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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lit Enz

Split Enz at Nambassa January 1979.jpg
Split Enz at Nambassa January 1979” by Nambassa Trust and Peter Terry – http://www.nambassa.com.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Split Enz는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까지 활동했던 뉴질랜드 출신의 뉴웨이브 밴드다. 1972년 Phil Judd와 Tim Finn이 주축이 되어 결성되었고 후에 Tim의 동생 Neil Finn이 가세한다. 밴드는 고향인 뉴질랜드와 인근의 호주, 그리고 캐나다 등에서 특히 인기가 많았다. 가장 인기가 있었던 곡은 1980년 싱글 “I Got You”다. 밴드는 아트록, 스윙, 펑크록, 뉴웨이브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서 영향 받은 음악을 구사했다. 또한 밴드는 비주얼 적으로도 독특한 스타일을 선보였는데 컬러풀하면서도 약간은 괴짜 같은 스타일의 패션을 유지했다. 1970년대 이들의 음악 스타일은 어쿠스틱 포크에 가까웠다. 하지만 1977년경부터 전자악기를 도입했고 프로그레시브록에 가까운 음악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이 시기는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인 Phil Judd가 그룹을 떠나고 Neil Finn이 가세한 시기와 일치한다. 이후 이들의 사운드는 점점 뉴웨이브 스타일로 바뀐다. 상업적으로도 성공하여 MTV에서도 그들의 뮤직비디오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밴드는 1984년 해산했고 그 뒤 몇 번 재결합하기도 했다. 해체 후에도 멤버들은 다양한 활동을 펼쳤는데 대표적으로 Finn형제가 주축이 된 Crowded House와 Finn Brothers 등이 있다. Split Enz와 Finn 형제의 뉴질랜드에서의 음악적 권위는 압도적인데 오스트랄시아 공연권리협회가 선정한 Top 100 New Zealand Songs of All Time이라는 차트에서는 Split Enz의 곡이 무려 일곱 곡이 선정되었다. 이외에도 Finn형제가 작곡한 곡과 Crowded House 시절의 곡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그들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개인적으로 이들 독특한 음악과 비견할 다른 나라의 밴드를 찾으라면 미국에서는 Talking Heads, 영국엔 XTC이라 생각한다.

스튜디오 앨범 디스코그래피
Mental Notes (1975)
Second Thoughts (1976)
Dizrythmia (1977)
Frenzy (1979)
True Colours (1980)
Waiata/Corroboree (1981)
Time and Tide (1982)
Conflicting Emotions (1983)
See Ya ‘Round (1984)

Soviet

뉴로맨틱이나 브릿팝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Soviet는 1990년대 후반에 활동한 일렉트로팝 밴드이다. 1999년 처음 등장한 이 밴드는 싱어이자 작곡자인 Keith Ruggiero와 키보디스트/프로그래머를 맡은 Chris Otchy를 주축으로 결성되었다. 공연에는 신디사이저 Amanda Lynn와 Greg Kochan, 기타에 Kenan Gunduz 등이 함께 했다. 2002년 데뷔앨범 We Are Eyes We Are Builders를 내놓았고, 2008년에 Spies in the House of Love를 내놓았다.

홈페이지
Soviet – Commute

Stray C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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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ay Cats” by Masao Nakagami – http://www.flickr.com/photos/goro_memo/227392648/.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1978년뉴욕의 롱아일랜드에서 결성된 트리오 스트레이캐츠는 영국에서 먼저 성공을 거둔 미국 밴드이다. 이들은 1981년 영국에서 일기 시작한 로커빌리의 리바이벌 붐에 힘입어 향수를 자아내는 초기 로커빌리 사운드로 운좋게 성공을 거둔 행운아들이었다. 리드 싱어이며 기타리스트인 Brian Setzer는 13세때부터 이미 로컬밴드에서 기타를 연주할 정도로 음악에 빠져 있었다. 로커빌리 사운드에 깊은 매력을 느낀 그는 클럽에서혼자 연주 생활을 하다가 같은 또래의 Slim Jim Phanton과 Lee Rocker를 만나 의기투합, 그룹을 결성하였다.1980년 세사람은 작은 클럽과 바에서 연주를 계속했으나 별 호응을 얻지 못하자 악기만 들고 영국으로 건너가 갖은 고생을 하면서 연주 활동을 하던 끝에 어느 날 매우 유명한 프로듀서 데이브 에드먼드를 만났다. 그들의 공연에 관심을 가진 데이브는 아리스타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게 해주었고 작품도 만들어 주었는데 그의 제작으로 출반된 이들의 데뷔 싱글 Runaway Boys는 당시 영국에서 유명해졌다. 이어서 1982년 발표한 싱글 Rock This Town과 Stray Cat Strut가 영국은 물론 미국으로까지 건너가 톱10이상의 대히트곡이 되어 미국으로 금의환향하게 되었다. 여세를 몰아 이들은 1983년 싱글 (She’s) Sexy + 17을 내놓아 또 한번 팝챠트를 누볐으며 뒤를 이어 I Won’t Stand In Your Way가 싱글 커트되었다. 60년대 초반의 간단한 악기 편성인 기타, 드럼, 스트링 베이스 만으로 전혀 빈틈없이 로큰롤 사운드를 구사하는 이들은 음악적 역량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었고 밝고 발랄한 사운드와 다소 반항적이긴 하지만 생동감 넘치는 내용의 가사는 이들의 매력으로 돋보이고 있다.

