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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a Don’t Pre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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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onna, Papa Don’t Preach cover“. Via Wikipedia.

1986년 8월 16일 Madonna의 “Papa Don’t Preach”가 빌보드 핫100 차트 정상에 올라 2주간 머물렀다. Brian Elliot(가사 일부분은 Madonna)이 만든 이 곡은 Madonna에게 있어 네 번째 정상곡이 되었다. 1985년 가을 Madonna는 공동 프로듀서 Patrick Leonard, Stephen Bray와 함께 그녀의 세 번째 앨범 “True Blue” 작업을 시작한다. 작곡가 Brian Elliot은 Cristina Dent라는 가수의 앨범을 만드는 도중 “Papa Don’t Preach”에 대한 영감을 얻는다. 그의 스튜디오는 당시 노우쓰할리우드(North Hollywood) 고등학교 근처에 있었는데, 하루는 여학생들이 그의 스튜디오 앞에서 임신한 한 학우에 대해 떠드는 여학생들의 이야기를 엿듣게 된다. 그는 이에 영감받아 재빨리 노래를 작곡하여 데모를 만든다. Elliot은 이 곡을 워너브로스의 체어맨 Mo Ostin의 아들 Michael Ostin에게 들려주었는데, 그는 이 노래를 맘에 들어 했다. 그리고 이 노래를 Madonna에게 들려주게 했다. 그녀 역시 맘에 들어 했다. 1986년 6월 11일 앨범의 두 번째 싱글로 나온 이 곡은 미성숙한 성관계와 십대의 임신을 용납하는 분위기라는 이유로 보수적인 종교계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노래의 인기는 꺾지 못했다. 1986년 6월 26일 빌보드 핫100 차트에 42위로 등장한 노래는 7주 후 차트 정상을 차지한다. 또한 이 곡은 영국과 캐나다 등 여러 나라에서 차트 정상을 차지한다. James Foley가 감독한 뮤직비디오에서는 배우 Danny Aiello (“Do The Right Thing”, “Moonstruck”)이 십대인 Madonna의 아버지로 나와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뮤직비디오

Madonna – Madonna(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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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onna (album)“. Via Wikipedia.

1983년 7월 27일 Madonna의 데뷔 앨범 Madonna가 Sire 레코드사를 통해 발매되었다. 뉴욕의 다운타운에서 싱어로서의 경력을 쌓고 있던 Madonna는 Sire 레코드사의 사장 Seymour Stein을 만나며 음악경력에 있어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Everybody”를 들은 Stein은 그녀와 계약을 체결했고 앨범 발매를 계획하게 된다. Reggie Lucas, John “Jellybean” Benitez, Mark Kamins가 프로듀스한 이 앨범은 1982년 5월에서 1983년 4월까지 뉴욕에 있는 시그마사운드 스튜디오에서 녹음작업을 진행했다. 싱글 “Everybody”와 “Burning Up”이 진행되는 동안 Madonna는 펑크/쏘울 그룹 Mtume의 기타리스트 Reggie Lucas과 함께 일했다. 하지만 둘 간의 음악에 대한 관점 차이가 커지고 Lucas는 돌연 프로젝트에서 손을 뗐다. 그래서 Madonna는 당시 남자친구였던 클럽 DJ이자 프로듀서인 “Jellybean” Benitez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그녀를 도와 믹싱과 레코딩을 마무리한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업비트의 디스코 풍의 곡들이 대세를 이루었다. 당시로서는 첨단기술인 린드럼머쉰, 무그 베이스 등이 쓰였고 Madonna는 밝고 소녀스러운 목소리로 사랑과 인간관계에 대해 노래했다. 앨범이 발매됐지만 반응이 즉각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1983년 9월 Holiday가 싱글로 발매되자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 곡은 빌보드 핫100 차트 16위까지, R&B 차트 25위까지 올랐다. “Borderline” (#10 Pop)과 “Lucky Star” (#4 Pop)도 큰 인기를 끌었다.

Everybody 뮤직비디오
Burning Up 뮤직비디오

Who’s That Girl – Original Motion Picture Soundtrack

1987년 7월 21일 “Who’s That Girl – Original Motion Picture Soundtrack”이 Sire 레코드사를 통해 발매됐다. 1986년 12월부터 1987년 3월까지 녹음된 이 앨범은 Madonna의 세 번째 영화 출연작(최초에는 “Slammer”라 이름 붙여진)의 사운드트랙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이 앨범에는 Madonna를 비롯해서 Club Nouveau, Scritti Politti, Coati Mundi, Michael Davidson, Duncan Faure 등이 참여하였다. 영화 자체의 평이나 흥행은 신통치 않았다. 사운드트랙 앨범도 비평은 신통치 않았으나 상업적으로는 인기를 얻었다. Madonna의 “Causing A Commotion”은 빌보드 핫100 차트 2위까지 진출했고 “Who’s That Girl”은 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앨범은 빌보드 탑200 차트 7위까지 올랐다.

