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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 Ig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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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ggy Pop – pinkpop87” by Yves Lorson – originally posted to Flickr as Iggy Pop.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이기 팝은 미시건 주 앤 아르버 태생이다. 그의 첫 밴드인 이구아나스(The Iguanas) 시절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 1970년 『재즈 & 팝』지의 인터뷰 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는데 그의 괴상한 성격이 유년시절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어렸을 땐 몹시 불행했고, 지극히 수줍음이 심했어요. 항상 망상 속에서 살았는데, 18세 무렵 교통사고로 같이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죽거나 다친 적이 있었답니다. 하지만 난 상처하나 입지 않았어요.”

1960년대 중반부터 이기는 시카고와 디트로이트에서 이구아나스와 프라임 무버즈 등의 멤버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블루스 음악인 샘 레이와도 연주활동을 했다.

“난 시카고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흑인 소울 밴드를 했는데, 마지막으로 그 지역에서의 음악활동을 청산했지요. 샘 레이 외에 조니 영이나 피트 윌링포드 등도 훌륭한 뮤지션이지만 함께 연주하기엔 너무 나이가 들어 있었어요.”

이후 이기는 도어스(The Doors)의 공연에 영감을 얻었고, 68년에 자신만의 허무주의적 음악관에 걸맞는 밴드 스투지스(The Stooges)를 결성했다. 이 때까지 이기는 드럼을 연주했는데, 스투지스를 결성하며 보컬과 기타를 담당했다. 그리고 기타리스트 론 애쉬톤이 베이스를, 스코트 애쉬톤이 드럼을 담당했는데, 얼마후 베이시스트 데이브 알렉산더가 기타리스트로 가입하여 이기는 보컬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선배격인 도어스의 싱어 짐 모리슨과 같은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이 때부터 이기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전위적인 쇼맨십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이상야릇한 무대 액션을 하며 노래를 하는 동안 밴드는 엄청난 볼륨으로 화음을 실어 원초적인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그의 무대 액션은 단순한 쇼맨십이라기에는 심오한 부분이 많았다. 그의 행위는 퍼포먼스였다. 그러나 스투지스는 처음부터 청중들로부터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점차 시대를 상징하는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미시건 주와 일리노이 주를 비롯한 중서부 지역에서 팬들을 확보하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이러한 결과로 스투지스는 일렉트라 음반사와 레코딩 계약을 하기에 이르렀다.

스투지스는 일렉트라 음반사를 통해 69년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과,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존 케일이 프로듀스한 1970년 2집 「Funhouse」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때 이기의 약물복용과 관련하여 스투지스는 해체하게 되었고, 이기의 활동도 중단되고 말았다.

72년 이기는 동갑내기이면서 음악적 동료인 데이빗 보위의 도움으로 데이빗 보위의 홈 타운 런던에서 새 앨범을 제작하게 되었다. 앨범 제작에는 역시 스투지스의 멤버였던 론 애쉬톤과 스코트 애쉬톤, 그리고 데이브 알렉산더를 대신한 기타리스트 제임스 윌리엄슨이 함께 했다.

새로운 재기 앨범인 73년 3집 「Raw Power」는 ‘이기 앤드 더 스투지스'(Iggy And The Stooges)라는 아티스트 이름으로 컬럼비아 음반사를 통해 73년에 발표되었다. ‘핵폭탄으로부터 도망한 아이의 모습과 같은 앨범’이라는 이기의 표현대로 이 앨범은 허무주의 찬가 등으로 팬들의 가슴에 뜨거운 공명을 불어넣었다. 또한 빌보드 앨범 차트에도 상위권에 진입할 만큼 상업적 성공도 거둔 명반이 되었다.

하지만 76년 4집 「Metallic K.O」을 마지막으로 다시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이기는 데이빗 보위가 소속된 RCA에서 데이빗 보위의 지원을 받으며 77년 통산 4집 「The Idiot」를 발표했다. 이 앨범에는 데이빗 보위와 공동 작곡한 노래들과, 데이빗 보위가 리메이크(스티비 레이 본의 노래)한 등이 포함되어 있다. 77년에는 또 버진 음반사를 통해 5집을 발표하는데, 역시 데이빗 보위와 공동작곡을 했다. 77년에는 또 「Kill City」 6집으로 선보였다.

78년에는 RCA 음반사를 통해 첫 라이브 앨범, 통산 7집으로 선보였으며, 아리스타 음반사를 통해 79년 8집 「New Values」, 「Soldier」, 그리고 과 「Party」를 발표했다. 1980년에 「No Fun」이라는 타이틀로 앨범을 발매했고. 81년엔 앨범 「Party」를 낸다.

