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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 – Quiet Life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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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David Sylvian은 한 인터뷰에서 “우리의 데뷔앨범은 완전 잘못된 앨범이에요. 그런데 또 다른 앨범도 마찬가지였죠.”라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그는 1979년에 발매된 이 앨범을 사실상의 그들의 데뷔앨범으로 여긴다고 한다. 확실히 앞서의 두 앨범과는 다른 스타일이다. 앞서의 두 앨범이 Bowie나 Bolan과 같은 글램락의 경도되었다면 이 앨범은 Kraftwerk, Roxy Music, Brian Eno가 추구하던 음악 스타일을 따라가고 있다. 강화된 신서사이저, 장황한 색소폰 연주, Sylvian의 음습한 내레이션, 복잡한 리듬 등이 이 앨범을 특징짓는 Japan스러움이다. 피치포크는 실비앙이 Roxy Music의 Bryan Ferry처럼 낮게 읊조리는 보컬 스타일(croon)을 채용한 것을 가장 큰 특징으로 꼽았다. 이런 보컬 스타일은 이후 Japan의 앨범에서 자주 등장하는 특유의 보컬 스타일이 되었다는 점에서 공감할만한 분석이다. 영국 앨범 차트에서는 최고 53위까지 올랐었고, 일본의 오리콘 차트에서는 좀더 높은 24위까지 올랐다.

Japan – Adolescent Sex (1978)

An oriental-style painting of the men in glam dress-up, alongside a red moon and "Japan" in big red letters, all in front of a black background.
By The cover art can be obtained from the record label., Fair use, Link

Japan의 데뷔앨범인 Adolescent Sex1 는 그들의 후기 작품에 비해 확실히 헤비하다. 아직 그들만의 음악 스타일을 가다듬기 전의 시기라 여겨지는데 수록곡 곳곳에서 Roxy Music, T-Rex, 또는 여타 글램락이나 펑크 뮤지션들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강한 기타 사운드와2 일부러 거칠게 혹은 쥐어짜듯 내뱉는 David Sylvian의 보컬 등은 이런 특색을 강화시키고 있다. 본국인 영국에서도 어느 정도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이 앨범은 역시나 일본에서 특히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오리콘 앨범 차트에 20위까지 오르는 성적을 거두었다. 싱글은 앨범 타이틀로 쓴 Adolescent Sex가 네덜란드 싱글 차트 등에서 인기를 얻었는데, 캐치하고 아기자기한 분위기가 그들의 후기 음악에 가장 어울린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어쨌든 데이빗은 1982년 한 인터뷰에서 “난 우리 첫 앨범에 대해서 후회스러운데 우리는 너무 어렸고 그것을 만들기에는 너무 순진했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은 이해했어야 했고 발매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두 번째 앨범이 차라리 첫 앨범인 것이 맞다.”3라고 말했다고 한다. 뭐 본인이 그렇게 생각할지라도 그 앨범은 발매가 되었고 몇 십 년이 흐른 지금 누군가는 그 앨범을 감상하며 이 감상평을 남기고 있으니 데이빗이여 그냥 이 앨범을 받아들이시라.

  1. 앨범 이름에 거부감을 갖는 일부 국가에서는 그냥 Japan이라는 이름으로 발매되었다고 한다
  2. Surbuban Love에서 길고도 긴 기타 애드립은 조금 지겹기도 함
  3. 출처

Real to Real Cacoph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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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ltorealcacophony” by The cover art can be obtained from Arista Records.. Licensed under Wikipedia.

Real to Real Cacophony는 포스트펑크/뉴웨이브 밴드 Simple Minds가 1979년 내놓은 이들의 두 번째 정규앨범이다. 1979년은 소위 “포스트펑크” 밴드의 명반이 – 예를 들면 Joy Division의 Unknown Pleasures 등 – 많이 발표된 해고 이 앨범도 그 중 하나다. Simple Minds의 곡을 80년대 청춘 영화 The Breakfast Club에서의 Don’t You와 같은 뉴웨이브 사운드가 많이 가미된 곡에서부터 접한 이라면 이 앨범이 많이 낯설 것이다. Jim Kerr의 보컬은 이 당시 많이 날카로웠고 멜로디와 리듬은 언뜻 KraftwerkDevo를 연상시킨다. 가사는 의미를 모를 단어의 연결이다. 개인적으로 맘에 드는 곡은 Citizen (Dance of Youth)다.