1. “Who’s That Girl” (performed by Madonna) 3:58
2. “Causing a Commotion” (performed by Madonna) 4:20
3. “The Look of Love” (performed by Madonna) 4:03
4. “24 Hours” (performed by Duncan Faure) 3:38
5. “Step by Step” (performed by Club Nouveau) 4:43
6. “Turn It Up” (performed by Michael Davidson) 3:56
7. “Best Thing Ever” (performed by Scritti Politti) 3:51
8. “Can’t Stop” (performed by Madonna) 4:45
9. “El Coco Loco (So So Bad)” (performed by Coati Mundi) 6:22

Into The Groove

Madonna가 부른 “Into The Groove”가 1985년 5월 27일 발매되었다. Madonna와tephen Bray가 쓰고 프로듀스를 맡았다. 뉴욕시의 이스트빌리지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Madonna는 잘생긴 푸에르토리코 젊은이를 발견한다. Madonna는 이 청년을 염두에 두고 그녀의 이전에 Breakfast Club에서 같이 활동했던 드러머 Steve Bray와 함께 곡을 완성한다. 그녀의 인터뷰에 따르면 곡은 그녀가 곡을 쓰고 있는 동안 그 잘생긴 청년을 발견한 후 나가서 데이트를 신청했고 그와의 마지막 데이트 바로 전에 끝났다고 한다. Madonna의 데뷔 싱글 “Everybody”의 프로듀서이자 클럽DJ인 Madonna의 전남친 Mark Kamins가 Cheyne이라는 신인 십대 여가수를 위한 곡을 써줄 것을 요청했다. Madonna는 이 곡을 그에게 줬다. 얼마 안 있어 그녀는 Susan Seidelman이 감독한 “Desperately Seeking Susan”의 주연을 맡게 되었다. Seidelman는 Madonna에게 뉴욕시의 ‘댄서테리아라(Danceteria)’는 곳에서 찍은 나이트클럽 장면에 쓸 음악을 요청했고, Madonna는 감독에게 데모로 만든 “Into The Groove”를 들려주었다. Seidelman은 매우 마음에 들어 했고 Madonna와 Stever Bray는 뉴욕에 있는 시그마사운드 스튜디오에서 노래를 다시 녹음했다. Kamins는 Madonna가 자기에게 말도 없이 노래를 다시 가져가 버린 것에 화를 냈고 둘의 사이는 벌어졌다. 1985년 3월말 “Susan”의 개봉과 동시에 Madonna의 곡은 큰 인기를 끌게 됐다. 당초 이 곡은 싱글 발매 계획도 없었고 영화의 사운드트랙 앨범에도 수록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곡을 이용한 뮤직비디오가 영화의 홍보를 위해 영화에서 골라낸 장면들을 이용하여 제작됐다. 라디오 방송국에서 이 비디오에서 뽑아 낸 노래를 방송하기 시작했다. 팬들의 반응이 뜨거워지자 Madonna의 소속사 Sire 레코드사는 싱글 발매를 결심하게 된다. 당시 차트에 머물러 있던 “Angel”의 경쟁을 피하기 위해 “Groove”는 “Angel”의 12인치 싱글 B면에 수록됐다. 미국에서 7인치 싱글로 발매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규정에 따라 빌보드 핫100에 오르지는 못했다.1 하지만 12인치 싱글은 미국에서만 백만 장이 넘게 팔렸고 해외에서는 A면에 실려 발매됐다. 몇몇 지역에서는 “Like A Virgin”앨범에 수록되어 팔리기도 했다. “Into The Groove”는 영국 차트에서 4주간 1위를 비롯하여 9개 나라에서 정상을 차지했다. 미국에서는 1985년 6월 29일 빌보드 클럽플레이 차트에서 1위에 올랐다.

