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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크의 반항에서 테크노까지, 소비사회에 대항하는 문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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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문화’라는 문구는 언뜻 모순되어 보인다. ‘대항’한다는 것은 거부한다는 뜻인데 문화적이라는 것은 삶으로부터 의미와 가치를 뽑아내고 그것을 해석하고 감상하고 심지어는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항하여 사랑한다는 것이 성립하는가? 어떻게 개방적이고 창조적이며 의미 있는 문화적 실천행위가 전술적인 대항을 의미하는 용어와 나란히 쓰일 수 있는가?


아마도 19세기의 정치철학가 칼 마르크스에게는 이러한 질문이 떠올랐을 것이다. 마르크스 및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자본주의에 대한 어떠한 의미 있는 대항이라도 노동자와 경영진, 프롤레타리아와 자본가들 사이의 대항과 같은 경제문제로 얽힌 관계에서만 생길 수 있으며, 그 형태는 정치영역에서 과격한 노동운동이나 혁명적인 선동에 의해서만 드러난다.


한마디로 이러한 사고는 문화의 영역을 빼고 오직 자본주의에 대한 대항만을 제시하였다. 실제로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문화는 대항의 대항으로만 드러날 수 있다. 즉, 문화는 자본주의 내의 지배논리가 모두에게 명확히 보여질 수 있도록 파괴되어야 하고 폭력적인 저항을 통해 거부되어야 하는 이데올로기의 베일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가 죽은 지 수세기가 지난 지금 ‘대항문화’라는 용어는 누구에게도 수수께끼를 던지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인류 역사의 궁극적인 주체라고 칭송했던 프롤레타리아는 그들이 전복시켜야 했던 체제의 편안함에 이미 오래 전에 넘어갔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롤레타리아들은 여가시간에 그들이 일터에서 생산한 물건을 소비하기 시작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이 생산한 상품과 그 상징들에 깊이 둘러싸이게 되었다.


오늘날 소비주의와 소비문화는 우리의 일상에 너무나 깊이 들어와 있으며 우리의 언어, 사회관계, 집단의식, 가치관 그리고 우리 자신들과의 관계에까지 완전히 용해되어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에 대한 대항 중에서 자본주의가 그 기반이 된 문화의 넓은 영역으로부터 생겨나지 않은 대항을 생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대항문화는 때로는 자본주의와 관련된 모든 사회적, 개인적, 정치적, 성적, 그리고 경제적인 논리에 일반적인 반대입장을 취하면서 이와 동시에 문화의 영역 안에 남는 것을 뜻한다. 즉, 사람들이 세상의 의미를 이해하고 미의 어떤 기준을 확인하기 위해 취하는 실천적 행위 및 태도로 남는다.


그러나 대항문화 활동가는 어떤 사람인가? 이 용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며 이것이 현재의 대항문화를 분석하는 데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 학술적으로 대항문화연구를 살펴보는 데에는 두 가지 중요한 뿌리가 있다. 하나는 미국 시카고학파의 실용주의 사회학자들이다. 이들은 어떻게 다양한 비주류 그룹들이 ‘대항문화’라는 용어를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사회적 규범 속에서 어떻게 정체성을 유지하며, 또 어떻게 주류문화가 이러한 과정에 비슷하게 기여를 하는지에 주로 관심을 보였다.


대항문화를 다룬 또 다른 중요한 학파는 버밍엄 대학의 현대문화연구센터에 근거를 둔 영국학파의 사회학자들로서 이들은 ‘문화연구’라는 학문분야를 개척하여 널리 알려졌다. 이들에 의하면 젊은이들은 대항문화를 통해 도전을 추구하며 그들 나름의 방법으로 자본주의적인 논리를 거부한다. 비록 대항문화의 관심이 경제적인 것이며 궁극적인 목표가 정치적인 것일지라도 이들이 정치적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사용하는 수단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대항문화 활동가는 자신을 둘러싼 소비문화를 형성하는 기호의 숲 속에서 경제에 뿌리를 둔 억압에 직관적으로 반응한다. 이러한 분석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새롭게 부상한 노동계급의 다양한 문화적 행동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록 이제 노동계급이 소유했던 정치력을 거의 잃었지만 이들은 대항적 입장을 취하는 소비와 기호의 표현을 통해 문화의 차원에서 정치를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최근의 대항문화는 대항문화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토양이 고갈되었다는 문제를 둘러싸고 위기를 맞고 있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문화를 통한 대항이 너무나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제도화되어서 스스로를 대항적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문화를 상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청년문화의 모티프는 중년의 소비자를 위한 제품까지 확대되었으며 더 나아가 사회적 규범에 대한 대항, 과격한 미학과 개인주의적이고 반항적인 태도의 추구는 주류 소비문화에 널리 받아들여져서 대항의 진정한 의미가 이제는 시대착오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최근의 대항문화적 노력은 대안적 전략을 탐구해야만 했다. 1980년대에 펑크가 서서히 뉴웨이브, 팝, 얼터너티브, 그리고 더욱 더 상업적인 음악 장르로 전환하기 시작했을 때 전복과 문화적 반항을 꿈꾸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새로운 기운이 생겨나고 있었다. 펑크가 디스코 음악에 내세웠던 전통적인 금기는 격렬함과 대항을 유지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클럽의 젊은이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깨어지고 있었다.


이에 부합하여 간헐적인 레이브 파티(클럽 파티)를 좇아 다니는 젊은이들의 관심을 끈 테크노 음악이 1980년대의 언더그라운드 댄스 문화를 구성하였다. 이것은 대항문화 역사상 근본적으로 새로운 발전이었으며 오늘날 대항문화를 고려함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자본주의 소비문화, 인공적 안락함, 대용적 쾌락, 그리고 만들어진 행복은 전통적으로 아방가르드와 청년문화그룹에 의해서 거부되었다. 격렬함과 불편함, 그리고 극단의 감정적 경험에 호소함으로써 펑크와 헤비메탈, 다다, 추상표현주의, 그리고 여타 과격한 문화 형태들은 소비주의가 선호하는 가장된 쾌락의 꿈 뒤에 숨겨진 냉혹한 현실을 찾기를 원했다.



