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y To Dancing?

지난 호 까지 힙합 문화와 음악에 관해 알아 보았다. “1990년대는 힙합과 테크노만 있을 뿐이다.” 라는 다소 과격한 말이 있을 정도로 1990년대부터 현재 까지 힙합과 테크노는 전세계적인 붐을 타고 우리의 주변에 산재해있다. 하지만 국내의 테크노라 하는 음악들은 말 그대로 돈벌이에 급급하여 심하게 왜곡 되고, 음악자체를 조롱한 ‘댄스가요’ 일 뿐 의식과 사상이 존재하는 ‘댄스뮤직’이 절대 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댄스 뮤직 자체를 저급한 음악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마저 생겨 나게 되는데 미국의 아티스트인 모비(Moby)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나를 테크노 뮤지션 혹은 댄스 DJ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20년 동안 음악을 해왔다. 나는 전형적인 뮤지션이었다. 재즈, 스피드 메탈, 하드코어, 펑크, 현란한 뉴웨이브까지 연주 해 봤다. 사실 사람들은 댄스 뮤지션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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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by 1” by Uncensored InterviewFlickr.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하지만 일렉트로닉 뮤지션들은 조작 매뉴얼이 전화 번호부 만큼이나 두꺼운 그런 장비 40~50개의 시스템을 알아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다른 종류의 음악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내가 이런 음악을 좋아 하는 건 일렉트로닉 악기들은 불평을 하지도, 담배를 피우지도 않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돈을 줄 필요도 없다.

음악을 판단 하는 나의 유일한 기준은, 음악이 주관적인 수준에서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오, 헤비메탈, 그건 멋진 음악임에 틀림없어’ 식의 좋고 나쁨을 판단 하는 건 난센스다. 확실히 각각의 음악은 각각의 사람들에 의해 평가될 필요가 있다.” 모비의 말은 댄스 뮤직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기껏해야 왜곡된 ‘댄스 가요’ 나부랭이나 듣고 테크노를 비하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무지함을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락(Rock)의 소멸 이후 대두 되었던 또 하나의 대안인 진짜 테크노 음악(Techno Music)에 관해 논해보자. 이 글이 애초에 대중적인 락(Rock) 음악에 기초하여 락음악 팬들이 다른 장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일종의 ‘흐름’을 보자는 것이였기에 테크노 음악에 대한 관점도 락음악에서 부터 시작 하도록 한다. 테크노는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는 시기가 단지 힙합 붐이 일어 났을 시기와 비슷했을 뿐 실은 그보다 훨씬 오래된 전통을 자랑하고 있는 것을 머릿속에 기억 하도록 하자.
지난 호 중 필자가 “락음악의 마지막 계략은 엉뚱하게도 힙합과 일렉트로니카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라고 말한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과연 테크노/일렉트로니카 계열에선 과연 누가 락을 죽였을까? 자, 이제 테크노 속으로 뛰어들기 전 우리는 락음악의 막바지 호투에 잠깐 발을 담궜다 빼야할것이다.

Anti-Rock

테크노의 기원은 물론 지금부터 이야기 하려는 ‘락의 부정’ 보다는 훨씬 먼저 행해졌던 일이다. 하지만 필자는 먼저 락을 부정하려고 했던 락 뮤지션들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이미 1970년대 초반부터 데이비드 보위, 브라이언 페리(Bryan Ferry), 루리드(Lou Reed) 등은 글램 락(Glam Rock) 이라는 장르로 락의 부정을 표면적으로 들어낸 대표로 꼽히고 있다. 특히 데이비드 보위 같은 경우는 끊임없는 변신(음악적, 외형적 이미지 모두)으로 디스코를 거쳐 브라이언 이노 와 함께 엠비언트에까지 손을 뻗는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했다.

이들은 1960년대 락스타들이 보여주었던 것과 는 달리 비대하고 과도한 자신의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의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외모와 음악은 그들의 뇌세포에 까지 깊숙이 침투 한 것일까? 과도한 나르시즘은 과도한 쇼맨쉽(?)으로 표출되었고 그들의 그러한 ‘행태’는 도전이나 개혁 이라기보단 ‘도피’로 비추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 결과 그들의 음악은 군중에게서까지도 너무 빨리 ‘도피’ 해버리게 된다. 하지만 보위는 끊임없는 변신으로 글램 록이 사장길에 접어들 무렵인 1975년 Young America을 발표, 아방가르드 디스코(avant-garde disco)를 선보이며 그 난관을 멋지게 빠져나가게 된다.

