)는 전형적인 하우스 뮤직 구성을 갖고 있다.

그들은 어디에…-개인 프로젝트 활동

하지만 그들의 명성과는 달리 뉴 오더 내부에선 심심치않게 들려온 멤버간의 음악적 견해차는 활동 전반을 통해 전편에 언급한 스미스에 못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그들의 모습을 보기란 여간 힘들다. 공식적인 뉴 오더의 음반은 95년에 발매된 그들의 88년-94년까지의 후반기 싱글 베스트 모음집 이후 아무런 새 음반 발매 소식이 없는 상황이다. 해체설도 없지 않아 나돌긴 했지만 아직까진 공식적인 표명이 없는 상황이다. 사실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뉴 오더의 공백은 곧 개인 프로젝트 활동의 진행’을 의미했다. 90년대 들어 이들의 소위 “따로 또 같이”활동 형태는 지금까지 계속된다. 버나드 섬너는 전편에서 언급된 기타리스트 자니 마와 ‘일렉트로닉’이라는 테크노 팝 그룹을 결성하여 현재까지 3장의 앨범을 발표해놓은 상황이다. 피터 훅은 ‘Monacco’라는 프로젝트 음반을 발표하고, 스테판 모리슨과 이언 길버트(둘은 부부임)는 ‘The other two’란 그룹을 만들어 활동 중이다.

-자스보이-  jassboy@hanmail.net )

The ROCKER™ by InterMuz.com since, 2000.

[지나가다] [제 사이트도 아닌 곳에서 저도 이러고 싶지 않습니다만] Come on, you j-ass boy! That’s bloody enough. 이언 길버트->질리언 길버트. Age Of Consent-> 법적으로 합의 섹스가 가능한 나이에 대한 함의가 있는 곡. 그리고 제발 디테일을 제맘대로 빠뜨리지 좀 말았으면- 단순히 맞춤법만이 아니라 적어도 타이틀 같은 건 정확하게 인용을 해야 할 게 아닌가 말임다… 헉헉 이상 overtly upset + frustrated된 지나가다였슴다…ㆀ -11월10일-
[moz]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이럴때 싸이트를 만든 보람을 느낀다니깐요. 🙂 -11월10일-

디스코그래피
1981 Movement Factory
1983 Power, Corruption & Lies Qwest
1985 Low-life Qwest
1986 Brotherhood Qwest
1987 Substance Qwest
1989 Technique Qwest
1992 BBC Radio 1 Live in Concert Import
1992 BBC Radio 1 Live in Concert Varese
1993 Republic Qwest
2001 Get Ready [Japan Bonus Track] Wea
2001 Get Ready Warner
2002 Back to Mine DMC
2002 Live in Concert ROIR
2005 Waiting for the Sirens’ Call
2013 Lost Sirens
2015 Music Complete


링크
the Official site
World in Motion
Taxbox23

Joy Division

Joy Division promo photo.jpg
Joy Division promo photo” by Source (WP:NFCC#4). Licensed under Wikipedia.

리드싱어 Ian Curtis가 죽기전 밴드의 이름으로 발매된 앨범이 오직 하나밖에 없었던 Joy Division은 팝뮤직씬에 믿기지 않을 만큼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1977년 어느날 키타리스트 Bernard Albrecht(Bernard Sumner)는 베이시스트 Peter Hook과 함께 Stiff Kittens라는 밴드를 조직했다. 그들은 보컬에 Ian Curtis와 드러머 Steve Brotherdale을 영입하여 Warsaw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하였다. 이들은 Buzzcocks 등의 써포트밴드로 라이브 활동을 시작하였다. 몇개의 데모를 만든 후에 Brotherdale이 그룹을 떠났다. Stephen Morris가 빈 자리를 메꿨다.

그해 말경 그들은 Warsaw Pakt라는 펑크밴드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름을 Joy Division이라고 바꿨다. – Karol Cetinsky의 2차대전에 관한 소설 The House of Dolls에서 영감을 얻은 이 이름은 나찌 병사들에게 매춘을 하도록 강요받았던 여자 부대원들을 일컫는 슬랭이다. – 주로 북부지방에서 공연을 했던 1978년 그들은 그룹의 매니저가 된 Rob Gretton, Factory 레코드사의 오너이자 TV저널리스트였던 Tony Wilson 등의 지지자를 얻게 된다. 그 해 이들은 셀프타이틀 앨범을 녹음했다. 펑크의 클래식으로 남을 뻔했던 이 앨범은 몇몇 곡에 씬써싸이저를 덧씌운 스튜디오 엔지니어의 행동에 화가 난 멤버들이 LP를 전부 폐기시켜버림으로써 전설속으로 사라졌다.(Warsaw라 이름붙여진 이 앨범의 브트렉이 떠돌기도 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첫발매된 앨범은 밴드의 자체 라벨인 Enigma를 통해 발매된 EP An Ideal for Living이다.

