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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킹헤즈가 그 집을 태워버렸다. 서로 각자가 아니라

이 팬의 이름은 스파이크리다.

“역사상 최고의 콘서트 필름입니다!” 토론토 인터내셔널페스티벌에서 토킹헤즈의 새롭게 리마스터된 콘서트 다큐멘터리 스탑메이킹센스의 시사회에서 이 베테랑 감독이 선언했다. 리는 그룹이 이십여년만에 처음으로 대중에 전체 밴드의 모습으로 나타난 영상회와 질의응답 시간의 사회를 맡아줄 것을 요청받았다.

몇년 동안 팬들은 멤버인 데이빗번, 티나웨이마우스, 크리스프란츠, 제리해리슨에게 재결성해줄 것을 애걸해왔다. 그러나 월요일의 이벤트는 이 락커들이 서로 한 방에 모일 수는 있기나 한 것인지에 대한 테스트였을 것이다. 번과의 마지막 만남이 “20여년 전”이었다는 프란츠는 그가 2020년 내놓은 생동감있는 회고록 리메인인러브에서 회고하길 번은 그룹의 공동작업에 대해 반복적으로 단독의 작곡인 것으로 간주했었고, 1991년 모두를 놀라게 하는 밴드의 해산을 주도했다. 그리고 나머지의 바람과 반해서 EMI의 카탈로그에 완전한 소유권에 서명해버렸다. 한편 웨이마우스는 이전에 번을 “트럼프주의자”이자 “거래적”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TIFF에서 잠복해있던 드라마는 재빨리 잠재워졌다. 리의 사회 하에 상영 후의 인터뷰는 최대한 밝고 공손했다. “역사상 최고의 콘서트 필름입니다!” 그는 다시 선언해서 그룹이 그들의 음악과 영상의 유산을 축하며 미소짓게 만들었다.

“토킹헤즈는 너무나 뛰어난 밴드이고 우리가 라인업을 확장했을 때… 우리는 다른 차원으로 옮겨갔었습니다.” 프란츠가 말했다. “자화자찬해서 미안한데 우리 밴드 멤버가 오늘밤 다시 함께 한 것이 너무 좋아요.”

CBGB의 열기 속에서 구성된 토킹헤즈는 1970년대 뉴욕에서 협조적이고 매혹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운드에 집중하는 거부할 수 없이 매력적인 라이브 연주로 경력을 시작했다. 이는 그들을 보다 전통적인 가사-코러스-가사 위주의 동료 뮤지션과 차별화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특히 피어오브뮤직(1979)에서 종합적인 텍스쳐를 락에 결합하고 차기작 리메인인라잇(1980)과 스피킹인텅스(1983)에서는 아프리카의 그루브에 영감을 받은 복합적인 리듬을 만들어내는 등 스튜디오 마술에 능숙한 솜씨를 보여주었다. 토킹헤즈는 비록 2021년이 되어서야 평생공로상으로 처음 그래미를 받기는 했지만 드물게도 비평과 흥행 모두에서 성공적이었다.

1984년 발표한 스탑메이킹센스는 그들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라이브 공연을 소중하게 담아냈다. 이 획기적인 필름은 당신을 토킹헤즈가 스피킹인텅스 투어로 3일 밤을 연주하는 로스엔젤레스의 판타지스 극장으로 데려간다. 당시 그룹은 쇼에서 라인업을 서서히 확장하면서 보다 풍부하게 실연하는 사운드나 장엄한 연출법 등을 선보였다.

당신이 스탑메이킹센스를 처음 접했든 반복적으로 시청을 했든 (해리슨이 감리를 맡은) 리마스트된 사운드를 포함한 복각판은 당신을 즉시 그들의 연주장으로 데려간다. IMAX에서 극단적으로 친밀한 경험을 맛볼 수 있다.(“그는 너무 땀이 흥건하네요!” 번의 근접 샷에서 내 이웃 하나가 말했다.) 극장의 팬들은 “버닝다운더하우스”에 원 모양으로 회전했고 “원스인어라이프타임”에서는 리는 좌석을 차고 일어난 이들에 합류했다. “라이프디어링워타임”의 연주 동안 번의 모습에에는 다시 한번 계단에서 달리기가 시작되었다.

“지금 이걸 봤을 때 난 이게 극장에 오는 이유야!라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번이 “내 랩탑으로 보는 것과 다르다”라고 농담하기 전에 이야기했다.

