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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the Resurr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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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ne Roses I Am the Resurrection” by The cover art can be obtained from Silvertone.. Licensed under Wikipedia.

“I Am the Resurrection“은 The Stone Roses의 데뷔 앨범의 영국 버전 가장 마지막 곡이다. 이 곡은 1992년 3월 30일 싱글로 발매되어 영국 싱글 차트 33위까지 올랐다. 곡의 마지막 4분은 연주로 채워져 있는 특이한 구성의 이 곡은 그 종교적인 뉘앙스 때문에[1. “I am the resurrection and I am the life”) 밴드가 5년 후에 발매한 2집 Second Coming에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싱어 Ian Brown은 오히려 이 곡이 反기독교적이라고 증언했다. ”교회의 문에 형광색 페인트로 그 말이 쓰여진 포스트를 본적이 있는데 인상적이었어요. 그래서 가사는 반기독교 적입니다. 사람들이 정상적인 뇌를 가지고 있다면 성경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를 이해한다 할지라도 정신적인 도움을 필요로 할 때도 있죠. 매우 슬프고 아이러닉한 일입니다.“ 한편 John Squire는 이렇게 말했다. ”한 개인에 대한 살의가 섞인 공격입니다. 누군지 말 못하지만 Ian이랑 내가 아는 어떤 사람입니다.“ Q 매거진은 “I Am the Resurrection“을 ‘가장 대한 100곡의 기타 트랙’에서 10위에 꼽았다. NME는 ‘가장 위대한 50곡의 인디 찬가’에서 8위로 꼽았다. 싱글 커버는 정식 앨범 커버와 마찬가지로 기타를 맡은 John Squire가 Jackson Pollock 스타일로 만들었다.

뮤직비디오

Smiths,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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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ithsPromoPhoto TQID 1985” by Scanned promotional photograph. Licensed under Fair use via Wikipedia.

스미쓰는 82년 봄 맨체스터 출신의 두 남자, 모리세이(본명 Steven Patrick Morrissey)와 자니 마(본명 John Maher)에 의해 결성되었다. 그해 여름 데모 작업을 위해 드러머인 사이먼 볼스탠크로프트(Simon Wolstencroft)와 녹음을 했지만 그는 스미쓰의 일원이 되기를 거부했다. 후에 사이먼은 폴(The Fall)에 들어갔고, 결국 스미쓰에 합류한 마이크 조이스(Mlke Joyce)와 함께 맨체스터 리츠에서 데뷔 공연을 가졌다. 베이스가 없던 스미쓰는 82년 말 스미쓰의 평생 동반자인 앤디 러크(Andy Rourke)를 만났는데 그는 자니와 함께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스미쓰의 첫 싱글 ‘Hand In Glove’는 차트에 오르지 못했지만 83년의 두 번째 싱글 ‘This Charming Man’은 영국 차트 30위에 오르는 실력을 과시했다. 곧장 미국 투어에 오른 네 명은 새로운 싱글 ‘What Difference Does It Make?’를 발표하고 12위에까지 올랐다. 모리세이는 자주 성(性)의 개념을 무너뜨리는 가사를 썼는데, 그의 동료 자니의 기타 사운드는 이런 모리세이의 든든한 지지자 역할을 하였다. 한편 1집의 엔딩곡인 ‘Little Children’은 60년대에 일어났던 끔찍한 살인사건의 피해자인 어린 아이들에게 바치는 레퀴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를 비난했고 스미쓰는 언론의 표적이 되어 곤혹을 치뤄야만 했다. 다행히 피해자 측의 모리세이에 대한 변론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이후 스미쓰와 모리세이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에피소드로 남았다.

스미쓰는 미국의 R.E.M이나 벡(Beck)처럼 대학가의 유명한 컬트 밴드가 되어가고 있었다. 86년 메이저 레이블인 EMI로 이적한 후 영국 투어를 하던 중, 자니가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의 공백을 크래이그 개넌(Craig Gannon)이 대신하였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법적인 문제로까지 불거지게 되었다. 브릭스톤 아카데미에서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스미쓰의 영국 공연은 더 이상 실현되지 않았다. 자니는 더 이상 스미쓰에 남아있고 싶어하지 않았다. 음악적인 방향이 달랐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에게는 휴식기간이 필요했다. 이들의 미래는 너무나 불투명했으며, 결국엔 87년 8월 공식적으로 해산을 선언했다. 이전에 마지막으로 발표된 앨범은 [Strangeways, Here We Come]으로 같은 해 나왔고, 이듬해 [Rank]가 발표되면서 스미쓰의 잔존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멤버들은 각자 세션맨으로서 분주하게 활동했고, 모리세이 또한 화려한 싱글 데뷔를 하였다.

자니는 프리텐더스(Pretenders)와 더더(The The)에서 기타맨으로 활약하다가 버나드와 함께 시작한 일렉트로닉에서 다시 한번 부활을 꿈꾸었다. 그는 과외활동으로 브라이언 페리, 토킹 헤즈, 빌리 브래이그, 커스티 맥콜, 팻샵 보이즈, 스텍스, 그리고 반데라스에 이르는 다양한 뮤지션들과 함께 작업하며 경력을 쌓아갔다.

에필로그

필자가 스미쓰를 처음 접한 것은 영화 Pretty in Pink의 싸운드트랙에서였다. 이 OST에 삽입된 Please please please let me get what I want라는 긴 이름의 이 노래는 그들의 서정적인 음악적 감성을 잘 표현해주는 곡으로 눈밭에서 반코트를 입은채 서있는 그들의 흑백사진과 오버랩되면서 오랫동안 여운을 남겨주는 곡이었다. 모리쎄이의 시적인 가사와 자니마의 발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애절한 키타 사운드는 이들 음악의 핵심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고딕락의 우울한 자화상과 이언커티스(Joy Division)의 표정이 묻어나는 듯한 그들의 음악적 천재성으로 인해 한동안 영국 음악계에 등장하는 신진밴드들은 이들과 비교되지 않으면 안되는 일종의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했다.

이제 모리쎄이는 예전의 샤프한 모습에서 적당히 살집이 잡힌 늙수구레한 아저씨의 모습으로 변한채 미국에서 하드코어 밴드를 이끌고 있고 자니마는 뉴오더의 버나드섬너와 함께 일렉트로닉으로 활동하여 인기를 얻었으며 현재는 자신의 밴드를 이끌고 있다 한다.

다른글(출처 : http://www.intermuz.com/theRocker/noiz_box/NOISE5.asp)

70년대 말 펑크의 소진과 함께 뉴 웨이브 팝이 영국 대중음악계를 휩쓸 무렵, 주류 팝 시장은 신시사이저가 주도하는 전자 음악의 홍수로 80년대 팝 음악시장의 모습을 갖춰나간다.울트라복스, 휴먼 리그같은 밴드들이 표방한 신스 팝은 이윽고 듀란 듀란, 컬처 클럽, 왬 등의 아이돌 스타들에 의한 세련된 포장으로 변신한다. MTV의 등장은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의 전환을 가져왔고, 주류 팝 시장에선 음악성보다는 외모와 무대 매너로만 음악인의 자질을 판가름하는 경향이 점차 농후해 졌다.

여기서 소개할 80년대 맨체스터 사운드는 바로 이런 당시 영국 주류 팝 시장의 소모적이고도 치열한 ‘음악 팔리기’에 대해 저항하며 맨체스터라는 영국 북부의 공업 소도시를 거점으로 활동한 인디 밴드들의 음악 스타일을 통칭해서 말한다. 영국 내에서 보면 한갓 지방도시에 불과한 이 지역을 거점으로 바로 본격적인 영국 얼터너티브 록 씬의 맹아가 형성되었다.

맨체스터 내의 밴드들은 그들만의 ‘지역성’을 통해 자신들만의 독특한 음악 색깔을 지니려고 했고 80년대 영국 얼터너티브의 발화점으로서 바로 이 맨체스터를 꼽는데는 별 이견이 없을 듯 하다. 80년대 당시 활동하던 맨체스터 출신 밴드들 중 가장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했던 밴드들론 스미스, 뉴 오더, 제임스 등이 있었고, 이들의 직계 영향 하에 등장한 ‘매드 체스터(일명 미친 맨체스터들)군단-스톤 로지스.해피 먼데이스, 인스파이럴 카펫, 살란탄 UK-들은 바로 위에 언급한 세 밴드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90년대 등장한 오아시스, 블러, 스웨이드, 펄프와 같은 쟁쟁한 브릿팝 그룹들 역시 바로 이 맨체스터 사운드에서 직,간접으로 그 음악적 영향을 흡수했다 볼 수 있다.

이 글에선 맨체스터 사운드를 대표하는 중요한 두 거목 스미스와 뉴 오더를 소개한다. 이들 그룹은 각각 ‘기타-팝’과 ‘신스 팝’이라는 음악 스타일을 통해 영국 내의 ‘인디 팝’ 운동의 선두를 담당한 밴드들이다. 이 두 밴드는 펑크와 90년대 브릿 팝을 연결 시키는 중요한 가교로서 거론되곤 한다. 앞으로 두 편으로 나눠서 진행 될 본 내용에서 먼저 ‘스미스’에 대해 알아본다.

The Smiths – 그들의 음악에 대해서…

스미스의 음악을 ‘기타 팝’이라고들 한다. 이는 당시 영국 내 대중 음악 상황과 연관되어서 붙어진 명칭인데, 당시 영국 팝 음악 시장을 주도하고 있던 스타일은 신시사이저와 시퀸서가 만들어 내는 전자음 위주의 음악이었다. 스미스의 음악은 당시 이런 주류 음악 산업의 배경 대한 신선한 대안을 드러내고 있었다.
팀의 핵인 보컬 모리시와 기타리스트 자니 마는 밴드의 지향점을 규정한다.

