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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awberry Switchblade

Goth의 인기가 사그라질 즈음 두 소녀가 물방울무늬의 드레스, 새빨간 립스틱, 그리고 헤어 리본 차림으로 등장하였다. 마치 Robert Smith의 약혼녀 같은 모습을 하고 등장한 Strawberry Switchblade 는 로리타 스타일의 발랄한 댄스팝으로 영국 차트에서 반짝 인기를 얻었고 80년대 중반 사라져 갔다.

Rose McDowall 과 Jill Bryson 은 1977년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에서 처음 만나서 펑크와 뉴웨이브에 대한 공통된 애정을 확인하였다. 이들은 Orange Juice 의 James Kirk와 친구가 되었는데 그는 이 둘에게 그룹을 결성하도록 격려했다.

1981년 이들은 전설적인 Postcard 레코드사의 팬진의 이름을 따와서 Strawberry Switchblade 라는 이름의 그룹을 결성하였다. 밴드는 당초에는 네 명의 멤버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다른 두 소녀는 그룹을 떠났다. Strawberry Switchblade 는 Orange Juice의 오프닝을 맡아오다 Postcard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었다.

첫 싱글 “Trees and Flowers” 는 여러 아티스트의 도움으로 제작되었는데 그들의 팬이었던 Echo & the Bunnymen 의 매니저 Bill Drummond 의 도움이 컸다. 그는 Ian McCulloch 에게 앨범 제작비를 대주도록 설득했다. 이 결과 Aztec Camera 의 Roddy Frame 이 키타 연주를 맡아준 “Trees and Flowers” 는 1983년 7월 발매되었고 약 1만 카피가 팔렸다. Strawberry Switchblade 는 BBC 의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연주하며 점차 메인스트림의 주목을 받았고 Drummond 는 그들이 Warner Bors. 와 계약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들의 다음 싱글인 “Since Yesterday” 는 1984년 영국 차트 5위까지 올라갔다. 이듬해인 1985년 이 싱글 등이 담긴 데뷔앨범 Strawberry Switchblade가 발매되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인기는 영국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마저도 “Since Yesterday” 이후에는 여의치 않았는데 이어지는 싱글 “Let Her Go” 와 “Who Knows What Love Is?” 는 영국에서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오히려 필리핀 등지에서는 인기를 얻었다). 이후 밴드는 Dolly Parton 의 “Jolene” 의 커버버전을 내놓았다.

밴드는 1986년 해산하였다. McDowall 은 Nurse With Wound 와 같은 다양한 실험적인 밴드와 함께 작업하였다. 이후 컬트팬들의 요청에 따라 90년대 초반 일본에서 그들의 유일한 앨범이 CD로 발매되었고 1999년에는 이전의 앨범과 미발표곡을 모은 Since Yesterday 가 발매되었다.

디스코그래피
1985 Strawberry Switchblade (Korova)
1999 Since Yesterday (Wea Internatio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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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Rose McDow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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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anglers, The

The Stranglers (band).JPG
The Stranglers (band)” by Robman94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1975년 결성된 The Stranglers는 비록 Punk Band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그들을 Sex Pistols와 같은 “성난 젊은이들”로 함께 간주하는 방식은 다소 무리가 있다(실제 나이들도 꽤 많았던 듯 하다). 왜냐하면 이들의 재기넘치는 음악과 아이디어는 일반적인(?) 펑크와는 사뭇 다른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무대에서의 그들의 과격한 행동 – 무대밖에서도 그리 얌전하지는 않았는데 그들은 종종 마약복용, 성차별적인 언행, 연행 등으로 헤드라인을 장식하기도 했다 – 과 Patti Smith와 공연했던 이력으로 인해서,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의 음악을 분류할만한 마땅한 카테고리도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항상 펑크라는 딱지가 붙어다녔다. 어쨋든 펑크라는 이름이 The Stranglers에게 그리 손해나는 일은 아니었다.

어찌 됐든 그들의 음악적 지형은 무척 다양했는데 락앤롤의 클래식을 충실히 재현하기도 하고, 또는 꿈꾸는 듯한 싸운드로 New Romantics의 영역에 도전하기도 한다. 그들의 1982년 히트작 Golden Brown이 그들의 이러한 Dreamy한 싸운드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처음 두앨범 IV Rattus Norvegicus과 No More Heroes는 도시의 어둠과 우울함, 그리고 편집증이 뒤섞인 키타위주의 곡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검은색 의상, 무뚝뚝한 표정, 청중들에 대한 무례한 태도로 일관했던 이들은 또한 이 앨범에서 여자는 쎅쓰할때나 필요하다는 그들의 지론을 London Lady나 Bring on the Nubiles와 같은 곡들에서 부르짖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그당시 Sex Pistols, Damned, The Clash 등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분노와는 다른 그 어떤 것이었기 때문에 평론가들 역시 그들에 대한 평가에서 상당히 주저하는 입장이었다. 결론적으로 앨범이 계속 발매될때마다 그들은 점점 더 이 펑크 무부먼트에서 멀어져갔다.

