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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40년이 지난 후, Talking Heads의 가장 가치 있는 멤버는 여전히 가장 낮게 평가받고 있다

Tina Weymouth of Talking Heads.jpg
By Jean-Luc – originally posted to Flickr as Talking Heads, CC BY-SA 2.0, Link

Carrie Courogen(원문 보기)

당신이 토킹헤즈의 대표곡들을 들을 때면 그 음악에는 하나의 두드러진 공통점이 있다. : 티나 웨이마우스(Tina Weymouth)의 훵키하고 멜로디 넘치는 베이스라인. 그가 없었다면 “Psycho Killer”나 “Burning Down The House”, 그리고 “Once in a Lifetime”이 없었을 것이다. 즉시 알아들을 수 있는 그루부는 곡의 가사가 사라지는 순간에도 우리의 뇌 속에 스며들어 있다. Jay-Z에서부터 최근에는 셀레나 고메즈(Selena Gomez)에 이르기까지 계속 샘플로 사용되고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던 것은 웨이마우스의 베이스라인이지만 이것들을 창작해낸 그의 역할은 아직까지 거의 논의되고 있지 않다.

웨이마우스의 기념비적인 “Psycho Killer”의 리프에 기초해서 만든 고메즈의 “Bad Liar”가 발매되자마자 평론가들은 데이빗 번(David Byrne)이 그 영향력있는 샘플에 기여한 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식적인 승인에 초점을 맞추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프론트맨을 뒷받침했던 여성이 종종 그러했던 것처럼 웨이마우스에 대한 평가 역시 일종의 부가적인 영역이었다.

66살의 웨이마우스 또한 명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난 그런 것에 대해 내 자신이 별로 개의치 않는다고 생각해요. 내가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죠.” PAPER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웨이마우스가 한 발언이다. “난 여전이 여기 있고 내 할 일을 해요. 결론적으로는 그게 진정한 모든 것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인식하는가가 아니라요.”

최근의 인터뷰에서 토킹헤즈의 드러머인 (그리고 웨이마우스의 남편) 크리스 프란츠(Chris Frantz)는 “토킹헤즈에서 티나 웨이마우스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그저 또 다른 어떤 밴드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왜 그가 그렇게나 중요한 역할을 했던 어떤 밴드의 유산에서 그는 서서히 배제된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

평론가들은 종종 웨이마우스가 킴 고든(Kim Gordon)에서 에스터 하임(Este Haim)에 이르기까지 많은 여성 베이스 연주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하곤 한다. 그러나 다른 더 많은 이들에게는 아니다. 사람들은 그가 (프란츠와 함께) 번의 난해한 아이디어를 리듬 섹션의 범위 내에서 캐치하고 상징적인 팝뮤직으로 변환하는 비법을 발견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의 프로파일을 심도 있게 적지 않는다.

그의 베이스라인은 밴드의 맥박이 되고 다운타운 펑크를 새로운 어떤 사운드로 만들어냈다. : 팔리아먼츠(Parliament)와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의 쏘울이 넘치고 훵키한 즉흥곡과 캐롤 케이(Carol Kaye)의 견실한 락음악의 춤추기 쉬운 컴비네이션. 이 사운드는 확실하게 쭉 뻗어나가는 멜로딕 훵크에서 아프리카에 영향받은 복합적인 리틈의 댄스 음악에 기초한 날카로운 그루브에 이르기까지의 넓은 스펙트럼을 커버했다. – 그와 프란츠가 후에 그들의 영향력있는 그룹 Tom Tom Club으로 개발했던 그 사운드.

그러나 웨이마우스에 대해 쓸 때에 그는 기껏해야 유머 감각 없이 잔소리가 심한 여자에서 심지어 번에 초점을 맞춘 이들에 의해 “락의 레이디 맥베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묘사되면서도 그의 음악가적 기질은 무시되어 왔다. 이러한 수사는 드문 것이 아니다. – 단지 그들이 창출하는데 기여했던 역사로부터 지워지고 있는 여성 아티스트들의 더 커다란 문제의 징후에 불과하다. 그들은 자주 흑과 백의 극단적인 개성으로 묘사되곤 하고, 그들의 성별(gender)이 언급되고 –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재능 있는 – 혹은 남성 평론가들의 렌즈를 통해 철저한 관찰된 중에 제대로 형성된 남성 동료들의 그늘 속의 배역으로 정의된다.

데이빗 바우맨(David Bowman)의 2002년 전기 This Must Be The Place : The Adventure of Talking Heads in the 20th Century를 보자. 그는 번을 이 이야기에서 겸손하고 친근한 주창자(protagonist)이자 진정한 영웅으로 묘사하면 반면, 웨이마우스를 묘사하길 적대자(antagonist), “다소 예민한”, “카톨릭 성인의 분위기가 나는, 또는 비극적으로 다리를 저는 프리마 발레리나. 또는 앤디 워홀을 저격했던 발레리 솔라니스(Valerie Solanis).”1 이 정도는 바우먼이 친절한 것이다. 나중에 그는 그를 “로체스터(Rochester)의 아내, 미친 인간”으로 비유하고 그의 기억들을 “유해하다”고 규정했다.

평론가들은 종종 디테일을 대충 묘사한다. 번이 밴드에서의 그의 역할을 위해 그를 세 번 오디션했다고 한다. – 다른 멤버들에게는 요구하지 않았던 것. 2015년의 다큐멘터리 Girls in Bands에서 그는 번이 그에게 “여성에게 위험한 곳이기에 이 큰 세상에서 진정한 여성의 역할은 없다”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일이 꼬일 때마다 번은 웨이마우스를 탓했다. “데이빗이 불안해할 때마다 내가 그의 괴롭힘 대상이었다. 그가 일이 잘 안 풀릴 때마다 그에 대해 날 괴롭히곤 했어요. 내내 내겐 고통이었죠.” 그는 바우먼에게 자세히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티나 웨이마우스는 그가 대체로 그의 다른 여성 등료들과 다르게 그렇게 확신을 주는 인물이 아니어서 충분한 신뢰를 얻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잘 해낸 것, 음악을 연주하는 것의 더 이상을 능가하고 싶지 않아요.” 1979년 Creem에서 그가 한 말이다. “난 여성임을 이용하지 않았는데 그런 것들을 아껴두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죠.”

