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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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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re sept 2013” by Fergus Kellyhttp://www.flickr.com/photos/55867717@N00/10017094715/.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1977년의 데뷔앨범 Pink Flag으로 이미 거장밴드로 등극한 Wire는 동시대의 펑크밴드들이 흉내내기 어려운 독특한 면을 가지고 있었다. 이 앨범에는 인스트리얼과 미니멀리즘적인 분위기를 강렬히 풍기는 Lowdown에서 초기 락앤롤의 명랑함이 담겨져 있는 파워팝 넘버 Mannequin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악적 지형을 40분이라는 짧은 플레이시간에 담아내는 뛰어난 음악적 역량을 선보였다. 이어진 Chairs Missing과 154은 전작만큼의 성과를 얻어내진 못하였지만 그들은 그룹의 음악적 역량을 꾸준히 확장시키고 세련되게 만들어갔다. 그룹의 컬트팬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는 와중인 1979년 Wire는 그들의 아이디어가 고갈되었다며 돌연 해체를 선언한다. 다양한 솔로 프로젝트로 여러 해를 보낸 밴드 멤버들은 1986년 재결성하여 다음 몇년동안 일련의 실험적인 팝레코드 시리즈를 내놓는다. 1987년 The Ideal Copy는 이전 작품과 다르게 신쓰팝적인 요소와 디지털 텍스춰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사운드적으로는 인상적인 기타리프와 그루브한 리듬파트가 New Order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하다. 비평은 호의적이었지만 이전만큼 열광적이진 않았다. 이때쯤 그들을 향한 컬트적인 호응은 점차 사그라들었고 Gotobed가 1991년 그룹을 떠났다. 남은 멤버들은 그룹의 이름에서 e를 뺀 Wir란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조용히 세간의 관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돌연 2001년 그들은 다시 스튜디오에 나타났고 2002년 6개의 트랙이 담긴 앨범 Read & Burn 01을 내놓았다.

1995년 Elastica는 그들의 힛싱글 Connection에 Wire의 곡 Three Girl Rhumba를 샘플링하기도 하였다.

멤버 : Art students Colin Newman (guitar, vocal), Bruce Gilbert (guitar), Graham Lewis (bass, vocal), and Robert Gotobed (b. Mark Field; drums)

디스코그래피
1977 Pink Flag [Restless]
1978 Chairs Missing [Restless]
1979 154 [Restless]
1981 Document and Eyewitness [live] [Mute]
1987 The Ideal Copy [Mute]
1988 A Bell Is a Cup…Until it Is Struck [Mute]
1989 It’s Beginning To & Back Again [Enigma]
1990 Manscape [Restless]
1991 The First Letter [Mute]
2002 Read and Burn, Vol. 1
2002 Read & Burn 01 [Pink Flag]

링크
Official Site
Wireviews
Pink Flag 전곡 가사

Wilder, Matthew

Break My Stride 라는 경쾌한 댄스곡으로 80년대 반짝 인기를 얻었던 Matthew Wilder 는 애초에 70년대 초반 뉴욕 출신 포크 듀오 Matthew & Peter 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1978년 LA로 근거지를 옮긴 후 TV 광고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에 Rickie Lee Jones 와 Bette Midler 의 백업 보컬을 맡기도 했다. 1983년 마침내 자신만의 앨범을 I Don’t Speak the Language를 내놓았다. 이 앨범에서 Break My Stride 가 미국 차트 탑10에 오르는 큰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이듬해 내놓은 두 번째 앨범 Bouncin’ Off the Walls 는 형편없는 인기를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Wilder 는 다른 이들에게 곡을 써주고 프로듀스를 하는 등 음악활동을 지속했다. 1995년 그는 No Doubt 의 멀티플래티넘 Tragic Kingdom을 프로듀스했다. 그리고 Mulan 의 사운드트랙에도 참여하여 오스카 후보에 오르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디스코그래피
1983 I Don’t Speak the Language Private I
1984 Bouncin’ off the Walls Private I

Wilde, Kim

50년대 팝싱어 Marty Wilde 의 딸인 Kim Wilde 는 Sheena Easton, Madonna 등과 함께 80년대 미녀가수 군단을 이룬 팝스타였다. 그녀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신쓰팝에 기초를 둔 팝음악이었지만 스타일면에서나 비트 면에서는 락음악의 요소도 일부 수용하여 반항적이면서도 관능적인 이미지를 구축하였다.

