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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ck With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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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href=”//en.wikipedia.org/wiki/Epic_Records” title=”Epic Records”>Epic Records</a> – <a rel=”nofollow” class=”external free” href=”http://www.45cat.com/record/950797us”>http://www.45cat.com/record/950797us</a>, Fair use, Link

1980년 1월 5일 Michael Jackson의 “Rock With You”가 빌보드 R&B 싱글 차트 1위에 올라 6주간 머물렀다. 이 곡은 또한 같은 해 1월 19일에 핫100 차트 정상에 올라 4주간 머물렀다. Rod Temperton이 만든 이 곡은 Michael Jackson의 솔로로서의 세 번째 정상곡이 되었다. 마이클이 그의 다섯 번째 솔로 앨범 “Off The Wall”을 작업하는 동안인 1978년 후반, 프로듀서 Quincy Jones는 작곡가 Rod Temperton에게 곡을 의뢰했다. 그의 밴드 Heatwave를 위해 “Rock With You”를 작곡했던 Temperton는 밴드의 리드싱어 Johnnie Wilder가 이 노래를 좋아하지 않자 곡을 마이클에게 줬다. 마이클은 1979년 초 이 곡의 기본 보컬과 백그라운드 보컬을 여섯 시간에 걸쳐 녹음했다. 1979년 후반 앨범의 두 번째 싱글로 발매된 후 이 곡은 라디오와 클럽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빌보드는 이 노래가 1980년 전 기간 동안 가장 인기 있었던 노래 중 4위를 차지했다고 발표했다. 그런 면에서 이 노래는 이른바 “디스코 시대”의 마지막 히트곡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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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Jackson의 머리카락이 불붙었던 사고

Michael Jackson이 그래미상 시상식을 휩쓸던 1984년 2월 28일 The Jacksons가 출연한 펩시 광고가 방송을 타기 시작했다. “Beat It”, “Say, Say, Say”를 감독한 바 있는 Bob Giraldi가 감독을 맡은 이 광고는 1984년 1월 27일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슈라인 오디토리움(Shrine Auditorium)에서 촬영됐다. 이 촬영에서는 사고가 있었는데 발광탄이 잘못 작동하는 바람에 Michael Jackson의 머리카락에 불이 붙었다. 그는 바로 병원으로 수송되었고 2도 화상을 입어 치료를 받게 되었다. 펩시는 Jackson가 합의를 통해 150만 달러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했고 Jackson은 이 돈을 그의 부상을 치료했던 브롯맨(Brotman) 의료센터에 기부했다. 당시 그 광고의 제작을 맡은 광고기획사의 임원이었던 Phil Dusenberry는 2005년의 저작 Then We Set His Hair on Fire: Insights and Accidents from a Hall of Fame Career in Advertising에 이 사고를 언급하기도 했다.

Bad

1987년 8월 31일 Michael Jackson의 일곱 번째 스튜디오 앨범 “Bad”가 에픽 레코드사를 통해 출시되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Quincy Jones와 Michael Jackson이 프로듀스한 이 앨범은 1987년 1월 5월부터 7월 9일까지 할리우드에 있는 웨스트레이크 오디오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 이전의 작품 “Thriller”가 워낙 엄청난 인기를 얻었기에 “Bad”가 나오기까지는 무려 5년이 소요될 정도로 제작팀은 신중하게 작업을 진행했다. LP에는 열 곡, CD에는 열한 곡이 담긴 이 앨범은 거의 Jackson이 다 쓰다시피 한 60곡 중에서 추려진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60곡 중에서 30곡이 녹음되었고, 선정된 열한 곡 중에서 아홉 곡이 Jackson의 작품이다. “Bad”의 사전 프러덕션은 1986년 11월 시작되었고 본격적인 세션은 이듬해 1월 5일 시작한다. 이 앨범은 Jackson의 앨범으로는 최초로 모든 녹음, 믹스, 마스터가 디지털 레코딩 설비로 이루어졌다. 앨범이 출시된 초기에 비평가들은 앨범이 다소 실망스럽다고 혹평하였다. 하지만 이런 혹평과 전작의 성공에 대한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Bad”에서는 아홉 개의 싱글이 발매되었고, 이중 “I Just Can’t Stop Loving You”, “Bad”, “The Way You Make Me Feel”, “Man In The Mirror”, “Another Part Of Me”, “Dirty Diana” 등이 인기를 얻었다. 이 히트곡 중 다섯 개의 곡이 빌보드 핫100 정상을 차지했는데, 이런 기록을 가지고 있는 앨범은 두 개뿐이다.1 빌보드 탑200 차트 정상에 올라 6주간 머문 앨범의 판매량은 전 세계적으로 3천만 장 이상 팔렸다. 그래미상 시상식에서는 여섯 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Leave Me Alone” 트랙에 대해 베스트 단편 비디오(Best Short Form Video) 부문과 베스트 엔지니어 녹음(Best Engineered Recording) 부문(수상자 Bruce Swedien) 등 두 개의 상을 수상하였다. 발매 당시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비평가는 생각을 바꾸어 이 앨범을 가장 위대한 앨범의 반열에 올려주었다. VH1은 2009년 MTV세대의 가장 위대한 100개의 앨범에서 이 앨범을 43위에 선정하였고 롤링스톤은 역대 가장 위대한 500개의 앨범에서 이 앨범을 202위에 선정하였다.