그는 임신 중에도 토킹헤즈의 공격적인 세계 공연에 따라나섰던 여성이고, 진통 중에도 베이스 트랙을 녹음했다. 데이빗 번의 그늘에서 라이브를 하는 것과 같은 거친 진실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던 여성이다. : “몇 해 동안” 로스엔젤레스타임스에 그가 한 말이다. “사람들은 내게 데이빗에 대해서만 물어봤고, 난 대답을 잘 했었죠.”

그는 가혹하도록 충성을 했고 대단히 신뢰할 만 했으나 팡파레를 원하지 않았다. 밴드를 하는 것은 프란츠의 꿈이었다. 그가 도쿄의 레드불뮤직아카데미(Red Bull Music Academy)에서의 2014년 강연에서 회고하길 그는 거의 2년 동안 베이스 주자를 찾아 헤맸다. 결국 아무도 나서지 않았고 웨이마우스는 밖에 나가서 거의 그만큼 큰 베이스를 사왔다. 그리고 밴드에 끼어들었다.

“밴드가 첫 라이브를 할 때까지 난 단지 5개월 동안 베이스를 연주했어요.” 같은 강연에서 그가 설명했다. “난 정말 펑크였던 셈이죠. 철저한 독학자였어요. 수업을 듣지도 않았죠. 아무도 어떻게 연주하는지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그는 구멍을 발견하고 어떻게 다른 사람의 요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여성들이 몇 세기동안 보답을 바라지 않고 해온 일이다. 밴드 멤버들이 그들의 초기 시절을 회상할 때 그들은 그가 번과 프란츠와 함께 온방이나 목욕탕도 없는 상업용 다락에서 살며, 그들에게 음식을 만들어주고, 머리를 잘라주고, 공연장까지 운전을 해주고, 베이스 주자와 로드 매니저라는 이중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회고한다.

티나 웨이마우스는 선구자였고 그 영향력은 특히나 여성들에게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남아있다. 그는 그만의 길을 지치지 않고 나아가고 있고, 프란츠와 새 음악을 만드는 와중에 멘토역을 하거나 더 젊은 아티스트들과 협업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좋았던 것 하나는 내가 여성이어서 겪었던 문제에 대해 한번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에요.” 1981년 The Face에서 그가 한 말이다. “나는 똑 같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다른 이들을 의기소침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난 그 길이 오르막을 오르는 수레처럼 보이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실제론 그랬지만요.”
여성은 때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비록 웨이마우스가 스스로 주목받는 것이나 여성으로서의 시도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했던 것이 상황을 복잡하게 하긴 했지만 말이다. 이것은 일종의 캐치22(catch-22)다. “나는 언제나 페미니스트였어요.” PAPER에서 그가 한 말이다. “난 단지 언제나 그 질문을 받는 것이 싫었어요. 그건 나를 ‘날 바라볼 때 생각나는 것이 그게 다에요? 여성으로서? 날 아티스트로 보지 않아요? 날 뮤지션으로 보지 않아요?’라는 질문에 가두는 것이에요.”

침묵을 지키는 것은 제자들이 그를 베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또한 그를 또 하나의 미스터리로 만든다. 그래서 그 앞에 지나갔던 많은 여성들처럼, 그 역시도 편견에 사로잡힌 비평가들의 투사와 남성들의 속 좁은 생각을, 그의 영향력이 단지 하나의 주석으로 축소되는 것을 참아왔다. 늘 그랬으니까.(Same as it ever was)

  1. 미국의 급진적 여성주의자. 앤디 워홀 미수사건의 범인으로 유명하다.

George Michael: 제조업화된 음악 산업 내에서의 보기 드문 신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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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iversity of Houston Digital Library – http://digital.lib.uh.edu/u?/p15195coll6,268, Public Domain, Link

(원문 보기)

편집자 노트 : Clay Cane 는 “Live Through This: Surviving the Intersections of Sexuality, God, and Race,”의 저자이다.

2016년 크리스마스에 우리는 또 한방 먹었다. 조지 마이클이 53세의 나이로 심장 질환으로 보도된 원인으로 인해 갑자기 세상을 등졌다. 소셜미디어는 그의 히트곡들 “Father Figure,” “Faith”, “Praying for Time” 등으로 그를 회상하느라 북새통이 되었다. 조지 마이클은 신과도 같은 목소리, 뛰어난 작곡 능력, 죽이게 잘 생긴 얼굴의 팝스타 이상의 인물이었다.

Georgios Kyriacos Panayiotou 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조지는 음악이 인종적으로 분리되고 주류의 문화가 가혹할 정도로 반(反)동성애적인 시절에 유명세를 얻은 백인, 남성, 동성애자, 쏘울 가수였다. Justin Timberlake, Robin Thicke, Sam Smith 그리고 많은 다른 이들은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 마이클처럼 이들도 팝 가수들이 아니다. 그들은 R&B 가수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백인이기 때문에 “팝”으로 분류되고 있다.

