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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즐거움 : 音盤편

올해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음반 위주로 들으려 일부러 노력했다. 사실 젠체하려는 문화적 허세남의 냄새가 다분히 풍기는 의도였지만 어쨌든 그러한 노력 덕에 음악 감상의 폭은 상당히 넓어진 한해였다. 그 중 인상 깊었던 음반들을 골라봤다.

Elgar: Cello Concerto / Sea Pictures[1965]
한 클래식 작곡가의 작품을 재평가하는데 연주자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는데 바로 엘가의 이 작품이 그렇다. Jacqueline du Pré라는 천재 첼리스트가 이 곡을 연주하자 사람들은 그 곡을 재평가했고 연주자에게도 가장 뛰어난 연주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Love Supreme – John Coltrane[1965]
째즈의 마지막 황금기에 가장 걸출한 째즈 뮤지션이 내놓았기에 그 어떤 째즈 음반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은 음반. 콜트레인의 종교적 명상이 고스란히 음악적으로 표현되어서 더욱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음반이 다시 나오는 것은 불가능할 듯.

ささやかな欲望 – 山口百惠[1975]
일본 최초의 아이돌이라 할 수 있는 야마구치모모에의 1975년 작. 초기의 어린 소녀의 로리타적 분위기에서 보다 성숙한 여인의 분위기로 넘어가던 시절의 – 그래봤자 당시 16세 – 곡들이 담겨져 있다. 모모에의 음반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함.

The Köln Concert – Keith Jarrett[1975]
지친 몸을 이끌고 퀼른에 왔는데 준비되어 있는 피아노는 당초 요구에 훨씬 못 미치는 조악한 상태의 미니그랜드피아노. 이 상태에서 키쓰자렛은 관객들에게 생애 최고의 즉흥연주를 선사했다. 음악이란 자유로움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려준 명반.

The River – Bruce Springsteen[1980]
미국 노동계급의 정서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뮤지션 브루스스프링스틴의 중기걸작. 미니멀리즘의 미학이 제대로 드러난 Hungry Heart나 아버지의 죽음에서 삶의 철학을 깨닫는 Independence Day 등 노동자의 희로애락이 절절하게 담겨져 있다.

Rain Dogs – Tom Waits[1985]
사실 톰웨이츠의 음악은 무의식적으로 피해왔다.(그 걸죽한 목소리가 싫었던 것인지?) 결국 이 음반을 듣고 나서 그의 음악을 피해온 세월이 아쉬워졌다. 한적한 미국 시골에 차려진 철지난 서커스 공연장에서 듣고 있으면 딱 좋을 풍각쟁이의 노래들.

Steve McQueen – Prefab Sprout[1988]
‘이 밴드의 음악은 언제 한번 제대로 들어야겠다’고 벼르다 고른 앨범인데 ‘역시 기대를 버리지 않는구나!’라고 감탄했다. 앨범명에서부터 커버, 그리고 수록곡이 환상적 궁합을 이루지만 미국에선 저작권 때문에 다른 이름으로 출시된 불운한 앨범이기도.

Enter The Wu-Tang(36 Chambers) – Wu-Tang Clan[1993]
힙합과 중국의 B급 무술영화가 만나서 90년대 힙합의 트렌드를 결정해버렸다. 개성이 너무나 확연한 멤버들이 화학적으로 융합되어 창출해낸 하나의 팝문화가 너무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Ol’ Dirty Bastard의 랩이 마음에 들었다.

Back To Black – Amy Winehouse[2006]
뮤지션은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임진모 씨의 꼰대질에 근거하여 보자면 이 앨범은 그야말로 에이미 그 자신의 절절한 사연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음반. Rehab만 들어도 이미 위기의 전조가 느껴지는데 청중은 그저 환호했을 뿐이다. R.I.P.

vega Intl. Night School – Neon Indian[2015]
인디 신쓰팝 뮤지션 니온인디언의 2015년 신보다. 디스코, 뉴웨이브, 훵크 등 장르가 맛깔스럽게 섞여서 귀가 즐거웠던 앨범이다. 올해 내한공연을 시도했으나 기획사의 역량부족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다음에 내한한다면 꼭 가보고 싶은 아티스트.

Music Complete – New Order[2015]
결성된 지 35년 만에 내놓은 2015년 신보. 단순히 노익장을 과시할 목적으로 내놓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어폰을 귀에 꽂는 순간 명확해진다. 마지막 트랙 Superheated까지 –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 곡이 좋다 –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수작.

스트리밍 서비스 시대가 초래한 불공정한 게임

레이블들은 그들의 수입의 일정비율(간혹 15% 정도)을 지불한다. 이 비율은 스트리밍 음악이 제조, 파손에 의한 피해, 그리고 손상을 보상하기 위한 레이블의 별도의 물리적 비용 등이 포함된 것이라면 말이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LP나 CD 생산과 비교할 때에 스트리밍은 레이블에게 비교도 안 되는 높은 마진을 안겨준다. [중략] 나는 애플 뮤직에 맛보기 기간 동안의 저작권료 계산법을 설명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은 그 계산법은 저작권 보유자(즉 레이블)에게만 공개된다고 말했다. 나는 내 레이블을 가지고 있고 내 앨범 중 몇 개의 저작권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가 내 배급사에게 얼굴을 돌리자 그의 답은 “당신은 계약을 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당신 변호사가 우리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게 하면 몇몇 질문에 답은 해드릴 수 있습니다.”였다. 상황은 더 나빴다. 한 업계 정보통은 내게 메이저 레이블들이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벌어들이는 수입을 그들의 카탈로그에 있는 아티스트들에게 언뜻 보기에도 제멋대로의 기준으로 배분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략] 레이블들은 세 곳의 또 다른 수입원이 있는데, 이는 모두 아티스트들에게는 감춰진 것들이다. 그들은 스트리밍 서비스에 대한 선금을 받고, 오래된 노래들에 대한 카탈로그 서비스에 대해 지불받고, 스트리밍 서비스 자체의 주식을 받는다.[Open the Music Industry’s Black Box]

80년대의 전설적인 뉴웨이브 밴드 Talking Heads의 프론트맨이었고 현재 솔로로 활동하면서 미술작품 제작 및 저작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David Byrne이 최근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이다. 스포티파이, 판도라, 유투브, 애플 뮤직 등 스트리밍 서비스가 음악 산업의 핵심부문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 자신이 음악가이자 레이블 소유자이기도 한 Byrne은 스트리밍 서비스의 계약과정에서 소외되고 있는 음악가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얼마 전 Taylor Swift가 애플 뮤직과의 지상 논쟁을 통해 음악가들에게 불공정한 것으로 보이는 처사를 취소하게 했던 해프닝도 있었던 바, 음악가들에게 있어 스트리밍 서비스의 현재와 앞날은 초미의 관심사가 된지 오래다. 그리고 Byrne은 Taylor Swift의 항의에 한발 더 나아가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와 레이블 – 특히 메이저 레이블 – 간에만 비밀스럽게 진행되는 계약에 대한 – Byrne은 이 계약을 “블랙박스”라 칭하고 있다 – 투명한 공개를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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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Byrne by Ron Baker” by Ron Baker – http://www.flickr.com/photos/kingsnake/2948571996/in/faves-24788065@N02/.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Commons.

David Byrne이 기타 연주하는 모습

스스로가 레이블 소유자인 Byrne이 애플 뮤직이나 배급사 등으로부터 스트리밍 서비스에 대한 여하한의 정보를 얻어내지 못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이 시장은 철저한 과점 시장이다. 그 과점 업체는 상위 3위의 레이블인 Sony, 유니버설, 그리고 Warner다. 이들 3개 업체는 Byrne이 짐작하길 서비스에 대한 선금과 주식 등을 배정받아 이미 서비스 업체와의 특수 관계가 되었고 음악가는 물론이고 독립적인 레이블들을 계약 과정에서 배제시키고 있다.

요컨대 스트리밍 서비스는 ▲ 음악소비 행태를 바꿔놓았고 ▲ 레이블은 더 이상 CD와 같은 물리적 상품을 이전처럼 대규모로 생산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 그럼에도 이들의 저작권에 대한 대가는 이전과 같은 비중 혹은 비밀스러운 계약과정을 통한 더 많은 이익을 독점하고 있다는 것이 Byrne의 관찰기다. 다시 말해 제조업에서 유통업으로 바뀐 음악 산업에서, 자본은 저작권이라는 고정자본을 마모시키지 않으면서도 잉여가치를 계속 착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음악이 산업화되어온 역사를 거칠게 보자면 초기에는 일종의 서비스업이자 유통업으로써 공연을 하는 생산자가 수입의 대부분을 갖는 형태였을 것이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상류층이 소비하는 고전음악의 생산자는 왕족이나 귀족의 후원이나 보수, 악보 판매 등의 수입으로 살아갔다. 현대로 접어들며 LP의 대량생산 시대부터 생산자는 레이블에 속해 이익을 공유했다. 그리고 이제 음악 산업이 제조업에서 유통업으로 회귀하며 생산자는 은밀한 거래에서 소외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만들었나

The Lexicon of Love라는 신쓰팝의 명반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ABC의 멤버인 당사자들이 쓴 글을 삼번함(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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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Lexicon” by The cover art can be obtained from the record label.. Licensed under Wikipedia.