1. “Bad
2. “The Way You Make Me Feel”
3. “Speed Demon”
4. “Liberian Girl”
5. “Just Good Friends” (featuring Stevie Wonder)
6. “Another Part of Me”
7. “Man in the Mirror”
8. “I Just Can’t Stop Loving You” (featuring Siedah Garrett)
9. “Dirty Diana”
10. “Smooth Criminal”
11. “Leave Me Alone” (CD버전과 디지털 다운로드로만 가능)

  1. 또 하나의 앨범은 Katy Perry의 2010년 앨범 Teenage Dream.

Beat It

“Beat It”은 Michael Jackson의 가수 경력을 통해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적이었던 앨범 Thriller에서 커팅되어 1983년 2월 3일 세 번째로 싱글로 출시된 곡으로 Billie Jean과 함께 Jackson의 싱글 중 가장 인지도 높은 곡으로 남게 되었다. 롤링스톤은 이 곡을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500곡’ 중 344위에 선정하여 음악적 중요성 역시 인정을 받았다. 이 곡은 특이하게도 1984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베스트 남성 락보컬 퍼포먼스’를 수상하는 기록을 남겼는데, 바로 Eddie Van Halen이 간주에서 유명한 기타 솔로를 선보인 덕이 크다.

“Beat It”은 Michael Jackson이 작곡하고 Quincy Jones가 프로듀스를 맡은 곡이다. Jackson은 이 곡의 장르 성격에 대해 이전에 언급하지 않았으나 Jones는 이 곡을 The Knack의 “My Sharona”와 같은 락음악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서 Jones는 Eddie Van Halen에게 기타 솔로를 부탁한다. 놀랍게도 Halen은 밴드의 다른 멤버 등 다른 사람들이 다들 어이없어 했는데도 무보수로 기타를 쳐줬다. 곡의 유명한 인트로는 Synclavier의 메이커가 1981년 내놓은 “The Incredible Sounds of Synclavier II”라는 데모LP에서 빌어 왔다.

에픽 레코드사의 부사장인 Frank DiLeo는 “The Girl Is Mine”과 “Billie Jean”의 성공을 보고 “Beat It”의 성공을 확신한다. 그의 예감대로 “Beat It”은 “Billie Jean”과 동시에 탑5에 오를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7주 동안 1위를 차지했던 “Billie Jean”이 The Dexys Midnight Runners의 “Come On Eileen”에 의해 1위 자리를 뺏겼지만 1주 후 “Beat It”이 바로 그 자리를 다시 차지하여 3주간 정상에 머물렀다. 이 곡은 또한 빌보드 R&B 싱글 차트에서도 1위를 기록한다. 이 곡의 장르는 락이자 R&B인 셈이다.

“Beat It”의 가사는 패배와 용기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don’t be a macho man”이란 부분은 Jackson이 얼마나 폭력을 싫어하는지를 말해주는 부분이다. 이러한 메시지는 유명한 뮤직비디오에서 더욱 명확히 전달되고 있다. Bob Giraldi가 감독한 이 작품에서 Jackson은 칼로 승부를 내려는 갱단 사이를 화해시키고 군무를 추는 장면으로 평화를 노래한다. 한편으로는 뮤지컬 웨스트사이드스토리를 연상시키는 이 뮤직비디오는 Jackson의 Billie Jean 비디오와 함께 흑인 음악이 MTV에서 뿌리를 내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뮤직비디오
The Incredible Sounds of Synclavier II 의 인트로 원음 듣기

Thriller

The cover has Jackson reclining in a white su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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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Jackson은 1979년 솔로 앨범 Off the Wall로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팝, R&B, 락, 포스트디스코, 펑크(funk), 어덜트컨템포러리의 장르가 골고루 배합된 이 앨범은 Stevie Wonder, Paul McCartney, David Forster, Quincy Jones 등이 프로듀서와 작곡가 등으로 가세하여 전 세계적으로 2천만장이 판매된 블록버스터였다. 이 때문에 Michael에게는 새 앨범에 대한 심적 부담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새 앨범 Thriller는 이러한 배경 하에 이전 앨범 발표로부터 3년 만인 1982년 11월 30일 발매되었다.

프로듀서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Quincy Jones가 주로 맡았고 Michael도 일부 곡들에서 프로듀서로 가세했다. 아홉 개의 트랙 중에서 Michael이 네 개의 곡을 썼고 James Ingram, Rod Temperton 등이 작곡진에 가세했다. 녹음은 1982년 4월에서부터 11월까지 LA에 있는 웨스트레이크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졌다. 예산은 약 75만 달러가 소요된 값비싼 앨범이다. 앨범 수록곡 중 “Baby Be Mine“과 “The Lady in My Life”를 제외한 일곱 개의 트랙이 싱글로 발매되어 전곡이 빌보드 핫100 차트 10위 안에 올랐다.

앨범은 현재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란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데 대략 5천1백만 장에서 6천5백만 장 정도 팔린 것으로 추산된다. 1984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이 앨범은 ‘이 해의 앨범’을 포함하여 8개 부문을 수상한다. 이러한 성과는 Michael Jackson이 인종적인 음악 장벽을 뛰어넘는데 큰 역할을 했음을 의미한다. Michael Jackson은 이제 ‘백인이 좋아하는 흑인음악’을 넘어 ‘누구나 좋아하는 팝음악’을 만드는 흑인음악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백악관에 가서 당시 美대통령 로널드 레이건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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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iller에서의 군무장면

실제로 Michael Jackson은 대중음악계에서조차 공공연한 인종차별에 힘들어했다고 한다. 그는 전작 Off The Wall이 ‘이 해의 앨범’에 선정되지 못한 것에 화를 냈다고 한다.(아마도 인종차별적 이유로) 결정적으로 Michael은 롤링스톤誌에 자신을 커버스토리로 다룰 의향이 있는지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다. “나는 끊임없이 흑인을 커버로 하는 잡지는 팔리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었다. 기다려. 그 잡지들이 내게 인터뷰를 구걸하는 날이 올 것이다.” 실제로 Michael이 인터뷰를 구걸하는 잡지에게 어떻게 대했는지는 모르겠다.