1980년 Kim Wilde 는 프로듀서 Mickie Most 의 레코드 레이블 Rak 과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첫 싱글 “Kids in America”를 이듬해 내놓았는데 이 곡이 그해 봄 영국 차트 2위까지 오르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두 번째 싱글 “Chequered Love” 도 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꽤 인기를 얻었다. 셀프타이틀 데뷔앨범이 같은 해 발매되었고 “Kids in America”가 미국 차트 40위안에 들어 국제적인 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후 내놓은 몇 장의 앨범은 이전과 같은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반짝 스타로 사라져가는 듯 했다. 하지만 1986년 Supremes 의 고전 “You Keep Me Hangin’ On” 의 리메이크 버전이 인기를 끌면서 다시 한번 팬들의 주목을 얻게 된다. 이후 몇 개의 마이너히트곡을 내놓았지만 첫 싱글 “Kids in America” 만큼의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는 받지 못하고 “80년대 가수”라는 호칭을 얻게 된다.

디스코그래피
1981 Kim Wilde Rak
1982 Select Rak
1983 Catch as Catch Can Rak
1984 Teases & Dares MCA
1986 Another Step MCA
1988 Close MCA
1990 Love Moves MCA
1992 Love Is….. MCA
1995 Now and Forever MCA
1995 Breaking Away MCA
1995 Rockin’ Around the Christmas Tree

링크
Official Site

Wild Swans,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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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WildSwans2” by www.skyray.co.uk. Licensed under Wikipedia.

Teardrop Explodes – 뉴웨이브/펑크 아티스트 Julian Cope가 주축이 된 밴드 – 의 오르간 주자 Paul Simpson은 1982년 그만의 밴드인 Wild Swans를 조직하였다. 이 밴드에서 그는 보컬을 맡으며 전면에 나섰고 Systems의 기타를 맡았던 Jerry Kelly가 기타를, Ged Quinn이 키보드, 그리고 Alan Mills가 드럼을 맡았다. 이들은 리버풀의 “Club Zoo”에서 소수의 청중만을 모아놓은채 공연을 가졌다. 한편 Kelly는 Peter Coyle을 보컬로 내세운 The Lotus Eaters를 조직하였다. 이렇듯 다양한 음악적 활동으로 인하여 이들의 활동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으나 그 기간동안 컬트적인 호응을 얻었다. 리버풀을 근거로 한 Zoo label에서 발표된 그들의 데뷔싱글 “Revolutionary Spirit”는 1986년 Peel Sessions의 EP에 삽입되어 큰 인기를 얻게 되었고 급기야 그룹이 재결성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1988년 그들은 Bringing Home the Ashes를 내놓았고 1990년 보다 싸이키델릭한 정조를 띈 Space Flower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Wild Swans의 해체 이후 Paul Simpson은 재주많은 송라이터이자 프로듀서인 Ian Broudie와 함께 Care를 조직하였다.

디스코그래피
1988 Bringing Home the Ashes Sire/Reprise
1988 Music and Talk from Liverpool Sire
1989 Space Flower Sire

링크
Paul Simpson에 대하여
Paul Simpson과의 인터뷰
Paul simpson과의 또다른 인터뷰

When in Rome

When in Rome은 팝계에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소위 반짝 스타의 전형이었다. 1988년의 히트곡 “The Promise”은 그야말로 New Order의 싸운드를 연상시키는 댄쓰락이었다. 어둡지만 귀에 쏙 들어오고, 울렁거리는 댄쓰리듬, 싱얼롱 코러스에 따라부르기 쉬운 멜로디까지 …. 확실히 “The Promise”는 히트곡의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상승세를 앨범까지 잇는데는 실패했다. 그들의 데뷔앨범 “When in Rome”의 오프닝트랙인 “The Promise”는 귀를 사로잡지만 나머지 곡들은 수준 이하이다. 보컬리스트 Clive Farrington 와 Andrew Mann의 솔로는 그런데로 괜찮지만 하모니를 시도하려는 “Heaven Knows”에서와 같은 시도는 그야말로 참혹하다. “Wide Wide Sea”가 그런데로 “The Promise”의 드라마틱한 곡편성에 근접한 곡이다. 나머지 트랙들은 금방 잊여져 버릴만한 수준들의 곡이다. (All Music Guide의 When In Rome앨범 평에서…)

디스코그래피
1988 When in Rome (Virg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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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icNet

W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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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mFreedom7InchEuropeanSingleCover” by Scan. Licensed under Wikipedia.

