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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otels – All Four One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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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Four One는 The Motels의 앨범 중 가장 높은 인기를 누린 앨범이다. 이 앨범에는 그들의 최고의 히트곡 “Only the Lonely”가 수록되어 있고 – 빌보드 핫100 차트 9위까지 오름 – 앨범은 1982년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을 집계하는 빌보드 차트에서 51위를 기록했다. 이러한 인상적인 성공은 앨범의 수록곡들을 차례차례 듣고 있자면 순순히 이해가 간다. 당시의 대세인 뉴웨이브를 전면에 내세운 와중에 하드락을 연상케 하는 강력한 기타 연주와 퓨전째즈 풍의 색소폰 연주 등이 꽤나 비중 있게 각각의 싱글들에 배치되어 있어 – 물론 뉴웨이브적인 신서사이저의 연주는 기본으로 깔고 있고(So L.A.라는 곡에서 신서사이저의 사용이 특히 두드러진다) – 당시의 유명한 라디오 프로그램이나 도심의 백화점에서 그들의 노래가 흘러나온다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만큼 당시의 유행 조류에 절묘하게 올라타고 있다.

이러한 시의성은 보컬 Martha Davis의 걸출한 노래 실력에 힘입은 바 크지 않은가 하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인데, 그의 보컬은 밴드의 보컬이라기보다는 약간은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여주의 그것을 연상케 하는데 그의 보컬이 기본적으로 굉장히 극적인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리가 있지만, Siouxsie and the Banshees의 Siouxsie Sioux의 보컬과 Pat Benatar의 보컬의 섞어 반으로 나누면 Martha의 보컬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도 든다.

어쨌든 위키피디어를 읽어보면 이 앨범이 탄생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Val Garay가 프로듀서를 맡아 앨범 작업을 하는 와중에 밴드는 당시로서는 밴드의 음악중 가장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로 노래를 녹음했다고 한다. 당시의 마사의 남자친구였던 리드 기타 Tim McGovern는 스튜디오에서 Garay와 자주 충돌을 일으켰고 스스로가 사실상의 프로듀서와 어레인저가 돼서 Apocalypso라는 이름의 앨범의 녹음을 마쳤다고 한다.(하~ 이름하고는) 하지만 작업이 끝난 후 소속사인 Capitol Records는 이 앨범이 “상업적이 않고 너무 이상하다”는 이유로 앨범 발매를 거절한다.

그래서 밴드는 스튜디오로 돌아가서 모든 작업을 새로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McGovern은 마사와 헤어지고 급기야 밴드를 떠나게 된다. McGovern이 떠난 후 Garay가 스튜디오의 뮤지션들을 최대한 활용하는 등의 새로운 접근법으로 앨범을 보다 상업적으로 포장하였는데, – 그 과정에서 많은 밴드 멤버들이 갈리곤 했다는데 사실상 그러면 밴드의 의미가 뭔가 싶기도 하고 – Apocalypso의 여섯 개 트랙은 완전히 새롭게 녹음하는 등의 환골탈태 과정이 있었다고 한다.

모든 어려움을 딛고 작업을 끝낸 앨범 이름이 All Four One으로 정해진 이유는 밴드가 네 개의 앨범은 녹음했는데 하나는 발매되지 않았다는 의미라고 한다. 끝까지 McGovern을 엿먹이는 Garay의 세심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또는 남은 네 명의 밴드 멤버가 앨범을 마쳤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웟에버) 레코드사는 우여곡절 끝에 나온 앨범은 1982년 4월 5일 발매했고 밴드의 앨범 중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된다. Apocalypso는 2011년 발매됐다고 한다.(한번 사볼까?)

https://www.youtube.com/watch?v=JWKfwz5NqWI

Combat R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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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lash – Combat Rock” by Source. Licensed under Wikipedia.