한편 MTV의 등장과 이 매체의 활용은 Thriller의 성공에 큰 기여를 한다. 1981년 ‘런던에서의 미국인 늑대인간’이라는 공포물을 내놓은 John Ladis는 Thriller의 감독을 맡아 마치 단편 영화를 보는 듯한 서사구조로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큰 인기를 얻었다. “Billie Jean”이나 “Beat It” 역시 현란한 무용과 재미있는 스토리 덕택에 MTV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1 이것은 또 하나의 인종차별에 대한 승리였다. MTV는 공식적으로 인종차별을 부인하였지만 어쨌든 Michael 의 성공이 흑인음악 비디오 방영의 기폭제가 된 것은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도 이 앨범은 최초로 구입한 LP다. Thriller의 전주에서의 발걸음 소리를 스테레오로 들으면서 전율하던 어린 시절의 감정이 지금도 생각난다. 그의 음악이 아니었더라면 아시아의 어린 소년이 흑인가수의 앨범을 살 생각을 했을까? 그의 음악이 아니었더라면 1984년 발표된 더 걸쭉한 흑인음악 풍의 팝음악인 Prince의 Purple Rain이 그런 열광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었을까? 일부 의식 있는(?) 비평가는 Michael Jackson의 이 앨범이 지나치게 “백인적”이라고 비판하지만 당시 백인 위주의 시장에겐 또 하나의 흑인음악이었을 뿐이다.

1. “Wanna Be Startin’ Somethin’
2. “Baby Be Mine”
3. “The Girl Is Mine” (with Paul McCartney)
4. “Thriller”
5. “Beat It
6. “Billie Jean”
7. “Human Nature”
8. “P.Y.T. (Pretty Young Thing)
9. “The Lady in My Life”
L

  1. 특히 “Beat It”에서의 군무(群舞)는 Michael의 죽음 후 기획된 한 프래쉬몹에서의 소재가 되는 등의 깊은 인상을 남겼다.

Vic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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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ksons-victory” by The cover art can be obtained from the record label.. Licensed under Fair use via Wikipedia.

1984년 6월 22일 The Jacksons의 열네 번째 스튜디오 앨범 Victory가 에픽 레코드사를 통해서 출시되었다. Michael Jackson, Jackie Jackson, Marlon Jackson, Randy Jackson, Tito Jackson, David Paich, 그리고 Steve Porcaro가 프로듀스한 이 앨범은 1983년 11월 11일부터 1984년 5월 7일까지 뉴욕, LA 등 다양한 도시의 다양한 스튜디오에서 녹음됐다. 1983년 봄의 “모타운 25” TV 스페셜에서의 The Jacksons의 재결합 공연 이후 그룹은 3년 전에 발표한 Triumph 이후의 새 앨범을 내놓을 것을 결심했다. 이 앨범은 여섯 명의 잭슨 형제가 모두 참여한 유일한 앨범이 되었다. 또한 Michael Jackson이 리드 싱어로 전체적으로 참여한 마지막 앨범이 되었다. Jacksons라는 이름이 붙긴 했지만 형제들 사이에서의 경쟁심 때문에 그룹으로써의 앨범이라기보다는 각 멤버들의 솔로 트랙으로 구성되어 있는 앨범의 성경이 강했다. 다만 Jermaine Jackson은 마이클과 듀엣을 하기도 했고, 마이클은 다른 세 곡에서 백그라운드 보컬을 맡기도 했다. 이 앨범에서는 Mick Jagger가 함께 노래한 “State Of Shock”이 팝 차트 3위 R&B 차트 4위에 오르는 인기를 얻었다. 이외에도 “Torture” (#17 Pop, #12 R&B)와 “Body” (#47 Pop, #39 R&B)등이 인기를 얻었다. 앨범은 빌보드 탑200 차트에서 4위까지 올랐고 R&B 앨범 차트에서는 2위까지 올랐다. 앨범의 홍보를 위해서 일명 Victory Tour도 진행되었다. 순회공연이 끝난 후에 Michael과 Marlon은 그룹을 떠난다. 남은 넷은 계속하여 The Jacksons의 이름으로 활동하며 몇 장의 앨범을 더 냈다.

발매당시 우리나라의 팝음악 잡지 음악세계에서는 특별부록으로 카셋테잎으로 된 이 앨범을 줬다.

Toture 노래 듣기

Somebody’s Watching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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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body’s Watching Me”는 모타운의 CEO Berry Gordy Jr.의 아들 Rockwell(본명은 Kenneth Gordy)의 데뷔 싱글이자 최고의 히트곡이다. 1984년 모타운 레이블에서 발매된 싱글에는 Michael Jackson이 코러스에 참여하고 Jermaine Jackson이 백보컬에 참여하는 등 호화스럽게 만든 곡이다. 이러한 지원사격 등에 힘입어 이 곡은 빌보드 핫100 차트 2위까지 진출하고 영국 싱글 차트에는 6위까지 올랐다. 가사 내용은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강박증에 시달리는 화장에 관한 내용이다. 뮤직비디오는 이러한 가사내용에 어울리게 Psycho의 샤워 장면을 오마쥬하거나 당시 공포영화에서 많이 쓰이는 여러 기법을 동원해 재밌게 만들었다.

