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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ock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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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ockers film poster” by http://www.cduniverse.com/images.asp?pid=1282281&cart=757413591&style=movie&image=front&title=Clockers+DVD. Licensed under <a href="//en.wikipedia.org/wiki/File:Clockers_film_poster.jpg" title="Fair use of copyrighted material in the context of Clockers (film)“>Fair use via Wikipedia.

우디알렌의 영화에 등장하는 흑인이 되고 싶다는 스파이크리가 바라보는 뉴욕은 우디알렌이 바라보듯 그렇게 여유롭고 지적이지 않다. 한마디로 전쟁터다. 사는 게 전쟁이니 그 삶의 터전도 전쟁이다. 흑인들은 마약을 팔고 백인들은 마약을 산다. 마약을 파는 소년 Strike는 절대 마약을 하지 않는다. 마치 포르노배우가 가장 위생적으로 청결한 것처럼 말이다. 그 대신 초콜릿무스를 수시로 마셔대는 통에 위장이 엉망이다. 그를 자식처럼 여긴다며 개뻥을 치는 마약상 Rodney는 그에게 사람을 죽여줄 것을 넌지시 암시한다. 암시였지 사주는 아니었다. 하여튼 살인은 이루어졌다. 이제부터 누가 죽였는지를 밝히기 위해 Rocco 형사가 팔 걷어붙이고 나섰다. Strike 의 형 Victor 가 자신이 정당방위로 죽였다고 나서는데 평소 행실이 발랐던 그의 말을 Rocco 형사는 믿지 않는다. 스릴러의 형식을 띤 흑인사회의 먹이사슬 보고서로 일관된 스파이크리의 정치적 행보는 마치 켄로치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흑인 우디알렌? Clocker 는 마약판매인 중에 가장 똘마니격으로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이들을 일컫는 은어라고 한다. 총격으로 죽은 흑인들의 생생한 사진을 관객의 코 밑까지 들이대는 타이틀시퀀스가 충격적이다.

p.s. 영화포스터가 그 유명한 ‘살인의 해부’의 포스터를 차용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Six Degrees Of Sepa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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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ald Sutherland (1095412255)” by Alan LightDonald Sutherland
Uploaded by MaybeMaybeMaybe.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의 미국판이라 할 만한 작품이다. 플랜 키트리지와 오이사 키트리지 부부는 미술품 거래상을 하면서 뉴욕의 고급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전형적인 상류층이다. 어느 날 그들의 투자자와 저녁식사를 위해 집을 나서려는 중 자신들의 자녀와 친구라는 한 흑인청년을 맞이하게 된다. 불쑥 찾아온 이 청년은 화려한 언변과 음식솜씨로 이들을 사로잡는데 스스로를 영화배우 시드니 포이티에의 아들 폴 포이티에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오이사는 다음날 아침 폴이 한 낯선 남자와 침실에서 완전나체로 성행위를 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둘을 내쫓는다. 이후 이들 주위친구들도 동일인물에게 비슷한 사기를 당하게 되고 이들은 정체불명의 폴이 누구인지를 집요하게 파고들기 시작한다. 영화제목 Six Degrees Of Separation 은 전혀 낯선 사람일지라도 여섯 단계만 거치면 알게 된다는 스탠리 밀그램 교수의 인간관계에 대한 이론을 의미한다. 결국 폴의 매력에 빠졌다가 피해 아닌 피해를 입은 이들은 어느 사이 서로의 인간관계가 어떻게 연관되는지에 대한 진지한 조사를 하게 되고 이는 상류층의 만남에서 좋은 입담거리가 되고 만다. 그러면서도 거리의 흑인청년이었던 폴이 얼마나 쉽게 그들의 고귀하고 차별적인 공간에 스며들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감지조차 못한다. 결국 폴과의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깨달은 오이사는 폴을 도와주려 애쓰지만 바로 그 순간 자신의 딸의 진지한 대화요구는 거절하는 이중성을 보이기도 한다. 실력파 배우들의 연기가 감칠맛 나면서 연극작품을 영화화하여 다분히 연극적인 분위기가 돋보인다. 부르주아의 위선을 비웃으면서도 어느새 그 지적이고 세련된 분위기에 동화되게끔 만드는 매력을 풍기는 작품이다. 그들의 폴의 미스터리에 대한 입담 장면은 마치 에큘 포와르가 용의자들을 응접실에 모여 놓고는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絞死刑(Death By Hanging)