Martin Fry, 싱어송라이터

1982년에 디스코는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난 Chic 앨범의 선율들을, 그리고 Earth, Wind &Fire의 모든 음악세계를 사랑했다. The Cure와 Joy Division과 같은 이들과 융화한 것은 우리가 추구했던 것이었다. – 우리 기타리스트였던 Mark White는 한 영화의 사운드트랙의 분위기를 부여하고 싶어 했다. 매우 극장과 같은 분위기의 표지에 끝내주는 고전 영화인 The Red Shoes의 터치를 가미하기도 했다. 실제보다 더 강렬하고 감정적이었다. The Lexicon of Love는 어느 정도는 그러했다. 난 팔세토 창법을 많이 썼다. 부분적으로 사랑에 빠진 것의 롤러코스터 탑승을 – 우쭐함과 절망 – 전달하기 위해서.

우리의 첫 싱글 Tears Are Not Enough는 1981년에 탑20곡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의 앨범은 보다 다듬어졌다. Dollar’s의 파노라마와 같은 넓은 화면과 같은 사운드인 Hand Held in Black and White를 듣고, 우리는 프로듀서 Trevor Horn과 접촉하였다. 그는 우리가 추구하려던 것을 즉시 이해했다. 우리는 아이디어가 가득했고 락앤롤을 바꿀 수 있으리라 – 셰필드에서 실직수당을 받으며 노래를 막 시작한 이에게는 매우 야심 찬 – 생각했다.

가사적으로 나는 Gary Numan과 OMD의 것을 사랑했었지만, 내 노래들을 Rodgers and Hammerstein이나 Cole Porter의 라인처럼 보다 감정적으로 고양시키고 싶었다. 그 당시에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것에 관한 노래가 드물었다. 펑크는 매우 중독적임에도 여성들은 그들의 존재감을 Lexicon에서 부각시켰다. 선율을 그렇게 두드러지게 특징 지우는 것은 통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당신이 Cilla Black이나 Cliff Richard가 아니라면 말이다. 4위까지 오른 The Look of Love는 무그 베이스라인에 모든 피치카토 어레인지먼트가 담겨 있었다. 반면 All of My Heart (No 5)는 매우 Bridge Over Troubled Water 스러웠다.

이미지적 관점에서 황금색 라메 수트와 디너 재킷은 우리를 펑크와 달리 보이게 했다. 야심적이고 코스모폴리탄적인, James Bond와 같은 요소를 가득 담고 있었다. 30년에 걸쳐 나는 이 노래들을 오케스트라와 공연하여 왔다. 나는 내 삶을 살아왔고 이제 두 아이가 있다. 그래서 All of My Heart로 돌아가는 것은 – 그리고 소년답게 라기보다는 남자답게 부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Anne Dudley, 키보드, 어레인저

ABC는 키보드 연주자가 없었다. 그래서 Trevor Horn이 영입했다. The Look of Love를 녹음하는 도중에 그는 진짜 현악과 관악 부문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젊은이의 확신으로 경험은 일천했지만 내가 어레인지먼트를 하겠다고 자원했다. 우리가 애비로드에서 30개의 현악 섹션을 녹음했을 때, 나는 종종 그 방에서 가장 어렸다. 나는 Gamble and Huff의 디스코 클래식 The Sound of Philadelphia에서의 오케스트라의 풍부함을 언제나 사랑했었다. 이게 주된 영감이 되었고 또한 Bee Gees의 날아오르는 듯 하지만 단순한 현악 라인이 보태졌고 심지어 거기에는 Vaughan Williams도 약간 가미되었다.

The Look of Love의 믹스를 듣고 Trevor가 얼마나 시끄럽게 현악을 만들어냈는지를 알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이것은 ABC의 색을 선명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미안해할 것도 없이 호사스럽고 서사적인 앨범이 될 것이었다. 그 이후로 우리는 많은 트랙들에 현악을 가미할 것이었고 앨범의 독특한 사운드를 개발해 나갈 것이었다. – 최신의 기술,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실제 악기의 조화. 그 이후로 내가 추구해오던 조합이다.

솔직히 난 All of My Heart가 처음엔 좀 약하다고 생각했다. Trevor가 “all of my heart”의 가사를 부르기 전에 드라마틱한 멈춤과 코러스로의 결말을 첨가할 때까지 말이다. 우리는 그 다음에 팀파니를 조금 더 넣었다. 반면 페이드아웃은 내게 영국의 목가적인 순간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 결론적으로 그건 아마도 Martin의 최고의 보컬 퍼포먼스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두드러진 곡이 되었다. 그러나 트랙들은 모두 두드러졌다. Martin의 재치 있고 쉬운 가사는 젊은 사랑의 시도를 요약하고 있다. The Lexicon of Love는 1위를 기록했고 난 이 앨범이 30년간 어떻게 비쳐지는지에 관해 즐거울 따름이다. 그리고 내 젊은 날의 노력이 그다지 부끄럽지는 않다.

스트리밍 서비스 시대의 도래에 따른 레이블과 뮤지션들의 명암

축음기와 라디오가 발명되고 보급된 이래 대중음악은 일군의 산업을 형성하며 끊임없이 발전해왔다. 녹음기술이 발전하고, 비닐 레코드가 표준화되고, 뮤지컬 영화가 극장에 개봉되고, MTV가 개국하고, 십대들이 음악잡지를 사고, 대규모 락콘서트가 열리고, mp3 플레이어가 보급되고, p2p로 mp3를 교환하고, YouTube가 인기를 얻고, 애플이 플랫폼에서 음악파일을 팔고, Spotify가 라디오를 대신하는 등 시장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산업의 참여자들에게 다양한 방향으로 영향을 미쳤다.

Q. Spotify가 레코드 레이블들과 요율을 협상하고 있다. 이 회사는 아마도 아직 이익이 나지 않는 사기업입니다.
A. 당신이 이윤을 낼 필요가 없을 경우 당신의 경쟁상대를 약하게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네. 스트리밍 회사는 레이블들과 “협상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 (대형) 레이블들은 투자자인데, 이건 명백히 이해관계의 충돌이죠. Spotify가 상장되면 이 레이블들은 많은 현금을 거머쥘 것입니다. 아마도 스트리밍을 통해 여태 얻는 극미한 수수료보다 훨씬 많겠죠. 그래서 레이블들은 스트리밍 회사를 거칠게 대할 인센티브가 없습니다. 매우, 매우 영리한 거죠. 이는 단기적인 생각으로 여겨집니다.[David Byrne Talks Artists’ Rights, Spotify & Touring]

빌보드의 이 인터뷰는 Talking Heads의 프론트맨이었고 현재 솔로 뮤지션으로 활동하면서 저작과 미술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있는 David Byrne의 스트리밍 서비스에 관한 생각이다. 현재 주로 모빌 기기를 기반으로 하는 스트리밍 서비스와 이에 연계된 각종 음악 서비스는 앨범 판매 등의 기존 수익모델이 위협받고 있는 시점에서 미래의 먹거리를 일구어줄 사업모델로 여겨지고 있다. 약 4천 만명의 이용자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Spotify는 그 중에서도 Pandora와 함께 스트리밍 서비스의 선두업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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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Byrne of Talking Heads” by Jean-Luc – originally posted to Flickr as Talking Heads.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젊은 시절의 David Byrne

David Byrne이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듯이 Spotify의 경쟁력은 경쟁자를 무력하게 만들만큼 싼 이용료일 것이다. Spotify는 이러한 놀라운 원가경쟁력을 어떻게 갖출 수 있는 것일까? 바로 메이저 레이블에게 스트리밍에 대한 수수료보다 더 매력적인 조건을 제시함으로써 레이블이 수수료를 낮추게 만든다는 것이 Byrne의 생각이다. 사실 레이블들은 소속 아티스트들의 이해관계를 위해서라도 수수료를 더 받아야하는데 온전히 자신들의 몫이 될 지분 획득을 대가로 싼 수수료를 용인한다는 것이 Byrne의 또 다른 짐작이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그렇게 적은 광고만으로도(어떤 때는 몇 시간을 로긴하고 있음에도 전혀 광고를 보지 못할 때도 있었다) 아티스트들에게 보상을 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중략] 내가 대화를 나눴던 주요 레코드 레이블들은 – 그리고 상대적으로 큰 인디 레이블들 – Spotify에 대해서 긍정적이었는데, 이 때문에 나는 그들이 두둑한 몫을 지불받든지 그리고/또는 회사의 주식을 받았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확실하게도 나의 의심은 몇 주후 확인됐는데 메이저들이 Spotify 주식의 18%를 받았다고 보도됐을 때였다.[Behind the music : The real reason why the major labels love Spotify]

Byrne의 발언을 확인시켜주는 가디언의 2009년 기사다. 물론 레이블들은 싼 수수료와 넉넉한 지분과의 연관성을 부인할 것이다. 하지만 이 레이블들이 현재도 20% 가량의 Spotify 지분을 -“공짜로” – 얻었고, 인스타그램이나 왓츠앱 등의 경이적인 성공에 크게 고무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 보도에 따르면 이들은 현재 Byrne이 예상하는 상장보다는 대형 통신사 등에 장외에서 지분을 넘기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가치는 100억 달러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뮤지션들이 끼어들 몫은 없다.

