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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My Beautiful Laundrette,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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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퓨리어스가 파키스탄 이민 2세인 작가 하니프 쿠레이쉬(Hanif Kureishi)의 각본을 바탕으로 파키스탄 이민자 2세대인 오마르와 그 가족들이 과거의 식민제국이자 자본주의 체제의 첨병인 영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버둥거리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

영화의 등장인물은 하나같이 비뚤어져 있다. 자신의 이상주의적 가치관과 현실과의 괴리로 인해 시체처럼 살아가는 오마르의 아버지, 인종적 차별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오마르의 삼촌 나세르와 샬림, 오마르와 어릴 적 친구였으면서도 파시스트 청년들과 몰려다니는 조니, 그리고 다시 만난 조니를 고용인으로 부리면서 – 한편으로는 동성애적 관계에 빠지면서도 – 전도된 만족감을 얻으려는 오마르.

인종, 계급, 동성애, 가부장 등 이 사회의 가장 첨예한 사회적 이슈들이 뒤섞여 있다. 마치 영화에서 등장하는 세탁기 안의 빨래처럼. 그것들은 때로 색깔진한 빨래가 다른 빨래에 물을 들이듯이 서로 영향을 미친다. 때로는 전도된 계급관계에 희열을 느끼는 경우처럼 변태적이기도 하고 겉으로는 불륜이면서도 나름대로는 인종을 뛰어넘는 구식 로맨스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어느 것 하나 뾰족한 답은 없다. 그저 매캐한 영국의 매연과 흐린 하늘처럼 늘 우리 옆에 존재할 뿐이다.

오마르는 나름대로 세탁소 같은 ‘깨끗한’ 사업으로 성공하려 하지만 그것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리고 인종과 성적 편견을 뛰어넘는 조니와의 사랑도 역시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영화 마지막의 애정 어린 물장구가 둘의 미래에 일말의 희망을 암시할 뿐이다.

p.s. 사무실 밖에 있는 조니가 사무실의 오마르를 창너머로 바라보는 얼굴로 오마르의 얼굴이 반사되는 장면은 둘의 서로를 향한 마음을 압축적으로, 그리고 시각적으로 예리하게 표현한 참 ‘영리하게’ 연출된 장면이었다.

p.s.2 물방울이 보글거리는 듯한 음향효과의 주제음악과 세탁기가 돌아가는 듯한 시각효과의 타이틀시퀀스도 인상적이다.

Network

거장 시드니루멧의 강력한 힘과 후광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무엇 하나 쉽지 않은 테마들이 그야말로 유기적으로 팽팽하게 연결되어 저마다 빛을 발하고 있다. TV가 현대 매스미디어에서 차지하는 중심적 역할,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시스템의 중심 다국적기업의 존재감,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바라보고 만난 남녀의 이유 있는 불륜, 청춘을 바친 직장을 떠나는 직장인의 자아상실, 반문화의 상업화를 통한 자본주의의 놀라운 생존력, 시청률이라는 정체불명의 숫자놀음을 감싸고 벌어지는 비정한 인간관계 등 따로 떼놓아도 장편영화 한편이 너끈히 나올 소재들이 이 영화 한편에 경이롭게 담겨있다. 그러면서도 산만함이 없이 떡하니 중심이 분명하다. 모든 배우들은 자신이 맡은 역할에 분명한 색깔을 부여하고 있다. 특히 의욕 넘치는 젊은 중역 다이애나 역의 패이더너웨이와 노련한 보도부장 맥스 역의 윌리엄홀덴의 연기는 동선 자체도 훌륭한 연기다 싶을 정도로 치밀하고 섬세하다.

UBS 의 인기 앵커였던 하워드빌은 시청률이 떨어지자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쫓겨날 판이다. 오랜 직장동료이자 같은 방송국의 보도부장 맥스슈마허는 술김에 방송에서 자살한다고 말하면 시청률이 올라갈 것이라고 농을 건넨다. 다음날 뉴스에서 하워드는 정말 방송에서 자살하겠다고 선언해버린다. 방송국이 발칵 뒤집힌 가운데 센세이셔널리즘을 추구하는 다이애나크리스틴슨은 UBS를 합병한 CCA의 점령군 프랭크해킷을 설득해 하워드의 뉴스를 버라이어티쇼로 전환시켜버린다. 시청자에게 일종의 대리만족을 주는 효과덕분에 하워드빌쇼는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된다. 저널리즘을 훼손하였다고 생각한 맥스는 회사를 때려치우고 다이애나는 더 힘을 얻어 극좌 테러리스트의 테러 장면을 시리즈로까지 제작한다. 그 와중에 둘은 연인사이가 된다.