디스코그래피
Stray Cats 1981
Built For Speed 1982
Rock Therapy 1986
The Best Of The Stray Cats: Rock This Town 1990
Choo Choo Hot Fish 1994
Runaway Boys: A Retrospective ’81-’92 1997
Struttin’ Live 1999
Live [Cleopatra] 1999

링크
브라이언세쳐 팬페이지

Secession

Secession 은 1983년부터 1987년까지 활동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신스팝 밴드이다. 이들은 Peter J. Thomson, Carole L. Branston, Charlie D. Kelly, J.L. Seenan 으로 구성되었다. Human League 의 무미건조한 신스팝 음악이 조금 더 어두운 쪽으로 진화한듯한 인상을 주는 이들의 음악은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열성적인 팬들의 환호를 받았고 Touch, The Magician 등이 인기를 끌었다.(개인적인 애청곡은 Michael)

싱어 Peter J. Thomson 은 1990년대 후반에 사망하였다. 이들은 그들의 짧은 활동기간 동안 Beggars Banquet과 Siren Records의 두 군데의 레이블에서 활동하였다. 아쉽게도 이들의 유일한 정규앨범은 1987년에 발매된 A Dark Enchantment 한 장 뿐이다. 이 앨범의 CD는 극히 희귀하여 온라인에서 100달러가 넘는 값에 거래되고 있다.

디스코그래피
Singles
1983 – “Betrayal” / 1984 – “Fire I / 1984 – “Touch” [Beggars Banquet] / 1986 – “Michael” / 1987 – “The Magician” [Siren] / 1987 – “Promise” / 1987 – “Radioland” / 1987 – “Sneakyville” [Siren]

Album
1987 – A Dark Enchantment

1. Eventide 2:22 2. Promise 4:09 3. Love Lies Bleeding 4:35 4. Sneakyville 3:44 5. Winifred 3:44 6. The Box That Holds A Secret 5:24 7. Ocean Blue 5:03 8. Radioland 4:33 9. The Magician 4:23 10. Love Lies Bleeding (Reprise) 1:02 11. The Wolf 4:18 12. Eventide (Theme From A Dark Enchantment) 2:00 13. All The Animals Come Out At Night 4:07 14. Michael 4:08 15. Havoc 3:47 16. Promise Dub 5:19

링크
My Space Fan Page Cool!
그들의 음반 구입하기
A Dark Enchantment 리뷰
싱글 The Magician 감상

Smiths,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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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ithsPromoPhoto TQID 1985” by Scanned promotional photograph. Licensed under Fair use via Wikipedia.

스미쓰는 82년 봄 맨체스터 출신의 두 남자, 모리세이(본명 Steven Patrick Morrissey)와 자니 마(본명 John Maher)에 의해 결성되었다. 그해 여름 데모 작업을 위해 드러머인 사이먼 볼스탠크로프트(Simon Wolstencroft)와 녹음을 했지만 그는 스미쓰의 일원이 되기를 거부했다. 후에 사이먼은 폴(The Fall)에 들어갔고, 결국 스미쓰에 합류한 마이크 조이스(Mlke Joyce)와 함께 맨체스터 리츠에서 데뷔 공연을 가졌다. 베이스가 없던 스미쓰는 82년 말 스미쓰의 평생 동반자인 앤디 러크(Andy Rourke)를 만났는데 그는 자니와 함께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스미쓰의 첫 싱글 ‘Hand In Glove’는 차트에 오르지 못했지만 83년의 두 번째 싱글 ‘This Charming Man’은 영국 차트 30위에 오르는 실력을 과시했다. 곧장 미국 투어에 오른 네 명은 새로운 싱글 ‘What Difference Does It Make?’를 발표하고 12위에까지 올랐다. 모리세이는 자주 성(性)의 개념을 무너뜨리는 가사를 썼는데, 그의 동료 자니의 기타 사운드는 이런 모리세이의 든든한 지지자 역할을 하였다. 한편 1집의 엔딩곡인 ‘Little Children’은 60년대에 일어났던 끔찍한 살인사건의 피해자인 어린 아이들에게 바치는 레퀴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를 비난했고 스미쓰는 언론의 표적이 되어 곤혹을 치뤄야만 했다. 다행히 피해자 측의 모리세이에 대한 변론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이후 스미쓰와 모리세이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에피소드로 남았다.

스미쓰는 미국의 R.E.M이나 벡(Beck)처럼 대학가의 유명한 컬트 밴드가 되어가고 있었다. 86년 메이저 레이블인 EMI로 이적한 후 영국 투어를 하던 중, 자니가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의 공백을 크래이그 개넌(Craig Gannon)이 대신하였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법적인 문제로까지 불거지게 되었다. 브릭스톤 아카데미에서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스미쓰의 영국 공연은 더 이상 실현되지 않았다. 자니는 더 이상 스미쓰에 남아있고 싶어하지 않았다. 음악적인 방향이 달랐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에게는 휴식기간이 필요했다. 이들의 미래는 너무나 불투명했으며, 결국엔 87년 8월 공식적으로 해산을 선언했다. 이전에 마지막으로 발표된 앨범은 [Strangeways, Here We Come]으로 같은 해 나왔고, 이듬해 [Rank]가 발표되면서 스미쓰의 잔존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멤버들은 각자 세션맨으로서 분주하게 활동했고, 모리세이 또한 화려한 싱글 데뷔를 하였다.

자니는 프리텐더스(Pretenders)와 더더(The The)에서 기타맨으로 활약하다가 버나드와 함께 시작한 일렉트로닉에서 다시 한번 부활을 꿈꾸었다. 그는 과외활동으로 브라이언 페리, 토킹 헤즈, 빌리 브래이그, 커스티 맥콜, 팻샵 보이즈, 스텍스, 그리고 반데라스에 이르는 다양한 뮤지션들과 함께 작업하며 경력을 쌓아갔다.