Unknown Pleas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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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known Pleasures는 Joy Division의 스튜디오 데뷔앨범이다. 이 앨범은 스트로베리 스튜디오에서 1979년 4월 1일에서 17일에 걸친 짧은 기간 동안 녹음을 마치고 그 해 6월 15일 팩토리 레코드사를 통해 영국에서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앨범 수록곡 중에서 싱글도 발매되지 않았고 – 홍보를 위해 “Transmission” 싱글이 발매되긴 했다 – 차트에 진입하지도 못했다. 1976년 결성되어 Warsaw라고 불리기도 했던 이 포스트펑크 밴드의 경력이 1980년대가 시작되기도 전에 끝날 것 같은 불안한 출발이었다. 물론 정규 앨범을 두 개밖에 내지 못할 정도로 활동기간이 길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은 걸작으로 남게 되었고 Joy Division 역시 시대를 대표하는 펑크 밴드로 평가받게 되었다.

이 앨범 이전에 밴드가 내놓은 앨범은 자신들이 프로듀스하여 1978년 내놓은 EP An Ideal for Living이었다. 이 앨범 덕분에 그들은 Tony Wilson의 지방 뉴스쇼 Granada Reports에 1978년 9월 출연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밴드의 매니저 Rob Gretton은 Wilson에게 Factory Records 레이블에서 Joy Division의 앨범을 내자고 제안하였다. 의기투합한 이들은 영국 스톡포트에 있는 스트로베리 스튜디오에서 작업에 착수한다. 프로듀서는 Martin Hannett이었다. Hannett은 Peter Hook의 표현처럼 “최고의 요리사”로서 Joy Division의 뛰어난 재료를 가지고 솜씨 좋게 요리를 만들었다. 그는 유리병을 깨부수는 소리, 스낵을 먹는 소리 등 평범하지 않은 음향효과를 첨가하여 곡에 세련미를 가미했다.

Hannett이 창조해낸 “공간감이 넓은 광활한 사운드”에 대한 밴드 멤버들의 의견은 엇갈렸다. Sumner는 “우리는 흑백의 그림을 원했는데 마틴이 색깔을 집어넣었다.”고 비판했다. Hook은 “난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음악이 마치 Pink Floyd같았다”라고 말했다. Morris는 이와는 다른 의견이었다. “Unknown Pleasures를 듣고 행복했다. 당시의 내 논지는 두 가지는 – 레코드를 듣는 것과 공연에 가는 것 –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Curtis도 프로덕션에 만족해했다. 2006년 인터뷰에서 Hook은 회고했다. “분명 당시에는 내가 원하는 사운드가 아니었다. 그러나 마틴이 일을 잘 했던 것은 이제 알겠다. 이에 관한 다른 대안은 없었다. 마틴 해넷이 조이디비전의 사운드를 창조하였다.”라고 인정하였다.

작가 Chris Ott는 앨범의 이름이 Marcel Proust의 Remembrance of Things Past에서 따온 것 같다고 말하였다. 앨범 커버는 Peter Saville이 맡았는데, 유명한 펄서 CP 1919의 전자파동의 이미지가 사용되었다. Saville은 흑백의 이미지를 뒤집어 검은 배경에 하얀 선의 파동 그래프가 그려진 유명한 커버를 완성하였다. 앨범은 1쇄로 1만 장을 프린트하였다. 판매량은 신통치 않았다. 하지만 LP에 수록되지 않은 홍보용 싱글 “Transmission” 이 발매되자 앨범은 전량 팔렸다. 당시 총 판매량은 1만5천 장 정도였고 차트 진입에 실패했다. 하지만 1980년 5월 Curtis가 자살하고 두 번째 정규앨범 Closer가 발매되는 등의 과정을 거쳐 재발매된 앨범은 그해 8월에 차트 71위에 진입하여 한참을 머물렀다.