복수의 정보원에 따르면 메이저 레이블들은 현재 20% 가량 되는 Spotify에 대한 공동소유권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중략] 예전 모델에서 레이블은 그들의 가치있는 카탈로그를 사용하는 권리에 대한 대로 비싼 선불 개런티에 보다 집중했다. [중략] 그러나 이런 거래에 익숙한 몇몇 정보원에 따르면 최근 몇 년간 이런 상황이 상당히 변했다고 한다. “[대형 레코드 레이블들은] 수수료보다는 주식을 요구하기로 결정했는데, 이제 [취득에 관한] 시장이 있기 때문이죠.” 한 정보원의 말이다. [중략] 한 정보원은 Spotify가 한 목표가는 과거에 100억 달러에 육박할 정도로 매우 매우 달콤한 보상이라고 지적했다.[The Major Labels Are Trying To Sell Spotify for $10 Billion, Sourses Say]

진보적인 뮤지션인 Billy Bragg은 현재 뮤지션들이 대형 레이블들로부터 받고 있는 스트리밍 요율을 더 높이기 위해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현재 뮤지션이 받고 있는 수수료의 요율은 극히 일부의 레이블이나 대형 가수를 제외하고는 전체 수입의 8~15%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가뜩이나 레이블들이 주식 대박의 꿈 때문에 수수료를 낮게 받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뮤지션들의 몫은 더 적다는 것이 Bragg 의 불만인 것이다. 이미 Radiohead의 Thom Yorke나 프로듀서 Nigel Godrich와 같은 이는 행동에 나섰다.

Bragg이 오늘 말했다. “이 스트리밍 비즈니스 모델의 문제점은 대부분의 아티스트들이 여전히 아날로그 시대의 계약으로 묶여있다는 것인데, 그때는 레코드 회사들이 실물의 생산과 배급의 모든 부담을 졌을 때죠. 그래서 아티스트들은 평균적으로 8~15%의 로얄티만 받는 것입니다. 디지털 시대까지 그대로 이어진 그 비율이 왜 아티스트들이 Spotify로부터 그렇게 형편없는 소득을 얻는지를 설명해줍니다.”[Spotify royalties : ‘Problem lies with labels – not streaming services’, says Billy Bragg]

요약하자면 대부분의 뮤지션들은 현재 Spotify와 같은 저항할 수 없는 새로운 음악 서비스로부터 불공정한 요율을 적용받고 있다는 것이 Byrne이나 Bragg과 같은 이들의 생각이다. 이러한 요율은 아날로그 시대에 적용된 요율이 그대로 디지털 시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고 이는 지속가능한 시스템이 아니라는 것이다. Byrne은 특히 이러한 상황이 대형 레이블들의 지분확보를 대가로 한 싼 수수료에 기인하며 이는 명백히 이해관계의 충돌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대형 레이블들의 적응력은 너무 뛰어난 것 같다.

Talking Heads의 “거칠고 거친 인생”을 듣도록 하겠다.

사회주의 혁명, 아방가르드, 그리고 전자음악

1919년에 러시아의 음향 기술자 레온 테레민 Leon Theremin(본명 Lev Sergeivich Termen) 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전기적인 음률의 고저가 연주되는 테레민 theremin(또는 thereminvox, aetherphone 으로 불리기도 함)이라는 흥미로운 악기를 발명한다. 이 악기는 연주자가 악기에 손을 대지 않고도 연주하는 악기로서 연주자의 손이 금속봉에 얼마나 근접하는 가에 따라 음의 고저와 음량이 조절되었다. 테레민의 연주소리는 다소 기괴스러워서 104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공상과학영화나 공포영화의 사운드트랙에 곧잘 사용되었다.(예로 들자면 Spellbound, The Lost Weekend, Ed Wood, Mars Attacks!, The Day the Earth Stood St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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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 Termen playing – cropped” by Bettmann, Corbis – http://tygodnik.onet.pl/35,0,57107,sowiecki_faust,artykul.html (polish).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테레민을 연주하고 있는 레온 테레민

이 악기는 흥미롭게도 소비에트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과 그에 따른 단기적인 아방가르드 예술의 융성과 관련이 깊다. 아방가르드 예술은 그 태생과 발전 자체가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급진성을 띠었으며 현실사회 전반에 대한 상당한 혐오감을 내포하고 있었다. 소비에트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볼셰비키는 후진적인 러시아 사회에서의 선각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소수의 직업적 혁명가의 엄격한 집단을 표방하였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와 상당히 유사한 형태의 집단이었다 할 수 있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진실을 파악하고 있었으며, 이점이야말로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경멸할 수 있는 권리를 스스로에게 부여해줬다.”[마크 애론슨, 도발 아방가르드의 문화사]

그리고 혁명이 성공하자 새로운 지배계급이 된 볼셰비키는 아방가르드의 예술 활동을 적극적으로 장려한다. 소비에트는 예술이 인민들을 사상, 감정, 분위기로 물들게 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여겼고 아방가르드 예술을 일종의 사회주의 선전선동의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술은 아지프로 agitprop 라 불리며 실질적이고 창조적인 약진을 해나갔다. 적어도 스탈린이 정권을 잡기 이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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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 Lissitzky, Lenin Tribune, 1920. State Tretyakov Gallery, Moscow“ von El Lissitzky – State Tretyakov Gallery, Moscow. Lizenziert unter Public domain über Wikimedia Commons.

엘 리시츠키 El Lissitzky 가 레닌을 위해 제작한 연단으로 구성주의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

여하튼 이 당시의 예술분위기는 모든 장르에서 전통적인 문법장르가 해체되는 시기였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들 모두가 해체되고 재창조되어 이해 불가한 우스꽝스러운 소리조차 음악으로 포장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창조물이 바로 기계를 통한 실용적 작업이 소리와 결합된 레온 테레민의 작품 테레민이었다.

레온 테레민은 1895년 페테스브르그에서 태어났다. 귀족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어렸을 적부터 과학에 소질을 보이며 남들과 다른 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소비에트 혁명 후 그의 인텔리겐챠적인 지위가 문제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의 과학적 재능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혁명정부를 위해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어느 정도 자유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테레민은 여러 연구를 하던 중 인체의 온도변화를 음향으로 전환하는데 착안하여 테레민을 만들게 되었다.

1921년 어느 날 레온 테레민이 자신이 발명한 새로운 악기를 레닌에게 시연해 보인다. 이 악기는 현도, 건반도, 마우스피스도 없는 악기였다. 음은 전기 장치가 부착된 상자에서 만들어졌다. 연주자는 상자에 부착된 안테나와 금속봉 사이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공기를 연주한다. 이 악기는 전혀 새롭고도 으스스한 음을 만들어내었다. 레닌은 이 연주에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악기연주법을 배우기까지 했다고 한다.(레닌은 후진적인 농업사회였던 러시아가 사회주의 강국으로 거듭나는 길은 하루빨리 공업사회로 전환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기계에 대한 그와 집권세력의 집착은 매우 강했다. 그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Socialism equals Soviet power plus electrification.” )

이후 소비에트의 현대성을 상징하는 선전도구로서 새로운 악기를 유럽에 선전하러 돌아다니던 테레민은 1927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이 신기한 악기를 대중에게 선보였다. 많은 이들이 테레민에 관심을 보였는데 앨버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도 매우 흥미있어 하며 그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한다. 이듬해 그는 테레민의 특허권을 얻은 후 악기 제작권을 RCA에 팔았다. RCA는 이 악기의 연주가 “휘파람 부는 것처럼” 쉽다는 슬로건 하에 악기 판매에 나섰는데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악기연주가 휘파람 불듯이 쉽지도 않았을 뿐더러 1929년 미국에는 대공황이라는 미증유의 사태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악기는 미키마우스 클럽에서 시연되기도 했었고 앞서 말했듯이 공상과학영화와 공포영화의 사운드트랙에 이용되었다. 이 악기의 가장 뛰어난 연주자는 전직 바이올리니스트였던 클라라 록모어 Clara Rockmore 였다. 레온 테레민은 아름다운 외모의 그녀에게 구애하였으나 그녀는 변호사 존 록모어 John Rockmore 와 결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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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ra.rockmores.lost.theremin.album” by [1]. Licensed under Fair use via Wikipedia.

