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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Michael: 제조업화된 음악 산업 내에서의 보기 드문 신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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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iversity of Houston Digital Library – http://digital.lib.uh.edu/u?/p15195coll6,268, Public Domain, Link

(원문 보기)

편집자 노트 : Clay Cane 는 “Live Through This: Surviving the Intersections of Sexuality, God, and Race,”의 저자이다.

2016년 크리스마스에 우리는 또 한방 먹었다. 조지 마이클이 53세의 나이로 심장 질환으로 보도된 원인으로 인해 갑자기 세상을 등졌다. 소셜미디어는 그의 히트곡들 “Father Figure,” “Faith”, “Praying for Time” 등으로 그를 회상하느라 북새통이 되었다. 조지 마이클은 신과도 같은 목소리, 뛰어난 작곡 능력, 죽이게 잘 생긴 얼굴의 팝스타 이상의 인물이었다.

Georgios Kyriacos Panayiotou 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조지는 음악이 인종적으로 분리되고 주류의 문화가 가혹할 정도로 반(反)동성애적인 시절에 유명세를 얻은 백인, 남성, 동성애자, 쏘울 가수였다. Justin Timberlake, Robin Thicke, Sam Smith 그리고 많은 다른 이들은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 마이클처럼 이들도 팝 가수들이 아니다. 그들은 R&B 가수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백인이기 때문에 “팝”으로 분류되고 있다.

R&B를 부르는 백인 가수가 된다는 것의 특혜는 — 또한 지겨울 정도로 팝음악 방송에서 틀어대는 — 종종 음악 산업에서 인지를 못하곤 한다. 음악에는 언제나 깊은 차별이 존재하였다. 음악 산업은 Billie Holiday, Dinah Washington, John Lee Hooker 와 같이 레이블을 부자로 만들어주지만 그들 자신은 몇 푼밖에 쥐지 못하는 “인종 레코드”로부터 구축됐다. 한편 Pat Boone 또는 Elvis Presley와 같은 백인 아티스트들은 원래 흑인 아티스트들이 부른 노래를 불러대며 몇 백만 달러를 벌었다. R&B 싱글 차트조차 1982년부터 1990년까지 기이하게도 “Hot Black Singles”라고 이름 붙여졌다.

“흑인”음악과 “백인”음악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Prince, Michael Jackson, Whitney Houston이 깨부쉈다. 조지 마이클은 R&B에서 찾아낸 또 하나의 백인 아티스트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쏘울 사운드”를 만들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다. 그는 노력하지 않고도 쏘울풀했다. 저스틴 팀버레이크에게 씌워졌던 비난처럼 문화적으로 남용하려는 흔적은 전혀 없었다. 그는 “도시의 여장자(urban drag)”에 있지도 않았고 흔치 않은 흑인 프로듀서와 계약을 맺지도 않았다. 그는 다른 흑인 아티스트들처럼 – 말년의 Teena Marie처럼 – 쏘울풀했을 뿐이다.

1988년 조지 마이클은 빌보드의 “탑 블랙 앨범”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 최초의 백인 아티스트가 됐다. 또한 “One More Try”로 “블랙” 차트에서 1위를 마지막으로 차지했는데, (이제는 Hot R&B/Hip-Hop Songs로 이름이 바뀐) 그 다음 백인 아티스트는 2007년 “Lost Without U”를 부른 로빈 티클이다. 1980년대의 흑인 커뮤니티에게 조지 마이클은 프린스나 Janet Jackson처럼 그들의 사운드트랙이었다. 더욱이 그는 흑인다움을 연기하지 않은 자생적인 아티스트이자 싱어이자 작곡자이자 프로듀서였다. 이는 영감과 적절함의 차이다.

조지 마이클의 명성은 LGBT 커뮤니티에게 가장 소름끼치던 그 시기에 다시 한 번 찾아온다. AIDS 위기. 잘 알려져 있다시피 Ronald Reagan은 이미 수십만 명의 사람이 이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두 번째 임기의 말까지 AIDS 위기를 인정하지 않았다. 슬프게도 게이나 퀴어라는 것은 AIDS와 동일시되었다. 그러므로 조지 마이클과 같은 팝스타에게는 “외치고 자랑스럽다(out and proud)”라는 여지는 없었다. 그는 음악 산업의 옷장 안에 갇혔다.