뮤직비디오

  1. 빌보드는 80년대 말 이 노래를 ‘지난 10년의 댄스 싱글’에 선정한다

V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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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gueBerlin2” by U2005.comMadonna Berlin 2012-06-30.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1990년 5월 19일 Madonna의 “Vogue”가 빌보드 핫100차트 1위에 올라 3주간 머물렀다. Madonna와 Shep Pettibone가 쓰고 프로듀스한 이 곡은 Madonna Louise Veronica Ciccone의 여덟 번째 1위곡이 되었다. 이 곡은 Madonna가 뉴욕에 있는 The Sound Factory 클럽에서 본 “voguing”이라 불리는 스타일리쉬한 댄스의 공연을 보고 영감을 받아 만든 곡이다. 1960년대 뉴욕의 언더그라운드의 게이클럽 등지에서 유래된 이 춤은 마치 모델들의 포즈 모양인 것과 같은 각진 춤동작을 취하기 때문에 패션 잡지 “Vogue”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음악적으로는 당시 유행하던 최신 조류에 따라 하우스 스타일로 프로듀스되었다. 가사는 복잡한 현실에서 도피해 댄스 플로어에서 춤을 즐기라는 내용인데, 곡 중간에는 나레이션도 있는데 할리우드의 황금시대에 인기를 끌었던 연예인들의 이름이 불려진다. Madonna는 이 곡을 그녀의 스튜디오 앨범 Like a Prayer의 다섯 번째 싱글 “Keep It Together”의 B-side 곡으로 쓰려 했다. 이를 안 Warner Bros는 그녀를 설득해서 영화 “Dick Tracy”의 사운드트랙 앨범이라 할 수 있는 “I’m Breathless”에 넣었다. 뮤직비디오는 Se7en으로 유명한 David Fincher가 맡았는데, 1920년대를 암시하는 흑백 화면을 배경으로 Madonna의 할리우드의 여러 여배우에 대한 오마쥬와 댄서들의 안무로 강렬한 인상을 준다. 비평가들은 이 곡과 뮤직비디오가 하우스 뮤직이라는 메인스트림과 디스코적인 작곡, 그리고 언더그라운드의 춤 문화를 주류에 끌어올렸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Madonna의 전성기에 나온 가장 인상적인 곡과 비디오라고 평가한다. 전 세계에 6백만 장이 넘는 싱글을 팔아치우며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뮤직비디오

Material Girl 을 듣다가 생각난 서구의 80년대

어떤 소년들은 내게 키스하고 어떤 소년들은 껴안는데
뭐 괜찮아.
만약 그들이 적당한 신용을 제공하지 않으면
그냥 떠나버리면 돼.
Some boys kiss me, some boys hug me
I think they’re O.K.
If they don’t give me proper credit
I just walk away
(Madonna – Material Girl)

유난히 천진난만한 코맹맹이 목소리로 신용거래를 통해 창출되는 애정관계를 묘사한 마돈나의 명곡 Material Girl. 마돈나는 “우리가 물질적인 세계(material world)에서 사는 것을 알지 않느냐”면서 “난 물질적인 소녀야”라고 선언한다. 이 노래는 그녀의 가장 많이 팔린 앨범 중 하나인 Like A Virgin의 수록곡이다.

이 앨범이 발표된 1985년의 미국은 마돈나가 이야기한 바대로 물질적인 분위기가 충만할 때였다. 이 시기, 대통령은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이었고, 경제는 활황세였기에 말 그대로 “돈이 말을 하는” 시기였다. 당시 분위기는 이 시절을 배경으로 한 영화 ‘미국의 싸이코(American Psycho)’에 잘 표현되어 있다.

넌 네 자신이 커다란 자동차의 운전대 뒤에 있는 것을 발견할지도 몰라.
넌 네 자신이 아름다운 집에서 아름다운 아내와 있는 것을 발견할지도 몰라.
넌 이렇게 자문할지도 몰라. 음, 내가 여기 어떻게 왔지?
You may find yourself behind the wheel of a large automobile
You may find yourself in a beautiful house with a beautiful wife You may ask yourself, well, how did I get here?
(Talking Heads – Once In A Lifetime)

바로 이 질문에 대해서 유머러스한 경제학자 사트야지트 다스는 ‘부채’덕분에 그게 가능하다고 말했다. 흠~ 아닌 게 아니라 그래프를 살펴보니 마돈나가 “난 물질적인 소녀야.”라고 외치고 있던 시점에, 미국의 싸이코가 친구의 명함이 자기 명함보다 더 고급스럽다는 사실에 눈썹이 떨리던 시점에 미국의 빚이 급증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돈나를 껴안으려는 소년이 제공하는 신용이나 싸이코가 만든 고급 명함의 재원은 바로 빚을 통해 조달한 것이 되는 셈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이때쯤이면 미쏘 대결구도에서 강경노선을 택한 레이건은 군비확장을 위해 빚을 늘렸고, 소련의 패배가 확실해진 일극(一極)체제에서 미국은 더 거침없이 빚을 늘렸다.

이렇게 빚이 는다고 모두가 그 혜택을 누린 것은 아니다. 당시는 영미권에서 보수정권이 들어서면서 이전의 온정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노동자들을 살벌하게 길거리로 내쫓던 시기였다. Fed 의장인 폴 볼커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살인적으로 올려 채무자들의 주머니를 탈탈 털어냈다. 서민의 삶은 더 힘들어졌다.

