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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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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2 Gelsenkirchen August 3rd 2009” by SteBo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20년간의 활동기간 동안 비평적인 면과 상업인 면 양쪽에서 성공을 거둔 몇 안되는 밴드 중의 하나인 U2는 예술적과 상업적이라는 음악산업의 양 면에서 그들의 활동기간 동안 성공적인 행보를 계속해왔다.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의 밴드의 초기 시절부터 현재까지 U2는 여타 다른 락밴드들이 벗어날 수 없었던 전통적인 한계로부터 자유를 부루짖어 왔으며 또한 자유로웠다. 독창적인 사운드에 진솔한 가사와 사회도전적인 메시지를 섞은 음악을 들려 줌으로써 U2는 비평가들은 물론 다른 동료 락 밴드로부터 존경을 얻어왔으며 전세계적으로 광적인 그들의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

U2는 1976년 14세의 Larry Mullen, Jr.(Drum)가 자신이 다니던 학교인 Dublin’s Mount Temple School의 게시판에 새로운 밴드의 멤버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내면서 시작 되었다. Mullen(drum), Adam Clayton(Bass), Paul Hewson(“Bono”, vocals), Dave evans(“The Edge”, guitar), Dick(Dave의 형, guitar) 이렇게 5명은 한데 뭉쳐 “Feedback”이라는 그룹을 결성하게 된다. 하지만 연습도 제대로 시작하기전 Dick은 다른 밴드에 가입하게 위해 밴드를 떠난다. “Feedback”은 밴드의 이름을 “The Hype”라 바꾸고 주말과 방과 후 연습을 시작하게 되고 진실한 우정과 조화를 이뤄간다. 연습을 시작한지 18개월 후 밴드에게 있어서 커다란 전환점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1978년 3월 한 contest에 참가하게 되는데 거기서 그들은 입상을 하게 되고 CBS 레코드사의 Jackie Hayden을 만나게 된다. “The Hype”의 연주에 깊은 인상을 받은 Hayden은 그들에게 데모 앨범을 내자는 제의를 하게 된다. contest가 끝난지 얼마되지 않아서 “The Hype”는 밴드명을 U2바꾸고 그들의 매니저로 Paul McGuinness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들은 학교 밖으로 그들의 활동영역을 넓혀가게 되고 가능한한 더블린 주위에서 많은 연주를 하며 지역 팬들을 확보하기 시작한다.

1979년 9월 U2는 계속된 연주 활동을 기반으로 그들의 첫 싱글 “U2:3″를 발표한다. 이 싱글은 아일랜드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한다. 이 인기에 힘입어 U2는 그해 12월 영국 공연을 감행하고 팬과 비평가의 주목을 끌기 위해 애쓰지만 유료 관객 9명이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남기게 되고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아일랜드로 돌아온다. 다시 아일랜드에서 좀더 큰 규모의 공연을 계속하며 1980년 두 번째 싱글 “A day with out me”가 성공을 거둔 뒤 U2의 가능성에 매력을 느낀 “Island Records”와 1980년 3월 계약을 체결하고 세계 시장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한다. 그리고 그해 10월 그들의 대망의 첫 앨범[Boy]가 발매된다. 이 앨범은 영국과 아일랜드 양국의 음악지에서 ‘신선하고 새로운 음악’이라는 열광적인 평을 얻어낸다. 이 앨범의 가사는 그 당시 다른 락 밴드들이 기피하던 믿음, 삶, 죽음, 정신적인 면등을 다뤘다.