그러나 “Freedom! ’90″에서 그는 가죽 재킷으로 엉덩이를 흔들어대던 이전의 이미지에 불을 댕겼다. 명백하게 밝힌 것은 아니지만 조지 마이클은 이 히트곡의 가사를 통해 스스로를 해방시켰다. “난 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기로 했어. / 네가 알아야 할 무언가가 있어. / 내가 너에게 그것을 말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 / 내 속 깊은 곳에 뭔가가 있어. / 내가 되어야 할 그 어떤 존재가 있어.” 조지 마이클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 자신이 되기로 결정했다.

1998년 마이클은 비버리힐스의 공원에서 잠복경찰과의 “추잡한” 행동으로 체포되었을 때 공식적으로 아웃팅 당했지만, 이 가수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는 1998년 비디오 “Outside”에서 이 사건을 비웃었다. 그가 이성애자가 아니란 사실이 크리스털처럼 투명해지자 조지는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몰랐을까 하는 등의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 진실한 당신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보상은 늘 없다. 그 뒤로 몇 년 동안 그는 마약, 체포, 건강 문제와 같은 보도에 질질 끌려 다녔다.

조지 마이클은 그의 성적기호로 인해 배척되었고 그를 무자비하게 스토킹하는 미디어에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2005년 이 가수는 게이와 이성애자들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미디어에서의 게이는 이성애자를 편안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고 자동적으로 이에 대한 나의 반응은 내가 더럽고 음란한 f****r 이고 당신은 그 사실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은 감당을 못해요.”

분명히 조지 마이클이 없이 샘 스미쓰, Adam Lambert, 또는 오늘날의 다른 많은 공개적으로 퀴어인 아티스트가 있을 수 없다. 샘 스미쓰는 언젠가 마이클에 대해 말한 바 있다. “나는 조지 마이클에 대한 기이하고도 시들지 않는 애정을 가지고 있다. 그는 내가 하는 일을 왜 하고자 했는지에 대한 이유다.”

나는 사람들이 미묘한 차이가 있는 조지 마이클의 유산에 대해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는 단순한 팝스타가 아니었다. 그는 쏘울풀했고 아티스트들이 제조업화된 음악 산업에서 진정한 자아로의 길을 닦는 정체성을 교차했다는 점에서 혁신적이었다.

Cher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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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ergency1984“. Via Wikipedia.

1985년 9월 14일 Kool & The Gang의 “Cherish”가 빌보드 R&B 싱글 차트 1위에 올라 1주간 머물렀다. 또한 1985년 8월 24일에는 어덜트 컨템포러리 차트 1위에 올라 6주간 머물기도 했다. 핫100 차트에는 같은 해 9월 21일 2위까지 올랐다.1 영국 싱글 차트에는 최고 4위까지 올랐다. Ronald Bell, James “J.T.” Taylor, Jim Bonnefond, Claydes Smith, George Brown, Curtis Williams가 함께 쓴 이 곡은 밴드의 아홉 번째 R&B 싱글 차트 1위곡이 되었다. 1979년 James “J.T” Taylor를 리드 싱어로 영입해 라인업을 강화하면서 이 밴드는 최고의 전성기를 거쳐오고 있던 즈음이었다. 이 곡은 당초 색소폰을 담당하며 그룹을 이끌어왔던 Ronald Bell (aka Khalis Bayyan)의 아이디어로 시작한 곡이었다. 이 곡은 그룹의 정식 스튜디오인 뉴저지 소재의 The House Of Music에서 녹음하는 대신 기본 트랙을 콤파스 포인트(Compass Point) 스튜디오에서 녹음하였다. 이 스튜디오는 아이슬랜드 레코드사의 창업자 Chris Blackwell의 소유였다. 나머지 트랙을 작업하면서 Bell은 Taylor에게 가사를 맡겼고, 그는 스튜디오 근처의 바닷가를 산책하며 작업을 마쳤다. 로맨틱한 멜로디의 이 곡의 녹음을 마쳤을 때 모두 이 곡이 히트곡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 1985년 6월 그룹의 27번째 스튜디오 앨범 “Emergency”의 세 번째 싱글로 발매된 이 곡은 팝, R&B, AC 차트를 누비며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 곡은 한동안 결혼식의 단골 축가가 되었다.