당신은 공공의 적인 10번지(다우닝가 10번지인 영국 수상관저)에 의해 위협받게 될까요?
파워게임을 하고 있는 그들.
당신의 임금인상은 없다는 소리를 들을 때
그들은 잉여를 취하고 당신만 책임을 집니다.
Are you gonna be threatened by
The public enemy No. 10
Those who play the power game
They take the profits -you take the blame
When they tell you there’s no rise in pay
(The Style Council – Walls Come Tumbling Down)

패션 스타일에 있어서는 거품이 생겨나는 경제를 대변하기라도 하듯 풍성하고 과장된 스타일이 유행했다. 머리는 한껏 치켜 올려 세웠고, 어깨선에도 과장된 디자인이 적용됐다. 대중음악들도 마돈나의 노래처럼 화려하고 거침없고 빠른 템포의 춤곡이 인기를 얻었다. 화장을 한 남녀들이 저마다의 미모를 뽐냈다.

이제 현대 자본주의에서 그런 시절이 다시 올까? 경기순환론을 믿는 이라면 사회의 생산력을 배가시킬 수 있는 어떤 혁신을 통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믿을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런 시기가 다시 온다면 사람들은 이전에 얻은 교훈을 통해 보다 현명한 경제활동을 할까? 아니면 다시 한 번 “난 물질적인 소녀야”라고 외칠까?

그렇지만 내 희망을 봐. 내 꿈을 봐.
우리가 쓴 현찰들.
(오~) 난 당신을 사랑해. 오~ 당신은 내 월세를 내주지.
(오~) 난 당신을 사랑해. 오~ 당신은 내 월세를 내주지.
But look at my hopes, look at my dreams
The currency we’ve spent
(Ooooh) I love you, oh, you pay my rent
(Ooooh) I love you, oh, you pay my rent
(Pet Shop Boys – Rent)

80년대 팝계의 20대 사건

출처가 어디인지는 불명입니다. http://myhome.naver.com/ouimoi/favorite/80년대사건.htm 라는 링크가 남아 있긴 한데, 지금 열어보니 더 이상 서비스를 하지 않는 페이지라는군요. 누군가 예전에 “음악세계”란 잡지에서 본 것 같다는 코멘트를 달아놓기도 했네요. 여하튼 저작권이 있으신 분이 있으시면 연락주시고요. 이 중 몇 개나 동의하시는지 한번 곰곰히 생각해보는 것도 재밌겠네요.

Pop Events Of The Decade (80년대 팝계의 20대 사건)

1. 1980-핑크 플로이드의 화제작 「벽」

1980년 최대의 화제작은 핑크 플로이드의 「벽」(The Wall)이었다. 67년 데뷔작 「여명의 문 앞에 선 풍적수」(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를 발표한 이래 핑크는 프로그레시브 음악으로 팬들은 물론이고 아티스들에게도 음악적인 영향을 미쳤다. 73년 「달의 어두운 면」(Dark Side Of The Moon) 이래 최대의 앨범이라는「벽」은 15주간 차트 정상을 차지했는데, 82년에 영화로도 제작되어 또 다시 핑크 플로이드 열풍을 몰고 오기도 했다. 앨런 파커 감독의 이 영화는 당시로선 최장시간의 록영화였다. 라이브 에이드로 우리들에게도 친숙한 봅 겔도프가 주연한 이 영화는 록 스타의 정신적인 붕괴를 다룬 것이다. 영화 속에 나오는 애니메이션은 정치만화 칼럼니스트로 유명한 제럴드 스카프의 작품.

2. 1980-존 레논 흉탄에 쓰러지다

비틀즈의 존 레논이 80년 12월 8일 뉴욕에 있는 다코타 아파트에서 마크 채프먼이라는 사내의 총탄에 쓰러졌다.  80년 11월, 5년 동안의 침묵을 깨며 그는 앨범 「이중 환상」(Double Fantasy)을 발표하여 팬들을 설레게 했었다. 싱글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Just Like> Starting Over)은 그의 죽음 이후 차트 1위에 올라 사람들을 더욱 애석하게 했다. 비틀즈 시절 “우리는 예수보다 유명하다”는 말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던 존은 60년대 팝 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만함 속에 번득이는 예지등으로 그의 개성은 더욱 팬들에게 어필되었고, 65년 비틀즈 멤버로서 ‘대영제국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3. 1981-MTV의 영향

1981년 8월 미국의 어느 케이블 방송국은 24시간 동안 음악만을 방송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MTV(Music Televison)이다. 75년 일본의 소니사에 의해 비디오가 대중화될 때부터 MTV의 출현은 이미 예상되었는데, 디스크의 소리에 TV의 화면을 접목시킨 것이었다. 노래를 듣고, 거기에다 보기까지 하니 음악의 내용도 상당히 변하게 되었다.  MTV는 뉴 웨이브 가수들의 출현을 앞당기기도 했다. 듀란 듀란, 컬처 클럽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70년대 통신기기의 대변혁인 비디오가 음악에 미친 영향은 바로 MTV의 출현이었다.

