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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More 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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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Michael” by University of Houston Digital Library – http://digital.lib.uh.edu/u?/p15195coll6,268.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1988년 5월 28일 Wham!에서 독립한 George Michael이 부른 “One More Try”가 빌보드 핫100 차트 1위에 올라 3주간 머물렀다. 또한 어덜트 컨템포러리 차트에도 같은 날 1위에 올라 역시 3주간 머물렀고, R&B 싱글 차트에는 같은 해 6월 18일 1위에 올라 1주간 머물렀다. George Michael이 쓰고 직접 프로듀스한 이 곡은 뮤지션의 솔로 활동 중 네 번째 미국 차트 1위곡이 되었다. 1987년 10월 발매되었던 George의 첫 번째 솔로 앨범 Faith는 계속해서 히트곡을 쏟아내고 있었는데 One More Try도 그 중 하나다.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아 또 다시 새로운 관계를 갖기를 꺼리는 한 남자의 심정을 담은 이 노래는 1988년 4월 11일 앨범의 네 번째 싱글로 발매되었고 4월 16일 40위로 핫100 차트에 등장했다. 그리고 6주 후 정상을 차지한다. 이 노래의 성공 덕택에 Faith는 R&B 앨범 차트에서도 1988년 5월 21일 1위를 차지하여 6주간 머물렀다. 아프리칸 어메리칸이 아니면서 R&B의 앨범과 싱글 차트를 동시에 석권한 것은 사상 최초였다. 이후 2006년 Robin Thicke이 싱글 “Lost Without You”와 앨범 “The Evolution of Robin Thicke”으로 이 대기록을 다시 한 번 세웠을 뿐이다.

뮤직비디오

I Want Your S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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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MichaelFaithAlbumcover” by May be found at the following website: http://www.georgemichael.com. Licensed under Wikipedia.

1987년 6월 3일 BBC는 Wham!의 프론트맨이었던 George Michael이 새로 내놓은 “I Want Your Sex”를 TV와 라디오에서 이틀 동안 방송하지 않았다. Michael의 솔로 데뷔 앨범 “Faith”의 첫 싱글로 발표된 이 곡은 Eddie Murphy의 코미디 “Beverly Hills Cop II”의 사운드트랙에도 사용됐다. BBC는 방송금지 사유로 음악과 비디오가 “너무 성적으로 도발적”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그리고 메시지는 일부일처제를 담고 있음에도1 실제로는 난혼(亂婚)을 조장하고 있다고 믿었다. 미국에서도 당시 AIDS 등에 대한 공포가 널리 퍼져있는 시대조류에 맞게 상당수의 방송국이 비슷한 이유로 방송을 거부했다. MTV는 Michael에게 그들의 낮방송에 틀 수 있도록 뮤직비디오를 편집해달라고 요청했다.2 CBS레코드사 역시 라디오 방송국에 “sex”라 외치는 부분을 “love”로 바꾼 버전을 제공했다. 이러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레코드는 영미 양국 차트에서 1위에 올랐다. “I Want Your Sex”는 영국 싱글 차트 3위, 빌보드 핫100 차트 2위에 올랐다.3 RIAA는 이 곡에 대해 플래티넘을 인증했다.

뮤직비디오

  1. 13분 10초에 달하는 익스텐디드 믹스의 제목은 Monogamy Mix다
  2. 뮤직비디오에는 당시 Michael의 여자친구였던 메이컵 아티스트 Kathy Jeung이 출연했다
  3. 당시 1위곡은 U2의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였다

Everything She W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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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thing She Wants” by May be found at the following website: http://images.google.co.uk/imgres?imgurl=http://www.stars-on-7-inch.com/index_w/wham/last_christmas.jpg&imgrefurl=http://www.stars-on-7-inch.com/index_w/wham/wham.html&h=507&w=505&sz=119&hl=en&start=20&tbnid=aAApz-N9rt8PTM:&tbnh=128&tbnw=127&prev=/images%3Fq%3DEverything%2Bshe%2Bwants%2B%2Bwham%26svnum%3D10%26hl%3Den%26lr%3D%26safe%3Doff%26rls%3DGGLJ,GGLJ:2006-42,GGLJ:en-GB%26sa%3DN. Licensed under Wikipedia.