앨범 발표 후 이들은 영국과 아일랜드를 벗어나 유럽과 미국에 투어를 나서게 되고 이로인해 전 세계적으로 그들의 음악의 추종자들을 만들어 나간다. ‘bubblegum pop’ 밴드들이 만연하던 80년대 초 음악씬에서 U2의 출현은 하나의 혁신이었으며 그들 또한 그들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81년 1월 U2는 그들의 2번째 앨범 [October]를 발표한다. 이 앨범은 발매 1주후 영국차트 11위에 등극한다. 이 앨범은 약간의 기독교적 색채를 가진 앨범이었고 “With a shout”, “Gloria”같은 곡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아담을 제외한 나머지 세 멤버는 크리스찬이었고 이들 셋은 더블린에서 “Shalom”이라는 종교단체에 가입하게 된다. 이 단체의 활동에서 세 멤버들은 락적인 삶의 방식과 종교적인 믿음 사이에서 의문을 갖게 되고 이로인해 아담과 약간의 문제가 생기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이 둘을 조화시키고 그들 자신들의 개인적인 믿음을 희생시키지 않고 음악을 계속해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이 시기의 밴드내의 혼란은 [October]저조한 판매 실적으로 나타났고 크게 주목받은 싱글 없이 U2라는 이름을 더욱 널리 알리는데는 실패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도 잠시 1983년 U2의 본격적인 세계시장 진출을 알리는 신호탄인 세 번째 앨범 [War]가 발매된다. 이 앨범은 그 당시 만연하던 버블검 사운드에 대한 전면적으로 반기를 든 음악을 들려주었으며 가사와 음악 또한 더욱 진보적이었다. 이 앨범은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했으며 이 앨범에서 처음으로 보노는 “Sunday, Bloody Sunday”라는 노래에서 북아일랜드에 대해 노래했으며 “폴란드 자유노조 대표 바웬사”에게 바친 다는 부제가 붙은 이 앨범의 첫 싱글 “New year’s day”는 영국 차트 10위에 도달하고 미국 차트 50위 권에 육박하는 등 자타가 공인하는 그들의 첫 히트 싱글이 되었다. 또한 이 노래의 비디오 클립은 미국 MTV에서 자주 방영되어 밴드를 소개하고 새로운 팬을 확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또한 앨범의 홍보를 위한 투어도 활발히 진행하였다. 이 투어 중 ‘Red rocks amphitheatre’에서의 모습을 담아 [Under a blood red sky]라는 그 들의 첫 라이브 앨범을 발표한다. 이 앨범은 영국 차트 1위에 등극하고 84년 1월에는 플래티넘을 획득한다.

위의 두 앨범의 성공으로 U2는 “롤링스톤지”로부터 “올해의 밴드”라는 칭호를 받게되고 “Island Records”와의 재계약에서 좀더 창조적인 권한과 금전적인 보수를 얻어내게 된다. 이러한 성공을 한껏 느끼고 있을때 U2는 음악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되고 그를 위해 새로운 프로듀서로 그 유명한 “Roxy Music”출신의 Brian Eno와 Daniel Lanois를 영입하고 그들의 네 번째 스튜디오 앨범을 준비한다.

1984년 10월 네 번째 앨범 [The unforgettable fire]가 발매된다. 이 앨범은 U2를 관록의 밴드로 세상에 소개한다. 전작의 도전적인 자세는 Martin luther king, Jr.을 위한 “Pride(in the name of love)”와 약물에 빠져 고생하고 있는 보노의 친구에 대해서 노래한 “Bad”에서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 앨범은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하고 싱글 “Pride”는 UK Top 5에 U.S. Top 50에 등극했다. 다른 싱글 “The unfotgettable fire”는 영국 차트 8위에 오르게 된다. 이때 롤링스톤지는 U2에게 “80년대의 밴드”라는 칭호를 부여했고 “세계 락 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가는 유일한 밴드일 것이다”라고 평했다. 4년여 동안의 투어 뒷편으로 그들의 앨범과 싱글들은 계속된 판매량 증가로 그들을 80년대 중반의 국제적인 스타로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성적에 힘입어 “The live aid”와 “Conspiracy of hope”같은 모금운동에도 참여하게 된다.