어릴 적에 이 앨범을 처음 구입했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 어쩌면 당연하게도 – 밴드 멤버가 찍혀 있는 앨범 표지였다. 한적한 시골의 철도변에 앉아 있는 반항적인 펑크족들의 사진은 밴드의 음악적 방향을 잘 말해주고 있는 듯 하다. 뮤지션과의 작업을 많이 한 것으로 유명한 사진작가 Pennie Smith가 찍은 이 사진은 밴드가 1982년 동남아 여행을 하던 중 방콕 외곽의 한 버려진 철도에서 찍은 것이라고 한다.

1982년 5월 14일 밴드의 다섯 번째 스튜디오앨범으로 발매된 이 작품은 영국 차트 1위, 미국 차트 7위까지 오르는 등 The Clash의 작품 중에서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하지만 그 과정까지에는 어려움도 있었다고 한다. 애초 이 작품은 “Rat Patrol from Fort Bragg”이라는 이름의 더블 앨범으로 기획되었다. 하지만 Mick Jones의 믹싱에 불만을 품은 나머지 멤버들이 이 일을 Glyn Johns에게 넘겼고 작품 길이는 싱글 LP로 줄었다.1

앨범의 첫 싱글로 발표된 작품은 A면 첫 곡이기도 한 “Know Your Rights”다. “이것은 기타로 알리는 공공의 발표다.”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세 가지 권리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이 권리들은 Catch22의 모순처럼 행사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면 “당신은 발언의 자유가 있다. 실제로 그걸 행사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면 말이다.(The right to free speech, as long as you’re not dumb enough to actually try it)”

앨범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은 세 번째 수록곡인 “Should I Stay Should I Go?”다.2 이 곡은 밴드가 영국 싱글 차트에서 유일하게 정상을 차지한 곡이 되었다. 이 노래의 제목 때문에 이 앨범으로 불화를 겪고 결국 그룹을 떠난 Mick Jones의 자조적인 내용이 아니냐는 소문이 있기도 했지만 본인은 부인했다고 한다. 롤링스톤은 “The 500 Greatest Songs of All Time”이라는 차트에서 이 곡을 228위에 올려놓았다.

“Should I Stay Should I Go?”와 함께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둔 또 하나의 싱글은 이어지는 곡 “Rock The Casbah”다. 이 곡은 빌보드 핫100 차트 8위까지 올랐는데 이는 밴드의 유일한 미국 차트 탑10 기록이다. 이 곡은 1979년 혁명 이후 서양음악을 금지한 이란 정권을 비꼰 내용이다. 이러한 상황은 실제로 이란계 프랑스 만화작가인 마르잔 사트라피의 자전적 작품 “Persepolis”에서 자세히 소개되기도 했다.3

요즘 들어 이 앨범에서 가장 맘에 드는 곡은 제목처럼 펑키한 리듬으로 무장한 “Overpowered by Funk”다. 80년대 The Jam, Spandau Ballet 등을 통해 일반화될 백인 펑크(funk)의 유행을 선도했던 이 노래는 영국에서 작업을 시작해서 앨범 전체를 마무리했던 뉴욕에서 완성되었다. 이 곡의 랩 부분은 뉴욕의 스튜디오에서 밴드의 “This Is Radio Clash” 등의 싱글 앨범 표지 작업을 맡기도 했던 Futura 2000이 맡았다.

앨범이 발표된 1982년은 영국 내부의 정치도 그러려니와 세계적으로도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The Clash는 이런 상황을 “전투 락”이라는 앨범 속에 진보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녹여냈다. 이 앨범의 미학적 가치는 또한 다양한 음악장르를 – 특히 랩이나 펑크(funk)와 같은 흑인음악을 –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이다. 밴드의 이러한 문화적 포용성은 펑크락(punk rock)이 단순한 백인 노동계급의 음악에서 머물지 않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1. 오리지널 믹스는 브트렉으로 팔리기도 했다고 한다
  2. 어릴 적 하숙집에서 이 노래를 내가 자주 들어 하숙집의 유행가가 되기도 했다
  3. 이란 정부의 풍속 경찰은 파티 등 서양의 문화를 단속했는데, 사람들은 이를 피하려다 지붕에 떨어져 죽기까지 하는 일화가 소개되고 있다

The Name Of This Band Is Talking Hea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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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ame of This Band Is Talking Heads” by Source. Licensed under Wikipedia.