첫 시작을 알린 비디오는 그 유명한 The BugglesVideo Killed The Radio Star

4. 1981-뉴웨이브의 기수들

뉴웨이브라는 말처럼 뜻이 다양하고 복잡한 용어도 드물 것이다. 70년대 말 펑크와 디스코, 그리고 기존 록의 혼합물을 뉴웨이브라고 부르는데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기계적으로는 MTV의 등장이 뉴 웨이브의 출현을 앞당기는 역할을 했다. 70년대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을 80년대의 요구에 맞춘 것이 뉴 웨이브라고 보는데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대중적인 기반은 1981년 블론디였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고 멘 앳 워크. 폴리스. 유리쓰믹스. 컬처 클럽. 듀란 듀란 등 수많은 아티스트가 등장했다. 감각적인 사운드, 현대적인 감각의 화장 및 분장 그리고 환상적인 패션 등이 그들의 개성이기도 했다. 70년대 말의 파괴적인 펑크 시대 이후 찾아온 대중 음악, 그것이 뉴 웨이브였다.

5. 1982-CD 및 LPD의 개발

디스크와 TV의 만남이 MTV였다. 하지만 우리들은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시각과 청각의 동시 해결이라는 요구는 풀렸지만 그 질(質)이 문제였다. 먼저 원음(原音)에 가까운 소리를 듣고자 했다. 그것이 CD(Compact Disk)이다. 일본의 소니사와 네덜란드 필립스사는 82년 CD발매를 개시했다. 광통신(光通信)의 발전은 거기에서 머물지 않았다. 화면도 실물에 가까운 생생한 것을 가능케 했다. 그것이  LDP(Laservision Disk Player)이다. 83년 일본의 파이오니어사는 LDP를 시장에 내놓기 시작했다. MTV가 제공하는 음악의 발전 단계가 LDP인 것이다. 이제 팬들은 생생한 소리와 화면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비디오의 등장처럼 LDP가 음악계의 흐름을 뒤집진 못하고 있다. 지금은 초기 단계다. LDP의 대중화는 비디오에 못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결국 LDP는 단명하고 말았고 현재는 DVD가 대세죠 : 옮긴 이 주)

6. 1982-80년대의 음악 뉴 에이지

80년대 들어 태동한 두 가지 음악 장르라면 뉴 에이지와 랩이다. 80년대 초부터 ‘뉴 에이지’ 또는 ‘환경음악'(주로 일본) 등으로 불린 이 음악은 동양적인 명상음악이라는데 특징이 있었다. 굳이 뉴 에이지를 82년의 사건으로 잡는데는 약간의 무리가 있지만, 뉴 에이지라는 음악을 대중화시킨 조지 윈스턴의 활동을 기초로 했다. 80년 조지는 「가을」(Autumn), 「겨울에서 봄으로」(Winter Into Spring),「12월」(December)등을 발표했다. 위의 앨범이 꾸준히 팬들의 사랑을 받아 83년 초 빌보드 재즈 차트에  오르기도 했다. 한편 반젤리스는 82년 <불의 마차 ‘(Chariots Of Fire)라는 영화음악으로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반젤리스가 뉴에이지? : 옮긴 이의 의문) 이때부터 뉴 에이지는 그
독립성을 인정받아 87년 최초의 뉴 에이지 그래미 수상자 안드레아스 플렌바이더를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CD의 보급은 뉴 에이지를 전파하는 데 큰 몫을 했다는 사실도  간과해선 안되겠다.

7. 1983-80년대의 대표적인 뮤지션 마이클 잭슨

지금도 팬들에겐 <빌리 진>(Billie Jean)의 전주 부분이 귀에 생생할 것이다. 83년 팝계를 휩쓸어 버린 수퍼스타가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마이클 잭슨이다.  당시만 해도 흑인 가수의 방영을 꺼리던 MTV에 그는 백인에 가까운 성형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영화감독 존 랜디스 (“블루스 브러더스”<Blues Brother>의 감독)를 영입하여 만든 비디오 <비트 잇>(Beat It)은 마이클을 수퍼스타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모타운 설립 20주년 기념식에서 보여준 그의 춤 솜씨와 퀸시 존스에 의해 프로듀스된 앨범 「스릴러」(Thriller)의 펑키한 사운드, 그리고 백인에 가까운 분장 등은 MTV의 장점을 가장 완벽하게 이용했다는 평을 들었다. 그 앨범에선 싱글 톱10이 7곡이었는데, 덕분에 마이클 잭슨은 그 해 그래미상  8개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8. 1983-온 거리를 뒤흔든 브레이크 댄스