에필로그

필자가 스미쓰를 처음 접한 것은 영화 Pretty in Pink의 싸운드트랙에서였다. 이 OST에 삽입된 Please please please let me get what I want라는 긴 이름의 이 노래는 그들의 서정적인 음악적 감성을 잘 표현해주는 곡으로 눈밭에서 반코트를 입은채 서있는 그들의 흑백사진과 오버랩되면서 오랫동안 여운을 남겨주는 곡이었다. 모리쎄이의 시적인 가사와 자니마의 발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애절한 키타 사운드는 이들 음악의 핵심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고딕락의 우울한 자화상과 이언커티스(Joy Division)의 표정이 묻어나는 듯한 그들의 음악적 천재성으로 인해 한동안 영국 음악계에 등장하는 신진밴드들은 이들과 비교되지 않으면 안되는 일종의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했다.

이제 모리쎄이는 예전의 샤프한 모습에서 적당히 살집이 잡힌 늙수구레한 아저씨의 모습으로 변한채 미국에서 하드코어 밴드를 이끌고 있고 자니마는 뉴오더의 버나드섬너와 함께 일렉트로닉으로 활동하여 인기를 얻었으며 현재는 자신의 밴드를 이끌고 있다 한다.

다른글(출처 : http://www.intermuz.com/theRocker/noiz_box/NOISE5.asp)

70년대 말 펑크의 소진과 함께 뉴 웨이브 팝이 영국 대중음악계를 휩쓸 무렵, 주류 팝 시장은 신시사이저가 주도하는 전자 음악의 홍수로 80년대 팝 음악시장의 모습을 갖춰나간다.울트라복스, 휴먼 리그같은 밴드들이 표방한 신스 팝은 이윽고 듀란 듀란, 컬처 클럽, 왬 등의 아이돌 스타들에 의한 세련된 포장으로 변신한다. MTV의 등장은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의 전환을 가져왔고, 주류 팝 시장에선 음악성보다는 외모와 무대 매너로만 음악인의 자질을 판가름하는 경향이 점차 농후해 졌다.

여기서 소개할 80년대 맨체스터 사운드는 바로 이런 당시 영국 주류 팝 시장의 소모적이고도 치열한 ‘음악 팔리기’에 대해 저항하며 맨체스터라는 영국 북부의 공업 소도시를 거점으로 활동한 인디 밴드들의 음악 스타일을 통칭해서 말한다. 영국 내에서 보면 한갓 지방도시에 불과한 이 지역을 거점으로 바로 본격적인 영국 얼터너티브 록 씬의 맹아가 형성되었다.

맨체스터 내의 밴드들은 그들만의 ‘지역성’을 통해 자신들만의 독특한 음악 색깔을 지니려고 했고 80년대 영국 얼터너티브의 발화점으로서 바로 이 맨체스터를 꼽는데는 별 이견이 없을 듯 하다. 80년대 당시 활동하던 맨체스터 출신 밴드들 중 가장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했던 밴드들론 스미스, 뉴 오더, 제임스 등이 있었고, 이들의 직계 영향 하에 등장한 ‘매드 체스터(일명 미친 맨체스터들)군단-스톤 로지스.해피 먼데이스, 인스파이럴 카펫, 살란탄 UK-들은 바로 위에 언급한 세 밴드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90년대 등장한 오아시스, 블러, 스웨이드, 펄프와 같은 쟁쟁한 브릿팝 그룹들 역시 바로 이 맨체스터 사운드에서 직,간접으로 그 음악적 영향을 흡수했다 볼 수 있다.

이 글에선 맨체스터 사운드를 대표하는 중요한 두 거목 스미스와 뉴 오더를 소개한다. 이들 그룹은 각각 ‘기타-팝’과 ‘신스 팝’이라는 음악 스타일을 통해 영국 내의 ‘인디 팝’ 운동의 선두를 담당한 밴드들이다. 이 두 밴드는 펑크와 90년대 브릿 팝을 연결 시키는 중요한 가교로서 거론되곤 한다. 앞으로 두 편으로 나눠서 진행 될 본 내용에서 먼저 ‘스미스’에 대해 알아본다.

The Smiths – 그들의 음악에 대해서…

스미스의 음악을 ‘기타 팝’이라고들 한다. 이는 당시 영국 내 대중 음악 상황과 연관되어서 붙어진 명칭인데, 당시 영국 팝 음악 시장을 주도하고 있던 스타일은 신시사이저와 시퀸서가 만들어 내는 전자음 위주의 음악이었다. 스미스의 음악은 당시 이런 주류 음악 산업의 배경 대한 신선한 대안을 드러내고 있었다.
팀의 핵인 보컬 모리시와 기타리스트 자니 마는 밴드의 지향점을 규정한다.

팀에서 작사와 보컬을 맡고 있는 모리시[본명 스티븐 패트릭 모리시(Morrissey);1959-]는 천부적인 언어 능력을 소유한 음악인 이전의 문학도이다. 그의 정신적인 우상이기도 한 제임스 딘을 닮은 창백한 이미지는 입 안에서 구르는 듯한 맬랑꼴리한 느낌의 보컬과 결합하여 기존 록 음악의 ‘샤우트’한 거친 록 음악 특유의 마초쉽과는 거리가 멀었다. 모리시의 공연을 보면서 ‘록 스타’라는 이미지는 오간데 없고 ‘동네 이웃의 친한 오빠’라는 친근한 이미지로서 다가온다. 그저 길을 지나치다가 쉽게 마주치는 그런 수줍은 청년 말이다.