1982년 3월 24일 Talking Heads의 다섯 번째 앨범이자 더블 라이브 앨범인 “The Name Of This Band Is Talking Heads”가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1977년 11월 17일 매사추세츠州 메이너드에 있는 ‘WCOZ 노던 스튜디오’, 1978년 8월 23일 일리노이즈州 시카고에 있는 ‘파크 웨스트(The Park West)’, 1978년 9월 16일 캘리포니아州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보딩 하우스(The Boarding House)’, 1978년 12월 18일 오하이오州 클리브랜드의 ‘아고라(The Agora)’, 1979년 8월 24일 매사추세츠州 보스턴에 있는 ‘버클리 퍼포먼스 센터(Berklee Performance Center)’, 1979년 11월 17일 뉴저지州 파사익에 있는 ‘캐피톨 극장(The Capitol Theater)’, 1980년 8월 27일 뉴욕시에 있는 ‘센트럴 공원’, 1980년 11월 8일부터 9일까지 뉴저지州 체리힐에 있는 ‘에메랄드 시티’, 1981년 2월 27일 일본 동경에 있는 ‘썬플라자 콘서트 홀’에서 녹음되었다. 연주되는 곡들은 “Talking Heads: 77”, “More Songs About Buildings and Food”, “Fear of Music”, “Remain in Light” 등 그룹이 이전에 낸 스튜디오 앨범의 수록곡들을 중심으로 짜여 있다. 1977년 11월부터 1981년 2월까지의 라이브 공연에서 연주한 열일곱 곡을 담은 이 더블 앨범은 반절은 네 명의 밴드 멤버로, 나머지 반절은 게스트 뮤지션들의 도움을 받아 총 10명의 진용으로 진행된 공연을 담은 것이다. 게스트 뮤지션으로는 기타에 Adrian Belew, 키보드에 Bernie Worrell, 백보컬에는 Dolette McDonald와 Nona Hendryx 등의 도움을 받았다. 이 앨범의 카세트 버전에는 “Cities”가 보너스트랙으로 들어있다. 2004년 재발매된 앨범에서는 오리지널 LP에서 삭제되었던 트랙들이 대거 포함되면서 길이가 거의 배가 늘었다. 추가된 곡은 총 여덟 곡이다. 오리지널 앨범은 발매 당시 빌보드 탑200 차트에 31위까지 올랐고 영국 앨범 차트에는 22위까지 올랐다.

우리는 어떻게 만들었나

The Lexicon of Love라는 신쓰팝의 명반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ABC의 멤버인 당사자들이 쓴 글을 삼번함(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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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Lexicon” by The cover art can be obtained from the record label.. Licensed under Wikipedia.

Martin Fry, 싱어송라이터

1982년에 디스코는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난 Chic 앨범의 선율들을, 그리고 Earth, Wind &Fire의 모든 음악세계를 사랑했다. The Cure와 Joy Division과 같은 이들과 융화한 것은 우리가 추구했던 것이었다. – 우리 기타리스트였던 Mark White는 한 영화의 사운드트랙의 분위기를 부여하고 싶어 했다. 매우 극장과 같은 분위기의 표지에 끝내주는 고전 영화인 The Red Shoes의 터치를 가미하기도 했다. 실제보다 더 강렬하고 감정적이었다. The Lexicon of Love는 어느 정도는 그러했다. 난 팔세토 창법을 많이 썼다. 부분적으로 사랑에 빠진 것의 롤러코스터 탑승을 – 우쭐함과 절망 – 전달하기 위해서.