영국 출신의 남성듀오 Wham이 부른 “Everything She Wants”가 1985년 5월 25일 빌보드 핫100차트 1위에 올라 2주간 머문다. 또한 같은 해 6월 8일에는 R&B 싱글 차트 12위까지 올랐다. 듀오의 프론트맨 George Michael이 작곡과 프로듀스를 담당한 이 곡은 듀오의 세 번째 미국 차트 1위곡이 되었다. 해당 곡은 듀오의 두 번째 앨범 “Make It Big”을 제작하는 기간에 만들어졌는데, 새로이 결혼한 남성이 부인의 물질적 요구에 힘들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런 상황은 부인이 임신을 한 사실을 알게 되고 결혼관계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더욱 악화된다. 녹음은 1984년 여름에 런던에 있는 Sarm West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다. 기본 리듬은 Linn LM-1 드럼 머신으로 프로그래밍되었고, Michael과 키보디스트 Tommy Eyre이 연주하는 신디사이저가 덧입혀졌다. 완성된 곡은 처음에 1984년 12월 영국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을 겨냥하고 만든 “Last Christmas”와 함께 A면에 실려 발매되었고, 영국 싱글 차트에서는 Band Aid의 “Do They Know It’s Christmas”에 이어 2위까지 올랐다. “Everything She Wants”는 George Michael 스스로도 자신들의 곡 중에서도 특히 좋아하는 곡이며, 단순한 틴팝 그룹에 그칠 것이라는 세간의 평가와 달리 듀오가 좀 더 진지한 청취층을 아우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다.

뮤직비디오

80년대 팝계의 20대 사건

출처가 어디인지는 불명입니다. http://myhome.naver.com/ouimoi/favorite/80년대사건.htm 라는 링크가 남아 있긴 한데, 지금 열어보니 더 이상 서비스를 하지 않는 페이지라는군요. 누군가 예전에 “음악세계”란 잡지에서 본 것 같다는 코멘트를 달아놓기도 했네요. 여하튼 저작권이 있으신 분이 있으시면 연락주시고요. 이 중 몇 개나 동의하시는지 한번 곰곰히 생각해보는 것도 재밌겠네요.

Pop Events Of The Decade (80년대 팝계의 20대 사건)

1. 1980-핑크 플로이드의 화제작 「벽」

1980년 최대의 화제작은 핑크 플로이드의 「벽」(The Wall)이었다. 67년 데뷔작 「여명의 문 앞에 선 풍적수」(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를 발표한 이래 핑크는 프로그레시브 음악으로 팬들은 물론이고 아티스들에게도 음악적인 영향을 미쳤다. 73년 「달의 어두운 면」(Dark Side Of The Moon) 이래 최대의 앨범이라는「벽」은 15주간 차트 정상을 차지했는데, 82년에 영화로도 제작되어 또 다시 핑크 플로이드 열풍을 몰고 오기도 했다. 앨런 파커 감독의 이 영화는 당시로선 최장시간의 록영화였다. 라이브 에이드로 우리들에게도 친숙한 봅 겔도프가 주연한 이 영화는 록 스타의 정신적인 붕괴를 다룬 것이다. 영화 속에 나오는 애니메이션은 정치만화 칼럼니스트로 유명한 제럴드 스카프의 작품.