[월간 디자인 2000년 5월호]글/샘 빙클리(뉴욕 뉴스쿨대학교 사회학과 강사)

영국 테크노의 역사

영국 테크노의 역사는 곧 테크노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영국의 테크노의 태동에서 변천을 거쳐 현재의 대중화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 비단 테크 노만이 영국 대중 음악의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경향을 대변해온 장르는 아니겠지만, 테크노의 변천 추이를 되짚어 보면 70년대에서 현재에 이르는 모든 영국 대중 음악의 기술적인 발자취와 거의 상통한다는 점에서 진보정신의 순수한 모태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테크노의 기원과 기본적인 틀은 독일에서부터 시작됐지만 그 형식의 다양성과 실용성을 갖춰 다각적인 테크노의 붐을 일으킨 것은 영국의 몫이었다.
영국이 공업으로 일어선 나라이고 온갖 공장들이 각처에 즐비하게 흩어져 있다지만 소규모 전자 제품이나 악기를 만드는데는 그다지 신통한 재주가 없었던 관계로 영국의 뮤지션들은 상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에서 악기를 구입할 수 밖에 없었고 웬만큼 악기레 이블의 협찬을 받거나 밴드의 지명도가 있기 전까진 사구려 중고 악기에 의존하는 뮤지션들이 많은 것이 음악 강국 영국의 현실이었다.

그런 탓에 영국의 테크노는 테크노를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선 중견 뮤지션들이나 비교적 생활이 윤택했던 인텔리 출신의 뮤지션들을 중심으로 시작될수 밖에 없었고, 그런 탓에 대중 지향보다는 아트록과 결합되거나 뮤지션의 화려한 테크닉을 선보이기 위한 솔로 앨 범의 도구로 이용될 뿐이었다(독일과는 달리 젊은 뮤지션들 사이에 테크노 바람이 일기까 지는 꽤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굳이 조그마한 바(bar)나 클럽에서 공연을 할 이유가 없었던 부유한 테크노 뮤지션들의 대개는 아트 스쿨 혹은 공학도 출신이었는데 그런탓에 실존적이고 실용적인 사운드를 표출하기 보다는 자기 도취적이고 약물과 연계를 맺은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느낌들에 근접하기 시작했다.
사이키델릭과 아트록의 붐에 편승해 등장한 전자 사운드를 표출하는 여러 실력파 밴드들은 첨단기기에 대한 연구를 거듭한 끝에 기계적 비트와 갖가지 다양한 효과음을 실전에 활용 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테크노 취향의 음악들로 방향을 우회하게 된다. 70년대 초 공간과 시간에 대한 묘사를 담은 호크윈드(Hawkwind)를 비롯한 스페이스 록 밴드들이 바로 영국 테크노의 시발점인 셈이다.

인간적인 풋풋한 연주보다는 치밀하게 계산된 극단적인 표현양식을 추구한 이들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화제를 모으자 각종 전자음악을 구사하는 밴드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등장했고 그 중 74년은 테크노와 전자 사운드의 기념비적인 해로 일렉트로폰(Electrophon)의 Zygoat, 세븐스 웨이브(Seventh Wave)의 Things to come등의 명반들과 브라이언 이노의 초기 앰비 언트적인 작품들이 속출한 시기였다.

특히, 브라이언 이노는 글램적인 요소가 다분한 록시 뮤직(Roxy Music)에서의 활동을 끝 으로 각종 프로젝트 결성에 열을 올리게 되는데 로버트 프립, 로버트 와트와 펼친 일련의 작품들은 스페이스 록 차원이 아닌 그 이상의 진보성과 의미를 지닌 작업들이었다. 이후 패트릭 모라즈, 릭 웨이크만, 마이크 올드필드, 릭 라이트 등의 건반 연주자와 리퓨지, 킹덤 컴 등의 밴드들이 신서사이저/키보드로만 일관된 음반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것은 바로 테크노의 기법상의 발전을 도모하는 계기로 두번째 변혁이었던 것이다. 그후 78년경 브라이 언 이노가 표방한 앰비언트에 대한 연구, 천재 뮤지션 에디 좁슨등이 발견되면서 신서사이저 와 드럼 머쉰을 통한 원맨 밴드 붐이 가열됐고 테크노는 매니어들 음악의 최상의 선택으로 끊임없는 지지를 얻게 된다.

80년대 이후 테크노는 영국 대중음악 신에서 중요한 수단으로 다시금 인식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바로 댄스 음악과의 접목을 통하면서부터다. 이것은 70년대 말엽까지의 매니어 취향, 혹은 극단적인 실험 음악 형태의 테크노를 벗어나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측면으로 변모했다 는 점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왜 이러한 테크노의 댄스 뮤직화의 시발점이 하필 영국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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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don Big Ben Phone box” by , wiki+spam@eindruckschinderdomain.de – 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2.5 via Wikimedia Commons.

그것은 앵글로 색슨족의 자기 우월주의와 타인종, 문화에 대한 배타적인 사고방식에서 이유 를 찾을 수 있다. 흑백이 공존하는 그리고 식민지 작업을 통해서 많은 인종을 거느리고 있 었던 영국이었지만 유독 백인 위주의 문화만이 토착화 되면서 영국에는 흑인의 그루브는 찾아보기 힘들었고 그런 연유로 마땅한 댄스음악이 생성될 수 없었다.
그러나, 80년대 초반은 안팎으로 상황이 좋았다. 댄스음악 빈곤에 대한 자기 반성과 함께 세계적인 인기를 모았던 디스코가 기술적인 문제에 부딪쳐 주춤하면서 전자 음악의 힘을 빌기 시작한것이다(아울러 영국에는 많은 수의 악기들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다소간의 흑인 음악을 추구하는 가수들은 디스코로 패셔너블한 부분들에 관심을 갖던 모던 보이들은 뉴 웨이브(New Wave)로 각각 제 갈길을 찾기 시작했다. 두가지 음악은 공존하면서 기술적인 많은 부분들을 협력하기 시작했는데 이 즈음부터 테크노는 그 세력을 독일에서 영국으로 옮겨오기 시작한 것이다.