그의 노래는 멜로디가 있다. 다시 말해 모리시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된다. 모리시의 보컬은 결코 넘치거나 나서지 않는다. 답답할 정도로 제한된 음정 폭(3도에서 길어야 5도)에서 보컬을 구사한다.

그의 보컬은 스미스의 음악 전체에서도 일관된 성격을 유지한다. 그는 명백한 ‘팝’주의자이다. 그의 음악적 자양분은 멀리는 50년대 버디 할리가 보여준 록커빌리의 이미지에서 60년대 크루닝 창법을 통한 스탠더드 팝, 걸 그룹, 그리고 70년대 쇼킹한 스테이지 매너를 과시한 뉴욕 돌스와 데이빗 보위의 글램, 그리고 섹스 피스톨스의 폭력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모리시의 가사 속엔 사춘기 소년의 ‘어찌할 줄 몰라 망설이는’듯한 수줍음(추억의 책갈피 마냥)과, 제임스 딘의 ‘이유 없는 반항’ 마냥 독설 어린 객끼, 여기에 문학도다운 탁월한 언어 감각이 오밀조밀하게 거미줄처럼 짜여 있다. 흔히 들을 수 있는 팝 음악의 ‘남녀 상열지사’류의 가사도 모리시에겐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론 처절할 정도로 비수를 품은 폭력성은 그의 또 다른 면모이다. 그는 한 때 펑크 매니아라고 자처할 정도로 어린 사춘기 시절 펑크 음악에 매료됐었다. 뉴욕 CBGB 출신 뉴욕 돌스의 팬 클럽 회장까지 역임한 그는 어느 누구보다 펑크의 출현을 반겼었다. 밴드 내에선 그렇게도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노래를 부르던 그이지만 한편으론 ‘섹스 피스톨’이 보여준 ‘파괴의 본능’이 그의 가사 속에 녹아 있다.

기타와 작곡을 맡고있는 자니 마[본명: 조니 마어(Johnny Marr) ; 1963- ]는 밴드내의 음악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의 기타 소리는 록 음악 특유의 디스토션 사운드와는 거리가 먼 크린 톤의, 맑게 울리는 기타 소리이다. 손가락으로 기타 줄을 하나하나 튕겨가며내는 소리는 울리는 소리다. 그의 연주는 한음 한음이 또렷하다. 필요 없는 음의 낭비란 찾아 볼 수 없고 정갈하고 깔끔하다. 일렉기타 또는 어쿠스틱 기타를 번갈아 가며 사용하는 그의 기타소리를 두고 평론가들은 ‘쟁글쟁글(기타의 소리를 두고 표현하는 말)한 기타 소리가 나는 기타 팝’이라고들 한다.

자니 마의 기타는 지저분하고 거친 록의 본연의 느낌과 거리가 있다. 크린 톤의 기타 음은 기존 밴드 내에서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쟁쟁한 기타리스트의 이미지와는 확연히 다른, 단지 모리시의 보컬을 든든히 받쳐주는 반주자의 역할에 가깝다. 리듬 웍이 강조되는 그의 기타 연주는 롤링 스톤의 키스 리처드에 비견될 수 있다. 베이스 주자인 엔디 루어크와 드러머 마이크 조이스의 연주 역시 파묻혀 버리지 않고 정확하고 또렷이 들린다. 과거 아트 록 그룹 록시 뮤직이나 재즈 록 밴드 스틸리 댄의 음악에서 느끼는 스튜디오 작업의 정확함과 치밀성이 스미스의 음악에도 살아있다. 각각의 소리가 조화롭게, 그러면서도 어느 하나 무시됨 없이 명료하게 들려온다.

이런 자니 마가 제시한 스미스의 음악 방향은 모리시의 음악관과 판이하다. 자니 마의 연주에 밀도를 둔 치밀한 스튜디오 작업을 선호하는 반면 모리시는 ‘엘리트’ 적이며 권위적인 록의 기존 이미지’를 증오하는, ‘팝’ 순수주의자이다. 스미스만의 독특한 색깔이란 바로 이들 모리시와 자니 마가 보여준 ‘앤티 록’과 ‘앤티 팝’간의 묘한 긴장관계의 존재일 것이다. 그들이 보여준, 결코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이런 밴드 내의 국면은 분명 본격적인 영국 얼터너티브 씬의 출발을 알리는 심상치 않은 징조였다.

The Smiths – Discography

그들의 활동은 1982년부터 1987년까지 만5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다. 자니 마와 모리시의 묘한 대립관계는 인디 음악계가 배출한 훌륭한 성과였을지 몰라도, 팀의 지속에는 확실히 걸림돌로 작용했다. 이들은 활동한 기간동안 4장의 정규 앨범과 3장의 베스트, 미발표 모음곡 집을 내놓는다. 그리고 몇몇의 앨범에 미수록된 싱글들을 활동 기간 내내 발표한다.

그들이 발표한 곡들은 영국 내에서 싱글 차트의 중상위권을 유지하면서 자국 내의 고정 팬을 확보할 정도의 반응을 보여줬던 스미스였지만 이들의 음악은 미국에서는 미미한 반응을 가져왔다. 아마도 그들의 음악에서 표방하는 “영국적인 상황”의 강조는 미국인들에겐 낮설고 어렵게 받아졌으리라 생각된다. 더군다나 그들이 표방한 ‘팝’이라는 음악 번지수는 미국 인디 씬이나 미국 내 인디 음악을 틀어주던 거개의 대학 교내 방송국에서 결코 반길만한 것이 못 되었다. 더군다나 미국 문화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들어내는 모리시의 가사는 미국인들에게 그다지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리라 본다.

