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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80년대 팝 이야기 (금지곡)

이 글은 과거 popi.com 시절 JH라는 이름의 사용자가 친히 써주신 칼럼이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드리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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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y-Chapman 1988 by Zoran Veselinovic” by Zoran Veselinovic – http://www.flickr.com/photos/56492970@N07/5590820078/.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상당수의 음반 수집가들이 라이센스반은 절대로 사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저처럼 눈나쁘고 감각 둔한 사람에겐 아무 문제가 없는 ‘자켓의 선명도 차이’라든가….-_-; 또는 (요새는 이 짓 잘 안하던데) 부클릿을 잘라내거나 워터마크 처리한 뒤 그 자리에 해설지를 덧붙이는 엽기적인 편집 기술의 영향도 크겠죠. 가끔씩 예전에 나왔던 앨범을 라이센스로 구입했을 때 이런 경우를 보면 정말 욕이 절로 나옵니다. (누가 해설지 넣어달랬냐고요~ We’re not gonna take it!)
그치만 역시 콜렉터들이 수입반을 고집하는 가장 큰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곡 수의 차이에 있겠죠. 70년대 신중현을 위시한 새로운 대중가요들에 대한 독재정권의 탄압을 시작으로 80년대에 들어서는 가요보다는 오히려 팝송들이 더 심한 구박을 받았습니다. 단순히 편집되는 차원을 넘어서서, 아예 사전 심사를 거친 뒤 한국땅에는 입국 자체가 불허되는(지들이 유승준도 아니고-_-;) 노래들이 참 많았었죠. 뭐, 금지곡 사유야 뻔합니다. ‘약물’, ‘음란’ 등이야 비교적 봐줄만 합니다만 ‘불온’이란 사유는 어찌 해석해야 할는지… 사실 갖다붙이기 나름이죠.
대개 헤비메탈이나 하드록밴드의 경우 음반 자체가 국내에 발도 못 들여놓는 일이 허다했기에 그 곡들까지 일일이 언급하자면 날새야겠죠… 사실 뭐 아는게 있어야지…-.-a 이 자리에서는 어디까지나 ‘팝’송 가운데 금지곡으로 묶여 듣기 힘들었던 곡들 좀 모아봤습니다. (아무라도 좋으니 혹시 백판에 얽힌 추억이 있다면 좀 들어보고 싶군요…)

 

1. Queen – Bohemian Rhapsody (1976년)
▶ 역사상 해외 금지곡 가운데 국내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곡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워낙에 곡이 훌륭하다보니 – 요새 문씨 성의 ‘아티스트’가 운운하는 Rock & Orchestra의 명곡이라고 할 수 있겠죠 – 금지곡임에도 불구하고 물밑거래를 통해 백판으로 수만장이 팔려나갔죠. 덕택에 세운상가 상인들은 재미 좀 봤었다고… 그야말로 언제 들어도 감동이 넘치는, 말 그대로 20세기를 빛낸 명곡 가운데 하나입니다. 혹시 80년대 곡 아니라고 시비 거실 분…?
▷ ‘엄마 전 오늘 사람을 죽였어요’라는 내용을 담은 가사가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금지되긴 했습니다만 제 아무리 철퇴를 내리쳐도 ‘판’은 칼보다 강한 법…

 

2. Prince – Darling Nikki (1984년)
▶ 프린스 최고의 걸작 “Purple Rain”의 수록곡인 이 곡은 가사 때문에 국내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고 미국 내에서도 심각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곡의 영향으로 보수적인 학부모 단체가 대중음악의 도덕성을 어쩌구 저쩌구 시비하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요새도 수입반 중 ‘불온한’ 앨범 표지에서는 ‘까맣고 하얀 딱지(뭐라고 써있더라…)’를 곧잘 찾아볼 수 있죠. 같은 앨범의 “Let’s Go Crazy” 또한 국내에서는 금지곡이었습니다.
▷ 가사 내용은 너무 유명해서 새삼 언급하기도 좀 그렇군요. 호텔 로비에서 눈맞은 여자랑 불장난 어쩌구…

 

3. Sting – Russians (1985년)
▶ 스팅의 1985년 솔로 데뷔앨범 “The Dream Of The Blue Turtles”의 수록곡으로 개인적으로 스팅의 곡 가운데 특히 좋아하는 곡 중 하나랍니다. 웅장하면서도 싸늘하고 약간은 비장미도 느껴지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한때 금지곡이었다고 하더군요… (제가 이 곡을 들었을 때는 이미 해금된 때였음) 이 사실을 안지 얼마 안됐는데 사유는 정말 어이없더군요.
▷ 억울하게도 가사내용은 전혀 안 살피고(이 곡의 가사는 오히려 소련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나요) 오로지 제목 하나 때문에 금지되었다고… 아무래도 시대가 시대니만큼…

 

4. George Michael – I Want Your Sex (1988년)
▶ 애시당초 이런 제목의 곡이 입국 허가받기를 기대하는 게 무리겠지요. 이 곡은 “Faith” 앨범에서 첫 싱글로 커트되었는데 조지 마이클의 솔로데뷔라는 점 못지않게 (아무래도) 제목의 파격성 덕분에도 화제를 모으기가 쉬웠던 것 같습니다. 선정적인 느낌이 강한 곡이다보니 해외에서도 역시 물의를 일으켰는데, 영국에서는 이 곡은 밤 9시 이후에나 방송을 탈 수 있었고, 이후 Faith Tour 당시 일부 지역에서는 콘서트장에서 가사를 ‘I want your love’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조지 마이클은 몇 년 전 공중 화장실에서 ‘딱 걸리기’ 이전에 이미 여러 곡들을 통해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은근히 드러낸 게 아닌가 싶은데요… 우선 이 곡이 그렇고, 또 “Freedom” 역시 그런 메시지가 담긴 듯 싶습니다. 프레디 머큐리 추모공연에 참가했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 해석하기 쉬울 듯 싶어요.

 

5. Tracy Chapman – Talkin’ About A Revolution (1988년)
▶ 수잔 베가와 함께 80년대 후반 퇴조하던 포크 음악을 부흥시킨 일등 공신으로 평가받는 트레이시 채프먼의 데뷔앨범 수록곡입니다. 과도한 보수주의를 내세우던 레이건 정부에 염증을 느꼈던 미국 국민들로부터 의외의 지지를 받아 신선한 충격과 함께 놀라움을 던져준 가수였으나… 역시 국내에서는 가위질을 면치 못했습니다. -_-;
군대가기 전쯤에 그녀의 대표곡인 “Fast Car”를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이 듣고 살았었는데 그래서인지 왠지 그녀의 곡을 듣고 있노라면 구슬픈 목소리 때문이 아니라도 울적해지곤 하더군요.
▷ Revolution이란 단어 하나만으로도(또 문씨 생각나네…거참-_-;) 충분히 꼬투리잡힐 수 있었던 시대에 희생된 곡입니다. 혁명이라니…어디 감히?

 

6. Marvin Gaye – Sexual Healing (1982년)
▶ 인류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나쁜 아버지를 둔 아티스트 마빈 게이의 생애 마지막 히트곡(1982년 싱글차트 3위 기록)입니다. 매끈하면서 관능적이기도 한 그의 보컬을 듣고 있노라면 그냥 온몸이 나른해지죠. 역시나 음탕한(!) 가사 때문에 여러 국가에서 말썽을 빚었던 곡입니다. 제가 평소 늘 사야지 사야지 하면서 안 사고 미뤄두는 앨범들이 있는데 마빈 게이 히트곡집도 그 중 하나… 조지 마이클의 콘서트 애창곡이기도 합니다.
▷ 가사도 가사지만 곡 전체를 감싸는 ‘끈적끈적한’ 분위기도 금지곡 판정에 한몫 했지 싶은데 비슷한 사례로 도나 여름 아줌니의 “Love To Love You Baby”를 들 수 있겠지요.

 

7. Def Leppard – Pour Some Sugar On Me (1987년)
▶ 그야말로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밴드 데프 레파드의 히트곡. 국내에서는 “Love Bites”가 인기를 얻었지만 전 이 곡이 훨씬 좋더군요. 특히 도입부의 하모니… 죽여주지 않습니까? (물론 이 곡을 라이센스 음반으로 접할 수 있었던 것도 불과 몇 년 전의 일…)
▷ 예전엔 이 곡 제목에 시비를 걸어서 금지곡으로 묶었는데 요샌 개그 프로그램에서 이 노래 제목을 갖고 패러디하는 세상… ‘벌써~ 휴가를 왔니~’라던가… 뭐라던가… -.-a

 

8. U2 – Red Hill Mining Town (1987년)
▶ U2의 명반 “The Joshua Tree” 수록곡으로 노동자들의 애환을 다루어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 곡은 싱글 히트곡은 아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With Or Without You”나 “I Still Haven’t….” 같은 히트곡들보다 더 좋아하는 곡이기도 해요. 이 곡의 감동적인 멜로디를 보노의 열창을 통해 듣고 있노라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멍해지는 기분…
▷ 여호수아 나무가 국내에 들어올 때는 4번부터 7번까지의 트랙 총 네 곡이 싸그리 가지치기된 채 만신창이로 라이센스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차라리 발매하질 말지’ 소리가 절로 나오더군요. 사유들도 가지각색입니다. 노동자의 애환을 편들었다는 이유 외에도 종교적 갈등을 편견으로 보았네, 약물중독을 풍자했네, 폭력적 세태를 포커스화 했네 등등… 이거 어디 무서워서 살겠나.

 

9. Johnny Hates Jazz – I Don’t Want To Be A Hero (1987년)
▶ 요 노래 제목을 좀 패러디해보자면 I don’t want to hear “Hero”. (TV에서 우리나라 가수들이 머라이어 캐리 모창할때마다 제가 단골로 하는 소리… 이젠 진짜 지긋지긋합니다. 완전히 90년대 국민팝송 수준…) 영양가 없는 소리는 각설하고… 반짝스타로 끝나버린 ‘조니는 재즈가 싫어’의 곡으로, “Shattered Dreams”만큼은 아니었지만 깔끔한 사운드 때문에 미국에서 그럭저럭 소폭의 히트는 했던 곡이지요.
▷ 근데 도대체 왜 금지곡이었나요? -_-

 

10. Heart – All I Wanna Do Is Make Love To You (1990년)
▶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는 다이안 워렌의 곡이 아닐까 했는데 알고보니 로버트 존 머트 레인지의 곡이더군요. 몇 년전까지 북미지역에서 최고 인기 여가수 자리를 고수했던 슈나이어 트웨인의 서방이기도 한 그는 브라이언 아담스나 셀린 디온처럼 주로 캐나다 출신의 가수들을 대중적 성공으로 이끌며 명성을 얻었는데 요새 뜸하더군요. 아무튼 팝적인 입김이 서린 곡이다 보니 하트의 80년대 히트곡들에 비해 좀 싱거운 감은 없지 않지만, 앤 윌슨의 한층 원숙해지고 여유있어진 보컬(과 함께 외모도 ‘원숙+여유=펑퍼짐’…)이 맘에 들어 제가 참 좋아했던 곡입니다. 금지곡이다 보니 듣기 쉽진 않았지만…
▷ 오늘 비가 엄청 쏟아지네요… 이 좋은 곡을 금지곡으로 만든 가사 내용은 오늘처럼 장대비 내리는 날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남녀가 눈맞는다는 얘기…

 

11. Color Me Bad – I Wanna Sex You Up (1991년)
▶ 컬러 미 배드의 첫 히트곡으로 제목 때문에 역시 눈길 많이 끌었던 곡입니다. 가사 때문에 문제가 불거지자,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부 국가에서는 금지곡 처분을 피하기 위해 (앞의 조지 마이클의 경우처럼) ‘Sex’를 ‘Love’로 바꿔 취입한 버전으로 발매했다고도 합니다.
▷ 제 생각에 ‘Sex’란 단어가 금지곡 리스트에서 풀린 게 1993년쯤이지 싶어요. 당시 발매된 미트 로프의 ‘지옥에서 나온 박쥐 2탄’에 버젓이 이 단어가 등장하는 걸 보면…