그룹은 Martin Hannett과 함께 레코딩을 시작하여 1979년 7월 그들의 오랜 친구인 Tony Wilson의 Factory 레이블을 통해 Unknown Pleasures를 발매했다. 이 앨범은 평론가의 찬사를 얻었고 꽤 오랜 기간 영국의 인디챠트에 머물렀다. 영국의 펑크붐에 자극받은 미국의 Warner Bros가 계약을 제의했으나 밴드는 이를 무시했다. 그해 그들의 라이브쇼는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인기의 이면에는 아이러니칼하게도 Curtis의 심약한 건강도 한몫했는데 그는 공연중에 종종 발작증세를 일으키곤 했다. 점점 더 그의 정상적인 스테이지에서의 제스쳐와 진짜 발작간에 구분이 모호해졌다. 공연이 지속됨에 따라 Curtis는 점점 더 약해져갔다.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낸 그룹은 유럽 공연에 돌입했다. 그러나 몇몇 공연은 Curtis 때문에 취소되었다.

그룹은 공연을 마친 후 두번째 LP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4월에 Love Will Tear US Aprart를 내놓았다. 5월초 한차례 공연후에 그룹은 미국 공연전에 2주일간의 휴식에 들어갔다. 그러나 출발 이틀전인 1980년 5월 18일 Curtis는 그의 집에서 스스로 목을 매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Curtis가 죽기전 그룹은 멤버중 한명만 그룹을 떠나더라도 밴드를 해체하기로 약속했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1980년 여름 바야흐로 그룹의 인기가 막 치솟하 오르기 시작했다. 재발매된 Love Will Tear Us Apart는 영국 싱글 챠트 13위까지 오르는 등 그룹의 최대 히트곡으로 부상했다. 8월에 발매된 Closer는 매출이 급상승하여 챠트 6위까지 오르게 된다. 여름이 가기 전에 Unknown Pleasures까지 챠트에 등장했다.

Joy Division의 또다른 위대한 면은 살아남은 멤버들의 후속작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Bernard Summer가 주축이 된 멤버들은 1980년 1월 New Order를 조직했다. Curtis의 유작 컴필레이션 성경의 Still이 Joy Division의 이름으로 발매되어 영국챠트 5위까지 올랐다. New Order는 80년대 중반 그들만의 싸운드로 만개하기까지 Curtis와 Joy Division의 그늘을 벗어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초기 앨범에서 Joy Division의 때를 벗기지 못한 그들은 더이상 음습함과 Isolation을 그룹의 음악적 방향으로 삼기를 거부하고 Groove로 전향하여 일렉트로닉 뮤직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이 후에도 Sumner는 Pet Shop Boys의 Neil Tenant, The Smiths의 Johny Marr 등과 함께 Electronic이란 프로젝트밴드를 통해, 다른 멤버들은 Monaco, Revenge, The Other Two 등 사이드프로젝트를 조직하여 정력적인 음악활동을 펼쳤다.

Joy Division의 어둡고 음습한 싸운드는 The Cure, Tears For Fears, Echo and the Bunnymen, 그리고 보다 최근의 아티스트로는 Nine Inch Nails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독특한 드러밍과 꿈꾸는 듯한 키타싸운드, Curtis의 카리스마적인 보컬스타일, 자학적인 가사 등이 Gothic 밴드들에게 미친 영향또한 심대했다. 또한 Joy Division의 존재로 말미암아 Manchester의 인디라벨이었던 Factory 레코드사는 영국 음악씬에 주요한 위치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들은 Big in Japan, Echo and the Bunnymen, Cabaret Voltaire 등을 발굴해내는 등 New Wave 싸운드의 확산에 큰 역할을 했다.

디스코그래피
1979 Unknown Pleasures [Qwest]
1980 Closer [Qwest]
1999 Preston Warehouse 28 February 1980 [live] [Factory]
2001 Les Bains Douches [live] [Factory]

링크
Joy Division Centr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