팀에서 작사와 보컬을 맡고 있는 모리시[본명 스티븐 패트릭 모리시(Morrissey);1959-]는 천부적인 언어 능력을 소유한 음악인 이전의 문학도이다. 그의 정신적인 우상이기도 한 제임스 딘을 닮은 창백한 이미지는 입 안에서 구르는 듯한 맬랑꼴리한 느낌의 보컬과 결합하여 기존 록 음악의 ‘샤우트’한 거친 록 음악 특유의 마초쉽과는 거리가 멀었다. 모리시의 공연을 보면서 ‘록 스타’라는 이미지는 오간데 없고 ‘동네 이웃의 친한 오빠’라는 친근한 이미지로서 다가온다. 그저 길을 지나치다가 쉽게 마주치는 그런 수줍은 청년 말이다.

그의 노래는 멜로디가 있다. 다시 말해 모리시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된다. 모리시의 보컬은 결코 넘치거나 나서지 않는다. 답답할 정도로 제한된 음정 폭(3도에서 길어야 5도)에서 보컬을 구사한다.

그의 보컬은 스미스의 음악 전체에서도 일관된 성격을 유지한다. 그는 명백한 ‘팝’주의자이다. 그의 음악적 자양분은 멀리는 50년대 버디 할리가 보여준 록커빌리의 이미지에서 60년대 크루닝 창법을 통한 스탠더드 팝, 걸 그룹, 그리고 70년대 쇼킹한 스테이지 매너를 과시한 뉴욕 돌스와 데이빗 보위의 글램, 그리고 섹스 피스톨스의 폭력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모리시의 가사 속엔 사춘기 소년의 ‘어찌할 줄 몰라 망설이는’듯한 수줍음(추억의 책갈피 마냥)과, 제임스 딘의 ‘이유 없는 반항’ 마냥 독설 어린 객끼, 여기에 문학도다운 탁월한 언어 감각이 오밀조밀하게 거미줄처럼 짜여 있다. 흔히 들을 수 있는 팝 음악의 ‘남녀 상열지사’류의 가사도 모리시에겐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론 처절할 정도로 비수를 품은 폭력성은 그의 또 다른 면모이다. 그는 한 때 펑크 매니아라고 자처할 정도로 어린 사춘기 시절 펑크 음악에 매료됐었다. 뉴욕 CBGB 출신 뉴욕 돌스의 팬 클럽 회장까지 역임한 그는 어느 누구보다 펑크의 출현을 반겼었다. 밴드 내에선 그렇게도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노래를 부르던 그이지만 한편으론 ‘섹스 피스톨’이 보여준 ‘파괴의 본능’이 그의 가사 속에 녹아 있다.

기타와 작곡을 맡고있는 자니 마[본명: 조니 마어(Johnny Marr) ; 1963- ]는 밴드내의 음악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의 기타 소리는 록 음악 특유의 디스토션 사운드와는 거리가 먼 크린 톤의, 맑게 울리는 기타 소리이다. 손가락으로 기타 줄을 하나하나 튕겨가며내는 소리는 울리는 소리다. 그의 연주는 한음 한음이 또렷하다. 필요 없는 음의 낭비란 찾아 볼 수 없고 정갈하고 깔끔하다. 일렉기타 또는 어쿠스틱 기타를 번갈아 가며 사용하는 그의 기타소리를 두고 평론가들은 ‘쟁글쟁글(기타의 소리를 두고 표현하는 말)한 기타 소리가 나는 기타 팝’이라고들 한다.

자니 마의 기타는 지저분하고 거친 록의 본연의 느낌과 거리가 있다. 크린 톤의 기타 음은 기존 밴드 내에서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쟁쟁한 기타리스트의 이미지와는 확연히 다른, 단지 모리시의 보컬을 든든히 받쳐주는 반주자의 역할에 가깝다. 리듬 웍이 강조되는 그의 기타 연주는 롤링 스톤의 키스 리처드에 비견될 수 있다. 베이스 주자인 엔디 루어크와 드러머 마이크 조이스의 연주 역시 파묻혀 버리지 않고 정확하고 또렷이 들린다. 과거 아트 록 그룹 록시 뮤직이나 재즈 록 밴드 스틸리 댄의 음악에서 느끼는 스튜디오 작업의 정확함과 치밀성이 스미스의 음악에도 살아있다. 각각의 소리가 조화롭게, 그러면서도 어느 하나 무시됨 없이 명료하게 들려온다.

이런 자니 마가 제시한 스미스의 음악 방향은 모리시의 음악관과 판이하다. 자니 마의 연주에 밀도를 둔 치밀한 스튜디오 작업을 선호하는 반면 모리시는 ‘엘리트’ 적이며 권위적인 록의 기존 이미지’를 증오하는, ‘팝’ 순수주의자이다. 스미스만의 독특한 색깔이란 바로 이들 모리시와 자니 마가 보여준 ‘앤티 록’과 ‘앤티 팝’간의 묘한 긴장관계의 존재일 것이다. 그들이 보여준, 결코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이런 밴드 내의 국면은 분명 본격적인 영국 얼터너티브 씬의 출발을 알리는 심상치 않은 징조였다.

The Smiths – Discography

그들의 활동은 1982년부터 1987년까지 만5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다. 자니 마와 모리시의 묘한 대립관계는 인디 음악계가 배출한 훌륭한 성과였을지 몰라도, 팀의 지속에는 확실히 걸림돌로 작용했다. 이들은 활동한 기간동안 4장의 정규 앨범과 3장의 베스트, 미발표 모음곡 집을 내놓는다. 그리고 몇몇의 앨범에 미수록된 싱글들을 활동 기간 내내 발표한다.

그들이 발표한 곡들은 영국 내에서 싱글 차트의 중상위권을 유지하면서 자국 내의 고정 팬을 확보할 정도의 반응을 보여줬던 스미스였지만 이들의 음악은 미국에서는 미미한 반응을 가져왔다. 아마도 그들의 음악에서 표방하는 “영국적인 상황”의 강조는 미국인들에겐 낮설고 어렵게 받아졌으리라 생각된다. 더군다나 그들이 표방한 ‘팝’이라는 음악 번지수는 미국 인디 씬이나 미국 내 인디 음악을 틀어주던 거개의 대학 교내 방송국에서 결코 반길만한 것이 못 되었다. 더군다나 미국 문화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들어내는 모리시의 가사는 미국인들에게 그다지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리라 본다.

The Smith – (1984)

메이저 급 음반사의 도움 없이 ‘러프 트레이드’ 라는 인디 레이블을 통해 나온 그들의 데뷔 음반은 브리티시 얼터너티브의 출현을 예고했다. 앨범이 나올 당시 영국 주류 음악 씬이 신시사이저로 치장된 기계 음이었던 반면에 이들의 음악은 지극히 소박하고 투명했다. 물론 스트링이나 피아노가 가세된 ‘틴 팬 앨리’ 류의 팝 음악이 아닌 과거 초기의 비틀즈나 롤링 스톤즈가 그랬듯이 ‘밴드 편성의 팝’이었다. 롤링 스톤지와의 인터뷰에서 자니 마는 ‘우리가 이런 음악을 시도하기 전에는 아무도 이런 식의 기타 반주에 멜랑꼴리한 팝 음악을 연주하는 밴드들은 없었다’고 얘기한다.

82년 클럽 라이브 무대를 통해 데뷔한 이들은 83년 러프 트레이드를 통해 첫 싱글 “Hand in Glove”를 내놓으면서 영국 음반 시장에 공식적으로 데뷔한다. 가사 내용 중 ‘호모 섹슈얼리티를 나타냈다는 점이 논란이 된 이 곡으로 바야흐로 언더그라운드 씬의 ‘스미스 열풍’을 예감케 한다. 소녀 취향의 팝 넘버인 그들의 두 번째 싱글 “This Charming man”은 영국 팝차트 25위까지 진출한다. 모리시의 창백하고 풋풋한 이미지는 소녀 팬들의 모성애를 자극했다. 그러나 아동 학대 내용을 다룬 “Reel around fountain”과 무어인(북 아프리카 아랍인과 베르베르족의 혼혈 인종)의 손에 살해 당한 아이를 보고 절규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린 “Suffer little Children”에서 보듯 그들의 음악이 표현 대상은 핑크빛 사랑 타령을 넘어 추악하고 암울한 사회 현실마저 적나라하게 투영시킨다. 커다란 뿔태 안경을 끼고 보청기를 낀 채 수선화를 뒷 주머니에 꽂고(스미스 시절 모리시의 전형적인 무대 매너)무대에 등장하는 모리시가 우스꽝스럽지 몰라도 그의 가사에서 보이는 세상에 대한 시선은 냉정하다.

Meat is murder – (1985)

모리시의 ‘채식주의’선언의 계기가 된 음반. 만인의 화제로 떠오른 그들의 두 번째 앨범은 전작 앨범의 노선을 그대로 유지한다. 성과면에선 전작에 비해선 다소 뒤떨어졌다. “That joke isn’t funny anymore”가 싱글 커트 됨.

The Queen is Dead – (1986)

그들의 대표적인 명반으로 꼽히는 수작. ‘여왕은 죽었다’라고 하는 앨범 타이틀에서 느끼듯이 전작들에 비해서 거칠게 몰아치는 첫 트랙부터 본 앨범의 진가를 기대하게끔 한다. 영국 왕실의 부패를 꼬집으며, 왕실의 실상을 모리시의 탁월한 글쓰기 실력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아마도 “The queen is dead” 만큼 자니 마와 모리시의 특성의 뚜렷이 대비를 지닌 곡도 없을 것이다. 강한 백 비트에 실릴 우렁찬 기타 리프는 단순한 코드 진행과 반복되는 패턴으로 지속되지만 어느 스미스 싱글보다도 강렬하다. 단연 자니 마의 기타 연주는 본 곡에서 가히 압권이다. 앨범 시작을 강한 파워로 몰아 부친 이 곡을 통해서 스미스의 음악적 뿌리가 펑크에 있음을 다시금 증명한다.