 

12. Bobby Brown – Good Enough (1992년)
▶ 일명 ‘Mr. 누룽지(밥이 brown)’가 뉴 에디션에서 솔로 독립한 뒤 한창 잘나가던 시절의 히트곡으로, 이 곡은 가사도 문제가 되었지만 특히나 뮤직비디오에서 보여준 그의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무대 매너 때문에 많은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신혼이었던 휘트니 휴스턴과 불화설이 종종 나돌기도… 두 사람이 결혼한 이듬해에 ‘올해 안에 이혼할 스타 커플’ 1위로 당당하게 꼽힌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말이죠. 그래도 지금까지 좋건 싫건 계속 같이 사는 걸 보면 정이 무섭긴 무서븐 모양입니다.
▷ 이 뽕쟁이 아저씨는 자신의 중독증을 부인에게 전염시킨 것도 모자라 얼마 전엔 휘트니의 이모 디온 워윅까지 마약혐의로 경찰서에 들락거려 아무래도 집안 내력이 아니냐는 눈총도 받는 중입니다…

이쯤 해두지요. 뭐, 70년대 곡 가운데서는 밥 딜런이나 조안 바에즈의 곡들, 또 비틀즈의 곡 가운데서도 상당수의 곡들이 금지곡으로 묶여 듣기 힘들었었죠. 80년대 곡드 가운데서도 언급한 곡들 이외에도 많겠습니다만 그건 여러분들에게 맡겨두고… 문단속 잘하시길 바랍니다. 지금 창문으로 비가 온통 들이치는 통에 문닫으러 가야겠네요… 지금 여긴 일산이랍니다. 에궁…

테마가 있는 80년대 팝 이야기 – 80년대의 여성그룹들

이 글은 과거 popi.com 시절 JH라는 이름의 사용자가 친히 써주신 칼럼이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드리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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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o-Gos – Belinda Carlisle, Kathy Valentine and Gina Schock” by Ron Baker (Kingsnake) from Austin, Texas – The Go-Go’s.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Commons.

’80년대 그룹’이라는 단어만 듣고 여성그룹을 떠올릴 사람은 많지 않을 듯 합니다. 그만치 이 시기에 여성 그룹들의 활약은 그리 크지 않았었는데요, 90년대에 모든 장르에 걸쳐 남성 뮤지션들보다 여성 뮤지션들이 더 돋보이는 활약상을 펼쳤던 것과 대조해보면 80년대의 여성 뮤지션들은 (물론 개중에도 그 나름대로 독특한 음악 세계를 선보였던 가수들도 있으나) 남성들과 비교될 만큼 높은 지지도를 확보하진 못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나마 인기를 얻었던 여성가수들도 상당수가 마돈나를 위시한 미모를 내세운 소모성 댄스가수가 아니면 휘트니 휴스턴으로 대표되는 보수적인 발라드 가수들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더욱이나 여성 그룹으로서 큰 성공을 거둔 사례가 많지 않았었죠. 기껏 인기있던 그룹들을 대봐도 당시 남성 그룹들의 인기에 비하면 새발의 피 수준이고, 그나마 그들의 인기는 싱글 히트곡들로 대변될 뿐 (음악적인 수준이 승패를 좌우한다고 할 수 있는) 앨범 간의 경쟁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남성 뮤지션들처럼 뼈대굵은 음악성을 보여주진 않았지만 그 나름대로 80년대의 물결에서 빼놓으면 안될 좋은 곡들이 많았다는 걸 느끼게 되는군요. 그래서 오늘은 80년대의 여성그룹들을 좀 살펴볼까 합니다. 저만 해도 많은 그룹들을 좋아했던 터라 간만에 듣게 되는 정든 노래들이 많네요…

우선 80년대 무수한 남성 록밴드들의 물결에서 처절하게 애썼던 여성 록그룹들을 만나보자면…

1. Go-Go’s – We Got The Beat (1982)
70년대의 전설적인(이 그룹을 소개할 때는 꼭 이 말이 붙더군요) 여성 록밴드 런어웨이스의 추종자임을 과시하며 등장했던 고고스는 80년대 초반 가장 전도유망한 여성그룹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들이 한창 인기있을 80년대 초 당시의 음악들(Beauty and the Beat, Vacation 앨범의 수록곡들)은 록이라고 부르기 다소 민망할 만큼 가볍긴 하지만, 등장 당시만 해도 록을 시도하는 여성 그룹들이 많지 않던 시기라 주목을 끌었었죠. 런어웨이스처럼 강렬하진 않았으나 멤버들이 직접 연주를 하고 여성의 섬세함을 잘 살린 팝스타일의 록(록스타일의 팝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을 선보이며 선풍적인 인기몰이…
그러나 여성그룹들이 지닌 메리트인 동시에 고질적 한계였던 ‘신선함의 고갈’은 곧 인기하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음악적인 측면에서 팝이나 다름없던 싱글들은 그들을 인기 정상에 올린 동시에 쉽게 끌어내리게 되었죠. 팝/록 밴드로서의 이미지는 70년대 후반 펑크를 들고 등장할 당시보다 약발이 강했으나 그만큼 빨리 떨어졌던 셈… (지금 들어봐도 70년대가 아닌, 80년대 고고스의 음악을 록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곤 합니다.) 이들이 등장 당시 평론가들로부터 좋은 평을 들었던 데는 일단 ‘보기 드문 여성 록밴드’라는 희소성과 (90년대의 뮤지션들과 비교해볼 때 한결 강도가 약하지만) 그들이 표방했던 페미니즘적인 가사들이 한몫했을 듯 합니다.
80년대 중반 해체 된 후 벨린다 칼라일은 솔로로 멋지게 재기했고, 제인 위들린 또한 “Rush Hour”란 다소 닭살돋는 곡으로 잠시나마 인기를 얻었습니다. 몇 년 전에는 고고스 원조 멤버들이 다시 재결합을 시도하기도 했었죠…
“We Got The Beat”은 그들의 가장 큰 히트곡으로 1982년 싱글차트에서 2위까지 진입하며 성공을 거둔 곡이었습니다. (재미있게도 이 곡은 런어웨이스 출신이었던 조안 제트의 “I Love Rock And Roll”에 밀려 5주간 2위에만 머물다 하락했다네요…) 곡 전체에 걸쳐 강렬하다기보단 귀엽고 발랄한 느낌이 강조되어 있는데 언제 들어도 흥겹긴 합니다.

2. Bangles – Hazy Shade Of Winter (1987)
전에도 여러 차례 얘기한 바 있지만 전 뱅글스를 결코 좋아하지 않는데 정확히 말하면 수재너 홉스를 싫어한다는 게 맞는 표현일 듯 합니다. 이들의 음악 스타일은 듣기 싫지 않았지만 수재너 홉스의 분위기 없는 보컬은 정말! 마음에 안 들어서 그들의 곡들을 일부러 안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In your room”처럼 수재너 홉스의 보컬이 많이 등장하는 곡은 정말 노골적으로 싫어했으며 “Eternal Flame”이라는 감미로운 발라드조차 ‘사만사 폭스가 불러도 저거보단 분위기 있겠다’라며 구박을 했었죠.
그러나 제가 좋아하건 싫어하건… 뱅글스는 비록 평가면에서는 고고스와 같은 호평을 받지 못했으나, 인기면에서는 그네들을 훨씬 앞질렀습니다. 수재너 홉스를 프론트걸로 내세우고 런어웨이스 출신의 베이시스트까지 영입하며 체계를 갖춘 뱅글스는 고고스보다 더 팝적인 형태의 록음악을 선보였던 ‘무늬만 록’ 밴드였지만 고고스 해체 후 80년대 중반 몇 안되는 인기 여성그룹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하면서 승승장구…
“Hazy Shade Of Winter”는 사이먼 앤 가펑클의 곡을 리메이크한 버전으로 그들의 곡 중 그나마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곡입니다. 물론 그 이유는 수재너 홉스의 보컬이 별로 등장하지 않기 때문인데, 비록 노래 수준은 그리 훌륭한 편이 못 되나 아가씨들의 고운 화음 덕택에 곡의 분위기가 좀 더 밝아지긴 했습니다. 원곡과 비교했을 때 좀 더 강렬해졌고 뱅글스의 화음이 곡의 멜로디를 맛깔스럽게 잘 포장하고 있습니다. 요즘같이 쌀쌀한 겨울이면 종종 생각나는 곡. (그러고 보니 이 곡도 2위까지 올랐다 떨어졌네요…)

3. Vixen – Edge Of A Broken Heart (1988)
고고스와 뱅글스는 그 희소성면에서 80년대의 대표적인 여성 록커들로 손꼽히긴 하나 지정한 록커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고들 합니다. 비록 윌슨 자매가 이끄는 하트가 활약하긴 했지만 사실 80년대 중반까지 70년대의 런어웨이스에 비견될 만한 거물 록그룹은 등장하지 않았었죠. 이 시점에서 80년대 후반 등장했던 빅센은 고고스나 뱅글스에 비해 그리 큰 인기를 얻진 못했으나 런어웨이스의 충격을 그리워했던 많은 록팬들에겐 깜짝 선물이나 마찬가지! 메탈의 요소를 양념한 듯한 록/팝(쓰는 사람이 록에 대해 무식하므로 이 이상의 구체적인 표현은 불가) 밴드로서 고고스나 뱅글스보다 한층 강렬해진 사운드를 선보이며 잠시나마 고정 팬들을 확보했습니다. 특히 자넷 가드너라는 보컬리스트의 가창력은 하트의 윌슨 자매처럼 대성할 수 있는 재목감이란 극찬을 받기도…
“Edge Of A Broken Heart”는 이들의 히트곡으로 귀에 쏙 들어오는 대중적인 멜로디와 화려한 연주가 어렵잖게 하트의 곡들을 연상시킵니다. 이색적인 사실은 이 곡의 작곡자가 리차드 막스라는 점… 듣다 보면 정말 신나는 곡…^^

4. Klymaxx – I Miss You (1985)
앞의 세 밴드들이 록그룹으로 분류되는 건 아마도 곡 자체보다는 멤버들이 직접 연주를 담당한다는 데 높은 평가를 둔 결과인 듯 싶습니다. 앞의 밴드들과 비교했을 때 절대로! 록이라고 부를 수는 없으나 팝음악을 하면서도 멤버들이 연주를 담당하며 음악적인 토대를 갖추고자 했던 밴드가 있었으니 바로 클라이막스…
6인조로 구성된 클라이막스는 79년 결성되어 80년대 중반 이 곡으로 이름을 알렸던 여성 밴드였습니다. 초창기에는 이들도 록으로 시작했지만 80년대에 들어서자 록적인 요소는 전혀 없이 말 그대로 여성의 섬세한 감수성을 잘 살린 팝발라드로 승부를 걸었죠. 결과는 성공으로 이 곡 “I Miss You”가 싱글차트에서 5위까지, 연말 결산차트에서 3위까지 오르며(이 곡은 히트할 당시의 싱글차트 성적보다 Yearly chart에서의 성적이 더 좋았던 몇 안되는 곡이기도 합니다) 이름을 알렸죠. 이들의 또다른 히트곡 몇 곡이 있지만 모두 이 곡과 비슷한 풍으로 80년대 후반 성인층에서 폭넓은 사랑을 받았던 팝발라드풍의 곡들입니다… 오랜만에 이들의 곡을 들어보는데 사실 멜로디도 단순하고, 이렇다할 독특함은 보이지 않지만 듣기엔 참 좋네요.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비록 80년대 여성그룹 가운데서는 위에 언급한 여성 록밴드들이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흑인 그룹들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네요. 연주가 아닌 보컬에 중점을 둔 그룹들이다 보니 평론가들의 관심면에서 그닥 비중이 크진 않았지만 싱글차트에서는 흑인 여성그룹들도 제법 잘 나갔습니다. 90년대 초반 엔 보그와 TLC를 선봉장으로 밀어닥친 흑인 여성그룹의 붐은 앞세대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겠지요.