수퍼스타 마이클 잭슨의 등장 이후 뒤로 걷는 댄스 스텝은 팝계의 또 다른 화제거리였다. 길거리에서도 그를 흉내내는 청소년들을 보기란 어렵지 않았다. 관절을 비틀어 대는 춤 때문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는 기사들이 발표되기도 했었다.  이름하여 브레이크 댄스 열기였다. 이 좋은 소재를 영화계에서 놓칠리가 없었다. 83년 애드리언 라인 감독의 “플래시댄스”(Flashdance)가 바로 그것이다.  제니퍼 빌스 주연의 이 영화는 황당한 스토리를 지닌 것이었지만 디스코 작곡가로 유명한 조르지오 모로더의 음악 덕분에 흥행에 성공한 영화였다. 특히 아이린카라가 부른 <플래시댄스>와 <신나는 기분> (Flashdance What A Feeling)(이 노래가 언제부터 두곡이었을까나… : 옮긴 이의 의문)은 오스카 주제가상을 받았다. 이 영화 이후 댄스 음악은 영화에서 주요한 위치를 갖기 시작했다.

9. 1984-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열기

84년은 유난히 뛰어난 앨범이 많이 발표된 해였다. 한 앨범이 계속해서 1위에 머무는 바람에 1년(약52주) 동안 4개의 앨범만이 넘버원을 차지했다.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프린스의 해라고 해도 좋을 시기였다. ‘보스'(브루스)는 70년대 미국을 대표하는 가수였지만 「미국에서 태어나」 (Born In The U.S.A) 앨범으로 대중적인 기반도 확실히 다지게 되었다. 「끝없는 질주」(Born To Run)로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한 그는 그 해 타임, 뉴스위크 양 잡지의 표지인물로 선정되기도했다. 80년 「강」(The River)으로 앨범 1위를 기록한 그는 수작 「네브라스카」 Nebraska) 이후 84년 「미국에서 태어나」를 발표했다. 재킷에 노동자 복장 차림의 사람이 성조기를 향해 오줌을 누고 있는 듯한 자세 때문에 말도 많았지만 본인은 강력히 부인하기도 한 문제의 앨범이었다.

10. 1984-미네아폴리스 사단의 리더 프린스

TV 드라마 “배트맨”(Batman)의 주제곡을 열심히 피아노로 연주하던 소년이 바로 영화 “배트맨”의 사운드트랙을 맡았던 프린스이다. 1984년은 한 마디로 보스와 프린스의 해였다. 특히 프린스는 작곡, 작사, 프로듀서, 싱어를 겸하는 만능 재주꾼으로 83년의 마이클 잭슨 열기를 뒤엎기에 충분한 인물이었다. 70년대에 데이비드 보위가 새로운 음악의 창조를 위해 노력했다면 80년대는 단연 프린스였다. 그는 「심홍색 비」(Purple Rain) 한 장의 앨범으로 표현된다. 바로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스타 제조기이기도 하다. 배내티와 아폴로니아가 프린스 사단 출신이며, 실라E. 차카 칸. 마돈나. 시나 이스턴 등 그가 후원한 가수는 수도 없이 많다.

11. 1985-만능 엔터테이너 마돈나

80년대 최고의 여성 가수로 마돈나를 지목하기에 주저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1985년 마돈나는 「처녀처럼」(Like A Virgin)으로 전 세계 팝 팬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고 말았다. 프로듀서는 듀란 듀란의 프로듀서로도 유명한 나일 로저스. 미모와 섹시함 그리고 가수로서의 가창력과 춤 등이 그녀를 수퍼스타로 만들기에 충분했지만 MTV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그녀는 MTV 등장 이후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88년에는 브로드웨이 연극에도 출연하여 화제를 몰고 온 그녀는 영화배우 숀 펜과의 결혼 생활을 끝내는 등 끊임없이 구설수에 올랐지만, 올해 「기도처럼」(Like A Prayer)을 발표하며 자신의 건재를 과시하였다.