상영회 이후 리는 동기부여 감독 역을 맡았다. “모두 환영해주세요. 전세계적으로 기록을 세울 예정입니다.” 토킹헤즈 101으로서 부분적으로 발매의 역할을 인지하고 있기에 리는 타임라인과 함께 1983년 어떻게 촬영했는지에서부터 밴드와 청중이 2023년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이르기까지 질의를 진행했다. 특별히 웨이마우스의 그의 베이스 스타일에 친밀감을 보이며 리는 그에게 이 필름에서 맘에 드는 연주가 무엇인지 물었다. “이봐요 스파이크” 그가 대답했다. “그건 마치 내 아이들 중 누구를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고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나 같아요.”

토킹헤즈의 발언이나 팬의 질문은 – 예를 들면 “완전 새로운 관객에게 이 상징적인 영화를 상영하니 어떤 느낌인가요?”와 같은 – 이 방안에 하나의 단어를 남겼는데 ‘사랑’이다. 리는 다시 강조했다. “사랑!” 리는 항상 같은 정서를 공유한 것만은 아닌 이들 밴드 구성원을 위한 치료의 힘이 있는 주문이라도 되는양 소리쳤다. “영원하다!” 그는 그들의 유산에 대한 확신감으로 반복했다. “풍부하고 세심한 사운드!” 그는 그룹이 기뻐할 정도로 강조하였다.

“이 필름이 힘을 유지하는 이유 중 하나로 당신은 스테이지 위에서 우리가 무척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해리슨의 말이다.

“제가 거기에 사랑이란 단어를 다시 넣어도 될까요?” 리가 물었다. “사랑! 사랑!”

“사랑과 즐거움, 그리고 청중이 ‘당신도 이 중 하나야’라고 말하고 있어요.” 해리슨이 이어나갔다.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당시의 놀라운 감정이 다시 떠오르곤 합니다.”

토킹헤즈는 리를 좀 더 자주 만나야 하고 이는 그들에게 좋은 일일 것이다.

게일블레커가 디자인한 아이코닉한 빅수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번은 일본에서 그의 친구와 저녁을 먹으면서 친구는 극장에서 동작과 부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실제 삶보다 크다고 이야기했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난 생각했는데 오~! 내 양복도 역시 커야겠구나.” 번이 말하자 폭소가 터졌다.

“오늘은 정말 컸어요.” 프란츠가 대꾸했다.

웨이마우스는 필름을 찍기전에 “모든 곡의 악보를 따고, 각 연주자가 무엇을 하는지, 누가 움직이는지를 알기 위해” 밴드와 함께 몇주간 여행했던 비주얼 컨설턴트 샌디맥레오드에게 고마움을 표했는데 “내 생각에 그게 실제 촬영에서 굉장히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밴드는 또한 팀의 노력으로 스탑메이킹센스의 감독으로 많은 신뢰를 받았던 조나단드미에게도 칭찬을 쏟아부었다.

“난 그가 이것을 일종의 합주 필름이라고 보고 있음을 깨달았어요.” 번이 고인이 된 감독에 대해 말했다. “당신은 많은 배우를 가지고 있어요. 당신은 하나하나의 캐릭터에 대해 알게 되죠. 그리고 당신은 그들이 서로 어떻게 관계하는지 바라봅니다. 나는 나많의 세상이 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본 것이라고 생각했었죠.”

프란츠가 덧붙였다. “조나달은 우리를 많이 신뢰했어요. 우리가 하는 것이 영화로 만들 가치가 있고 또한 그것이 미래에 기억될 가치가 있다고 느끼게 해줬죠.”

리는 아쉽게도 밴드 멤버들이 어떻게 이제 잘 지내게 됐는 지에 대해서나 라이브를 위한 재결합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번은 다만 최근 사람들에게 그가 그룹을 끝내게 한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고 그것을 “꼴 사나운 해체”라고 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고 한다. 토킹헤즈의 이전의 2002년 공개 석상에서 프란츠는 록앤롤 명예의 전당에게 밴드가 “행복한 끝맺음”의 기회를 준 것에 대해 감사한 바 있다. TIFF는 보다 행복한 것이 되었다.