The Smith – (1984)

메이저 급 음반사의 도움 없이 ‘러프 트레이드’ 라는 인디 레이블을 통해 나온 그들의 데뷔 음반은 브리티시 얼터너티브의 출현을 예고했다. 앨범이 나올 당시 영국 주류 음악 씬이 신시사이저로 치장된 기계 음이었던 반면에 이들의 음악은 지극히 소박하고 투명했다. 물론 스트링이나 피아노가 가세된 ‘틴 팬 앨리’ 류의 팝 음악이 아닌 과거 초기의 비틀즈나 롤링 스톤즈가 그랬듯이 ‘밴드 편성의 팝’이었다. 롤링 스톤지와의 인터뷰에서 자니 마는 ‘우리가 이런 음악을 시도하기 전에는 아무도 이런 식의 기타 반주에 멜랑꼴리한 팝 음악을 연주하는 밴드들은 없었다’고 얘기한다.

82년 클럽 라이브 무대를 통해 데뷔한 이들은 83년 러프 트레이드를 통해 첫 싱글 “Hand in Glove”를 내놓으면서 영국 음반 시장에 공식적으로 데뷔한다. 가사 내용 중 ‘호모 섹슈얼리티를 나타냈다는 점이 논란이 된 이 곡으로 바야흐로 언더그라운드 씬의 ‘스미스 열풍’을 예감케 한다. 소녀 취향의 팝 넘버인 그들의 두 번째 싱글 “This Charming man”은 영국 팝차트 25위까지 진출한다. 모리시의 창백하고 풋풋한 이미지는 소녀 팬들의 모성애를 자극했다. 그러나 아동 학대 내용을 다룬 “Reel around fountain”과 무어인(북 아프리카 아랍인과 베르베르족의 혼혈 인종)의 손에 살해 당한 아이를 보고 절규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린 “Suffer little Children”에서 보듯 그들의 음악이 표현 대상은 핑크빛 사랑 타령을 넘어 추악하고 암울한 사회 현실마저 적나라하게 투영시킨다. 커다란 뿔태 안경을 끼고 보청기를 낀 채 수선화를 뒷 주머니에 꽂고(스미스 시절 모리시의 전형적인 무대 매너)무대에 등장하는 모리시가 우스꽝스럽지 몰라도 그의 가사에서 보이는 세상에 대한 시선은 냉정하다.

Meat is murder – (1985)

모리시의 ‘채식주의’선언의 계기가 된 음반. 만인의 화제로 떠오른 그들의 두 번째 앨범은 전작 앨범의 노선을 그대로 유지한다. 성과면에선 전작에 비해선 다소 뒤떨어졌다. “That joke isn’t funny anymore”가 싱글 커트 됨.

The Queen is Dead – (1986)

그들의 대표적인 명반으로 꼽히는 수작. ‘여왕은 죽었다’라고 하는 앨범 타이틀에서 느끼듯이 전작들에 비해서 거칠게 몰아치는 첫 트랙부터 본 앨범의 진가를 기대하게끔 한다. 영국 왕실의 부패를 꼬집으며, 왕실의 실상을 모리시의 탁월한 글쓰기 실력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아마도 “The queen is dead” 만큼 자니 마와 모리시의 특성의 뚜렷이 대비를 지닌 곡도 없을 것이다. 강한 백 비트에 실릴 우렁찬 기타 리프는 단순한 코드 진행과 반복되는 패턴으로 지속되지만 어느 스미스 싱글보다도 강렬하다. 단연 자니 마의 기타 연주는 본 곡에서 가히 압권이다. 앨범 시작을 강한 파워로 몰아 부친 이 곡을 통해서 스미스의 음악적 뿌리가 펑크에 있음을 다시금 증명한다.

스미스의 특기인 전형적인 팝 역시 “I know it’s over”에서 들려주는 멜랑콜리한 보컬은 여전하다. 스트링 편곡이 선명한 본 앨범의 첫 싱글 커트 곡인 “There is a light never go out”와 “The boy with the thorn in his side”는 모리시가 표방하는 “영국의 특수성”으로 비쳐진다. 그는 그의 가사를 통해 영국의 인종문제, 계급, 사회 부조리를 그만의 위트와 수사법으로 표현하고 있다.”Queen”이라는 명사의 쓰임에서 보듯이 그의 노래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영국 사회이다.

그의 가사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 이런 그의 글 쓰기에서 나타나는 상황적 고려의 필요성 때문일 것이다. 자니 마의 기타 연주는 이전보다도 훨씬 다채롭다. 어쿠스틱과 일렉트릭 기타를 번갈아 가며 만들어내는 사운드가 돋보이는 “Bigmouth Strikes Again”를 비롯 50년대 록커빌리 사운드의 숨결이 느껴지는 “Vicar in a Tutu”에서도 자니 마의 기타 연주는 유난히 돋보인다. “There is a light never go out”와 “The boy with the thorn in his side”에서 보여준 세련된 편곡 솜씨는 ‘스미스’의 음악이 ‘과연 기타 팝’임을 여실 없이 증명한다.

스미스의 모든 것을 유감없이 드러낸 본작은 그들의 1집,2집 앨범을 들은 스미스 팬이었다면 ‘정말로 이젠 모든 것을 거침없이 드러냈다”라는 표현이 어울릴만한 확실한 그들의 음악 색깔을 규정한다.