평론가들의 이 앨범에 대한 평이 “불투명한 선언(opaque manifesto)”이나 “황량한 악몽의 사운드트랙(bleak nightmare soundtrack)”이라 평할 만큼 이 앨범은 황량한 상실감으로 메워져 있다. 앨범 발매 이후 1년이 되지 않아 자살을 선택한 이언 커티스의 심신에 걸친 극도의 불안감이 앨범에 고스란히 녹아들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Joy라는 단어를 밴드 명에 쓰고 Pleasures란 단어가 앨범 명에 쓰인 것 치고는 너무나 역설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미스터리하고 음습한 보컬이 조급증이 느껴지는 연주나 특수효과와 함께 공감감이 넓은 음악 안에서 메아리칠 때, 그 공간에서 느껴지는 것은 이언 커티스의 거대한 공허감이라는 점이 이 앨범의 매력이자 – 결말을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 가슴 아픈 부분이다.

All Mod C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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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am – All Mod Cons“. Licensed under Wikipedia.

요 며칠 The Jam의 All Mod Cons를 즐겨듣고 있다. 1978년 밴드의 세 번째 스튜디오 앨범으로 발매된 이 작품은 밴드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앨범의 제목은 “일체의 현대문명의 이기(利器)”를 의미하는 “all modern conveniences”라는 주택 광고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광고 카피를 줄인 숙어다. 밴드는 이 표현을 자신들의 모드 리바이벌 스타일의 작품에 일종의 말장난으로 가져다 붙인 것이다.

앨범 전체 수록곡은 The Kinks의 “David Watts”의 커버 버전을 비롯하여 전반적으로 소위 “브리티시 인배이전(British Invasion)”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타이틀곡인 “All Mod Cons”는 성공한 이들에게 싹싹하게 굴다가 그들이 실패하는 즉시 떠나버리는 변덕스러운 사람들을 비판하고 있다. “Mr. Clean”은 Paul Weller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워킹(Woking)이라는 영국 남부 도시의 외곽에 있는 주식거래 지역에서 느낀 이미지를 가지고 만든 작품이다.

“계급 문제는 당시 제가 매우 중요했어요. 워킹의 외곽에는 주식중개인 벨트가 있었죠. 그래서 난 이미지를 가지고 씨티(The City)에 가기 위해 워털루 역까지의 기차를 잡아타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떠올렸습니다. 미스터 클린은 그런 나의 시각이었죠.”

앨범에서 가장 아름다운 멜로디의 발라드 “English Rose”는 오리지널 앨범 발매 시에는 제목도 가사도 없었다고 한다. Paul 은 이 노래에는 음악 자체 없이는 가사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싱글로 발매된 앨범의 마지막 곡 “Down in the Tube Station at Midnight”은 영국 차트 15위까지 오르면서 그룹의 발표작중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곡으로 남게 되었다. 이 곡은 지하철을 이용하여 아내가 있는 가정으로 돌아가다가 극우 깡패들에게 얻어맞는, 한 젊은이의 독백으로 구성된 곡이다.

Q매거진은 “가장 위대한 100개의 영국 앨범”에서 이 앨범을 50위로 선정했다. 또한 NME는 2013년의 “가장 위대한 500개의 앨범”에서 이 앨범을 219위로 선정했다.

Love Supreme

이코노미스트에서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에 발매된 재즈 명반 “Love Supreme”에 관한 칼럼이 게재되어 여기에 번역해서 올려둔다.

A blue-tinted black-and-white photograph of Coltrane's face looking to the left, with the logo "A Love Supreme/John Coltrane" written in white bold Arial across the top.
John Coltrane – A Love Supreme” by Source. Licensed under Wikipedia.

재즈에서 가장 유명한 징과 함께 시작한다. 몇 초 후, 더블베이스가 4노트의 “Love Supreme” 주제를 이어받는다. John Coltrane은 강렬한 색소폰 솔로를 시작한다. 그리고 30분 뒤, 모든 것이 끝난다. 그러나 여전히 5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신선하게 들린다.

재즈의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였던 Coltrane은 1967년 그의 나이 40살에 간암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간혹 한 해에 여러 장의 앨범을 녹음하기도 하는 다작의 아티스트였다. 1965년 2월에 발매된 “A Love Supreme”은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자 비평가로부터 가장 큰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다.

“Supreme”에 관해서는 과장이 좀 있다. 이 작품은 그 시기의 Coltrane의 다른 작품들보다 더 압도적으로 뛰어난 작품은 아니다.(예를 들어 “Sun Ship”이나 “Crescent”와 같은 작품들) 그 명성은 아마도 몇몇 다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첫째, 이 작품은 1960년대 중반의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접근하기 쉽다. “Supreme”은 Coltrane의 기술적인 힘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에 발매되었다. 그러나 또한 그가 조성(調聲)에 흥미를 잃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그의 앨범 다수는 재즈 클럽에서의 “해프닝”의 결과물로써 고도로 추상적이다. 익숙하지 않은 귀로는 몇몇은 거의 감상하기 어렵다.(“Live at the Village Vanguard Again!”을 시도해보라) “Supreme”은 숙달된 기술과 1960년대 Coltrane의 지성주의가 잘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또한 상당히 이지리스닝인 것이다.