뮤직비디오 보기

  1. 당시 1위곡은 Dire Straits의 Money For Nothing이었다.

Thri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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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jacksonthrilleralbum” by Derived from a digital capture (photo/scan) of the album cover (creator of this digital version is irrelevant as the copyright in all equivalent images is still held by the same party). Copyright held by the record company or the artist. Claimed as fair use regardless.. Licensed under Fair use of copyrighted material in the context of Thriller (Michael Jackson album)“>Fair use via Wikipedia.

Michael Jackson은 1979년 솔로 앨범 Off the Wall로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팝, R&B, 락, 포스트디스코, 펑크(funk), 어덜트컨템포러리의 장르가 골고루 배합된 이 앨범은 Stevie Wonder, Paul McCartney, David Forster, Quincy Jones 등이 프로듀서와 작곡가 등으로 가세하여 전 세계적으로 2천만장이 판매된 블록버스터였다. 이 때문에 Michael에게는 새 앨범에 대한 심적 부담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새 앨범 Thriller는 이러한 배경 하에 이전 앨범 발표로부터 3년 만인 1982년 11월 30일 발매되었다.

프로듀서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Quincy Jones가 주로 맡았고 Michael도 일부 곡들에서 프로듀서로 가세했다. 아홉 개의 트랙 중에서 Michael이 네 개의 곡을 썼고 James Ingram, Rod Temperton 등이 작곡진에 가세했다. 녹음은 1982년 4월에서부터 11월까지 LA에 있는 웨스트레이크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졌다. 예산은 약 75만 달러가 소요된 값비싼 앨범이다. 앨범 수록곡 중 “Baby Be Mine“과 “The Lady in My Life”를 제외한 일곱 개의 트랙이 싱글로 발매되어 전곡이 빌보드 핫100 차트 10위 안에 올랐다.

앨범은 현재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란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데 대략 5천1백만 장에서 6천5백만 장 정도 팔린 것으로 추산된다. 1984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이 앨범은 ‘이 해의 앨범’을 포함하여 8개 부문을 수상한다. 이러한 성과는 Michael Jackson이 인종적인 음악 장벽을 뛰어넘는데 큰 역할을 했음을 의미한다. Michael Jackson은 이제 ‘백인이 좋아하는 흑인음악’을 넘어 ‘누구나 좋아하는 팝음악’을 만드는 흑인음악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백악관에 가서 당시 美대통령 로널드 레이건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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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jthriller” by Poolparty. Licensed under Fair use of copyrighted material in the context of Michael Jackson’s Thriller“>Fair use via Wikipedia.

Thriller에서의 군무장면

실제로 Michael Jackson은 대중음악계에서조차 공공연한 인종차별에 힘들어했다고 한다. 그는 전작 Off The Wall이 ‘이 해의 앨범’에 선정되지 못한 것에 화를 냈다고 한다.(아마도 인종차별적 이유로) 결정적으로 Michael은 롤링스톤誌에 자신을 커버스토리로 다룰 의향이 있는지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다. “나는 끊임없이 흑인을 커버로 하는 잡지는 팔리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었다. 기다려. 그 잡지들이 내게 인터뷰를 구걸하는 날이 올 것이다.” 실제로 Michael이 인터뷰를 구걸하는 잡지에게 어떻게 대했는지는 모르겠다.

한편 MTV의 등장과 이 매체의 활용은 Thriller의 성공에 큰 기여를 한다. 1981년 ‘런던에서의 미국인 늑대인간’이라는 공포물을 내놓은 John Ladis는 Thriller의 감독을 맡아 마치 단편 영화를 보는 듯한 서사구조로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큰 인기를 얻었다. “Billie Jean”이나 “Beat It” 역시 현란한 무용과 재미있는 스토리 덕택에 MTV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1 이것은 또 하나의 인종차별에 대한 승리였다. MTV는 공식적으로 인종차별을 부인하였지만 어쨌든 Michael 의 성공이 흑인음악 비디오 방영의 기폭제가 된 것은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도 이 앨범은 최초로 구입한 LP다. Thriller의 전주에서의 발걸음 소리를 스테레오로 들으면서 전율하던 어린 시절의 감정이 지금도 생각난다. 그의 음악이 아니었더라면 아시아의 어린 소년이 흑인가수의 앨범을 살 생각을 했을까? 그의 음악이 아니었더라면 1984년 발표된 더 걸쭉한 흑인음악 풍의 팝음악인 Prince의 Purple Rain이 그런 열광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었을까? 일부 의식 있는(?) 비평가는 Michael Jackson의 이 앨범이 지나치게 “백인적”이라고 비판하지만 당시 백인 위주의 시장에겐 또 하나의 흑인음악이었을 뿐이다.