1978년 발표한 Black and White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데 실패하자 A&M은 그들을 버렸다. 1982년 그룹은 Epic과 손을 잡았고 곧 이들은 The Kinks의 All Day and All of the Night나 The Mysterians 의 96 Tears와 같은 락클래식을 커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됨으로써 그들의 거칠고 우울한 초기의 싸운드적인 특징은 팝적인 냄새가 물씬한 뉴웨이브적인 싸운드로 변해갔다.

디스코그래피

1977 Rattus Norvegicus A&M
1977 No More Heroes A&M
1978 Black & White A&M
1979 The Raven United Artists
1980 Stranglers IV IRS
1981 The Meninblack Liberty
1981 La Folie Liberty
1983 Feline Epic
1984 Aural Sculpture Epic
1987 Dreamtime Epic
1990 10 Epic
1993 Stranglers in the Night Viceroy
1995 About Time When?
1997 Written in Red When
1998 Coup de Grace Festi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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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one Ro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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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ne Roses-17-07-2012 Milan” by Alfio66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결성 : 1985년 영국 맨처스터
해체 : 1996년(최근 재결성)
멤버 : Peter Garner, Ian Brown, Mani, Reni, John Squire, Aziz Ibrahim, Robert Maddox, Andy Couzens

80년대 댄스비트에 대한 이해와 함께 60년대 스타일의 기타팝이 맛물려 스톤로우지즈는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영국 기타팝 씬을 정의하였다. 데뷰앨범은 맨체스터사운드의 시조가 되어 영국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1989년 계속해서 비슷한 맨체스터 사운들르 추구하는 the Charantas(U.K), Inspral Carpets와 the Happy Mondays와 같은 밴드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2집앨범을 내기까지 5년이나 기다려야 했고 2집 발매후 1년 반정도의 기간동안에 그들은 서서히 그 빛을 잃었다.

스톤로우지즈는 1985년에 학교룸메이트인 John Squire(기타)와 Ian Brown(보컬)이 만든 맨체스터에 기반을 둔 밴드 English Rose로부터 탄생하게 된다. 스톤로우지즈가 정식으로 만들어진 것은 Squire와 Brown이 드러머 Reni, 기타리스트 Andy Couzens 그리고 베이시스트 Pete Garner를 영입함으로 이루어진다. 그룹은 맨체스터 근교 창고에서 연습을 사직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룹은 전통적인 브리티쉬 60년대 기타 팝과 고쓰(Goth)록 냄새가나는 헤비메탈사이를 크로스어버시키기 시작한다. 1987년 Gouzens가 그룹을 떠나고 Ganer가 대신 그 자릴 대신했고 Mani가 뒤에 들어와 다시 기타를 맏는다. 그들의 첫번째 싱글 을 녹음하고 Thin Lne레코드의 주목을 받아 발매하게 된다. 87년이 끝나갈때 스톤로우지즈는 두 번째 싱글 을 발매하게 되었고 이 싱글은 기타팝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그룹이 앞으로 나가야할 방향을 설정해 주게 된다. 88년 가을에 밴드는 Silverstone레코드와 계약하게 되어 쉬운 곡조의 네오싸이키델릭 기타팝을 정의하게 되는 싱글 을 발매하게 된다.

발매후 얼마지나지 않아 본격적인 스톤로우지즈 시대를 열었다. 1989년 초 그룹은 맨체스터에서 런던까지의 공연이 모두 매진되는 성황을 이룬다. 5월달에 스톤로우지즈는 역사적인 앨범인 그들의 셀프타이틀 데뷰앨범을 내었고 그것은 60년대 기타 사운드의 편애성 뿐만아니라 컨템포러리 애시드 하우스의 리드믹한 감수성까지 보여 주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맹렬한 비난을 받게 된지만 곧 영국에서 그들과 유사한 사운드로 묶을 수 있는 밴드들이 나타나게 된다. 여름이 끝나기 전 스톤로우지즈는 록 앤 록과 애시드 하우스 문화를 융합한 맨체스터 사운드를 이끌게 된다. 세번째 싱글 는 처음으로 여름이 끝나기 전에 Top40에 오른다. 그리고 11월에 가 8위에 링크 된다. 를 발매하기전 그들은 Widnes의 Spike Island에서 자신들의 페스티발을 만든다. 그 콘서트에는 3만명 이상이 모여들었고 향후 5년동안 영국에서 그들의 마지막 콘서트가 될 것이란 것을 알게 해 준다. Spike Island이후 스톤로우지즈는 Silverstone 레코드와 법적 싸움에 말려들게 된다.