뮤직비디오

‘태양의서커스 마이클 잭슨 임모털 월드투어’를 보고

Michael Jackson과 ‘태양의 서커스’. 비록 고인이 됐지만 가장 강력한 팝아이콘 중 하나와 서커스를 서커스 그 이상으로 고양시킨 최고의 대중문화 공연중 하나로 자리잡은 ‘태양의 서커스’가 하나로 엮인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유혹이었다. 생전에 마이클 잭슨이 ‘태양의 서커스’ 본사를 직접 방문할 정도로 팬이었다는 인연 덕분에 그의 사후 ‘태양의 서커스’ 측이 마이클 잭슨의 노래에 대한 공연권을 얻었고, 이를 ‘태양의 서커스’ 콘텐츠와 접목시킴으로써 이번 공연이 이루어졌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과연 두 콘텐츠의 결합은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화학적 상승작용을 일으킬만한 것은 아니었다.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대형공연장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황홀경에 빠질 팬이라면 모르겠지만, 일단 ‘태양의 서커스’라는 브랜드에 더 많은 기대를 하고 갔던 나에게 만큼은 이번 공연은 실망스러웠다. 분명 나는 서커스를 원했다. 마이클 잭슨이 위대한 인물이고 그가 가지고 있는 콘텐츠도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서커스와 결합되지 않는다면 굳이 마이클 잭슨의 일종의 “추모공연”을 서커스 기획사에서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체 공연 110여 분 중에서 서커스다운 서커스라고 할 만한 공연은 불과 30여분에 불과하다 여겨질 만큼 짧았고, 대부분의 시간은 그의 유명한 노래에 맞춰 댄서들이 단독으로 또는 단체로 댄스 공연을 펼치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생전에 마이클 잭슨과 함께 일하기도 했던 최고 수준의 뛰어난 연출자들과 안무가들이 결합했고, 그의 육성만을 세심하게 발라내어 연주자들의 실황 연주를 통해 완성도를 높였다고는 하나 역시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서커스였고 마이클 잭슨이 앞에 나와서는 안 되는 공연이란 생각이 들었다.

또한 마이클 잭슨 캐릭터로 여겨지는 흰 옷 차림의 댄서가 전반적으로 공연을 주도하였는데, 난 아직도 이 희한한 캐릭터의 옷차림이나 얼굴에 붙인 반창고의 의미를 모르겠다. 그리고 공연이 후반부로 흐르면서 전하려하는 지구사랑이나 평화에 대한 메시지, 그리고 이를 형상화한 하트 모양의 빨간 풍선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조금은 민망했다. 생전의 마이클 잭슨이 전 세계인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였다고는 하지만 역시 서커스를 서커스답게 하는 요소와는 거리가 멀었다. 전반적으로 실망스러웠던 공연이다.

80년대 팝계의 20대 사건

출처가 어디인지는 불명입니다. http://myhome.naver.com/ouimoi/favorite/80년대사건.htm 라는 링크가 남아 있긴 한데, 지금 열어보니 더 이상 서비스를 하지 않는 페이지라는군요. 누군가 예전에 “음악세계”란 잡지에서 본 것 같다는 코멘트를 달아놓기도 했네요. 여하튼 저작권이 있으신 분이 있으시면 연락주시고요. 이 중 몇 개나 동의하시는지 한번 곰곰히 생각해보는 것도 재밌겠네요.

Pop Events Of The Decade (80년대 팝계의 20대 사건)

1. 1980-핑크 플로이드의 화제작 「벽」

1980년 최대의 화제작은 핑크 플로이드의 「벽」(The Wall)이었다. 67년 데뷔작 「여명의 문 앞에 선 풍적수」(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를 발표한 이래 핑크는 프로그레시브 음악으로 팬들은 물론이고 아티스들에게도 음악적인 영향을 미쳤다. 73년 「달의 어두운 면」(Dark Side Of The Moon) 이래 최대의 앨범이라는「벽」은 15주간 차트 정상을 차지했는데, 82년에 영화로도 제작되어 또 다시 핑크 플로이드 열풍을 몰고 오기도 했다. 앨런 파커 감독의 이 영화는 당시로선 최장시간의 록영화였다. 라이브 에이드로 우리들에게도 친숙한 봅 겔도프가 주연한 이 영화는 록 스타의 정신적인 붕괴를 다룬 것이다. 영화 속에 나오는 애니메이션은 정치만화 칼럼니스트로 유명한 제럴드 스카프의 작품.

2. 1980-존 레논 흉탄에 쓰러지다

비틀즈의 존 레논이 80년 12월 8일 뉴욕에 있는 다코타 아파트에서 마크 채프먼이라는 사내의 총탄에 쓰러졌다.  80년 11월, 5년 동안의 침묵을 깨며 그는 앨범 「이중 환상」(Double Fantasy)을 발표하여 팬들을 설레게 했었다. 싱글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Just Like> Starting Over)은 그의 죽음 이후 차트 1위에 올라 사람들을 더욱 애석하게 했다. 비틀즈 시절 “우리는 예수보다 유명하다”는 말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던 존은 60년대 팝 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만함 속에 번득이는 예지등으로 그의 개성은 더욱 팬들에게 어필되었고, 65년 비틀즈 멤버로서 ‘대영제국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3. 1981-MTV의 영향

1981년 8월 미국의 어느 케이블 방송국은 24시간 동안 음악만을 방송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MTV(Music Televison)이다. 75년 일본의 소니사에 의해 비디오가 대중화될 때부터 MTV의 출현은 이미 예상되었는데, 디스크의 소리에 TV의 화면을 접목시킨 것이었다. 노래를 듣고, 거기에다 보기까지 하니 음악의 내용도 상당히 변하게 되었다.  MTV는 뉴 웨이브 가수들의 출현을 앞당기기도 했다. 듀란 듀란, 컬처 클럽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70년대 통신기기의 대변혁인 비디오가 음악에 미친 영향은 바로 MTV의 출현이었다.