R&B를 부르는 백인 가수가 된다는 것의 특혜는 — 또한 지겨울 정도로 팝음악 방송에서 틀어대는 — 종종 음악 산업에서 인지를 못하곤 한다. 음악에는 언제나 깊은 차별이 존재하였다. 음악 산업은 Billie Holiday, Dinah Washington, John Lee Hooker 와 같이 레이블을 부자로 만들어주지만 그들 자신은 몇 푼밖에 쥐지 못하는 “인종 레코드”로부터 구축됐다. 한편 Pat Boone 또는 Elvis Presley와 같은 백인 아티스트들은 원래 흑인 아티스트들이 부른 노래를 불러대며 몇 백만 달러를 벌었다. R&B 싱글 차트조차 1982년부터 1990년까지 기이하게도 “Hot Black Singles”라고 이름 붙여졌다.

“흑인”음악과 “백인”음악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Prince, Michael Jackson, Whitney Houston이 깨부쉈다. 조지 마이클은 R&B에서 찾아낸 또 하나의 백인 아티스트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쏘울 사운드”를 만들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다. 그는 노력하지 않고도 쏘울풀했다. 저스틴 팀버레이크에게 씌워졌던 비난처럼 문화적으로 남용하려는 흔적은 전혀 없었다. 그는 “도시의 여장자(urban drag)”에 있지도 않았고 흔치 않은 흑인 프로듀서와 계약을 맺지도 않았다. 그는 다른 흑인 아티스트들처럼 – 말년의 Teena Marie처럼 – 쏘울풀했을 뿐이다.

1988년 조지 마이클은 빌보드의 “탑 블랙 앨범”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 최초의 백인 아티스트가 됐다. 또한 “One More Try”로 “블랙” 차트에서 1위를 마지막으로 차지했는데, (이제는 Hot R&B/Hip-Hop Songs로 이름이 바뀐) 그 다음 백인 아티스트는 2007년 “Lost Without U”를 부른 로빈 티클이다. 1980년대의 흑인 커뮤니티에게 조지 마이클은 프린스나 Janet Jackson처럼 그들의 사운드트랙이었다. 더욱이 그는 흑인다움을 연기하지 않은 자생적인 아티스트이자 싱어이자 작곡자이자 프로듀서였다. 이는 영감과 적절함의 차이다.

조지 마이클의 명성은 LGBT 커뮤니티에게 가장 소름끼치던 그 시기에 다시 한 번 찾아온다. AIDS 위기. 잘 알려져 있다시피 Ronald Reagan은 이미 수십만 명의 사람이 이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두 번째 임기의 말까지 AIDS 위기를 인정하지 않았다. 슬프게도 게이나 퀴어라는 것은 AIDS와 동일시되었다. 그러므로 조지 마이클과 같은 팝스타에게는 “외치고 자랑스럽다(out and proud)”라는 여지는 없었다. 그는 음악 산업의 옷장 안에 갇혔다.

그러나 “Freedom! ’90″에서 그는 가죽 재킷으로 엉덩이를 흔들어대던 이전의 이미지에 불을 댕겼다. 명백하게 밝힌 것은 아니지만 조지 마이클은 이 히트곡의 가사를 통해 스스로를 해방시켰다. “난 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기로 했어. / 네가 알아야 할 무언가가 있어. / 내가 너에게 그것을 말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 / 내 속 깊은 곳에 뭔가가 있어. / 내가 되어야 할 그 어떤 존재가 있어.” 조지 마이클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 자신이 되기로 결정했다.

1998년 마이클은 비버리힐스의 공원에서 잠복경찰과의 “추잡한” 행동으로 체포되었을 때 공식적으로 아웃팅 당했지만, 이 가수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는 1998년 비디오 “Outside”에서 이 사건을 비웃었다. 그가 이성애자가 아니란 사실이 크리스털처럼 투명해지자 조지는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몰랐을까 하는 등의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 진실한 당신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보상은 늘 없다. 그 뒤로 몇 년 동안 그는 마약, 체포, 건강 문제와 같은 보도에 질질 끌려 다녔다.

조지 마이클은 그의 성적기호로 인해 배척되었고 그를 무자비하게 스토킹하는 미디어에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2005년 이 가수는 게이와 이성애자들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미디어에서의 게이는 이성애자를 편안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고 자동적으로 이에 대한 나의 반응은 내가 더럽고 음란한 f****r 이고 당신은 그 사실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은 감당을 못해요.”

분명히 조지 마이클이 없이 샘 스미쓰, Adam Lambert, 또는 오늘날의 다른 많은 공개적으로 퀴어인 아티스트가 있을 수 없다. 샘 스미쓰는 언젠가 마이클에 대해 말한 바 있다. “나는 조지 마이클에 대한 기이하고도 시들지 않는 애정을 가지고 있다. 그는 내가 하는 일을 왜 하고자 했는지에 대한 이유다.”

나는 사람들이 미묘한 차이가 있는 조지 마이클의 유산에 대해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는 단순한 팝스타가 아니었다. 그는 쏘울풀했고 아티스트들이 제조업화된 음악 산업에서 진정한 자아로의 길을 닦는 정체성을 교차했다는 점에서 혁신적이었다.

올해의 즐거움 : 音盤편

올해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음반 위주로 들으려 일부러 노력했다. 사실 젠체하려는 문화적 허세남의 냄새가 다분히 풍기는 의도였지만 어쨌든 그러한 노력 덕에 음악 감상의 폭은 상당히 넓어진 한해였다. 그 중 인상 깊었던 음반들을 골라봤다.

Elgar: Cello Concerto / Sea Pictures[1965]
한 클래식 작곡가의 작품을 재평가하는데 연주자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는데 바로 엘가의 이 작품이 그렇다. Jacqueline du Pré라는 천재 첼리스트가 이 곡을 연주하자 사람들은 그 곡을 재평가했고 연주자에게도 가장 뛰어난 연주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Love Supreme – John Coltrane[1965]
째즈의 마지막 황금기에 가장 걸출한 째즈 뮤지션이 내놓았기에 그 어떤 째즈 음반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은 음반. 콜트레인의 종교적 명상이 고스란히 음악적으로 표현되어서 더욱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음반이 다시 나오는 것은 불가능할 듯.