“Strangeway-Here We come” – (1987)

본 앨범을 내기 바로 직전 스미스는 갑작스런 해산을 선언한다. 이미 전작 “The Queen is dead”를 제작할 당시부터 자니 마와 모리시와의 밴드 내 분열은 표면화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둘 간의 음악 성향 차이로 인해 팀 해산을 맞는다. 모리시는 자니 마의 외도( 그는 당시 록시 뮤직에 있던 브라이언 페리나 밀리 브래그와 음악적 교류를 나눴다)가 못 마땅했고, 자니 마 역시 모리시의 60년대 팝 음악에 심취한 태도가 못 마땅했었다. 둘 사이의 음악적 견해차는 결국 본 앨봄 발매를 몇 주 앞두고 자니 마의 밴드를 떠나겠다는 선언으로 이어진다. 모리시는 주저 없이 팀을 해산하고 솔로 활동에 나서게 된다. “I started Something I couldn’t finish”와 “Last night I dreamt that someday loved me”가 싱글로 커트 됨.

Single Collection

Hateful of hollow (Single B-side collection)
The world Won’t listen (single collection-UK version)
Louder than Bombs (single collection -US version)

이외에도 정규 앨범엔 포함되어 있지 않으나 싱글로 발표되어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Panic”은 미국 문화로 범벅된 영국의 상황을 인종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을 각오를 갖고 만든 곡이다. “DJ를 교수형에”라는 독설 찬 그의 항변은 그가 미국 문화에 대해 가지고 있는 반감의 정도를 말해준다. “Heaven knows I’m Miserable now”는 영국 내의 사회문제인 실업을 모리시의 위트 어린 가사로 표현해냈다.

-자스보이- ( jassboy@hanmail.net )

[지나가다] [불평]ah you jassboy -whatever you are- so much to answer for… This sounds half-baked, or half-hearted at its best! 그리고 정정: 무어인이 아니라 60년대 맨체스터에서 있었던 엽기 연쇄살인사건인 무어스 머더(Moors Murder)를 말하는 것. 무어(스)는 그 지방 외곽의 황량한 들판을 지칭. -11월10일-
[lupin] 예전 로저 샤툭이 샤드백작-후작인가? 가 무어스 살인사건과 테디번디 살인사건의 원인 제공자라 했는데 그무어스가 그 무어스군요.. -11월10일-
[lupin] 윗글 쓰신분 =자스보이님딴엔 정성껏 동아 대 백과사전 찿아가며 쓰신 무어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지나가다님의 글을 읽고 다시보니 참 쓸쓸 하네요.. -11월10일-
[lupin] 스미스의 패닉은 들을때마다 딴나라당 선거 유세에 쓰이면 딱이겠다는 생각이…hang the dj,hang the dj -11월10일-
[moz] Hang the blessed DJ~ 한때 제 시그내춰로 쓰기도 했던 문구였습니다. 아~ 토요일 날도 좋은데 저녁때 웬 생일파리에 딸려나가야 하는군요. 고양이 산책이나 시켜야 겠다. -11월10일-
[moz] 선거캠페인쏭 말이 나와서 생각난건데 한때 부쉬녀석(애비부쉬)이 선거캠페인쏭으로 토킹헤즈의 Dont worry about the government를 썼다는군요. 이에 토킹헤즈 측은 it’s bullshit이라고 짤막하게 논평하였답니다. -11월10일-

디스코그래피
1984 The Smiths Sire
1985 Meat Is Murder Sire
1986 The Queen Is Dead Sire
1987 Strangeways Here We Come Sire
1988 Rank [live]

링크
Fan Page
다음의 스미쓰 카페
morrissey-solo.com/
Johnny Marr의 공식싸이트
elmoz의 팬페이지
haine의 팬페이지
SmithyteriaCOOL!!
Johnny Marr 키타탭
Johnny Marr와의 인터뷰

Stacey Q

Stacey Q (스테이시 큐)