“마술같아요.” 웨이마우스는 스탑메이킹센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 감상은 그 밤 그 자체에게도 쉽게 적용될 것이다. “모든 것이 특별해요. 당신이 우리와 청중 사이에 대해 이야기한 그 사랑, 팀웍, 우리 동료, 영화를 찍은 동료. 모든 것이 멋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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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sh And The Pan


이미지 출처

Flash And The Pan은 호주의 뉴웨이브 밴드다. 이 밴드는 호주에서 가장 위대한 락밴드로 평가받는 The Easybeats의 멤버였던 Harry Vanda와 George Young이 1979년대에 시작한 프로젝트다. 이 듀오의 첫 성공은 데뷔 앨범의 수록곡 Walking In The Rain의 인기였다. 이 곡은 후에 Grace Jones가 그녀의 1981년 앨범 Nightclubbing에서 커버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Hey St. Peter가 미국에서 싱글로 발매되어 빌보드 핫100 차트 76위까지 오르기도 했다. 앨범도 성공적인 반응을 얻었는데 유럽, 영국, 미국 등지에서 인기를 얻었다.

Albums
Flash and the Pan (1979)
Lights in the Night (1980)
Headlines (1982)
Early Morning Wake Up Call (1984)
Nights in France (1987)
Burning up the Night (1992)

보다 상세한 디스코그래피

Split Enz

Split Enz at Nambassa January 1979.jpg
Split Enz at Nambassa January 1979” by Nambassa Trust and Peter Terry – http://www.nambassa.com.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Split Enz는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까지 활동했던 뉴질랜드 출신의 뉴웨이브 밴드다. 1972년 Phil Judd와 Tim Finn이 주축이 되어 결성되었고 후에 Tim의 동생 Neil Finn이 가세한다. 밴드는 고향인 뉴질랜드와 인근의 호주, 그리고 캐나다 등에서 특히 인기가 많았다. 가장 인기가 있었던 곡은 1980년 싱글 “I Got You”다. 밴드는 아트록, 스윙, 펑크록, 뉴웨이브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서 영향 받은 음악을 구사했다. 또한 밴드는 비주얼 적으로도 독특한 스타일을 선보였는데 컬러풀하면서도 약간은 괴짜 같은 스타일의 패션을 유지했다. 1970년대 이들의 음악 스타일은 어쿠스틱 포크에 가까웠다. 하지만 1977년경부터 전자악기를 도입했고 프로그레시브록에 가까운 음악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이 시기는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인 Phil Judd가 그룹을 떠나고 Neil Finn이 가세한 시기와 일치한다. 이후 이들의 사운드는 점점 뉴웨이브 스타일로 바뀐다. 상업적으로도 성공하여 MTV에서도 그들의 뮤직비디오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밴드는 1984년 해산했고 그 뒤 몇 번 재결합하기도 했다. 해체 후에도 멤버들은 다양한 활동을 펼쳤는데 대표적으로 Finn형제가 주축이 된 Crowded House와 Finn Brothers 등이 있다. Split Enz와 Finn 형제의 뉴질랜드에서의 음악적 권위는 압도적인데 오스트랄시아 공연권리협회가 선정한 Top 100 New Zealand Songs of All Time이라는 차트에서는 Split Enz의 곡이 무려 일곱 곡이 선정되었다. 이외에도 Finn형제가 작곡한 곡과 Crowded House 시절의 곡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그들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개인적으로 이들 독특한 음악과 비견할 다른 나라의 밴드를 찾으라면 미국에서는 Talking Heads, 영국엔 XTC이라 생각한다.

스튜디오 앨범 디스코그래피
Mental Notes (1975)
Second Thoughts (1976)
Dizrythmia (1977)
Frenzy (1979)
True Colours (1980)
Waiata/Corroboree (1981)
Time and Tide (1982)
Conflicting Emotions (1983)
See Ya ‘Round (1984)