ささやかな欲望 – 山口百惠[1975]
일본 최초의 아이돌이라 할 수 있는 야마구치모모에의 1975년 작. 초기의 어린 소녀의 로리타적 분위기에서 보다 성숙한 여인의 분위기로 넘어가던 시절의 – 그래봤자 당시 16세 – 곡들이 담겨져 있다. 모모에의 음반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함.

The Köln Concert – Keith Jarrett[1975]
지친 몸을 이끌고 퀼른에 왔는데 준비되어 있는 피아노는 당초 요구에 훨씬 못 미치는 조악한 상태의 미니그랜드피아노. 이 상태에서 키쓰자렛은 관객들에게 생애 최고의 즉흥연주를 선사했다. 음악이란 자유로움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려준 명반.

The River – Bruce Springsteen[1980]
미국 노동계급의 정서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뮤지션 브루스스프링스틴의 중기걸작. 미니멀리즘의 미학이 제대로 드러난 Hungry Heart나 아버지의 죽음에서 삶의 철학을 깨닫는 Independence Day 등 노동자의 희로애락이 절절하게 담겨져 있다.

Rain Dogs – Tom Waits[1985]
사실 톰웨이츠의 음악은 무의식적으로 피해왔다.(그 걸죽한 목소리가 싫었던 것인지?) 결국 이 음반을 듣고 나서 그의 음악을 피해온 세월이 아쉬워졌다. 한적한 미국 시골에 차려진 철지난 서커스 공연장에서 듣고 있으면 딱 좋을 풍각쟁이의 노래들.

Steve McQueen – Prefab Sprout[1988]
‘이 밴드의 음악은 언제 한번 제대로 들어야겠다’고 벼르다 고른 앨범인데 ‘역시 기대를 버리지 않는구나!’라고 감탄했다. 앨범명에서부터 커버, 그리고 수록곡이 환상적 궁합을 이루지만 미국에선 저작권 때문에 다른 이름으로 출시된 불운한 앨범이기도.

Enter The Wu-Tang(36 Chambers) – Wu-Tang Clan[1993]
힙합과 중국의 B급 무술영화가 만나서 90년대 힙합의 트렌드를 결정해버렸다. 개성이 너무나 확연한 멤버들이 화학적으로 융합되어 창출해낸 하나의 팝문화가 너무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Ol’ Dirty Bastard의 랩이 마음에 들었다.

Back To Black – Amy Winehouse[2006]
뮤지션은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임진모 씨의 꼰대질에 근거하여 보자면 이 앨범은 그야말로 에이미 그 자신의 절절한 사연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음반. Rehab만 들어도 이미 위기의 전조가 느껴지는데 청중은 그저 환호했을 뿐이다. R.I.P.

vega Intl. Night School – Neon Indian[2015]
인디 신쓰팝 뮤지션 니온인디언의 2015년 신보다. 디스코, 뉴웨이브, 훵크 등 장르가 맛깔스럽게 섞여서 귀가 즐거웠던 앨범이다. 올해 내한공연을 시도했으나 기획사의 역량부족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다음에 내한한다면 꼭 가보고 싶은 아티스트.

Music Complete – New Order[2015]
결성된 지 35년 만에 내놓은 2015년 신보. 단순히 노익장을 과시할 목적으로 내놓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어폰을 귀에 꽂는 순간 명확해진다. 마지막 트랙 Superheated까지 –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 곡이 좋다 –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수작.

스트리밍 서비스 시대가 초래한 불공정한 게임

레이블들은 그들의 수입의 일정비율(간혹 15% 정도)을 지불한다. 이 비율은 스트리밍 음악이 제조, 파손에 의한 피해, 그리고 손상을 보상하기 위한 레이블의 별도의 물리적 비용 등이 포함된 것이라면 말이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LP나 CD 생산과 비교할 때에 스트리밍은 레이블에게 비교도 안 되는 높은 마진을 안겨준다. [중략] 나는 애플 뮤직에 맛보기 기간 동안의 저작권료 계산법을 설명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은 그 계산법은 저작권 보유자(즉 레이블)에게만 공개된다고 말했다. 나는 내 레이블을 가지고 있고 내 앨범 중 몇 개의 저작권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가 내 배급사에게 얼굴을 돌리자 그의 답은 “당신은 계약을 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당신 변호사가 우리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게 하면 몇몇 질문에 답은 해드릴 수 있습니다.”였다. 상황은 더 나빴다. 한 업계 정보통은 내게 메이저 레이블들이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벌어들이는 수입을 그들의 카탈로그에 있는 아티스트들에게 언뜻 보기에도 제멋대로의 기준으로 배분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략] 레이블들은 세 곳의 또 다른 수입원이 있는데, 이는 모두 아티스트들에게는 감춰진 것들이다. 그들은 스트리밍 서비스에 대한 선금을 받고, 오래된 노래들에 대한 카탈로그 서비스에 대해 지불받고, 스트리밍 서비스 자체의 주식을 받는다.[Open the Music Industry’s Black Box]

80년대의 전설적인 뉴웨이브 밴드 Talking Heads의 프론트맨이었고 현재 솔로로 활동하면서 미술작품 제작 및 저작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David Byrne이 최근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이다. 스포티파이, 판도라, 유투브, 애플 뮤직 등 스트리밍 서비스가 음악 산업의 핵심부문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 자신이 음악가이자 레이블 소유자이기도 한 Byrne은 스트리밍 서비스의 계약과정에서 소외되고 있는 음악가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얼마 전 Taylor Swift가 애플 뮤직과의 지상 논쟁을 통해 음악가들에게 불공정한 것으로 보이는 처사를 취소하게 했던 해프닝도 있었던 바, 음악가들에게 있어 스트리밍 서비스의 현재와 앞날은 초미의 관심사가 된지 오래다. 그리고 Byrne은 Taylor Swift의 항의에 한발 더 나아가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와 레이블 – 특히 메이저 레이블 – 간에만 비밀스럽게 진행되는 계약에 대한 – Byrne은 이 계약을 “블랙박스”라 칭하고 있다 – 투명한 공개를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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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Byrne by Ron Baker” by Ron Baker – http://www.flickr.com/photos/kingsnake/2948571996/in/faves-24788065@N02/.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Commons.