이제 TV는 더 이상 솔직해질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치부마저 상업화시키는 ‘반문화의 상업화’의 정점에 오르게 된다. 하워드빌은 방송중에 CCA가 아랍계 자본에 먹힐 것이라며 애국적 호소를 하게 되자 회사중역들은 그의 무한질주에 분노를 느낀다. CCA의 최고경영자 젠슨은 그를 불러 민족과 민주주의는 실종된 지 오래며 그 자리를 다국적기업이 채우고 있음을 일갈한다. 다국적기업이라는 새로운 신 내림을 받은 하워드는 점점 더 자기 폐쇄적으로 침몰해가고 젠슨을 제외한 나머지 중역들은 그의 존재에 심각한 위기를 느낀다. 완벽한 시나리오, 완벽한 배역, 완벽한 완급조절 등 Dog Day Afternoon 등과 함께 시드니루멧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걸작이다.

설국열차(코믹스)

“오랜 냉전의 끝에 지구가 얼어붙는다. 어리석은 인류가 기후 무기를 이용해 지구를 영하 85도의 얼음 행성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살아남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영원히 지구 위를 돌 수 있도록 만들어진 1001량의 초호화판 설국 열차에 탑승하는 것이다. 황금칸으로부터 꼬리칸까지 모든 객차는 계급에 따라 나누어져 있으며, 채소와 육류를 기를 수 있는 자급자족 차량까지 구비되어 있다. 설국열차는 지구의 축소판이다. 모든 것은 권력층의 독재에 의해 관리되며, 꼬리칸의 일반인들은 더러운 환경에서 고통받으며 죽어가고, 황금칸은 자포자기의 퇴폐와 향락에 휩싸여 타락해간다. 장 마르크 로셰트의 유려한 그림체를 오래도록 음미할 수 있는 <설국열차>는 모두 세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국판 1권은 <설국열차>, 한국판 2권은 <설국열차: 측량사>와 <설국열차: 횡단>을 모두 담고 있다.”

대략적인 책 소개이다.

열차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예술작품이 의외로 꽤 된다. 열차탈취를 소재로 한 20년대 블록버스터 영화인 버스터키튼 주연의 ‘The General’, 아서힐 감독의 ‘Silver Streak’, 웨스앤더슨 감독의 ‘The Darjeeling Limited(2007)’,  고전이 된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 그리고 휴고프라트의 걸작만화 코르트말테제 시리즈의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이르기까지……

열차는 다양한 상징으로 활용된다. 액션영화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공간에서부터, 고향으로 떠나 타지로 가는 인간의 고독감과 두려움의 상징, 흘러가는 삶에 대한 은유, 그리고 남근의 형태를 가진데서 착안된 권력상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은유와 상징으로 활용된다.

이러한 다양한 활용 용례에서 공통적으로 끄집어 낼 수 있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열차는 ‘달리고 있다는 것’ 이다. 달리지 않는 열차는 흥미가 없다. 그저 좁고 답답한 기계일 뿐이다. 달리는 기차는 그 속도감과 한정된 공간이 주는 긴장감으로 인해 인간의 희로애락의 감정이 극대화되는 적절한 장치이기 때문에 예술가들로부터 사랑받는 공간이 된 것이다.

‘설국열차’에서의 열차는 제 스스로 달린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기계 스스로 무한궤도를 질주한다. 멸망한 지구를 돌고 있는 이 열차에 몸을 의지하고 있는 인간들. 어찌 보면 더 이상의 희망도 없는데 꼬리 칸의 사람들뿐 아니라 황금 칸의 사람들까지도 무슨 이유로 살고 있나 싶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은 이 지구 역시 차갑고 생명체 없는 우주에서 무한궤도로 돌고 있는 또 하나의 설국열차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우리의 삶도 그들의 삶만큼이나 부질없고 희망 없는 것 일수도 있다. 어쩌면 – 상당히 믿을 만 할 정도로 – 작가가 의도한 설국열차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그 자체일 것이다.