그룹은 Silverstone레이블을 떠나기 원했으나 레코드사는 그룹이 어떠한 앨범발매와 활동을 막는 법적 소송을 제기한다. 다음 2년 동안 밴드는 레코드사와 싸우는 동안 2집준비를 하게 되나 법정문제 때문에 어떠한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는 동안 몇 몇 메이저 레이블은 비밀스럽게 밴드와 협상한다. 1991년 3월에 소송은 끝이 나게되고 두 달후 그들은 Silverstone에 대한 소송에서 완전이 이겨 케펜 레코드와 계약을 한다. 다음 3년동안 스톤로우지즈는 미완성 태잎을 남겨둔채 2집작업을 드디게 진행시킨다. 이 기간 동안 그룹은 언론에게 노출되는 것을 자제하고 축구를 관전하는 것 이외의 어떠한 외부 활동을 하지 않음으로 신비감을 유지하게 된다. 마침내 1994년 봄, 그룹은 앨범을 완성시키고 게펜은 스톤로우지즈의 2집 SECOND COMING을 가을에 발매한다. 밴드의 컴백 싱글 는 11월 초에 Radio One에서 처음 들려진다. 이 싱글은 냉담한 반응을 얻었고 Top10에 몇 주 밖에 머무르지 못한다. 스톤로우지즈는 1995년 초 앨범홍보를 위한 국제적인 튜어를 계획하게 되나 막판에 몇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튜어떠나기 전에 Reni가 탈퇴함으로 드러머없이 튜어를 하게 될 상황이었다. 그래서 Rebel MC에서 연주했던적이 있던 Robbie Maddix를 영입하고 영입후에 또 다시 John Squire가 오토바이사고로 쇄골이 부서지는 사고를 당해 이것을 마무리 짓고 난 다음에야 짧은 일정으로 미국튜어를 할 수 있었다. Squire의 사고로 25회 Glastonbury 페스티발에 헤더라이너로 초청된 것을 취소 할 수 밖에 없었고 이것은 영국에서 데뷰앨범 발매후 5년동안의 첫 콘서트가 될뻔 했다. Squire가 회복할때 쯤에는 이미 스톤로우지즈의 인기는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동료들, the Charantas(U.K), the Happy Mondays를 만들었던 보컬리스트 Shaun ryder등은 예상치 않았던 성공적인 컴백에 존경의 표시를 한다.

스톤로우지즈는 1995년이 끝나갈 즈음 1990년 이후로 처음있는 영국튜어를 하기전에 키보디스트를 영입하고 떠난다. 96년 봄에 John Squire는 좀더 활발한 밴드활동을 위해 새 밴드를 결성하고 스톤로우지즈를 탈퇴할 것을 알린다. 스톤로우지즈는 새로운 기타리스트를 영입해 그들의 의지를 불태우나 그해 10월에 밴드를 해체 시킨다. Squire는 새밴드 Seahorses는 97년 6월 데뷰앨범을 발표했고 그러는 동안 Brown은 솔로 데뷰앨범 UNFINISHED MONKEY BUSINESS를 98년 초에 발표하게 된다. 스톤로우지즈는 맨체스터 사운드의 이정표를 세운 역사적인 밴드이며 그들의 데뷰음반은 영국역사상 가중 뛰어나 데뷰음반으로 칭송받고 있다.

The Gate Of Rock(http://my.netian.com/~clubnono)에서 펌

디스코그래피
1989 The Stone Roses[US]
1989 Stone Roses [UK]
1994 Second Coming

링크
www.thestoneroses.co.uk

Squee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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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ueeze live” by Erik OganFlickr: Squeeze.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런던의 남동부 지역인 Deptford에서 1974년 결성된 Squeeze는 70년대말 펑크의 영향을 받은 뉴웨이브 밴드중 가장 눈에 띄는 밴드였다. 창단 멤버인 Chris Difford(guitar/lead vocals), Glen Tilbrook(guitar/vocals), Jullian ‘Jools’ Holland(keyboards)는 그룹의 이름을 Velvet Underground의 졸작 앨범에서 빌어왔는데 이후 Harry Kakoulli(bass)와 원래 드러머였던 Paul Gunn과 교체된 세션 드러머 Gilson Lavis를 추가로 맞아들여 완전한 라인업을 갖추고 1977년, Ep pocket Of Three를 Deptford Fun City 레이블을 통해 발표하는데 프로듀서는 Velvet Underground의 멤버였던 John Cale이었다. 앨범 대부분의 곡은 Chris Difford와 Glen Tilbrook이 작곡했으며 이 Ep로 인해 그룹은 A&M과 계약을 맺고 1978년, “Take Me I’m Yours”로 UK Top20을 기록한다.데뷔앨범에서는 “Bang Bang”과 “Goodbye Girl”이 마이너 히트를 기록하고 1979년에는 “Cool For Cats”와 “Up The Junction”이 2위를 기록한다. Difford가 쓴 가사는 비극적인 유머로 남부 런던의 삶을 잘 포착해 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밴드는 1980년 앨범 argy Bargy로 본격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하는데 “Another Nail In My Heart”(UK Top 20), “Pulling Mussels(From A Shell)”이 히트를 기록한다. 펑크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는 호소력 있는 밴드의 곡들은 Ray Davies의 마지막 앨범 이후로 가장 ‘kitschen sink'(영국 속어로 보통 음악이나 연극에서 극단적인 사실주의적인 표현을 말한다)적인 표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앨범부터는 그룹의 새로운 베이시스트 John Bentley가 연주하고 있었다.1981년에는 Holland가 자신의 밴드인 Jools Holland And The Millionaires(부기우기 피아노 스타일의 밴드)를 결성하기 위해 그룹을 떠나고, 밴드는 영국의 TV쇼인 the Tube에 초대되기도 한다. 그를 대신해서 피아니스트이자 싱어인 Paul Carrack이 가입하는데 그는 이전에 퍼브록 밴드인 Ace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Elvis Costello에 의해 프로듀스된 앨범 east Side Story는 Carrack의 작곡 참여와 함께 “Tempted”, “Labelled With Love”등의 UK Top 5 히트곡을 남기며 밴드의 최고 히트 앨범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Carrack은 곧 Carlene Carter의 그룹에 가담하기 위해 그룹을 떠나고 그의 자리는 Sinceros라는 밴드에 있었던 Don Snow로 교체된다. 이어 발표된 앨범 sweet From A Stranger는 히트곡인 “Black Coffee In Bed”가 수록되어 잇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불행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뉴욕의 Madison Square Garden에서는 공연표가 모두 매진되며 최고의 인기를 누리지만 Difford와 Tilbrook은 그룹의 해산을 선언하고 듀오로 활동을 재개하며 1984년 새로운 앨범을 발표한다.