David Byrne이 기타 연주하는 모습

스스로가 레이블 소유자인 Byrne이 애플 뮤직이나 배급사 등으로부터 스트리밍 서비스에 대한 여하한의 정보를 얻어내지 못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이 시장은 철저한 과점 시장이다. 그 과점 업체는 상위 3위의 레이블인 Sony, 유니버설, 그리고 Warner다. 이들 3개 업체는 Byrne이 짐작하길 서비스에 대한 선금과 주식 등을 배정받아 이미 서비스 업체와의 특수 관계가 되었고 음악가는 물론이고 독립적인 레이블들을 계약 과정에서 배제시키고 있다.

요컨대 스트리밍 서비스는 ▲ 음악소비 행태를 바꿔놓았고 ▲ 레이블은 더 이상 CD와 같은 물리적 상품을 이전처럼 대규모로 생산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 그럼에도 이들의 저작권에 대한 대가는 이전과 같은 비중 혹은 비밀스러운 계약과정을 통한 더 많은 이익을 독점하고 있다는 것이 Byrne의 관찰기다. 다시 말해 제조업에서 유통업으로 바뀐 음악 산업에서, 자본은 저작권이라는 고정자본을 마모시키지 않으면서도 잉여가치를 계속 착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음악이 산업화되어온 역사를 거칠게 보자면 초기에는 일종의 서비스업이자 유통업으로써 공연을 하는 생산자가 수입의 대부분을 갖는 형태였을 것이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상류층이 소비하는 고전음악의 생산자는 왕족이나 귀족의 후원이나 보수, 악보 판매 등의 수입으로 살아갔다. 현대로 접어들며 LP의 대량생산 시대부터 생산자는 레이블에 속해 이익을 공유했다. 그리고 이제 음악 산업이 제조업에서 유통업으로 회귀하며 생산자는 은밀한 거래에서 소외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만들었나

The Lexicon of Love라는 신쓰팝의 명반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ABC의 멤버인 당사자들이 쓴 글을 삼번함(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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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Lexicon” by The cover art can be obtained from the record label.. Licensed under Fair use of copyrighted material in the context of The Lexicon of Love“>Fair use via Wikipedia.

Martin Fry, 싱어송라이터

1982년에 디스코는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난 Chic 앨범의 선율들을, 그리고 Earth, Wind &Fire의 모든 음악세계를 사랑했다. The Cure와 Joy Division과 같은 이들과 융화한 것은 우리가 추구했던 것이었다. – 우리 기타리스트였던 Mark White는 한 영화의 사운드트랙의 분위기를 부여하고 싶어 했다. 매우 극장과 같은 분위기의 표지에 끝내주는 고전 영화인 The Red Shoes의 터치를 가미하기도 했다. 실제보다 더 강렬하고 감정적이었다. The Lexicon of Love는 어느 정도는 그러했다. 난 팔세토 창법을 많이 썼다. 부분적으로 사랑에 빠진 것의 롤러코스터 탑승을 – 우쭐함과 절망 – 전달하기 위해서.

우리의 첫 싱글 Tears Are Not Enough는 1981년에 탑20곡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의 앨범은 보다 다듬어졌다. Dollar’s의 파노라마와 같은 넓은 화면과 같은 사운드인 Hand Held in Black and White를 듣고, 우리는 프로듀서 Trevor Horn과 접촉하였다. 그는 우리가 추구하려던 것을 즉시 이해했다. 우리는 아이디어가 가득했고 락앤롤을 바꿀 수 있으리라 – 셰필드에서 실직수당을 받으며 노래를 막 시작한 이에게는 매우 야심 찬 – 생각했다.

가사적으로 나는 Gary Numan과 OMD의 것을 사랑했었지만, 내 노래들을 Rodgers and Hammerstein이나 Cole Porter의 라인처럼 보다 감정적으로 고양시키고 싶었다. 그 당시에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것에 관한 노래가 드물었다. 펑크는 매우 중독적임에도 여성들은 그들의 존재감을 Lexicon에서 부각시켰다. 선율을 그렇게 두드러지게 특징 지우는 것은 통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당신이 Cilla Black이나 Cliff Richard가 아니라면 말이다. 4위까지 오른 The Look of Love는 무그 베이스라인에 모든 피치카토 어레인지먼트가 담겨 있었다. 반면 All of My Heart (No 5)는 매우 Bridge Over Troubled Water 스러웠다.

이미지적 관점에서 황금색 라메 수트와 디너 재킷은 우리를 펑크와 달리 보이게 했다. 야심적이고 코스모폴리탄적인, James Bond와 같은 요소를 가득 담고 있었다. 30년에 걸쳐 나는 이 노래들을 오케스트라와 공연하여 왔다. 나는 내 삶을 살아왔고 이제 두 아이가 있다. 그래서 All of My Heart로 돌아가는 것은 – 그리고 소년답게 라기보다는 남자답게 부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Anne Dudley, 키보드, 어레인저

ABC는 키보드 연주자가 없었다. 그래서 Trevor Horn이 영입했다. The Look of Love를 녹음하는 도중에 그는 진짜 현악과 관악 부문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젊은이의 확신으로 경험은 일천했지만 내가 어레인지먼트를 하겠다고 자원했다. 우리가 애비로드에서 30개의 현악 섹션을 녹음했을 때, 나는 종종 그 방에서 가장 어렸다. 나는 Gamble and Huff의 디스코 클래식 The Sound of Philadelphia에서의 오케스트라의 풍부함을 언제나 사랑했었다. 이게 주된 영감이 되었고 또한 Bee Gees의 날아오르는 듯 하지만 단순한 현악 라인이 보태졌고 심지어 거기에는 Vaughan Williams도 약간 가미되었다.