카바레 볼테어, 조이디비전으로 시작된 뉴 테크노 사운드의 움직임은 휴먼 리그(Human League), 뉴오더(New Order), ABC, 하워드 존스(Howard jones), 디페쉬 모드(Depeche Mode) 등 팝과 테크노 댄스를 혼합한 음악들로 변모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영국 음악의 부흥은 시작됐다. 하지만 80년대 중반까지 펼쳐진 일련의 음악들은 테크노라는 의미보다는 전자음악, 뉴 웨이브라는 의미로 통용될 뿐이고 또 확실히 기계에 의존하는 부분도 그다지 적극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80년대 말 앰비언트라는 장르와 인디펜던트라는 의미, 매니어용 댄스라는 구분이 알려지면서 대도시 클럽과 소규모 공연장을 중심으로 분파가 갈려지기 시작했고 테크노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거듭됐다. 유투(U2)와 데이빗 보위(David Bowie) 같은 대스타들이 새로운 조류와 브라이언 이노 같은 대 뮤지션을 섭렵하여 자랑스레 대중앞에 섰고 테크노 는 단숨에 인디펜던트 음악에서 오버그라운드, 메인스트림으로 돌변하게 되었다.

믹싱 DJ나 스튜디오 맨에 불과하던 사이드 뮤지션들이 모두 거리로 뛰쳐나와 관중을 포섭 하기 시작했고 하나 둘씩 스타밴드들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거기에 모던록/얼터너티브란 모호함을 함축한 장르가 가세하면서 상승세의 테크노 뮤지션들까지 덩달에 매체에 알려지 게 되었고 그들 역시 상종가를 누리면서 모던록 스타들의 뒤안길에서 믹싱 작업을 조달하 던 테크노 보이를 청산하고 서서히 전면에 나설 채비를 해가고 있었다. 록 음악에서 제휴 한 과격한 행동과 사운드를 선보이기 시작한 프로디지(Prodigy)나 케미컬 브러더스(Chemical Brothers)와 같은 팀들이 차트 정상을 차지하는 빅히트를 하게 되자 테크노는 완연한 대중 가요로 정착되게 된다.

테크노가 완연한 인기를 얻을 즈음 영국에선 괴이한 현상이 발병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무분별한 장르의 탄생이었던 것이다. 테크노의 수직 상승이 장르 탄생의 모태가 된 셈인데 덥(Dub), 트랜스(Trance), 레이브(Rave), 트립 합(Trip Hop), 애시드 하우스(Acid House), 하드코어 테크노(Hardcore Techno), 신스 팝(Synth Pop)등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는 수많은 장르들이 탄생했고 단명했으며 다른 장르와 연대하여 또 다시 생성했고 장르에 관한 설명서 가 있어야 할 정도로 너무나 많은 장르와 명칭에 혼란을 겪게 됐다. 90년대 말로 치닫는 현재의 테크노는 이제 브릿팝(Brit Pop)이라는 화두를 무참히 잠재우고 영국을 넘어 세계 각지에 그 세력을 확장 시키고 있는 영국 대중 음악의 최고의 장르이자 글로벌 사운드가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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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y To Dancing?

지난 호 까지 힙합 문화와 음악에 관해 알아 보았다. “1990년대는 힙합과 테크노만 있을 뿐이다.” 라는 다소 과격한 말이 있을 정도로 1990년대부터 현재 까지 힙합과 테크노는 전세계적인 붐을 타고 우리의 주변에 산재해있다. 하지만 국내의 테크노라 하는 음악들은 말 그대로 돈벌이에 급급하여 심하게 왜곡 되고, 음악자체를 조롱한 ‘댄스가요’ 일 뿐 의식과 사상이 존재하는 ‘댄스뮤직’이 절대 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댄스 뮤직 자체를 저급한 음악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마저 생겨 나게 되는데 미국의 아티스트인 모비(Moby)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나를 테크노 뮤지션 혹은 댄스 DJ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20년 동안 음악을 해왔다. 나는 전형적인 뮤지션이었다. 재즈, 스피드 메탈, 하드코어, 펑크, 현란한 뉴웨이브까지 연주 해 봤다. 사실 사람들은 댄스 뮤지션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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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by 1” by Uncensored InterviewFlickr.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하지만 일렉트로닉 뮤지션들은 조작 매뉴얼이 전화 번호부 만큼이나 두꺼운 그런 장비 40~50개의 시스템을 알아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다른 종류의 음악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내가 이런 음악을 좋아 하는 건 일렉트로닉 악기들은 불평을 하지도, 담배를 피우지도 않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돈을 줄 필요도 없다.