대망의 1987년이 되어서 그들의 최고의 앨범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5번째 앨범 [The Joshua tree]가 발표된다. 이 앨범은 미국과 영국 앨범차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한다. “With or without you”와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가 미국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고 이 중 “With or…..”는 영국에서도 1위를 차지한다. 이때 U2는 Beatles, The who에 이어 락밴드로는 세 번째로 TIME지 커버를 장식하게 되며 Time에서는 U2를 공연이 항상 매진이며 표를 구하기 힘들다 하여 “Rock’s hottest ticket”이라고 표현했다. 또한 이 앨범으로 Grammy Award에서 “Album of the year”와 “Best rock performance” 두 개 부문을 수상하게 된다. 실로 U2는 명실상부한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밴드가 된 것이다.

그해 10월 U2는 그들이 정상에 서기 까지 그들에게 영향을 준 미국 뮤지션들에 대한 트리뷰트성의 앨범이자 6번째 앨범 [Rattle and hum]을 발표한다. 이 앨범 역시 영, 미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다. 비비킹과의 연주, 밥 딜런과의 가사 공동 작업, 비틀즈의 커버곡 수록, 빌리할리데이에 관한 노래등등…이 앨범은 동명의 기록 영화에 사운드 트랙이다. 이 앨범에 대한 활동 후 밴드 멤버들은 잠시 휴식기를 가진다. 그리고 1990년 말에 새로운 앨범 작업을 위해 베를린에 모인다.

1991년 11월 그들은 어찌보면 상당히 모험적이고 인더스트리얼 계열의 기타 사운드와 피드백,일렉트로닉 댄스 비트를 가미한 7번째 앨범 [Achung Baby]를 발표한다. 하지만 이때까지 팬들과 비평가들은 과거의 그들의 음악에 대한 추억보다는 새로운 변화를 반기는 입장이었다. “그들의 새로운 행보, 지칠 줄 모른는 실험정신, 발빠른 시대 음악 변화의 수용”이라는 멋진 미사여구로 말이다. 이 앨범 발표 후 가진 ‘Zoo tv’ 투어에서 그들은 엄청난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러한 볼거리와 아직은 그들의 음악이 ‘좋다’라는 평을 받는 시기였기 때문에 투어는 성황리에 끝나게 되었다. 2백 50만이라는 관객 수와 함께…. 그들의 8번째 앨범 [Zooropa]는 1993년 3월 더블린에서 레코딩 되었다. 이 앨범에서 에지는 프로듀서라는 직함을 달게 되고 “Numb”에서는 리드보컬을 맡게 된다. 앨범 발매에 따른 투어 후 U2는 “Batman forever”등의 사운드 트랙 작업에 참여했고 Passenger라는 프로젝트 밴드를 그들의 프로듀서 Brian Eno와 결성하여 [Original soundtrack 1]을 발표한다. 하지만 이 앨범은 비평적은 물론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U2는 1996년 초 새로운 앨범 작업에 들어간다. 그들은 이 앨범에서 Prodigy나 Chemical brothers 풍의 일렉트릭 사운드를 수용하고 싶어했고 정말 그렇게 했다. 앨범 발매전 인터넷에 공개된 그들의 새 노래는 가히 충격이었다. 팬들사이에서는 “U2가 댄스 음반을 만든다”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그 새노래는 바로 “Discotheque”였다. [POP]이 1997년 3월 발매되었을 때 일렉트릭 댄스의 영향은 소문처럼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충격 때문인지 이 앨범은 처음에는 차트상에서 성적이 괜찮았으나 전작들에 비해 너무나 빠르게 차트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그들은 엄청나게 발전된 볼거리로 포장된 “POP mart”투어를 행하고 아직 그들은 건재하다는 모습을 보여준다. 투어 후 그들은 북 아일랜드로 관심을 돌리고 활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98년 9월 그들의 베스트 앨범 [U2: The best of 1980-1990]을 발표한다. 1999년 초 그들은 Brian Eno와 Daniel Lanois를 프로듀서로 두고 새 앨범 작업에 들어간다. 그리고 2000년 초 U2는 보노가 각본에 참여하고 Mel gibson, Milla Jovovich등이 출연하고 그들의 절친한 친구인 Wim Wenders 감독이 연출하는 영화”The Million Dollar Hotel”의 사운드 트랙에 참여하여 “Stateless,” “The First Time”, “The Ground Beneath Her Feet”세곡의 노래를 들려준다.