The Look of Love의 믹스를 듣고 Trevor가 얼마나 시끄럽게 현악을 만들어냈는지를 알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이것은 ABC의 색을 선명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미안해할 것도 없이 호사스럽고 서사적인 앨범이 될 것이었다. 그 이후로 우리는 많은 트랙들에 현악을 가미할 것이었고 앨범의 독특한 사운드를 개발해 나갈 것이었다. – 최신의 기술,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실제 악기의 조화. 그 이후로 내가 추구해오던 조합이다.

솔직히 난 All of My Heart가 처음엔 좀 약하다고 생각했다. Trevor가 “all of my heart”의 가사를 부르기 전에 드라마틱한 멈춤과 코러스로의 결말을 첨가할 때까지 말이다. 우리는 그 다음에 팀파니를 조금 더 넣었다. 반면 페이드아웃은 내게 영국의 목가적인 순간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 결론적으로 그건 아마도 Martin의 최고의 보컬 퍼포먼스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두드러진 곡이 되었다. 그러나 트랙들은 모두 두드러졌다. Martin의 재치 있고 쉬운 가사는 젊은 사랑의 시도를 요약하고 있다. The Lexicon of Love는 1위를 기록했고 난 이 앨범이 30년간 어떻게 비쳐지는지에 관해 즐거울 따름이다. 그리고 내 젊은 날의 노력이 그다지 부끄럽지는 않다.

스트리밍 서비스 시대의 도래에 따른 레이블과 뮤지션들의 명암

축음기와 라디오가 발명되고 보급된 이래 대중음악은 일군의 산업을 형성하며 끊임없이 발전해왔다. 녹음기술이 발전하고, 비닐 레코드가 표준화되고, 뮤지컬 영화가 극장에 개봉되고, MTV가 개국하고, 십대들이 음악잡지를 사고, 대규모 락콘서트가 열리고, mp3 플레이어가 보급되고, p2p로 mp3를 교환하고, YouTube가 인기를 얻고, 애플이 플랫폼에서 음악파일을 팔고, Spotify가 라디오를 대신하는 등 시장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산업의 참여자들에게 다양한 방향으로 영향을 미쳤다.

Q. Spotify가 레코드 레이블들과 요율을 협상하고 있다. 이 회사는 아마도 아직 이익이 나지 않는 사기업입니다.
A. 당신이 이윤을 낼 필요가 없을 경우 당신의 경쟁상대를 약하게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네. 스트리밍 회사는 레이블들과 “협상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 (대형) 레이블들은 투자자인데, 이건 명백히 이해관계의 충돌이죠. Spotify가 상장되면 이 레이블들은 많은 현금을 거머쥘 것입니다. 아마도 스트리밍을 통해 여태 얻는 극미한 수수료보다 훨씬 많겠죠. 그래서 레이블들은 스트리밍 회사를 거칠게 대할 인센티브가 없습니다. 매우, 매우 영리한 거죠. 이는 단기적인 생각으로 여겨집니다.[David Byrne Talks Artists’ Rights, Spotify & Touring]

빌보드의 이 인터뷰는 Talking Heads의 프론트맨이었고 현재 솔로 뮤지션으로 활동하면서 저작과 미술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있는 David Byrne의 스트리밍 서비스에 관한 생각이다. 현재 주로 모빌 기기를 기반으로 하는 스트리밍 서비스와 이에 연계된 각종 음악 서비스는 앨범 판매 등의 기존 수익모델이 위협받고 있는 시점에서 미래의 먹거리를 일구어줄 사업모델로 여겨지고 있다. 약 4천 만명의 이용자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Spotify는 그 중에서도 Pandora와 함께 스트리밍 서비스의 선두업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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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Byrne of Talking Heads” by Jean-Luc – originally posted to Flickr as Talking Heads.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젊은 시절의 David Byrne

David Byrne이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듯이 Spotify의 경쟁력은 경쟁자를 무력하게 만들만큼 싼 이용료일 것이다. Spotify는 이러한 놀라운 원가경쟁력을 어떻게 갖출 수 있는 것일까? 바로 메이저 레이블에게 스트리밍에 대한 수수료보다 더 매력적인 조건을 제시함으로써 레이블이 수수료를 낮추게 만든다는 것이 Byrne의 생각이다. 사실 레이블들은 소속 아티스트들의 이해관계를 위해서라도 수수료를 더 받아야하는데 온전히 자신들의 몫이 될 지분 획득을 대가로 싼 수수료를 용인한다는 것이 Byrne의 또 다른 짐작이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그렇게 적은 광고만으로도(어떤 때는 몇 시간을 로긴하고 있음에도 전혀 광고를 보지 못할 때도 있었다) 아티스트들에게 보상을 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중략] 내가 대화를 나눴던 주요 레코드 레이블들은 – 그리고 상대적으로 큰 인디 레이블들 – Spotify에 대해서 긍정적이었는데, 이 때문에 나는 그들이 두둑한 몫을 지불받든지 그리고/또는 회사의 주식을 받았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확실하게도 나의 의심은 몇 주후 확인됐는데 메이저들이 Spotify 주식의 18%를 받았다고 보도됐을 때였다.[Behind the music : The real reason why the major labels love Spotify]

Byrne의 발언을 확인시켜주는 가디언의 2009년 기사다. 물론 레이블들은 싼 수수료와 넉넉한 지분과의 연관성을 부인할 것이다. 하지만 이 레이블들이 현재도 20% 가량의 Spotify 지분을 -“공짜로” – 얻었고, 인스타그램이나 왓츠앱 등의 경이적인 성공에 크게 고무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 보도에 따르면 이들은 현재 Byrne이 예상하는 상장보다는 대형 통신사 등에 장외에서 지분을 넘기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가치는 100억 달러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뮤지션들이 끼어들 몫은 없다.