스미스의 특기인 전형적인 팝 역시 “I know it’s over”에서 들려주는 멜랑콜리한 보컬은 여전하다. 스트링 편곡이 선명한 본 앨범의 첫 싱글 커트 곡인 “There is a light never go out”와 “The boy with the thorn in his side”는 모리시가 표방하는 “영국의 특수성”으로 비쳐진다. 그는 그의 가사를 통해 영국의 인종문제, 계급, 사회 부조리를 그만의 위트와 수사법으로 표현하고 있다.”Queen”이라는 명사의 쓰임에서 보듯이 그의 노래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영국 사회이다.

그의 가사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 이런 그의 글 쓰기에서 나타나는 상황적 고려의 필요성 때문일 것이다. 자니 마의 기타 연주는 이전보다도 훨씬 다채롭다. 어쿠스틱과 일렉트릭 기타를 번갈아 가며 만들어내는 사운드가 돋보이는 “Bigmouth Strikes Again”를 비롯 50년대 록커빌리 사운드의 숨결이 느껴지는 “Vicar in a Tutu”에서도 자니 마의 기타 연주는 유난히 돋보인다. “There is a light never go out”와 “The boy with the thorn in his side”에서 보여준 세련된 편곡 솜씨는 ‘스미스’의 음악이 ‘과연 기타 팝’임을 여실 없이 증명한다.

스미스의 모든 것을 유감없이 드러낸 본작은 그들의 1집,2집 앨범을 들은 스미스 팬이었다면 ‘정말로 이젠 모든 것을 거침없이 드러냈다”라는 표현이 어울릴만한 확실한 그들의 음악 색깔을 규정한다.

“Strangeway-Here We come” – (1987)

본 앨범을 내기 바로 직전 스미스는 갑작스런 해산을 선언한다. 이미 전작 “The Queen is dead”를 제작할 당시부터 자니 마와 모리시와의 밴드 내 분열은 표면화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둘 간의 음악 성향 차이로 인해 팀 해산을 맞는다. 모리시는 자니 마의 외도( 그는 당시 록시 뮤직에 있던 브라이언 페리나 밀리 브래그와 음악적 교류를 나눴다)가 못 마땅했고, 자니 마 역시 모리시의 60년대 팝 음악에 심취한 태도가 못 마땅했었다. 둘 사이의 음악적 견해차는 결국 본 앨봄 발매를 몇 주 앞두고 자니 마의 밴드를 떠나겠다는 선언으로 이어진다. 모리시는 주저 없이 팀을 해산하고 솔로 활동에 나서게 된다. “I started Something I couldn’t finish”와 “Last night I dreamt that someday loved me”가 싱글로 커트 됨.

Single Collection

Hateful of hollow (Single B-side collection)
The world Won’t listen (single collection-UK version)
Louder than Bombs (single collection -US version)

이외에도 정규 앨범엔 포함되어 있지 않으나 싱글로 발표되어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Panic”은 미국 문화로 범벅된 영국의 상황을 인종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을 각오를 갖고 만든 곡이다. “DJ를 교수형에”라는 독설 찬 그의 항변은 그가 미국 문화에 대해 가지고 있는 반감의 정도를 말해준다. “Heaven knows I’m Miserable now”는 영국 내의 사회문제인 실업을 모리시의 위트 어린 가사로 표현해냈다.

-자스보이- ( jassboy@hanmail.net )

[지나가다] [불평]ah you jassboy -whatever you are- so much to answer for… This sounds half-baked, or half-hearted at its best! 그리고 정정: 무어인이 아니라 60년대 맨체스터에서 있었던 엽기 연쇄살인사건인 무어스 머더(Moors Murder)를 말하는 것. 무어(스)는 그 지방 외곽의 황량한 들판을 지칭. -11월10일-
[lupin] 예전 로저 샤툭이 샤드백작-후작인가? 가 무어스 살인사건과 테디번디 살인사건의 원인 제공자라 했는데 그무어스가 그 무어스군요.. -11월10일-
[lupin] 윗글 쓰신분 =자스보이님딴엔 정성껏 동아 대 백과사전 찿아가며 쓰신 무어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지나가다님의 글을 읽고 다시보니 참 쓸쓸 하네요.. -11월10일-
[lupin] 스미스의 패닉은 들을때마다 딴나라당 선거 유세에 쓰이면 딱이겠다는 생각이…hang the dj,hang the dj -11월10일-
[moz] Hang the blessed DJ~ 한때 제 시그내춰로 쓰기도 했던 문구였습니다. 아~ 토요일 날도 좋은데 저녁때 웬 생일파리에 딸려나가야 하는군요. 고양이 산책이나 시켜야 겠다. -11월10일-
[moz] 선거캠페인쏭 말이 나와서 생각난건데 한때 부쉬녀석(애비부쉬)이 선거캠페인쏭으로 토킹헤즈의 Dont worry about the government를 썼다는군요. 이에 토킹헤즈 측은 it’s bullshit이라고 짤막하게 논평하였답니다. -11월10일-

디스코그래피
1984 The Smiths Sire
1985 Meat Is Murder Sire
1986 The Queen Is Dead Sire
1987 Strangeways Here We Come Sire
1988 Rank [live]

링크
Fan Page
다음의 스미쓰 카페
morrissey-solo.com/
Johnny Marr의 공식싸이트
elmoz의 팬페이지
haine의 팬페이지
SmithyteriaCOOL!!
Johnny Marr 키타탭
Johnny Marr와의 인터뷰

80년대, 이런 음악도 있다.

Date : 2001-09-29
Writer : 조은미  
jamogue@tubemusic.com
Illustrator : 조미영 narara@tubemusic.com


9월 초 VH1은 ‘Top Eighty Of The 80s’이란 이름 아래 80년대 대표적인 80곡을 선정하여 발표했다. 그들의 선정 기준은 80년대 혁신적이고 중대했던, 그리고 많은 논의가 이뤄졌던 곡들을 중심적으로 다룬 것. 당연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음악들이 여기 80곡에 포함돼 있다.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마돈나(Madonna)로 대표되는 MTV 시대의 리더들을 비롯해, 80년대 메탈 씬의 굵직한 흐름을 이뤘던 데프 레퍼드(Def Leppard), 포이즌(Poison), 본 조비(Bon Jovi), 스키드 로우(Skid Row)와 같은 LA 메탈 밴드들, 그리고 뉴 웨이브 후기에 등장한 컬쳐 클럽(The Culture Club), 듀란 듀란(Duran Duran), 아하(A-Ha)와 같은 로맨티시즘 밴드들이 그들이다. 그 나머지 80곡을 이루는 이들 역시 고개를 끄덕끄덕할 만한 이름들이다. 그리고 프로그레시브 일렉트로닉 밴드 아트 오브 노이즈(Art Of Noise)나 실험적인 펑크 밴드 큐어(The Cure)와 같은 영국 밴드와 미국 언더그라운드 펑크 밴드 데보(Devo), 그리고 1980년 [Boy]를 통해 등장한 U2의 이름은 그 주요 흐름의 바깥에서 만날 수 있는 특별히 반가운 이름들이다.


그러나 80년대 모든 음악이 MTV와 댄스 팝, 로맨틱 뉴 웨이브, 팝 메탈로 채워졌던 것은 아니다. 가장 대중적인 음악이 성공한 음악이었던 80년대에도 실험적인 음악은 존재했다. 이미 얼터너티브의 원천이 80년대 초부터 형성 되기 시작했으며, 언더그라운드, 인디 씬에서는 메인스트림과는 별도의 특징적인 사운드가 마련되고 있었다. VH1의 선정 리스트에는 R.E.M.의 이름은 빠져 있다. R.E.M.의 대중적인 성공은 90년대 이르러 두드러졌지만 현재 시점에서 80년대를 되돌아 볼 때 그들은 이미 중요한 밴드였다. 즉, VH1의 ‘Top 80’ 선정 기준은 현재로부터 과거를 되돌아 보는 관점이 아니라, 당시 가장 대중적이고 성공적이었던 곡들에 중점을 둔 것이다. 그렇기에 80년대 영국 음악의 주요 흐름을 이뤘던 슈게이징이나 80년대 중후반 미국 언더그라운드에서 움트기 시작한 노이즈/드림 팝 등도 이 리스트에서는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느 시대나 인디, 언더그라운드 씬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 적합한 예로 들 수 있는 것은 이제 누구나 알고 있는 너바나(Nirvana)일 것이다. 인디 레이블 서브 팝(Sub Pop) 출신의 너바나는 90년대 초 록 씬은 물론 문화 전반에 걸쳐 메인스트림을 주도했다. 언제나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는 인디, 언더그라운드(적인) 음악을 듣는 일은 메인스트림에서 듣지 못했던 남다른 사운드를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이 열 장의 앨범이 80년대 그러한 음악을 온전히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례가 될 뿐이다. 많은 아티스트의 이름과 그들의 앨범이 여기서 또 누락되기는 마찬가지다. 뉴 오더(New Order)나 R.E.M 등 역시 꼭 거론해야겠지만 되도록 국내에 소개가 덜 된 아티스트를 중심으로 (너무도 단촐한) 10장을 선정했다.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것은, ‘Top 10’이 아니라 ‘열 개의 추천작’일 뿐이라는 점이다.