Clara Rockmore

이후 테레민은 소수이긴 하지만 대중음악에도 사용된다. The Beatles나 The Rolling Stones 와 같은 몇몇 대중음악가가 이 악기의 소리를 사용하였다. 대표적인 곡이 비치보이스의 명곡 Good Vibrations 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이러한 컬트적인 현상과 별개로 현대 대중음악에 보다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업이 신서사이저를 발명한 로버트 무그 Robert Moog 에게 영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로버트 무그는 1950년대 혁신적인 신서사이저라 할 수 있는 미니무그 minimoog 를 발명하여 현대 전자음악(Kraftwerk, Gary Numan, Pink Floyd 등의 선구자적인 음악가들이 시도하여 인기를 얻었던 전자음악은 80년대 Synth Pop, New Romantics 등의 장르를 통해 전성기를 맞는다. 이후 이들 장르의 인기는 이전 같지 않지만 오늘 날 대중음악에서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이다. 그는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테레민에 매혹되어 직접 제작하여 팔기까지 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미니무그는 많은 면에서 테레민이 지향하는 바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우리시대의 신서사이저 음악은 테레민의 은혜를 받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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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moog” by Krash – photo taken by Krash.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로버트 무그가 제작한 미니무그

1938년 그는 돌연 미국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많은 이들은 소련의 스파이들이 그의 뉴욕 아파트에서 그를 납치하여 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후에 나온 그의 전기에서는 그가 빚 때문에 미국을 떠났고(RCA에 테레민의 권리를 넘긴 레온 테레민의 다음 프로젝트는 텔레비전의 발명이었다고 한다. 이를 위해 회사를 설립하고 많은 돈을 끌어 모았으나  그 프로젝트는 실패하였고 테레민은 빚더미에 앉았다고 한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소련에 호송되었다고 전하고 있다.(또는 그가 미국에서 명성을 얻었을때조차 지속적으로 소련 스파이들과 접선을 유지했고 이 당시 자발적으로 소련으로 돌아갔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그는 그곳에서 혁신적인 도청장치인 The Bug의 작업에 참여하였고 이일로 인해 당시 소련사회의 최고 영예인 스탈린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후에 소련에서 음악학교에서 음악 강의를 맡기도 했으나 현대음악은 해로운 것이라는 비난에 직면하여 이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는 1991년이 되어서야 미국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고 1993년 숨을 거두었다. 1994년 그의 업적을 기린 Theremin: An Electronic Odyssey 라는 다큐멘타리가 발표되었다.

요컨대 테레민의 개발, 발전, 그리고 이어지는 전자음악의 발달의 이면에는 사회주의 혁명, 아방가르드, 기계문명에 대한 낙관주의와 같은 20세기 초 인류문명사의 발전이라는 역사적 맥락이 놓여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참 후에 대중음악계는 지나친 악기의 기계화, 내지는 전자기기화에 싫증을 낸 이들이 소위 플러그를 뺐다는 의미의 unpluged 공연을 한동안 유행시키기도 했다.

테레민 연주 듣기

참고할만한 사이트들

도널드 덕의 이미지 어떻게 전재할 것인가?

이야기의 줄거리와 이것을 전달하기 위해 이용되는 삽화들 – 키만투가 디즈니 사의 허가 없이 실은 삽화들이기도 하다 –을 보면, 디즈니가 이들 나라 사람들이 한편으로는 순진무구하고 고귀한 야만인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 혁명 분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략] 따라서 이 책을 미국 내에서도 손쉽게 구입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으나, 여기에 저작권 문제가 끼어들었다. [중략] 컨즐에 의하면 두 출판사 모두 종국에는 디즈니 사의 소송 제기가 두려워 이를(출판 : 인용자 주) 단념하고 말았다. 디즈니 만화책의 삽화는 주요 주제와 전형을 다룬 두 사람의 주장에 대한 시각적 증거를 제공해준다. 디즈니 측은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결코 자사의 만화 삽화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이용되는 일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만약 누군가 삽화들을 허가 없이 출판한다면 값비싼 소송 비용을 물게 될 것이었다.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 아리엘 도르프만/아르망 마텔라르 지음, 김성오 옮김, 새물결, 2006년, pp246~249]

무인도에 낙오되었을 때 쉽게 구출되는 방법이 ‘미키마우스를 해변에 그려놓는 것’이라는 농담이 있다. 그러면 유난히 저작권에 민감한 디즈니에서 즉시 헬기라도 띄워 바로 찾아와 해변의 그림을 지울 것이라고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바로 그림을 지워야 할 것이라는 개연성에 대해서는 고개가 끄덕거려지지만 화가 나서 찾아온 디즈니 측 직원들이 과연 조난자를 다시 문명세계로 데려갈지는 미지수지만, 여하튼 디즈니의 강력한 저작권 대책에 대한 재밌는 농담이긴 하다.

인용한 부분은 칠레에 사회주의 성향의 아옌데 정부가 들어선 이후 들불처럼 일었던 사회 각 분야의 개혁적 행동 중 하나로써의 문화적 각성의 산출물인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의 영어권 출판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화를 소개한 글이다. 책의 관계자들은 디즈니의 저작권에 대한 –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들에게 적대적인 책의 발간을 막고자 하는 것이겠지만 – 시비를 두려워했고, 이는 앞서의 농담이나 다른 여러 일화에서 알 수 있는바 단순한 기우는 아니었을 것이다.

인용문의 뒤를 읽어보면 결국 맑스 관련 출판물을 전문으로 내는 뉴욕 소재의 제너럴 에디션스 사가 출판을 결정했고 1975년 6월 영국에서 찍은 책이 뉴욕에 도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디즈니는 이 책과 총력전을 펼친다. 디즈니는 책이 자사의 캐릭터를 이용해서 “순진한 부모들로 하여금 디즈니 만화 가운데 하나를 산다고 믿게 하려는” 상술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이 책의 옹호자 측은 캐릭터의 사용이 ‘공정 사용’과 미 헌법 수정 제1조항1에 근거하여 책의 발간을 옹호하였다.

총 68개의 도판은 모두 112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의 상당 부분을 구성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3달러 25센트로 가격이 책정되었으며 압도적일 정도로 장황한 본문으로 이루어진 문제의 책이 디즈니 만화책과 혼동될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 내용 대부분이 구체적이거나 일반적인 맥락에서 이 저서의 정치학적/경제학적인 메시지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이 경우에 아래의 인용문이 매우 합당하다고 믿는 바이다. [다음은 인용문] 헌법 수정 제1조항의 정신은 저작권법에도 적용된다. 그런데 어떤 자가 전혀 다른 성격의 이해를 보호할 의도로 제정된 저작권법을 이용하고자 할 때, 법원은 적어도 일반 대중이 공익과 관련된 모든 사안을 알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어떤 시도도 용인해서는 안 된다. 로즈먼트 엔터프라이즈 사 대 랜덤 하우스 사 소송 사건.[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 아리엘 도르프만/아르망 마텔라르 지음, 김성오 옮김, 새물결, 2006년, p259]

위 인용문은 ‘공정 사용’과 헌법 수정 제1조항이라는 논거를 받아들인 美재무성의 진술이다. 디즈니는 결국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항의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이로 인해 이 사건은 거대 기업 소유의 상당량의 이미지가 정치적 논증을 위해 전재되었고 이런 행위가 공적인 의사 결정 기관에 의해 옹호된 희귀한 사례가 되었다. 더불어 이 사건은 오리지널 저작물을 사용하는 데 있어 그 양(量)이나 구성, 그리고 사용의 의도 등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다양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1. 1791년 재가된 것으로, 이는 표현, 신문, 집회, 신앙 및 정부에 대한 탄원의 자유를 보장하며 國敎의 제정을 금했다

Material Girl 을 듣다가 생각난 서구의 80년대

어떤 소년들은 내게 키스하고 어떤 소년들은 껴안는데
뭐 괜찮아.
만약 그들이 적당한 신용을 제공하지 않으면
그냥 떠나버리면 돼.
Some boys kiss me, some boys hug me
I think they’re O.K.
If they don’t give me proper credit
I just walk away
(Madonna – Material Girl)

유난히 천진난만한 코맹맹이 목소리로 신용거래를 통해 창출되는 애정관계를 묘사한 마돈나의 명곡 Material Girl. 마돈나는 “우리가 물질적인 세계(material world)에서 사는 것을 알지 않느냐”면서 “난 물질적인 소녀야”라고 선언한다. 이 노래는 그녀의 가장 많이 팔린 앨범 중 하나인 Like A Virgin의 수록곡이다.