첫 시작을 알린 비디오는 그 유명한 The BugglesVideo Killed The Radio Star

4. 1981-뉴웨이브의 기수들

뉴웨이브라는 말처럼 뜻이 다양하고 복잡한 용어도 드물 것이다. 70년대 말 펑크와 디스코, 그리고 기존 록의 혼합물을 뉴웨이브라고 부르는데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기계적으로는 MTV의 등장이 뉴 웨이브의 출현을 앞당기는 역할을 했다. 70년대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을 80년대의 요구에 맞춘 것이 뉴 웨이브라고 보는데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대중적인 기반은 1981년 블론디였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고 멘 앳 워크. 폴리스. 유리쓰믹스. 컬처 클럽. 듀란 듀란 등 수많은 아티스트가 등장했다. 감각적인 사운드, 현대적인 감각의 화장 및 분장 그리고 환상적인 패션 등이 그들의 개성이기도 했다. 70년대 말의 파괴적인 펑크 시대 이후 찾아온 대중 음악, 그것이 뉴 웨이브였다.

5. 1982-CD 및 LPD의 개발

디스크와 TV의 만남이 MTV였다. 하지만 우리들은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시각과 청각의 동시 해결이라는 요구는 풀렸지만 그 질(質)이 문제였다. 먼저 원음(原音)에 가까운 소리를 듣고자 했다. 그것이 CD(Compact Disk)이다. 일본의 소니사와 네덜란드 필립스사는 82년 CD발매를 개시했다. 광통신(光通信)의 발전은 거기에서 머물지 않았다. 화면도 실물에 가까운 생생한 것을 가능케 했다. 그것이  LDP(Laservision Disk Player)이다. 83년 일본의 파이오니어사는 LDP를 시장에 내놓기 시작했다. MTV가 제공하는 음악의 발전 단계가 LDP인 것이다. 이제 팬들은 생생한 소리와 화면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비디오의 등장처럼 LDP가 음악계의 흐름을 뒤집진 못하고 있다. 지금은 초기 단계다. LDP의 대중화는 비디오에 못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결국 LDP는 단명하고 말았고 현재는 DVD가 대세죠 : 옮긴 이 주)

6. 1982-80년대의 음악 뉴 에이지

80년대 들어 태동한 두 가지 음악 장르라면 뉴 에이지와 랩이다. 80년대 초부터 ‘뉴 에이지’ 또는 ‘환경음악'(주로 일본) 등으로 불린 이 음악은 동양적인 명상음악이라는데 특징이 있었다. 굳이 뉴 에이지를 82년의 사건으로 잡는데는 약간의 무리가 있지만, 뉴 에이지라는 음악을 대중화시킨 조지 윈스턴의 활동을 기초로 했다. 80년 조지는 「가을」(Autumn), 「겨울에서 봄으로」(Winter Into Spring),「12월」(December)등을 발표했다. 위의 앨범이 꾸준히 팬들의 사랑을 받아 83년 초 빌보드 재즈 차트에  오르기도 했다. 한편 반젤리스는 82년 <불의 마차 ‘(Chariots Of Fire)라는 영화음악으로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반젤리스가 뉴에이지? : 옮긴 이의 의문) 이때부터 뉴 에이지는 그
독립성을 인정받아 87년 최초의 뉴 에이지 그래미 수상자 안드레아스 플렌바이더를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CD의 보급은 뉴 에이지를 전파하는 데 큰 몫을 했다는 사실도  간과해선 안되겠다.

7. 1983-80년대의 대표적인 뮤지션 마이클 잭슨

지금도 팬들에겐 <빌리 진>(Billie Jean)의 전주 부분이 귀에 생생할 것이다. 83년 팝계를 휩쓸어 버린 수퍼스타가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마이클 잭슨이다.  당시만 해도 흑인 가수의 방영을 꺼리던 MTV에 그는 백인에 가까운 성형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영화감독 존 랜디스 (“블루스 브러더스”<Blues Brother>의 감독)를 영입하여 만든 비디오 <비트 잇>(Beat It)은 마이클을 수퍼스타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모타운 설립 20주년 기념식에서 보여준 그의 춤 솜씨와 퀸시 존스에 의해 프로듀스된 앨범 「스릴러」(Thriller)의 펑키한 사운드, 그리고 백인에 가까운 분장 등은 MTV의 장점을 가장 완벽하게 이용했다는 평을 들었다. 그 앨범에선 싱글 톱10이 7곡이었는데, 덕분에 마이클 잭슨은 그 해 그래미상  8개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8. 1983-온 거리를 뒤흔든 브레이크 댄스