Cocteau Twins [Treasure] (1984)
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가장 독특한 밴드 중 하나인 콕토 트윈스(Cocteau Twins)의 세 번째 정규 앨범. 로빈 거스리(Robin Guthrie)의 부드럽게 흐느적거리는 기타, 사이몬 레이몬드(Simon Raymonde)의 낮은 베이스 연주, 그리고 여성 보컬리스트 엘리자베스 프레이저(Elizabeth Fraser)의 아련한 보컬이 어우러져, 어두운 듯하면서도 신비로운 사운드를 연출해 낸다. 낮은 베이스 연주와 달리 엘리자베스의 보컬은 대기를 부유하는 듯하다. 관능적인 듯하면서 짙은 허무의 인상을 드리우고 있는 그녀의 보컬은 여러 번의 보컬 더빙을 통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며, 때로는 모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다양한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는 보컬리스트 중 하나. 이러한 인상은 앰비언트적인 요소가 덧입혀지면서 더욱 짙어진다. 콕토 트윈스는 마이 블루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를 비롯한 드림 팝 밴드들처럼 노이즈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장 최면적인 사운드를 들려주는 이들은 일련의 드림 팝 밴드들 중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초창기 콕토 트윈스는 다소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듯한 사운드를 들려줬지만 이 앨범을 거치면서 그들은 한결 멜로디컬하고 부드러워진 사운드를 들려준다. 이 앨범은 콕토 트윈스가 그들의 독특한 사운드의 완성 단계에 접어든 시점에 놓인 앨범. 몽환적이고 모호한 사운드, 그리고 매혹적인 보컬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이 그들 초창기의 황폐한 느낌을 완전히 저버린 것은 아니다. 초기처럼 청자들을 시험에 빠져들게 하는 혼잡한 사운드는 아니지만 앨범 저변을 이루는 또 하나의 줄기는 황폐함이다. 그 때문일까. 콕토 트윈스의 사운드는 각 앨범마다 큰 변화를 거치지 않고 일관된 흐름을 지니고 있다.


Smiths [The Queen Is Dead] (1986)
80년대 영국 인디 팝을 말할 때 빠질 수 없는 이름, 그래서 이제는 국내 팬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밴드, 스미스(The Smiths). 특히 이들은 당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가장 신망을 얻었던 밴드 중 하나다. 국내 팬들에게는 보컬리스트 모리시(Morrissey)가 더욱 잘 알려진 이름이지만 기타리스트 쟈니 마(Johnny Marr)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모리시가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스미스의 가사를 전담했다면 쟈니 마는 명석한 작곡력으로 그것을 완성 지었다. 그러나 이들 화려한 콤비도 오래 가지 못했고 1987년 쟈니 마가 스미스를 떠나면서 밴드는 해체됐다. 이 앨범은 팀이 와해되기 전에 발표한 앨범으로 가장 스미스 사운드에 충실한 앨범. 해체까지 얼마 안 남은 상황이었지만 이 앨범에서 스미스는 비약적인 사운드를 보여주는데, 그들의 어떤 앨범보다도 가장 록킹한 사운드를 담고 있다.


Sonic Youth [Daydream Nation] (1988)
뉴욕 아방가르드 씬의 대표적인 밴드 소닉 유스(Sonic Youth). 이 앨범은 많은 사람들이 소닉 유스의 대표작으로 여기는 작품이다. 6, 7분대의 곡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는, 70분이 넘는 대작에 가까운 앨범. 전위 예술을 방불케 하는 난해한 사운드를 특징으로 삼고 있는 소닉 유스의 실험적인 태도는 이 앨범에서도 변함없지만 단촐한 앨범 커버처럼 그 어느 때보다 귀에 잘 들어오는 연주를 들려준다. 전작들에 비하며 상당 부분 난해한 사운드가 정제돼 있는 느낌. 물론 ‘Silver’와 같은 펑크 지향적인 사운드나 3부작 ‘Trilogy’와 같은 곡은 여전히 소닉 유스의 기본은 실험성에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XTC [Skylarking] (1986)
70년대 중반 결성돼 영국 인디 씬을 변함 없이 지켜온 밴드 중 하나. 비치 보이스(Beach Boys)와 비틀스(The Beatles) 풍의 60년대 팝/록으로부터 영향 받은 XTC는 70년대 말 뉴 웨이브의 영향까지 받은 사운드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신디사이저의 쓰임새나 비치 에브뉴 보이스(Beech Avenue Boys) 보컬 역시 뉴 웨이브적인 감수성을 품고 있다. 진지하고 실험적인 사운드를 애호하는 이들에게 이들의 음악은 다소 유치증에 걸린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60년대 팝적인 감각과 기타 사운드를 적절히 섞은 사운드만큼은 언제 들어도 경쾌하다. 거기에 혼과 스트링이 더하여진 사운드의 묘미도 쏠쏠하다.


Meat Puppets [Meat Puppets II] (1983)
소닉 유스와 함께,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이 흠모했던 밴드 중 하나로 알려지면서 뒤늦게 국내에도 알려진 미트 퍼펫츠(Meat Puppets)의 두 번째 앨범. 매번 커트 커크우드(Curt Kirkwood)의 아트웍으로 채워지는 앨범 자켓으로도 흥미를 갖게 되는 밴드다. 이 앨범에는 너바나(Nirvana)가 커버하기도 했던 ‘Plateau’가 수록됐다. 너바나처럼 3인조 밴드인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들의 사운드와 너바나 사이에서 충분한 공통점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기타와 보컬을 맡고 있는 커트 커트우드의 보컬마저도 흡사 [Unplugged] 앨범에서의 커트 코베인과 닮은 듯하다. 이 곡을 들어보면 커트 코베인이 가능한 원곡의 느낌을 헤치지 않으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쉽게 무엇이다, 정의 내릴 수 없는 독특한 사운드를 담은 이 앨범은 밴드 지향적이기보다는 싱어 송라이터의 앨범에 가깝다. 얼터너티브, 그런지의 노이지 기타는 이 앨범에서도 이미 드러나고 있지만 결코 과도함은 없다. 마치 닉 케이브(Nick Cave)의 온화해진 우울하고 느린 펑크를 듣는 듯하다.


The Jesus & Mary Chain [Psychocandy] (1985)
벨 앤 세바스찬(Belle & Sebastian)을 통해 이제는 결코 낯설지 않은, 영국 대중음악의 또 다른 중심지 글래스고우 출신의 지저스 앤 메리 체인(The Jesus & Mary Chain), 그들의 데뷔작이자 곧 마스터피스. 지저스 앤 메리 체인은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과 함께 80년대 영국 슈게이징 팝을 이끌었던 글래스고우 출신의 밴드. ‘Just Like Honey’, ‘The Hardest Walk’, ‘You Trip Me Up’와 같은 곡들은 지저스 앤 메리 체인의 사운드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곡들이자 슈게이징 사운드의 전형을 보여주는 곡들이다.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음울한 사운드와 달리, 다소 멜랑콜리하지만 팝의 감각에 충실한 멜로디 라인은 듣는 사람의 귀를 부담 없게 한다.


Yo La Tengo [Ride The Tiger] (1986)
사실 욜 라 텡고(Yo La Tengo)는 80년대 중반에 결성된 90년대의 밴드라 하는 것이 더 옳을 듯하다. 더군다나 이들은 여전히 미국 인디 씬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밴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인디 씬의 많은 기타 팝 밴드에게서 들을 수 있는 쟁글쟁글거리는 기타 리프는 이 앨범에서도 변함 없다. 이제 미국 인디 씬의 거장이 되어버린 그들이지만 이 데뷔작을 발표할 당시만 하더라도 별반 다를 것은 없이, 소박하고 단순하고 귀여운 사운드를 들려준다. [I Can Hear the Heart Beating As One]과 같은 보다 진중해진 후기 드림 팝 사운드를 기대했다면 이 앨범은 쟁글 팝 사운드에 더욱 가깝다.


My Bloody Valentine [Isn’t Anything] (1988)
슈게이징(Shoegazing)을 논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의 두 번째 앨범. 단 세 장의 정규 앨범에서 이들의 대표작을 논할 때 가장 많은 표를 받는 것은 마지막 앨범인 [Loveless]다. 소음과도 같은 기타 노이즈를 빼면 이들 사운드의 절반이 날아가 버릴 정도로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주요 토대는 기타 노이즈다. 그러나 이들의 기타 노이즈는 노이지함 그 자체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닌, 공간적인 개념으로 다가온다. 즉, 이들 음악의 바탕을 이루거나 혹은 뒷배경이 되는 토양인 것. 가끔은 지나치게 귀에 거슬리는 듯한 기타 노이즈에 예민해질 수 있으나 몽환적인 선율에 귀를 기울인다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앨범이다.


Galaxie 500 [On Fire] (1989)
미국 인디 팝 씬의 주요 아티스트로 떠오른 데이몬 앤 나오미(Damon & Naomi)의 전신이었던 갤럭시 500(Galaxie 500)의 두 번째 앨범. 현재 데이몬 앤 나오미는 슬로우코어 위주의 멜랑콜리한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다. 그것은 모하비 3(Mojave 3)를 연상 시킬 정도로 부드럽고 상냥하지만, 갤럭시 500 시절 이들의 사운드는 그보다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며 또한 더욱 실험적이었다. 데이몬 앤 나오미가 따스한 인간미를 느낄 수 있는 어쿠스틱 포크에 가까운, 가사 전달 위주의 싱어 송라이터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 달리, 갤럭시 500은 사운드적인 측면에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데이몬 앤 나오미의 사운드의 연장선 상에 놓인 앨범이라 여긴다면 그것은 완전히 오해다.


Bauhaus [Mask] (1981)
포스트 펑크 씬의 큐어(The Cure)와 조이 디비전(Joy Division)으로부터 파생된 고스 록(goth rock)의 영향권 아래 놓여있는 바우하우스(Bauhaus)의 두 번째 앨범. 장대한 바로크 풍의 편곡과 우울한 신디사이저, 프로그레시브한 기타 연주 등, 언뜻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요소들이 함께 하는 이들의 음악은 결코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것은 70년대 프로그레시브의 왕국이었고 이후 큐어와 조이 디비전과 같은 밴드들이 영국에 존재했기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오프닝 트랙 ‘Hair Of The Dog’부터 듣는 이를 주춤거리게 하지만, 훵키/사이키델릭한 기타 리프, 스토리텔링하는 듯한 보컬을 지닌 ‘Passion Of Lovers’와 ‘Of Lillies And Remains’ 그리고 초창기 펑크의 잔향이 남아있는 ‘Dancing’ 등은 아주 낯설지 만은 않다. 고딕적인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는 이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장애물로 놓여있지만, 이 앨범은 80년대 영국 음악의 또 다른 면을 들여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각종 장르 설명

다음은 음악전문 도서출판 꾼의 브리티시 모던 록과 Hot Music 1996년 6월의 내용중 일부입니다

1. Ambient

70년대 브라이언 이노(Brian Eno)가 만들어낸 장르로써 90년대 들어 다시 관심을 끌고있다. 거의 명상음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음의 변화가 적고 환상적인 분위기로 일관 하는데 이런 사운드는 청취자의 취향에의 잠재의식 속의 어두운 일면과 청자들의 청력을 몇시간동안 차지하게 만든다. 대표적인 뮤지션으로는 Brian Eno, Aphex Twin, Orb등이 있다.