극은 한 사형수 R의 교수형이 처해지는 장면의 묘사로 시작된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밧줄에 매달린 R은 의식은 잃었지만 여전히 심장이 뛰고 있었다. 당황한 참관인들(교도관, 검사, 신부, 의사 등)은 그를 죽이기 위해 다시 살리는 희극에 뛰어든다. 그러나 의식을 되찾은 R은 자신이 R임을 깨닫지 못하고 참관인들은 R의 성장배경과 그가 저지른 강간살인을 재연하며 R이 R임을 깨닫게 하려고 노력을 기울인다. 재일 한국인이었던 R의 어두웠던 가정환경, 그의 범행동기, 살인 당시의 상황이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극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R은 결국 자신 스스로는 사형을 받을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자부하지만 국가의 또 다른 범죄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모든 사형 받을 이들을 대신해 사형을 받겠노라고 스스로의 죽음을 순교로 정의하고 교수형으로 사라져간다. 결국 어쩌면 이 모든 사형을 둘러싼 참관인들의 해프닝은 R이 교수형을 받으며 아래로 추락하는 찰나의 순간에 꾸었던 꿈일지도 모른다. 루이스 브뉘엘 스타일의 실험적인 코미디 형식을 빌려 실제 있었던 재일 한국인에 대한 사형을 다룬 이 영화는 사회적 징벌로써의 사형의 부적절함, 재일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무지와 편견, 스스로 살인자였던 일본이 또 다른 살인자를 처벌하는 모순 등 무거운 사회적 주제를 한 편에 소화해내고 있다.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사회적 이슈를 나름의 시각으로 펼쳐내어 대가로 인정받은 오시마 나기사는 진정한 범죄자는 전쟁으로 국민들을 내몰아 수만 명을 살인한 국가임을 고발하고 있다. 재일 한국인 R의 역은 실제 한국인인 윤윤도가 열연하였다. P.S. 전기의자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미국에서는 1950년대 실제로 사형수가 형집행 후에도 살아남은 일이 있었다. 부실한 전기의자의 성능 탓이었다. 사형수는 같은 범죄로 두 번 처벌받을 수 없다며 사형을 재개하지 말 것을 청원하였으나 기각되고 두 번째 전기의자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는 미성년자인 흑인이었다.

오시마 나기사에 대해 알아보기

Lone Star

멕시코와 연접한 텍사스 주의 한 마을의 황야에서 죽은 지 몇 십 년이 지난 이름 모를 이의 뼈가 발견된다. 죽은 이의 정체는 25년 전에 실종된 그 마을의 부패한 인종우월주의자 보안관 Charlie Wade. 이 사건의 수사를 맡게 된 신임 보안관 Sam Deeds 는 우연찮게도 Charlie 의 뒤를 이어 보안관직을 수행한 Buddy Deeds의 아들이다. Sam은 언제나 공정하고 명쾌한 업무 수행으로 그 마을에서 전설이 되어버린 그의 아버지가 어떤 식으로든 이 미스터리한 사건에 연루되었으리라는 심증을 가지고 수사를 진행한다. 하지만 비밀을 알고 있으리라 짐작되는 이들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그 와중에 Sam 은 인종주의적 편견 때문에 맺어지지 못했던 멕시코계옛 애인 Pilar 와 재회한다.

영화는 이외에도 마을 술집 주인 Otis 와 육군 대령인 그의 아들 Delmore 와의 갈등, 역사교육을 둘러싼 마을 사람들의 갈등(한때 멕시코의 영토였다가 지금은 미국의 영토가 되어 백인, 멕시코인, 흑인이 어울려 사는 이 동네에서는 몹시 심각한 갈등이다) 등의 에피소드가 복잡한 실타래처럼 엉켜 진행된다. 이러한 모든 갈등들은 역사적 콘텍스트와 개개인의 인생사가 꼬여 등장인물들의 몸과 마음의 주변에 낙인찍혀 쉽게 지워지지 않고 있다. 과거와 현재를 같은 공간에서 세련되게 표현해내는 연출솜씨 덕에 지극히 사실주의적인 개개 사건들은 초현실적으로 그려진다.

Matewan 등을 통해 근접하기 어려운 사회적 이슈를 솜씨 있게 풀어나가는 이야기꾼 John Sayles 가 1996년 만든 이 작품은 자칫 흥분에 들떠 직설적인 화법으로 내뱉을법한 참기 힘든 유혹을 물리치고 관객 스스로에게 나직하게 질문을 던지는 낮은 톤의 묵직한 화법을 통해 미국이라는 인종의 용광로가 지니고 있는 사회적 모순을 유려하게 펼쳐내고 있다.

Sam Deeds 역을 맡은 Chris Cooper 는 그 스스로가 Charlie 로 대표되는 사회적 모순의 피해자이면서도 사회체제의 온존을 위해 그의 아버지가 범인일지도 모르는 사건을 수사해야만 하는 보안관 역을 뛰어난 연기로 소화해냈다. 영화 제목인 Lone Star 는 알려져 있다시피 텍사스 주의 별명이다.