1. “Wanna Be Startin’ Somethin’
2. “Baby Be Mine”
3. “The Girl Is Mine” (with Paul McCartney)
4. “Thriller”
5. “Beat It
6. “Billie Jean”
7. “Human Nature”
8. “P.Y.T. (Pretty Young Thing)
9. “The Lady in My Life”
L

  1. 특히 “Beat It”에서의 군무(群舞)는 Michael의 죽음 후 기획된 한 프래쉬몹에서의 소재가 되는 등의 깊은 인상을 남겼다.

Holding Back The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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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ply Red – Holding Back the Years” by [1]. Licensed under Fair use of copyrighted material in the context of Holding Back the Years“>Fair use via Wikipedia.

1986년 7월 12일 Simply Red의 “Holding Back The Years”가 빌보드 핫100 차트 1위에 올라 1주간 머물렀다. 같은 날 R&B차트에서는 최고 순위인 29위까지 오른다. Mick Hucknall과 Neil Moss가 쓴 이 곡은 영국 맨체스터 출신의 팝/쏘울 밴드 Simply Red에게는 첫 미국 차트 정상곡이 되었다. 리드싱어 Mick Hucknall는 후에 “Holding Back The Years”가 될 이곡을 열일곱 살 때부터 쓰기 시작했다. 작곡의 계기는 그의 어머니가 그가 세 살 때 가족을 떠났다는 사실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Hucknall은 이 곡을 몇 년 후 The Frantic Elevators의 멤버로 있을 때 밴드 멤버인 Neil Moss와 함께 마무리한다. 밴드는 이 곡을 처음에 1982년 녹음했다. 하지만 큰 인기를 얻진 못한다. The Elevators가 해산하고 나서 Hucknall은 1985년 Simply Red를 결성하고 데뷔 앨범 “Picture Book”에 쓰기 위해 베테랑 프로듀서 Stewart Levine의 도움을 받아 이 곡을 다시 녹음했다. 이 곡은 영국에서 앨범의 세 번째 싱글로 발매됐고 차트 51위에 머물렀다. WEA는 굴하지 않고 1986년 봄 싱글을 재발매했고 차트 2위까지 올랐다. 영국에서 인기를 얻자 Elektra 레코드사는 미국에서 싱글을 발표했다. 1986년 4월 5일 88위로 차트에 데뷔한 “Holding Back The Years”는 14주 후 차트 정상을 차지한다.1 앨범은 미국에서 플래티넘 레코드 인증을 받았고 밴드는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베스트 신인 부문을 포함 두 개의 부문 후보에 올랐다. 2005년 이 곡의 어쿠스틱 버전이 앨범 “Simplified”에 수록되어 발표되었고 째즈 라디오 방송국의 인기를 얻었다.

뮤직비디오

  1. 이 곡과 함께 미국 차트 정상을 차지한 Simply Red의 다른 곡은 리메이크 곡은 “If You Don’t Know Me by Now“다.

One More 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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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Michael” by University of Houston Digital Library – http://digital.lib.uh.edu/u?/p15195coll6,268.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1988년 5월 28일 Wham!에서 독립한 George Michael이 부른 “One More Try”가 빌보드 핫100 차트 1위에 올라 3주간 머물렀다. 또한 어덜트 컨템포러리 차트에도 같은 날 1위에 올라 역시 3주간 머물렀고, R&B 싱글 차트에는 같은 해 6월 18일 1위에 올라 1주간 머물렀다. George Michael이 쓰고 직접 프로듀스한 이 곡은 뮤지션의 솔로 활동 중 네 번째 미국 차트 1위곡이 되었다. 1987년 10월 발매되었던 George의 첫 번째 솔로 앨범 Faith는 계속해서 히트곡을 쏟아내고 있었는데 One More Try도 그 중 하나다.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아 또 다시 새로운 관계를 갖기를 꺼리는 한 남자의 심정을 담은 이 노래는 1988년 4월 11일 앨범의 네 번째 싱글로 발매되었고 4월 16일 40위로 핫100 차트에 등장했다. 그리고 6주 후 정상을 차지한다. 이 노래의 성공 덕택에 Faith는 R&B 앨범 차트에서도 1988년 5월 21일 1위를 차지하여 6주간 머물렀다. 아프리칸 어메리칸이 아니면서 R&B의 앨범과 싱글 차트를 동시에 석권한 것은 사상 최초였다. 이후 2006년 Robin Thicke이 싱글 “Lost Without You”와 앨범 “The Evolution of Robin Thicke”으로 이 대기록을 다시 한 번 세웠을 뿐이다.