2. Arsequake

87년에서 83년의 브로드 바톰드 브레이스(Broad-Bottomed Brace)로 지칭된 그룹들, 즉 The Young Gods, Big Black 이 그 대표적인 부류이다. 극단적인 기계음과 강렬한 비트, 기괴함을 주무기로 하는 헤비 록을 추구한다.

3. Baggy

황량한 인디 현상을 내포하고 있는 음악 부류로서 이펙트 페달과 끊어질 듯 이어지는 노래로 구성되어 있으며 거기에 더하여 드러머의 백 비트가 어우러진다. Shoegazing이 중산층을 겨냥한 음악가라고 한다면 Baggy는 명백히 노동자 계층을 위한 음악 분야이며 동시에 침체된 분야라 할 수 있다. The Stone Roses, Happy Mondays, Charlantans, Blur 등이 이에 속한다.

4. Drip Rock

Stephen ‘Tin Tin’ Duppy, Prefab Sprout, Felt, Aztec Camera 등이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분야로 이 장르의 음악에는 여러가지가 복합되어져 있지만 대체적으로 싱어로 꽉 채운 듯한 음악과 로맨틱스럽게 꾸민 듯한 풍이 얽혀 있는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5. Dub

레게 음악과 트립 합의 중간쯤 된다고 할까? 세상에서 가장 환상에 잘 빠져들게 만들어주는 장르로 살인과 같은 세상의 여러 추악함을 잊게 해준다. 이 분야의 음악이 긍정적으로 적용할 때는 듣는이의 머리 속을 재정리 할 수 있게하지만 부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때는 나태하고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마치 마약과도 같은 이 음악의 대표 밴드로는 Tortois가 있다.

6. Glam Rock

David Bowie, Marc Bolan 으로 대표되어지는 음악 장르로 기괴한 분장과 화장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었으며, 70년대 초반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 뒤에는 Wizzard, The Sweet, Gary Glitter, The Bay City Rollers등이 활동했는데 이들이 노쇠함에 따라 점점 사그라 들어가고 있다.

7. Indie Rock

펑크 록이 인디 레이블에서 발표되면서 대규모 레코드사나 거창한 기계의 도움을 받지 않은 7인치 레코드의 붐이 일기 시작했다. 이런 소규모 레코드 회사들이 인디 록의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최근의 인디 록은 어떤 형태로든 메이저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인디 록이라고 할 수 없다. 요즘의 인디 라는 것은 찢어진 청바지와 가죽 옷을 몇년동안 입고 싸구려 맥주를 플라스틱 컵에 마시는 사람들을 말한다. 대표 밴드를 꼽는다는 것이 무의미하나 어떤 잡지에서는 스톤 로지스를 최고로 꼽고 있다.

8. Jungle

계속되는 음악의 발전은 특히 댄스 음악의 분야에서 그 강세가 돋보이는데 레이브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한 형태인 정글은 BPM 250 이상의 극단적인 빠름과 일정한 포인트음의 딜레이 효과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미 외국에서는 중요 장르로 자리집은 만큼 그 파급 속도가 빠른 이 장르에는 Goldie 라는 카리스마적인 인물이 있다.

9. Merseybeat

초기 레코드사의 횡포가 점차 심해지는 가운데, 리버풀은 비틀즈의 성공이후 즉시 여타 밴드들로 꽉 채워졌다. 그 결과 Gerry & The Pacemakers, Billy J.Kramer & The Dakotas 등이 머시비트류로 구분되어졌다. 이 장르는 로큰 롤과 재즈의 한 형태인 스키플(Skiffle), 컨트리적인 하모니가 조화된 장르로서 블루톤스(Bluetones), 라스(Lars), 캐스트(Cast) 등이 이 장르의 인물로 분류된다.

10. New Romantics

60년대 초반 처음으로 시작된 이후 상류층과 같이 되고 싶은 욕망이 패션으로 발달된 장르이다. 그후 Spandau Ballet 가 인기를 끄는동안 영국의 모든 젊은이들이 18세기의 댄디나 공립 학교 학생들처럼 보일 정도로 이 장르의 인기는 대단했다. 깔끔하고 귀족적인 외모와 낭만적인 멜로디, 퇴페적인 분위기로 한 시대를 풍미 했었다. 대표 밴드로는 Abc, Duran Duran, Japan 등이 있다.

11. New Wave

70년대 말 한창 득세하고 있던 펑크는 그 과격함과 무례함 때문에 사람들에게 외면 받기 시작하였고, 세상은 펑크가 처음 등장했을 때와는 달리 많이 변했다. 사람들은 좀더 살기 좋아짐에 따라 듣기 좋은 것을 찾기 시작했고 그런 취향에 편승해서 아름답고 편안한 사운드를 들려주는 밴드들이 등장했다. 이 장르에는 XTC, The Knack 등 우리 귀에 친숙한 밴드들이 많이 들어 있다.

12. Pub Rock

주로 퍼브 록이라는 말은 주로 펑크 록 등장 이전인 70년대 전반에 클럽의 소규모 형태인 퍼브(Pub)를 중심으로 충실한 라이브 활동을 행했던 브리즐린 슈워츠와 독스 디럭스 등을 일컫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음악 장르로서는 과거의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퍼브에서 연주하는 뮤지션이라면 누구라도 퍼브록커이며, 퍼브록은 록에서 리듬 앤 블루스, 컨트리까지의 음악 장르를 불문하고 펼쳐졌다

13. Riot Grrrl

맹렬 여성 붐과 때를 같이한 페미니즘을 한단계 발전시킨 장르이다. 공격적이고 남자들을 능가하는 펑크에 기반을 둔 강력한 음악이 이들의 특징이다. 불투명한 앞날에 대한 불안을 대변한 장르로써 음악잡지의 평이나 그 밖의 모든 구속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 음악의 한 사조이다. 대표적인 밴드로는 Hole, Seven Years Bitch, Babes In Toyland 등이 있다.

14. Romo

로모가 로맨틱 모더니즘을 뜻하고 있음을 상기해 보면 알 수 있듯이 글램 록과 나르시즘, 뉴 웨이브 등으로 치장하고 싸구려 신서사이저와 값싼 립스틱에 대한 향수 등으로 그 속에 절대성을 내포하고 있다. 짙은 화장과 성을 종잡을 수 없는 외모등은 이들의 커다란 특징이다. 대표 밴드로는 Orlando, Hollywood 등이 있다.

15. Shoegazing

흔히 드림 팝이라고 불리우는 이 장르는 몽롱한 분위기와 퇴페적인 나른함을 특징으로 한다. 노이즈와 멜로디의 결합이라는 말로 설명되는 이 장르는 My Blood Valentine 이라는 대표적인 밴드를 가지고 있다.

16. Synth Pop

그룹 Cars 와 Gary Numan에 의해 쉽게 유명해진 음악 장르로 신디 팝이 뜻하는 바는 즉 OMD를 의미한다고 할 정도로 OMD는 이 장르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다. 전기타자수들처럼 쇠잔해져가고 있는 이 분야는 현재 샘플러의 활동만이 눈에 보인다. 대표적인 밴드로는 Depeche Mode, Yazoo, Human League, Erasure 등이 있다.

17. Techno

크라프트베르크의 영향하에 원래는 Detroit’s Derrick May, Kevin Saunderson과 Juan Atkins 에 의해서 만들어진 음악이다. 이 장르는 시카고의 하우스 사운드 보다도 더 최면적이며 반복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 요즘 거의 모든 전자 음악에 이용되어지고 있는 음악의 분야이다.

18. Trance

엔지니어 혹은 컴퓨터 음악을 하던 이들이 클럽에서 당시 유행하던 터크노 같은 음악보더 좀더 공격적인 음악을 만들어낸 것이 시초가 되었던 이 장르는 듣는 와중에 사람의 정신을 빼놓은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대뵤적인 밴드로는 Chemical Brothers, 808 State 등이 있다.