5. Pointer Sisters – I’m So Excited (1983)
게이컬처의 대표주자로도 인식되는 댄스 플로어의 스타로 도나 서머와 다이아나 로스가 있었다면 이쪽 동네의 그룹으로서는 단연 포인터 시스터즈를 들 수 있겠죠. 적어도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전반에 걸쳐 이들을 능가할 흑인 여성그룹은 없었습니다. 본래 4인조로 출발했던 포인터 家의 네 자매들은 어린 시절부터 (목사집 딸들답게) 가스펠을 익히며 음악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프로세계에 뛰어들며 디스코와 댄스, R&B 등 끈적하지 않으면서 박력있는 음악들을 혼합해 경쾌한 보컬로 멋지게 불러제꼈죠. 이러한 특징은 이들의 최대 히트곡인 “Jump(For My Love)”에서도 잘 드러나죠…
이들은 80년대 초반 내놓는 곡들마다 R&B 차트에서 빅히트를 거두며 성공가도를 달렸습니다. 이들의 히트곡 “I’m So Excited”는 본래 싱글차트에서 Top 40권에서 하락했다가 새롭게 리믹스된 버전으로 다시 발표되며 Top 10에 진입했던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간간이 들을 수 있는 곡이죠. 빠른 템포에 세 자매(70년대 말 한 명이 솔로 데뷔차 탈퇴)의 박진감 넘치는 보컬에서 남성 못지않은 힘이 느껴집니다. (특히나 메인 보컬리스트의 목소리는 영락없이 인순이 아줌마를 연상하게 하죠.)
그러나 비디오적인 요소나 음악적인 신선함 없이 다소 구태의연하게 기존 히트곡들의 풍을 계속 답습하는 이들의 인기는 80년대 중반 백인들의 팝음악 붐 속에서 서서히 사그라들어 요새는 활동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군요. 노래 참 잘하는 그룹인데… (이들을 보면 노래하는 재주도 타고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들이 한참 잘 나갈 때 탈퇴한 멤버가 재가입을 원했으나 다른 자매들이 저 혼자 먹고 살겠다고 배신때린 주제에 낯짝도 두껍다며 거절했다는 소문…)

6. Sister Sledge – Frankie (1985)
포인터 시스터즈에 관해 얘기하면 으레 라이벌처럼 비교되는 시스터 슬레지… 포인터 시스터즈보다 먼저 데뷔했지만 그만치 빨리 잊혀졌던 시스터 슬레지 또한 70년대 말 디스코의 불꽃 속에서 큰 인기를 얻었던 보컬그룹입니다. (흑인 여성 4인조) 포인터 시스터즈가 흑인 그룹이면서도 R&B에 댄스를 첨가한 형태의 곡들로 메인스트림 팝 차트에서도 성공을 거둔 그룹이었다면 시스터 슬레지는 그들보다 훨씬 더 흑인적인 음악을 선보였던 그룹이었죠. 휘트니 휴스턴이 불러 히트시킨 “All The Man That I Need”의 원곡을 부른 것으로도 알려졌다시피 끈적한 R&B 발라드에도 능했고 70년대 말에는 도나 서머 못지않은 순수 디스코의 추종자로 평가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들을 떠올리면 80년대보다는 역시 70년대 그룹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80년대에도 이들이 두손 놓고 놀고 있었던 건 아니구요, 80년대 이들의 가장 큰 히트곡인 이 곡 “Frankie”와 같은 가벼운 R&B 곡으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 곡은 1985년 영국 싱글차트에서 4주간 1위 기록.) 보컬면에서 포인터 시스터즈처럼 강렬함이 없는 대신 흑인들 특유의 유연함이 잘 느껴지는 보컬이라 이런 스타일의 곡이 잘 어울리는 듯…. 상큼한 화음과 색소폰 연주가 흥겨움을 배가시키네요. 경쾌하고 리듬감이 잘 살아있는 곡을 좋아하시는 분들게 추천!

7. Mary Jane Girls – In My House (1985)
앞의 두 그룹만큼 흑인음악을 충실히 계승했다고는 볼 수 없으나 R&B 댄스풍의 곡들과 섹시한 컨셉을 주무기로 80년대 중반 잠시 반짝했던 그룹 메리 제인 걸스. “In My House”라는 Top 10 히트곡으로 반짝 인기를 얻은 후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져간 그녀들은 탄탄한 보컬 실력이 뒷받침된 그룹과 그렇지 못한 그룹의 수명차를 가장 현격히 보여줬던 사례가 되어버렸습니다. 후에 테리 루이스와 작업을 시도했으나 수포로 돌아간 뒤 흐지부지…
그러나 다소 유치뽕한 전자음향이 판을 치는 이 곡은 지금 들어도 신나네요…^^ 멜로디가 귀에 쏙쏙 들어오는 상큼함이라니…

8. Salt-N-Peppa – Push It (1986)
흑인 여성그룹이라고 해서 앞에서 언급한 보컬그룹들만 있었던 건 아니었죠. 특히 솔트 앤 페파는 80년대 흑인음악계에서 당시 유일한 여성 랩그룹이었다는 것만으로도 높이 평가되곤 합니다. 더구나 이들이 했던 돌출 발언들과 가사, 그리고 다소 공격적인 형태의 곡들을 듣다보면 분명 여타의 80년대 여성그룹들과는 (곡 분위기뿐 아니라 풍기는 이미지가)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곡의 가사는 선정성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기 보다는 은연중에 성적인 이미지를 노출하고 있는 듯 합니다. 남성가수가 여성의 백치미를 찬양하는 곡들은 셀 수 없이 많지만 여성이 남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삼고 약간은 노리개(?)로 취급하는 듯한 이런 가사는 보기 드물죠. 이런 내용은 분명 페미니즘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비난받기도 하겠지만 음악계에서의 여성의 권익 신장에는 한몫 담당했을 듯 합니다. 아울러 “Let’s Talk About Sex” 같은 직설적인 음악들은 90년대 엔 보그, TLC, 데스티니스 차일드로 계승되며 흑인 여성 뮤지션들의 인기가도를 뒤받침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죠. 음악의 좋고 나쁨에 관계없이 그 존재가치만으로도 높이 평가되는 그룹인 듯 합니다.

적어도 평론가들이 좋아하는 백인 여성그룹은 록(+팝) 그룹, 흑인 여성그룹은 역시 R&B 보컬 그룹으로 대변되지만 아무래도 역시 ‘여성=미모’라는 공식을 믿는 대중들이 많지요. 어느 시기 어느 곳에나…
사실 위에서 언급했던 그룹들이 제 아무리 높은 평가를 받더라도 사실상 가장 보편적인 여성그룹의 형태는 댄스와 미모를 주무기로 삼는 그룹인 듯 합니다. (다시 말해 솔트 앤 페파가 가장 싫어하는 그룹이겠죠.) 유행에 가장 민감하면서 동시에 어느 때에나 이런 가수들이 등장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리 좋게 볼 순 없겠지만 한편으로는 분명 매력적인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룹이건 솔로건 이런 여가수들은 ‘욕하면서도 듣는다’는 게 전략이겠죠.

9. Nolans – Sexy Music (1980)
80년대 또 하나의 자매그룹인 놀란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히트쳤던 아라베스크의 “Hello Mr. Monkey”나 둘리스의 “Wanted” 등과 함께 ‘국내용 팝송’으로 사랑받았던 “Sexy Music”… 영락없는 닭장 스타의 전형이었다고 하죠. 놀란스는 영국 출신의 그룹이었지만 일본 동경 가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으며 알려져 이후 국내에서 더 큰 사랑을 받았었죠. 1982년 내한공연을 갖기도…
남자들이 가장 선호한다는 금발미녀(그리 미녀라고 생각되진 않으나) 네 명이서 빨강, 파랑 등 원색의 파자마같은 옷 입고 한줄로 서서 단순한 율동(?)을 선보이며 노래하던 뮤직비디오가 지금도 기억납니다. ^^ 섹쒸 섹쒸 뮤직~ 온 더월~~

10. Bananarama – I Heard A Rumor (1987)
놀란스가 국내에서 유독 사랑을 받으며 선전하긴 했지만 역시 80년대 최고의 댄스트리오는 바나나라마일 것 같습니다. 80년대 초 결성된 영국출신의 이 트리오는 몇 년 뒤 무수히 쏟아진 여성 그룹들의 물결에도 끄떡없이 전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몰이… 80년대 메인스트림 댄스 차트를 주름잡던 Stock, Aitken & Waterman 트리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수많은 히트곡을 쏟아내었는데 특히 본국인 영국에선 거의 절대적인 인기를 얻어 1982년 결성된 이후 10년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영국 싱글차트 히트곡을 냈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당시 우후죽순 격으로 등장했던 많은 여성 댄스그룹들 가운데서도 유독 바나나라마가 오랜 기간에 걸쳐 높은 지지를 받았던 이유를 추정해보면 아마도 ‘할 거면 확실하게 하자’ 작전이 성공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여성 댄스그룹의 매력포인트인 신선한, 발랄한, 경쾌한 이미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그리고 가장 대놓고 드러낸 경우였죠. 신디사이저 반주와 전자음향을 통해 다른 어떤 그룹들보다도 가장 경쾌한 댄스음악을 선보였고(이들의 곡 중 “Cruel Summer” 같은 곡은 그냥 유로댄스라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세 아가씨의 상큼한 목소리와 쉽고 가벼운 멜로디는 분명 가장 신선하고 발랄한 느낌을 주었겠죠. 미모야 두말하면 입아프고… 비록 그 덕택에 처음 들으면 신선해도 몇 번 들으면 순식간에 질려버리는 노래들이라는 악평과 함께 차트에서도 ‘fast come fast go’했지만, 몇 달만 지나면 새로운 싱글이 나와서 또 인기를 얻는, 상당히 치밀한 상업적 전략의 승리였죠. 특히나 SAW 트리오가 밀어줬던 릭 애슬리나 카일리 미노그 등이 인기있던 유럽 지역에서는 이들 또한 좋은 반응을 얻는 게 당연지사…
사실 어차피 음악이란 즐거우라고 듣는 것이니 굳이 이렇게 분석하고 어쩌고 할 것 없더라도 이들의 음악은 매력적입니다. 비디오 시대를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했다는 점도 매력이었구요… (시오팬 파이는 제가 본 가장 예쁜 여가수 중 하나랍니다. ^^) 이 곡 “I Heard A Rumor”도 그런 곡입니다. 코러스의 단순한 멜로디, 곡 전체에 넘쳐 흐르는 무사태평의 발랄한 분위기… 듣다 보면 언제나 즐거워집니다.