“Supreme”은 또한 Coltrane에게 있어 가장 종교적인 앨범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가장 헌신적인 재즈 팬이 아닐지라도 그들이 진정으로 아는 것을 느낄 수 없는 이들에조차 어떤 영감을 준다. 그는 요절했다. 그는 맹렬하게 연습했는데, 하루 12시간 씩 했다고 하고, 이는 아마도 가장 기술적으로 많은 성취를 이룬 색소폰 연주자가 되게 하였을 것이다. Charlie Parker나 Miles Davis와 같은 다른 재즈 거인들과 달리 그에게는 섹스와 관련된 짓궂은 일화가 거의 없다. 그래서 Coltrane의 팬들은 이 사람에 대해 아는 바를 조각조각 모아야 한다.

1950년대 후반의 마약중독에서 회복되는 동안 Coltrane은 깊은 신앙심을 갖게 되었고 “Supreme”은 명백하게 종교적인 함축이다. 라이너노트에서 그는 이 작업을 “그에게 바치는 변변치 않은 제물”이라고 칭했다. 첫 악장 “Acknowledgment”에서 Coltrane은 가스펠과도 같은 투로 “A Love Supreme”이란 가사를 되뇐다.(어떤 사람들은 그가 실은 “Allah Supreme”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여긴다. – 진지한 재즈 학자들조차 전적으로 믿을 만 하다고 여기지는 않는 주장)

제 4악장 “Psalm”은 Coltrane이 그의 색소폰과 말을 “주고받은” 시에 대한 낭송이다. 당신은 여기에서 그 대화를 들을 수 있다(꽤 감동적이다). 이 작품은 빛나는 색채로 끝을 맺는다. Coltrane은 두 번째 색소폰으로 오버덥 작업을 했다.

마지막으로 “Supreme”은 발매된 그 맥락 때문에 중요하다. Coltrane은 발매 이후 몇 달 후에 사망한다. 이후 어떤 색소폰 주자도 그 정도의 인기와 비평적 찬사를 얻지 못했다. “Supreme”이 나올 즈음 재즈의 인기를 폭락하기 시작했다. 락밴드가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디너 재킷과 작은 클럽이 곁들여진 재즈는 앰프가 가미된 기타와 화려한 의상에 비해서 매우 쿨하지 않은 것이 된 것처럼 보였다. 많은 재즈 뮤지션들이 새롭고 어린 청중에게 어필하기 위해 극적으로 자신들의 스타일을 바꿨다. “Supreme”이 나온 3년 후, Davis는 “Miles in the Sky”(명백하게 비틀즈에 대한 고개 끄덕거림이 담긴)이라는 앨범을 내놓는다. 그는 Jimi Hendrix와 함께 연주했다. Herbie Hancock은 전통적인 재즈를 거의 전적으로 생략하였다. 일그러뜨린 기타 사운드, 전자 베이스들, 락 리듬, 그리고 큰 썬그래스가 음악적인 이행기에 함께 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Supreme”에 대한 광범위한 숭배는 부분적으로 지금 의미하는 것에 의해 설명된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중적으로 어필했던 “적정한” 재즈라 여기는 마지막 앨범이었다. 그것은 죽어가는, 그리고 다시는 회복되지 않은 한 예술 형식의 최후의 일제사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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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ham Parker and the Rumour – Squeezing Out Sparks(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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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ueezing Out Sparks는 Graham Parker and the Rumour가 1979년 내놓은 그들의 네 번째 공식 앨범이다. The Rumour는 사실상 Graham Parker의 백업 밴드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사실상의 Graham의 솔로앨범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Graham Parker는 Elvis Costello, Joe Jackson 등과 함께 뉴웨이브 운동의 초기 주요 뮤지션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의 지명도는 마이너인 Elvis Costello 만도 못한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초기 뉴웨이브 뮤직의 정수를 관통하고 있는 이 앨범은 롤링스톤誌가 선정한 ‘500개의 위대한 앨범’에서 335위에 선정될 정도로 명반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앨범은 락앤롤의 단순함의 미학을 잘 구현한 앨범이다. 타이틀곡 Discovering Japan을 비롯하여 이어지는 Local Girls, 그리고 Protection 등의 앨범 트랙들은 심오한 멜로디나 현학적인 연주가 없이도 락앤롤을 감칠 맛나게 즐길 수 있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70년대의 다소는 규모가 지나치게 커져버린 락앤롤의 두터운 양념을 제거시켜 오히려 락앤롤의 본질을 맛보게 해주는 단순함의 미학이 구현되어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단순화는 Graham Parker 자신의 디스코그래피에서도 구현되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즉, 당초 Graham Parker의 음악은 쏘울 뮤직의 영향이 강했던 지라 관악기 섹션이 풍부하게 가미되었었지만 이 앨범의 프로듀서인 Jack Nitzsche 는 보다 원초적인 소리를 선호했다. 우연히도 당시의 인기 펑크 밴드인 The Clash는 그들의 사운드를 보다 풍부하게 하려는 등 반대의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그래서 The Rumour의 리듬앤블루스 섹션의 연주자들은 The Clash의 세 번째 앨범 London Calling의 녹음에 가세하게 되었다. 두 명반의 조금은 다른 길이 흥미롭게 교차되는 지점이었던 셈이다. 2001년 이 앨범은 두 개의 라이브 트랙과 함께 – 그 중 하나는 Jackson 5의 I Want You Back의 리메이크 – 영국에서 재발매 되었다.