음악을 판단 하는 나의 유일한 기준은, 음악이 주관적인 수준에서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오, 헤비메탈, 그건 멋진 음악임에 틀림없어’ 식의 좋고 나쁨을 판단 하는 건 난센스다. 확실히 각각의 음악은 각각의 사람들에 의해 평가될 필요가 있다.” 모비의 말은 댄스 뮤직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기껏해야 왜곡된 ‘댄스 가요’ 나부랭이나 듣고 테크노를 비하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무지함을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락(Rock)의 소멸 이후 대두 되었던 또 하나의 대안인 진짜 테크노 음악(Techno Music)에 관해 논해보자. 이 글이 애초에 대중적인 락(Rock) 음악에 기초하여 락음악 팬들이 다른 장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일종의 ‘흐름’을 보자는 것이였기에 테크노 음악에 대한 관점도 락음악에서 부터 시작 하도록 한다. 테크노는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는 시기가 단지 힙합 붐이 일어 났을 시기와 비슷했을 뿐 실은 그보다 훨씬 오래된 전통을 자랑하고 있는 것을 머릿속에 기억 하도록 하자.
지난 호 중 필자가 “락음악의 마지막 계략은 엉뚱하게도 힙합과 일렉트로니카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라고 말한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과연 테크노/일렉트로니카 계열에선 과연 누가 락을 죽였을까? 자, 이제 테크노 속으로 뛰어들기 전 우리는 락음악의 막바지 호투에 잠깐 발을 담궜다 빼야할것이다.

Anti-Rock

테크노의 기원은 물론 지금부터 이야기 하려는 ‘락의 부정’ 보다는 훨씬 먼저 행해졌던 일이다. 하지만 필자는 먼저 락을 부정하려고 했던 락 뮤지션들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이미 1970년대 초반부터 데이비드 보위, 브라이언 페리(Bryan Ferry), 루리드(Lou Reed) 등은 글램 락(Glam Rock) 이라는 장르로 락의 부정을 표면적으로 들어낸 대표로 꼽히고 있다. 특히 데이비드 보위 같은 경우는 끊임없는 변신(음악적, 외형적 이미지 모두)으로 디스코를 거쳐 브라이언 이노 와 함께 엠비언트에까지 손을 뻗는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했다.

이들은 1960년대 락스타들이 보여주었던 것과 는 달리 비대하고 과도한 자신의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의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외모와 음악은 그들의 뇌세포에 까지 깊숙이 침투 한 것일까? 과도한 나르시즘은 과도한 쇼맨쉽(?)으로 표출되었고 그들의 그러한 ‘행태’는 도전이나 개혁 이라기보단 ‘도피’로 비추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 결과 그들의 음악은 군중에게서까지도 너무 빨리 ‘도피’ 해버리게 된다. 하지만 보위는 끊임없는 변신으로 글램 록이 사장길에 접어들 무렵인 1975년 Young America을 발표, 아방가르드 디스코(avant-garde disco)를 선보이며 그 난관을 멋지게 빠져나가게 된다.

그 후 1978년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의 성공으로 디스코(Disco)의 황금기에 접어들게 되고(락 팬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았을 테지만….) 현재까지도 여러 장르들과의 훌륭한 융화력으로 더욱 많은 서브 장르를 창출해내는 결과를 낳는다. 그 후 1980년대로 넘어와 뉴웨이브, 나아가 신스팝과 뉴로맨틱스가 있을 것이다.

뉴웨이브의 전조가 퍼브락 이라면 뉴로맨틱스의 전조는 신스팝 일 것이다. 우선 퍼브락에서 출발하여 뉴웨이브를 이끈 인물로 가장 눈에 띄는 존재는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였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 된다. 리버풀 출신의 그는 버디 홀리와 비틀즈, 홀리스(The Hollies) 등에 심취해 10대를 보내며 마침내 1975년 그의 첫 앨범인 My Aim Is True를 발매, 세상에 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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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vis Costello 1978” by Jean-Luc Ourlin – http://www.flickr.com/photos/jlacpo/4646227/.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이 앨범은 평론가들 사이에서 데뷔앨범으론 드물게 호평을 얻으며 그의 활동에 활력을 불어 넣게 된다. 이후에 그는 1979년 ‘Armed Force’, 1980년 ‘Get Happy’ 등의 음반으로 1980년대 중반 락이 다시 ‘모던 락’ 이라는 이름으로 되살아 나는데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 가운데 하나로서 인정 받게 된다.

코스텔로와 더불어 뉴웨이브의 주역으로는 프리텐더스(The Pretenders) 와 잼(The Jam)을 들 수 있을 것 이다. 프리텐더스는 코스텔로와 는 달리 자신들의 음악을 펑크록과 결합시키려는 시도를 펼쳤고 맨체스터 출신의 버즈콕스(The Buzzcocks)와 함께 펑크 팝(Punk Pop)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잼은 리듬앤블루스, 소울, 포크 등을 모드(Mode)의 테두리 안에서 다양하게 구사하는 식의 음악을 선보여 인정 받았다.

신디사이저로 대표되는 새로운 ‘전자악기(혹은 전자음악)’는 주류팝을 반대했던 펑크를 밀어 내면서 기존 대중의 관심과 지지를 자양분으로, 후에 주목 받게 될 뉴로맨틱스의 터전을 마련하게 된다. 평론가 피터 윅(Peter Wicke)은 1980년대 대중음악계를 ‘합성물의 시대’ 라고 명명 했을 만큼 일정하게 스타일을 분류하기 어려운 스타일들이 많이 대두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신스팝과 뉴로맨틱스다. 듀란 듀란(Duran Duran), 컬쳐 클럽(Culture Club)과 같이 락 밴드의 구성을 보일 때는 뉴로맨틱스라는 명칭으로, 디페시 모드 (Depeche Mode), 휴먼 리그 (Human Leag – ue), 울트라 복스 (Ultra vox)와 같이 신디사이저와 보컬 형식을 보이는 밴드들에게는 신스팝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미미한 차이 였다.

신스팝은 독일의 크라프트베르크 (Kraftwerk)의 영향을받되 그들과는 달리 가공되지 않은 전자음에 노골적으로 ‘팝적’ 선율을 접목 시킨 형식의 단조롭고 거북함 없는 곡을 양산하게 되는데 이는 또한 디스코에서 강한 영향을 받은것 이라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음악은 정작 음악적인 감각 보다는 전자기술에 집착한 나머지 밋밋한 음악을 ‘양산’ 하게 되었다는 비판을 듣게 된다.