우리의 첫 싱글 Tears Are Not Enough는 1981년에 탑20곡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의 앨범은 보다 다듬어졌다. Dollar’s의 파노라마와 같은 넓은 화면과 같은 사운드인 Hand Held in Black and White를 듣고, 우리는 프로듀서 Trevor Horn과 접촉하였다. 그는 우리가 추구하려던 것을 즉시 이해했다. 우리는 아이디어가 가득했고 락앤롤을 바꿀 수 있으리라 – 셰필드에서 실직수당을 받으며 노래를 막 시작한 이에게는 매우 야심 찬 – 생각했다.

가사적으로 나는 Gary Numan과 OMD의 것을 사랑했었지만, 내 노래들을 Rodgers and Hammerstein이나 Cole Porter의 라인처럼 보다 감정적으로 고양시키고 싶었다. 그 당시에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것에 관한 노래가 드물었다. 펑크는 매우 중독적임에도 여성들은 그들의 존재감을 Lexicon에서 부각시켰다. 선율을 그렇게 두드러지게 특징 지우는 것은 통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당신이 Cilla Black이나 Cliff Richard가 아니라면 말이다. 4위까지 오른 The Look of Love는 무그 베이스라인에 모든 피치카토 어레인지먼트가 담겨 있었다. 반면 All of My Heart (No 5)는 매우 Bridge Over Troubled Water 스러웠다.

이미지적 관점에서 황금색 라메 수트와 디너 재킷은 우리를 펑크와 달리 보이게 했다. 야심적이고 코스모폴리탄적인, James Bond와 같은 요소를 가득 담고 있었다. 30년에 걸쳐 나는 이 노래들을 오케스트라와 공연하여 왔다. 나는 내 삶을 살아왔고 이제 두 아이가 있다. 그래서 All of My Heart로 돌아가는 것은 – 그리고 소년답게 라기보다는 남자답게 부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Anne Dudley, 키보드, 어레인저

ABC는 키보드 연주자가 없었다. 그래서 Trevor Horn이 영입했다. The Look of Love를 녹음하는 도중에 그는 진짜 현악과 관악 부문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젊은이의 확신으로 경험은 일천했지만 내가 어레인지먼트를 하겠다고 자원했다. 우리가 애비로드에서 30개의 현악 섹션을 녹음했을 때, 나는 종종 그 방에서 가장 어렸다. 나는 Gamble and Huff의 디스코 클래식 The Sound of Philadelphia에서의 오케스트라의 풍부함을 언제나 사랑했었다. 이게 주된 영감이 되었고 또한 Bee Gees의 날아오르는 듯 하지만 단순한 현악 라인이 보태졌고 심지어 거기에는 Vaughan Williams도 약간 가미되었다.

The Look of Love의 믹스를 듣고 Trevor가 얼마나 시끄럽게 현악을 만들어냈는지를 알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이것은 ABC의 색을 선명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미안해할 것도 없이 호사스럽고 서사적인 앨범이 될 것이었다. 그 이후로 우리는 많은 트랙들에 현악을 가미할 것이었고 앨범의 독특한 사운드를 개발해 나갈 것이었다. – 최신의 기술,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실제 악기의 조화. 그 이후로 내가 추구해오던 조합이다.

솔직히 난 All of My Heart가 처음엔 좀 약하다고 생각했다. Trevor가 “all of my heart”의 가사를 부르기 전에 드라마틱한 멈춤과 코러스로의 결말을 첨가할 때까지 말이다. 우리는 그 다음에 팀파니를 조금 더 넣었다. 반면 페이드아웃은 내게 영국의 목가적인 순간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 결론적으로 그건 아마도 Martin의 최고의 보컬 퍼포먼스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두드러진 곡이 되었다. 그러나 트랙들은 모두 두드러졌다. Martin의 재치 있고 쉬운 가사는 젊은 사랑의 시도를 요약하고 있다. The Lexicon of Love는 1위를 기록했고 난 이 앨범이 30년간 어떻게 비쳐지는지에 관해 즐거울 따름이다. 그리고 내 젊은 날의 노력이 그다지 부끄럽지는 않다.