11. Expose – Come Go With Me (1986)
미녀 삼총사로 구성된 댄스그룹이라는 점에서 바나나라마와 함께 비교되는 또다른 그룹이 엑스포제… 바나나라마에게 유럽팬들과 보았다 트리오가 있었다면 엑스포제에게는 미국팬들과 루이스 마티니가 있었습니다. 바나나라마는 80년대 내내 유지되었던 그 폭발적인 인기에 비해 미국 차트에서는 그리 많은 싱글을 히트시키진 못했는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엑스포제는 전세계적으로 그리 높은 인지도를 얻진 못했으나 미국에서만큼은 80년대 후반 어떤 여성그룹보다도 인기가 높았습니다. (물론 홈 그라운드의 이점이 가장 크게 작용했겠죠. 마이애미 출신이니…)
루이스 마티니의 산하에서 결성된 세 명의 클럽스타는 바나나라마보다 좀 더 미국적인 음악, 즉 덜 멜로디컬한 대신 전체적인 곡 분위기에 좀 더 중점을 둔 음악을 선보였는데 특히 이들의 최대 히트작인 데뷔앨범에 그런 곡들이 많이 들어있죠. 라틴팝 분위기가 마이애미 사운드 머신의 곡을 연상케하는 “Let Me Be The One”이나 약간은 동양적인 블루스풍의 “Seasons Change” 등은 수작…
“Come Go With Me”는 댄스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던 그들의 데뷔싱글로 엑스포제의 매력을 잘 살린 곡이라고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 엑스포제의 곡을 들으면 멜로디보다는 리듬감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는데 특히 이  곡 “Come Go With Me”는 다양한 악기들의 반주가 맛있게 잘 버무려진 곡이죠. 전자음향도 마구 남발하는 것이 아닌, 정갈하게 잘 정돈된 느낌이 상당히 깔끔한데 이 점은 분명 바나나라마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되네요. 자넷 주라도의 청량하면서도 힘있는 보컬도 훌륭합니다. 엑스포제는 데뷔앨범 이후 “When I Looked At Him”이나 다이안 워렌이 만들어준 “I’ll Never Get Over You” 등의 발라드로 또다른 면모를 선보였으나 개인적으로는 데뷔앨범에서의 댄스 히트곡들이 가장 마음에 들더군요…

12. Sweet Sensation – If Wishes Came True (1990)
엑스포제의 성공 이후 등장한 또 하나의 여성그룹 스위트 센세이션. 유사품이 으레 그러하듯 기대만큼 센세이션을 일으키진 못했으나 이 곡 “If Wishes Came True”로 빌보드 싱글차트 정상에 오르며 인기몰이… 개인적으로 그룹 자체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이쪽동네의 여성그룹 중 가장 쳐지는 미모의 소유자들이라는 게 이유같지 않은 이유) 이 곡은 제법 좋아하고 있습니다. 멜로디는 단순해도 아가씨들의 화음이 듣기 좋아서요…
(참고로 70년대 말에도 스위트 센세이션이란 그룹이 활동했답니다…. 이 그룹은 흑인 남성그룹이더군요. -_-)

13. Cover Girls – Because Of You (1987)
카자나 윈맥스에서 MP3 파일을 검색하다보면 이 동네 그룹들의 곡은 주인이 바뀐 채 돌아 다니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알게 됩니다. “Expose-Wishing On A Star” 뭐 이런식으로 말이지요. 그만치 개성이 없이 빨리 잊혀진다는 말이 될 수 있겠는데 “Wishing On A Star”의 주인공인 진짜 커버 걸스도 음악인들이 아닌 잡지 커버 모델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벌써 돈냄새가 풀풀 납니다.
어쨌거나 그들도 등장 당시엔 한 인기 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예전에 팝아이에서 여성그룹 인기투표할 때 커버 걸스가 1위를 차지하는 걸 보고는 의외였던 기억이 나네요.) 특히 본국보다는 일본 열도에서 인기가 높아 “Show Me”라는 그들의 데뷔곡은 일본 팝차트에서 수주간 1위에 오르기도 했다는군요. 이들의 곡은 바나나라마의 멜로디컬함과 엑스포제의 리듬감을 짬뽕한 느낌의 곡들인데 “Show Me”가 바나나라마에 가깝다면 이 곡 “Because Of You”는 엑스포제에 가깝다고 생각되네요. 라틴 팝 분위기도 나는 댄스곡…
사실 원곡 자체보다는 여기저기 수도 없이 샘플링된 ‘워 우 워우워~’ 하는 부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샘플링의 대표주자였던 신철은 프로듀서로 활동중인 것 같던데 미애는 요새 모하나..

14. Seduction – Two To Make It Right (1990)
여성 댄스그룹들을 내세운, 정확히 말해 보기에만 잘생기고 예쁜 애들을 내세워 한몫 잡으려는 상업적인 전략이 극에 달했을 때 등장했던 립싱크 그룹들…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밀리 바닐리를 비롯해, 블랙 박스의 여자 보컬리스트(원주인은 마사 워시던가 로레타 홀웨이던가 이 덩치큰 여자분들은 맨날 헷갈린다는) 그리고 이 곡의 주인공인 시덕션… (이 곡 MP3 찾기 생각보다 쉽지 않더군요)
전 당시 이 그룹들을 하나같이 다 좋아했는데요, 특히 시덕션의 이 곡은 발랄한 분위기와 멜로디 때문에 심심찮게 따라부르곤 했던 곡이었습니다. 립싱크 그룹이었다는 걸 알았을 때는 당삼빠떼루 배신감이 들었지만 어차피 오fot 동안 잊고 있다가 최근에 알게 된 지라 그냥 그렇더군요. 우리 나라에는 걸프렌드라는 애들이 있었죠…

이쯤에서 끝내겠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많네요… 여성 그룹들의 전성시대는 역시 90년대였다는 생각이 드는데 엔보그, 윌슨 필립스, SWV, TLC, 스파이스 걸스, 올 세인츠, 데스티니스 차일드 등등이 길고 짧게 한가닥 했었죠. 여자건 남자건 그룹이건 솔로건 뭐니뭐니해도 실력이 최고인 듯 합니다.
그러나 베이비복스는 정말 질기네요…

테마가 있는 80년대 팝 이야기 (프린스 작품선)

이 글은 과거 popi.com 시절 JH라는 이름의 사용자가 친히 써주신 컬럼이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드리는 바이다.

오늘 프린스의 CD 3장짜리 히트곡집을 큰맘먹고 구입하려고 했더니 역시나… 동네 레코드점엔 프린스의 앨범이 한 장도 없더라구요. 제법 큰 레코드점이었는데도… 나온지 좀 지난 탓도 있겠지만 아마도 프린스가 우리 나라에서 그다지 지명도 높은 가수가 아니라는 점도 오프라인상에선 프린스 앨범을 찾아보기 힘든 현실에 한몫 한 듯 싶습니다. 역시 우송료 무료인(가격이 가격이다보니…) 인터넷 주문이 최고군요.

프린스의 이름을 처음 접한 때가 ’84년쯤이지 싶은데 당시 제가 막 팝에 관심을 갖던 시기라 그 시기에 잘나가던 가수들은 유난히 기억이 생생해요. 그 시기에 대형 히트 앨범들이 참 많이 나왔는데 그 가운데서도 프린스의 보라색 비 열풍은 독보적이었습니다. 앨범 차트 24주간 1위, 5개의 Top 40 히트곡 및 “Darling Nikki”로 인한 파문 등등…

지금 와서 프린스라는 가수를 돌이켜보면… 그는 확실히 개성이 넘치는 가수이긴 하지만, 그 개성이 지나치다보니 어떨 땐 ‘프린스’하면 무조건 독특한 음악 내지는 묘한 음악만 기대하게 되더군요. 음악적 개성이 워낙 강하게 인식되다보니 오히려 무난한 음악을 시도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구요. 편견을 깨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다 보니 어느새 또 하나의 편견을 낳은 셈…

프린스가 미네아폴리스 사단을 시작으로 Revolution이니 New Power Generation과 같은 많은 타 가수들에게 곡을 써주고 적극적으로 프로듀싱을 한 것도 어쩌면 그런 편견을 깨기 위한 시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미 굳어진 자신의 이미지를 깰 수 있는 신선한 목소리를 발굴하는 과정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종종 신선한 연인을 향한 ‘작업’으로 연결되곤 했습니다…)

그럼 왕자님의 발자국 좀 추적해보죠… 다들 훤하실 테지만… (전 ‘왕자’란 이름이 예명이 아닌 본명이란 걸 오늘에서야 인터넷 검색하다 알았답니다…-.-)

Chaka Khan.jpg
Chaka Khan” by Original uploader was Dwightmccann at en.wikipedia – Originally from en.wikipedia; description page is/was here.. Licensed under CC BY-SA 2.5 via Wikimedia Commons.

1. Chaka Khan – I Feel For You
(From The Album I FEEL FOR YOU, 1984)
▶ 노장 R&B 여가수 샤카 칸의 최대 히트곡으로 1984년 동명앨범 수록곡입니다. 빌보드 싱글차트에서 최고순위는 3위에 그쳤지만 그 해 연말결산 차트에서 유수한 1위곡들을 제치고 Top 10에 랭크될 정도로 꾸준히 차트에서 인기를 얻었던 곡. 도입부의 샤카샤카 차카차카 어쩌구 하는 부분은 장난스럽기도…^^
▷ For를 4로 표기하지 않은 건 좀 의외…

2. Sheena Easton – Sugar Walls
(From The Album A PRIVATE HEAVEN, 1984)
▶ 시나 이스턴은 프린스의 수많은 연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약발이 오래갔죠. 이 곡을 시작으로 이후 발표하는 앨범마다 프린스와 조우하며 “U Got The Look”, “The Arms Of Orion” 등의 듀엣곡을 낳기도… 앨범에는 이 곡의 작곡자가 Alexander Nevermind라는 요상한 이름으로 되어있는데 이건 프린스의 일회용 이름이랍니다. 프린스 특유의 느끼한 창법이 시나 이스턴에게도 생각보다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했던 곡… 1984년 싱글차트 9위 기록.
▷ “Sugar Walls”의 숨은 의미는 다들 아실 듯… 후반부의 ‘Come insi~de~’하는 부분을 듣고 있노라면 심의 통과한 게 용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3. The Bangles – Manic Monday
(From The Album DIFFERENT LIGHT, 1986)
▶ 이 곡의 작곡가 역시 발표 당시엔 Christopher라고만 알려졌는데 나중에 그게 Prince임이 밝혀졌죠. 역시나 미녀에 약한 프린스는 뱅글스의 보컬리스트 수재너 홉스와 염문을 뿌리기도 했습니다. (뱅글스를 몹시 싫어하던 중학생은 이렇게 말했지요 – 어디가 이쁘다고…)
▷ 지금도 월요일날 기분이 찌뿌둥할 때면 생각나서 흥얼대곤 하는 곡이에요. ‘I wish it was~ sunday~ 흑흑흑…’ 내일 아침 일찍 서울 올라가야 하는데 눈꼽 떼고 운전하면서 이 노래나 불러야 하겠네요.

4. Vanity 6 – Nasty Girls
(From The Album VANITY 6, 1982)
▶ 이 이름이 낯선 분들이 계실지도… 저는 최근에야 알게 된 곡입니다. 프린스가 야심차게 선보인 최초의 프로젝트 그룹으로 별 히트는 못했지만 미네아폴리스 사단 최초의 그룹이라는 데 의의가 있을 듯 합니다. 이 곡은 펑키한 리듬의 다소 단조로운 댄스곡입니다. 보컬들이 어쩐지 숨차게 들리네요…^^
▷ 이 독특한 그룹명은 이 3인조 여성그룹의 리더 Vanity의 이름을 딴 듯 합니다. 사진을 봤는데 뭐랄까… 뇌쇄적으로 생겼더군요. 마돈나와 비슷하다는 느낌도… 아마도 프린스의 여성편력은 이 때부터 시작된 것 같습니다…^^

5. Martika – Love… Thy Will Be Done
(From The Album MARTIKA’S KITCHEN, 1990)
▶ 마티카가 “Toy Soldiers”의 성공 이후 발표했던 또 하나의 발라드곡으로 잔잔하면서도 야릇한 분위기가 역시 프린스다운 곡입니다. 마티카의 보컬 또한 차분하면서도 감정이 잘 살아 있구요… 이 곡 참 좋아했었는데 이 앨범이 생각만큼 히트를 못해 아쉬워했던 기억도 납니다. 나중에 인터넷을 통해 마티카의 2집 앨범 수록곡을 몇 곡 구해서 들어볼 수 있었는데 생각 외로 괜찮은 곡들이 많더라구요. 타이틀곡 “Martika’s Kitchen”도 추천곡.
▷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까지 우후죽순격으로 등장한 여성 댄스 가수들은 단 한 명도 오래가지 못했는데 마티카도 그 중 하나. 제 생각에 미모를 내세운 여가수들의 주무기는 ‘신선함’인데 아무래도 2집을 낼 때면 노래가 좋든 안 좋든 그런 매력이 떨어지는 건 사실인 듯… 어느 분야든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한다는 건 절대진리죠. 얼마 전 팝아이 뉴스란을 보니 듀오를 결성해서 재기를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고 하지만… 글쎄요.