복수의 정보원에 따르면 메이저 레이블들은 현재 20% 가량 되는 Spotify에 대한 공동소유권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중략] 예전 모델에서 레이블은 그들의 가치있는 카탈로그를 사용하는 권리에 대한 대로 비싼 선불 개런티에 보다 집중했다. [중략] 그러나 이런 거래에 익숙한 몇몇 정보원에 따르면 최근 몇 년간 이런 상황이 상당히 변했다고 한다. “[대형 레코드 레이블들은] 수수료보다는 주식을 요구하기로 결정했는데, 이제 [취득에 관한] 시장이 있기 때문이죠.” 한 정보원의 말이다. [중략] 한 정보원은 Spotify가 한 목표가는 과거에 100억 달러에 육박할 정도로 매우 매우 달콤한 보상이라고 지적했다.[The Major Labels Are Trying To Sell Spotify for $10 Billion, Sourses Say]

진보적인 뮤지션인 Billy Bragg은 현재 뮤지션들이 대형 레이블들로부터 받고 있는 스트리밍 요율을 더 높이기 위해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현재 뮤지션이 받고 있는 수수료의 요율은 극히 일부의 레이블이나 대형 가수를 제외하고는 전체 수입의 8~15%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가뜩이나 레이블들이 주식 대박의 꿈 때문에 수수료를 낮게 받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뮤지션들의 몫은 더 적다는 것이 Bragg 의 불만인 것이다. 이미 Radiohead의 Thom Yorke나 프로듀서 Nigel Godrich와 같은 이는 행동에 나섰다.

Bragg이 오늘 말했다. “이 스트리밍 비즈니스 모델의 문제점은 대부분의 아티스트들이 여전히 아날로그 시대의 계약으로 묶여있다는 것인데, 그때는 레코드 회사들이 실물의 생산과 배급의 모든 부담을 졌을 때죠. 그래서 아티스트들은 평균적으로 8~15%의 로얄티만 받는 것입니다. 디지털 시대까지 그대로 이어진 그 비율이 왜 아티스트들이 Spotify로부터 그렇게 형편없는 소득을 얻는지를 설명해줍니다.”[Spotify royalties : ‘Problem lies with labels – not streaming services’, says Billy Bragg]

요약하자면 대부분의 뮤지션들은 현재 Spotify와 같은 저항할 수 없는 새로운 음악 서비스로부터 불공정한 요율을 적용받고 있다는 것이 Byrne이나 Bragg과 같은 이들의 생각이다. 이러한 요율은 아날로그 시대에 적용된 요율이 그대로 디지털 시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고 이는 지속가능한 시스템이 아니라는 것이다. Byrne은 특히 이러한 상황이 대형 레이블들의 지분확보를 대가로 한 싼 수수료에 기인하며 이는 명백히 이해관계의 충돌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대형 레이블들의 적응력은 너무 뛰어난 것 같다.

Talking Heads의 “거칠고 거친 인생”을 듣도록 하겠다.

사회주의 혁명, 아방가르드, 그리고 전자음악

1919년에 러시아의 음향 기술자 레온 테레민 Leon Theremin(본명 Lev Sergeivich Termen) 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전기적인 음률의 고저가 연주되는 테레민 theremin(또는 thereminvox, aetherphone 으로 불리기도 함)이라는 흥미로운 악기를 발명한다. 이 악기는 연주자가 악기에 손을 대지 않고도 연주하는 악기로서 연주자의 손이 금속봉에 얼마나 근접하는 가에 따라 음의 고저와 음량이 조절되었다. 테레민의 연주소리는 다소 기괴스러워서 104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공상과학영화나 공포영화의 사운드트랙에 곧잘 사용되었다.(예로 들자면 Spellbound, The Lost Weekend, Ed Wood, Mars Attacks!, The Day the Earth Stood St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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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 Termen playing – cropped” by Bettmann, Corbis – http://tygodnik.onet.pl/35,0,57107,sowiecki_faust,artykul.html (polish).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테레민을 연주하고 있는 레온 테레민

이 악기는 흥미롭게도 소비에트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과 그에 따른 단기적인 아방가르드 예술의 융성과 관련이 깊다. 아방가르드 예술은 그 태생과 발전 자체가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급진성을 띠었으며 현실사회 전반에 대한 상당한 혐오감을 내포하고 있었다. 소비에트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볼셰비키는 후진적인 러시아 사회에서의 선각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소수의 직업적 혁명가의 엄격한 집단을 표방하였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와 상당히 유사한 형태의 집단이었다 할 수 있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진실을 파악하고 있었으며, 이점이야말로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경멸할 수 있는 권리를 스스로에게 부여해줬다.”[마크 애론슨, 도발 아방가르드의 문화사]

그리고 혁명이 성공하자 새로운 지배계급이 된 볼셰비키는 아방가르드의 예술 활동을 적극적으로 장려한다. 소비에트는 예술이 인민들을 사상, 감정, 분위기로 물들게 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여겼고 아방가르드 예술을 일종의 사회주의 선전선동의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술은 아지프로 agitprop 라 불리며 실질적이고 창조적인 약진을 해나갔다. 적어도 스탈린이 정권을 잡기 이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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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 Lissitzky, Lenin Tribune, 1920. State Tretyakov Gallery, Moscow“ von El Lissitzky – State Tretyakov Gallery, Moscow. Lizenziert unter Public domain über Wikimedia Commons.