이기는 82년 12집 「Zombie Birdhouse」를 내놓으며 활약을 펼치지만 계속 마약문제가 뒤따랐고, 결국 다시 활동은 중단 되었다. 하지만 이 기간인 84년에 RCA 음반사를 통해 편집음반을 발매했다.

공연에서 이기는 마치 래퍼처럼, 노래한다.

“잘 먹어서 혈색 멀끔한 자식들아. ~~””

청중들은 이러한 언동을 그저 신비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기는 ‘통제불능의 과잉행동장애를 보이지만, 이러한 이미지도 무대를 벗어나면 사라진다.

약 4년간의 공백후 이기는 마약문제를 해결하고, A&M 음반사를 통해 86년 통산 14집을 내놓았는데, 데이빗 보위가 프로듀스한 이 앨범에는 존스도 참여하여 이기와 함께 곡을 썼다. 이기의 독특하고 왕성한 활동은 다시 시작된다. 데이빗 보위처럼 이기는 뮤지션일 뿐만 배우’이기도 하다. 우리는 “니코” “시드와 베이비” “하드웨어” “돈의 색깔”(The Color “크로우 2″(Crow 2)에서 이기의 연기를 접할 수 있다.

디스코그래피
1977 The Idiot Virgin
1977 Lust for Life Virgin
1978 TV Eye [live] RCA
1979 New Values Buddha
1980 Soldier Buddha
1981 Party Buddha
1982 Zombie Birdhouse IRS
1984 Choice Cuts RCA
1986 Blah Blah Blah A&M
1988 Instinct A&M
1990 Brick by Brick Virgin
1993 American Caesar Virgin
1995 We’re Not Talking About Commercial Shit Sky Dog
1995 Wake Up Suckers Sky Dog
1995 Live at the Ritz NYC (1986) New Rose Blues
1995 Live at the Channel, Boston MA 1988 ROIR
1996 Naughty Little Doggie Virgin
1997 Heroin Hates You [live] Other People’s
1997 King Biscuit Flower Hour [live] King Biscuit
1999 Avenue B [US] Virgin
1999 Avenue B [Japan Bonus Tracks] EMI
2000 Live EMI-Capitol
2000 Live in NYC King Biscuit
2001 Beat ‘Em Up Virgin
2001 Hippodrome, Paris ’77 [live] Roir

Police,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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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ng ThePolice 2007” by Lionel Urman – Lionel Urman via email.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팝/록에 레게(Reggae)를 가미, 펑키(punky)한 사운드로 최고의 트리오로서 호평받는 그룹이 바로 폴리스(Police)다.Stewart Copeland와 Sting (b. Gordon Sumner)은 1977년 폴리스를 결성하였다. 밴드를 결성하기전 CIA 에이전트의 아들이었던 스튜어트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영국으로 이주하기 전 그는 프로그레시브락 밴드 Curved Air와 잠시 함께하기도 했었다. 스팅은 교사생활을 하는 한편 째즈락 밴드 등에서 연주를 하기도 했다. 두 뮤지션은 한 로컬째즈클럽에서 만나서 키타리스트 Henry Padovani와 함께 프로그레시브 밴드를 조직하기로 했다. 처음 몇달동안 그룹은 런던의 펍에서 연주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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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y Summers Marseille 2008” by JosuéJacob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1977년 후반 그룹은 그들의 첫싱글 Fall Out을 발매하였고 인디씬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패도바니는 첫싱글 Fall Out의 발매이후 앤디섬머즈(Andy Summers)로 교체되었다. 섬머즈는 이전에 애니멀즈의 두번째 라인업에서 활동하기도 한 실력파였다.1978년 봄, 폴리스는 A&M과 계약을 맺고 Roxanne를 발표했지만 챠트 진입에는 실패하였다. 그룹은 데뷔앨범도 없이 미국 공연을 강행했다. 빌린 차를 타고다니며 빌린 악기로 연주를 강행한 그룹의 첫앨범 Outlandos D’Amour이 1978년 가을 발매되었고 슬금 슬금 영국챠트와 미국챠트에 등장했다. 79년 재발매된 Roxanne는 영국챠트 12위까지 올랐다.이어진 앨범 Reggatta de Blanc에서는 싱글 Message in a Bottle이 영국챠트에서 4주간 1위에 머무는 대히트를 기록하였다. 이로 인해 그룹은 영국과 유럽에서 확실한 스타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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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wart Copeland Marseille 2008” by JosuéJacob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그들은 이어 서구 아티스트의 공연을 흔하게 접할 수 없는 태국, 인도, 멕시코, 그리스, 이집트 등을 돌며 그들의 음악을 전파하였다. 1980년 가을 발매된 Zenyatta Mondatta를 통해 폴리스는 북미 지역에서 확실한 기반을 다졌다. 이 앨범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탑10 진입에 성공하였고 영국에서는 4주 동안 1위에 올랐다. 앨범에 수록된 De Do Do Do, De Da Da Da라는 재밌는 제목의 싱글이 히트하였고 1981년 그들은 프로듀서 Hugh Padgham과 함께 네번째 앨범을 제작하기 위해 스튜디오로 돌아왔다. Ghost in the Machine은 1981년 가을 발매되었다. 이 역시 영미 챠트의 1위를 기록하였고 Every Little Thing She Does is Magic이 크게 히트하였다.1980년과 1981년의 눈부신 활동 덕택에 그들은 브릿어워드에서 최우수 영국 그룹에 선정되었고 세 개의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그룹은 1982년에 휴식기를 가졌다. 각각의 멤버들은 이 시기에 각각의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스팅은 Spread a Little Happiness라는 싱글을 발매하여 영국에서 히트하였고 코폴랜드는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영화 Rumble Fish의 영화음악을 맡았다. 섬머즈는 인스트루멘탈 앨범을 녹음하였다.1983년 폴리스는 그들 최고의 걸작 Synchronicity와 함께 돌아왔다. 이 앨범에는 미국챠트 1위에 8주간이 머문 최고의 히트곡 Every Breath You Take와 연속된 히트곡 King of Pain, Wrapped Around Your Finger 등이 수록되어 있었다. 이 앨범은 영국과 미국에서 멀티플래티넘을 기록하는 엄청난 히트를 쳤다. 폴리스는 여세를 몰아 공연에 돌입하였다. 공연이 끝나고 그룹은 안식일을 선언했다.그러나 이 “안식일”동안에멤버들간의 불화가 이어졌다. 그들은 한동안 함께 일하고자 하는 의욕이 없었다.