2. 1980-존 레논 흉탄에 쓰러지다

비틀즈의 존 레논이 80년 12월 8일 뉴욕에 있는 다코타 아파트에서 마크 채프먼이라는 사내의 총탄에 쓰러졌다.  80년 11월, 5년 동안의 침묵을 깨며 그는 앨범 「이중 환상」(Double Fantasy)을 발표하여 팬들을 설레게 했었다. 싱글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Just Like> Starting Over)은 그의 죽음 이후 차트 1위에 올라 사람들을 더욱 애석하게 했다. 비틀즈 시절 “우리는 예수보다 유명하다”는 말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던 존은 60년대 팝 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만함 속에 번득이는 예지등으로 그의 개성은 더욱 팬들에게 어필되었고, 65년 비틀즈 멤버로서 ‘대영제국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3. 1981-MTV의 영향

1981년 8월 미국의 어느 케이블 방송국은 24시간 동안 음악만을 방송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MTV(Music Televison)이다. 75년 일본의 소니사에 의해 비디오가 대중화될 때부터 MTV의 출현은 이미 예상되었는데, 디스크의 소리에 TV의 화면을 접목시킨 것이었다. 노래를 듣고, 거기에다 보기까지 하니 음악의 내용도 상당히 변하게 되었다.  MTV는 뉴 웨이브 가수들의 출현을 앞당기기도 했다. 듀란 듀란, 컬처 클럽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70년대 통신기기의 대변혁인 비디오가 음악에 미친 영향은 바로 MTV의 출현이었다.

첫 시작을 알린 비디오는 그 유명한 The BugglesVideo Killed The Radio Star

4. 1981-뉴웨이브의 기수들

뉴웨이브라는 말처럼 뜻이 다양하고 복잡한 용어도 드물 것이다. 70년대 말 펑크와 디스코, 그리고 기존 록의 혼합물을 뉴웨이브라고 부르는데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기계적으로는 MTV의 등장이 뉴 웨이브의 출현을 앞당기는 역할을 했다. 70년대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을 80년대의 요구에 맞춘 것이 뉴 웨이브라고 보는데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대중적인 기반은 1981년 블론디였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고 멘 앳 워크. 폴리스. 유리쓰믹스. 컬처 클럽. 듀란 듀란 등 수많은 아티스트가 등장했다. 감각적인 사운드, 현대적인 감각의 화장 및 분장 그리고 환상적인 패션 등이 그들의 개성이기도 했다. 70년대 말의 파괴적인 펑크 시대 이후 찾아온 대중 음악, 그것이 뉴 웨이브였다.

5. 1982-CD 및 LPD의 개발

디스크와 TV의 만남이 MTV였다. 하지만 우리들은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시각과 청각의 동시 해결이라는 요구는 풀렸지만 그 질(質)이 문제였다. 먼저 원음(原音)에 가까운 소리를 듣고자 했다. 그것이 CD(Compact Disk)이다. 일본의 소니사와 네덜란드 필립스사는 82년 CD발매를 개시했다. 광통신(光通信)의 발전은 거기에서 머물지 않았다. 화면도 실물에 가까운 생생한 것을 가능케 했다. 그것이  LDP(Laservision Disk Player)이다. 83년 일본의 파이오니어사는 LDP를 시장에 내놓기 시작했다. MTV가 제공하는 음악의 발전 단계가 LDP인 것이다. 이제 팬들은 생생한 소리와 화면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비디오의 등장처럼 LDP가 음악계의 흐름을 뒤집진 못하고 있다. 지금은 초기 단계다. LDP의 대중화는 비디오에 못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결국 LDP는 단명하고 말았고 현재는 DVD가 대세죠 : 옮긴 이 주)

6. 1982-80년대의 음악 뉴 에이지

80년대 들어 태동한 두 가지 음악 장르라면 뉴 에이지와 랩이다. 80년대 초부터 ‘뉴 에이지’ 또는 ‘환경음악'(주로 일본) 등으로 불린 이 음악은 동양적인 명상음악이라는데 특징이 있었다. 굳이 뉴 에이지를 82년의 사건으로 잡는데는 약간의 무리가 있지만, 뉴 에이지라는 음악을 대중화시킨 조지 윈스턴의 활동을 기초로 했다. 80년 조지는 「가을」(Autumn), 「겨울에서 봄으로」(Winter Into Spring),「12월」(December)등을 발표했다. 위의 앨범이 꾸준히 팬들의 사랑을 받아 83년 초 빌보드 재즈 차트에  오르기도 했다. 한편 반젤리스는 82년 <불의 마차 ‘(Chariots Of Fire)라는 영화음악으로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반젤리스가 뉴에이지? : 옮긴 이의 의문) 이때부터 뉴 에이지는 그
독립성을 인정받아 87년 최초의 뉴 에이지 그래미 수상자 안드레아스 플렌바이더를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CD의 보급은 뉴 에이지를 전파하는 데 큰 몫을 했다는 사실도  간과해선 안되겠다.