한편 1970년대 말 영국 클럽씬에서는 신스팝과 글램록에 심취한 이들이 데이비드 보위를 기념하는 행사인 ‘A Club For Heroes’ 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게 되는데 이 행사는 주변 클럽으로 확산되게 된다. 이 같은 상황을 기반으로 뉴로맨틱스의 첫번째 선두주자에 속하는 스팬도 발레(Spandau Ballet)는 뉴로맨틱스 스타일을 물위에 올려놓은 최초의 밴드라는 찬사를 받으며 뉴로맨틱스 최초의 히트 싱글인 ‘To cut a long story short’를 1980년 영국 싱글 차트 5위에 올려놓는 쾌거를 이룬다.

이들의 이러한 성공에 많은 밴드들이 그 뒤를 잇게 되며 울트라 복스, 휴먼리그 등도 히트 싱글을 발표하게 된다. 이들이 단순 신시사이져음색에 팝적인 선율의 도입으로 군중에 관심을 끌었다면 또 다른 한편에선 레게 와 디스코 스카를 도입해 좀더 쉬운 음악을 선보인 밴드들도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는 펑카폴리탄(Funkaplitan)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뉴로맨틱스가 흑인 음악과 라틴음악을 어떻게 팝적으로 분해 하고 요약해서 수용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그 무렵 ‘A Club For Heroes’ 행사의 주도자 였던 보이조지(Boy George)는 펑크 밴드 출신의 드러머 존 모스(Jon Moss)등과 뜻을 합쳐 컬쳐 클럽을 결성하게 된다. 그들은 양성적 섹슈얼리티와 다국적 음악스타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되는데, 그들의 그러한 성공은 1960년대의 티니바퍼(Teenybopper)의 주역인 소녀들의 열광적인 지지와 때맞춘 MTV 출현 덕분이었다. 그들 (컬쳐 클럽을 위시해 듀란 듀란, 왬(Wham), 프랭키 고우즈 투 할리우드(Frankie goes to Hollywood))은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영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우상으로 부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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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kie Goes to Hollywood in London cropped” by Jane McCormick Smith – Jane McCormick Smith.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이상 뉴웨이브-신스팝-뉴로맨틱스까지의 행보를 간략히 짚어 보았다. 락 팬들은 어쩌면 필자가 여기까지 늘어놓은 이야기들을 ‘역겹게’ 읽었을지도 모르나 위에 나열한 밴드(음악)들의 진화와 테크노 음악과의 연장선을 부정하기 어려운 상황이기에 그들에 대한 설명을 피할 수 없었던 점을 충분히 감안 했으리라 생각한다. (사실 락 음악 팬들은 데쓰(Death Metal) 과 펑크 이후 곧바로 인더스트리얼로 뛰어 넘었을 테지만…) 뉴로맨틱스 신예들의 선전에도 불구 하고 언더그라운드씬에서는 새로운 대안을 위한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그 대표 주자로 단연 인더스트리얼(Industrial)과 앰비언트(Ambient)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앰비언트가 좀더 진보적인 전자음악에 대한 갈증을 푸는 역할을 했다면 인더스트리얼은 락음악 팬들을 전자 음악쪽에 관심을 기울이게 한 장본인임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Pretty, Hate Machine

인더스트리얼을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린 인물로는 1990년대 정도까지 거슬러 올라와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나 미니스트리(Ministry)등의 밴드들이 팝차트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면서 전세계적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인간의 소음에 대한 동경은 더욱 오래 전부터 시도 되어왔다.

명망 있는 클래식 음악가인 루이 루솔로(Lui Russo – lo)는 1913년에 이미 인토나루모레(intonarumore)라는 ‘기계’를 연주에 도입 했으며 에릭 사티(Erick Satie)는 1920년대 이미 권총과 타자기를 자신의 음악에 적극 수용하는 예를 보여주었다. 그 이후에도 프랑스의 작곡가인 에드가 바레즈(Edgar Varese)는 1933년 퍼커션 만으로 이루어진 이오니자숑(Ionisation)을 발표했다. 특히 그는 소음을 포함한 어떠한 소리로도 음악을 만들수 있는 권리 를 주장 하면서 소음을 음악적영역에 포함시키는데 적극적이었다.

이와 같은 실험은 1960년대 이후 대중음악의 영역에도 활발히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예전의 클래식 음악가들과 다른점은 대중적인 ‘매체’를 적극 ‘이용’하여 자신들의 영역을 확보해 나갔다는 것이다. 이제 다시 1976년대 영국으로 돌아와 인더스트리얼의 시조 라는 칭호를 얻은 스로빙 그리슬(Throbbing Gristle)에 우리는 주목한다. 그룹의 리더인 제네시스 피오리지(Genesis P-Orridge)는 1976년 스로빙 그리슬을 결성하기 이전부터 전위 예술에 몸담던 인물인데 그는 1969년 Coum트랜스미션이라는 아방가르드 예술단체를 결성하여 충격적인 퍼포먼스를 해오던 인물이다.

그들의 음악 활동은 펑크가 가졌던 부정 및 해체 그 이상의 강도와 충격을 가지고 왔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쓰였던 기본 악기인 기타, 베이스, 드럼 조차도 거부 하려는 의도를 다분히 내 비췄고, 기존의 곡 진행 방식 마저 모두 무시해 버렸다. 일 예로 멤버간의 포지션 설정을 “너는 기타를 한번도 쳐보지 않았으니 기타를 치고, 난 드럼에 재능이 있지만 베이스를 연주 하지.” 라는식 으로 결정 했고, 멤버중의 하나가 기타가 너무 무겁다고 하자 아예 기타의 보디를 반으로 잘라서 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들의 이러한 음악적 관점에 변조된 이펙터와 신시사이저, 샘플러 등은 그들에게 안성맞춤인 ‘도구’ 였다. 또한 이들은 공연장에서 자신들의 전신이었던 Coum트랜스미션에서 보여주었던 과격한 공연을 보여주어 리더인 피오리지는 정신병자였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피오리지는 Coum트랜스미션의 활동 당시 자신의 피를 주사기로 뽑아 재 투여 하는 등 과격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들과 같은 목표를 공유한 아티스트을 양성하고 유대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1976년 인더스트리얼 레코드 레이블을 설립하게 되는데 소속된 밴드들 가운데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었던 밴드가 바로 카바레 볼테르(Cabaret Voltaire)였다.