스팅은 째즈에 기반을 둔 솔로활동에 착수하였고 1985년 Dream of the Blue Turtles를 발매하였다. 그 앨범은 국제적인 히트를 기록하였고 이로 인해 그는 더더욱 밴드활동으로의 복귀에 대해 회의감이 들기 시작하였다. 코폴랜드는 1985년 월드비트를 추구하는 The Rhythmatist를 발매하고 영화음악과 TV주제가 등을 작곡했다. 그는 나중에 팝록밴드 Animal Logic을 조직하였다. 섬머즈는 아트락과 째즈퓨전 등 실험적인 음악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이따금씩 Fripp과 John Etheridge와 함께 음악활동을 진행하였다.이후 80년대 후반과 90년대에 걸쳐 우리는 이 재기발랄한 세명의 멤버가 함께 모여 만든 음악을 접할 수 없었다. 80년대를 압축적으로 살아간 폴리스는 멤버 각각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이 화학적으로 훌륭하게 녹아들어간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그레시브 밴드에서부터 시작된 그들의 음악이 시대적 조류와 함께 펑크락으로 분류되었다는 재밌는 사실때문에 이들은 단순히 펑크락으로 분류하기에는 다소 무리한 측면이 있다. 음악사조상으로 팝과 락, 그리고 레게를 가장 훌륭하게 접목시킨 이들의 음악에는 펑크의 표상으로 불리우는 젊은이의 분노와 저항 이상의 그 무엇이 있었으며(펑크가 음악적으로 열등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스팅을 비롯한 각각의 멤버들이 오늘날 훌륭한 솔로활동을 펼치고 있는 사실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디스코그래피
1978 Outlandos d’Amour A&M
1979 Reggatta de Blanc A&M
1980 Zenyatta Mondatta A&M
1981 Ghost in the Machine A&M
1983 Synchronicity A&M
1995 Live A&M

링크
stingchronicity.co.uk
stingetc.com
Police/Sting Links
Sting의 영화활동

Parker, Gra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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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ham Parker” by Robman94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Graham Parker는 ’70년대 초반 영국의 펍록(Pub-Rock)씬에서 활동한 싱어쏭라이터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아티스트 중 하나이다. Van Morrison과 Rolling Stones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Parker는 락앤롤과 포크락에 냉소과 분노가 섞인 자신만의 열정과 뒤섞어 새로운 휴전스타일을 창조해냈다. 그의 앨범들은 펍록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러한 여러가지 매력적인 그만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고 스타가 되려 노력하지 않았고 이어서 등장한 Elvis Costello의 존재에 의해 그의 존재가 가리워졌다. 여러 이상한 직업을 전전했던 Parker는 진지하게 음악적 경력을 쌓기로 결심하고 여러 펍록 밴드에서 연주활동을 시작하였다. 1975년 그는 데모테잎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자신을 시장에 내다팔기로 결심했다.