7. 1983-80년대의 대표적인 뮤지션 마이클 잭슨

지금도 팬들에겐 <빌리 진>(Billie Jean)의 전주 부분이 귀에 생생할 것이다. 83년 팝계를 휩쓸어 버린 수퍼스타가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마이클 잭슨이다.  당시만 해도 흑인 가수의 방영을 꺼리던 MTV에 그는 백인에 가까운 성형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영화감독 존 랜디스 (“블루스 브러더스”<Blues Brother>의 감독)를 영입하여 만든 비디오 <비트 잇>(Beat It)은 마이클을 수퍼스타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모타운 설립 20주년 기념식에서 보여준 그의 춤 솜씨와 퀸시 존스에 의해 프로듀스된 앨범 「스릴러」(Thriller)의 펑키한 사운드, 그리고 백인에 가까운 분장 등은 MTV의 장점을 가장 완벽하게 이용했다는 평을 들었다. 그 앨범에선 싱글 톱10이 7곡이었는데, 덕분에 마이클 잭슨은 그 해 그래미상  8개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8. 1983-온 거리를 뒤흔든 브레이크 댄스

수퍼스타 마이클 잭슨의 등장 이후 뒤로 걷는 댄스 스텝은 팝계의 또 다른 화제거리였다. 길거리에서도 그를 흉내내는 청소년들을 보기란 어렵지 않았다. 관절을 비틀어 대는 춤 때문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는 기사들이 발표되기도 했었다.  이름하여 브레이크 댄스 열기였다. 이 좋은 소재를 영화계에서 놓칠리가 없었다. 83년 애드리언 라인 감독의 “플래시댄스”(Flashdance)가 바로 그것이다.  제니퍼 빌스 주연의 이 영화는 황당한 스토리를 지닌 것이었지만 디스코 작곡가로 유명한 조르지오 모로더의 음악 덕분에 흥행에 성공한 영화였다. 특히 아이린카라가 부른 <플래시댄스>와 <신나는 기분> (Flashdance What A Feeling)(이 노래가 언제부터 두곡이었을까나… : 옮긴 이의 의문)은 오스카 주제가상을 받았다. 이 영화 이후 댄스 음악은 영화에서 주요한 위치를 갖기 시작했다.

9. 1984-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열기

84년은 유난히 뛰어난 앨범이 많이 발표된 해였다. 한 앨범이 계속해서 1위에 머무는 바람에 1년(약52주) 동안 4개의 앨범만이 넘버원을 차지했다.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프린스의 해라고 해도 좋을 시기였다. ‘보스'(브루스)는 70년대 미국을 대표하는 가수였지만 「미국에서 태어나」 (Born In The U.S.A) 앨범으로 대중적인 기반도 확실히 다지게 되었다. 「끝없는 질주」(Born To Run)로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한 그는 그 해 타임, 뉴스위크 양 잡지의 표지인물로 선정되기도했다. 80년 「강」(The River)으로 앨범 1위를 기록한 그는 수작 「네브라스카」 Nebraska) 이후 84년 「미국에서 태어나」를 발표했다. 재킷에 노동자 복장 차림의 사람이 성조기를 향해 오줌을 누고 있는 듯한 자세 때문에 말도 많았지만 본인은 강력히 부인하기도 한 문제의 앨범이었다.