그러나 다음해 Lavis와 다시 돌아온 Holland, 새로운 베이스 연주자인 Kieth Wilkinson과 함께 그룹을 재결성한다.cosi Fan Tutti Frutti는 히트곡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King George Street”, “I Learnt How To Pray” 그리고 Difford와 Holland의 공동작품인 “Heartbreaking World” 같은 좋은 곡들을 수록하고 잇었다. 1987년에는 6년만에 UK차트 상위권에 기록되는 곡들을 배출하는데 “Hourglass”는 16위를 기록하며 첫 US Top40을 기록한다. 이 곡은 15위까지 올랐으며 “853-5937″도 US Top 40을 기록했다. 동시에 발매된 앨범 babylon And On은 전 Soft Boys와 Robyn Hitchcock’s Egyptians의 멤버였던 Andy Metcalfe(horns/keyboards/moog)가 참여하기도 했다.

1989년, 앨범 frank의 발표 이후, 여성의 월경에 대한 남성의 입장을 가사로 쓴 “She Don’t Have To Shave”를 발표한다. Holland는 TV일에 종사하기 위해 다시 한번 그룹을 떠나고 그룹은 Matt Irving을 세컨드 키보디스트로 맞아들이며 라이브 앨범 a Round And A Bout를 Deptford Fun City 레이블을 통해 발표한다. 이후 밴드는 Warner Brothers와 새로운 계약을 맺고 꾸준한 작품활동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Chris Difford와 Glenn Tilbrook은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팀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되었다.Punk 77.com

디스코그래피
1978 U.K. Squeeze A&M
1979 Cool for Cats A&M
1980 Argybargy A&M
1981 East Side Story A&M
1982 Sweets from a Stranger A&M
1985 Cosi Fan Tutti Frutti A&M
1987 Babylon and On A&M
1989 Frank A&M
1990 A Round & A Bout (Live) IRS
1991 Play Reprise
1993 Some Fantastic Place [US] A&M
1995 Ridiculous Ark 21
1998 Domino Valley
1999 Live at Royal Albert Hall Poly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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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fficial Site

Springsteen, Bruce

Bruce Springsteen - Roskilde Festival 2012.jpg
Bruce Springsteen – Roskilde Festival 2012” by Bill Ebbesen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살아있는 위대한 로큰롤 스타로 가죽잠바에 청바지 차림의 반항아적인 모습, 도시의 아웃사이더 같은 소박한 가사, 절규하는 듯한 음악 스타일로 전 세계적으로 천만 장이 넘는 음반 판매고를 기록하고 마니아들을 형성하며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최고의 인기를 누린 록 뮤지션. 73년 첫 앨범을 발표하며 밥 딜런에 비유 74년 Thunder Road 로 골드 획득. 78년 역작 [Darkness on the Edge of Town] 발표. 80년에 [The River]로 플래티넘 기록. 84년 팝적인 전환을 보여 [Born in the U.S.A.] 발표. 93년 영화 [Philadelphia]의 삽입곡으로 ‘Streets of Philadelphia’를 발표하며 그래미와 아카데미상 석권. 최근 비록 예전만큼의 거칠고 터질 듯한 헤비 록적인 음악을 구사하지는 않지만, 25년이 넘는 꾸준한 음악 생활을 통해 더욱더 완숙한 스타일로 록과 포크를 섭렵하며 인생과 사랑에 관한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디스코그래피
1973 Greetings from Asbury Park NJ Columbia
1973 The Wild, the Innocent and the E Street… Columbia
1975 Born to Run Columbia
1978 Darkness on the Edge of Town Columbia
1980 The River Columbia
1982 Nebraska Columbia
1984 Born in the U.S.A. Columbia
1986 Live 1975-1985 Columbia
1987 Tunnel of Love Columbia
1992 Human Touch Columbia
1992 Lucky Town Columbia
1992 Plugged: In Concert [live] Alx
1993 Lucky Town Live Alex
1993 In Concert/MTV Plugged [live] Columbia
1995 The Ghost of Tom Joad Columbia
2001 Live in New York City Sony