수퍼스타 마이클 잭슨의 등장 이후 뒤로 걷는 댄스 스텝은 팝계의 또 다른 화제거리였다. 길거리에서도 그를 흉내내는 청소년들을 보기란 어렵지 않았다. 관절을 비틀어 대는 춤 때문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는 기사들이 발표되기도 했었다.  이름하여 브레이크 댄스 열기였다. 이 좋은 소재를 영화계에서 놓칠리가 없었다. 83년 애드리언 라인 감독의 “플래시댄스”(Flashdance)가 바로 그것이다.  제니퍼 빌스 주연의 이 영화는 황당한 스토리를 지닌 것이었지만 디스코 작곡가로 유명한 조르지오 모로더의 음악 덕분에 흥행에 성공한 영화였다. 특히 아이린카라가 부른 <플래시댄스>와 <신나는 기분> (Flashdance What A Feeling)(이 노래가 언제부터 두곡이었을까나… : 옮긴 이의 의문)은 오스카 주제가상을 받았다. 이 영화 이후 댄스 음악은 영화에서 주요한 위치를 갖기 시작했다.

9. 1984-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열기

84년은 유난히 뛰어난 앨범이 많이 발표된 해였다. 한 앨범이 계속해서 1위에 머무는 바람에 1년(약52주) 동안 4개의 앨범만이 넘버원을 차지했다.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프린스의 해라고 해도 좋을 시기였다. ‘보스'(브루스)는 70년대 미국을 대표하는 가수였지만 「미국에서 태어나」 (Born In The U.S.A) 앨범으로 대중적인 기반도 확실히 다지게 되었다. 「끝없는 질주」(Born To Run)로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한 그는 그 해 타임, 뉴스위크 양 잡지의 표지인물로 선정되기도했다. 80년 「강」(The River)으로 앨범 1위를 기록한 그는 수작 「네브라스카」 Nebraska) 이후 84년 「미국에서 태어나」를 발표했다. 재킷에 노동자 복장 차림의 사람이 성조기를 향해 오줌을 누고 있는 듯한 자세 때문에 말도 많았지만 본인은 강력히 부인하기도 한 문제의 앨범이었다.

10. 1984-미네아폴리스 사단의 리더 프린스

TV 드라마 “배트맨”(Batman)의 주제곡을 열심히 피아노로 연주하던 소년이 바로 영화 “배트맨”의 사운드트랙을 맡았던 프린스이다. 1984년은 한 마디로 보스와 프린스의 해였다. 특히 프린스는 작곡, 작사, 프로듀서, 싱어를 겸하는 만능 재주꾼으로 83년의 마이클 잭슨 열기를 뒤엎기에 충분한 인물이었다. 70년대에 데이비드 보위가 새로운 음악의 창조를 위해 노력했다면 80년대는 단연 프린스였다. 그는 「심홍색 비」(Purple Rain) 한 장의 앨범으로 표현된다. 바로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스타 제조기이기도 하다. 배내티와 아폴로니아가 프린스 사단 출신이며, 실라E. 차카 칸. 마돈나. 시나 이스턴 등 그가 후원한 가수는 수도 없이 많다.

11. 1985-만능 엔터테이너 마돈나

80년대 최고의 여성 가수로 마돈나를 지목하기에 주저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1985년 마돈나는 「처녀처럼」(Like A Virgin)으로 전 세계 팝 팬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고 말았다. 프로듀서는 듀란 듀란의 프로듀서로도 유명한 나일 로저스. 미모와 섹시함 그리고 가수로서의 가창력과 춤 등이 그녀를 수퍼스타로 만들기에 충분했지만 MTV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그녀는 MTV 등장 이후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88년에는 브로드웨이 연극에도 출연하여 화제를 몰고 온 그녀는 영화배우 숀 펜과의 결혼 생활을 끝내는 등 끊임없이 구설수에 올랐지만, 올해 「기도처럼」(Like A Prayer)을 발표하며 자신의 건재를 과시하였다.

12. 1985-이디오피아 난민구호 ‘라이브 에이드

85년 7월 13일 영국 런던의 웸블리 구장과 미국 필라델피아의 존 F. 케네디 구장에서 동시에 대규모 콘서트인 ‘라이브 에이드'(Live Aid)가 개최되었다. 이디오피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난민을 돕기 위한 자선공연이었다. 장장 16시간의 공연, 200여명의 아티스트 출연, 430억의 자선 기금, 세계 140개국에의 15억 시청자 등등 종래의 모든 기록을 깨버린 행사였다. 영국의 록 그룹 붐 타운 래츠의 리더 봅 겔도프는 이 행사를 개최한 공로로 그 해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라이브 에이드’는 우드스톡 이후 최대의 공연이었으며, 이 행사에 자극받아 해리 벨라폰테는 ‘우리는 곧 세계'(We Are The World) 라는 앨범(We are the world는 라이브에이드 이전에 나오지 않았나요? : 옮긴 이의 의문)을 제작하기도 했다. 프로듀서는 퀸시 존스. 빌보드 차트 1위 및 그래미상 수상의 영광도 안은 앨범이었다.

13. 1981-뉴 웨이브의 기수들

뉴 웨이브의 열기, MTV의 등장 그리고 아티스트의 개성 등이 그 시대와 딱 들어맞은 뮤지션이 왬이었다.  조지 마이클과 앤드류 리즐리로 구성된 이 영국 듀오는 1984년 <떠나기 전에 깨워주오>(Wake Me Up Before You Go-Go)를 싱글 차트 1위에 올려 놓으며 스타덤에 올랐다. 1985년 중국 공연까지 벌였던 그들은 특히 여성 팬들의 우상이었다.  준수한 외모와 로맨틱한 노래로 국내에서의 인기도 대단했는데 85년 <경솔한 속삭임>(Careless Whisper)은 아마 팝 팬들에게 많은 추억을 준 곡으로 짐작된다. 흑인의 소울을 팝 감각으로 소화시켜 자신들의 개성을 구축했던 이들은 2집 「크게 해봐」(Make It Big)의 성공 이후, 끝없이 해체설이 돌다 결국 86년 헤어지고 말았다.