10. 1984-미네아폴리스 사단의 리더 프린스

TV 드라마 “배트맨”(Batman)의 주제곡을 열심히 피아노로 연주하던 소년이 바로 영화 “배트맨”의 사운드트랙을 맡았던 프린스이다. 1984년은 한 마디로 보스와 프린스의 해였다. 특히 프린스는 작곡, 작사, 프로듀서, 싱어를 겸하는 만능 재주꾼으로 83년의 마이클 잭슨 열기를 뒤엎기에 충분한 인물이었다. 70년대에 데이비드 보위가 새로운 음악의 창조를 위해 노력했다면 80년대는 단연 프린스였다. 그는 「심홍색 비」(Purple Rain) 한 장의 앨범으로 표현된다. 바로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스타 제조기이기도 하다. 배내티와 아폴로니아가 프린스 사단 출신이며, 실라E. 차카 칸. 마돈나. 시나 이스턴 등 그가 후원한 가수는 수도 없이 많다.

11. 1985-만능 엔터테이너 마돈나

80년대 최고의 여성 가수로 마돈나를 지목하기에 주저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1985년 마돈나는 「처녀처럼」(Like A Virgin)으로 전 세계 팝 팬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고 말았다. 프로듀서는 듀란 듀란의 프로듀서로도 유명한 나일 로저스. 미모와 섹시함 그리고 가수로서의 가창력과 춤 등이 그녀를 수퍼스타로 만들기에 충분했지만 MTV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그녀는 MTV 등장 이후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88년에는 브로드웨이 연극에도 출연하여 화제를 몰고 온 그녀는 영화배우 숀 펜과의 결혼 생활을 끝내는 등 끊임없이 구설수에 올랐지만, 올해 「기도처럼」(Like A Prayer)을 발표하며 자신의 건재를 과시하였다.

12. 1985-이디오피아 난민구호 ‘라이브 에이드

85년 7월 13일 영국 런던의 웸블리 구장과 미국 필라델피아의 존 F. 케네디 구장에서 동시에 대규모 콘서트인 ‘라이브 에이드'(Live Aid)가 개최되었다. 이디오피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난민을 돕기 위한 자선공연이었다. 장장 16시간의 공연, 200여명의 아티스트 출연, 430억의 자선 기금, 세계 140개국에의 15억 시청자 등등 종래의 모든 기록을 깨버린 행사였다. 영국의 록 그룹 붐 타운 래츠의 리더 봅 겔도프는 이 행사를 개최한 공로로 그 해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라이브 에이드’는 우드스톡 이후 최대의 공연이었으며, 이 행사에 자극받아 해리 벨라폰테는 ‘우리는 곧 세계'(We Are The World) 라는 앨범(We are the world는 라이브에이드 이전에 나오지 않았나요? : 옮긴 이의 의문)을 제작하기도 했다. 프로듀서는 퀸시 존스. 빌보드 차트 1위 및 그래미상 수상의 영광도 안은 앨범이었다.

13. 1981-뉴 웨이브의 기수들

뉴 웨이브의 열기, MTV의 등장 그리고 아티스트의 개성 등이 그 시대와 딱 들어맞은 뮤지션이 왬이었다.  조지 마이클과 앤드류 리즐리로 구성된 이 영국 듀오는 1984년 <떠나기 전에 깨워주오>(Wake Me Up Before You Go-Go)를 싱글 차트 1위에 올려 놓으며 스타덤에 올랐다. 1985년 중국 공연까지 벌였던 그들은 특히 여성 팬들의 우상이었다.  준수한 외모와 로맨틱한 노래로 국내에서의 인기도 대단했는데 85년 <경솔한 속삭임>(Careless Whisper)은 아마 팝 팬들에게 많은 추억을 준 곡으로 짐작된다. 흑인의 소울을 팝 감각으로 소화시켜 자신들의 개성을 구축했던 이들은 2집 「크게 해봐」(Make It Big)의 성공 이후, 끝없이 해체설이 돌다 결국 86년 헤어지고 말았다.