이 앨범이 발표된 1985년의 미국은 마돈나가 이야기한 바대로 물질적인 분위기가 충만할 때였다. 이 시기, 대통령은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이었고, 경제는 활황세였기에 말 그대로 “돈이 말을 하는” 시기였다. 당시 분위기는 이 시절을 배경으로 한 영화 ‘미국의 싸이코(American Psycho)’에 잘 표현되어 있다.

넌 네 자신이 커다란 자동차의 운전대 뒤에 있는 것을 발견할지도 몰라.
넌 네 자신이 아름다운 집에서 아름다운 아내와 있는 것을 발견할지도 몰라.
넌 이렇게 자문할지도 몰라. 음, 내가 여기 어떻게 왔지?
You may find yourself behind the wheel of a large automobile
You may find yourself in a beautiful house with a beautiful wife You may ask yourself, well, how did I get here?
(Talking Heads – Once In A Lifetime)

바로 이 질문에 대해서 유머러스한 경제학자 사트야지트 다스는 ‘부채’덕분에 그게 가능하다고 말했다. 흠~ 아닌 게 아니라 그래프를 살펴보니 마돈나가 “난 물질적인 소녀야.”라고 외치고 있던 시점에, 미국의 싸이코가 친구의 명함이 자기 명함보다 더 고급스럽다는 사실에 눈썹이 떨리던 시점에 미국의 빚이 급증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돈나를 껴안으려는 소년이 제공하는 신용이나 싸이코가 만든 고급 명함의 재원은 바로 빚을 통해 조달한 것이 되는 셈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이때쯤이면 미쏘 대결구도에서 강경노선을 택한 레이건은 군비확장을 위해 빚을 늘렸고, 소련의 패배가 확실해진 일극(一極)체제에서 미국은 더 거침없이 빚을 늘렸다.

이렇게 빚이 는다고 모두가 그 혜택을 누린 것은 아니다. 당시는 영미권에서 보수정권이 들어서면서 이전의 온정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노동자들을 살벌하게 길거리로 내쫓던 시기였다. Fed 의장인 폴 볼커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살인적으로 올려 채무자들의 주머니를 탈탈 털어냈다. 서민의 삶은 더 힘들어졌다.

당신은 공공의 적인 10번지(다우닝가 10번지인 영국 수상관저)에 의해 위협받게 될까요?
파워게임을 하고 있는 그들.
당신의 임금인상은 없다는 소리를 들을 때
그들은 잉여를 취하고 당신만 책임을 집니다.
Are you gonna be threatened by
The public enemy No. 10
Those who play the power game
They take the profits -you take the blame
When they tell you there’s no rise in pay
(The Style Council – Walls Come Tumbling Down)

패션 스타일에 있어서는 거품이 생겨나는 경제를 대변하기라도 하듯 풍성하고 과장된 스타일이 유행했다. 머리는 한껏 치켜 올려 세웠고, 어깨선에도 과장된 디자인이 적용됐다. 대중음악들도 마돈나의 노래처럼 화려하고 거침없고 빠른 템포의 춤곡이 인기를 얻었다. 화장을 한 남녀들이 저마다의 미모를 뽐냈다.

이제 현대 자본주의에서 그런 시절이 다시 올까? 경기순환론을 믿는 이라면 사회의 생산력을 배가시킬 수 있는 어떤 혁신을 통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믿을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런 시기가 다시 온다면 사람들은 이전에 얻은 교훈을 통해 보다 현명한 경제활동을 할까? 아니면 다시 한 번 “난 물질적인 소녀야”라고 외칠까?

그렇지만 내 희망을 봐. 내 꿈을 봐.
우리가 쓴 현찰들.
(오~) 난 당신을 사랑해. 오~ 당신은 내 월세를 내주지.
(오~) 난 당신을 사랑해. 오~ 당신은 내 월세를 내주지.
But look at my hopes, look at my dreams
The currency we’ve spent
(Ooooh) I love you, oh, you pay my rent
(Ooooh) I love you, oh, you pay my rent
(Pet Shop Boys – Rent)

‘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 感想文

예술, 그 중에서도 미술이란 과연 무엇일까? 어떤 재능이 미술을 미술답게 하고 우리에게 예술적 쾌감을 안겨주는가? 이러한 질문은, 예를 들면 마르셀 뒤쌍의 작품 ‘샘(Fountain)’을 대할 때 더욱 대답하기 난감해진다. 다빈치의 ‘모나리자’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를 볼 때에는 어느 정도 분명해 보이던 것이 ‘샘’과 같은 현대의 추상예술에 접어들면 흐릿해지는 것이다.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는 이런 현대미술의 모호함을 고발한 책이기도 하다.

한편 언젠가부터 이러한 제도권의 위선을 비웃으며 미술계의 ‘힙합전사’가 거리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거친 거리의 청년들이 극장의 호화스러운 무대에서 우아한 춤을 추는 대신에 거리에서 골판지를 깔아놓고 힙합댄스(또는 브레이크댄스)를 추는 것처럼, 일군의 예술가들은 거리의 벽이나 광고판에 불법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전시해놓기 시작한다. 그런 예술가들 중에서 내가 알게 된 최초의 거리예술가는 아마도 장 미쉘 바스키아였던 것 같다.

바스키아의 현란한 색채감과 절제되지 않은 형태의 자유분방한 작품을 접한 제도권은 그에게 ‘검은 피카소’란 별명을 지어줬고, 이윤극대화를 위해 그의 재능을 빠른 속도로 확대재생산한다. 결국 그는 그러한 고통스러운 작품‘공장’에서 자신의 재능을 착취당하며 괴로워하다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지만, 거리 예술가는 그 이후에도 꾸준히 명맥을 이어간다. 그리고 한 프랑스인이 이러한 거리의 삶을 아무 생각 없이 필름에 담기 시작한다.

스스로가 거리 예술가인 뱅시(Banksy)가 감독했다는 다큐멘터리(2010년) ‘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Exit Through The Gift Shop)’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티에리 구에타(Thierry Guetta)가 바로 그 사람이다. 영화는 어릴 적 경험한 엄마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해 모든 것을 비디오로 기록해야만 성이 풀리는 집착증을 가지게 된 티에리가 어떻게 거리 예술가의 모습을 찍게 되었고, 뱅시를 만나게 되었고, 뱅시의 권유에 따라 스스로 거리 예술가가 되어 “상업적으로” 성공하는지를 경쾌하지만 냉소적인 유머감각으로 조명하고 있다.

다큐에 따르면 원래 뱅시는 그가 기획한 미국에서의 전시회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되고, 또 다시 거리예술이 제도권의 상업주의에 편입되는 과정을 보면서, 거리예술의 진정한 모습을 티에리의 기록물을 통해 알리기 위해 티에리에게 기록물을 편집해 작품으로 만들 것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티에리의 재앙 수준의 작품에 넋을 잃은 뱅시가 작품의도를 완전히 바꾸고 티에리의 자료를 기초로 새로운 작품을 만들면서 이 영화가 탄생하게 된다.

즉, 뱅시의 권유에 따라 티에리 스스로가 전시회를 기획하고 큰 성공을 거두게 되는데, 이 과정이 제도권 미술계의 허영심에 찌든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것을 간파한 뱅시가 작품을 거리예술에 대한 소개 다큐가 아닌 거리예술을 기록하고 다니던 티에리의 인생역전 드라마로 바꿔 버린다. 이를 통해 그는 다다이즘, 바스키아, 그리고 뱅시 그 자신 등, 미술계의 연속되는 사기극이 티에리에 이르러서도 반복재생되고 있음을 고발한다.

특히 티에리가 존경하는 뱅시의 권유에 따라 기획한 전시회가 모두의 예상과 달리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자하여 어이없는 대규모의 전시회로 만들고, 구인모집을 통해 작품을 제작할 기술자들을 모집하고 – 마치 다큐에 언급된 데미안 허스트처럼 – , 전시장을 기존의 팝아트를 포토샵으로 변형시킨 작품으로 메워가는 과정이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재생산 도식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사기극의 극적효과는 더욱 두드러진다. 예술의 자판기 수준이랄까?

예술적 재능과 관련 없는 티에리의 성공에 대해 뱅시 등 거리예술가들은 씁쓸한 미소를 짓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티에리는 여전히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이룬 성공에 흡족해 한다. 작품구입자들은 티에리의 작품이 어떤 예술적 성취를 이루었건 간에 다음 거래에서 만족할만한 투자수익을 거두기만 하면 되니까, 어쨌든 이 예술계의 서브프라임모기지 채권은 시장이 폭발하기 전까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보관되거나 유통될 것이다.