카바레 볼테르는 리처드 H. 커크(Richard H, Kirk), 스티븐 맬 맬린더(Stephen ‘Mal’ Mallinder), 크리스 왓슨(Chris Watson) 이상 3명을 주축으로 결성된 밴드인데 이들은 이미 1973년경부터 신시사이저와 테이프 기기들을 이용한 실험에 몰두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후에 오늘날 머신 리듬(Machine Rhythm)이라 불리는 인더스트리얼의 트레이드마크를 발전시킨 장본이라는 영예를 안게 된다. 그 외에도 이들의 실험은 후에 여러 인더스트리얼 아티스트들에게 사운드 표본을 제시하게 된다. 허나 인더스트리얼 레코드 레이블(IR)에서는 이들의 초기 작업만을 발매 했으며 정식 데뷔앨범은 1978년 러프 트레이드(Rough Trade) 레이블에서 발매되게 된다.

스로빙 그리슬 이나 카바레 볼테르의 선전에 힘입어 1970년대 말에는 인더스트리얼은 IR 레코드에만 국한 되지 않은 더욱 넓은 활동무대를 구축하게 된다. 또한 위에서 말했듯이 그들의 영향력은 음악 만큼이나 파격적으로 영화, 패션, 건축 등 많은 분야게 적용되었다. 신체를 뚫고 불로 낙인을 만드는 이르나 리벳 헤드의 패션 스타일과 연쇄 살인범을 추모하고 약물이나 섹스, 정신질환 등을 주요 소재로 삼는 트랜스그레시브 소설(Transgressive Fiction) 등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하지만 스로빙그리슬이 해체되는 연도인 1981년도를 기점으로 초기 인더스트리얼 유파는 막을 내리게 된다.

여기까지 테크노 전조에 대한 신스팝과 뉴웨이브, 뉴로맨틱스 그리고 초기 인더스트리얼 유파에 대해 알아 보았다. 다음 편에는 1990년대 들어와 다시 부활하게 되는 ‘변형된’ 인더스트리얼과 테크노에 관해 좀더 깊이 들어가 보자.  

http://www.iautosound.co.kr/200202/auto0502.html 
 

Techno

★ 테크노의 역사

테크노는 말 그대로 기술(技術)이란 의미의 ‘Technology’ 에서 따온 단어이다. 20세기의 대표적인 발명품인 컴퓨터의 탄생은 음악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는데 바로 신디사이저라는 첨단 악기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테크노 음악도 이와 발맞추어 탄생하게 되었다. 1960년대 후반 영국의 록시 뮤직 (Roxy Music), 브라이언 이노 (Brian Eno), 독일의 탠저린 드림 (Tangerin Dream), 크라프트베르크 (Kraftwerk) 등 유럽 지역의 진보 성향 뮤지션들은 신디사이저를 도입해 더욱 실험적인 음악을 발표했는데 이들이 만들어낸 전위적이면서 신비주의적인 일렉트로닉 사운드는 뒤에 등장하는 테크노 음악의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초기 테크노 음악은 70년대 후반 디스코, 펑크라는 신조류의 영향을 대거 수용한 형태로 변모하게 된다. 테크노 팝이라고도 불리우던 이 당시 테크노 음악은 팝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사운드로 전과는 달리 대중적인 인기 또한 얻을수 있었다. 버글즈 (Burgles), 게리 뉴만 (Gary Numan), 울트라복스 (Ultravox), 휴먼 리그 (Human League) 등이 당시 주목받던 뮤지션들이다. 한층 발전된 신디사이저를 이용해 예전의 실험적인 사운드에서 탈피하여 뉴웨이브 (New Wave), 뉴 로맨틱 (New Romantic), 댄스, 팝 사운드를 차용한 신스 팝 (Synth Pop)은 80년대 초반 대중 음악계의 주류로 새롭게 부각되었다. 현재까지 최고의 신스 팝 밴드로 인기 정상을 누리고 있는 디페쉬 모드 (Depeche Mode), 역시 디페쉬 모드를 거친 빈스 클락 (Vince Clark)이 결성했던 야주 (Yazoo, 훗날 이레이저 Erasure로 발전됨), 유리스믹스 (Eurythmics), 하워드 존스 (Howard Jones)등의 음악은 당시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레이저, 프랭키 고즈 투 헐리웃 (Frankie Goes To Hollywood), 팻 샵 보이즈 (Pet Shop Boys), 아트 오브 노이즈 (Art Of Noise)등 영국 신스 팝 계열의 뮤지션들이 더욱 맹위를 떨치는 가운데 80년대 중반에 와서 테크노는 다양한 세분화를 이루게된다. 샘플링 머쉰같은 전자 악기들이 보편화되면서 새로운 음악적 실험이 이뤄지는데 대표적인 댄스 뮤직인 하우스 (House), 기계적인 인더스트리얼 (Industrial) 경향의 음악은 이 시기에 와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테크노라고 부르는 것들은 거의 90년대에 등장한 테크노 음악을 일컫는다. 현재의 테크노는 엠비언트 (Ambient), 애시드 재즈 (Acid Jazz), 트랜스 (Trance), 드럼 앤 베이스 (Drum and Bass), 하드코어 테크노 (Hardcore Techno), 트립 합 (Trip-Hop) 등 마치 세포 분열을 연상케 할만큼 수많은 하위 장르로 파생되고 있다.