뮤직비디오

Watley, Jo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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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affairs93 mini” by AvidMusicInc – Jody Watley.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Jody Watley는 TV쇼 Soul Train – 우리나라에선 AFKN에서 토요일 낮 4시경에 방영하였던 무용위주의 흑인음악 프로그램. 이 프로그램에서 그 유명한 Moon Walk도 첫선을 보였다. – 에서 댄서로 쇼비즈에 첫발을 내딛었다. 1977년에서 1984년까지 그녀는 그룹 Shalamar – 영화 Footloose에 삽입되었던 Dancing in The Sheets로 유명한 그룹 – 에서 싱어로 활동하였다. 그녀의 첫 솔로앨범인 Jody Watley는 1987년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백만장 이상 팔리며 “Looking for a New Love”, “Don’t You Want Me”, “Some Kind of Lover” 등 세곡을 탑텐에 올려놓는 엄청난 흥행성적을 거두었다. 이러한 혁혁한 전과를 바탕으로 그녀는 그해 그래미에서 신인아티스트상을 수상하였다. 그녀의 두번째 앨범 Larger than Life(1989)는 이전 앨범과 같은 성적을 거두진 못했지만 “Real Love” 등 몇몇 싱글이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이후 그녀의 꾸준한 음악활동에도 불구하고 상업적 성공은 흑인차트 바깥을 벗어나기 어려웠고 결국 ’80s의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녀의 매력적인 노래를 듣고 있자면 그녀를 단순히 외모 – 그런데 그녀의 외모는 언뜻 샤데이의 외모와 흡사하다 – 나 춤솜씨로 승부를 건 바비인형으로 폄하할 수 없는 비범함이 담겨져 있음은 분명하다.

디스코그래피
1987 Jody Watley MCA
1989 Larger than Life MCA
1990 You Wanna Dance with Me? MCA
1991 Affairs of the Heart MCA
1993 Intimacy MCA
1995 Affection Avitone
1998 Flower Atlantic
2002 Midnight Lounge MCA
2002 Beginnings Solar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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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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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nce at Coachella 001” by Micahmedia at en.wikipediaOwn work (Original caption: “I created this work entirely by my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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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Prince, O(+>, TAFKAP, The Artist formely known as Prince, The Artist
본명 : Prince Roger Nelson (later Prince Rogers Nelson)
생년월일 + 고향 : June 7, 1958 in Minneapolis, MN, USA

프린스와 섹쓰는 그 자체로 자웅일체처럼 느껴진다. 그의 다인종적인 외모와 퍼플레인 시절의 연보라색의 화사한 의상의 결합은 그야말로 그만의 섹쓰 왕국의 프린스의 모습 그 자체였다. 물론 I would die for you같은 노래에서는 섹쓰가 그리 중요한게 아니라지만 그건 그가 때로는 다른 것도 생각한다는 말이지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일 일은 아니다. Sheila E, Vanity, The Revolutions를 거느렸던 이 왕자는 그의 신하들을 음악계 곳곳에 배치시켜 80년대 흑인음악에 프린스표 음악을 유포하였다. Sheila E의 Glamorous Life나 Chaka Khan의 I Feel For You는 챠트를 뒤흔들며 프린스의 음악이 얼마나 대중에게 흡입력이 있는가를 증명해주었다.