‘설국열차’에서는 계급간의 갈등을 꼬리 칸을 떼어내 버림으로써 해결한다. 상당히 편리한 해결방식이다. 현실의 지배계급도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을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다만 현실은 더욱 복잡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 현실에서의 피지배계급은 작품에서처럼 열차 꼬리에 매달려 죽을 날만 기다리는 기생계급이 아니라 지배계급을 위해 노동하는 생산자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설국열차는 꼬리 칸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열차이다.

하지만 이런 단순화나 무리한 은유가 원작의 품격을 해칠 만큼의 단점은 아니다. 모든 예술작품에서의 추상화와 단순화, 그리고 일반화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지나친 단순화로 인한 단점은 특유의 장치설정에서 비롯되는 극적 긴장감으로 무난히 상쇄된다.

아무튼 특유의 유럽적 감성으로 무장한 이 독특한 작품에 대한민국의 봉준호 감독이 눈독을 들이고서는 영화화하려 하고 있고 2010년 쯤이면 그 결과물을 볼 수 있다니 자못 기대가 된다.

Le Charme Discret de la Bourgeoisie(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비록 이 영화의 소개에 의례 초현실주의, 아방가르드, 실험주의 등과 같은 친해지기 어려운 단어들이 함께 하지만 이를 너무 심각히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다른 걸 다 제쳐두고라도 이 영화는 건방진 부르주아를 약 올리는 흥겨운 마당극 한판일 뿐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부르주아들은 외교관의 신분을 이용한 더러운 마약거래에 손대고 가장 친한 친구의 와이프와 거리낌 없이 바람을 피우는 족속들이지만 대마초를 피우는 군인을 비난하고 마티니를 마시는 법을 모르는 운전기사를 조롱한다.

그들은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 매일 밤 만찬으로 자신들의 넉넉함을 과시하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들은 만찬은 이런 저런 이유 탓에 연기된다. 심지어는 그들이 결국 무대 위의 배우라는 사실이 들통 나(?) 만찬이 연기되기도 한다. 루이스 브니엘은 이런 만찬 실패담(?)을 큰 줄기로 다양한 캐릭터의 몽환적인 꿈 이야기를 배치해 영화에 시적 상상력을 불어넣는다.

결국 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며 관객의 극의 몰입을 의도적으로 차단하지만 영화 속 캐릭터들의 과장된 행동은 오늘날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진지하게 – 코미디를 진지하게 연기하고 있으니 더욱 코미디스럽다 – 연출되고 있기에 이 작품이 의의를 가지는 것이리라(상투적인 “꼭 봐야할 영화 100선”따위에 불명예스럽게 매번 거론되느니).

Frontline : Private Warriors

프론트라인의 또 하나의 수작 다큐멘터리다.

이 작품은 군대의 민영화에 대해 다루고 있다. 즉 공공서비스의 마지막 보루로 남아있는 군대가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 민간의 효율과 창의라는 이름하에 어떻게 민영화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이익을 얻는 이들은 누구인가를 고발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부시 행정부는 말 그대로 자본가의 정부라 할 수 있다. 행정부 수반 면면이 미국의 거대기업의 임원이나 사장을 지낸 인물들이며 그들의 중심축에는 핼리버튼의 CEO를 지낸 부통령 딕체니가 있다. 전투기능을 제외한 군이 행하는 업무를 민간에게 넘기는 방침이 확정되고 나서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은 각국 – 특히 미국의 – 군사기업의 거대시장이 되어가고 있는 형국이다. 그리고 최대의 수혜자는 딕체니의 본거지 핼리버튼이다. 이 기업은 모회사 및 자회사 등을 통하여 굵직굵직한 프로젝트를 수주하여 사상최대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또한 이들을 둘러싼 부정과 부패의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어쨌든 군사기업으로서는 이라크 전의 단기간의 해결은 결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다. 이라크가 진흙탕이 될수록 그들의 이익은 증대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이들 군사기업에 의해 고용되어 유사전투기능을 수행하다 억울하게 숨져간 미국인들을 조명하여 전쟁의 참상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이들이 어떻게 현실을 외면하고 왜곡하고 있는가를 뜻있는 이들의 증언을 통해 고발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전 세계의 군사기업의 실태와 부작용에 대해서 알게끔 했고 이에 영향 받은 국내 공중파 방송들도 앞 다투어 비슷한 포맷으로 군민영화 실태를 고발하였다. 2005년 방영.