엘 리시츠키 El Lissitzky 가 레닌을 위해 제작한 연단으로 구성주의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

여하튼 이 당시의 예술분위기는 모든 장르에서 전통적인 문법장르가 해체되는 시기였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들 모두가 해체되고 재창조되어 이해 불가한 우스꽝스러운 소리조차 음악으로 포장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창조물이 바로 기계를 통한 실용적 작업이 소리와 결합된 레온 테레민의 작품 테레민이었다.

레온 테레민은 1895년 페테스브르그에서 태어났다. 귀족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어렸을 적부터 과학에 소질을 보이며 남들과 다른 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소비에트 혁명 후 그의 인텔리겐챠적인 지위가 문제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의 과학적 재능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혁명정부를 위해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어느 정도 자유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테레민은 여러 연구를 하던 중 인체의 온도변화를 음향으로 전환하는데 착안하여 테레민을 만들게 되었다.

1921년 어느 날 레온 테레민이 자신이 발명한 새로운 악기를 레닌에게 시연해 보인다. 이 악기는 현도, 건반도, 마우스피스도 없는 악기였다. 음은 전기 장치가 부착된 상자에서 만들어졌다. 연주자는 상자에 부착된 안테나와 금속봉 사이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공기를 연주한다. 이 악기는 전혀 새롭고도 으스스한 음을 만들어내었다. 레닌은 이 연주에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악기연주법을 배우기까지 했다고 한다.(레닌은 후진적인 농업사회였던 러시아가 사회주의 강국으로 거듭나는 길은 하루빨리 공업사회로 전환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기계에 대한 그와 집권세력의 집착은 매우 강했다. 그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Socialism equals Soviet power plus electrification.” )

이후 소비에트의 현대성을 상징하는 선전도구로서 새로운 악기를 유럽에 선전하러 돌아다니던 테레민은 1927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이 신기한 악기를 대중에게 선보였다. 많은 이들이 테레민에 관심을 보였는데 앨버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도 매우 흥미있어 하며 그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한다. 이듬해 그는 테레민의 특허권을 얻은 후 악기 제작권을 RCA에 팔았다. RCA는 이 악기의 연주가 “휘파람 부는 것처럼” 쉽다는 슬로건 하에 악기 판매에 나섰는데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악기연주가 휘파람 불듯이 쉽지도 않았을 뿐더러 1929년 미국에는 대공황이라는 미증유의 사태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악기는 미키마우스 클럽에서 시연되기도 했었고 앞서 말했듯이 공상과학영화와 공포영화의 사운드트랙에 이용되었다. 이 악기의 가장 뛰어난 연주자는 전직 바이올리니스트였던 클라라 록모어 Clara Rockmore 였다. 레온 테레민은 아름다운 외모의 그녀에게 구애하였으나 그녀는 변호사 존 록모어 John Rockmore 와 결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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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ra.rockmores.lost.theremin.album” by [1]. Licensed under Fair use via Wikipedia.

Clara Rockmore

이후 테레민은 소수이긴 하지만 대중음악에도 사용된다. The Beatles나 The Rolling Stones 와 같은 몇몇 대중음악가가 이 악기의 소리를 사용하였다. 대표적인 곡이 비치보이스의 명곡 Good Vibrations 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이러한 컬트적인 현상과 별개로 현대 대중음악에 보다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업이 신서사이저를 발명한 로버트 무그 Robert Moog 에게 영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로버트 무그는 1950년대 혁신적인 신서사이저라 할 수 있는 미니무그 minimoog 를 발명하여 현대 전자음악(Kraftwerk, Gary Numan, Pink Floyd 등의 선구자적인 음악가들이 시도하여 인기를 얻었던 전자음악은 80년대 Synth Pop, New Romantics 등의 장르를 통해 전성기를 맞는다. 이후 이들 장르의 인기는 이전 같지 않지만 오늘 날 대중음악에서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이다. 그는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테레민에 매혹되어 직접 제작하여 팔기까지 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미니무그는 많은 면에서 테레민이 지향하는 바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우리시대의 신서사이저 음악은 테레민의 은혜를 받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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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moog” by Krash – photo taken by Krash.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로버트 무그가 제작한 미니무그

1938년 그는 돌연 미국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많은 이들은 소련의 스파이들이 그의 뉴욕 아파트에서 그를 납치하여 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후에 나온 그의 전기에서는 그가 빚 때문에 미국을 떠났고(RCA에 테레민의 권리를 넘긴 레온 테레민의 다음 프로젝트는 텔레비전의 발명이었다고 한다. 이를 위해 회사를 설립하고 많은 돈을 끌어 모았으나  그 프로젝트는 실패하였고 테레민은 빚더미에 앉았다고 한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소련에 호송되었다고 전하고 있다.(또는 그가 미국에서 명성을 얻었을때조차 지속적으로 소련 스파이들과 접선을 유지했고 이 당시 자발적으로 소련으로 돌아갔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그는 그곳에서 혁신적인 도청장치인 The Bug의 작업에 참여하였고 이일로 인해 당시 소련사회의 최고 영예인 스탈린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후에 소련에서 음악학교에서 음악 강의를 맡기도 했으나 현대음악은 해로운 것이라는 비난에 직면하여 이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는 1991년이 되어서야 미국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고 1993년 숨을 거두었다. 1994년 그의 업적을 기린 Theremin: An Electronic Odyssey 라는 다큐멘타리가 발표되었다.

요컨대 테레민의 개발, 발전, 그리고 이어지는 전자음악의 발달의 이면에는 사회주의 혁명, 아방가르드, 기계문명에 대한 낙관주의와 같은 20세기 초 인류문명사의 발전이라는 역사적 맥락이 놓여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참 후에 대중음악계는 지나친 악기의 기계화, 내지는 전자기기화에 싫증을 낸 이들이 소위 플러그를 뺐다는 의미의 unpluged 공연을 한동안 유행시키기도 했다.

테레민 연주 듣기

참고할만한 사이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