성(性)을 주요 모티브로 했다는 점에서 마돈나와 비교할 수 있는 그는 백인 취향의 건전한 음악을 생산해냈던 마이클잭슨과는 마치 음악계의 마틴루터킹과 말콤엑스같은 지형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80년대 흑인 음악의 무협지를 읽는 듯한 흥미로움을 자아낸다.

Bio from 오이뮤직

” 실험정신과 선정성의 결합, Prince ”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와 흑인들의 전유뮬로 여겨졌던 소울 음악이 어떻게 융합될 수 있는가를 증명해 보인 뛰어난 음악인 프린스. 혹자들로 부터 같은 58년 생인 마이클 잭슨과 함께 흑인 음악의 진정성을 백인들에게 팔아먹은 이단아라 불리기도 하지만 그는 분명히 20세기 말 등장한 가장 뛰어난 아티스트 가운데 한 명이다. 기타, 베이스, 드럼, 키보드 등 다양한 악기에 고루 능한 멀티 뮤지션이기도 하고 그에 앞서 뛰어난 싱어송라이터이다. 시대를 앞선 음악성으로 인해 비난과 외면을 당했으나 ’84년의 [퍼플 레인] 사운드 트랙이 영화의 성공과 별개로 히트를 기록해 그는 새삼 재조명 받기에 이르렀다. 타이틀 트랙 외에 ‘When Doves Cry’, ‘I Would Die 4 U’ 등이 연이어 히트했고 앨범 자체도 천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해 다이아먼드 레코드를 수여 받았다. 실험정신과 선정성으로 대표되는 그의 음악 세게는 사실 그가 미네소타 주의 중산층 출신이라는 치명적인 결점으로 말미암아 태생적 한계를 지닌다. 그는 쾌락과 예술 두가지를 추구하지만 열정과 젊음이 지나친 다작과 방종 그리고 절제의 부족으로 식어 들어가 NPG와의 활동 시작 이후 그의 음악이 지니는 에술적 가치와 대중적 인기가 고루 하강 곡선을 기록했다. [Love Sexy] 앨범을 통해 자신의 누드를 파격적으로 공개하기도 했으나 고향 미네소타 주 몇몇 음반 소매상들은 그의 앨범을 진열하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다. 이 사건이 ’89년 5월 9일의 일이다. 프린스는 [워너]를 통해 ’96년까지 활동했는데 레이블과의 불화로 스스로의 뺨에 노예(slave)라고 새기고 다니기도 했으며 자기 이름을 부정해 스스로를 남성과 여성의 상징을 조합해 만든 이상한 기호 뒤로 은폐해 결국 TAFKAP(The Artist Formerly Known As Prince)라 불리기도 했다. 소속사를 BMG로 옮기면서 [Emancipation(해방)]이라는 타이틀의 3CD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적 이후 발표한 [Rave Un2 The Joy Fantastic]은 비평가들의 혹독한 비난 속에 발매된 지 2년도 안 되어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있다. 그는 요즘 디지털 시대에 힘 입어 인터넷 상에서 신곡을 발표하는 새로운 시도를 선보이고 있다.

디스코그래피
1978 For You
1979 Prince
1980 Dirty Mind
1981 Controversy
1982 1999
1984 Purple Rain
1985 Around The World In A Day
1986 Parade
1987 Sign O’The Times
1988 Lovesexy
1989 Batman
1990 Grafitty Bridge
1991 Diamonds And Pearls
1992 o( + >
1993 Gold Nigga
1993 The Hits / The B-Sides
1994 1-800-New-Funk
1994 Come
1995 Exodus
1995 The Gold Experience
1996 Girl6
1996 Chaos And Disorder
1996 Emancipation
1998 Crystal Ball
1998 The Truth
1998 Kamasutra
1998 New Power Soul
1999 The Vault… Old Friends 4 Sale
1999 Rave Un2The
1999 Crystal Ball [Limited Edition]
2001 The Beautiful Experience [Bellmark]
2001 The Rainbow Children
2002 One Nite Alone…Live!
2004 Musicology
2004 The Chocolate Invasion
2004 The Slaughterhouse
2006 3121
2007 Planet Earth
2009 Lotusflow3r
2009 MPLSound
2010 20Ten
2014 Plectrumelectrum
2014 Art Official Age
2015 HITnRUN Phase One
2015 HITnRUN Phase Two

링크
프리챌 프린스 게시판
드림위즈 Prince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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