사족으로…

군사기업은 막대한 이익을 올리고 그들을 지원한 정치가는 뒷돈을 챙길 텐데 정작 나머지 행정부 자체는 어떤 이익이 있을까? 정답은 미군의 사망자 숫자를 조작하여 국내 반전 여론을 무마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군사기업의 고용인들의 죽음은 산업재해 일뿐 군인으로서의 영예로운(?) 죽음으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When Worlds Collide

영화는 꽤 우울하게 시작된다. 외계행성이 지구와 조만간 충돌할 것이라는 사실에서 출발되기 때문이다. 요즘 영화 Deep Impact나 Armageddon 에서는 이러한 별들을 용감한 자원자들이 폭파하여 지구를 구하는 설정이었으나 당시 사람들에게 아직 그러한 방법은 너무 급진적이었나 보다. 아무튼 지구의 과학자들은 행성을 폭파하는 대신 거대한 우주선을 만들어 – 일종의 노아의 방주 – 다가오는 행성의 위성에 안착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문제는 우주선의 수용인원이 수십 명에 불과할 정도로 너무 적다는 것이다. 극은 이로 인한 갈등과 희생정신, 그리고 주인공들 간의 삼각관계를 주요 에피소드로 삼고 있다. 그 당시로서는 꽤나 스펙터클한 영상을 선사하고 있지만 새로운 별에 우주선이 안착하여 바라본 풍경은 꽤나 유치한 그림임이 너무나 명확하여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그래도 ‘이 정도 하느라 수고했다’ 라는 느낌이다. Philip Wylie 와 Edwin Balmer 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1951년작.

Soy Cuba

Soy Cuba(“나는 쿠바다”라는 뜻)는 네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영화이다. 쿠바혁명 이후 쿠바 혁명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은 착취당하고 있던 쿠바를 대표하는 전형들이었다.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젊은 여인, 하루아침에 땅에서 쫓겨 난 농민, 혁명을 위해 헌신하는 학생 등 갖가지 삶의 군상이 비춰지지만 이들은 하나같이 제3세계 식민지라는 구조적 질곡에 몸부림치는 소시민들이다. 결국 이 영화는 혁명의 결과를 묘사하진 않지만 학생투사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몰려든 군중이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든 농민들의 모습에서 결과의 단초를 말해주고 있다. 정치적 이유에서가 아니더라도 그 형식의 탁월함이나 마술 같은 영상 자체로도 걸작의 반열에 올려놓을 만하지만 미국에서는 오랜 기간 상영금지 목록에 올라있었다.

Blazing Saddles(불타는 말안장,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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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zing saddles movie poster” by http://www.impawards.com/1974/blazing_saddles.html. Licensed under Wikipedia.

어렸을 적 AFKN에서 웬 말도 안 되는 서부극을 본 기억이 이따금씩 뇌리를 스치곤 했다. 흑인 보안관이 겉만 판자로 세워놓은 가짜 도시를 만들던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후에 알게 된 그 영화의 제목은 “불타는 말안장(Blazing Saddles)” “프로듀서”, “영프랑켄슈타인”, “스페이스볼” 등에서 어이없는 유머로 우리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멜브룩스는 이 영화에서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또한 이전의 수작들에 한 가지 더하여 이 영화를 한층 빛내는 요소는 인종과 자본의 대한 정치적 올바름이다. 천성이 광대 기질인 멜브룩스는 이러한 정치적 올바름을 구태의연한 진지함이 아닌 자신만의 냉소적인 유머코드로 승화시켜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한다.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주지사(멜브룩스), 철도로 큰돈을 벌 욕심으로 가득한 부주지사, 사형수에서 하루아침에 보안관이 된 흑인노예 등 캐릭터는 엉뚱하고 생기 넘친다. 결국 아름다운 흑백의 화해와 협동으로 앞서 언급한 얼치기 도시로 악당을 물리치고 위기에 처한 마을을 구한다는 결말은 그리 얄밉지 않은 결말이다.