★ 대표적인 90년대 테크노 뮤지션

불협화음, 전위적인 구성, 파괴적인 기계음 등, 세기말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프로디지 (Prodigy)는 단연 90년대가 낳은 최고의 테크노 밴드이다. (1997년, 테크노 뮤지션으로는 최초로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을 차지) 프로디지와 함께 영국 테크노의 3인방으로 군림하는 케미컬 브러더즈 (Chemical Brothers)와 형제 듀오 오비탈 (Orbital), 이외에도 영화 ‘트레인스포팅’에 삽입된 ‘Born Slippy’로 유명해진 언더월드 (Underworld), 테크노의 불모지였던 미국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모비 (Moby, 영화 ‘007 네버다이’에 참여) 프랑스의 대프트 펑크 (Daft Funk), 에어 (Air), 독일의 아타리 틴에이지 라이엇, 트립-합을 정착시킨 영국의 혼성듀오 포티쉐드 (Portishead) 등은 90년대 테크노 음악의 붐을 주도한 대표적인 뮤지션들이다.

★ 국내의 경우

정통 테크노 음악이라고 부를 만한 시도를 국내에선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해 달파란 (시나위, H2O를 거친 베이시스트 강기영의 예명)이 발표한 독집 음반 ‘휘파람 별’ 이나 조동익의 영화음악 모음집 ‘Movie’에 수록된 ‘일탈’, ‘현기증’ 등 일부곡 정도랄까 ? 흔히 일반인들이 테크노라고 생각하는 음악들은 대개 댄스 음악에 테크노적인 요소를 양념처럼 첨가한 것 뿐이다. 멜로디가 강조된 음악을 선호하는 국내 정서와 이와는 반대인 90년대 테크노 음악과의 간격은 생각보다 크다.

이제 테크노는 세기말을 맞이하는 1999년, 중요한 문화 현상중 하나로 자리매김을 했다. 비인간적이고 기계적이라는 비판에도 아랑곳 없이 테크노의 인기는 당분간 지속될 듯 보인다. 하지만 테크노의 미래가 지금처럼 밝을지는 예측하기 힘들다. 다양한 음악적인 실험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앞서 등장했다 소멸한 여러 장르의 음악들 처럼 테크노 음악도 같은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뮤지션들도 기억하겠지만.

Kraftwerk / Trans – Europe Ex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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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Europe Express German” by The cover art can be obtained from Kling Klang.. Licensed under Fair use of copyrighted material in the context of Trans-Europe Express (album)“>Fair use via Wikipedia.

크라우트록(Krautrock)… 캔,파우스트,노이 등의 실험적 혹 음악은 `아트 록’이 반드시 거장적 연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그러나 뒤셀도르프 출신의 크라프트베르크가 `록 음악`을 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미래는 전자 음악의 시대이다’라고 확신한 이들은 전자 악기 및 전자기기만을 사용한 음악을 만을 사용한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들의 승부수는 로보틱(Robotic)하고 강박적인 일렉트로닉 펄스(Electronic Pulse)에 기포한 감정 없고 비인간적인 사운드였다. 8비트의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리듬, 일렉트로닉 키보드의 리프(혹은 시퀀스)는 자칫 단조롭게 들리기 쉽다. 그러나 22분이라는 오랜 시간을 지속하면서도 이런 단조로운을 떨쳐 버린다. 갖가지 음향효과가 양념처럼 들어가고 특유의 몰환적 기타 사운드는 최면적 효과를 발휘한다. ‘테크놀로지 속의 스피리추오리티'(Spirituclity in technology)라는 후대의 테크노 씬의 맹아는 이미 여기부터 존재한다. 그들의 미래주의적 프로젝트는 멋지게 성공한 듯이 보인다. 그들이 주 영향은 협의의 록 음악분만 아니라 록의 외부까지 멀리 환장된다. 뉴로맨틱스, 알렉토로신서 캅, 하우스, 테크노ㅡ 인더스트리얼, 앰비언트에 이르기까지 크라프트베르크의 유산은 지대하다. 독자는 그들의 초기 작품이 정말 실험적인 록 음반이라고 주장할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독일의 록음악이 이 앨범이 없었다면 이렇게 세계적으로 알려졌을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에 속한다.(신 현 준)

Y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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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MO2008(cropped)” by YMO2008.jpg: The_Junes of Flickr.com
derivative work: Solid State Survivor (talk) – YMO2008.jpg.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굳이 YMO를 이야기하는 이유 두가지. 작년 가을에 일본에 갔을 때 놀란 일이 있다. 타워 레코드에서 신보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귀에 익은 음악이 들렸다. YMO의 [Rydeen]이었다. 나온지 십년도 넘은 음악이 갑자기 나오는 이유가 뭐지, 란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YMO의 베스트 음반이 새로 발매된 탓이었다. 일본 젊은이들은 여전히 그들을 일종의 ´전설´로 여긴다. 일본 대중음악인으로선 미국과 유럽 등지의 음악인에게 영향을 준 최초의 그룹이었으니까. 두 번째는 얼마전 국내 발매된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반 [BTTB] 탓이다. [Tong Poo]이라는 타이틀의 음악이 사카모토 류이치의 피아노 연주로 흘러나오고 있다.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YMO 시절에 사카모토 류이치가 만들었으며 YMO의 대표곡 중 하나로 꼽히는 곡이다. 새로운 감흥을 자아내는 것이다.