Local Girls 뮤직비디오 보기

Bitches Brew & The Inner Mounting Flame

Miles Davis의 Bitches Brew와 Mahavishnu Orchestra의 The Inner Mounting Fl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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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집중적으로 듣고 있는 앨범들이다. 두 앨범은 각각 1970년과 1971년 발표되어 당시의 째즈 음악계에 일대풍파를 일으킨 앨범들이다. 이미 째즈의 거장이었던 마일스 데이비스는 Bitches Brew를 통해 일렉트릭 피아노나 기타 등을 사용하면서 매우 실험적인 째즈를 선보였다. 당시에는 비전통적인 시도 때문에 엇갈린 평가를 받았지만 오늘날에는 음악계의 역대 명반 중 하나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신비로운 분위기의 앨범 커버와 20분에 달하는 첫 곡 Pharaoh’s Dance를 듣고 있으면 마일스 데이비스라는 인물의 거대한 아우라랄까 하는 매력이 느껴진다. 한편 이 앨범에서 기타를 맡은 John McLaughlin이 만든 프로젝트가 바로 Mahavishnu Orchestra다. 이들은 Weather Report 등과 함께 소위 째즈퓨전과 째즈락이란 장르를 선진적으로 개척한 밴드다. 밴드의 데뷔 앨범인 The Inner Mounting Flame은 ‘지미 헨드릭스가 째즈를 한다면 이렇게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락적인 냄새가 강하다. 이미 Bitches Brew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은 John McLaughlin의 압도적인 기타 플레이가 이 앨범에서는 한층 더 기세등등하다. 모호한 멜로디와 리듬으로 가득 찬 Bitches Brew보다는 정돈된 느낌이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소위 “째즈퓨전”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처럼 편안한 까페에서 느긋하게 즐길 정도로 편안한 음악은 아니다. 끊임없이 청취자를 긴장시키며 음악적 각성을 일깨우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 이 앨범과 Bitches Brew의 공통점이다.

Miles Davis의 Pharaoh’s Dance 듣기
Mahavishnu Orchestra의 Vital Transformation 듣기

My Aim Is T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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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Aim isTrue” by The cover art can be obtained from Stiff / Columbia / Demon/Rykodisc / Rhino / Hip-O.. Licensed under Wikipedia.