Springfield, Rick

Rick Springfield(본명 Richard Springthorpe)는 1949년 8월 23일 호주 시드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군인이었기에 호주 등지와 영국 등으로 자주 주거지를 옮겼고 이러한 환경이 Rick 의 어린 시절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친구사귀기의 어려움을 책과 음악에서 풀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고등학교 시절 밴드를 조직하였는데 50년대 리바이벌 그룹 Rock House 였다. 1968년에는 Zoot 라는 밴드로 옮겼고 1971년까지 호주에서 가장 인기있는 그룹이었다.

이후 Zoot 는 해체하고 Rick 은 미국에서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 호주에서 히트시킨 Speak To The Sky 를 다시 레코딩했는데 이 곡은 미국에서 차트 14위까지 오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레코드사의 경영상의 어려움으로 인해 Rick 은 1976년 이후 앨범을 내지 못하게 되었다.

한편 Rick 에게 다행스럽게도 연기를 할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그는 1980년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계약을 맺고 몇몇 TV 프로그램에 출연한다. 짧은 연기생활 이후 그는 다시 RCA 와 계약을 맺고 앨범을 준비하게 된다. 1981년 그는 제네럴하스피탈에서 의사 Noah Drake 의 역을 따내게 된다. 그의 인기는 수직상승했다.

같은 해에 앨범 Working Class Dog 을 내놓았고 큰 인기를 얻었다. 이 앨범에서 Jessie’s Girl 이 큰 인기를 얻게 된다. 연이어 1982년 내놓은 Success Hasn’t Spoiled Me Yet 에서는 Don’t Talk To Stranger가 인기를 끌었다. 이후 내놓은 앨범들은 팬들, 특히 십대소녀들의 환호 속에 판매호조를 벌였고 그는 80년대를 대표하는 꽃미남 락싱어로 등극하게 된다.

이렇듯 Rick Springfield 는 척박한 땅 호주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메인스트림에 진입한 여러 헐리웃스타의 선봉에 서서 80년대를 휘젓고 다녔다. 비록 그가 천성적인 미모 때문에 십대소녀들에게 특히 인기를 얻긴 했지만 그를 단순히 틴아이돌로 치부해서는 안된다. 그의 음악은 분명히 파워팝의 매력을 진지하게 탐구하였고 팬들은 그러한 그의 성실성에 앨범구입으로 답례하였던 것이다.

디스코그래피
1969 Just Zoot Columbia
1970 Zoot Out Columbia
1972 Beginnings Capitol
1974 Comic Book Heroes Razor & Tie
1974 Mission Magic Wizard
1976 Wait for Night Chelsea
1981 Working Class Dog RCA
1982 Success Hasn’t Spoiled Me Yet RCA
1983 Living in Oz RCA
1984 Beautiful Feelings Mercury
1984 Hard to Hold Razor & Tie
1985 Tao RCA
1988 Rock of Life RCA
1999 Karma Intersound
2001 Greatest Hits…Alive Hip-O
2001 Speak To the Sky [Laserlight] LaserLight
2004 Shock/Denial/Anger/Acceptance Go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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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k Springfield Fan Club – Online
Jessie’s Girl 뮤직비디오 보기

Spinal Tap

80년대 후반을 산 사람이라도 Spinal Tap이라는 그룹을 그리 많이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실제로 존재했던 그룹이 아니라 가상의 그룹이기 때문이다. Spinal Tap은 1984년 제작된 Rob Reiner의 가짜 다큐멘타리 This is Spinal Tap에 등장하는 그룹이다.

이 영화에 출연한 이들은 Michael McKean, Christopher Guest, 그리고 Harry Shearer였고 70년대 인기를 끌었다가 80년대 들어 인기를 잃은 헤비메틀 밴드의 역할을 멋지게 해냈다. 영화는 꽤 인기를 끌었고 출연진들은 사운드트랙을 위해 실제로 연주를 하기도 해서 사운드트랙이 큰 인기를 끌었다.

실제로 사운드트랙은 80년대의 록앤롤을 잘 구현해내고 있기 때문에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은 아마도 그들이 실존하는 그룹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여하튼 이들은 1984년에 낸 사운드트랙의 인기를 얻은 후 1992년에 Break Like the Wind라는 앨범을 내놓았으나 큰 호응은 얻지 못했다.