80년대 팝계의 20대 사건

출처가 어디인지는 불명입니다. http://myhome.naver.com/ouimoi/favorite/80년대사건.htm 라는 링크가 남아 있긴 한데, 지금 열어보니 더 이상 서비스를 하지 않는 페이지라는군요. 누군가 예전에 “음악세계”란 잡지에서 본 것 같다는 코멘트를 달아놓기도 했네요. 여하튼 저작권이 있으신 분이 있으시면 연락주시고요. 이 중 몇 개나 동의하시는지 한번 곰곰히 생각해보는 것도 재밌겠네요.

Pop Events Of The Decade (80년대 팝계의 20대 사건)

1. 1980-핑크 플로이드의 화제작 「벽」

1980년 최대의 화제작은 핑크 플로이드의 「벽」(The Wall)이었다. 67년 데뷔작 「여명의 문 앞에 선 풍적수」(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를 발표한 이래 핑크는 프로그레시브 음악으로 팬들은 물론이고 아티스들에게도 음악적인 영향을 미쳤다. 73년 「달의 어두운 면」(Dark Side Of The Moon) 이래 최대의 앨범이라는「벽」은 15주간 차트 정상을 차지했는데, 82년에 영화로도 제작되어 또 다시 핑크 플로이드 열풍을 몰고 오기도 했다. 앨런 파커 감독의 이 영화는 당시로선 최장시간의 록영화였다. 라이브 에이드로 우리들에게도 친숙한 봅 겔도프가 주연한 이 영화는 록 스타의 정신적인 붕괴를 다룬 것이다. 영화 속에 나오는 애니메이션은 정치만화 칼럼니스트로 유명한 제럴드 스카프의 작품.

2. 1980-존 레논 흉탄에 쓰러지다

비틀즈의 존 레논이 80년 12월 8일 뉴욕에 있는 다코타 아파트에서 마크 채프먼이라는 사내의 총탄에 쓰러졌다.  80년 11월, 5년 동안의 침묵을 깨며 그는 앨범 「이중 환상」(Double Fantasy)을 발표하여 팬들을 설레게 했었다. 싱글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Just Like> Starting Over)은 그의 죽음 이후 차트 1위에 올라 사람들을 더욱 애석하게 했다. 비틀즈 시절 “우리는 예수보다 유명하다”는 말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던 존은 60년대 팝 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만함 속에 번득이는 예지등으로 그의 개성은 더욱 팬들에게 어필되었고, 65년 비틀즈 멤버로서 ‘대영제국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3. 1981-MTV의 영향

1981년 8월 미국의 어느 케이블 방송국은 24시간 동안 음악만을 방송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MTV(Music Televison)이다. 75년 일본의 소니사에 의해 비디오가 대중화될 때부터 MTV의 출현은 이미 예상되었는데, 디스크의 소리에 TV의 화면을 접목시킨 것이었다. 노래를 듣고, 거기에다 보기까지 하니 음악의 내용도 상당히 변하게 되었다.  MTV는 뉴 웨이브 가수들의 출현을 앞당기기도 했다. 듀란 듀란, 컬처 클럽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70년대 통신기기의 대변혁인 비디오가 음악에 미친 영향은 바로 MTV의 출현이었다.

첫 시작을 알린 비디오는 그 유명한 The BugglesVideo Killed The Radio Star

4. 1981-뉴웨이브의 기수들

뉴웨이브라는 말처럼 뜻이 다양하고 복잡한 용어도 드물 것이다. 70년대 말 펑크와 디스코, 그리고 기존 록의 혼합물을 뉴웨이브라고 부르는데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기계적으로는 MTV의 등장이 뉴 웨이브의 출현을 앞당기는 역할을 했다. 70년대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을 80년대의 요구에 맞춘 것이 뉴 웨이브라고 보는데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대중적인 기반은 1981년 블론디였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고 멘 앳 워크. 폴리스. 유리쓰믹스. 컬처 클럽. 듀란 듀란 등 수많은 아티스트가 등장했다. 감각적인 사운드, 현대적인 감각의 화장 및 분장 그리고 환상적인 패션 등이 그들의 개성이기도 했다. 70년대 말의 파괴적인 펑크 시대 이후 찾아온 대중 음악, 그것이 뉴 웨이브였다.

5. 1982-CD 및 LPD의 개발

디스크와 TV의 만남이 MTV였다. 하지만 우리들은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시각과 청각의 동시 해결이라는 요구는 풀렸지만 그 질(質)이 문제였다. 먼저 원음(原音)에 가까운 소리를 듣고자 했다. 그것이 CD(Compact Disk)이다. 일본의 소니사와 네덜란드 필립스사는 82년 CD발매를 개시했다. 광통신(光通信)의 발전은 거기에서 머물지 않았다. 화면도 실물에 가까운 생생한 것을 가능케 했다. 그것이  LDP(Laservision Disk Player)이다. 83년 일본의 파이오니어사는 LDP를 시장에 내놓기 시작했다. MTV가 제공하는 음악의 발전 단계가 LDP인 것이다. 이제 팬들은 생생한 소리와 화면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비디오의 등장처럼 LDP가 음악계의 흐름을 뒤집진 못하고 있다. 지금은 초기 단계다. LDP의 대중화는 비디오에 못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결국 LDP는 단명하고 말았고 현재는 DVD가 대세죠 : 옮긴 이 주)

6. 1982-80년대의 음악 뉴 에이지

80년대 들어 태동한 두 가지 음악 장르라면 뉴 에이지와 랩이다. 80년대 초부터 ‘뉴 에이지’ 또는 ‘환경음악'(주로 일본) 등으로 불린 이 음악은 동양적인 명상음악이라는데 특징이 있었다. 굳이 뉴 에이지를 82년의 사건으로 잡는데는 약간의 무리가 있지만, 뉴 에이지라는 음악을 대중화시킨 조지 윈스턴의 활동을 기초로 했다. 80년 조지는 「가을」(Autumn), 「겨울에서 봄으로」(Winter Into Spring),「12월」(December)등을 발표했다. 위의 앨범이 꾸준히 팬들의 사랑을 받아 83년 초 빌보드 재즈 차트에  오르기도 했다. 한편 반젤리스는 82년 <불의 마차 ‘(Chariots Of Fire)라는 영화음악으로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반젤리스가 뉴에이지? : 옮긴 이의 의문) 이때부터 뉴 에이지는 그
독립성을 인정받아 87년 최초의 뉴 에이지 그래미 수상자 안드레아스 플렌바이더를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CD의 보급은 뉴 에이지를 전파하는 데 큰 몫을 했다는 사실도  간과해선 안되겠다.

7. 1983-80년대의 대표적인 뮤지션 마이클 잭슨

지금도 팬들에겐 <빌리 진>(Billie Jean)의 전주 부분이 귀에 생생할 것이다. 83년 팝계를 휩쓸어 버린 수퍼스타가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마이클 잭슨이다.  당시만 해도 흑인 가수의 방영을 꺼리던 MTV에 그는 백인에 가까운 성형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영화감독 존 랜디스 (“블루스 브러더스”<Blues Brother>의 감독)를 영입하여 만든 비디오 <비트 잇>(Beat It)은 마이클을 수퍼스타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모타운 설립 20주년 기념식에서 보여준 그의 춤 솜씨와 퀸시 존스에 의해 프로듀스된 앨범 「스릴러」(Thriller)의 펑키한 사운드, 그리고 백인에 가까운 분장 등은 MTV의 장점을 가장 완벽하게 이용했다는 평을 들었다. 그 앨범에선 싱글 톱10이 7곡이었는데, 덕분에 마이클 잭슨은 그 해 그래미상  8개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8. 1983-온 거리를 뒤흔든 브레이크 댄스

수퍼스타 마이클 잭슨의 등장 이후 뒤로 걷는 댄스 스텝은 팝계의 또 다른 화제거리였다. 길거리에서도 그를 흉내내는 청소년들을 보기란 어렵지 않았다. 관절을 비틀어 대는 춤 때문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는 기사들이 발표되기도 했었다.  이름하여 브레이크 댄스 열기였다. 이 좋은 소재를 영화계에서 놓칠리가 없었다. 83년 애드리언 라인 감독의 “플래시댄스”(Flashdance)가 바로 그것이다.  제니퍼 빌스 주연의 이 영화는 황당한 스토리를 지닌 것이었지만 디스코 작곡가로 유명한 조르지오 모로더의 음악 덕분에 흥행에 성공한 영화였다. 특히 아이린카라가 부른 <플래시댄스>와 <신나는 기분> (Flashdance What A Feeling)(이 노래가 언제부터 두곡이었을까나… : 옮긴 이의 의문)은 오스카 주제가상을 받았다. 이 영화 이후 댄스 음악은 영화에서 주요한 위치를 갖기 시작했다.