죠지 마이클, 그리고 앤드류 리즐리. 짧은 기간 이토록 선굵은 활동을 펼쳤던 듀오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공식적인 만 4년의 활동 동안 3장의 앨범과 10여개가 넘는 탑 탠 싱글을 남긴 웸. 이들의 전설은 수년이 지난 현재에도 변함없이 유효하다. 1963년 동갑나기인 죠지 마이클과 앤드류 리즐리는 13살 때 처음 만나 10년 이상 동고동락 해온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둘도없는 음악 파트너이다.

이들은 고등학교 재학 시절 앤드류의 형제들과 스카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했고 훗날 1,2집에 수록될 수많은 곡들을 만들어 놓았을 정도로 여러 부분에 걸쳐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발신하고 있었다. 이렇게 저렇게 수년의 시간을 흘려보낸 82년, 본격적인 프로 뮤지션이 되고자 20파운드를 투자해 데모 테입을 제작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CBS레코드와 계약, 4장의 싱글과 83년 7월 대망의 데뷔 앨범 ‘판타스틱’을 발표하게 된다.

죠지 마이클과 스티브 브라운이 공동 프로듀서한 이 앨범은 놀랍게도 발매와 동시에 1위로 직행, 웸은 영국 댄스 음악의 최강자이자 아이돌 스타로 단숨에 뛰어오른다. 84년 11월 발표된 2집 ‘ Make It Big ‘ 은 영국 차트 정상에 오른 것은 물론 솔로 작품 ‘ Careless Whisper’ 까지 선보인 죠지 마이클은 단숨에 이 시대에 가장 잘 나가는 싱어송 라이터로 떠 오른다. 싱글과 앨범의 연이은 성공으로 85년 2월 브릿 어워드의 베스트 브리티쉬 그룹으로 선정된 웸은 여세를 몰아 빌보드 앨범과 싱글 챠트를 동시에 석권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한다.

4월에는 서방계 팝 밴드론 최초로 죽의 장막 중국을 방문하여 공연을 갖기도 했으며 그 기록들은 ‘프리덤’의 뮤직비디오에 담은 바 있다. 같은해 12월 조지 마이클은 색다른 기록 한가지를 세우게 된다. 웸의 새로운 싱글 ‘I’m Your Man’ 크리스마스만 되면 울려퍼지는 ‘라스트 크리스마스’와 밴드 에이드의 ‘Do They Know It’s Christmas ?’ 백 보컬로 참여한 엘튼 존의 ‘니키타’ 등 그의 목소리가 담긴 네곡이 싱글 차트 상위권에 랭크된 것. 영국 팀으로는 드물게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의 4개 부분을 석권하며 쾌적의 86년을 맞이한 웸이었지만 이들의 주변에선 괴이한 소문들이 하나 둘씩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팀이 해체할 것’ ‘조지 마이클이 솔로로 나서게 될것’ 등등.. 그러한 소문을 입증이라도 하듯 조지 마이클은 ‘Carless Whisper’ 에 이은 두 번째 솔로 싱글 ‘A Different Corner’ 를 발표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팀의 해체를 알리는 충격의 매스컴 발표가 있게 된다.

86년 8월 웸은 3번째 정규 앨범 ‘Music From The Edge Of Heaven’ 을 끝으로 공식적인 모든 활동을 마감한다. 학창시절 친구로 구성된 듀오였던 탓에 누구도 팀웍을 의심한바 없었지만 결국 음악적인 견해 차이와 내적 불균형이 원인이 되어 5년간의 화려했던 활동을 추억으로 접어두고, 86년 충격적인 해체 선언과 갈라서기를 시작하게 된 웸! 아주 오랜만에 새롭게 생각해보는 웸의 존재, 이들은 이제 추억이 아니라 전설에 가깝다. 왬은 없지만 조지마이클은 아직 팝계에 남아있다,, 베스트앨범이 2장이 나왔을정도로 그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도 언제 사라질진 아무도 모른다..20여년의 세월이 흐른뒤에도 지금까지 이어온 역사를 이어가기 바랄뿐이다.

디스코그래피
1983 Fantastic! Columbia
1984 Make It Big Columbia
1986 Music from the Edge of Heaven Columb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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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m Shake!