Throbbing Gristle

Throbbing Gristle.jpg
Throbbing Gristle” by Xic667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Throbbing Gristle은 다다이즘 운동에 영향받은 COUM Transmissions라는 퍼포먼스 아트 그룹(1969년~1976년까지 활동)에서 발전하여 1975년 결성된 영국의 음악/비주얼아트 그룹이다. COUM Transmissions의 마지막 공연이 Throbbing Gristle의 첫 공연이었다. 그룹은 Cabaret Voltaire와 함께 인더스트리얼 음악을 처음 추구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1 하지만 다소 팝 친화적인 음악을 추구했던 Cabaret와 달리 이들의 음악은 보다 전위적이었다. 이들의 공연은 때로 도발적이었는데 포르노그래피와 나찌의 강제수용소의 사진이 등장하는 등의 해프닝 때문에 악명을 쌓기도 했다. 그러나 그룹은 자신들의 의도가 매력적인 음악을 만들기보다는 인간의 삶의 어둡고 강박적인 측면을 분석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들은 테잎에 담긴 사전에 녹음된 샘플과 고도로 왜곡된 배경을 깔고 있는 특수효과 등을 자주 사용하였다. 그룹은 1977년 첫 싱글 “United”/”Zyklon B Zombie”로 데뷔한다. 이어 데뷔 앨범 The Second Annual Report를 내놓는다. 이 앨범은 자신들의 레이블 인더스트리얼 레코드사에서 786장만을 찍어냈지만, 이후 팬들의 요청으로 뮤트 레코드사를 통해 대량으로 시장에 판매되었다. 상반된 평가를 받은 데뷔 앨범과는 달리 이후 발표된 D.o.A: The Third and Final Report of Throbbing Gristle이나 20 Jazz Funk Greats는 평론가의 찬사를 얻는다. 특히 D.o.A는 1001 Albums You Must Hear Before You Die라는 책에 필청 음반으로 추천을 받기도 한다. 이후 80년대에 낸 두 개의 앨범은 더더욱 실험적인 작업으로 일관했다. 심지어 1986년 내놓은 앨범은 제목도 붙이지 않아 CD1이라는 비공식적인 이름을 갖고 있다. 그룹은 1981년 해산했지만 개별 멤버들은 그 뒤로도 많은 프로젝트에 활발하게 참여하였다. 2004년 재결성했지만 멤버 Peter Christopherson의 죽음 이후인 2010년 다시 해산했다.

Studio albums
The Second Annual Report (1977)
D.o.A: The Third and Final Report of Throbbing Gristle (1978)
20 Jazz Funk Greats (1979)
Journey Through a Body (1982)
CD1 (1986)
TG Now (2004)
Part Two: The Endless Not (2007)
The Third Mind Movements (2009)

  1. 그룹은 2009년 BBC에서 제작된 Synth Britannia에서 자신들은 “펑크가 아니라 인더스트리얼”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Off Course(オフコース)

Off Course(오프코스, オフコース) 는 일본의 영향력있는 포크락 밴드였다. 1969년  카나가와 현 요코하마시 의 聖光학원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오다 가즈마사(小田和正)와 스즈키 야쓰히로(鈴木康博)등이 중심이 되어 만든 이 밴드는 1970년 싱글 “群衆の中で”(군중의 안에서)로 데뷔하였다. 결성 7년째인 1976년에는 기타, 베이스, 키보드 등을 보강하여 밴드의 진용을 갖춘다. 이후, “さよなら”(안녕), “言葉にできない”(말로 할 수 없다)1 등의 수많은 히트곡을 양산했지만 TV프로그램에는 거의 출연하지 않고 레코드 제작과 콘서트에만 주력하는 개성을 유지했다. 1982년 스즈키가 탈퇴하는 등의 위기도 있었지만 이후 활동을 지속하다가 1989년 2월 26일 도쿄돔에서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해체했다. 가성을 쓰지 않으면서도 여성의 음역까지 올라가는 하이톤이라서 오프코스의 곡들은 대체로 청아한 느낌의 발라드다. 그룹의 중심인 오다는 그룹 해체와 동시에 솔로 활동에 나섰고 1991년 TV시리즈였던 도쿄러브스토리의 주제가로 발매한 “ラブストーリーは突然に”(러브 스토리는 돌연히)는 오리콘 1위를 기록하고 270만 장이 넘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오프코스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메인 보컬을 맡은 오다 가즈마사의 존재감이다.