9. 1984-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열기

84년은 유난히 뛰어난 앨범이 많이 발표된 해였다. 한 앨범이 계속해서 1위에 머무는 바람에 1년(약52주) 동안 4개의 앨범만이 넘버원을 차지했다.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프린스의 해라고 해도 좋을 시기였다. ‘보스'(브루스)는 70년대 미국을 대표하는 가수였지만 「미국에서 태어나」 (Born In The U.S.A) 앨범으로 대중적인 기반도 확실히 다지게 되었다. 「끝없는 질주」(Born To Run)로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한 그는 그 해 타임, 뉴스위크 양 잡지의 표지인물로 선정되기도했다. 80년 「강」(The River)으로 앨범 1위를 기록한 그는 수작 「네브라스카」 Nebraska) 이후 84년 「미국에서 태어나」를 발표했다. 재킷에 노동자 복장 차림의 사람이 성조기를 향해 오줌을 누고 있는 듯한 자세 때문에 말도 많았지만 본인은 강력히 부인하기도 한 문제의 앨범이었다.

10. 1984-미네아폴리스 사단의 리더 프린스

TV 드라마 “배트맨”(Batman)의 주제곡을 열심히 피아노로 연주하던 소년이 바로 영화 “배트맨”의 사운드트랙을 맡았던 프린스이다. 1984년은 한 마디로 보스와 프린스의 해였다. 특히 프린스는 작곡, 작사, 프로듀서, 싱어를 겸하는 만능 재주꾼으로 83년의 마이클 잭슨 열기를 뒤엎기에 충분한 인물이었다. 70년대에 데이비드 보위가 새로운 음악의 창조를 위해 노력했다면 80년대는 단연 프린스였다. 그는 「심홍색 비」(Purple Rain) 한 장의 앨범으로 표현된다. 바로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스타 제조기이기도 하다. 배내티와 아폴로니아가 프린스 사단 출신이며, 실라E. 차카 칸. 마돈나. 시나 이스턴 등 그가 후원한 가수는 수도 없이 많다.

11. 1985-만능 엔터테이너 마돈나

80년대 최고의 여성 가수로 마돈나를 지목하기에 주저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1985년 마돈나는 「처녀처럼」(Like A Virgin)으로 전 세계 팝 팬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고 말았다. 프로듀서는 듀란 듀란의 프로듀서로도 유명한 나일 로저스. 미모와 섹시함 그리고 가수로서의 가창력과 춤 등이 그녀를 수퍼스타로 만들기에 충분했지만 MTV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그녀는 MTV 등장 이후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88년에는 브로드웨이 연극에도 출연하여 화제를 몰고 온 그녀는 영화배우 숀 펜과의 결혼 생활을 끝내는 등 끊임없이 구설수에 올랐지만, 올해 「기도처럼」(Like A Prayer)을 발표하며 자신의 건재를 과시하였다.

12. 1985-이디오피아 난민구호 ‘라이브 에이드

85년 7월 13일 영국 런던의 웸블리 구장과 미국 필라델피아의 존 F. 케네디 구장에서 동시에 대규모 콘서트인 ‘라이브 에이드'(Live Aid)가 개최되었다. 이디오피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난민을 돕기 위한 자선공연이었다. 장장 16시간의 공연, 200여명의 아티스트 출연, 430억의 자선 기금, 세계 140개국에의 15억 시청자 등등 종래의 모든 기록을 깨버린 행사였다. 영국의 록 그룹 붐 타운 래츠의 리더 봅 겔도프는 이 행사를 개최한 공로로 그 해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라이브 에이드’는 우드스톡 이후 최대의 공연이었으며, 이 행사에 자극받아 해리 벨라폰테는 ‘우리는 곧 세계'(We Are The World) 라는 앨범(We are the world는 라이브에이드 이전에 나오지 않았나요? : 옮긴 이의 의문)을 제작하기도 했다. 프로듀서는 퀸시 존스. 빌보드 차트 1위 및 그래미상 수상의 영광도 안은 앨범이었다.

13. 1981-뉴 웨이브의 기수들

뉴 웨이브의 열기, MTV의 등장 그리고 아티스트의 개성 등이 그 시대와 딱 들어맞은 뮤지션이 왬이었다.  조지 마이클과 앤드류 리즐리로 구성된 이 영국 듀오는 1984년 <떠나기 전에 깨워주오>(Wake Me Up Before You Go-Go)를 싱글 차트 1위에 올려 놓으며 스타덤에 올랐다. 1985년 중국 공연까지 벌였던 그들은 특히 여성 팬들의 우상이었다.  준수한 외모와 로맨틱한 노래로 국내에서의 인기도 대단했는데 85년 <경솔한 속삭임>(Careless Whisper)은 아마 팝 팬들에게 많은 추억을 준 곡으로 짐작된다. 흑인의 소울을 팝 감각으로 소화시켜 자신들의 개성을 구축했던 이들은 2집 「크게 해봐」(Make It Big)의 성공 이후, 끝없이 해체설이 돌다 결국 86년 헤어지고 말았다.

14. 1986-앰네스티 로큰롤 순회공연 개시

86년 ‘앰네스티’라는 단체가 뉴스에 종종 오르내렸다.’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라는 이 단체는 각국의 탄압받는 양심수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61년에 조직되었다. 온 세계에 이 단체의 존재를 명확하게 알리는 데는 록 스타들의 역할이 컸다. 앰네스티 미국 지부의 잭 힐리라는 사람은 85년 ‘라이브 에이드'(Live Aid) 공연의 위력을 실감한 뒤 대규모 록 행사를 계획했다. 86년 6월 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 개최되었던 이 행사에서 U2와 스팅 등은 자신들의 개성을 팝 팬들에게 강력히 심어 주기도 했다. U2는 이 행사로 전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는 1987년 ‘여호수아 나무'(The Joshua Tree)로 나타났다. 1988년 ‘지금 인권을'(Human Rights, Now!)공연으로 이 행사는 맥을 잇고 있다.

15. 1987-미래의 검은 로큰롤 랩

50년대 로큰롤이 등장했을 때 젊은이들의 호응은 열광적이었지만 기성세대는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정적이고 도발적인 춤, 가사, 창법 등으로 젊은이들을 흥분시켰던 로큰롤은 기성세대들이 보기엔 천박한 잡음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후 로큰롤은 대중음악의 주류가 되었다. 아직은 소수이지만 랩에서 로큰롤이 가졌던 의의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80년대 중반 흑인들 사이에서 랩이 퍼지기 시작했다. 마구 지껄이는 폭력적인 가사, 반복되는 리듬 등으로 일반 팬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던 음악이 랩이었다. 86년 런-DMC에 의해 랩의 저변이 확대되기 시작하더니 87년 드디어 백인 래퍼 3인조 비스티 보이스의 「살인 허가」(Licenced To Kill)가 앨범 차트 1위에 올라섰다. 뉴 에이지와 함께 80년대에 탄생한 장르로 새로이 위치를 굳힌 랩은 올해 톤 록이라는 또 다른 스타를 내기도 했다.

16. 1987-로큰롤은 U2를 통해 재탄생되었다.

85년의 ‘라이브 에이드'(Live Aid)와 86년의 앰네스티 순회공연을 통해 등장한 스타 중 U2의 부상은 단연 돋보이는 것이 있었다. 특히 앰네스티 공연에서 U2의 리드 싱어 보노가 보여준 개성은 60년대 도어스의 짐 모리슨이 보여 준 바로 그것이었다. 아일랜드 출신 4인조 U2는 87년 팬들에 보답하는 앨범 「여호수아 나무」(Joshua Tree)를 발표했다. 이 앨범은 차트 1위에 랭크된 것은 물론이고, 78년 팀결성 이후 발표한 앨범들도 덩달아 차트에 무더기로 진입하여 그들의 인기를 실감케 했다. 정통 로큰롤에 실린 의미있는 가사와 진지한 매너로 한몫 보기도한 U2는 그 해 그래미상을 휩쓸기도 했다. 오랜만에 로큰롤이 U2를 통해 기지개를 켠 87년이었다.

17. 1988-일년내내 톱10에 랭크된 조지 마이클의 「믿음」

1988년은 오직 한 명의 스타가 독주한 해였다. 그 주인공은 조지 마이클. 86년 왬이 해산될 때부터 그의 솔로 등장은 시간 문제였다. 섹스 어필하는 용모와 흑인 가수를 방불케하는 소울 창법 등 스타가 될 만한 재능이 넘치는 영국 가수였다. 그의 솔로 데뷔 앨범은 「믿음」(Faith)이었는데, 이 앨범은 88년 한해 단 1주만 11위를 기록하였고 나머지 기간에는 톱10안에 랭크되었었다. 정상에 머무른 기간도 12주였다. 싱글 1위곡도 5개나 터져 나왔다(I Want Your Sex, Faith, Father Figure, One More Try, Monkey). 마이클 잭슨도 마돈나도 이런 기록은 세우지 못했다. 트레이시 채프먼의 포크와 스티브 윈우드의 컴백도 조지 마이클의 열기를 따라 잡진 못한 한 해였다.