디스코그래피
1980 Boy (Island)
1981 October (Island)
1983 War (Island)
1983 Under a Blood Red Sky [live] (Island)
1984 The Unforgettable Fire (Island)
1985 Wide Awake in America [live] (Island)
1987 The Joshua Tree (Island)
1988 Rattle & Hum (Island)
1991 Achtung Baby (Island)
1993 Zooropa (Island)
1997 Pop (Island)
2000 All That You Can’t Leave Behind (Interscope)
2000 All That You Can’t Leave Behind (Universal)
2000 Hasta la Vista, Baby: Live From Mexico City (U2 Limited )
2004 How to Dismantle an Atomic Bomb (Interscope)

링크
U2 Community
Rock On The Net

최근소식
U2가 그들의 통산 12번째 앨범을 발표할 계획을 밝혔다. No Line on the Horizon이라는 제목의 이 앨범은 북미에서 2009년 3월 3일 발매될 것이라 한다. Brian Eno, Daniel Lanois, Steve Lillywhite가 프러덕션을 돕는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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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travox

Midge April84.JPG
Midge April84” by OhconfuciusOwn work. Licensed under CC BY 3.0 via Wikimedia Commons.

울트라복스(Ultravox)는 80년 초반 영국의 일렉트로-팝(Electro-pop) 음악의 물결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그룹 중 하나이다. 74년에 결성된 이들은 초기에 보컬인 존 폭스(John Foxx), 기타의 스티브 쉬어즈(Steve Shears), 드럼의 워렌 캔(Warren Can), 베이스의 크리스 크로스(Chris Cross), 키보드, 신디사이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빌리 커리(Billy Currie)로 구성되었다.

76년 레코드사와 계약 후 첫 앨범을 발표했는데, 브라이언 이노(Brian Eno)의 프로듀싱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에게 미친 영향은 매우 미미하였으나, 영국 팝 역사에 끼친 영향은 후대에 인정을 받게 된다. 기타의 자리가 로빈 사이먼(Robin Simon)으로 교체된 후 발표한 앨범 [Systems of Romance]는 실망스런 판매고를 기록하였고, 소속 레코드사와의 계약은 여기서 끝나게 되었다. 그룹의 핵심 멤버였던 폭스과 사이먼이 솔로 활동을 모색하던 중 남은 멤버들은 갈팡질팡했고 결국 그룹은 해체되었다. 한편 Midge Ure라는 인물을 우연히 만나게 된 커리는 서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전 멤버들과 함께 4인조의 울트라복스를 재건하기로 결심했다. 이들의 시도는 ‘Sleepwalk’와 ‘Passing Strangers’의 미약한 성공을 시작으로 하여 ‘Vienna’가 발표되면서 비로소 성공을 맛보게 되었다. 수수께끼 같은 영상과 함께 발매된 이 곡은 음울한 사운드를 들려주며 차트 2위까지 올랐다.

81년 ‘All Stood Still’, 82년 ‘Reap The Wild Wind’, 84년 ‘Dancing with Tears in My Eyes’ 등 이후 3년 동안 이들은 차트 20위 안에 연속적인 히트곡을 올려놓았다. 동시대의 듀란 듀란(Duran Duran)이나 스팬도 발레(Spandau Ballet)와 함께 로맨틱한 스타일을 들려주던 이들은 유럽 전역에서도 큰 인기를 모았지만, 미국에서는 유럽에서의 인기 수준을 확보하지는 못하였다. 이후 Ure의 솔로 활동은 성공적이었으나 그룹의 결속력은 약화되어가는 경향을 보였다. 앨범 [U-Vox](86) 발매 이후 이들은 5년 이상의 공백기간을 깨고 [Revelation](93) 앨범을 발표했으나 많은 이들의 외면을 당했다. 2년 후 [Ingenuity](95) 앨범을 발표하였다.

changg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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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유어 전화인터뷰