그 후 1978년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의 성공으로 디스코(Disco)의 황금기에 접어들게 되고(락 팬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았을 테지만….) 현재까지도 여러 장르들과의 훌륭한 융화력으로 더욱 많은 서브 장르를 창출해내는 결과를 낳는다. 그 후 1980년대로 넘어와 뉴웨이브, 나아가 신스팝과 뉴로맨틱스가 있을 것이다.

뉴웨이브의 전조가 퍼브락 이라면 뉴로맨틱스의 전조는 신스팝 일 것이다. 우선 퍼브락에서 출발하여 뉴웨이브를 이끈 인물로 가장 눈에 띄는 존재는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였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 된다. 리버풀 출신의 그는 버디 홀리와 비틀즈, 홀리스(The Hollies) 등에 심취해 10대를 보내며 마침내 1975년 그의 첫 앨범인 My Aim Is True를 발매, 세상에 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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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vis Costello 1978” by Jean-Luc Ourlin – http://www.flickr.com/photos/jlacpo/4646227/.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이 앨범은 평론가들 사이에서 데뷔앨범으론 드물게 호평을 얻으며 그의 활동에 활력을 불어 넣게 된다. 이후에 그는 1979년 ‘Armed Force’, 1980년 ‘Get Happy’ 등의 음반으로 1980년대 중반 락이 다시 ‘모던 락’ 이라는 이름으로 되살아 나는데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 가운데 하나로서 인정 받게 된다.

코스텔로와 더불어 뉴웨이브의 주역으로는 프리텐더스(The Pretenders) 와 잼(The Jam)을 들 수 있을 것 이다. 프리텐더스는 코스텔로와 는 달리 자신들의 음악을 펑크록과 결합시키려는 시도를 펼쳤고 맨체스터 출신의 버즈콕스(The Buzzcocks)와 함께 펑크 팝(Punk Pop)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잼은 리듬앤블루스, 소울, 포크 등을 모드(Mode)의 테두리 안에서 다양하게 구사하는 식의 음악을 선보여 인정 받았다.

신디사이저로 대표되는 새로운 ‘전자악기(혹은 전자음악)’는 주류팝을 반대했던 펑크를 밀어 내면서 기존 대중의 관심과 지지를 자양분으로, 후에 주목 받게 될 뉴로맨틱스의 터전을 마련하게 된다. 평론가 피터 윅(Peter Wicke)은 1980년대 대중음악계를 ‘합성물의 시대’ 라고 명명 했을 만큼 일정하게 스타일을 분류하기 어려운 스타일들이 많이 대두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신스팝과 뉴로맨틱스다. 듀란 듀란(Duran Duran), 컬쳐 클럽(Culture Club)과 같이 락 밴드의 구성을 보일 때는 뉴로맨틱스라는 명칭으로, 디페시 모드 (Depeche Mode), 휴먼 리그 (Human Leag – ue), 울트라 복스 (Ultra vox)와 같이 신디사이저와 보컬 형식을 보이는 밴드들에게는 신스팝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미미한 차이 였다.

신스팝은 독일의 크라프트베르크 (Kraftwerk)의 영향을받되 그들과는 달리 가공되지 않은 전자음에 노골적으로 ‘팝적’ 선율을 접목 시킨 형식의 단조롭고 거북함 없는 곡을 양산하게 되는데 이는 또한 디스코에서 강한 영향을 받은것 이라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음악은 정작 음악적인 감각 보다는 전자기술에 집착한 나머지 밋밋한 음악을 ‘양산’ 하게 되었다는 비판을 듣게 된다.