6. Sheila E. – The Glamorous Life
(From The Album THE GLAMOROUS LIFE, 1985)
▶ 쉴라 이는 프린스 사단의 가수들 가운데서도 특히 실력있는 가수로 인정받았는데 생각만큼 지속적인 인기를 얻진 못했습니다. 뛰어난 드러머이자 퍼커션 연주자이기도 한데요, 이 곡 역시 들어보면 단번에 프린스의 곡임을 알 수 있는 특유의 리듬감이 넘쳐나는 곡입니다.
▷ 글래머한 인생이라… 제목이 심상치 않네요. 혹시 이 곡도 금지곡?

7. Cyndi Lauper – When You Were Mine
(From The Album SHE’S SO UNUSUAL, 1983)
▶ 이 곡은 프린스가 정식으로 사사한 곡은 아니고 프린스가 먼저 발표했던 곡을 신디 로퍼가 리메이크한 곡입니다. 원곡에 등장하는 프린스의 독특한 가성창법을 신디 로퍼도 멋지게 소화하고 있습니다. ^^ 빵빵한 사운드 덕분에 원곡보다 훨씬 신나는 리메이크곡이 되었네요.
▷ 프린스의 곡들은 하나같이 특이해서 그의 수많은 히트곡들 가운데서도 쉽사리 리메이크할 만한 곡이 없는 게 사실이긴 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또다른 프린스 리메이크곡은 LeAnn Rimes가 부른 “Purple Rain”… 컨트리 가수가 부르는 프린스라니 좀 웃기죠? 근데 생각보다 들을 만 해요.

8. Sinead O’Connor – Nothing Compares 2 U
(From The Album I DO NOT WANT WHAT I HAVEN’T GOT, 1989)
▶ 시네이드 오코너의 생애 최대 히트곡으로 1990년 4주간 빌보드 싱글차트 정상을 사수한 곡입니다. 본래는 프린스 사단의 프로젝트 그룹 The Family가 먼저 발표한 곡이었는데 그닥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시네이드 오코너가 리메이크하여 대형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시네이드의 구슬픈 목소리가 정제된 듯 하면서도 은근히 사람 우울하게 만드는 노래… 뮤직비디오에서처럼 흐린 날씨의 가을날에 조용한 길가를 걸으며 듣고 싶은 곡입니다. (꼴에 센치한 척은…-.-)
▷ 이 곡에 얽힌 시네이드와 프린스의 에피소드는 하도 유명해서 다들 아실 듯 합니다. 자신의 최대 히트곡을 두고 ‘가장 부르기 싫은 노래’라고 밝힌 그녀의 심정이 어땠을지 생각하며 이 곡을 들으면 더 착잡해지죠… 아무튼 이런 경험도 한몫하긴 했겠지만 시네이드는 이 곡 이후 그녀 특유의 냉소적인 발언과 과감한(?) 행동들로 하는 말이며 행동 하나하나마다 화제를 모으고 다녔습니다. (그녀의 언행들 역시 하도 유명해서 생략) 몇 년 전에 그녀의 새 앨범 리뷰를 보았을 때 머리를 기른 모습과 ‘앞으로는 정치적인 발언도 자제하고 음악에만 전념하겠다’는 인터뷰가 인상적이었는데 또 얼마전엔 난데없이 전격 은퇴한다고 해서 다시 화제를 모으기도…-_- 역시 음악계의 ‘양치기 소녀’답습니다.

9. Tevin Campbell – The Halls Of Desire
(From The Album T.E.V.I.N., 19)
▶ 프린스 사단 가운데서는 찾아보기 힘든 남성 가수네요… ^^ 테빈 캠벨이 13살의 나이로 처음 데뷔할 당시에 그의 나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네요. 나이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노래 솜씨가 원숙했던 탓… 그의 데뷔앨범에는 Babyface 사단과 프린스 사단이 대거 출동하여 서로 경쟁이나 하듯이 좋은 곡들을 많이 써주었는데 프린스가 워낙 한 개성 하는 인물이다 보니 그의 곡들은 얼핏 듣기만 해도 Babyface의 곡들과는 구별이 됩니다. 일부 곡들에서는 프린스의 느끼한 창법을 테빈 캠벨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기도…
▷ 테빈 캠벨은 데뷔 당시 역시 비슷한 나이 또래였던 Tracie Spencer와 함께 차세대 흑인 남녀가수로 주목받았는데 두 사람 다 빨리 주목받은 만큼 빨리 식어버린 듯 합니다. 아직 둘 다 서른도 안된 나이인데 재기했으면 하는 바람…

10. Madonna – Love Song
(From The Album LIKE A PRAYER, 1989)
▶ 마돈나의 앨범들 가운데 특히 예술성이 높은 앨범으로 꼽히고 있는 4집 앨범의 수록곡으로 프린스가 작곡과 백그라운드 보컬로 참여하고 있는 곡입니다. 역시나 프린스 특유의 ‘어딘지 어벙벙하고 묘한’ 느낌이 살아있는 곡이긴 합니다만… 어쩐지 이 곡을 듣고 있노라면 두 사람이 노래만 같이 했을 뿐, 완전히 따로 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I Feel For You”와 비교해 볼 때 리듬감도 약하고, “Sugar Walls”에서의 독특한 선정성도 느껴지지 않는군요. 그렇다고 “Manic Monday”처럼 멜로디컬한 것도 아니고… 느낌이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에겐 좀 실망스러웠던 곡입니다. 아무튼 Love Song이라는 제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군요. (가사에서도 This is not a Love So..Ong~ ^0^)
▷싱글로는 발매되지 않았지만 스캔들에 있어서 둘째가면 서러워할 두 톱스타가 뭉쳤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화제가 되었던 곡.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다는 뉴스가 나오기가 무섭게 당시 팝계가 떠들석해졌는데 의외로 그들은 사고(?) 날 틈도 없이 달랑 이 노래 한 곡만 함께 작업하고 말아 기사거리에 굶주린 언론들에게 아쉬움(?)을 주기도 했다나 어쨌다나 머다나…

11. Celine Dion – With This Tear
(From The Album CELINE DION, 1991)
▶ 프린스와 셀린 디온의 만남! 어쩐지 밸런스가 안 맞지 않습니까…ㅋㅋㅋ 이 곡은 셀린 디온이 막 미국 시장에서 이름을 알리던 시기에 발표된 곡으로 Mariah Carey의 성공에 고무된 Sony가 제 2의 디바형 가수를 육성하고자 그녀에게 집중적으로 투자한 결과물입니다. 시종일관 아련한 분위기 가운데 곡이 진행되다가 후반부 코러스에서부터 셀린 디온의 열창이 마치 폭풍처럼 이어집니다. 스케일도 큰데다가 그녀의 화려한 가창력도 곡의 호소력을 살리는 데 한몫하고 있습니다. 프린스의 숨어있는 명곡…
▷ 프린스의 곡답게 역시 2, 4, thee 등의 단어가 부지기수로 등장… 다시님께 추천해드리고 싶은 곡…^^

12. Prince – Dark
(From The Album COME, 1994)
▶ 끝으로 오늘의 주인공 ‘왕자’의 그닥 알려지지 않은 곡 하나 추천해볼께요. 프린스가 ‘자기는 노예’네 ‘이름 없이 기호로 불러달라’네 어쩌네 하면서 화제를 모으던 90년대 중반에 Warner Bros.와의 관계를 청산하며 발표했던 앨범의 수록곡으로 느릿하고 호젓한 분위기가 묘한 곡… 오늘 프린스 CD값도 비교해볼 겸 그에 대해 이것저것 찾아보다 발견한 곡인데 제법 괜찮네요. 역시나 프린스다운 ‘묘한’ 곡인데 특이한 점이 있다면 반주를 가급적 절제하고 보컬의 흐름과 관악기를 강조한 점…
▷ 프린스는 MP3 공유에 찬성하는 가수라고 들은 바 있는데 지금도 그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그의 새 앨범이 발매되었는데도 별 소식도 없이 지나갔고 한 번 들어보고 싶어서 검색을 했더니 인터넷상에서 신작 MP3 파일 구하기도 힘들고… 프린스가 정말 인기가 식긴 식었나 봅니다. 가정에 충실하고 있다는 말도 들은 바 있는데… 날이 갈수록 개성 강한 가수를 찾아보기 힘든 지금, 20년 전 음악계를 뒤흔들었던 보라색 비의 반란을 다시 기대하는 건 무리일지…

오늘은 글이 좀 두서가 없죠? 집안 분위기가 “Nothing Compares 2 U” 뺨치게 음산하걸랑요. 이런저런 문제 때문에 온 집안 식구들이 다 냉전중인데 저 혼자 신나서 음악 듣고 있습니다. 비는 왜 이리 척척 오는지… 외롭당…

땡땡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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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me from Breaking Free” by Scanned from a copy of the book.. Licensed under Wikipedia.

이승환 동무가 요즘 직장을 구해서 마음의 여유가 생겼는지 야한 글은 안 올리고 뜬금없이 ‘좌빨 블로거가 추천하는 도서’라는 블로그의 격에 어울리지 않는 글을 올려놓으면서, 나를 좌빨 블로거라고 딱지를 붙인 후 책을 추천하라고 을러댄다. 이전에도 이미 한번 소위 양서(良書)를 추천한바 있는데 사실 별로 내키지는 않는다. 나 같은 것이 책을 읽어봐야 세상 책의 1조분의 1도 안 읽었을 텐데 불특정다수에게 “니네 이 책 알아?”라고 하는 것 같아 영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뭐 이승환 동무가 오랜 방황 끝에 취직도 한 것 같고 이제 자본주의의 마름으로 충실히 살아간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그에 대한 작은 선물로 그의 부탁 – 강권 -을 들어주기로 했다.

내가 추천하는 도서는 꿈과 모험이 가득한 만화 ‘땡땡의 모험(영어 제목 : The Adventures of Tintin, 불어 제목 : Les Aventures de Tintin)’이다. 실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를 꼽으라면 이 만화 이외에 다른 만화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의 독서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만화다. 정확히 언제부터 이 만화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뚜렷치 않다. 아마도 초등학교 시절 유행하던 이른바 소년잡지에 단편적으로 소개되던 에피소드에서부터 땡땡을 처음 만난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 국내에 출간된 하드커버도 구입하고 외국 사이트에서 영어판도 구입하면서 조금씩 컬렉션을 늘려갔고 총 24개에 달하는 에피소드 중 거의 전부를 구비하게 되었다.

‘땡땡의 모험’은 Herge(에르제)로 알려진 벨기에 작가 Georges Remi(1907-1983)가 창조한 작품이다. 그는 보이스카웃 신문이나 카톨릭 신문 등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다가, 1929년 처음 카톨릭 신문  Le Petit Vingtieme 에 땡땡의 캐릭터로 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에피소드는 ‘땡땡과 소비에트’로 그 후 첫 단행본으로 출시된다. 이후 사실상의 마지막 작품이랄 수 있는 – 1986년의 ‘땡땡과 알파아트’는 미완성 – 1976년의 ‘땡땡과 피카로스’까지 총 23편의 에피소드를 창작하여 땡땡을 유럽 최고의 인기 캐릭터로 성장시켰다.