The Road to Guantanamo

관타나모로 가는 다소 복잡한 경로에 관해 서술한 영화이다. 관타나모는 쿠바 동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1903년 이래 미국이 자국의 해군기지로 사용하고 있으며, 소위 미국의 테러세력과의 전쟁 이후 불법적인 전쟁포로 수용소로 유명해진 지역이었다.관타나모 수용소 포로들에 대한 미국 당국의 불법감금, 폭력행사 등은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았으나 미국 정부는 그 곳이 자국의 치외법권 지역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들어 각종 합당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영화는 파키스탄계 영국청년 네 명이 충동적으로 아프카니스탄에 들렀다가 부당하게 관타나모 기지에 2년여를 불법감금당하고 인권을 유린당한 실화를 바탕으로 진행된다. 극은 실제인물의 증언, 전문배우들의 재연, 그리고 각종 언론에 공개된 필름 등을 섞어서 일종의 다큐드라마 형식으로 진행된다. 역동적인 카메라는 마치 우리자신들이 그 현장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또한 이미 24 Hour Party People 등을 통해 음악에도 적지 않은 공력이 있음을 증명한 마이클윈터바텀은 자신만의 색깔을 지닌 음악사용을 최대한 자제하고 긴장감 조성만을 위한 음악을 화면에 깔아 사실성을 높이고 있다.

이 영화는 영국의 ‘채널4’에서 방영되어 영국 내 반전여론에 큰 몫을 담당하였다고 전해진다. 어쨌든 이 ‘순수한(innocent)’ 네 명의 영국청년의 기구한 운명은 제3세계의 인종적 ’운명‘을 지닌 이들이 아무리 제1세계에 편입되어도 결국은 얼마나 당연하게도 다양한 인종적 편견에 시달리고 있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최근 프랑스에서 일어난 알제리계 프랑스인들을 포함한 유색인종의 폭동 역시 그 나라 안에서조차 제3세계 인종은 내부식민지화 되어 있음을 잘 말해주고 있기에 이들의 에피소드는 그 사연이 좀 더 기구할 뿐 예외적인 경우로 치부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좀 더 나아가서 관타나모 기지에 감금된 ‘불순한’ 젊은이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작심하고 ‘성전(聖戰)’에 참여했기에 기꺼이 인권을 유린당하여도 정당한 것인가? 영화 속의 부시의 말처럼 “그들은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가치를 저버린 살인자”들인가? 이 질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부시가 선거에서 참패하고 럼스펠드를 희생시켰다 할지라도 여전히 세상은 주류에 의해 주입된 편향된 가치가 지배하고 있다. 약자가 하면 ‘불순한’ 테러이고 강자가 하면 자위적 수단으로써의 ‘순수한’ 응징이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 영화의 후속편으로 ‘불순한’ 젊은이들의 관타나모 여행기를 다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펌:아도니스]웰컴 투 사라예보

웰컴 투 사라예보 (Welcome To Sarajevo, Michael Winterbottom, 1997)

개인적으로 지금 영국에서 가장 주목하는 감독은 뭐니뭐니해도 마이클 윈터바텀입니다. ‘쥬드’에 한 방 먹어서 한 해 동안 얼얼하게 만들었으니까요. 바늘 한 뜸 들어가지 않을 정도의 완벽할 것 같은 컷 구사 능력에 잔뜩 매료됐었지요. 대체 이 감독이 누군가 싶어 그때부터 찾고 다녔어요. 안타깝게도 영국 영화제가 열릴 동안 뭔가 다른 일이 있어서 ‘더 클레임’밖에는 보지 못했습니다. 더 안타깝게도 영국 배우의 자존심 피터 뮬란과 제가 좋아하는 밀라 요보비치 양이 나왔음에도 그 영화는 제 기대를 만족시키주지 못했었습니다.

이미 비디오를 출시되었다는 ‘광끼’랑 ‘버터플라이 키스’를 찾고 다니느라 수유리 일대를 뒤졌지만 허사. 그는 지금 돈이 생기면 제가 사야 봐야 할 DVD 1순위. 아트 하우스에 경도된 국내 씨네마텍 경향에도 불만입니다. 윈터바텀, 아키 카우리스마끼, 예지 스콜리모우스키 등 현실 발언들을 한 감독들도 좀 불러들였으면 좋겠단 바램입니다.

마이클 윈터바텀은 다소 노쇄해 보이는 듯한 켄 로치를 대신할 차세대 영국 좌파 감독으로서 손색이 없다는 평가입니다. 이미 ‘웰컴 투 사라예보’와 아프가니스탄 난민에 대한 영화 ‘인 디스 월드’로 그 진가를 발휘하기도 했지요. 가장 최근에 만든 영화는 ‘코드 46’인데, 팀 로빈슨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에는 쏙 들어오지 않더군요.