14. 1986-앰네스티 로큰롤 순회공연 개시

86년 ‘앰네스티’라는 단체가 뉴스에 종종 오르내렸다.’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라는 이 단체는 각국의 탄압받는 양심수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61년에 조직되었다. 온 세계에 이 단체의 존재를 명확하게 알리는 데는 록 스타들의 역할이 컸다. 앰네스티 미국 지부의 잭 힐리라는 사람은 85년 ‘라이브 에이드'(Live Aid) 공연의 위력을 실감한 뒤 대규모 록 행사를 계획했다. 86년 6월 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 개최되었던 이 행사에서 U2와 스팅 등은 자신들의 개성을 팝 팬들에게 강력히 심어 주기도 했다. U2는 이 행사로 전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는 1987년 ‘여호수아 나무'(The Joshua Tree)로 나타났다. 1988년 ‘지금 인권을'(Human Rights, Now!)공연으로 이 행사는 맥을 잇고 있다.

15. 1987-미래의 검은 로큰롤 랩

50년대 로큰롤이 등장했을 때 젊은이들의 호응은 열광적이었지만 기성세대는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정적이고 도발적인 춤, 가사, 창법 등으로 젊은이들을 흥분시켰던 로큰롤은 기성세대들이 보기엔 천박한 잡음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후 로큰롤은 대중음악의 주류가 되었다. 아직은 소수이지만 랩에서 로큰롤이 가졌던 의의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80년대 중반 흑인들 사이에서 랩이 퍼지기 시작했다. 마구 지껄이는 폭력적인 가사, 반복되는 리듬 등으로 일반 팬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던 음악이 랩이었다. 86년 런-DMC에 의해 랩의 저변이 확대되기 시작하더니 87년 드디어 백인 래퍼 3인조 비스티 보이스의 「살인 허가」(Licenced To Kill)가 앨범 차트 1위에 올라섰다. 뉴 에이지와 함께 80년대에 탄생한 장르로 새로이 위치를 굳힌 랩은 올해 톤 록이라는 또 다른 스타를 내기도 했다.

16. 1987-로큰롤은 U2를 통해 재탄생되었다.

85년의 ‘라이브 에이드'(Live Aid)와 86년의 앰네스티 순회공연을 통해 등장한 스타 중 U2의 부상은 단연 돋보이는 것이 있었다. 특히 앰네스티 공연에서 U2의 리드 싱어 보노가 보여준 개성은 60년대 도어스의 짐 모리슨이 보여 준 바로 그것이었다. 아일랜드 출신 4인조 U2는 87년 팬들에 보답하는 앨범 「여호수아 나무」(Joshua Tree)를 발표했다. 이 앨범은 차트 1위에 랭크된 것은 물론이고, 78년 팀결성 이후 발표한 앨범들도 덩달아 차트에 무더기로 진입하여 그들의 인기를 실감케 했다. 정통 로큰롤에 실린 의미있는 가사와 진지한 매너로 한몫 보기도한 U2는 그 해 그래미상을 휩쓸기도 했다. 오랜만에 로큰롤이 U2를 통해 기지개를 켠 87년이었다.

17. 1988-일년내내 톱10에 랭크된 조지 마이클의 「믿음」

1988년은 오직 한 명의 스타가 독주한 해였다. 그 주인공은 조지 마이클. 86년 왬이 해산될 때부터 그의 솔로 등장은 시간 문제였다. 섹스 어필하는 용모와 흑인 가수를 방불케하는 소울 창법 등 스타가 될 만한 재능이 넘치는 영국 가수였다. 그의 솔로 데뷔 앨범은 「믿음」(Faith)이었는데, 이 앨범은 88년 한해 단 1주만 11위를 기록하였고 나머지 기간에는 톱10안에 랭크되었었다. 정상에 머무른 기간도 12주였다. 싱글 1위곡도 5개나 터져 나왔다(I Want Your Sex, Faith, Father Figure, One More Try, Monkey). 마이클 잭슨도 마돈나도 이런 기록은 세우지 못했다. 트레이시 채프먼의 포크와 스티브 윈우드의 컴백도 조지 마이클의 열기를 따라 잡진 못한 한 해였다.