Songs of the F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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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fsotf” by The cover art can be obtained from Warner Bros... Licensed under Wikipedia.

Songs of the Free는 포스트펑크 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인정받는 영국 리즈(Leeds) 출신의 밴드 Gang of Four1의 세 번째 스튜디오 앨범이다. 1982년 발매된 이 앨범의 곡은 그룹의 핵심 멤버인 기타리스트 Andy Gill과 싱어 Jon King이 만들었고 프로듀스에는 이들 이외에 Mike Howlett이 가세했다. 앨범에서는 Jon King의 강렬한 샤우트 창법이 인상적인 “I Love a Man in a Uniform“이 같은 해 싱글로 발매되어 인기를 끌었다. 이 곡은 영국 싱글 차트에서는 65위, 빌보드 클럽플레이 싱글스에서는 27위에 올랐다. 이 곡은 Call Me Up과 함께 앨범에서 가장 두드러진 곡이다. 앨범은 빌보드 팝앨범스 차트에 175위까지 올랐다. Infinite Zero Archive/American Recordings 레이블이 1996년 이 앨범을 2개의 보너스 트랙과 함께 CD로 발매했다. 이 앨범은 순서가 약간 바뀌었고2 “I Love a Man in a Uniform”을 “I Love a Man in Uniform”이라고 잘못 표기했다. EMI는 2008년 CD를 재발매했는데 원래 앨범의 순서를 지켰고 보너스 트랙은 뺐다. 피치포크 미디어는 이 앨범은 1980년대 가장 위대한 앨범 중 99위에 선정했다.

Side one
1.”Call Me Up” – 3:35
2.”I Love a Man in a Uniform” – 4:06
3.”Muscle for Brains” – 3:17
4.”It Is Not Enough” – 3:27
5.”Life! It’s a Shame” – 5:06
Side two
1.”I Will Be a Good Boy” – 3:52
2.”The History of the World” – 4:40
3.”We Live as We Dream, Alone” – 3:37
4.”Of the Instant” – 4:58
1996 bonus tracks
1.”The World at Fault” – 3:38
2.”I Love a Man in a Uniform (dub)” – 4:48

  1. 밴드의 이름은 잘 알려진 중국의 四人幇에서 따왔다.
  2. “Muscle for Brains”와 “We Live as We Dream, Alone”의 순서를 바꾸었다

A Broken Fr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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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9월 27일, Depeche Mode의 두 번째 스튜디오 앨범 “A Broken Frame”이 발매되었다. 밴드 멤버와 Daniel Miller가 프로듀스한 이 앨범은 1981년 12월에서 1982년 7월까지 런던에 있는 블랙윙 스튜디오에서 녹음됐다. 이 앨범은 오리지널 멤버였던 Vince Clarke이 Alison Moyet과 Yazoo를 결성하기 위해 그룹을 떠난 후 Martin Gore가 전적으로 작품을 만들었던 첫 작품이었다. Clarke의 대체 멤버 Alan Wilder는 앨범에 실질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공식적으로 그 해 열렸던 그들의 두 번째 영국 투어에 참여했다. 앨범에서는 “Leave In Silence”, “See You” 등이 인기를 얻었다. 앨범은 영국 앨범 차트에서는 8위까지 올랐고 빌보드 탑200에서는 177위까지 올랐다. 이 앨범은 2006년 리마스터링 작업을 거쳐 1982년 10월 런던의 햄머스미쓰 오데온에서 가졌던 공연 모습을 담은 DVD와 함께 고음질 슈퍼오디어 CD로 재발매되었다.

