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장미’를 보고

막 영국 감독 켄로치의 최신작 ‘빵과 장미’를 봤습니다. 켄로치는 잘 아시겠지만 사회주의자로서 일관되게 좌파적 시각과 민중의 시각에서 작품을 만들어 온 작가시죠. 그의 작품은 드라마적인 영화문법을 쓰고 있습니다. 평이한 카메라웍, 어찌 보면 도식적이기까지 한 플롯 등… 그래서 과거 즐겨 보던 어려운 표현주의적인 작품이나 요즘의 MTV식의 편집으로 정신없게 만드는 그런 작품을 보다 그의 작품을 보면 싱거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형식은 어찌 보면 그가 작품에서 담아내고자 하는 내용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쉬운 언어로 전파하고자 하는 그만의 형식미학이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플롯을 구태여 복잡하게 꼬지 않고 서민들이 즐겨 보는 평이한 드라마 기법으로 사건을 풀어나가되 사태의 본질을 왜곡시키지 않고 정확히 꿰뚫는 그런 자신만의 리얼리즘 미학.

이 영화 ‘빵과 장미’ 역시 그러한 태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멕시코 국경을 월경하는 불법이민자들의 숨가뿐 모습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주인공 마야의 빌딩 미화원으로의 취직, 노조조직원 샘(아드리안 브로디라고 왜 그 아카데미시상식에서 할베리하고 딥키쓰했던 그 총각이 역을 맡았습니다)과의 만남을 통한 노동자 의식의 각성, 사측의 노골적인 방해공작, 샘과 마야의 애정사, 이어지는 투쟁, 그리고 마침내 노조의 승리에 이르기까지 담담하고도 담백하게 진행됩니다.(마지막에 반전이 있는데 그것까지 말하면 스포일러이므로 함구)

이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 제게 공포영화였습니다. 저는 흔히 사람들이 공포영화를 즐기는 이유가 스크린내의 공포가 우리한테 미치는 영향이 없다는 안도감 때문에 보는 게 아닐까 생각해보곤 합니다(그래서 사실 좀비니 늑대인간이 나오는 영화보다는 실제 우리의 일상을 헤집는 Fatal Attraction 이나 Rosemary’s Baby 같은 영화가 훨씬 무섭죠). 그런 관점에서 이 영화 ‘빵과 장미’는 노동자의 비참한 일상과 그에 따른 고통이 섬뜩하게 표현되며 그 고통이 다른 공포영화와 달리 우리의 일상 속에서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에서 가장 고밀도의 공포영화인 셈이죠. 먼 나라 미국에서의 미화원이 겪는 고통은 지금 이 땅 남한 내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튼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제목입니다. ‘빵과 장미’.

영화의 하이라이트에 노동자들은 시위를 벌입니다. 그리고 그 시위에 들고 나온 플래카드에는 이렇게 써있습니다. “우리는 빵을 원한다. 그러나 또한 장미를 원한다.” 빵은 말 그대로 경제적인 요구입니다. 장미는? 그건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입니다. 노동자의 인격을 파괴하는 장면은 중간관리자 페레즈를 통해 형상화됩니다. 취직 명목으로 첫달치 월급을 뺏어가고 노골적으로 성관계를 요구하는 그는 언제나 얄미운 자본의 악랄함의 가장 밑바닥의 모습입니다.

빵 뿐만 아니라 장미를 달라는 노동자들의 요구. 모든 인간관계에서 요구된다는 생각이 최근 들어 부쩍 듭니다. 저 다니는 회사에서도 미화원 아주머니들에게도 인사를 합니다(사실 의식적인 노력입니다만 대부분 사원들은 안 합니다). 또 다른 것들이 많겠죠. 누가 되었건(그게 우리가 척결해야할 악랄한 지배계급이 아니라면) 인간에 대한 예의, 상호존중은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야 된다고 봅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 갚는다는 속담도 이걸 이야기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사회주의자이건 또는 자본주의자건 간에 (하물며 좌파들끼리는) 상대에 대한 존경심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건 빵보다도 중요하니까요.

영화에서 루벤이라는 남자미화원이 청소하고 있던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사람들이 그를 훌쩍 건너 넘어가자 마야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유니폼을 입으면 우린 투명인간이 되는 것 같아.”

2003-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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