18. 1988-헤비 메틀의 전성기를 다시 연 밴드들

88년 후반부의 주인공은 데프 레퍼드와 건스 & 로지스였다. 이들이 벌인 차트 경쟁은 헤비 메틀 만큼이나 치열한 것이었다. 88년 메틀계에 불을 당긴 팀은 반 헤일런의 「오! 자네도 하나 먹었군」(OU 812) 앨범으로 시작해서 데프 레퍼드의 「히스테리아」(Hysteria), 건스 & 로지스의 「파괴 망」(Appetite For Destruction) 그리고 본 조비의 「뉴 저지」(New Jersey)까지 그 열기는 이어졌다. 데프 레퍼드는 83년 「방화광」(Pyromania)에 이어 「히스테리아」도 7백만 장 이상 판매하여 앨범 2장을 연속으로 7백만장 이상 판매한 최초의 밴드가 되었다. 이들을 이어 건스 & 로지스 그리고 본 조비가 메틀의 열기를 이었다. 「뉴 저지」가 차트 1위에 올랐을 때 2위는 「파괴 욕망」, 3위는 「히스테리아」였다. 빌보드 차트 사상 메틀 밴드의 앨범이 1,2,3위를 휩쓴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19. 1989-팝계의 새로운 주인공 10대 가수들

89년은 유난히 10대 가수들의 활약이 돋보인 해였다. ’10대현상’은 88년 티파니부터 시작되었다. 데뷔 앨범 ‘티파니'(Tiffany)를 차트 정상에 올려놓으며 그녀는 10대 선풍을 몰고 왔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곧이어 데비 깁슨이라는 천재 소녀가 출현했다.  데뷔 앨범 「뜻밖에」(Out Of Blue)에 이어 「짜릿한 청춘」(Electric Youth)을 내놓으며 티파니의 인기를 능가하고 있다. 전반기는 보비 브라운의 독무대였다. 앨범 「잔인하게 굴지 마세요」(Don’t Be Cruel)에서 연속으로싱글 히트곡을 내놓았다(Don’t Be Cruel, My Prerogative, Roni, Every Little Step 등). 후반부는 뉴 키즈 온 더 블록이었다. 앨범「끈질기게 버텨」(Hangin’ Tough)를 차트 1위에 올리며 동명 싱글곡 외에 <커버 걸>(Cover Girl), <내가 (당신을 황홀하게 하지 않았어요>(Didn’t I<Blow Your Mind>)등을 연속 히트시켰다.

20. 1989-돌아온 공룡들

전반부엔 10대 가수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면 후반부는 60년대 로커들의 재등장이 활발한 시기였다. 토론토 공연으로 시작된 더 후의 컴백,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재등장. 봅 딜런. 반 모리슨. 비지스. 링고 스타 등의 새로운 모습이 인상적인 해였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1989년의 사건은 롤링 스톤즈의 재결합 공연이었다. 필라델피아에서 8월 31일 시작된 그들의 순회공연은 미국을 온통 뒤집어 놓았다. 뉴욕에선 공연이 예정되자마자 6시간만에 약 30만장의 입장권이 동나버리기도 했다. 새 앨범 「강철 바퀴」(Steel Wheels)와 싱글 <복잡한 감정> (Mixed Emotion)은 차트 정상을 향해 질주했다. ‘구르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말을 실감케 했다.

조지 마이클, 마약 혐의로 체포

추억(?)의 스타 조지 마이클이 다시 언론에 회자되고 있다. 마약 소지 혐의로 체포. 쯥~* 뭐 비단 조지 마이클 뿐만 아니라 수많은 해외 스타들이 마약 관련 사고를 치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오히려 더 안습은 그의 너무나 아저씨스러운 최근 외모 T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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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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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mFreedom7InchEuropeanSingleCover” by Scan. Licensed under Wikipedia.