19. Trip Pop

흔히 브리스톨 사운드로 불리우는 이 장르는 최근 가장 각광받고 있는 장르이다. 테크노와 엠비언트, 60년대의 블루스, 재즈에 힙합 리듬이 섞인 이 장르는 퇴페적이고 나른한 분위기로 음악 팬들을 사로 잡으며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브리스톨 3총사로 불리우는 Massive Attack, Tricky, Postishead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20. Hardcore Punk

하드코어 펑크의 시초는 77년, 스토이크온 토렌트 결성을 모태로한 디스체야지의 앨범 “Why”부터 였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영국의 하드코어 운동에 가세했고, 이어 익스플롭티드의 앨범 “Troops Of Tomorrow”와 버빙검 출신의 4인조 그룹 G.B.H.의 앨범이 이러한 부류에 편승하였다. 84년 카오스 UK가 앨범 “Short Sharp Shock”를 공개했고, 85년에는 Amebix가 앨범 “Arise!”를 내놓아 하드코어 펑크 흐름을 계승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형성은 점차 메틀 사운드가 가미되면서 구체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 86년에는 Conflict가 앨범 “The Ungovemable Force”를 발표하면서 주류를 형성하였고, 87년에는 네이팜 데스가 앨범 “Skam”을, 89년에는 스나이프가 동명 타이틀 앨범을, 88년 Heresy가 “Voice Your Opinion”으로 91년에는 Extreme Noise Terror가 강력한 하드코어 사운드가 깃든 앨범으로 주목 받는다. 그러나 하드코어 펑크는 사운드의 극단적인 요소로 인해 더 이상 자리매김 하지 못한다.

http://community.shinbiro.com/@stage/genre/etc.htm#1

Violent Fem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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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olentfemmessydney90” by Casliber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80년대 미국의 대표적인 컬트밴드 Violent Femmes는 상업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음악적으로는 높이 평가받는 그룹이다. ’80년대 초반 Milwaukee에서 결성된 이들은 싱어/키타리스트 Gordon Gano, 베이스 Brian Ritchie, 퍼커션 Victor DeLorenzo 으로 구성되었다. The Pretenders의 James Honeyman-Scott의 눈에 띈 이들은 Slash와 계약을 맺고 1983년 셀프타이틀 앨범을 내놓았다. 이 앨범은 어린 청취자들의 심정적 동의를 얻어내기에 충분할만한 감성을 지닌 folk-punk 컬렉션이었다. 차트에 오른 곡은 한곡도 없지만 이 앨범은 틴아웃싸이더의 통과의례쯤으로 받아들여졌다. 십수년이 흐른후에 마침내 플레티넘을 기록하게 되었다.

1984년에 발표된 Hallowed Ground에서 Gano의 가사는 그의 뱁티스트적인 자세가 반영되어 있었다. 음악적으로는 보다 더 포크적이며 컨트리적인 면에 경도되어 있었다. Talking Heads의 Jerry Harrison이 프로듀스한 그들의 세번째 앨범 The Blind Leading the Naked는 이전 작품에 비해 보다 메인스트림 싸운드를 많이 도입하였다. T. Rex의 곡을 커버한 “Children of the Revolution”가 어느 정도 인기를 얻은 싱글이었다. 앨범이 발매된후 밴드는 잠정적으로 해산하였다. Gano는 1987년 그의 가스펠(!) 프로젝트인 The Mercy Seat와 함께 솔로앨범을 냈다. Ritchie역시 솔로앨범들을 발매하였다. 1989년 다시 뭉친 이들은 ’91년 Why Do Birds Sing?을 내놓았다. 이 앨범에서는 특이하게 Culture Club의 “Do You Really Want to Hurt Me?” 를 해체주의적인 관점에서 커버하였다.

1993년 컴필레이션 Add It Up을 발표하고 이번에는 DeLorenzo가 솔로앨범 작업에 열중하게 된다. 2001년 봄 The Femmes는 emusic.com을 통해 mp3로만 만들어진 앨범 Something’s Wrong을 발매하였다.

디스코그래피
1983 Violent Femmes Slash/Rhino
1985 Hallowed Ground Slash/Rhino
1986 Blind Leading the Naked Slash
1989 3 Slash
1991 Why Do Birds Sing? Reprise
1991 Debacle: The First Decade Slash
1994 New Times Elektra
1998 Rock!!!!! Cold Front
1999 Viva Wisconsin Beyond
2000 Freak Magnet Beyond

링크

Trash Can Sinatras

스코틀랜드 출신 인디팝 밴드 Trash Can Sinatras는 싱어이자 키타리스트인 Frank Reader가 주축이 되어 1987년 결성된 5인조 밴드이다. 처음에는 커버밴드(다른 유명한 아티스트들의 곡들을 연주하며 생활하는 밴드)로 시작하였던 이들의 음악인생은 한 지방술집에서의 공연모습이 Go! Discs 레이블의 사장 Simon Dine의 눈에 띄면서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그들의 뛰어난 첫싱글 “Obscurity Knocks”는 1990년에 발매되어 그들이 Aztec Camera, Orange Juice 등의 스코티쉬팝의 선배들을 이을 수 있는 뛰어난 적자임을 증명하였다. 두번째 싱글 “Only Tongue Can Tell”에 이어 그들의 데뷔 앨범 Cake가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영국과 미국 양쪽에서 모두 호응을 얻었는데 특히 대학가 래디오 방송에서 인기를 누렸다. 이 즈음 베이스를 맡았던 McDaid가 그룹을 떠났다. 1993년 그들의 두번째 앨범 I’ve Seen Everything이 발표되었지만 그 즈음 인디락계는 그런지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쟁글팝은 호응을 얻는데 실패했다.

라인업 : Frank Reader(v), John Douglas(g), Paul Livingston(g), George McDaid(b), Stephen Douglas(d)

디스코그래피
1990 Cake London
1993 I’ve Seen Everything Polygram
1996 A Happy Pocket Go Dis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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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one Ro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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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ne Roses-17-07-2012 Milan” by Alfio66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결성 : 1985년 영국 맨처스터
해체 : 1996년(최근 재결성)
멤버 : Peter Garner, Ian Brown, Mani, Reni, John Squire, Aziz Ibrahim, Robert Maddox, Andy Couzens

80년대 댄스비트에 대한 이해와 함께 60년대 스타일의 기타팝이 맛물려 스톤로우지즈는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영국 기타팝 씬을 정의하였다. 데뷰앨범은 맨체스터사운드의 시조가 되어 영국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1989년 계속해서 비슷한 맨체스터 사운들르 추구하는 the Charantas(U.K), Inspral Carpets와 the Happy Mondays와 같은 밴드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2집앨범을 내기까지 5년이나 기다려야 했고 2집 발매후 1년 반정도의 기간동안에 그들은 서서히 그 빛을 잃었다.

스톤로우지즈는 1985년에 학교룸메이트인 John Squire(기타)와 Ian Brown(보컬)이 만든 맨체스터에 기반을 둔 밴드 English Rose로부터 탄생하게 된다. 스톤로우지즈가 정식으로 만들어진 것은 Squire와 Brown이 드러머 Reni, 기타리스트 Andy Couzens 그리고 베이시스트 Pete Garner를 영입함으로 이루어진다. 그룹은 맨체스터 근교 창고에서 연습을 사직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룹은 전통적인 브리티쉬 60년대 기타 팝과 고쓰(Goth)록 냄새가나는 헤비메탈사이를 크로스어버시키기 시작한다. 1987년 Gouzens가 그룹을 떠나고 Ganer가 대신 그 자릴 대신했고 Mani가 뒤에 들어와 다시 기타를 맏는다. 그들의 첫번째 싱글 을 녹음하고 Thin Lne레코드의 주목을 받아 발매하게 된다. 87년이 끝나갈때 스톤로우지즈는 두 번째 싱글 을 발매하게 되었고 이 싱글은 기타팝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그룹이 앞으로 나가야할 방향을 설정해 주게 된다. 88년 가을에 밴드는 Silverstone레코드와 계약하게 되어 쉬운 곡조의 네오싸이키델릭 기타팝을 정의하게 되는 싱글 을 발매하게 된다.

발매후 얼마지나지 않아 본격적인 스톤로우지즈 시대를 열었다. 1989년 초 그룹은 맨체스터에서 런던까지의 공연이 모두 매진되는 성황을 이룬다. 5월달에 스톤로우지즈는 역사적인 앨범인 그들의 셀프타이틀 데뷰앨범을 내었고 그것은 60년대 기타 사운드의 편애성 뿐만아니라 컨템포러리 애시드 하우스의 리드믹한 감수성까지 보여 주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맹렬한 비난을 받게 된지만 곧 영국에서 그들과 유사한 사운드로 묶을 수 있는 밴드들이 나타나게 된다. 여름이 끝나기 전 스톤로우지즈는 록 앤 록과 애시드 하우스 문화를 융합한 맨체스터 사운드를 이끌게 된다. 세번째 싱글 는 처음으로 여름이 끝나기 전에 Top40에 오른다. 그리고 11월에 가 8위에 링크 된다. 를 발매하기전 그들은 Widnes의 Spike Island에서 자신들의 페스티발을 만든다. 그 콘서트에는 3만명 이상이 모여들었고 향후 5년동안 영국에서 그들의 마지막 콘서트가 될 것이란 것을 알게 해 준다. Spike Island이후 스톤로우지즈는 Silverstone 레코드와 법적 싸움에 말려들게 된다.

그룹은 Silverstone레이블을 떠나기 원했으나 레코드사는 그룹이 어떠한 앨범발매와 활동을 막는 법적 소송을 제기한다. 다음 2년 동안 밴드는 레코드사와 싸우는 동안 2집준비를 하게 되나 법정문제 때문에 어떠한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는 동안 몇 몇 메이저 레이블은 비밀스럽게 밴드와 협상한다. 1991년 3월에 소송은 끝이 나게되고 두 달후 그들은 Silverstone에 대한 소송에서 완전이 이겨 케펜 레코드와 계약을 한다. 다음 3년동안 스톤로우지즈는 미완성 태잎을 남겨둔채 2집작업을 드디게 진행시킨다. 이 기간 동안 그룹은 언론에게 노출되는 것을 자제하고 축구를 관전하는 것 이외의 어떠한 외부 활동을 하지 않음으로 신비감을 유지하게 된다. 마침내 1994년 봄, 그룹은 앨범을 완성시키고 게펜은 스톤로우지즈의 2집 SECOND COMING을 가을에 발매한다. 밴드의 컴백 싱글 는 11월 초에 Radio One에서 처음 들려진다. 이 싱글은 냉담한 반응을 얻었고 Top10에 몇 주 밖에 머무르지 못한다. 스톤로우지즈는 1995년 초 앨범홍보를 위한 국제적인 튜어를 계획하게 되나 막판에 몇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튜어떠나기 전에 Reni가 탈퇴함으로 드러머없이 튜어를 하게 될 상황이었다. 그래서 Rebel MC에서 연주했던적이 있던 Robbie Maddix를 영입하고 영입후에 또 다시 John Squire가 오토바이사고로 쇄골이 부서지는 사고를 당해 이것을 마무리 짓고 난 다음에야 짧은 일정으로 미국튜어를 할 수 있었다. Squire의 사고로 25회 Glastonbury 페스티발에 헤더라이너로 초청된 것을 취소 할 수 밖에 없었고 이것은 영국에서 데뷰앨범 발매후 5년동안의 첫 콘서트가 될뻔 했다. Squire가 회복할때 쯤에는 이미 스톤로우지즈의 인기는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동료들, the Charantas(U.K), the Happy Mondays를 만들었던 보컬리스트 Shaun ryder등은 예상치 않았던 성공적인 컴백에 존경의 표시를 한다.