한편 1970년대 말 영국 클럽씬에서는 신스팝과 글램록에 심취한 이들이 데이비드 보위를 기념하는 행사인 ‘A Club For Heroes’ 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게 되는데 이 행사는 주변 클럽으로 확산되게 된다. 이 같은 상황을 기반으로 뉴로맨틱스의 첫번째 선두주자에 속하는 스팬도 발레(Spandau Ballet)는 뉴로맨틱스 스타일을 물위에 올려놓은 최초의 밴드라는 찬사를 받으며 뉴로맨틱스 최초의 히트 싱글인 ‘To cut a long story short’를 1980년 영국 싱글 차트 5위에 올려놓는 쾌거를 이룬다.

이들의 이러한 성공에 많은 밴드들이 그 뒤를 잇게 되며 울트라 복스, 휴먼리그 등도 히트 싱글을 발표하게 된다. 이들이 단순 신시사이져음색에 팝적인 선율의 도입으로 군중에 관심을 끌었다면 또 다른 한편에선 레게 와 디스코 스카를 도입해 좀더 쉬운 음악을 선보인 밴드들도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는 펑카폴리탄(Funkaplitan)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뉴로맨틱스가 흑인 음악과 라틴음악을 어떻게 팝적으로 분해 하고 요약해서 수용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그 무렵 ‘A Club For Heroes’ 행사의 주도자 였던 보이조지(Boy George)는 펑크 밴드 출신의 드러머 존 모스(Jon Moss)등과 뜻을 합쳐 컬쳐 클럽을 결성하게 된다. 그들은 양성적 섹슈얼리티와 다국적 음악스타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되는데, 그들의 그러한 성공은 1960년대의 티니바퍼(Teenybopper)의 주역인 소녀들의 열광적인 지지와 때맞춘 MTV 출현 덕분이었다. 그들 (컬쳐 클럽을 위시해 듀란 듀란, 왬(Wham), 프랭키 고우즈 투 할리우드(Frankie goes to Hollywood))은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영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우상으로 부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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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kie Goes to Hollywood in London cropped” by Jane McCormick Smith – Jane McCormick Smith.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이상 뉴웨이브-신스팝-뉴로맨틱스까지의 행보를 간략히 짚어 보았다. 락 팬들은 어쩌면 필자가 여기까지 늘어놓은 이야기들을 ‘역겹게’ 읽었을지도 모르나 위에 나열한 밴드(음악)들의 진화와 테크노 음악과의 연장선을 부정하기 어려운 상황이기에 그들에 대한 설명을 피할 수 없었던 점을 충분히 감안 했으리라 생각한다. (사실 락 음악 팬들은 데쓰(Death Metal) 과 펑크 이후 곧바로 인더스트리얼로 뛰어 넘었을 테지만…) 뉴로맨틱스 신예들의 선전에도 불구 하고 언더그라운드씬에서는 새로운 대안을 위한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그 대표 주자로 단연 인더스트리얼(Industrial)과 앰비언트(Ambient)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앰비언트가 좀더 진보적인 전자음악에 대한 갈증을 푸는 역할을 했다면 인더스트리얼은 락음악 팬들을 전자 음악쪽에 관심을 기울이게 한 장본인임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Pretty, Hate Machine

인더스트리얼을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린 인물로는 1990년대 정도까지 거슬러 올라와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나 미니스트리(Ministry)등의 밴드들이 팝차트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면서 전세계적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인간의 소음에 대한 동경은 더욱 오래 전부터 시도 되어왔다.

명망 있는 클래식 음악가인 루이 루솔로(Lui Russo – lo)는 1913년에 이미 인토나루모레(intonarumore)라는 ‘기계’를 연주에 도입 했으며 에릭 사티(Erick Satie)는 1920년대 이미 권총과 타자기를 자신의 음악에 적극 수용하는 예를 보여주었다. 그 이후에도 프랑스의 작곡가인 에드가 바레즈(Edgar Varese)는 1933년 퍼커션 만으로 이루어진 이오니자숑(Ionisation)을 발표했다. 특히 그는 소음을 포함한 어떠한 소리로도 음악을 만들수 있는 권리 를 주장 하면서 소음을 음악적영역에 포함시키는데 적극적이었다.