사카모토의 국내 공연이 예정되어 있어선지 요즘 그에 대한 이야기들이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것도 작은 이유다. YMO는 키보드의 사카모토 류이치, 베이스와 키보드의 호소노 하루오미, 그리고 드럼과 키보드의 다카하시 유키히로로 구성된 3인조 그룹이었다. 도쿄 대학 출신의 사카모토 류이치는 전형적인 인텔리 음악인이며 그룹의 리더였던 호소노 하루오미는 음악 제작과 연주를 겸했으며 다카하시는 록 음악인으로 활동하던 인물이다. YMO는 80년대 일본 음악의 지형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엔카와 댄스, 그리고 록으로 삼분되어 있던 일본 음악계에 테크노라는 새로운 장르를 들이밀었던 것이다. YMO 멤버들은 차갑고 정형화된 음악을, 공연장에서 마치 로봇 같은 매너로 연주했다. 중국의 인민군복을 입고 무대에 등장해 세간에 충격을 던지기도 했다. 이들은 노래의 제목을 장 뤽 고다르의 영화제목에서 빌어오는 등 혁신적인 대중음악을 들려줬다. 그리고 미국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이들이 외국무대로 향한 것은 [솔리드 스테이트 서바이버 Solid State Survivor]라는 앨범을 발표한 직후였다. YMO의 무개성적인 테크노음악은 당시 록 음악의 대안을 찾고 있던 서양 젊은이들에게 어필했으며 미국 시장에서 앨범을 발매한 YMO는 일본 대중음악인으로선 최초로 세계순회 공연을 하는 활발한 활동을 벌인다. 80년대 초반, 일본에선 ´YMO붐´이라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그만큼 청년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던 셈이다. 83년에 해산을 한 YMO는 이후 1993년에 멤버들이 다시 모여 신작 앨범을 녹음하기도 했는데 전성기 만큼 열광적인 반응을 얻진 못했다. 이미 음악계의 판도가 댄스풍의 테크노음악으로 바뀌어버린 뒤였기 때문이다. 이들의 음악은 더 이상 젊은 층에 어필할 무엇인가를 상실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YMO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다를 수 있다. 이들은 시기적으로 운이 좋은 셈이었다. 전자악기의 보급에 발맞춰, 테크노 음악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들고 나온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YMO 덕에 이후 일본에서 테크노 음악이 계속적인 흐름을 만들 수 있었으며 그 정신적 자양분을 YMO가 제공하였음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번 공연에서 사카모토 류이치가 [Tong Poo]를 연주할까. 만약 그렇다면, 이미 20여년 전에 일본에서 음악적 신화를 구축했던 세 음악인의 자취를 흐릿하나마 다시 접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족 한가지. 일본의 젊은이들이 YMO에 갖는 대단한 존경심과 애정을 확인하고 싶은 분은 국내에서 출판된 일본의 판타지 만화 [가면 속의 수수께끼]를 꼭 찾아서 보길 바란다. 이 만화를 그린 작가는 YMO의 대단한 매니아인 듯한데 만화 곳곳에 그들의 음반 자켓과 음악인들 캐릭터를 재치있게 그려넣었다. 그 재미가 쏠쏠하다. <글: 김 의 찬> 출처 http://www.odemusic.co.kr/(주의 : 현재는 야동 사이트로 연결됨)

디스코그래피
1978 Yellow Magic Orchestra EMI
1979 Solid State Survivor EMI
1980 Public Pressure [live] Alfa
1980 Xoo Multiplies EMI
1981 BGM EMI
1981 Technodelic EMI
1983 Naughty Boys Restless
1983 Service Restless
1984 After Service [live] Restless
1993 Technodon EMI
1997 Yellow Magic Orchestra [Import Bonus Tracks] Sony Music
2003 Zosyoku Japanese Import
2003 Yellow Magic Orchestra: U.S. Edition Sony Music

Shamen, The

소용돌이 치는 듯한 싸이키델릭 락과 하드코어 힙합 리듬을 뒤섞은 the Shamen의 음악은 8~90년대 댄쓰클럽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Colin Angus, Peter Stephenson, Keith McKenzie, 그리고 Derek McKenzie로 구성된 이 4인조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그들의 음악적 뿌리를 이른바 네오싸이키델릭에서 찾고 있다.

공식적으로 1986년 결성된 the Shamen은 1987년에 데뷔앨범 Drop을 발매하였다. 이 앨범은 다양한 키타 텍스춰와 60년대 후반 락밴드들에 대한 향수가 적절히 배합된 앨범이었다. 이 앨범 발매 후 Angus는 acid house/hip-hop에 푹 빠져 들고 말았으며, Derek McKenzie는 그룹을 떠나고 이어 William Sinnott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William은 밴드의 싸운드를 재편성하는데 도움을 주었는데 쌤플, 드럼머쉰 등에 의존한 리듬펄스가 크게 강조되게 되었다.

1988년 스테이지에 선 이들은 새롭게 다듬어진 싸운드로 스테이지에 올랐다. 이 시기에 Peter Stephenson 와 Keith McKenzie 가 밴드를 떠났다. 결국 Angus와 Sinnott는 듀오가 되고 만 셈이다. 1989년 In Gorbachev We Trust라는 세번째 앨범으로 the Shamen 은 영국뿐 아니라 미국의 청취자들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듀오는 계속해서 댄쓰뮤직에 몰두하였다.

막 메인스트림이 그들의 음악에 주의를 기울여갈 즈음 Will Sinnott는 1990년 5월 23일 카나리섬에서 익사하였다. Sinnott의 가족들의 격려로 말미암아 Angus는 활동을 계속했고 처음으로 챠트에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영국에서 91년과 92년 사이에 다섯 개의 싱글히트곡이 쏟아졌다. “Move Any Mountain (Progen 91)”은 1991년 말 마침내 미국 팝40에 진입하였다.

그러나 1993년은 그야말로 침몰의 시기였다. 이어지는 앨범은 팬들로부터 외면을 받았으나 그들은 꾸준히 앨범을 냈다.

디스코그래피
1987 Drop (Communion)
1988 Strange Day Dreams (Moksha-Materia)
1988 What’s Going Down? (Communion)
1989 In Gorbachev We Trust (Edsel)
1990 En-Tact (Epic)
1992 Boss Drum (Epic)
1995 Axis Mutatis (One Little)
1996 Hempton Manor (One Little)
1998 UV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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