제가 그의 영화들 중에 가장 보고 싶어하는 영화는 ‘광끼’, ‘버터플라이 키스’, ‘원더랜드’와 같은 초기작들과 ‘인 디스 월드’입니다. 대체 ‘인 디스 월드’는 국내에 들어오기나 한답니까? 나중에 DVD 구입할 때 이 양반 리스트를 몽땅 구입하고 싶어요. 현재 ‘24 Hour Party People‘은 구해놨는데 못 보고 있습니다.

보스니아 내전에 관한 이야기여서 미루다 미루다 이제서야 본 ‘웰컴 투 사라예보’는 제 게으름을 난도질하는 통증이 있는 영화군요. 보스니아 내전 현장에 들어가 살아 있는 영상을 만든 그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사라예보 소녀를 영국으로 데려온 어느 기자의 눈을 통해, 제노사이드의 어떤 흔적도 없다며 20세기 최대의 인종청소 전쟁을 방관했던 서유럽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실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다큐와 픽션이 뒤섞여져 있는데, 너무 처참해서 눈을 돌리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전세계 비극의 현장을 돌며 디지털 카메라를 들이대는 분들을 보면 한없이 왜소해지는 기분이 듭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푼수없이 또 울게 되더군요. 사라예보 산 꼭대기에서 공연이 펼쳐집니다. ‘사라예보를 구하자’라는 플랭카드가 붙여 있고, 혼자 남자가 첼로를 켜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알비노니의 ‘현과 오르간을 위한 아다지오’. 며칠 전 타계한 수잔 손택도 문뜩 생각나더군요. 평화를 바라며 전쟁 중인 사라예보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했던 그녀가 당시 남긴 말은 ‘실제의 포탄 소리는 텔레비젼에서 듣는 것보다 크다.’

2005-01-02

http://www.jinbonuri.com/bbs/zboard.php?id=haeuso&page=1&sn1=&divpage=5&sn=on&ss=off&sc=off&keyword=아도니스&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2644

Hoop Dreams

Onibus 174가 제3세계의 가난한 아이들이 처한 비극적 현실을 그린 다큐멘타리라면 Hoop Dreams 는 제1세계,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라는 미국에서 가난한 흑인가정의 자녀들이 어떻게 자라는가에 대한 관찰기라 할 수 있다. 감독 Steve James 는 결코 순탄하다고 할 수 없는 가정환경에서 농구선수의 꿈을 키워가는 두 소년 William Gates와 Arthur Agee의 성장기를 오랜 기간 필름에 담는다. 둘 모두 재능을 인정받아 사립학교에 입학하게 되지만 그들의 농구인생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성장한다. 결국 그들은 꿈에도 그리던 NBA로 입성하게 되는가? 가족들의 나머지 인생들까지 걸린 도박에서 성공할 것인가? 1994년에 제작되어 선댄스 페스티발, 뉴욕비평가 협회, 아카데미 등에서 수상한 화려한 경력의 다큐멘타리다. 이후 유사한 스타일의 다큐멘타리가 다른 감독들에 의해 선보여지기도 했다.

Blazing Saddles(불타는 말안장,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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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zing saddles movie poster” by http://www.impawards.com/1974/blazing_saddles.html. Licensed under Wikipedia.

어렸을 적 AFKN에서 웬 말도 안 되는 서부극을 본 기억이 이따금씩 뇌리를 스치곤 했다. 흑인 보안관이 겉만 판자로 세워놓은 가짜 도시를 만들던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후에 알게 된 그 영화의 제목은 “불타는 말안장(Blazing Saddles)” “프로듀서”, “영프랑켄슈타인”, “스페이스볼” 등에서 어이없는 유머로 우리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멜브룩스는 이 영화에서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또한 이전의 수작들에 한 가지 더하여 이 영화를 한층 빛내는 요소는 인종과 자본의 대한 정치적 올바름이다. 천성이 광대 기질인 멜브룩스는 이러한 정치적 올바름을 구태의연한 진지함이 아닌 자신만의 냉소적인 유머코드로 승화시켜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한다.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주지사(멜브룩스), 철도로 큰돈을 벌 욕심으로 가득한 부주지사, 사형수에서 하루아침에 보안관이 된 흑인노예 등 캐릭터는 엉뚱하고 생기 넘친다. 결국 아름다운 흑백의 화해와 협동으로 앞서 언급한 얼치기 도시로 악당을 물리치고 위기에 처한 마을을 구한다는 결말은 그리 얄밉지 않은 결말이다.

사족 : 샌프랜시스코에 놀러갔을 때 자전거 대여점의 상호가 Blazing Saddles여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