18. 1988-헤비 메틀의 전성기를 다시 연 밴드들

88년 후반부의 주인공은 데프 레퍼드와 건스 & 로지스였다. 이들이 벌인 차트 경쟁은 헤비 메틀 만큼이나 치열한 것이었다. 88년 메틀계에 불을 당긴 팀은 반 헤일런의 「오! 자네도 하나 먹었군」(OU 812) 앨범으로 시작해서 데프 레퍼드의 「히스테리아」(Hysteria), 건스 & 로지스의 「파괴 망」(Appetite For Destruction) 그리고 본 조비의 「뉴 저지」(New Jersey)까지 그 열기는 이어졌다. 데프 레퍼드는 83년 「방화광」(Pyromania)에 이어 「히스테리아」도 7백만 장 이상 판매하여 앨범 2장을 연속으로 7백만장 이상 판매한 최초의 밴드가 되었다. 이들을 이어 건스 & 로지스 그리고 본 조비가 메틀의 열기를 이었다. 「뉴 저지」가 차트 1위에 올랐을 때 2위는 「파괴 욕망」, 3위는 「히스테리아」였다. 빌보드 차트 사상 메틀 밴드의 앨범이 1,2,3위를 휩쓴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19. 1989-팝계의 새로운 주인공 10대 가수들

89년은 유난히 10대 가수들의 활약이 돋보인 해였다. ’10대현상’은 88년 티파니부터 시작되었다. 데뷔 앨범 ‘티파니'(Tiffany)를 차트 정상에 올려놓으며 그녀는 10대 선풍을 몰고 왔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곧이어 데비 깁슨이라는 천재 소녀가 출현했다.  데뷔 앨범 「뜻밖에」(Out Of Blue)에 이어 「짜릿한 청춘」(Electric Youth)을 내놓으며 티파니의 인기를 능가하고 있다. 전반기는 보비 브라운의 독무대였다. 앨범 「잔인하게 굴지 마세요」(Don’t Be Cruel)에서 연속으로싱글 히트곡을 내놓았다(Don’t Be Cruel, My Prerogative, Roni, Every Little Step 등). 후반부는 뉴 키즈 온 더 블록이었다. 앨범「끈질기게 버텨」(Hangin’ Tough)를 차트 1위에 올리며 동명 싱글곡 외에 <커버 걸>(Cover Girl), <내가 (당신을 황홀하게 하지 않았어요>(Didn’t I<Blow Your Mind>)등을 연속 히트시켰다.

20. 1989-돌아온 공룡들

전반부엔 10대 가수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면 후반부는 60년대 로커들의 재등장이 활발한 시기였다. 토론토 공연으로 시작된 더 후의 컴백,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재등장. 봅 딜런. 반 모리슨. 비지스. 링고 스타 등의 새로운 모습이 인상적인 해였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1989년의 사건은 롤링 스톤즈의 재결합 공연이었다. 필라델피아에서 8월 31일 시작된 그들의 순회공연은 미국을 온통 뒤집어 놓았다. 뉴욕에선 공연이 예정되자마자 6시간만에 약 30만장의 입장권이 동나버리기도 했다. 새 앨범 「강철 바퀴」(Steel Wheels)와 싱글 <복잡한 감정> (Mixed Emotion)은 차트 정상을 향해 질주했다. ‘구르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말을 실감케 했다.

페르낭 레제, ‘여가 – 루이 다비드에게 보내는 경의’

큐비즘, 기계, 건축, 공산당, 서민적 레크리에이션 등등. 우리에게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큐비즘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하나인 페르낭 레제(Jules Fernand Henre Léger)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몇 가지 키워드를 나열해보았다. 우리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작품 중 하나로는 ‘여가 – 루이 다비드에게 보내는 경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국립 퐁피두 센터가 소장하고 있는 이 작품은 2008년 한국에서 열린 ‘퐁피두 센터 특별전 <화가들의 천국>’이 열릴 때에 국내에 전시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 작품이 앞서 나열한 페르낭 레제의 그림에 관한 키워드가 포괄적으로 내재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Les Loisirs. Hommage à Louis David
huile sur toile de Fernand Léger – 1948-1949
Paris,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 Centre Georges Pompidou
© ADAGP Paris 2004
© CNAC / MNAM – distr : RMN / Jean-François Tomasian

1881년 생인 페르낭 레제는 건축을 공부하다 1910년경부터 큐비즘 운동에 참가, 피카소, 로베르 들로네 등과 함께 적극적인 추진자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위대한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영향을 받은 그는 기계문명, 건축, 추상회화의 접점을 모색하는 그림을 즐겨 그렸다. 1919년 그린 ‘도시’ 라는 작품을 보면 이러한 경향을 잘 목격할 수 있다. 공산주의자였던 그는 기계문명에 대해 낙관적이었고 이를 즐겨 표현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기계문명과 기술진보에 대해 낙관적이란 점에서 목가적인 反기계문명론자와는 다른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그의 입장이 유별날 것은 없다.

그의 작품만의 특징을 하나 들자면 유난히 원통형에 대한 묘사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기계 플랜트에 들어가는 각종 배관을 염두에 두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그의 경향에 대해 한 평론가는 큐비즘이란 단어를 재밌게 비틀어 튜비즘(Tubism)이 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여하튼 이런 레제의 원통형에 대한 집착은 구상화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그가 그린 사람들은 원통형의 체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가 그린 사람들은 뚱뚱해 보인다기보다는 튼튼해 보이는 골격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유난히 뚱뚱한 사람을 즐겨 그렸던 콜롬비아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와는 또 다른 느낌을 준다.

다시 ‘여가 – 루이 다비드에게 보내는 경의’로 돌아가 보자. 사실 이 작품을 맥락 없이 전시장에서 만난다면 그저 평범한 남녀가 여가를 즐기는 모습쯤으로 짐작할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기술진보로 노동자들에게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서 여가를 즐기고 있는 모습을 담으려는 의도가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작품이다. 예의 원통형 몸의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천국” 미국에서 유입된 자유분방한 옷차림을 하고 하이킹을 즐기고 있는데, 기술진보로 직장에서 잘리는 대신 여가를 즐기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그린 사회는 이미 이상적인 노동자 중심의 사회가 전제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레제가 이런 낙관적인 이상향을 묘사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좌익들이 확실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던 프랑스의 정치상황이 자리 잡고 있다. 프랑스 좌익은 1930년대 파시즘의 위협 하에 사회당, 공산당 등이 결합한 인민전선을 결성한 후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1936년 6월 총파업 이후 전국적 규모의 중앙노사협정인 마티뇽 협정(Accords de Matignon)이 이루어졌는데, 이로 인해 대표적 노동조합의 개념과 단체협약의 효력확장규정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이 협정에는 프랑스에서는 최초로  ‘2주간 유급휴가제’가 도입되어 노동자는 비로소 유급휴가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퐁피두 센터의 설명에 따르면 레제의 의도는 바로 이러한 노동자를 위한 유급휴가를 지지하라는 것이었다. 휴가는 이전까지 귀족이나 부르주아지의 전유물이었고, 이러한 분위기는 조르주 쇠라의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에서 잘 느낄 수 있다. 프랑스 노동자는 마티뇽 협정 이전까지는 유급휴가를 즐길 수 없었다. 그런데 계급투쟁을 통한 자본가와의 타협, 기술진보로 인한 사회잉여의 증가 등이 노동자의 여가를 이야기할 수 있는 물적 토대가 이 시기부터 만들어졌다. 그래서 자연히 이 작품에는 혁명까지는 아니어도 사회개혁을 통한 노동자 세상에 대한 낙관이 담기게 되었다.

이렇듯 우리가 오늘날 당연시하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노동자의 유급휴가는 – 사실 잘 알다시피 그마저도 여전히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이 그렇듯이 이렇게 지난한 계급간의 갈등과 투쟁, 그리고 레제와 같은 예술가들의 선전선동에 의해 기틀을 다져온 것이다. 일단 무엇이든지 가지게 된 자들은 웬만해선 기득권을 잘 양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평론가는 그의 작풍을 “사회주의 이론의 결과이되, 전투적인 맑시스트라기보다는 열정적인 휴머니스트”적인 것이라 평했는데, ‘여가’는 이러한 평가에 잘 어울리는 작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