14. 1986-앰네스티 로큰롤 순회공연 개시

86년 ‘앰네스티’라는 단체가 뉴스에 종종 오르내렸다.’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라는 이 단체는 각국의 탄압받는 양심수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61년에 조직되었다. 온 세계에 이 단체의 존재를 명확하게 알리는 데는 록 스타들의 역할이 컸다. 앰네스티 미국 지부의 잭 힐리라는 사람은 85년 ‘라이브 에이드'(Live Aid) 공연의 위력을 실감한 뒤 대규모 록 행사를 계획했다. 86년 6월 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 개최되었던 이 행사에서 U2와 스팅 등은 자신들의 개성을 팝 팬들에게 강력히 심어 주기도 했다. U2는 이 행사로 전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는 1987년 ‘여호수아 나무'(The Joshua Tree)로 나타났다. 1988년 ‘지금 인권을'(Human Rights, Now!)공연으로 이 행사는 맥을 잇고 있다.

15. 1987-미래의 검은 로큰롤 랩

50년대 로큰롤이 등장했을 때 젊은이들의 호응은 열광적이었지만 기성세대는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정적이고 도발적인 춤, 가사, 창법 등으로 젊은이들을 흥분시켰던 로큰롤은 기성세대들이 보기엔 천박한 잡음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후 로큰롤은 대중음악의 주류가 되었다. 아직은 소수이지만 랩에서 로큰롤이 가졌던 의의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80년대 중반 흑인들 사이에서 랩이 퍼지기 시작했다. 마구 지껄이는 폭력적인 가사, 반복되는 리듬 등으로 일반 팬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던 음악이 랩이었다. 86년 런-DMC에 의해 랩의 저변이 확대되기 시작하더니 87년 드디어 백인 래퍼 3인조 비스티 보이스의 「살인 허가」(Licenced To Kill)가 앨범 차트 1위에 올라섰다. 뉴 에이지와 함께 80년대에 탄생한 장르로 새로이 위치를 굳힌 랩은 올해 톤 록이라는 또 다른 스타를 내기도 했다.

16. 1987-로큰롤은 U2를 통해 재탄생되었다.

85년의 ‘라이브 에이드'(Live Aid)와 86년의 앰네스티 순회공연을 통해 등장한 스타 중 U2의 부상은 단연 돋보이는 것이 있었다. 특히 앰네스티 공연에서 U2의 리드 싱어 보노가 보여준 개성은 60년대 도어스의 짐 모리슨이 보여 준 바로 그것이었다. 아일랜드 출신 4인조 U2는 87년 팬들에 보답하는 앨범 「여호수아 나무」(Joshua Tree)를 발표했다. 이 앨범은 차트 1위에 랭크된 것은 물론이고, 78년 팀결성 이후 발표한 앨범들도 덩달아 차트에 무더기로 진입하여 그들의 인기를 실감케 했다. 정통 로큰롤에 실린 의미있는 가사와 진지한 매너로 한몫 보기도한 U2는 그 해 그래미상을 휩쓸기도 했다. 오랜만에 로큰롤이 U2를 통해 기지개를 켠 87년이었다.

17. 1988-일년내내 톱10에 랭크된 조지 마이클의 「믿음」

1988년은 오직 한 명의 스타가 독주한 해였다. 그 주인공은 조지 마이클. 86년 왬이 해산될 때부터 그의 솔로 등장은 시간 문제였다. 섹스 어필하는 용모와 흑인 가수를 방불케하는 소울 창법 등 스타가 될 만한 재능이 넘치는 영국 가수였다. 그의 솔로 데뷔 앨범은 「믿음」(Faith)이었는데, 이 앨범은 88년 한해 단 1주만 11위를 기록하였고 나머지 기간에는 톱10안에 랭크되었었다. 정상에 머무른 기간도 12주였다. 싱글 1위곡도 5개나 터져 나왔다(I Want Your Sex, Faith, Father Figure, One More Try, Monkey). 마이클 잭슨도 마돈나도 이런 기록은 세우지 못했다. 트레이시 채프먼의 포크와 스티브 윈우드의 컴백도 조지 마이클의 열기를 따라 잡진 못한 한 해였다.

18. 1988-헤비 메틀의 전성기를 다시 연 밴드들

88년 후반부의 주인공은 데프 레퍼드와 건스 & 로지스였다. 이들이 벌인 차트 경쟁은 헤비 메틀 만큼이나 치열한 것이었다. 88년 메틀계에 불을 당긴 팀은 반 헤일런의 「오! 자네도 하나 먹었군」(OU 812) 앨범으로 시작해서 데프 레퍼드의 「히스테리아」(Hysteria), 건스 & 로지스의 「파괴 망」(Appetite For Destruction) 그리고 본 조비의 「뉴 저지」(New Jersey)까지 그 열기는 이어졌다. 데프 레퍼드는 83년 「방화광」(Pyromania)에 이어 「히스테리아」도 7백만 장 이상 판매하여 앨범 2장을 연속으로 7백만장 이상 판매한 최초의 밴드가 되었다. 이들을 이어 건스 & 로지스 그리고 본 조비가 메틀의 열기를 이었다. 「뉴 저지」가 차트 1위에 올랐을 때 2위는 「파괴 욕망」, 3위는 「히스테리아」였다. 빌보드 차트 사상 메틀 밴드의 앨범이 1,2,3위를 휩쓴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19. 1989-팝계의 새로운 주인공 10대 가수들