12. 1985-이디오피아 난민구호 ‘라이브 에이드

85년 7월 13일 영국 런던의 웸블리 구장과 미국 필라델피아의 존 F. 케네디 구장에서 동시에 대규모 콘서트인 ‘라이브 에이드'(Live Aid)가 개최되었다. 이디오피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난민을 돕기 위한 자선공연이었다. 장장 16시간의 공연, 200여명의 아티스트 출연, 430억의 자선 기금, 세계 140개국에의 15억 시청자 등등 종래의 모든 기록을 깨버린 행사였다. 영국의 록 그룹 붐 타운 래츠의 리더 봅 겔도프는 이 행사를 개최한 공로로 그 해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라이브 에이드’는 우드스톡 이후 최대의 공연이었으며, 이 행사에 자극받아 해리 벨라폰테는 ‘우리는 곧 세계'(We Are The World) 라는 앨범(We are the world는 라이브에이드 이전에 나오지 않았나요? : 옮긴 이의 의문)을 제작하기도 했다. 프로듀서는 퀸시 존스. 빌보드 차트 1위 및 그래미상 수상의 영광도 안은 앨범이었다.

13. 1981-뉴 웨이브의 기수들

뉴 웨이브의 열기, MTV의 등장 그리고 아티스트의 개성 등이 그 시대와 딱 들어맞은 뮤지션이 왬이었다.  조지 마이클과 앤드류 리즐리로 구성된 이 영국 듀오는 1984년 <떠나기 전에 깨워주오>(Wake Me Up Before You Go-Go)를 싱글 차트 1위에 올려 놓으며 스타덤에 올랐다. 1985년 중국 공연까지 벌였던 그들은 특히 여성 팬들의 우상이었다.  준수한 외모와 로맨틱한 노래로 국내에서의 인기도 대단했는데 85년 <경솔한 속삭임>(Careless Whisper)은 아마 팝 팬들에게 많은 추억을 준 곡으로 짐작된다. 흑인의 소울을 팝 감각으로 소화시켜 자신들의 개성을 구축했던 이들은 2집 「크게 해봐」(Make It Big)의 성공 이후, 끝없이 해체설이 돌다 결국 86년 헤어지고 말았다.

14. 1986-앰네스티 로큰롤 순회공연 개시

86년 ‘앰네스티’라는 단체가 뉴스에 종종 오르내렸다.’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라는 이 단체는 각국의 탄압받는 양심수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61년에 조직되었다. 온 세계에 이 단체의 존재를 명확하게 알리는 데는 록 스타들의 역할이 컸다. 앰네스티 미국 지부의 잭 힐리라는 사람은 85년 ‘라이브 에이드'(Live Aid) 공연의 위력을 실감한 뒤 대규모 록 행사를 계획했다. 86년 6월 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 개최되었던 이 행사에서 U2와 스팅 등은 자신들의 개성을 팝 팬들에게 강력히 심어 주기도 했다. U2는 이 행사로 전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는 1987년 ‘여호수아 나무'(The Joshua Tree)로 나타났다. 1988년 ‘지금 인권을'(Human Rights, Now!)공연으로 이 행사는 맥을 잇고 있다.

15. 1987-미래의 검은 로큰롤 랩

50년대 로큰롤이 등장했을 때 젊은이들의 호응은 열광적이었지만 기성세대는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정적이고 도발적인 춤, 가사, 창법 등으로 젊은이들을 흥분시켰던 로큰롤은 기성세대들이 보기엔 천박한 잡음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후 로큰롤은 대중음악의 주류가 되었다. 아직은 소수이지만 랩에서 로큰롤이 가졌던 의의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80년대 중반 흑인들 사이에서 랩이 퍼지기 시작했다. 마구 지껄이는 폭력적인 가사, 반복되는 리듬 등으로 일반 팬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던 음악이 랩이었다. 86년 런-DMC에 의해 랩의 저변이 확대되기 시작하더니 87년 드디어 백인 래퍼 3인조 비스티 보이스의 「살인 허가」(Licenced To Kill)가 앨범 차트 1위에 올라섰다. 뉴 에이지와 함께 80년대에 탄생한 장르로 새로이 위치를 굳힌 랩은 올해 톤 록이라는 또 다른 스타를 내기도 했다.

16. 1987-로큰롤은 U2를 통해 재탄생되었다.

85년의 ‘라이브 에이드'(Live Aid)와 86년의 앰네스티 순회공연을 통해 등장한 스타 중 U2의 부상은 단연 돋보이는 것이 있었다. 특히 앰네스티 공연에서 U2의 리드 싱어 보노가 보여준 개성은 60년대 도어스의 짐 모리슨이 보여 준 바로 그것이었다. 아일랜드 출신 4인조 U2는 87년 팬들에 보답하는 앨범 「여호수아 나무」(Joshua Tree)를 발표했다. 이 앨범은 차트 1위에 랭크된 것은 물론이고, 78년 팀결성 이후 발표한 앨범들도 덩달아 차트에 무더기로 진입하여 그들의 인기를 실감케 했다. 정통 로큰롤에 실린 의미있는 가사와 진지한 매너로 한몫 보기도한 U2는 그 해 그래미상을 휩쓸기도 했다. 오랜만에 로큰롤이 U2를 통해 기지개를 켠 87년이었다.