Thriller

The cover has Jackson reclining in a white su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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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Jackson은 1979년 솔로 앨범 Off the Wall로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팝, R&B, 락, 포스트디스코, 펑크(funk), 어덜트컨템포러리의 장르가 골고루 배합된 이 앨범은 Stevie Wonder, Paul McCartney, David Forster, Quincy Jones 등이 프로듀서와 작곡가 등으로 가세하여 전 세계적으로 2천만장이 판매된 블록버스터였다. 이 때문에 Michael에게는 새 앨범에 대한 심적 부담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새 앨범 Thriller는 이러한 배경 하에 이전 앨범 발표로부터 3년 만인 1982년 11월 30일 발매되었다.

프로듀서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Quincy Jones가 주로 맡았고 Michael도 일부 곡들에서 프로듀서로 가세했다. 아홉 개의 트랙 중에서 Michael이 네 개의 곡을 썼고 James Ingram, Rod Temperton 등이 작곡진에 가세했다. 녹음은 1982년 4월에서부터 11월까지 LA에 있는 웨스트레이크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졌다. 예산은 약 75만 달러가 소요된 값비싼 앨범이다. 앨범 수록곡 중 “Baby Be Mine“과 “The Lady in My Life”를 제외한 일곱 개의 트랙이 싱글로 발매되어 전곡이 빌보드 핫100 차트 10위 안에 올랐다.

앨범은 현재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란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데 대략 5천1백만 장에서 6천5백만 장 정도 팔린 것으로 추산된다. 1984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이 앨범은 ‘이 해의 앨범’을 포함하여 8개 부문을 수상한다. 이러한 성과는 Michael Jackson이 인종적인 음악 장벽을 뛰어넘는데 큰 역할을 했음을 의미한다. Michael Jackson은 이제 ‘백인이 좋아하는 흑인음악’을 넘어 ‘누구나 좋아하는 팝음악’을 만드는 흑인음악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백악관에 가서 당시 美대통령 로널드 레이건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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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iller에서의 군무장면

실제로 Michael Jackson은 대중음악계에서조차 공공연한 인종차별에 힘들어했다고 한다. 그는 전작 Off The Wall이 ‘이 해의 앨범’에 선정되지 못한 것에 화를 냈다고 한다.(아마도 인종차별적 이유로) 결정적으로 Michael은 롤링스톤誌에 자신을 커버스토리로 다룰 의향이 있는지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다. “나는 끊임없이 흑인을 커버로 하는 잡지는 팔리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었다. 기다려. 그 잡지들이 내게 인터뷰를 구걸하는 날이 올 것이다.” 실제로 Michael이 인터뷰를 구걸하는 잡지에게 어떻게 대했는지는 모르겠다.

한편 MTV의 등장과 이 매체의 활용은 Thriller의 성공에 큰 기여를 한다. 1981년 ‘런던에서의 미국인 늑대인간’이라는 공포물을 내놓은 John Ladis는 Thriller의 감독을 맡아 마치 단편 영화를 보는 듯한 서사구조로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큰 인기를 얻었다. “Billie Jean”이나 “Beat It” 역시 현란한 무용과 재미있는 스토리 덕택에 MTV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1 이것은 또 하나의 인종차별에 대한 승리였다. MTV는 공식적으로 인종차별을 부인하였지만 어쨌든 Michael 의 성공이 흑인음악 비디오 방영의 기폭제가 된 것은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도 이 앨범은 최초로 구입한 LP다. Thriller의 전주에서의 발걸음 소리를 스테레오로 들으면서 전율하던 어린 시절의 감정이 지금도 생각난다. 그의 음악이 아니었더라면 아시아의 어린 소년이 흑인가수의 앨범을 살 생각을 했을까? 그의 음악이 아니었더라면 1984년 발표된 더 걸쭉한 흑인음악 풍의 팝음악인 Prince의 Purple Rain이 그런 열광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었을까? 일부 의식 있는(?) 비평가는 Michael Jackson의 이 앨범이 지나치게 “백인적”이라고 비판하지만 당시 백인 위주의 시장에겐 또 하나의 흑인음악이었을 뿐이다.