디스코그래피
1984 This Is Spinal Tap Polygram
1992 Break Like the Wind M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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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dau Ballet

Spandau Ballet in Concert, Liverpool Echo Arena.jpg
Spandau Ballet in Concert, Liverpool Echo Arena” by Andrew Hurley – originally posted to Flickr as Spandau Ballet in Concert, Liverpool Echo Arena.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스팬다우 발레(Spandau Ballet)는 1979년 영국 런던에서 결성된 뉴 로맨틱(New Romantic) 그룹으로 80년대에 불어닥친 뉴 웨이브(New Wave) 사조 안에서 가장 성공한 밴드 중 하나였다. 록시 뮤직(Roxy Music)의 영향을 받은 소울, 팝, 댄스가 어우러진 사운드를 구사하는 이들은 신디사이저 위주의 댄스 팝으로 확실한 성공을 거두었다.기타리스트 개리 켐프(Gary Kemp)와 베이시스트 마틴 켐프(Martin Kemp) 형제를 주축으로 보컬인 토니 해들리(Tony Hadley), 리듬 기타와 색소폰, 퍼커션을 두루 담당한 스티브 노먼(Steve Norman), 드럼의 존 키블(John Keeble)의 5인조로 출발, 학교 친구인 스티브 대거(Steve Dagger)를 매니저로 두고 오랜 기간 팀웍을 자랑했다.

초창기에는 언론매체로부터 뉴 로맨틱스(New Romantics)로 일컬어지게 된 직접적인 원인인 과장되고 패셔너블한 의상과 분장을 한 채 런던의 나이트 클럽에서부터 활동을 시작되었다. 이들은 아일랜드 레코드(Island Records)의 계약 제안을 거절하고 자신들이 직접 리포메이션(Reformation)이라는 레이블을 설립, 크리살리스(Chrysalis)와 배급 계약을 체결하는 수완을 보여주기도 했다.80년 말 발표한 첫 싱글 ‘To Cut a Long Story Short’와 81년 초 ‘The Freeze, Musclebound’ 등의 싱글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가운데 이들은 81년 데뷔 앨범인 [Journey to Glory]를 발표한다. 이 앨범에서는 데이빗 보위(David Bowie)와 브라이언 페리(Bryan Ferry)로부터 받은 영향을 확인할 수 있는데, 다양한 리듬과 멜로디, 하모니를 주도하는 신디사이저 사운드에 보컬이 어우러진 사운드를 들려주었다.그 해 여름 펑키(Funky)하고 소울풀한 싱글 ‘Chant No.1(I Dont Need This Pressure on)’이 발표되었으며, 연이어 ‘Instinction’, ‘Lifetime’과 같은 히트곡들이 탄생되었다.

2집인 [Diamond](82)는 리듬 위주의 흑인음악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는 펑키(Funky)하면서도 동양적인 멜로디 위주의 사운드를 들려주었으나 1집과 비슷한 스타일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3집 [True](83)는 70년대 후반 록시 뮤직의 앨범과 같이 정교하고 복잡하면서도 미묘한 백인 소울(Soul) 계열이었다. 스티브 노먼의 다재다능함을 확인할 수 있는 앨범으로, 그의 색소폰 연주도 감상할 수 있다. 타이틀 곡인 ‘True’는 당시 데이빗 보위의 ‘Lets Dance’를 누르고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하면서 미국 시장 진출의 교두보가 되었는데, 몇 개월 뒤 미국 차트에서 싱글 4위, 앨범은 19위에 오르는 히트를 기록했다. 마치 영화 [007]의 주제가를 연상시키는 곡 ‘Gold’는 당시 L.A 올림픽의 찬가처럼 사용되면서 영국과 미국 모두에서 인기를 얻었다.

이 앨범으로 이들의 음악적 방향이 설정되기는 하였으나, 3번째 싱글인 ‘Communication’이 미국에서 실패하면서 이들의 상업적 성공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4집 [Parade](84)에는 가사 면에서 게리 켐프의 성숙함과 강한 사회의식을 엿볼 수 있는 ‘Only When You Leave’가 수록되어 있긴 하였으나, 앨범 자체는 미국 시장에서 실패하였으며 영국에서의 성공도 전작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에서 그치고 말았다. 85년 미국에서의 미비한 홍보를 이유로 크리살리스에 소송을 제기, 승소 후 소속사 교체라는 결과는 얻었으나 결국 이들의 경력에 오점을 남긴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다음 해에 현 소니뮤직(Sony Music)을 통해 5집인 [Through the Barricades](86)를 발표하는데, 인종차별 정책에 반대하여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비발매를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하는 등 사회·정치적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기도 하였다. 타이틀 곡은 북아일랜드의 정치적 상황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10위권 내에 진입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다음 곡인 ‘How Many Lies’는 최후의 미국 차트 진입곡이 되고 말았다.89년 6집인 [Heart Like a Sky]를 발표하고 이듬해인 90년에는 결국 해체하고 말았다.