1. Tintin in the Land of the Soviets (1929-1930)
2. Tintin in the Congo (1930-1931)
3. Tintin in America (1931-1932)
4. Cigars of the Pharaoh (1932-1934)
5. The Blue Lotus (1934-1935)
6. The Broken Ear (1935-1937)
7. The Black Island (1937-1938)
8. King Ottokar’s Sceptre (1938-1939)
9. The Crab with the Golden Claws (1940-1941)
10. The Shooting Star (1941-1942)
11. The Secret of the Unicorn (1942-1943)
12. Red Rackham’s Treasure (1943-1944)
13. The Seven Crystal Balls (1943-1948)
14. Prisoners of the Sun (1946-1949)
15. Land of Black Gold (1948-1950)
16. Destination Moon (1950-1953)
17. Explorers on the Moon (1950-1954)
18. The Calculus Affair (1954-1956)
19. The Red Sea Sharks (1958)
20. Tintin in Tibet (1960)
21. The Castafiore Emerald (1963)
22. Flight 714 (1968)
23. Tintin and the Picaros (1976)
24. Tintin and Alph-Art (1986, 2004)

나는 무엇 때문에 땡땡에 매료되었나? 우선 땡땡 시리즈는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 아닌 진짜배기로 독자들에게 ‘꿈과 희망의 모험’을 선사한다는 점이다. 20세기를 제대로 관통하고 있는 이 만화는 소년기자 땡땡과 그의 애견 밀루 Milou(영어 이름으로는 스노위 Snowy)를 등장시켜, 이미 동시대에 존재하고 있지만 아직은 자유로운 여행이 여의치 않은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다른 세계에서의 모험을 선사하였다. 이러한 모험만화의 패턴은 하나의 전범이 되어 이 후 수많은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1

이것이 땡땡이 지닌 매력의 모든 것이라면 굳이 땡땡을 ‘가장’ 좋아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 작품 말고도 ‘꿈과 희망’을 준 작품은 꽤 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또 하나의 엄청난 매력은 반세기 동안 불과 이십여 개의 에피소드만을 만들었던 에르제의 지독하리만치 집요한 장인정신이다. 처음에는 흑백으로 그려졌던 작품은 서서히 칼라로 바뀌었고 이전 흑백 작품들 역시 칼라로 재작업 하여 출간되었는데2 각 에피소드에서 그러한 작가의 그림체나 스타일이 발전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너무 매력적이다. 잘 그려진 우키요예를 연상시키는 색감과 선(線)의 풍요로운 조화, 풍경의 세밀함3은 장면 하나 하나를 감상할 수 있는4 재미를 안겨준다.5

여기까지는 사실 굳이 땡땡이 아니더라도 웬만한 아동만화의 걸작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는 – 예를 들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또 하나의 작품 ‘아스테릭스의 모험’ 같은 – 매력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 선을 뛰어넘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다. 바로 작가 에르제의 사상적 발전이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서 카톨릭 신문에서 일했던 유럽의 작가는 사실 사상적으로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극우라고까지는 할 수 없더라고 그는 백인우월주의에 유럽우월주의적인 보수우익이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조금씩 변해갔고 이것이 각각의 작품에 알게 모르게 반영되어 간다는 점이 이 에피소드의 엄청난 매력이다.6

그의 첫 작품 ‘땡땡과 소비에트’는 철저한 반공(反共)만화다. 땡땡의 눈에 – 에르제의 눈에 – 소련은 도적들이 지배하는 나라다. 그리고 땡땡은 이 도적들을 농락한다는 것이 작품의 줄거리다. 에르제는 후에 이러한 그의 맹목적인 반공주의를 반성한다. 그래서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 작품을 흑백 버전으로 남겨두었다. 다음 작품 ‘콩고에서의 땡땡’도 사실 만만치 않았다. 콩고는 그 당시 벨기에의 식민지였다. 땡땡은 이 작품에서 제국주의적 사고를 하면서 동물들을 학살하는 등의 비상식적 – 그 당시로서는 당연한 – 행위를 저지르면서도 원주민들로부터 영웅대접을 받는다. 요컨대 땡땡은 전형적인 유럽 백인 소년들을 위한 모험만화였다. 이렇게 계속 갔으면 땡땡은 걸작 반열에 오를 수가 없었다.

세 번째 에피소드 ‘미국에 간 땡땡’에서는 다소 발전이 있었다. 유럽인이 보기에 미국의 ‘자본주의자’들은 소련의 ‘공산주의자’만큼은 아니지만 여하튼 역겨운 돈벌레였다. 에르제는 이 작품에서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다룬다. 약간은 공평해졌다. 그러나 본격적인 사상전환은 ‘블루로터스’였다. 당초 이 작품은 일본인이 선한 세력, 중국인이 무지몽매한 미개인으로 다뤄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즈음 친구가 된 한 중국인 유학생 창총젠을 만나면서 작품의 내용이, 그리고 에르제의 사고가 획기적으로 변하게 된다.

뛰어난 예술가이자 민족주의자였던 창총젠은 아시아의 현실을 에르제에게 알려주었고 에르제는 여태까지의 유럽중심주의 편견이 통째로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블루로터스’의 기획을 통째로 바꾸었고, 작품은 의로운 중국소년 ‘창’과 땡땡이 친구가 되어 함께 모험하게 되는 줄거리를 갖게 된다. 일본은 제국주의적 야욕을 지닌 나라였고 땡땡은 그 야욕을 분쇄한다. 이전의 ‘콩고에 간 땡땡’과 비교하면 상전벽해라 할만하다.7 이후 ‘오토카 왕의 봉’ 등에서는 파시즘을 경계하는 소재를 다루기도 하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모험만화도 계속 이어진다.

그의 사상적 변화의 최고봉은 1976년 발표된 ‘땡땡과 피카로스’다. 이 작품은 분명히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성공시킨 쿠바 혁명으로부터 소재를 빌려왔다. 땡땡은 이 작품에서 우익독재에 고통 받고 있는 한 가상의 남미국가에서 혁명군을 도와 혁명을 승리로 이끈다. 이 과정에서 땡땡은 끊임없이 비폭력주의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소비에트에 가서 그들을 농락했던 1929년의 땡땡과는 근본이 틀린 땡땡이었다. 이 작품은 에르제가 사상적으로 사회주의자라고 우길만한 – 그렇게 우길 친구도 없겠지만 – 증거는 아니지만, 적어도 틀린 것은 틀렸다고 옳은 것은 옳다고 인정할 줄 아는 용감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다.

땡땡을 접하게 된 경로가 다양하고 접했던 에피소드가 앞뒤로 들쭉날쭉 인지라 그의 작품세계를 통시적으로 접하기 어려웠던 시절 그에 대한 거부감도 없잖아 있었으나 그의 작품 대부분을 감상하고 관련 영상이나 연구서를 훑어본 후 어느 샌가 그가 가지는, 또한 그가 살았던 20세기 유럽이 가졌던 무게감이 상당히 묵직하게 다가오게 되었다. 너무나 완벽주의적인 작가정신 때문에 고뇌했고, 사상적으로 혼란을 겪어야 했고, 파시즘 치하의 유럽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에르제는 – 그리고 땡땡은 – 만화 나부랭이라고 폄하할 수 없는 – 물론 다른 만화도 마찬가지다 – 문화유산이라 불릴만하다.

지루하게 잡설을 늘어놨는데 긴 말 필요 없다. 재미있으니 사보시라.

참고할만한 곳들
위키피디어 ‘땡땡의 모험’ 설명
위키피디어 ‘에르제’ 설명
tintinologist.org

  1. 한 예로 스티븐 스필버그는 그 당시 많은 소년들이 그랬듯이 이 만화에 매료되어 자신이 창조한 최고의 캐릭터 인디아나 존스가 땡땡을 흉내 낸 것이라고 고백하였고, 지금 현재도 땡땡의 실사화를 위해 작업하고 있다.
  2. 유일하게 첫 에피소드 ‘땡땡과 소비에트’가 칼라 작품으로 재작업 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3. 에르제는 사실성을 위해 엄청난 자료를 수집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4. 예를 들어 중국의 항일투쟁을 다룬 초기걸작 중 하나인 ‘블루로터스’에서는 중국인 거리 묘사를 위해 항일투쟁의 의미가 담긴 한문을 거리 담벼락 곳곳에 배치해놓는다. 그 만화를 볼 이들의 0.1%도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5. 그런데 사실 이 집요함으로 말미암아 작가 스스로는 엄청난 중압감을 느꼈으며 이것이 그의 정신을 갉아먹기도 했다고 그의 연구자들은 이야기한다.
  6. 그를 존경하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따라오지 못하는 매력
  7. 이후 창은 ‘티벳으로 간 땡땡’에서 다시 등장하는데 그가 티벳에서 조난당하고 땡땡이 그를 구하는 내용이다. 실재했던 창은 그 후 중국으로 가고 서로간의 연락이 끊기게 되는데 에르제는 오랫동안 그를 찾아 헤맨다. 이후 노년이 된 이들이 어렵사리 재회하게 되는데 그 당시 벨기에에서는 생방송으로 중계할 만큼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몬티파이든(Monty Python)의 역발상

몬티파이든(Monty Python)은 1970년대 초반까지 큰 인기를 끌었던 영국의 코미디 Monty Python’s Flying Circus에 단골로 출연했고 그 외 다수의 극장용 영화를 만들었던, 일종의 코미디 창작집단이라 할 수 있다. 몬티파이든이라는 이름을 걸고 만든 영화 외에도 바로 이 집단의 일원이었던 테리 길리엄이 만든 ‘브라질’ 등 여러 편의 컬트걸작들, 그리고 존 클리스가 주연한 걸작 ‘완다라는 이름의 물고기’도 이들의 코미디 코드를 차용했다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한때 이들의 작품에 열광하기도 했다.(물론 지금도 좋아한다)

이들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기 1
이들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기 2

이들은 현재 유투브(YouTube)에 자신들만의 채널을 열어놓고 그들의 작품들을 무료로 볼 수 있도록 제공하고 있다. 이들이 그들의 채널에 써놓은 글을 살펴보자.

“3년여 동안 유트브 이용자들은 우리의 작품을 몰래 떠서 수십만 개의 비디오를 유투브에 올렸다. 이제 테이블이 돌려졌다. 이 문제를 우리 스스로의 손으로 다룰 때가 왔다. 우리는 당신들이 누구인지 어디 사는지 알고 있고 당신들을 말하기조차 두려운 방법으로 추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무지하게 좋은 녀석들인 관계로 우리만의 더 좋은 방법을 찾아냈다. 우리는 우리들의 몬티파이든 채널을 유투브에 런치했다. 더 이상 당신들이 올리던 저화질의 쓰레기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저장고에서 바로 배달된 HQ화질의 진짜배기를 선사하고 있다.”

역시 몬티파이든 다운 멘트다. 하지만 물론 이게 끝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대가로 바라는 것이 있다. 당신들의 철없는 소리나 생각 없는 코멘트는 아니고 그 대신에 링크를 눌러 우리 영화와 TV쇼를 사셔서 요 몇 년간의 (네티즌들의) 해적질로 인한 우리의 고통과 혐오감을 경감시켜주길 바란다.”

이들이 말하는 링크란 유투브가 채용한 Click-to-Buy, 즉 유투브에서 본 동영상의 DVD등을 바로 매입할 수 있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이에 따른 몬티파이든의 매출신장은 어떻게 되었을까? 지난 11월 런칭된 이후 이들의 비디오는 유투브에서 가장 많이 감상되고 있는 리스트에 올랐고, 그들의 DVD는 아마존의 Movies & TV bestsellers list에서 2위에 올라 판매는 230배 증가했다고 한다.(참고 페이지)

이게 바로 클릭투바이

기술의 발달에 따라 합법의 경계를 넘어서 유통되고 있는 자신들의 저작물을 강제로 금지시키는 대신에 역설적으로 고화질의 콘텐츠를 제공하면서 상업적 성공을 동시에 획득한 몬티파이든의 역발상은 웃길 것 같지 않는 어이없는 소재로 웃음을 선사하던(예를 들면 ‘나는 양’이나 ‘웃기게 걷는 걸음을 위한 정부부처’에 관한 에피소드.. 말이 되냐..) 그들의 유머감각과 묘하게 겹친다.


그 유명한 스팸, 스팸, 스팸, 스팸 에피소드

Punk 略史

Proto-Punk라는 장르는 사후적으로 정의된 장르라 할 수 있다. 즉 1970년대 중반 Punk가 하나의 거대한 물결을 형성한 이후, 그 주된 아티스트들이 이전의 어떤 아티스트들의 음악과 태도에 영향을 받았는지를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에서 무리 지워진 60년대 아티스트들의 음악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당시에는 이들은 어떠한 공통점도 일치된 정신도 없었다 할 수 있다.