17. 1988-일년내내 톱10에 랭크된 조지 마이클의 「믿음」

1988년은 오직 한 명의 스타가 독주한 해였다. 그 주인공은 조지 마이클. 86년 왬이 해산될 때부터 그의 솔로 등장은 시간 문제였다. 섹스 어필하는 용모와 흑인 가수를 방불케하는 소울 창법 등 스타가 될 만한 재능이 넘치는 영국 가수였다. 그의 솔로 데뷔 앨범은 「믿음」(Faith)이었는데, 이 앨범은 88년 한해 단 1주만 11위를 기록하였고 나머지 기간에는 톱10안에 랭크되었었다. 정상에 머무른 기간도 12주였다. 싱글 1위곡도 5개나 터져 나왔다(I Want Your Sex, Faith, Father Figure, One More Try, Monkey). 마이클 잭슨도 마돈나도 이런 기록은 세우지 못했다. 트레이시 채프먼의 포크와 스티브 윈우드의 컴백도 조지 마이클의 열기를 따라 잡진 못한 한 해였다.

18. 1988-헤비 메틀의 전성기를 다시 연 밴드들

88년 후반부의 주인공은 데프 레퍼드와 건스 & 로지스였다. 이들이 벌인 차트 경쟁은 헤비 메틀 만큼이나 치열한 것이었다. 88년 메틀계에 불을 당긴 팀은 반 헤일런의 「오! 자네도 하나 먹었군」(OU 812) 앨범으로 시작해서 데프 레퍼드의 「히스테리아」(Hysteria), 건스 & 로지스의 「파괴 망」(Appetite For Destruction) 그리고 본 조비의 「뉴 저지」(New Jersey)까지 그 열기는 이어졌다. 데프 레퍼드는 83년 「방화광」(Pyromania)에 이어 「히스테리아」도 7백만 장 이상 판매하여 앨범 2장을 연속으로 7백만장 이상 판매한 최초의 밴드가 되었다. 이들을 이어 건스 & 로지스 그리고 본 조비가 메틀의 열기를 이었다. 「뉴 저지」가 차트 1위에 올랐을 때 2위는 「파괴 욕망」, 3위는 「히스테리아」였다. 빌보드 차트 사상 메틀 밴드의 앨범이 1,2,3위를 휩쓴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19. 1989-팝계의 새로운 주인공 10대 가수들

89년은 유난히 10대 가수들의 활약이 돋보인 해였다. ’10대현상’은 88년 티파니부터 시작되었다. 데뷔 앨범 ‘티파니'(Tiffany)를 차트 정상에 올려놓으며 그녀는 10대 선풍을 몰고 왔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곧이어 데비 깁슨이라는 천재 소녀가 출현했다.  데뷔 앨범 「뜻밖에」(Out Of Blue)에 이어 「짜릿한 청춘」(Electric Youth)을 내놓으며 티파니의 인기를 능가하고 있다. 전반기는 보비 브라운의 독무대였다. 앨범 「잔인하게 굴지 마세요」(Don’t Be Cruel)에서 연속으로싱글 히트곡을 내놓았다(Don’t Be Cruel, My Prerogative, Roni, Every Little Step 등). 후반부는 뉴 키즈 온 더 블록이었다. 앨범「끈질기게 버텨」(Hangin’ Tough)를 차트 1위에 올리며 동명 싱글곡 외에 <커버 걸>(Cover Girl), <내가 (당신을 황홀하게 하지 않았어요>(Didn’t I<Blow Your Mind>)등을 연속 히트시켰다.

20. 1989-돌아온 공룡들

전반부엔 10대 가수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면 후반부는 60년대 로커들의 재등장이 활발한 시기였다. 토론토 공연으로 시작된 더 후의 컴백,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재등장. 봅 딜런. 반 모리슨. 비지스. 링고 스타 등의 새로운 모습이 인상적인 해였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1989년의 사건은 롤링 스톤즈의 재결합 공연이었다. 필라델피아에서 8월 31일 시작된 그들의 순회공연은 미국을 온통 뒤집어 놓았다. 뉴욕에선 공연이 예정되자마자 6시간만에 약 30만장의 입장권이 동나버리기도 했다. 새 앨범 「강철 바퀴」(Steel Wheels)와 싱글 <복잡한 감정> (Mixed Emotion)은 차트 정상을 향해 질주했다. ‘구르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말을 실감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