스톤로우지즈는 1995년이 끝나갈 즈음 1990년 이후로 처음있는 영국튜어를 하기전에 키보디스트를 영입하고 떠난다. 96년 봄에 John Squire는 좀더 활발한 밴드활동을 위해 새 밴드를 결성하고 스톤로우지즈를 탈퇴할 것을 알린다. 스톤로우지즈는 새로운 기타리스트를 영입해 그들의 의지를 불태우나 그해 10월에 밴드를 해체 시킨다. Squire는 새밴드 Seahorses는 97년 6월 데뷰앨범을 발표했고 그러는 동안 Brown은 솔로 데뷰앨범 UNFINISHED MONKEY BUSINESS를 98년 초에 발표하게 된다. 스톤로우지즈는 맨체스터 사운드의 이정표를 세운 역사적인 밴드이며 그들의 데뷰음반은 영국역사상 가중 뛰어나 데뷰음반으로 칭송받고 있다.

The Gate Of Rock(http://my.netian.com/~clubnono)에서 펌

디스코그래피
1989 The Stone Roses[US]
1989 Stone Roses [UK]
1994 Second Coming

링크
www.thestoneroses.co.uk

Sonic Yo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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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ic1991b” by Original uploader was Channel R at en.wikipedia – Transferred from en.wikipedia; transfered to Commons by User:Channel_R using CommonsHelper..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사실 9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국내에서 소닉 유스의 위상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너바나의 말릴 수 없는 신드롬과 얼터너티브의 교주, 커트 코베인의 자살사건(그렇다! 이것은 분명히 사건이었다.) 이후에 커트가 살아 생전에 흠모하였다고 하여 뒤늦게 재조명 받기 시작한 그룹이 바로 이들이었으니까…. 광기 번뜩이던 음악을 표출하던 80년대 소닉 유스가 빚어낸 아름다운 소음들은 평론가들과 극소수의 마니아들을 제외하고는 국내의 음악팬들에게 서러우리만큼 홀대를 받아야 했다. 아무래도 아름다운 멜로디 지상주의의 음악을 연주하는 뮤지션들을 편애하고 그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는 국내의 록팬들에게 이들의 음악은 어려운 부류에 속하거나 귀가 얇은 인간들은 이해하기 힘든 전위예술가들의 퍼포먼스나 해프닝 정도로 치부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소닉 유스의 역사는 뉴욕의 아방가르드씬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인 1981년부터 전개된다. 튜스턴 무어(Thurston Moore, 기타/보컬)와 그룹의 홍일점 멤버 킴 고든(Kim Gordon, 베이시/보컬)의 혼성듀오로 출발했지만, 후에 리 라날도(Lee Ranaldo, 기타/보컬)와 리처드 에드슨(Richard Edson, 드럼)이 합류하면서 특이하게도 세 명의 멤버가 보컬을 번갈아 맡는 트리플 보컬시스템의 4인조로 라인업을 완성한다. 이듬해 소닉 유스 앨범의 스타트가 되는 EP [Sonic Youth]를 공개한 이들은 같은 해 말, 새로운 드러머 밥 버트(Bob Bert)를 맞이하여 이스트 코스트를 도는 투어를 갖는다. 이 투어가 끝나갈 무렵 멤버교체가 이루어지는데 새로 가입한 드러머 밥이 연주스타일의 차이로 탈퇴한 것이다.

소닉 유쓰는 1983년, 8트랙 스튜디오에서 작업한 데뷔앨범 [Confusion Is Sex]를 공개한다. 엄밀히 말하면 편집증적인 노이즈와 청자에게 최면을 걸 듯 반복되는 베이스라인, 그리고 정형화된 비트라고 말하기 힘든 드러밍으로 일관된 이 앨범은 중기 이후의 소닉 유스 사운드에 길들여진 팬들에게 좀처럼 친숙해지기 힘든 섬짓한 ‘물건’이었을 것이다. 이 앨범을 통해 언더그라운드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을 즈음, 밴드에서 낙오되었던 밥 버트는 이들의 유럽투어를 위해 다시 팀에 복귀하게 되었고 라인업을 안정시킨 소닉 유스는 영국의 관객들에게 첫 선을 보이게 되는데, ‘Blast First’레이블의 설립자 폴 스미쓰(Paul Smith)는 공연을 접하고는 이들의 파격적인 사운드에 깊은 관심을 표했다. 이것을 계기로 소닉 유쓰의 두 번째 앨범 [Bad Moon Rising]이 폴의 레이블을 통해 발매되기에 이른다.

블랙메틀을 뺨칠만한 악마적인 분위기의 암울한 노이즈로 가득했던 이 앨범에는 연쇄 살인마 찰스 맨슨에게 경의를 표한 작품이 들어 있어 음악외적인 화재를 모으기도 했다. 1985년 중반에 탈퇴와 재가입을 번갈아 하던 말썽꾸러기 드러머 밥 버트가 또 다시 팀을 떠났고 그의 후임자는 현재까지 소닉 유스의 드럼파트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스티브 셸리(Steve Shelley)였다. 머지 않아 이들은 블랙 플래그(Black Flag)의 레이블인 SST와 새로운 계약을 성사시키고 1986년 앨범 [Evol](영단어 ‘Love’를 거꾸로 한 제목임)을 발표한다. 자기 정체성 확립과 성숙지향의 사운드를 담아낸 이 앨범은 정치적인 메시지와 고차원적인 반어법으로 점철되었고 이러한 성향은 다음작 [Sister]에 까지 계승된다.

아시아에 위치한 한 작은 분단국가에서 올림픽이 개최된 역사적인 해였던 1988년으로 접어들어 소닉 유스는 이들 최고의 역작으로 평가받는 [Daydream Nation]을 공개하여 명성을 떨치는데, 본작은 빌보드 앨범차트 45위에 랭크되었으며, 유력지 [롤링스톤]으로부터 ’80년대 최고의 앨범 중 하나’라는 찬사를 얻게 된다.(혹시 소닉 유스의 팬임을 자청하면서도 이 앨범을 접해보지 못한 독자가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들어볼 것을 당부한다.)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격동의 시대였던 90년대로 접어들면서도 이들은 여전한 성공/인기 가도를 달리게 된다. 오랜 언더그라운드생활을 청산하고 새롭게 ‘게펜(Geffen)’과 손잡아 계약서에 사인을 한 후 [Goo](1990)를 비롯해서 그런지에 영향받은 듯 한 사운드를 담아내었던 [Dirty](1992), 이들의 디스코그래피 사상 가장 정적인 작품집으로 불릴만한 [Experimental Jet Set, Trash & No Star](1994), 세탁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는 소년을 자켓커버로 인해 혹자에게는 일명 ‘세탁기앨범’으로 불렸던 [Washing Machine](1995) 등이 오버에서 연이은 성공가도를 달리게 되면서 뉴욕의 클럽씬에서 활동하던 일개 인디밴드에서 전세계적인 록의 흐름을 주도해나가는 오피니언리더로서의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것이다. 1998년, 90년대 판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을 담고 있었던 [A Thousand Leaves]를 공개하여 변함없는 명성을 입증시켰는데 이 음반은 밴드소유의 스튜디오에서 전체가 레코딩된 그들 최초의 작품이기도 했다

Fight Generation +++

디스코그래피
1985 Bad Moon Rising (DGC)
1986 Made in USA (Rhino)
1986 EVOL (DGC)
1987 Sister (DGC)
1988 Daydream Nation (DGC)
1989 Mini Plot (SST)
1990 Goo (DGC)
1992 Dirty (DGC)
1994 Experimental Jet Set, Trash & No Star (DGC)
1995 Washing Machine (DGC)
1995 Live in Holland (Sonic Death)
1996 Live in Texas (Tec Tones)
1998 A Thousand Leaves (DGC)
2000 NYC Ghosts & Flowers (Geffen)

R.E.M.

A black-and-white photo of the members of R.E.M. embracing and smiling onstage
REM” by Shimelle Laine – http://www.flickr.com/photos/shimelle/2360434817/.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한창 헤비메틀이 기승을(?) 부리던 80년대 우리나라에서 R.E.M은 일부 80년대판 모던락 팬들에게서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오는 전설의 밴드였다. 필자가 그들의 음악을 처음 접한 것도 기껏해야 80년대 말 명동 수입 씨디 가게에서 구한 Eponymous를 통해서 였다. R.E.M의 초기 다섯장의 앨범에 대한 Greatest Hits의 성격을 띄고 있었던 이 앨범을 통해 접한 그들의 음악은 이전에 필자가 접했던 뉴웨이브 음악이나 헤비메틀과는 또다른 무언가가 담겨져 있었다. 뉴웨이브라고 부르기에는 무겁고 메틀이라 부르기에는 발랄한 묘한 중도노선을 걷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이른바 모던락이니 얼터너티브니 하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된 이들 음악은 사실 칼리지락이라고 부르면 딱 알맞을 스타일의 음악이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소위 지성팬 또는 열성팬들의 지지를 얻었다는 데서 착안한 칼리지락은 장르상으로는 한 테두리에 두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지형을 가지고 있었지만 R.E.M, Talking Heads, Television 등으로 대표되는 칼리지락의 선구자들의 면면을 보면 구분이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즉, 우선 키타를 중심으로 한 키타팝 내지는 키타락 위주의 싸운드를 뽑아낼 수 있다. 흔히 jangle pop이라고도 불리는 이 음악의 특성은 명칭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쟁쟁거리는 키타싸운드를 그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싸운드는 소위 초기 뉴웨이브 밴드들로 불리웠던 많은 밴드들의 – 특히 미국의 – 주된 특징이기도 하다.