신스 팝 그룹 ‘울트라복스’ 출신의 전천후 뮤지션

요즘 팝 팬들에겐 생소한 이름일 수밖에 없는 뮤지션이다, 미지 유어는. 그러나 80년대에 팝 음악을 열심히 들었던 세대에게 미지 유어는 그룹 울트라복스의 기타리스트 겸 보컬리스트로 기억에 남아있는 인물이다. 그는 울트라복스 외에도 많은 그룹을 거쳤으며 밥 겔도프와 함께 그 유명한 프로젝트 그룹 ‘밴드 에이드’를 결성했고 자선공연 ‘라이브 에이드’를 주도했으며 몇 편의 뮤직 비디오의 감독까지 맡은 바 있는, 전천후 아티스트라고 할 수 있다. 그 동안 4장의 솔로 앨범을 발표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선보였던 미지 유어가 무려 4년 만에 솔로 앨범 MOVE ME를 발표했다. 자신만의 개성을 고수하면서도 일반 팬들이 듣기에도 부담이 없는 노래들을 담고 있는 앨범 MOVE ME 이야기, 이제까지의 음악 활동과 최신 근황 등을 미지 유어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낱낱이 알아보았다.

– 먼저 새 앨범의 발매를 축하드립니다. 옛날 이야기부터 좀 시작하죠. ‘Salvation’이라는 밴드에서 처음 음악 생활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처음 음악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언제부터인지, 또 음악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 계기는 어떤 것이 있는지 좀 말해주세요.

프로페셔널한 음악을 시작한 것은 18세 때 ‘Salvation’에 들어가면서였지만 늘 음악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당시에는 기타리스트로 들어갔지만 곧 보컬이 탈퇴하면서 제가 보컬을 맡게 되었지요.

– ‘Salvation’이란 밴드가 ‘Slik’이라는 밴드로 바뀌었고 밴드의 음악적 성격이 바뀌게 되자 이에 반발해서 탈퇴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후 ’Sex Pistols’의 베이시스트인 글렌 매틀록이 이끌던 ‘Rich Kids’란 밴드에서 활동을 했는데 이 그룹에 가담하게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Slik’는 10대 지향적인 그룹이었고 넘버 원 음악을 갖기도 하고 재미있었어요. Rich Kids에 가담하게 된 것은 정말 순식간에 이루어졌어요. 제가 글래스고에 있는데 런던으로 내려오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런던에 도착하자 그 자리에서 3곡을 녹음하고 그 날 밤 공연에 나갔지요. 심지어는 공연 중 불까지 나서 우리들은, 불로 축복받은 그룹이라고 느끼기도 했어요.

– 그룹 ‘Visage’를 거쳐 ‘Ultravox’에 가담했는데 당신의 음악 인생에 있어 ‘Ultravox’가 차지하는 의미는 어떤 것입니까?

울트라복스는 정말 뛰어난 밴드였고 좋은 기억만 남아 있지요. 울트라복스??? 당시 최초로 전통 악기들과 드럼 머신 같은 일렉트로닉 기술을 가미해서 ‘원더풀 사운드’를 만들어냈어요. 그 때 음악은 정말 특별한 음악이었어요.

– 당신이 가장 음악적으로 영향을 받은 인물은 누구입니까?

시기 별로 바뀌는데, 초기에는 60년대 밴드인 ‘Small Faces’가 있었고 그 다움은 데이빗 보위, 그리고 제가 기타에 관심을 쏟던 당시에는 지미 페이지와 에릭 클랩튼, 그리고 요즘은 ‘크라프트베르크’의 신서사이저에 푹 빠져 있어요.

http://music.kbsweb.co.kr/03_inter/ic0001152.htm#

디스코그래피
Vienna 1980
Rage In Eden 1981
Quartet 1982
Lament 1984
Rare, Vol. 1 1994
Rare, Vol. 2 1994
Future Picture 1995
Ingenuity 1996
Systems Of Romance 1997
Ultravox! 1999

링크
Official Site
Midge 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