사족 : 샌프랜시스코에 놀러갔을 때 자전거 대여점의 상호가 Blazing Saddles여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

‘빵과 장미’를 보고

막 영국 감독 켄로치의 최신작 ‘빵과 장미’를 봤습니다. 켄로치는 잘 아시겠지만 사회주의자로서 일관되게 좌파적 시각과 민중의 시각에서 작품을 만들어 온 작가시죠. 그의 작품은 드라마적인 영화문법을 쓰고 있습니다. 평이한 카메라웍, 어찌 보면 도식적이기까지 한 플롯 등… 그래서 과거 즐겨 보던 어려운 표현주의적인 작품이나 요즘의 MTV식의 편집으로 정신없게 만드는 그런 작품을 보다 그의 작품을 보면 싱거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형식은 어찌 보면 그가 작품에서 담아내고자 하는 내용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쉬운 언어로 전파하고자 하는 그만의 형식미학이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플롯을 구태여 복잡하게 꼬지 않고 서민들이 즐겨 보는 평이한 드라마 기법으로 사건을 풀어나가되 사태의 본질을 왜곡시키지 않고 정확히 꿰뚫는 그런 자신만의 리얼리즘 미학.

이 영화 ‘빵과 장미’ 역시 그러한 태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멕시코 국경을 월경하는 불법이민자들의 숨가뿐 모습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주인공 마야의 빌딩 미화원으로의 취직, 노조조직원 샘(아드리안 브로디라고 왜 그 아카데미시상식에서 할베리하고 딥키쓰했던 그 총각이 역을 맡았습니다)과의 만남을 통한 노동자 의식의 각성, 사측의 노골적인 방해공작, 샘과 마야의 애정사, 이어지는 투쟁, 그리고 마침내 노조의 승리에 이르기까지 담담하고도 담백하게 진행됩니다.(마지막에 반전이 있는데 그것까지 말하면 스포일러이므로 함구)

이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 제게 공포영화였습니다. 저는 흔히 사람들이 공포영화를 즐기는 이유가 스크린내의 공포가 우리한테 미치는 영향이 없다는 안도감 때문에 보는 게 아닐까 생각해보곤 합니다(그래서 사실 좀비니 늑대인간이 나오는 영화보다는 실제 우리의 일상을 헤집는 Fatal Attraction 이나 Rosemary’s Baby 같은 영화가 훨씬 무섭죠). 그런 관점에서 이 영화 ‘빵과 장미’는 노동자의 비참한 일상과 그에 따른 고통이 섬뜩하게 표현되며 그 고통이 다른 공포영화와 달리 우리의 일상 속에서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에서 가장 고밀도의 공포영화인 셈이죠. 먼 나라 미국에서의 미화원이 겪는 고통은 지금 이 땅 남한 내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튼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제목입니다. ‘빵과 장미’.

영화의 하이라이트에 노동자들은 시위를 벌입니다. 그리고 그 시위에 들고 나온 플래카드에는 이렇게 써있습니다. “우리는 빵을 원한다. 그러나 또한 장미를 원한다.” 빵은 말 그대로 경제적인 요구입니다. 장미는? 그건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입니다. 노동자의 인격을 파괴하는 장면은 중간관리자 페레즈를 통해 형상화됩니다. 취직 명목으로 첫달치 월급을 뺏어가고 노골적으로 성관계를 요구하는 그는 언제나 얄미운 자본의 악랄함의 가장 밑바닥의 모습입니다.

빵 뿐만 아니라 장미를 달라는 노동자들의 요구. 모든 인간관계에서 요구된다는 생각이 최근 들어 부쩍 듭니다. 저 다니는 회사에서도 미화원 아주머니들에게도 인사를 합니다(사실 의식적인 노력입니다만 대부분 사원들은 안 합니다). 또 다른 것들이 많겠죠. 누가 되었건(그게 우리가 척결해야할 악랄한 지배계급이 아니라면) 인간에 대한 예의, 상호존중은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야 된다고 봅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 갚는다는 속담도 이걸 이야기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사회주의자이건 또는 자본주의자건 간에 (하물며 좌파들끼리는) 상대에 대한 존경심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건 빵보다도 중요하니까요.

영화에서 루벤이라는 남자미화원이 청소하고 있던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사람들이 그를 훌쩍 건너 넘어가자 마야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유니폼을 입으면 우린 투명인간이 되는 것 같아.”

2003-07-06

‘로저와 나’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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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 and me” by The poster art can or could be obtained from Warner Bros... Licensed under Wikipedia.