1986년은 마돈나숀 펜(Sean Penn)과 첫 결혼을 했고, 3집 [True Blue]앨범을 발표하며 자신의 음악이 단순한 댄스 팝의 틀에서 벗어날 것이며, 자신의 스타덤이 모두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는 것을 지켜보던 한 해였다. 그 벤치마킹의 첫 번째 모범 사례로 미국에서 등장한 여가수가 바로 스테이시 큐(본명 Stacey Lynn Swain)였다. 그녀의 메이저 데뷔 싱글 [Two Of Hearts]가 전미 차트 3위, 그리고 전 유럽과 아시아 지역의 클럽가를 석권했을 때(한국 라디오와 나이트 클럽에서도 이 곡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대중은 그녀가 “제2의 마돈나”의 후보로 그녀의 이름을 올렸을테니까…
59년생으로 캘리포니아 출신인 스테이시는 소녀시절부터 클래식 발레와 연기를 공부했고, 80년대 초반 댄스 뮤직 밴드 Q(007영화에서 제임스 본드의 상관의 호칭에서 기원함)의 보컬리스트로 처음 프로의 길을 걸었다. 나중에 밴드는 이름을 SSQ로 바꾸게 되는데, 83년작 [Playback] 이후 나머지 멤버들은 그녕의 작업에 도움을 주는 관계로 남고 그녀는 솔로로 독립했다.
그 후 86년에 인디 레이블을 통해 셀프-타이틀 데모 EP를 발표한 데 이어 아틀랜틱(Atlantic) 레이블과 계약을 맺고 첫 솔로 앨범 [Better Than Heaven]을 내놓는다. (그 전에 이미 싱글 [Two Of Hearts]는 클럽가를 휩쓸기 시작하고 있었다.) 결국 이 곡의 전 세계적 히트로 그녀는 ‘Overnight Success’에 가까운 스타덤을 얻었고, 후속 싱글 [We Connect]도 Top 40 히트를 기록하며 선전했다. (두 싱글 모두 그녀가 잠시 출연했던 드라마 “The Facts Of Life“에서도 소개되었던 것이 나름대로 히트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88년에 발표된 2집 [Hard Machine]이 싱글 [Don’t Make A Fool Of Yourself]의 저조한 히트로 인해 묻혀버리자 그녀의 이름도 팝계에서 너무나 쉽게 잊혀져가기 시작했다. 다음해인 89년에 3집 [Nights Like This]가 발표되었음에도 사람들은 그녀의 앨범이 나왔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녀는 자꾸만 팝계의 저편으로 밀려났다. 결국 한 동안 연예계를 떠나있으면서 티벳 불교에도 심취했던 스테이시는 97년 그 영향으로 당혹스럽게도 포크-록적 성향을 가진 4집 앨범 [Boomerang]을 발표하며 팝계에 다시 복귀했다. (이 앨범에는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의 곡을 리메이크한 [My Sweet Lord]가 들어있다.)
그 앨범 역시 상업적인 실패를 거두자 그녀는 음악보다 영화쪽에 오히려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Playing The Odd](98), [Citizens of Perpetual Indulgence](00), [Never Mind The Buzzcocks](02) 등 그리 우리에겐 알려지지 않은 영화들에서 연기 활동을 펼쳤다. 2004년 다시 고향인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그녀는 다시 댄스 뮤직계로 돌아와 클럽 등에서 공연하면서 음악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고 하는데, 최근에는 에코 정키스(Echo Junkies)의 존 세인트 제임스, 스킵 한 등과 함께 스튜디오에서 새 음반을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그녀의 Myspace홈페이지에 실려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녀의 현재 공식 홈페이지는 http://www.stacey-q.com 이다.) 오른쪽 포스터는 이번 달에 예정된 클럽 파티에서의 공연 예정 광고인데, 아직도 이렇게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조만간 그녀의 신곡을 들을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섹슈얼한 느낌을 주지만 (마치 강수지, 하수빈이 생각나는것 처럼) 여린 보컬 능력이 그녀의 아티스트로서의 한계이긴 했지만, 그녀도 스스로 작사-작곡을 할 줄 아는 싱어였기 때문에 언제든 본인이 만족할 작품이 만들어진다면 다시 그녀의 모습을 화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80년대에 가장 섹시한(야릇한 충동이 느껴지는) 노래중 하나로 기록될 이 [Two Of Heart]와 그 뮤직비디오를 다시 보면서 중학교 1학년 학생의 가슴에 다가왔던 그 야릇해던 느낌이 다시 되살아 나는듯하다.

Stacy Q’s Discography:
SSQ: [Playback] (83)
1집: [Better Than Heaven](86) /
2집
: [Hard Machine] (88) /
3집
: [Nights Like This] (89)
4집: [Boomerang] (97) /
베스트앨범
: [Stacey Q’s Greatest Hits] (95)

Swing Out Si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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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ing Out Sister” by CorinneDrewerySOS06.jpg: Carl Lender at http://flickr.com/photos/clender/
AndyConnellSOS06.jpg: Carl Lender at http://flickr.com/photos/clender/
derivative work: FotoPhest (talk) – CorinneDrewerySOS06.jpg
AndyConnellSOS06.jpg.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결성 : 1985년
멤버 : Andy Connell, Corinne Drewery, Martin JacksonSwing Out Sister는 Manchester 출신이지만 그 동네의 싸이키델릭한 그룹들과는 사뭇 다른 음악성을 추구하였다. 째즈에서 영향받은 스무드한 씬쓰팝을 구사했던 그들은 Martin Jackson (드럼), Andy Connell (키보드), 그리고 패션디자이너 출신인 Corrine Drewery (보컬)로 구성되었다. Jackson은 첫앨범 발표후 그룹을 떠났다. 이들의 최대 히트곡 Break Out은 이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디스코그래피
1987 Another Non-Stop Sister [US]
1987 It’s Better to Travel
1989 Kaleidoscope World
1991 Get in Touch with Yourself
1993 Live
1993 Swing Out Sister
1994 Living Return
1997 Shapes and Patterns
1999 Another Non-Stop Sister [Japan]
2000 Live at the Jazz Cafe

링크
Official Site

Supertramp

Supertramp의 탄생은 이채롭다. 1969년 Stanley August Miesegaes라는 독일의 한 백만장자는 평소 알고 지내던 보컬리스트이자 키보드 주자인 Rick Davies에게 자신의 밴드를 조직할 수 있도록 재정적 지원을 해주었다. Melody Maker에 광고를 낸 결과 Davies는 그룹 Supertramp를 조직하게 되었다. 2장의 프로그레시브 앨범을 발표한 후 Miesegaes는 재정적 지원을 중단하게 된다.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한 밴드는 그들의 사운드에 좀더 상업적 색깔을 가미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좀더 팝적인 요소를 가미한 세 번째 앨범 Crime of the Century를 내놓게 되었다.

이 후 이들의 앨범 중 몇몇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1979년 작 Breakfast in America에서는 “Goodbye Stranger,” “Logical Song”, “Take the Long Way Home” 등이 연속적으로 히트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천팔백만 장 이상이 팔리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앨범 이후 그룹은 R&B적인 색채가 가미된 음악을 선보였고 80년대에는 “It’s Raining Again”, “Don’t Leave Me Now”, “Cannonball” 등의 히트곡을 제조해냈다.