Watley, Jo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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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affairs93 mini” by AvidMusicInc – Jody Watley.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Jody Watley는 TV쇼 Soul Train – 우리나라에선 AFKN에서 토요일 낮 4시경에 방영하였던 무용위주의 흑인음악 프로그램. 이 프로그램에서 그 유명한 Moon Walk도 첫선을 보였다. – 에서 댄서로 쇼비즈에 첫발을 내딛었다. 1977년에서 1984년까지 그녀는 그룹 Shalamar – 영화 Footloose에 삽입되었던 Dancing in The Sheets로 유명한 그룹 – 에서 싱어로 활동하였다. 그녀의 첫 솔로앨범인 Jody Watley는 1987년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백만장 이상 팔리며 “Looking for a New Love”, “Don’t You Want Me”, “Some Kind of Lover” 등 세곡을 탑텐에 올려놓는 엄청난 흥행성적을 거두었다. 이러한 혁혁한 전과를 바탕으로 그녀는 그해 그래미에서 신인아티스트상을 수상하였다. 그녀의 두번째 앨범 Larger than Life(1989)는 이전 앨범과 같은 성적을 거두진 못했지만 “Real Love” 등 몇몇 싱글이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이후 그녀의 꾸준한 음악활동에도 불구하고 상업적 성공은 흑인차트 바깥을 벗어나기 어려웠고 결국 ’80s의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녀의 매력적인 노래를 듣고 있자면 그녀를 단순히 외모 – 그런데 그녀의 외모는 언뜻 샤데이의 외모와 흡사하다 – 나 춤솜씨로 승부를 건 바비인형으로 폄하할 수 없는 비범함이 담겨져 있음은 분명하다.

디스코그래피
1987 Jody Watley MCA
1989 Larger than Life MCA
1990 You Wanna Dance with Me? MCA
1991 Affairs of the Heart MCA
1993 Intimacy MCA
1995 Affection Avitone
1998 Flower Atlantic
2002 Midnight Lounge MCA
2002 Beginnings Sol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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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 Page

Waterboys, The

어렸을때 이들의 음악을 들으면 항상 Wonder Stuff랑 헷갈리곤 했다. 보컬의 음색이 상당히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인것 같다. 그러나 그들을 소개하기 위해 다시 들어보니 오히려 보컬보다는 곡풍이 귀에 우선 들어온다. 서사적이고 이국적인(?) 노래풍이 이제 보니 상당히 켈트적이다. 과연 켈트적인 음악이 어떠한 것이냐 하는 의문은 아직도 여전히 유보적이지만 소위 켈트적인 음악이라고 주장하는 XTC, Dexy’s Midnight Runners, Big Country, 그리고 무었보다도 뭔가 애국적이고 남성적인 냄새를 풍기는 Alarm과도 상당히 유사한 싸운드이다.

그래서 웬지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 밴드가 아닐까 하고 생각되었지만 뜻밖에도 이들은 영국 런던에서 결성되었다. 그러나 역시 그룹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싱어/쏭라이터 Mike Scott(1958년 12월 14일생)은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출신이다. 애초 지방 펑크밴드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그의 밴드 Another Pretty Face를 이끌고 런던으로 향했다. 그러나 밴드는 이내 해체되어 버렸고 대신 The Waterboys – 밴드명은 Lou Reed의 노래 “The Kids”의 가사에서 따왔다 함 – 를 조직하였다.

The Waterboys는 1983년 셀프타이틀로 데뷔 앨범을 발매하였다. 그뒤 1984년 두번째 앨범 A Pagan Place를 내놓으면서 키보디스트 Karl Wallinger와 (그들의 음악의 특징적 요소를 이룬) 트럼펫 Roddy Lorimer을 영입하면서 더욱 풍부하고 드라마틱한 싸운드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는 또한 영적인 면에 대한 Scott의 관심과도 관련되어 있다. 1985년 작품인 This Is The Sea에서 싱글 The Whole of the Moon이 크게 히트하면서 그룹은 전성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앨범 발매이후 Wallinger가 World Party를 조직하기 위해 그룹을 떠났고 그룹은 상당 기간 침묵하게 되었다. 1988년 많은 갈채를 받은 Fisherman’s Blues로 일선에 복귀했을때 싸운드는 아일랜드적인 풍취가 짙게 깔린 포크 싸운드가 주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취향은 1990년 Room to Roam으로까지 이어졌다.