1977년 7월 22일 Elvis Costello(본명 Declan MacManus)의 데뷔 앨범 “My Aim Is True”가 발매되었다.(미국에서는 1978년 3월) Nick Lowe가 프로듀스한 이 앨범은 1976년 말에서 1977년 초까지 런던에 있는 패쓰웨이(Pathway) 스튜디오에서 녹음됐다. 그의 동네인 리버풀의 펍이나 클럽에서 육 년여 동안 공연을 했던 Costello는 1976년 그가 녹음한 데모테잎을 Stiff 레코드사에 보냈다. 처음에 이 레이블은 그를 Dave Edmunds를 위한 작곡가로 쓸 생각을 했었지만 Edmunds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회사는 Costello에게 몇 곡을 녹음할 기회는 주고는 Costello에게 레코딩 아티스트를 포기하게 할 생각이었지만 결과물이 꽤 괜찮았기 때문에 마음을 바꿨다. 그래서 이제 회사는 Wreckless Eric과 데뷔 앨범을 공유할 것을 제안했지만 Costello는 이미 자신만의 앨범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양의 노래를 작곡해놓았다. 이 앨범은 몇 주에 걸쳐 Clover라는 밴드의 멤버와 함께 여섯 번의 4시간 씩 총 24시간 동안 녹음을 마쳤다. 당시 낮에 데이터 입력 일을 하고 있던 Costello는 병가를 내가며 연습과 녹음을 마쳐야 했다. 처음의 두 싱글 “Less Than Zero”와 “Alison”이 나올 때까지 Costello는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다. 마침내 레이블은 1977년 여름 앨범을 내놓을 것을 결정하고서 Costello에게 회사를 그만두고 프로페셔널 뮤지션으로 나서라고 권유했다. Stiff 레코드사는 그에게 월급을 주고 선금으로 150파운드와 앰프 하나, 그리고 테이프 녹음기를 줬다. Costello는 이 상황을 “7년 이후의 하룻밤의 성공”이라고 묘사했다. 이 앨범에서는 고전이 된 “Alison”와 “(The Angels Want To Wear My) Red Shoes”가 인기를 끌었고 차트에서는 “My Aim Is True” 등이 성공했다. VH1은 2003년 이 앨범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에서 80위에 선정했다. 롤링스톤은 2004년 이 앨범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500개의 앨범에서 168위에 선정했다.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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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by Resampled from digital copy included on The Beatles USB Box Set. Licensed under Wikipedia.

1967년 6월 1일 영국의 4인조 밴드 The Beatles의 여덟 번째 스튜디오 앨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가 출시되었다.(미국에서는 같은 해 6월 2일) George Martin이 프로듀스를 담당한 이 앨범은 1966년 12월 6일부터 1967년 4월 21일까지 런던에 있는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녹음됐다. 이 앨범을 통해 밴드는 이전의 혁신적인 “Revolver”앨범에 이어 다시 한 번 대중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넓혀갔다. 이 앨범은 비틀즈 멤버들 이외에도 다양한 수준급의 뮤지션들이 기용되었으며 사운드를 윤색할 수 있는 스튜디오의 다양한 첨단 기술이 적용되었다. 이 앨범을 만들기 전, Paul McCartney는 투어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에드워드 7세 시대의 군악단’이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고, 비틀즈가 스스로 일종의 알터이고로서 당시 군인의 모습을 지닌 “Sgt. Pepper” 분장을 한다는 개념을 구체화시켰다. 녹음을 하는 와중에 Paul은 동료들에게 이 상상의 밴드가 앨범의 노래를 연주한다는 개념으로 작업을 할 것을 제안하였고, 채택된 아이디어를 통해 그룹은 음악적으로나 비주얼 적으로나 보다 많은 재량과 실험정신을 구현할 수 있었다. 스튜디오에서 약 400시간을 보낸 후 탄생한 결과물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중음악 음반이라는 평가로 귀결되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앨범 커버랄 수 있는 이 앨범의 커버는 Michael Cooper의 사진작품을 가지고 Peter Blake와 Jann Haworth가 디자인했다. 이 작품에는 비틀즈가 앨범의 가운데 군복을 입고 서있는 와중에 많은 유명인들의 사진이 콜라주로 주위에 배치되어 있다. “Pepper”는 1968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7개 부문에 후보에 올라서 “그 해의 앨범”을 포함, 4개 부문을 수상한다. 이러한 수상결과는 그래미가 락 음악을 본류의 음악으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음악적으로 “Pepper”는 프로그레시브락, 앨범락, 사이키델리아 등 이 후 출발하는 많은 락 장르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앨범은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했는데 빌보드 탑200 차트 1위에 15주간, 영국 차트에서는 1위에 22주간 머물렀다. 2014년 현재까지는 전 세계적으로 3천만장 이상이 팔린 것으로 추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