여하튼 이들 Proto-Punk의 대표는 역시 이전의 인습을 깡그리 무시한 정체불명의 음악을 시도한 David Bowie 다. 그의 중성적인 패션과 모호한 음악 들은 수많은 다른 장르에도 그렇지만 특히 Punk 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이 당시 Proto-Punk로 분류되는 이들로는 MC5, Modern Lovers, The Velvet Underground, T-Rex, Television, 심지어는 점잖게 양복을 빼입고 노래했던 Roxy Music까지도 거론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밴드는 단연 Roxy Music. 하지만 다른 이들이 이들의 히트곡 Same Old Scene 을 들으면 대체 이 밴드와 Punk 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궁금해 할 것은 당연하다. 아무래도 Modern Lovers가 보다 Punk 에 다가섰다 할 수 있겠다. 그들의 담백하지만 반항기어린 곡 Roadrunner 를 들으면 확실히 Punk 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더 나아가 Television 의 Marquee Moon 은 Punk 는 연주가 딸리는 음악이라는 편견을 여지없이 까부시는 명곡이다. 

본격적인 Punk 의 시대에 접어들면 영국과 미국 양쪽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운 태도로 무장한 일군의 아티스트들이 등장한다. 어느새 거대화된 록의 상업화와 쇼비즈니스에 노골적으로 혐오를 드러낸 이들은 소규모 공연장에서의 팬들과의 교류를 한층 중요시 여겼다.

The Sex Pistols의 등장이 역시 Punk 역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일 것이다. 그들의 명곡 Anarchy in The UK 는 Punk의 많은 부분을 함축하고 있는 곡으로 수많은 아티스트들에 의해 리메이크되었다. 한편 이 밴드의 멤버 Sid Vicious 는 Punk 버전의My Way 를 통해 우상파괴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Sex Pistols 가 좌충우돌 형의 Punk Band 라면 The Clash, The Jam, Gang of Four 등은 보다 확고한 사상과 신념을 가지고 음악활동을 하였다. 좌익사상에 대한 신념이 담긴 이들의 곡은 신자유주의가 막 동이 막 뜨던 영국사회의 어두운 면을 냉정하게 묘사하였다. 영국 음악의 주요한 조류 중 하나인 Mod Revival 의 원조이기도 한 The Jam 의 Going Ground 는 메시지와 음악성의 화학적 결합의 모범적인 사례라 할만하다.

한편 전설적인 Punk Club 인 뉴욕의 CBGB에서는 영국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Punk Artist 들이 등장한다. The Ramones, Talking Heads(한국어 팬페이지), Blondie, Patti Smith 등이 이들인데 영국의 그것과는 달리 좀 더 지적인 면, 시적인 면, 아방가르드한 면이 강조되었다는 특징이다. Patti Smith 의 읊조리는 보컬이 돋보이는 명곡 Horses 나 Talking Heads의 보컬 David Byrne 의 뻔뻔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Psycho Killer 를 들어보면 확실히 영국의 Punk 와는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음악 장르든 그렇듯이 Punk 역시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인기가 사그라진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새로이 등장하는 음악들은 ‘후기 펑크’ 즉, Post-Punk 라는 이름을 달고 Punk의 태도를 답습한다. 대표적인 밴드가 리더 Ian Curtis의 자살로 더더욱 전설이 된 Joy Division 이다. 댄서블한 리듬에 어울리지 않는 암울함과 부조리함으로 가득 찬 그들의 명곡 Love Will Tear Us Apart 는 그들의 명성이 헛것임이 아님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Echo & the Bunnymen, Siouxsie and the Banshees, The Cure 등이 이 시대를 함께 한 뮤지션들이다.

Punk 의 역사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다고 여기는 아티스트가 이 와중에 등장하는데 바로 Devo라는 밴드다. De-evolution, 즉 퇴보를 뜻한다는 밴드명에서부터 수상한 냄새가 나는 이들은 50년대 싸구려 공상과학 영화의 상상력, Punk에 충실한 곡진행, 전면적인 전자음악의 도입 등이 뒤섞인, 그 누구에게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독창성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들의 명곡 Whip it 을 들어보라. 어이가 없어진다.

그 당시 뮤지션들이 날카롭던 비판정신은 무뎌지고 배에 살이 찐 90년대 후반과 21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Punk 는 많은 뮤지션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New Wave/Post-Punk Revival 이 바로 그런 조류인데 그 선두주자는 Elastica, The Rapture, Yeah Yeah Yeahs, Arctic Monkeys 등이다. 마지막 입가심으로 The Rapture 의 The House Of Jealous Lovers 를 추천하며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펑크의 자기부정에 대한 단상

역시 블로깅은 재밌다. 아래 글들은 이른바 Punk Spirit 에 관한 일련의 커뮤니케이션을 시간 순으로 나열해본 링크들이다. ‘웅크린 감자’님이 펑크적이지도 않은 빅뱅은 펑크 흉내 내지 말라고 화두를 꺼내셨고, ‘민노씨’가 ‘웅크린 감자’님의 훈계가 모순되게도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대안을 찾고 있다고 비판하셨고, ‘히치하이커’님이 “다만 실제로 국내 음악신에서 아이돌이란 위치에 있는 이들이 얼마나 자율적으로 음악을 하고 있는진 궁금하긴” 하다며 민노씨의 글을 첨언하셨다.(비판은 아닌 것 같고) 그리고 이에 대해 민노씨가 또 “펑크는 궁극적으론 자신을 부정하고, 극복하고, 역먹이려는 정신이라고 나는 감히 이야기하고 싶다”라고 첨언하셨다.



펑크 음악을 즐겨듣는 나에게는 참 흥겨운 주제다. “펑크는 궁극적으로 자신을 엿 먹이려는 정신”이라는 민노씨의 멘트도 왠지 공감이 간다. 그것 아마 아래와 같은 이유때문 일 것이다.(너무 냉소적일지 몰라도…)


시장 지배를 위한 음악 산업의 전략은 정밀하게 발전되어 왔다. 시장은 그들이 장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주기적으로 해결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주장이다. 레코드 회사들은 인디펜던트들의 활동으로 드러난 시장 수요에 가끔 부응하기도 하지만 보통 그들은 시장을 교묘히 조작하고 가능한 선택을 제한한다. 이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대중적 취향이다. 한편으로 대중은 항상 혁신에 응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대중적 취향은 항상 장사꾼들에 의해 현혹되기도 한다. 불만스러운 요구들이 쌓여 마침내 터져 나올 때까지 기업은 대중적 취향 위에 군림하다가 인디펜던트들에 의해 이 욕구는 상업화하고 다시 이는 기업의 의해 매수된다. 그러나 의문점은 어디에서 그러한 새로운 요구들이 생겨나는 것인가? 왜 시장 통제는 대부분 효율적이지만 가끔씩은 그렇지 않은가? 대중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는가? 항상? 가끔씩? 이 장에서 얘기하고 싶은 요점은 록이 제작되는 상업적 프로세스는 본질적으로 상호 모순적이라는 것이다.[록음악의 사회학 사운드의 힘, 사이먼 프리스, 권영성/김공수 옮김, 한나래(1995), pp 128~129]


어쨌든 모든 예술행위는, 급기야 모든 (정치적, 경제적, 사상적) 행위는 다른 이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전달되지 않는 한에는 지가 무슨 랭보였든, 피카소였든, 커트 코베인이었든, 트로츠키였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지 않게 된다. 그 점이 체제순화적인 행위에서야 갈등을 빚을 일이 없겠으나 체제모순적인 행위에서는 그 자체가 모순이 된다. ‘이거 시발 체제는 좆같은데 그걸 알리려면 체제 안으로 들어가야 되다니’라는 독백을 바로 윗 글에서 사이먼 프리스가 시장과 인디펜던트의 관계를 비유로 들며 어렵게 설명해주었다.


팬들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suede가 우리나라에 알려지지 않았을 때 그 광팬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 분 왈 제발 우리나라에서 유명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단다. 자신을 메인스트림에 쩔어있는 국내 팝팬들과 차별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그런데 그 팬은 suede 가 영국 음악씬에서 명성을 얻지 않았다면 그들의 이름을 알기나 했겠는가. 그것이 음악‘시장’에서의 팬(특히 오덕후스러운)들의 딜레마일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상호모순’이 가장 비극적으로 표출된 사례는 Joy Division의 이언 커티스나 Nirvana의 커트 코베인의 자살이 아닐까 싶다. The Clash 를 비롯한 상당수의 펑크 밴드들도 자신의 이데올로기, 상업주의, 팬들의 모순된 요구 속에서 긴장감과 자기부정 속에서 괴로워했고 말이다.(이러한 자기부정은 자본주의 정치체제로 편입한 좌파정당의 평당원들 사이에서 꽤나 심각한 고민거리다) 결국 민노씨 이야기처럼 ‘끊임없이 자기부정을 하는 펑크 정신’이 온존하여 음악계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면 좋겠지만 당사자에게는 상당한 스트레스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엄청난 펑크관련 블로그 하나 소개

추.


예전에 NHK에서 밴드 경연대회를 본적이 있는데 모히칸 머리를 하고 웃통을 벗은 엄청난 녀석이 보컬을 맡은 펑크밴드의 공연도 있었다. 이 보컬, 사회자의 단상까지 들고 나와서는 무대를 개판으로 만들어버렸다. 문제는 공연이 끝나고 난 후인데 단상을 죄송스럽다는 표정으로 들고 가 정중히 내려놓고 ‘스미마센’하며 인사를 꾸벅 하는 것이었다. 그때 일본 애들 중엔 펑크밴드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80년대 음악의 키워드

무리한 방식이긴 하지만 몇가지 키워드를 제시해봄으로써 80년대 음악을 관찰해보기로 하죠.

★ MTV
81년 개국된 이 음악전문방송을 떼놓고 80년대 음악을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제 가수들은 좋던 싫던 뮤직비데오를 제작해야했고 오늘날에 있어서는 노래와 앨범의 상업적 성공에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데오스타를 비난했던 다이어스트레이츠의 Money For Nothing 조차 뮤직비데오를 제작해야했고 아이러니칼하게도 그 해에 가장 뛰어난 비데오클립으로 선정되기도 했죠.(뮤비의 최대수혜자는 조*모)

★ 꽃미남
앞서의 키워드와 연계하여 80년대는 소위 가수들의 외모가 이전 그 어느때보다 더욱 더 강조되었던 시대입니다. 사실 음주가무에 꽃미남이란 당연한 수순이지만 6~70년대의 소위 반항적 음악에서는 가치의 전복이 화두였던 시기였기 때문에 밥딜런 아저씨같은 추남들도 스타 대접을 받을 수 있었죠. 하지만 80년대에는 뉴로맨틱스의 영향 등으로 외모가 인기의 큰 축을 담당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메틀한다는 본조비마저도 외모를 부각시켰을 정도니까요. 물론 여전히 필콜린스같은 아저씨들도 인기를 얻었드랬습니다.

★ 씬써싸이저
음악적인 면에서 살펴보자면 씬써싸이저라는 악기 또는 하드웨어의 등장으로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 더이상 큰 투자를 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연주가 아닌 프로그래밍으로 여러 악기의 효과를 대체할 수 있게되자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그들의 습작으로 프로무대를 노크하였고 급기야 하워드존스, 토마스돌비와 같은 원맨밴드까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 팝
물론 팝이 인기가 없었던 시기는 없었지만 80년대에 들어와 특히 여러 음악장르들의 팝적 친화력이 강해졌다고 생각합니다. Synth-Pop이야 이미 팝음악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있었지만 심지어 메틀음악조차 팝메틀의 경향이 두드러졌던 때가 이 시기입니다. 덕분에 챠트에서는 많은 락스타들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락팬들에게는 바람직하지 않았겠지만…. 이러한 팝뮤직 강세경향에 대해서 임진모씨라면 사회가 보수적이 되어서 음악이 말랑말랑해진거라고 말씀하시겠죠.