오프코스 일본 위키
오다 가즈마사 엔하위키
오다 가즈마사 위키백과
뮤직비디오

  1. 이 곡은 동방신기가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J. Geils Band

J Geils Band 1973.JPG
J Geils Band 1973” by Premiere Talent Associates (management) – eBay item
photo front
photoback.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80년대에 발표한 음악으로만 그들을 접했던 입장에서는 다소 의외인데 애초에 J. Geils Band는 블루스 밴드로 음악 경력을 시작한 밴드라고 한다. 또한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실인데 당연하게도 밴드의 리더는 기타리스트 J. Geils라고 한다.(나는 여태 싱어였던 Peter Wolf라고 생각했었다.) 개인적으로 처음 접한 그들의 싱글은 강렬한 락비트가 특징인 Come Back이었다. 뭔가 비장한 톤으로 “다시 돌아와”라고 외치는 모습이 80년대 풍의 허세와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이 곡은 밴드가 1980년 발표한 Love Stinks에 수록되어 있는데, 같은 이름의 타이틀 싱글 Love Stinks는 80년대를 추억하는 영화 Wedding Singer에서 주인공이 결혼식 피로연에서 부르기도 한다. 또한 기억에 남는 곡은 1981년에 발매된 앨범 Freeze Frame – 이 앨범은 카세트테잎으로 구매했었다 – 에 담긴 동명의 싱글 Freeze Frame 이다. 이 노래는 당시 우리나라의 한 청소년 대상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퀴즈 꼭지를 시작할 때 배경음악으로 써서 유달리 기억에 남는다. 이 앨범에는 밴드의 최대 히트곡 Centerfold가 담겨있다. 이 곡은 밴드의 싱글 중 유일하게 빌보드 핫100 차트 1위에 무려 6주간이나 머물렀다. 고등학교 시절 짝사랑했던 여인이 성인잡지의 전면화보에 등장한 것을 발견하고 괴로워하는 한 남성의 시각을 담은 이 곡은 가수 송대관의 히트곡 ‘해뜰날’과 멜로디가 비슷하다 하여 “逆표절이 아니냐?”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우리나라에서만) 한편 개인적으로는 같은 앨범에 담긴 Angel In Blue를 좋아한다. 제목은 “우울한 천사”라고 번역할 수 있는 곡인데 스트리퍼로 살아가는 여인의 삶과 감정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AllMusic의 리뷰에서는 이 곡이 ‘Centerfold의 연장선상의 곡이다’라고도 했는데 어떤 면에서는 수긍이 되기도 한다. 음악적으로는 빠른 리듬의 Centerfold와 달리 미드 템포의 구슬픈 멜로디로 구성되어 있다. 1983년 싱어 Peter Wolf가 음악적 입장의 차이를 이유로 그룹을 떠나자 밴드의 인기는 빠르게 식었다. 결국 1985년 밴드는 해산했다. 솔로로 나선 Wolf는 Lights Out이란 노래로 반짝 인기를 얻었다.

Plus One

+1은 Ulf Alvedahl (aka Hull Alvvalley), Thomas Larsson, Thoth, Caj Ehrling, Magnus Wahl (aka Bonk Wahl)의 멤버로 구성된 스웨덴의 신쓰팝 밴드다. 그들은 1985년가 1986년 간에 걸쳐 세 곡의 노래를 스웨덴 차트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1985년 Young Europeans라는 이름의 정규앨범과 싱글 (I Don’t Want To Be Left Alone) Tonight, Nevermore (다양한 리믹스 형태로), Young Europeans (7”)를 내놓았다.

p.s. 그룹의 이름은 +1이지만 공식적으로는 Plus One이라 발음하지 않는다 한다. 노래가 세계시장에서 통할 법 한데도 다른 나라 차트에 오르지 않은 것에는 이러한 애매한 그룹명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뮤직비디오

1. (I Don’t Want to Be Left Alone) Tonight 3:37
2. Peace Army (Long Version) 2:51
3. Indian Shadow 4:24
4. Thousand Reasons 3:54
5. (I Don’t Want to Be Left Alone) Tonight (Maxi Cut) 2:12
6. Young Europeans 2:26
7. Nevermore 4:25
8. P.I. 3:34
9. Arabian Princess 3:34
10. Peace Army (Short Version) 0:57
11. Soldier 2:55

Fall,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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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fall1984” by Original uploader was Kekslover at en.wikipedia – Transferred from en.wikipedia.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1977년, 알베르 까뮈의 소설 제목에서 힌트를 얻은 이름으로 맨체스터에서 결성되고 1979년 첫 앨범을 낸 이래 작년인 2011년까지 정규 스튜디오앨범만도 29장을 발표한 엄청난 장수그룹이다. 포스트펑크 밴드가 이토록 생명력이 긴 사례는 아마 극히 희귀할 것이다. 밴드라고는 해도 사실은 Mark E. Smith의 개인 프로젝트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그의 껄렁하게 읊조리는 것 같은 – 일종의 백인 랩이라고 해야 할까? – 스타일의 보컬이 밴드의 음악의 색깔을 결정하는데 너무나 선명하고, 실제로 그 외에는 멤버들이 계속하여 교체되었기 때문이다. 그룹은 몇 개의 히트곡이 있긴 하지만 활동 기간 내내 사실상의 컬트밴드라 할 수 있다.