89년은 유난히 10대 가수들의 활약이 돋보인 해였다. ’10대현상’은 88년 티파니부터 시작되었다. 데뷔 앨범 ‘티파니'(Tiffany)를 차트 정상에 올려놓으며 그녀는 10대 선풍을 몰고 왔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곧이어 데비 깁슨이라는 천재 소녀가 출현했다.  데뷔 앨범 「뜻밖에」(Out Of Blue)에 이어 「짜릿한 청춘」(Electric Youth)을 내놓으며 티파니의 인기를 능가하고 있다. 전반기는 보비 브라운의 독무대였다. 앨범 「잔인하게 굴지 마세요」(Don’t Be Cruel)에서 연속으로싱글 히트곡을 내놓았다(Don’t Be Cruel, My Prerogative, Roni, Every Little Step 등). 후반부는 뉴 키즈 온 더 블록이었다. 앨범「끈질기게 버텨」(Hangin’ Tough)를 차트 1위에 올리며 동명 싱글곡 외에 <커버 걸>(Cover Girl), <내가 (당신을 황홀하게 하지 않았어요>(Didn’t I<Blow Your Mind>)등을 연속 히트시켰다.

20. 1989-돌아온 공룡들

전반부엔 10대 가수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면 후반부는 60년대 로커들의 재등장이 활발한 시기였다. 토론토 공연으로 시작된 더 후의 컴백,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재등장. 봅 딜런. 반 모리슨. 비지스. 링고 스타 등의 새로운 모습이 인상적인 해였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1989년의 사건은 롤링 스톤즈의 재결합 공연이었다. 필라델피아에서 8월 31일 시작된 그들의 순회공연은 미국을 온통 뒤집어 놓았다. 뉴욕에선 공연이 예정되자마자 6시간만에 약 30만장의 입장권이 동나버리기도 했다. 새 앨범 「강철 바퀴」(Steel Wheels)와 싱글 <복잡한 감정> (Mixed Emotion)은 차트 정상을 향해 질주했다. ‘구르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말을 실감케 했다.

마이클잭슨에 대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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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Jackson-3” by Michaeljacksonphoto_drewcohen.JPG: Drew H. Cohen
derivative work: Gaston S/Kpo! 09 (talk) – Michaeljacksonphoto_drewcohen.JPG.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그의 죽음을 접한 후 새삼 마이클잭슨이 나에게 어떠한 존재였는가는 생각해보게 된다. 80년대 음악 블로그를 직접 운영하고 있을 만큼 나름 80년대 팝음악에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기에, 어떤 식으로든 그의 존재감은 나의 음악생활에 분명히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 내가 처음 산 LP가 바로 마이클잭슨의 스릴러(Thriller)였다는 점이 떠오른다. 그전까지 이런저런 히트싱글을 모음집 형식으로 묶은 조악한 “구르마 테잎(리어카라는 이동수단에 쌓아놓고 한 개의 1천 원씩 정도 받고 팔던 불법복사 카셋테잎)”을 통해 음악을 접했었던 내가 큰맘 먹고 거금 2,500원을 주고 산 앨범이 바로 마이클잭슨의 앨범이었다.

하얀 양복을 입고 옆으로 누워 앞을 응시하는 마이클잭슨의 사진이 인쇄된 간단한 디자인의 앨범이었지만 그 속내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Billie Jean을 비롯하여 앨범 거의 모든 곡이 차트에 오르고 리듬앤블루스뿐만 아니라 락부문까지 그래미상을 수상하는 등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한마디로 전무후무한 대중음악의 산 역사라 할만한 앨범이 되었다.

이 앨범을 통해 내가 경험한 또 하나의 최초는 바로 스테레오사운드의 쾌감이다. 히트싱글 Thriller를 들으면 도입부에 문이 삐걱하고 열리며 누군가가 뚜벅 뚜벅 걷는 장면이 묘사된다. 헤드폰으로 들으면 이 발자국 소리가 좌에서 우로 옮겨지는 부분이 선명히 느껴지는데, 어린 마음에 친구와 함께 들으며 무척이나 신나했었던 추억이 생각난다.

한편 그의 음악을 처음 안 것이 스릴러 앨범부터였고 이후의 앨범은 그럭저럭 챙겨들었지만 그의 어릴 적 음악은 접하지 못했었다. 그러다 그 전의 어린 시절을 알게 된 것은 학창시절 같은 반 친구덕분이었는데, 80년대에 유행하던 주문제작(!) 테잎 – 음반가게에 자기가 듣고 싶은 곡을 리스트로 주고 복사해서 만든 카셋테잎 -을 만들 때에 그의 조언에 따라 마이클잭슨의 곡을 녹음하고서였다.

즉, 하나에 2천 원 정도 했던 이 테잎을 주문할 때에 그 친구가 자기의 음악적 취향을 뽐내며 – 알고 보면 그 친구도 자기 형한테 주워들은 풍월이었지만 – 마이클잭슨의 어린 시절 곡을 추천해주고 덕분에 그 곡을 알게 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의 성인시절 음악도 좋지만 어린 시절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그의 맑은 음색도 또한 맘에 든다. 그가 죽은 이 시점에 더욱 애잔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잘 가요 마이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