게리와 마틴 형제는 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배우 활동을 시작하여 [보디가드] 등 몇몇의 영화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토니 해들리는 솔로 활동을 하며 93년 [State of Play]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토니, 존, 스티브 세 사람이 재결합하여 새 앨범을 구상 중이라는 소식도 들려오고 있다. 이들과 견줄 만큼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밴드는 듀란 듀란(Duran Duran)이 유일하며, 스팬도 발레는 최초의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밴드로서 비평가들로부터 낙천주의 감각과 스타일을 잘 결합시켜 유쾌한 댄스 음악을 창조한 밴드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changgo.com

스튜디오앨범
1981 Journeys to Glory Chrysalis
1982 Diamond Chrysalis
1983 True Chrysalis
1984 Parade Chrysalis
1986 Through the Barricades Epic
1989 Heart Like a Sky Reformation
2000 Musclebound Disky
2009 Once More

링크
www.spandauballet.com
Unofficial Page

Sonic Yo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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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9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국내에서 소닉 유스의 위상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너바나의 말릴 수 없는 신드롬과 얼터너티브의 교주, 커트 코베인의 자살사건(그렇다! 이것은 분명히 사건이었다.) 이후에 커트가 살아 생전에 흠모하였다고 하여 뒤늦게 재조명 받기 시작한 그룹이 바로 이들이었으니까…. 광기 번뜩이던 음악을 표출하던 80년대 소닉 유스가 빚어낸 아름다운 소음들은 평론가들과 극소수의 마니아들을 제외하고는 국내의 음악팬들에게 서러우리만큼 홀대를 받아야 했다. 아무래도 아름다운 멜로디 지상주의의 음악을 연주하는 뮤지션들을 편애하고 그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는 국내의 록팬들에게 이들의 음악은 어려운 부류에 속하거나 귀가 얇은 인간들은 이해하기 힘든 전위예술가들의 퍼포먼스나 해프닝 정도로 치부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소닉 유스의 역사는 뉴욕의 아방가르드씬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인 1981년부터 전개된다. 튜스턴 무어(Thurston Moore, 기타/보컬)와 그룹의 홍일점 멤버 킴 고든(Kim Gordon, 베이시/보컬)의 혼성듀오로 출발했지만, 후에 리 라날도(Lee Ranaldo, 기타/보컬)와 리처드 에드슨(Richard Edson, 드럼)이 합류하면서 특이하게도 세 명의 멤버가 보컬을 번갈아 맡는 트리플 보컬시스템의 4인조로 라인업을 완성한다. 이듬해 소닉 유스 앨범의 스타트가 되는 EP [Sonic Youth]를 공개한 이들은 같은 해 말, 새로운 드러머 밥 버트(Bob Bert)를 맞이하여 이스트 코스트를 도는 투어를 갖는다. 이 투어가 끝나갈 무렵 멤버교체가 이루어지는데 새로 가입한 드러머 밥이 연주스타일의 차이로 탈퇴한 것이다.

소닉 유쓰는 1983년, 8트랙 스튜디오에서 작업한 데뷔앨범 [Confusion Is Sex]를 공개한다. 엄밀히 말하면 편집증적인 노이즈와 청자에게 최면을 걸 듯 반복되는 베이스라인, 그리고 정형화된 비트라고 말하기 힘든 드러밍으로 일관된 이 앨범은 중기 이후의 소닉 유스 사운드에 길들여진 팬들에게 좀처럼 친숙해지기 힘든 섬짓한 ‘물건’이었을 것이다. 이 앨범을 통해 언더그라운드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을 즈음, 밴드에서 낙오되었던 밥 버트는 이들의 유럽투어를 위해 다시 팀에 복귀하게 되었고 라인업을 안정시킨 소닉 유스는 영국의 관객들에게 첫 선을 보이게 되는데, ‘Blast First’레이블의 설립자 폴 스미쓰(Paul Smith)는 공연을 접하고는 이들의 파격적인 사운드에 깊은 관심을 표했다. 이것을 계기로 소닉 유쓰의 두 번째 앨범 [Bad Moon Rising]이 폴의 레이블을 통해 발매되기에 이른다.

블랙메틀을 뺨칠만한 악마적인 분위기의 암울한 노이즈로 가득했던 이 앨범에는 연쇄 살인마 찰스 맨슨에게 경의를 표한 작품이 들어 있어 음악외적인 화재를 모으기도 했다. 1985년 중반에 탈퇴와 재가입을 번갈아 하던 말썽꾸러기 드러머 밥 버트가 또 다시 팀을 떠났고 그의 후임자는 현재까지 소닉 유스의 드럼파트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스티브 셸리(Steve Shelley)였다. 머지 않아 이들은 블랙 플래그(Black Flag)의 레이블인 SST와 새로운 계약을 성사시키고 1986년 앨범 [Evol](영단어 ‘Love’를 거꾸로 한 제목임)을 발표한다. 자기 정체성 확립과 성숙지향의 사운드를 담아낸 이 앨범은 정치적인 메시지와 고차원적인 반어법으로 점철되었고 이러한 성향은 다음작 [Sister]에 까지 계승된다.