1. “Wanna Be Startin’ Somethin’
2. “Baby Be Mine”
3. “The Girl Is Mine” (with Paul McCartney)
4. “Thriller”
5. “Beat It
6. “Billie Jean”
7. “Human Nature”
8. “P.Y.T. (Pretty Young Thing)
9. “The Lady in My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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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특히 “Beat It”에서의 군무(群舞)는 Michael의 죽음 후 기획된 한 프래쉬몹에서의 소재가 되는 등의 깊은 인상을 남겼다.

Ten Ragas To A Disco Beat


이미지 출처

하우스 뮤직은 누가 처음 연주하였을까? Ten Ragas To A Disco Beat 라는 앨범의 속지를 쓴 인도 대중문화 평론가 Edo Bouman은 인도의 발리우드 영화 음악가 카란지트 싱(Charanjit Singh)이 하우스 뮤직의 창시자라고 할 만한 상당한 근거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Bouman은 이 앨범이 “전형적인 하우스”라고 말하고 있다.

앨범은 전체적으로 미니멀리즘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지만 하우스 뮤직, 특히 애시드 하우스(Acid House)의 특성을 말해주는 신디싸이저 TR-808과 TB-303의 최면적인 일렉트로닉 멜로디로 꾸며져 있다. 1982년 발표된 이 앨범은 통상 최초의 하우스 레코드라 알려진 Chip E.의 Jack Trax보다 3년 먼저 발표된 셈이다. 또한 최초의 Acid House 로 알려진 Phuture의 Acid Trax보다 5년 먼저 발표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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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303

그렇다면 발리우드 영화음악을 주로 작업했던 싱은 어떻게 TB-303 등의 악기를 사용하여 하우스 뮤직을 할 생각을 했을까? Bouman과의 인터뷰에서 싱은 “당시 디스코 음악이 굉장한 인기였어요. 그래서 난 고전적인 라가 음악을 디스코 비트로 바꿨죠.”라고 말했다. 싱은 HMV 인디아와 계약을 맺고 자신의 신디싸이저를 HMV 스튜디오로 가져가 단 이틀 동안 단 한번의 연주로 모두 녹음을 마쳤다고 한다.

싱이 이 앨범에서 쓴 악기는 Jupiter-8 키보드, 드럼 연주를 위한 TR-808, 베이스 연주를 위한 TB-303이 다였다. 모두 전자음악에서는 고전이 된 악기들이다. 흥미롭게도 싱이 당시 이 앨범을 만들 당시 영감을 준 아티스트는 그가 직접 공연도 봤던 Kraftwerk와 같은 전자 음악단이 아니라 Daddy Cool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던 Boney M. 이라고 한다. 유로디스코가 인도의 한 음악가에게 영향을 미쳐 하우스 뮤직으로 발전하게 된 셈이다.

앨범 수록곡 듣기

The Lexicon of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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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exicon of Love는 영국 출신의 뉴웨이브 밴드 ABC가 1982년 내놓은 데뷔 앨범이다. 이 앨범은 컨셉트 앨범은 아니지만 반복적으로 싱어가 충만한 인간관계를 가지려 시도했지만 실패함으로써 겪은 마음의 상처라는 주제를 반복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이 앨범은 The Buggles 출신의 Trevor Horn이 프로듀서를 맡았고 엔지니어는 Gary Langan이 맡았다. 한편 클래식과 팝 양쪽에서 활동하고 있던 작곡가 Anne Dudley의 오케스트레이션과 JJ Jeczalik의 Fairlight CMI 프로그래밍의 도움을 받았다. 이 넷은 후에 Art Of Noise를 결성한다. 프로덕션 팀이나 세션 플레이어들은 ZZT 레이블의 기초를 다진 이들이었다. Tears Are Not Enough, All Of My Heart, Poison Arrow, The Look Of Love(Part One)이 영국에서 차트 20위안에 올랐다. Poison Arrow, The Look Of Love(Part One)은 미국 싱글 차트에서 각각 25위와 14위까지 올랐다. 앨범은 영국 차트에서 1위, 미국 차트에서 24위까지 올랐다. 2004년 삭제된 부분과 초기 데모, 그리고 1982년 공연의 라이브 버전 등이 포함된 두 장짜리 디럭스 디스크가 뉴트론 레이블을 통해 발매되었다. 2009년에는 ABC가 런던의 로얄알버트홀에서 BBC 콘서트 오케스트라와 함께 앨범의 수록곡을 가지고 공연을 가졌다. 2012년 앨범 발매 30주년을 기념하여 다시 한 번 로얄드러리레인 극장에서 공연을 가졌다.