칼리지락(college rock)의 대표주자들의 또 하나의 특징을 들자면 소위 지성파 밴드라고 불리웠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먹물 많이 드신 양반들이 아무 음악이나 골라들을 수는 없고 소위 내용과 형식면에서 일정정도 지적 만족감을 채워줄 수 있는 음악을 듣게 되었는데 R.E.M은 바로 그러한 지적인 오만을 채워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밴드였던 것이다.

R.E.M의 음악적 성향을 정의해주는 용어는 이외에도 많다. 이른바 Post Punk로 분류되기도 하고 그들의 후기(최근의 음악)는 확실한 얼터너티브 밴드로 자리매김하는 등 시대를 넘어선 다양한 장르를 포괄(사실 스타일을 바꾼 건 별로 없다. 시대가 그들을 달리 불렀을 뿐일지도). 여하튼 80년대 언더그라운드에 머물러 있던 garage 운동을 메인스트림으로 끌어내면서 얼너티브라는 90년대를 대표하는 락장르의 대선배로 불리우기 까지 그들의 공헌도는 혁혁하였다는 점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디스코그래피

1982 Chronic Town (IRS)
1983 Murmur (IRS)
1984 Reckoning (IRS)
1985 Fables of the Reconstruction (IRS)
1986 Life’s Rich Pageant (IRS)
1987 Document (IRS)
1988 Green (Warner)
1988 Eponymous
1991 Out of Time (Warner)
1991 Audio-Visual (Import)
1992 Automatic for the People (Warner)
1994 Monster (Warner)
1996 New Adventures in Hi-Fi (Warner)
1998 Up (Warner)
1999 Star Profiles (Master Dance)
2001 Reveal

링크
팬페이지

Pixies, The

Pixies in Kansas City, October 1, 2004.jpg
Pixies in Kansas City, October 1, 2004” by Stephanie D.Pixies in Kansas City, October 1, 2004.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6년동안 팩시스의 존재는 인디 씬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다. 보스톤에서부터 세계적 헤더라이너까지 의미 심장한 가사와 격럴한 기타웍으로 뭉친 픽시스는 인디 씬에서 최고의 록밴드로 평가하는 그룹중의 하나가 되었다.

캘리포니아에서 비틀매니아인 ‘CHARLES MICHEAL KITRIDGE’ 즉,’BLACK FRANCIS’가 태어났다. 그의 아버진 술집 주인이었고 우울한 학교시절을 보낸다. 그래서 캘리포니아의 바닷가는 그의 음악세계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그는 기타, 베이스, 피아노, 드럼을 배우기 시작했고 후엔 보컬영역까지 넘나 들었다.

비틀즈와 도어즈에 심취해있던 프란시스가 ‘MASSACHUSETTS’ 대학에서 필리핀계 룸메이트인 ‘JOEY SANTIAGO’ 를 만나게 되고 그로부터 70년대 펑크사운드와 ‘DAVID BOWIE’, ‘IGGY POP’ 을 소개 받게 된다. 그와 있는 동안 음악과 기타에 몰두하게 되나 산티아고와 헤어진후 방탕한 생활에 빠지게 된다.

1986년 5월 보스톤으로 돌아온 그는 밴드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프란시스는 다시 산티아고와 만나 짖굿은 작은 요정이란 뜻의 ‘PIXIES’ 란 이름으로 밴드를 만들고 신문에 ‘HUSKER DU’, ‘PETER,PAUL AND MARY’ 와 같은 음악성향이 비슷한 베이스스트를 구한다는 광고를 내게 된다. 그리고 그 광고를 보고 온 ‘KIM DEAL’은 메사추세츠의 ‘IZ WIZARD’ 와 ‘RIFF RAFF’에 있던 드러머인 ‘DAVID LOVERINGIL’ 을 대리고와 같이 픽시스에 함류하게 된다. 그래서 1986년 러버링길 아버지의 허름한 창고에서 부터 픽시스의 사운드는 시작된다.

얼마후 그들은 8곡이 담긴 데모테잎을 만들어 ‘ROXBURY’ 의 ‘FORT APACHE’ 스튜디오에 있던 매니져겸 프로듀서인 ‘GARY SMITH’에게 그것을 보냈고 데모를 들은 스미스는 흡족해 하며 첫 번째 미니 앨범을 제작케 했다. 1987년 3월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 데모테잎을 영국 인디레이블 ‘4AD’ 제작자인 ‘IVO-RUSSELL에게 보내게 되고 그는 곧 그들의 데뷰EP앨범 ‘COME ON PILGRIM’을 영국과 유럽시장에 내놓게 된다. 총 7곡의 짧은 곡들로 구성된 이 앨범은 프란시스의 악마적(?)인 외침속에 부드러운 멜로디로 곡들이 짜여져 있으며 종교적 색채와 성과 로큰롤이라는 대립되는 주제를 표현하고자 했다.

두번째 앨범은 이보의 제안으로 프로듀서인 ‘STEVE ALBINI’가 참가하게 되고 픽시스의 사운드를 확립시켜 내놓은 그들의 최고 앨범 surfer ROSA가 14일 동안의 녹음으로 1988년에 나오게 된다. 타이틀 곡인 ‘GIGANTIC’을 필두로 픽시스를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리는 작픔이 되었다. 기계적으로 처리된 목소리, 거친 기타리프. 어울리지 않은 듯 하지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곡들. surfer ROSA는 음악적으로 상업적으로 모두 성공하게 되었고 영국 인디차트 정상을 차지하는 영광과 유수 잡지에서 최고의 밴드로 대우받게 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1988년 4월에 ‘LONDON’S MEAN FIDDLER’를 시작하여 튜어를 떠나게 된다. 이 공연 이후 그들의 팬들은 늘어 났고 여기서 킴딜은 후에 ‘BREEDERS’ 의 베이시스가 될 ‘JOSEPHINE WIGGS’ 을 만난다. 밴드로서는 프로듀서’GIL NORTON’ 과 알게 된다. 그리고 보스톤 스튜디오에서 임시 가제인 whore 로 그들의 세번째 앨범을 녹음하게 된다. 픽시스의 음악적 끼가 함축된 앨범 doolittle이란 타이틀로 1989년에 발매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픽시스하면 doolittle을 떠올린다. 15곡이 담긴 이 앨범은 누구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당당히 첫 베스트원을 차지했다. ‘DEBASER’ 는 나무랄때 없는 픽시스의 No1노래이며 곡 자체의 가사와 멜로디는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세번째 앨범의 활동을 마감하게 될때 킴딜은 1989년 12월말에 ‘LONDON’S MEAN FIDDLER’에서 서포트 밴드로 나온 ‘THROWING MUSES’ 의 키타리스트 ‘TANYA DONNELLY’, 또 서포트 밴드로 출연한 ‘PERFECT DISASTER’ 의 베이시스트 ‘JOSEPHINE WIGGS’, 하드코어 밴드 ‘SLINT’ 출신의 19살 무명의 드러머인 ‘BRIT WALFORD’ 와 프로젝트 그룹 ‘BREEDERS’ – 게이들이 사용하는 이성애란 뜻의 슬랭어 – 를 결성한다. 알바니가 다시 프로듀서를 맏아서 13곡을 녹음했고 pod란 제목으로 발매된다. 그리고 런던에서 비공식적 공연을 시작으로 브리더즈의 활동은 시작된다. 브리더즈은 픽시스와 쓰로잉 뮤지스를 섞어 놓은 것 같다는 평을 듣게 된다.

그리고 킴딜은 다시 LA에서 픽시스의 네번째 앨범을 녹음하기위해 밴드와 다시 합류한다. ‘MASTER CONTROL’ 스튜디오에서 bossanova 가 제작되고 서퍼 사운드와 SF적 내용이 앨범에 담겨진 이 앨범은 픽시스가 적절한 평과 댄스는 그만두라는 등의 상반된 평을 듣게 된다. 주목할 만한 것은 ‘ANA’ 는 드물게 어쿠스틱 버전으로 만들어 져다는 것이다. 픽시스는 후에 몇 개의 커버곡들을 만들었는데 이 곡들은 평론가들로 부터 외면당하기도 했다. 픽시스의 행로가 예상된 투어 ‘LODON’S BRIXTON ACADEMY’ 에서 킴딜은 우리의 마지막 공연이 될 것이라는 말을 함으로써 픽시스를 얼마동안 보지 못 할 것이란 의미를 내던진다. 그리고 프란시스는 ‘LONDON’S BORDERLINE’ 에서 개인 공연을 갖게되고 이것은 프란시스와 킴딜의 관계가 좋지 않음을 알수 있게 해 주었다.

1991년 ‘OZZIE OSBOURNE’ 이 녹음 한적이 있는 LA의 ‘MASTER CONTROL’ 스튜디오에서 5번째 앨범 trompe LE MONDE를 녹음한다. 15곡이 담겨있는 이 앨범은 픽시스가 뭔가 잘 못 되었음을 알게 해준 앨범이었으나 ‘PLANET OF SOUND’ 와 ‘U-MASS’ 는 그나마 픽시스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오래지않아 프란시스는 라디오에서 픽시스해산을 알림으로 픽시스의 역사를 접게 했다.

(from Clubnono)

디스코그래피
1987 Come on Pilgrim [EP] 4AD/Elektra
1988 Surfer Rosa 4AD/Elektra
1989 Doolittle 4AD/Elektra
1990 Bossanova 4AD/Elektra
1991 Trompe le Monde 4AD/Elektra

링크
PixiesWeb
Pixies 4AD
팬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