Discography(Studio Albums)
Live at the Witch Trials (1979)
Dragnet (1979)
Grotesque (After the Gramme) (1980)
Slates (1981)
Hex Enduction Hour (1982)
Room to Live (Undilutable Slang Truth!) (1982)
Perverted by Language (1983)
The Wonderful and Frightening World of The Fall (1984)
This Nation’s Saving Grace (1985)
Bend Sinister (1986)
The Frenz Experiment (1988)
I Am Kurious Oranj (1988)
Extricate (1990)
Shift-Work (1991)
Code: Selfish (1992)
The Infotainment Scan (1993)
Middle Class Revolt (1994)
Cerebral Caustic (1995)
The Light User Syndrome (1996)
Levitate (1997)
The Marshall Suite (1999)
The Unutterable (2000)
Are You Are Missing Winner (2001)
The Real New Fall LP (Formerly Country on the Click) (2003)
Fall Heads Roll (2005)
Reformation Post TLC (2007)
Imperial Wax Solvent (2008)
Your Future Our Clutter (2010)
Ersatz GB (2011)

Links
페이스북의 Mark E. Smith 페이지
인터뷰
2011년 새 앨범을 발표할 즈음의 뉴요커의 소개글
2011년 새 앨범을 발표할 즈음, Mark E. Smith를 만나 인터뷰한 인디펜던트의 글

Climie Fis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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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mie-fisher2” by Original uploader was Andwhatsnext at en.wikipedia – Transferred from en.wikipedia; transferred to Commons by User:Liftarn using CommonsHelper..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80년대 말 미국에는 또 한 차례 영국 아티스트들의 “공습”이 있었는데, 그 중에 유명한 이들로는 Johnny Hates Jazz, Waterfront, Curiosity Killed the Cat 등이 있었다. 이들의 특징은 세련된 멜로디, 블루아이드쏘울 풍, 가벼운 펑크(funk)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부류 중 또 하나의 뮤지션으로 Climie Fisher을 꼽을 수 있다. 보컬 Simon Climie와 키보디스트 Rob Fisher로 이루어진 듀오로 1988년 데뷔앨범 Everything(영국 차트 14위, 미국 차트 120위)을 내놓았다.

Simon Climie는 이 그룹의 결성 전에 George Michael과 Aretha Franklin이 함께 불러 히트시킨 곡 “I Knew You Were Waiting (For Me)”을 썼고, Fisher는 또 다른 유명한 팝 듀오 Naked Eyes의 멤버였다. Climie와 Fisher는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세션뮤지션으로 작업을 하던 중에 만났는데, 둘이서 들을만한 좋은 팝뮤직이 없다고 한탄을 하던 중에 스스로 그 작업에 나서기로 했다는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들은 Everything 의 작업을 위해 Steve Lillywhite와 Stephen Hague를 프로듀서로 쓴다. 그리고 노련한 작곡가 Dennis Morgan에게 공동작업을 의뢰했다. 그는 듀오의 가장 큰 히트곡인 “Love Changes (Everything)”(영국 차트 2위, 미국 차트 23위)과 “Rise to the Occasion”(영국 14위)에 참여했다. 두 번째 앨범 Coming in for the Kill(영국 차트 45위)을 내놓고 듀오는 해산한다.

이후 Climie는 1992년 솔로앨범 “Soul Inspiration”을 내놓았고, Rick Astley의 앨범에 곡을 쓰기도 했던 Fisher는 1999년 8월 25일 39세의 나이에 장암(腸癌)으로 세상을 떠났다.

Discography
1988 Everything
1989 Coming in for the Kill

Soviet

뉴로맨틱이나 브릿팝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Soviet는 1990년대 후반에 활동한 일렉트로팝 밴드이다. 1999년 처음 등장한 이 밴드는 싱어이자 작곡자인 Keith Ruggiero와 키보디스트/프로그래머를 맡은 Chris Otchy를 주축으로 결성되었다. 공연에는 신디사이저 Amanda Lynn와 Greg Kochan, 기타에 Kenan Gunduz 등이 함께 했다. 2002년 데뷔앨범 We Are Eyes We Are Builders를 내놓았고, 2008년에 Spies in the House of Love를 내놓았다.

홈페이지
Soviet – Commu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