이와 같은 실험은 1960년대 이후 대중음악의 영역에도 활발히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예전의 클래식 음악가들과 다른점은 대중적인 ‘매체’를 적극 ‘이용’하여 자신들의 영역을 확보해 나갔다는 것이다. 이제 다시 1976년대 영국으로 돌아와 인더스트리얼의 시조 라는 칭호를 얻은 스로빙 그리슬(Throbbing Gristle)에 우리는 주목한다. 그룹의 리더인 제네시스 피오리지(Genesis P-Orridge)는 1976년 스로빙 그리슬을 결성하기 이전부터 전위 예술에 몸담던 인물인데 그는 1969년 Coum트랜스미션이라는 아방가르드 예술단체를 결성하여 충격적인 퍼포먼스를 해오던 인물이다.

그들의 음악 활동은 펑크가 가졌던 부정 및 해체 그 이상의 강도와 충격을 가지고 왔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쓰였던 기본 악기인 기타, 베이스, 드럼 조차도 거부 하려는 의도를 다분히 내 비췄고, 기존의 곡 진행 방식 마저 모두 무시해 버렸다. 일 예로 멤버간의 포지션 설정을 “너는 기타를 한번도 쳐보지 않았으니 기타를 치고, 난 드럼에 재능이 있지만 베이스를 연주 하지.” 라는식 으로 결정 했고, 멤버중의 하나가 기타가 너무 무겁다고 하자 아예 기타의 보디를 반으로 잘라서 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들의 이러한 음악적 관점에 변조된 이펙터와 신시사이저, 샘플러 등은 그들에게 안성맞춤인 ‘도구’ 였다. 또한 이들은 공연장에서 자신들의 전신이었던 Coum트랜스미션에서 보여주었던 과격한 공연을 보여주어 리더인 피오리지는 정신병자였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피오리지는 Coum트랜스미션의 활동 당시 자신의 피를 주사기로 뽑아 재 투여 하는 등 과격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들과 같은 목표를 공유한 아티스트을 양성하고 유대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1976년 인더스트리얼 레코드 레이블을 설립하게 되는데 소속된 밴드들 가운데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었던 밴드가 바로 카바레 볼테르(Cabaret Voltaire)였다.

카바레 볼테르는 리처드 H. 커크(Richard H, Kirk), 스티븐 맬 맬린더(Stephen ‘Mal’ Mallinder), 크리스 왓슨(Chris Watson) 이상 3명을 주축으로 결성된 밴드인데 이들은 이미 1973년경부터 신시사이저와 테이프 기기들을 이용한 실험에 몰두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후에 오늘날 머신 리듬(Machine Rhythm)이라 불리는 인더스트리얼의 트레이드마크를 발전시킨 장본이라는 영예를 안게 된다. 그 외에도 이들의 실험은 후에 여러 인더스트리얼 아티스트들에게 사운드 표본을 제시하게 된다. 허나 인더스트리얼 레코드 레이블(IR)에서는 이들의 초기 작업만을 발매 했으며 정식 데뷔앨범은 1978년 러프 트레이드(Rough Trade) 레이블에서 발매되게 된다.

스로빙 그리슬 이나 카바레 볼테르의 선전에 힘입어 1970년대 말에는 인더스트리얼은 IR 레코드에만 국한 되지 않은 더욱 넓은 활동무대를 구축하게 된다. 또한 위에서 말했듯이 그들의 영향력은 음악 만큼이나 파격적으로 영화, 패션, 건축 등 많은 분야게 적용되었다. 신체를 뚫고 불로 낙인을 만드는 이르나 리벳 헤드의 패션 스타일과 연쇄 살인범을 추모하고 약물이나 섹스, 정신질환 등을 주요 소재로 삼는 트랜스그레시브 소설(Transgressive Fiction) 등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하지만 스로빙그리슬이 해체되는 연도인 1981년도를 기점으로 초기 인더스트리얼 유파는 막을 내리게 된다.

여기까지 테크노 전조에 대한 신스팝과 뉴웨이브, 뉴로맨틱스 그리고 초기 인더스트리얼 유파에 대해 알아 보았다. 다음 편에는 1990년대 들어와 다시 부활하게 되는 ‘변형된’ 인더스트리얼과 테크노에 관해 좀더 깊이 들어가 보자.  

http://www.iautosound.co.kr/200202/auto050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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