아시아에 위치한 한 작은 분단국가에서 올림픽이 개최된 역사적인 해였던 1988년으로 접어들어 소닉 유스는 이들 최고의 역작으로 평가받는 [Daydream Nation]을 공개하여 명성을 떨치는데, 본작은 빌보드 앨범차트 45위에 랭크되었으며, 유력지 [롤링스톤]으로부터 ’80년대 최고의 앨범 중 하나’라는 찬사를 얻게 된다.(혹시 소닉 유스의 팬임을 자청하면서도 이 앨범을 접해보지 못한 독자가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들어볼 것을 당부한다.)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격동의 시대였던 90년대로 접어들면서도 이들은 여전한 성공/인기 가도를 달리게 된다. 오랜 언더그라운드생활을 청산하고 새롭게 ‘게펜(Geffen)’과 손잡아 계약서에 사인을 한 후 [Goo](1990)를 비롯해서 그런지에 영향받은 듯 한 사운드를 담아내었던 [Dirty](1992), 이들의 디스코그래피 사상 가장 정적인 작품집으로 불릴만한 [Experimental Jet Set, Trash & No Star](1994), 세탁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는 소년을 자켓커버로 인해 혹자에게는 일명 ‘세탁기앨범’으로 불렸던 [Washing Machine](1995) 등이 오버에서 연이은 성공가도를 달리게 되면서 뉴욕의 클럽씬에서 활동하던 일개 인디밴드에서 전세계적인 록의 흐름을 주도해나가는 오피니언리더로서의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것이다. 1998년, 90년대 판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을 담고 있었던 [A Thousand Leaves]를 공개하여 변함없는 명성을 입증시켰는데 이 음반은 밴드소유의 스튜디오에서 전체가 레코딩된 그들 최초의 작품이기도 했다

Fight Generation +++

디스코그래피
1985 Bad Moon Rising (DGC)
1986 Made in USA (Rhino)
1986 EVOL (DGC)
1987 Sister (DGC)
1988 Daydream Nation (DGC)
1989 Mini Plot (SST)
1990 Goo (DGC)
1992 Dirty (DGC)
1994 Experimental Jet Set, Trash & No Star (DGC)
1995 Washing Machine (DGC)
1995 Live in Holland (Sonic Death)
1996 Live in Texas (Tec Tones)
1998 A Thousand Leaves (DGC)
2000 NYC Ghosts & Flowers (Geffen)

Soft Cell

Tainted Love라는 경이적인 히트곡을 기록한 Soft Cell은 1979년 결성되었다. 나른하면서도 다소 퇴폐적인 목소리의 소유자 Marc Almond와 신서사이저 및 퍼커션 주자인 Dave Ball이 그 멤버였다.

결성 직후 북부 영국의 소울 밴드에서 기량을 닦던 듀오의 첫 싱글 Memorabilia가 발표된 것은 1981년 초였다. 그러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두 번째 싱글 Tainted Love와 그해 연말의 Bedsitter를 통해서 였다. 이들 곡5을 수록한 데뷔 앨범 Non Stop Erotic Cabaret역시 챠트 상위권에 오르면서 성공적인 데뷔를 장식할 수 있었고, 1982년 1월에 싱글 커트된 Say Hello Wave Goodbye를 시작으로 Torch, Non Stop Ecstatic Dancing, Numbers로 이어졌다. 데뷔 앨범을 재편집하여 2집으로 내놓은 EP가 얻은 성공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Tainted Love가 얻은 성공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 곡은 흑인 싱어 Gloria Jones의 60년대 히트곡을 The Four Freshman의 창단 멤버이자 프로듀서인 Ed Cobb이 편곡하여 듀오가 리바이벌시킨 것으로서 빌보드 팝싱글 챠트에 42주 연속으로 머무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발표한 두 번째 앨범 The Arts Of Falling Apart로 음악적 성숙과 함께 지미 헨드릭스의 곡을 독창적으로 리메이크하는 재능을 보여주기도 한 소프트 셀은 이 작품을 끝으로 사실상 해체하게 되는데 80년대 후반에 리더인 데이브 볼(Dave Ball)만이 그리드The Grid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고 마크알몬드는 꾸준한 솔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디스코그래피
1981 Non-Stop Erotic Cabaret [Sire]
1982 Non-Stop Ecstatic Dancing [Sire]
1983 The Art of Falling Apart [Sire]
1984 This Last Night in Sodom [Sire]
1994 Down in the Subway [Alex]
1998 Non-Stop Erotic Cabaret [Germany] [Polygram]
2002 Non-Stop Erotic Cabaret [Bonus Tracks] [Universal]

링크
팬페이지
마크알몬드 Official S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