★ 밴드에이드 & 라이브에이드
밥겔도프의 순간적인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일파만파의 영향을 미치며 대중음악계를 뒤집어놓은 큰 사건이었습니다. 스타들을 몽땅 모아 노래를 부르게 만든다는 기상천외한 생각은 지금 생각해도 신선합니다. 결과적으로 밴드에이드에 이어 USA For Africa를 비롯한 각종 이벤트성 모임이 활성화되었고 라이브에이드라는 대규모 공연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짐작키로 이 사건을 계기로 소위 기획 – 음악비즈니스의 선진화? – 이라는 업무가 크게 부각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당초 의도했던 기아의 탈출은 21세기인 이 시점에서도 요원한 과제입니다.

★ 마이클 잭슨 & 마돈나
이전에도 팝의 황제니 디바니 하는 호칭은 여러 가수들에게 붙여졌겠지만 이 둘만큼 그러한 호칭에 어울리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좋아하던 싫어하던) 이는 음악성과는 별개로 철저히 계산되고 기획된 음악비즈니스의 상품이 시장에서의 최대히트상품이 되면서 가수가 인격체가 아닌 브랜드가 되는 사례를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음.. 짧은 지식으로나마 몇가지 키워드를 살펴보았지만 쓰고보니 너무 단편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군요. 음… 손아프게 타자친게 아까워서 안 지웁니다. 그냥 이런 생각도 있구나 하세요.. ^^  

2003.12.20

레코드회사들이 저지른 뼈아픈 실수 1위는?

Blender.com 은 최근 “20 Biggest Record Company Screw-Ups of All Time”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레코드 회사가 저지른 가장 멍청한 실수 20가지를 선정했다. 흥미로운 실수 몇 개를 살펴보자.

17위에 에디슨이 세운 레코드 회사에 관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축음기의 발명가 에디슨이니만큼(사실 발명가라기보다는 사업가지만) 당연히 그는 National Phonograph Company(나중에 Edison Records 라고 개명)라는 이름의 레코드 회사를 소유하고 있었다. 처음에 이 회사는 관련업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회사였다. 하지만 치명적인 두 가지 실수는 이 회사의 수명을 단축했다. 첫 번째, 에디슨 회사의 레코드는 오직 에디슨의 플레이어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었다. 호환성이 없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그는 당시 유행하던 재즈를 지독히 싫어했고[footnote]그는 “나는 언제나 재즈 레코드를 거꾸로 돌려서 들어. 그 편이 훨씬 나아”라고 망발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footnote] 이러한 사적인 감정이 비즈니스에 반영되어 재즈 음반을 전혀 내지 않았다 한다. 결국 이차저차해서 회사는 1929년에 문을 닫았다고 한다.

 

8위로는 워너뮤직 Warner Music 의 뼈아픈 실수를 소개하고 있다. 미국의 대중음악은 그 장르적 속성 자체가 정치적 성향과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흔한데 대표적으로 보수적인 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음악은 바로 랩이나 힙합으로 불리는 흑인음악일 것이다. 힙합이 한창 인기를 끌고 있을 때 이 음악의 최고의 수혜자는 워너뮤직이었다. 그들의 계열사 중 하나인 Interscope label 이 부분소유하고 있는 Death Row 사에 당시 최고의 힙합 아티스트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Bob Dole 이 한 연설에서 이러한 이유로 워너뮤직을 비난하자 그들은 서둘러 Interscope 을 라이벌인 유니버셜에게 팔아버린다. 그뒤 유니버셜은 Interscope 이 배출한 Tupac, Dr. Dre, Eminem 등의 놀라운 성공에 힘입어 가장 큰 레코드사로 성장한다. 워너뮤직은 서서히 사그러져 가다가 2004년 매각되었다.

 

그럼 대망의 1위는?

 

“Major labels squash Napster”

 

메이저레이블의 냅스터 진압작전이 선정되었다. 냅스터가 처음 서비스를 개시했을 적에 그 인기는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파일을 다운로드하기 위해 컴퓨터를 아예 켜놓고 자는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때문에 하드디스크가 엄청나게 팔려나갔을 것이다. Blender.com 은 이 P2P의 원조 사이트가 기존 기업들에게 자본조달을 요청했을 때 이를 무시하고 무력 진압한 것을 실수로 뽑고 있다. 왜냐하면 “냅스터의 사용자들은 사라지지 않고 수많은 대체 시스템으로 흩어져 버렸기 때문이다(Napster’s users didn’t just disappear. They scattered to hundreds of alternative systems)”

 

그리고 이제는 냅스터를 찾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여전히 온라인을 통한 영상 및 음악의 불법 다운로드나 판매의 문제는 적극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레코드 회사는 DRM이라는 있으나마나한 기술을 도입했다가 폐기했고, 여전히 온라인 다운로드에 익숙해있는 수많은 사용자들은 범법자로 낙인찍히고 있고, 이 와중에 저작권을 미끼로 법률 브로커가 용돈을 벌고 있는 실타래처럼 꼬여있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겠지만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는 서비스가 RCRD LBL(발음 그대로 “레코드레이블”) 이라는 블로그다. 이 블로그는 아티스트들에게 저작권이 제한되어 있지 않은 음악을 공짜로 제공하면서 벌어들이는 광고수익을 아티스트들과 나누는 구조다. 블로그의 운영자 Rojas 씨는 꼭 음악 자체가 팔릴 필요는 없으며 광고처럼 선전되어 아티스트들과 이 수입을 공유하면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서비스의 가능성은 아마도 그 정도의 수익공유로도 만족하는 독립 아티스트들이 자신들의 음악을 알릴 수 있는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지는 선에서의 시장에 국한될 것이다. 하여튼 이러한 다양한 실험적 시도가 많아질수록 우리는 보다 다양한, 그리고 보다 건설적인 논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기존 음악 산업계들이 그러한 실험을 거부한 채 자신들만의 이익추구에만 몰두한다면 다음에 Blender.com 이 선정할 리스트에는 아마 그때 일어날 실수가 1위로 선정되지 않을까 싶다.

from foog.com

펑크의 반항에서 테크노까지, 소비사회에 대항하는 문화운동

http://www.design.co.kr/D/d200005/html/118.htm


‘대항문화’라는 문구는 언뜻 모순되어 보인다. ‘대항’한다는 것은 거부한다는 뜻인데 문화적이라는 것은 삶으로부터 의미와 가치를 뽑아내고 그것을 해석하고 감상하고 심지어는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항하여 사랑한다는 것이 성립하는가? 어떻게 개방적이고 창조적이며 의미 있는 문화적 실천행위가 전술적인 대항을 의미하는 용어와 나란히 쓰일 수 있는가?


아마도 19세기의 정치철학가 칼 마르크스에게는 이러한 질문이 떠올랐을 것이다. 마르크스 및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자본주의에 대한 어떠한 의미 있는 대항이라도 노동자와 경영진, 프롤레타리아와 자본가들 사이의 대항과 같은 경제문제로 얽힌 관계에서만 생길 수 있으며, 그 형태는 정치영역에서 과격한 노동운동이나 혁명적인 선동에 의해서만 드러난다.


한마디로 이러한 사고는 문화의 영역을 빼고 오직 자본주의에 대한 대항만을 제시하였다. 실제로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문화는 대항의 대항으로만 드러날 수 있다. 즉, 문화는 자본주의 내의 지배논리가 모두에게 명확히 보여질 수 있도록 파괴되어야 하고 폭력적인 저항을 통해 거부되어야 하는 이데올로기의 베일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가 죽은 지 수세기가 지난 지금 ‘대항문화’라는 용어는 누구에게도 수수께끼를 던지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인류 역사의 궁극적인 주체라고 칭송했던 프롤레타리아는 그들이 전복시켜야 했던 체제의 편안함에 이미 오래 전에 넘어갔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롤레타리아들은 여가시간에 그들이 일터에서 생산한 물건을 소비하기 시작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이 생산한 상품과 그 상징들에 깊이 둘러싸이게 되었다.


오늘날 소비주의와 소비문화는 우리의 일상에 너무나 깊이 들어와 있으며 우리의 언어, 사회관계, 집단의식, 가치관 그리고 우리 자신들과의 관계에까지 완전히 용해되어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에 대한 대항 중에서 자본주의가 그 기반이 된 문화의 넓은 영역으로부터 생겨나지 않은 대항을 생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대항문화는 때로는 자본주의와 관련된 모든 사회적, 개인적, 정치적, 성적, 그리고 경제적인 논리에 일반적인 반대입장을 취하면서 이와 동시에 문화의 영역 안에 남는 것을 뜻한다. 즉, 사람들이 세상의 의미를 이해하고 미의 어떤 기준을 확인하기 위해 취하는 실천적 행위 및 태도로 남는다.


그러나 대항문화 활동가는 어떤 사람인가? 이 용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며 이것이 현재의 대항문화를 분석하는 데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 학술적으로 대항문화연구를 살펴보는 데에는 두 가지 중요한 뿌리가 있다. 하나는 미국 시카고학파의 실용주의 사회학자들이다. 이들은 어떻게 다양한 비주류 그룹들이 ‘대항문화’라는 용어를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사회적 규범 속에서 어떻게 정체성을 유지하며, 또 어떻게 주류문화가 이러한 과정에 비슷하게 기여를 하는지에 주로 관심을 보였다.


대항문화를 다룬 또 다른 중요한 학파는 버밍엄 대학의 현대문화연구센터에 근거를 둔 영국학파의 사회학자들로서 이들은 ‘문화연구’라는 학문분야를 개척하여 널리 알려졌다. 이들에 의하면 젊은이들은 대항문화를 통해 도전을 추구하며 그들 나름의 방법으로 자본주의적인 논리를 거부한다. 비록 대항문화의 관심이 경제적인 것이며 궁극적인 목표가 정치적인 것일지라도 이들이 정치적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사용하는 수단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대항문화 활동가는 자신을 둘러싼 소비문화를 형성하는 기호의 숲 속에서 경제에 뿌리를 둔 억압에 직관적으로 반응한다. 이러한 분석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새롭게 부상한 노동계급의 다양한 문화적 행동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록 이제 노동계급이 소유했던 정치력을 거의 잃었지만 이들은 대항적 입장을 취하는 소비와 기호의 표현을 통해 문화의 차원에서 정치를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최근의 대항문화는 대항문화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토양이 고갈되었다는 문제를 둘러싸고 위기를 맞고 있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문화를 통한 대항이 너무나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제도화되어서 스스로를 대항적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문화를 상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청년문화의 모티프는 중년의 소비자를 위한 제품까지 확대되었으며 더 나아가 사회적 규범에 대한 대항, 과격한 미학과 개인주의적이고 반항적인 태도의 추구는 주류 소비문화에 널리 받아들여져서 대항의 진정한 의미가 이제는 시대착오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최근의 대항문화적 노력은 대안적 전략을 탐구해야만 했다. 1980년대에 펑크가 서서히 뉴웨이브, 팝, 얼터너티브, 그리고 더욱 더 상업적인 음악 장르로 전환하기 시작했을 때 전복과 문화적 반항을 꿈꾸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새로운 기운이 생겨나고 있었다. 펑크가 디스코 음악에 내세웠던 전통적인 금기는 격렬함과 대항을 유지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클럽의 젊은이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깨어지고 있었다.


이에 부합하여 간헐적인 레이브 파티(클럽 파티)를 좇아 다니는 젊은이들의 관심을 끈 테크노 음악이 1980년대의 언더그라운드 댄스 문화를 구성하였다. 이것은 대항문화 역사상 근본적으로 새로운 발전이었으며 오늘날 대항문화를 고려함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자본주의 소비문화, 인공적 안락함, 대용적 쾌락, 그리고 만들어진 행복은 전통적으로 아방가르드와 청년문화그룹에 의해서 거부되었다. 격렬함과 불편함, 그리고 극단의 감정적 경험에 호소함으로써 펑크와 헤비메탈, 다다, 추상표현주의, 그리고 여타 과격한 문화 형태들은 소비주의가 선호하는 가장된 쾌락의 꿈 뒤에 숨겨진 냉혹한 현실을 찾기를 원했다.



[월간 디자인 2000년 5월호]글/샘 빙클리(뉴욕 뉴스쿨대학교 사회학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