1991년 Scott은 멤버들을 떼어 놓은 채 뉴욕으로 근거지를 옮겨버렸고 그곳에서 세션뮤지션들과 함께 Dream Harder(1993년)를 내놓았다. 곧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Scott은 한 영적 자치구(spiritual commune)에서 긴 은거에 들어갔다. 거기에서 그는 포크적인 냄새가 물씬 나는 Bring ‘Em All을 그의 이름으로 발표했다.

디스코그래피
1983 The Waterboys [Ensign/Chrysal]
1984 A Pagan Place [Ensign/Chrysal]
1985 This Is the Sea [Chrysalis]
1988 Fisherman’s Blues [Ensign/Chrysal]
1990 Room to Roam [Ensign/Chrysal]
1993 Dream Harder [Geffen]
2000 A Rock in the Weary Land [BMG International] [BMG]
2001 Rock in the Weary Land [Razor & Tie] [Razor & Tie]
2001 Too Close to Heaven [Phant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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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icial Site

Wang Ch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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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ng Chung” by http://www.geocities.com//patmil007/may823.jpg, Copyright : Geffen Records, 1986. Licensed under Wikipedia.

Nick Feldman과 Jack Hues로 1984년 구성된 왕청은 1984년 데뷔 싱글 Dance Hall Days를 들고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하며 팝스계에 나섰던 영국의 듀오이다. 당시 이들의 출현을 두고 관계자들은 전혀 뜻밖의 인물들로 받아들였던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댄스 취향의 데뷔 싱글로 큰 관심을 모은 이들이 1985년에 이와 정반대의 분위기 있는 발라드 To Live And Die In L.A.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이 제작한 이 영화는 감미로운 스토리와 함께 왕청이라는 듀오의 또다른 진면목을 알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 들은 1986년 두번째 앨범 Mosaic를 발매하고 첫 싱글 Everybody Have Fun Tonight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였다.

디스코그래피
1982 Huang Chung One Way
1984 Points on the Curve Geffen
1985 To Live and Die in L.A. Geffen
1986 Mosaic Geffen
1989 The Warmer Side of Cool Geffen

Waitresses, The

 The Waitresses는 위트있고 여성의 주체적인 역할을 주창하는 노래를 주로 발표하였다. 이 그룹은 기타리스트 Chris Butler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그는 전에 클리블랜드의 Tin Huey, 15-60-75 등 여러 뉴웨이브 밴드를 전전하였다. 1977년 그는 “I Know What Boys Like”를 연주곡으로 만들었다. 그의 친구 Patty Donahue는 이 연주에 아주 냉소적인 가사를 붙여 불렀다. 이것이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던 그룹 The Waitresses의 시작이었다. 근거지를 뉴욕으로 옮긴 Butler는 한 프로듀서에게 거의 잊혀진 노래였던 “I Know What Boys Like”의 녹음테잎을 건네주었고 이것이 레코드사와의 계약으로 이어졌다. Butler는 상상속의 밴드 The Waitresses를 급조하기 위해 Donahue에게 뉴욕행 버스값을 부치고 뉴욕 거리의 일없이 빈둥거리는 아티스트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 중에는 Television의 드러머였던 Billy Ficca도 포함되어 있었다. 1982년 데뷔앨범 Wasn’t Tommorrow Wonderful와 EP I Could Rule the World If I Could Only Get the Parts를 발매했고 꽤 판매량이 괜찮았다. Butler의 재밌고 스마트한 가사와 Donahue의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보컬 스타일 – 그녀의 보컬 스타일은 마치 건방진 십대 소녀가 전화받으면서 껌씹고, 동시에 발톱에 매니큐어를 바르면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 역시 평론가의 호평을 받았다. 짧은 순회공연후 그룹은 두번째 앨범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공연때부터 시작된 갈등은 시간이 갈수록 커져만 갔고 결국 Donahue와 Butler가 그룹을 떠났다. 나머지 멤버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룹은 해산을 피할 수 없었다. Butler는 이후 the dB’s, Scruffy the Cat, Freedy Johnston 등의 앨범제작에 나서는 등 솔로활동을 펼쳤다. Donahue는 1996년 암으로 사망하였다.

디스코그래피
1982 Wasn’t Tomorrow Wonderful? [Polydor]
1983 Bruiseology [Polydor]
1997 King Biscuit Flower Hour [live] [King Biscuit]

링크
Fan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