원제 : Roger & Me
제작년도 : 1989년
감독 : Michael Moore

미시간주의 플린트는 디트로이트 못지 않은 자동차의 도시다. 그곳은 또한 영화감독이자 지독한 독설가인 마이클무어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런 플린트에서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시의 경제의 가장 큰 축이던 GM사가 공장을 멕시코로 이전해버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결정을 주도한 이가 바로 GM의 CEO(요즘은 사장이나 회장이 아니라 이렇게 불러줘야 한다) 로저 스미스였다.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쫓겨나고 그 바람에 집세를 내지 못해 거리로 내몰리는 상황을 바라보던 마이클 무어는 로저 스미스에게 그에게 단 하루만이라도 플린트에 들러 직장을 잃은 노동자들의 처지를 보기를 권하기 위해 그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그를 만나기 위해 3년이 훌쩍 넘은 후에야 GM직원을 위한 크리스마스 파티 석상에서 간신히 그와 조우한다. 하지만 마이클의 날선 질문에 로저가 무시하면서 사태는 종결.

그 와중에 실직한 노동자들은 타코벨에서 점원노릇을 하고, 매혈을 하고, 토끼를 팔고(왜완용으로 팔다가 남은 놈은 식용으로 판다), 집세 체납자들을 쫓아내는 부보안관이 되고, 감옥의 간수가 된다(GM 사태 이후 범죄율의 폭발적인 증가로 인해 시는 새 감옥을 지었고 감옥 준공파티를 열어 일반인들에게 돈을 받고 감옥에서 하룻밤 잘 수 있게도 했다). 그리고 이도 저도 안되는 이들은 범죄를 저질러 예전의 직장동료가 간수로 있는 감옥신세를 진다. 전국 자동차 노조 위원장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내젓는다(에라이~).

시당국은 플린트를 관광도시로 만들겠다며 시예산을 들여 하이얏트 호텔과 오토월드(무너져 내린 자동차 왕국의 씁쓸한 유물로 가득한)를 만들지만 호텔은 파산하고 오토월드는 문을 닫는다. 가진 이들은 ‘위대한 개츠비’ 파티(미국인들이 좋아하는 1920년대의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그 당시의 의상을 입고 즐기는)를 열어 세상풍파와 무관함을 뽐낸다. 그러면서 반드시 나쁜 면만을 보지 말라고 주문한다. 좋은 면이 무어냐는 마이클의 질문에 한 여인은 대답한다.

“뭐 예를 들면 발레랄지…”

1980년대 말에 제작된 이 다큐멘터리는 시대와 장소를 훌쩍 뛰어넘어서 2004년 남한 땅의 상황과 근사하게 중첩된다. 오늘 자 신문을 보면 한국은행의 철없는 총재 박승씨마저 ‘고용 없는 성장’을 인정하였다. 또한 산업이 공동화되고 있다 한다. 수출은 사상최대의 흑자인데 내수는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어디선가 성장은 분명히 하고 있는데 그게 노동자들에게까지 전파가 되고 있지 않다는 소리다.

또다시 해묵은 논쟁을 들추어 내보자. 기업이 벌어들인 돈은 누구의 돈인가? 그리고 성장한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나는 누가 뭐래도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노동자와 자본가(많이 양보해서) 공동의 소유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재벌의 아들은 불과 몇 년만에 엄청난 부를 움켜쥐고 노동귀족은 곰팡이 슨 집에 살고 있을까? 왜 플린트의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이 일구어낸 자동차 왕국에서 어느날 갑자기 쫓겨나는 것일까? 자신들이 일구어낸 자신들의 공장에서….

원래 아무리 혁신적인 영화라도 만들어진지 한 4∼5년만 지나도 촌스러워지는 법인데 – 터미네이터와 매트릭스, 그리고 최신영화들을 비교해보자 – 이 다큐멘터리는 그러한 시대의 흐름에 따른 촌티가 흐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했듯이 그 시대의 상황이 오늘날 이 땅의 상황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다.

아 한가지 틀린 구석이 있긴 하다. 그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미남 배우 출신 로널드 레이건은 노동자를 위로한답시고 플린트를 방문해 실직 노동자 12명과 한 식당에서 식사를 같이 하며 적당한 대안을 찾아보겠다고 약속했다(결국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식당만 돈벌어준 꼴이 되었지만). 21세기 우리의 대통령은 귀족노조의 전투적이고 이기적인 노동운동 때문에 나라꼴이 엉망 된다는 어이없는 소리만 하고 있다. 그 대신 그는 자본가들과 삼계탕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