죠지 마이클, 그리고 앤드류 리즐리. 짧은 기간 이토록 선굵은 활동을 펼쳤던 듀오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공식적인 만 4년의 활동 동안 3장의 앨범과 10여개가 넘는 탑 탠 싱글을 남긴 웸. 이들의 전설은 수년이 지난 현재에도 변함없이 유효하다. 1963년 동갑나기인 죠지 마이클과 앤드류 리즐리는 13살 때 처음 만나 10년 이상 동고동락 해온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둘도없는 음악 파트너이다.

이들은 고등학교 재학 시절 앤드류의 형제들과 스카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했고 훗날 1,2집에 수록될 수많은 곡들을 만들어 놓았을 정도로 여러 부분에 걸쳐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발신하고 있었다. 이렇게 저렇게 수년의 시간을 흘려보낸 82년, 본격적인 프로 뮤지션이 되고자 20파운드를 투자해 데모 테입을 제작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CBS레코드와 계약, 4장의 싱글과 83년 7월 대망의 데뷔 앨범 ‘판타스틱’을 발표하게 된다.

죠지 마이클과 스티브 브라운이 공동 프로듀서한 이 앨범은 놀랍게도 발매와 동시에 1위로 직행, 웸은 영국 댄스 음악의 최강자이자 아이돌 스타로 단숨에 뛰어오른다. 84년 11월 발표된 2집 ‘ Make It Big ‘ 은 영국 차트 정상에 오른 것은 물론 솔로 작품 ‘ Careless Whisper’ 까지 선보인 죠지 마이클은 단숨에 이 시대에 가장 잘 나가는 싱어송 라이터로 떠 오른다. 싱글과 앨범의 연이은 성공으로 85년 2월 브릿 어워드의 베스트 브리티쉬 그룹으로 선정된 웸은 여세를 몰아 빌보드 앨범과 싱글 챠트를 동시에 석권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한다.

4월에는 서방계 팝 밴드론 최초로 죽의 장막 중국을 방문하여 공연을 갖기도 했으며 그 기록들은 ‘프리덤’의 뮤직비디오에 담은 바 있다. 같은해 12월 조지 마이클은 색다른 기록 한가지를 세우게 된다. 웸의 새로운 싱글 ‘I’m Your Man’ 크리스마스만 되면 울려퍼지는 ‘라스트 크리스마스’와 밴드 에이드의 ‘Do They Know It’s Christmas ?’ 백 보컬로 참여한 엘튼 존의 ‘니키타’ 등 그의 목소리가 담긴 네곡이 싱글 차트 상위권에 랭크된 것. 영국 팀으로는 드물게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의 4개 부분을 석권하며 쾌적의 86년을 맞이한 웸이었지만 이들의 주변에선 괴이한 소문들이 하나 둘씩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팀이 해체할 것’ ‘조지 마이클이 솔로로 나서게 될것’ 등등.. 그러한 소문을 입증이라도 하듯 조지 마이클은 ‘Carless Whisper’ 에 이은 두 번째 솔로 싱글 ‘A Different Corner’ 를 발표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팀의 해체를 알리는 충격의 매스컴 발표가 있게 된다.

86년 8월 웸은 3번째 정규 앨범 ‘Music From The Edge Of Heaven’ 을 끝으로 공식적인 모든 활동을 마감한다. 학창시절 친구로 구성된 듀오였던 탓에 누구도 팀웍을 의심한바 없었지만 결국 음악적인 견해 차이와 내적 불균형이 원인이 되어 5년간의 화려했던 활동을 추억으로 접어두고, 86년 충격적인 해체 선언과 갈라서기를 시작하게 된 웸! 아주 오랜만에 새롭게 생각해보는 웸의 존재, 이들은 이제 추억이 아니라 전설에 가깝다. 왬은 없지만 조지마이클은 아직 팝계에 남아있다,, 베스트앨범이 2장이 나왔을정도로 그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도 언제 사라질진 아무도 모른다..20여년의 세월이 흐른뒤에도 지금까지 이어온 역사를 이어가기 바랄뿐이다.

디스코그래피
1983 Fantastic! Columbia
1984 Make It Big Columbia
1986 Music from the Edge of Heaven Columbia

링크
Wham Sha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