디스코그래피
1970 Supertramp A&M
1971 Indelibly Stamped A&M
1973 Extremes [Original Soundtrack] Deram
1974 Crime of the Century A&M
1975 Crisis? What Crisis? A&M
1977 Even in the Quietest Moments A&M
1979 Breakfast in America A&M
1980 Paris [live] A&M
1982 …Famous Last Words… A&M
1985 Brother Where You Bound A&M
1987 Free As a Bird A&M
1988 Live 88 A&M
1997 Some Things Never Change Chrysalis
2001 Is Everybody Listening? [live]
2002 Slow Motion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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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icial Site
Fan Page

Sugarcubes, The

The Sugarcubes.jpg
The Sugarcubes” by http://www.geocities.com//patmil007/6265.jpg, Copyright : Elektra Entertainment Group, Inc. for the US and Canada, 1991. Licensed under Wikipedia.

The Sugarcubes는 Iceland출신으로는 가장 성공한 밴드이다. 그들의 음악을 표현하자면 개인적으로는 The B-52’s에 대한 아이슬랜드의 응답이라고 말하고 싶다. 경쾌하고 멜로딕하고 댄써블한 싱글들은 여러 면에서 The B-52’s를 연상시킨다. 그룹의 전설에 따르면 그들은 보컬리스트 Björk(Björk Gundmundsdottir)이 아들을 낳았던 1986년 6월 8일 결성했다 한다. 결성전 그룹의 멤버들은 여러 아이슬랜드 밴드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Bjork은 11살때 이미 친구의 앨범에서 보컬을 맡았었다. 십대 후반 그녀는 포스트펑크 밴드인 Tappi Tikarrass에 가담했다. 드러머 Siggi Baldursson은 Theyer의 멤버였다. 그들은 Killing Jokes의 Martin Glover Youth와 Jaz Coleman이 아이슬랜드에 왔을때 함께 작업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Einar Benediktsson와 Bragi Olafsson는 Purrkur Pillnikk라는 펑크밴드를 조직했었다.

1984년 Bjork, Einar Benediktsson, Siggi Baldursson, 그리고 키보디스트 Einar Mellax는 마침내 함께 모여 KUKL 을 결성했다. 그룹의 음악 스타일은 노이지한 포스트펑크 스타일이었고 Crass라는 영국의 인디라벨에서 싱글을 몇개 발표했다. 1986년 KUKL은 키타에 Björk의 남편 Thor Jonson과 베이스 Bragi Olafsson가 가세하면서 the Sugarcubes로 발전했다.

1987년 후반 밴드는 영국의 One Little Indian, 그리고 미국의 Elektra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고 1988년 데뷔앨범 Life’s Too Good을 내놓았다. 미국과 영국에서 동시에 호평을 얻은 이 앨범에서는 싱글 Birthday가 대학가를 중심으로 히트하였다. 특히 Björk이 각광을 받았는데 이로 인해 그녀와 Einar Benediktsson 사이에 긴장관계가 조성되었다. 두번째 앨범을 내놓을 즈음 Thor가 Bjork과 이혼하고 그룹의 키보디스트가 된 Magga Ornolfsdottir와 결혼했다. 게다가 Bragi Olaffson까지 이혼하는 등 음악외적인 시련이 있었다.

그들의 두번째 앨범 Here Today, Tomorrow, Next Week!는 Einar가 보컬쪽에 많은 기여를 했다. 두번째 앨범을 내놓은 후 그들은 장기간의 공연에 들어갔다. 1990년 공연이 마무리된 후 멤버들은 각자의 취미생활에 열중하였다. 1992년 세번째 앨범 Stick Around for Joy가 발표되었다. 이 앨범의 평은 Life’s Too Good보다 더 나았지만 히트싱글은 없었다. 1993년 Björk이 솔로활동으로 돌아섰고 비평적인 면에서나 상업적인 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디스코그래피
1988 Life’s Too Good [Elektra]
1989 Here Today Tomorrow Next Week [Elektra]
1992 Stick Around for Joy [Elektra]

링크
The Sugarcubes Main Page
The Sugarcubes

Style Council, The

The Style Council.jpg
The Style Council” by http://www.chic-a-boom.com/pics/stylecouncil.jpg, Copyright : Polydor, Ltd. (UK), 1988. Licensed under Wikipedia.

1983년 결성하고 1990년 해체했다. 멤버는 Mick Talbot, Paul Weller, Dee C. Lee, Steve White 등이다. 키타리스트이자 보컬리스트인 Paul Weller는 80년대 영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밴드였던 The Jam을 해산하였다. 그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1982년에 그룹이 해산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폴웰러가 그룹의 음악적 방향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웰러는 그의 작품에 soul, R&B, jazz 등의 요소를 집어넣기를 원했다. 이러한 음악적 방향을 달성하기 위해 그는 1983년 모드 리바이벌 밴드인 the Merton Parkas 출신의 키보드 주자인 Mick Talbot와 함께 Style Concil이라는 팀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추구하는 음악에 따라서 여러 뮤지션들이 가세하였다. 비록 음악적 뿌리는 미국의 R&B였지만 음악의 구성은 씬써싸이저와 드럼머쉰을 사용하였고 유럽적인 음악 스타일로 여과되었다. 좌익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폴의 가사는 인종주의, 마가렛 대처, 성차별주의 등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었다.

디스코그래피
1983 Introducing the Style Council
1984 My Ever Changing Moods
1984 Cafe Bleu
1985 Internationalists
1985 Our Favourite Shop
1986 Home & Abroad [live]
1987 Cost of Loving
1988 Confessions of a Pop Group
1989 The Singular Adventures of The Style Council
1998 The Complete Adventures of The Style Council

링크
참고싸이트
The Jam, The Style Council and Paul Weller
Fan S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