Side One
1. “Show Me” – 4:02
2. “Poison Arrow” – 3:24
3. “Many Happy Returns” – 3:56
4. “Tears Are Not Enough” – 3:31
5. “Valentine’s Day” – 3:42
Side Two
6. “The Look of Love” (Part One) – 3:26
7. “Date Stamp” – 3:51
8. “All of My Heart” – 5:12
9. “4 Ever 2 Gether” (ABC/Anne Dudley) – 5:30
10. “The Look of Love” (Part Four) – 1:02

Built For Spe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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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ilt For Speed cover” by The cover art can be obtained from EMI America.. Licensed under Wikipedia.

1982년 6월 7일 라커빌리 밴드 Stray Cats의 “Built For Speed”가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밴드가 이전에 영국에서 발매한 두 개의 앨범(셀프타이틀 앨범과 Gonna Bell)의 모음집의 형태를 띠고 있다. 밴드는 Eddie Cochran, Carl Perkins, Bill Haley & His Comets와 같은 50년대 뮤지션들의 음악에 영향을 받은 라커빌리 음악을 구사하였다. 이들은 그들의 고향 뉴욕의 롱아일랜드의 공연장에서 공연을 하며 지지자들을 확보하였다. 1980년 영국으로 이주한 이들은 뮤지션이 프로듀서인 Dave Edmunds를 만났다. 그는 밴드와 함께 그들의 셀프타이틀 데뷔앨범을 제작했다. Stray Cats는 이 앨범을 Arista 레코드사를 통해 내놓는다. 이 앨범에서는 “Runaway Boys”, “Rock This Town”, “Stray Cat Strut” 등이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이어진 앨범 Gonna Ball은 히트곡이 없었다. The Tomcats, The Teds, Bryan and the Tom Cats 등 다양한 이름으로 활동하던 이들은 The Rolling Stones 미국 순회공연의 오프닝 밴드 등으로 활동하면서 Stray Cats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밴드는 EMI-America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고 두 앨범의 컴필레이션 성격인 “Speed”를 내놓는다. 앨범에서 “Rock This Town”(#9 Pop)와 “Stray Cat Strut”(#3 Pop)가 큰 인기를 얻었다. 앨범은 빌보드 탑200 2위에 올랐다.
Side one
1.”Rock This Town” – 3:24
2.”Built for Speed” – 2:53
3.”Rev It Up & Go” – 2:27
4.”Stray Cat Strut” – 3:15
5.”Little Miss Prissy” – 2:59
6.”Rumble in Brighton” (Setzer, Slim Jim Phantom) – 3:11
Side two
7.”Runaway Boys” (Setzer, Phantom)- 2:58
8.”Lonely Summer Nights” – 3:16
9.”Double Talkin’ Baby” (Danny Wolfe) – 3:02
10.”You Don’t Believe Me” (Setzer, Phantom, Lee Rocker) – 2:54
11.”Jeanie, Jeanie, Jeanie” (George Motola, Ricky Page) – 2:18
12.”Baby Blue Eyes” (Paul Burlison, Johnny Burnette)- 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