1975년 새로운 인디라벨인 Stiff의 공동설립자인 Dave Robinson은 Parker의 데모테잎을 듣고는 이 쏭라이터에게 The Rumor라는 백밴드를 조직하도록 격려했다. Robinson은 곧 키타리스트 Brinsley Schwarz, 키보디스트 Bob Andrews, 키타리스트 Martin Belmont, 드러머 Steve Goulding,베이시스트 Andrew Bodnar 등 펍록씬에서 활동하던 몇몇 스타들을 불러모았다. DJ Charlie Gillett의 도움으로 1975년말 Mecury와 레코드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새로이 조직된 밴드는 Nick Lowe의 프로듀스로 데뷔앨범 제작에 들어갔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앨범 Howlin’ Wind는 평단의 찬사를 얻었다. 두번째 앨범 Heat Treatment의 이어진 찬사에도 불구하고 Parker는 Mecury에 불만이 쌓여갔다. 그는 회사가 그의 앨범의 홍보를 게을리 했다고 여겼다. 세번째 앨범 Stick To Me는 결국 앨범발매 예정일 전에 결함이 있는 것으로 밝혀져 다시 녹음해야만 했다. 그러나 여전히 Parker는 그와 비슷한 음악적 뿌리를 가지고 있는 Elvis Costello에 의해 그의 존재가 가리워 지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마침내 Parker는 Mecury와의 계약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1978년 여름 라이브 더블앨범을 발매했다. 그리고는 이어진 Mecury와의 분쟁후에 Arista와 계약을 체결하였다. 계약후 처음 발매한 앨범은 그의 전 소속사를 드러내놓고 욕한 Mecury Poisoning이라는 제목의 앨범이었다.

이어진 앨범 Squeezing Out Sparks – Nick Lowe가 어떤 형태로든지 앨범제작에 관여하지 않은 첫앨범 – 는 또다시 평론의 극찬을 받았다. 싱글 Local Girls역시 래디오에서 크게 히트하였다. 이 앨범은 미국 챠트 40위안에 들었고 2백만 카피 이상이 팔리는 등 그의 가장 앨범중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앨범이 되었다. Parker가 드디어 메이저로 입성하는 듯 했지만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어진 앨범 The Up Escalator은 팔리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Parker는 The Rumor를 해체하기로 맘먹었다. 1982년 Another Grey Area에서 그는 Jack Douglas를 프로듀서로 고용하고 세션뮤지션들을 활용했다. 엇갈린 비평을 얻은 이 앨범은 간신히 챠트 51위까지 올라갔다. 이어진 앨범들도 비슷한 처지였다.

Parker는 The Shot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백밴드와 함께 Elektra 레코드사로 옮겼다. 그리고 Wake Up(Next To You)가 탑40에 올랐는데 이 곡이 그의 유일한 챠트 히트곡이다. 앨범 역시 챠트에 Squeezing Out Sparks가 머물러 있던 만큼 머물러 있었다. 이번에는 Elektra와 트러블이 생겼고 그는 재빨리 Atlantic으로 옮겼지만 여기서 그는 싱글 한장도 내놓지 못하고 만다. Parker는 결국 1988년까지 또다른 앨범을 내놓지 못했다. 그가 RCA와 계약을 체결하고서야 The Mona Lisa’s Sister를 내놓을 수 있었다. 그 앨범에서는 Get Started(Start a Fire)가 대학가를 중심으로 유행하였다. 그의 시대가 다시 오는 듯 하였으나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이어진 앨범들은 호의적인 평에도 불구하고 챠트의 끝자락만 붙잡고 늘어졌다. 결국 그는 소위 컬트라는 수식어가 노상 따라다니게 될 판이었다. 1992년 Capitol로 소속사를 바꾼 그는 Burning Questions를 내놓았고 이 역시 무시당했다.

90년대에도 Parker는 인디라벨에서 꾸준히 앨범활동을 펼쳐나갔다.

Punk77의 Garam Parker소개

디스코그래피

1976 Howlin Wind Mercury
1976 Heat Treatment Mercury
1977 Pink Parker Mercury
1977 Stick to Me Mercury
1978 The Parkerilla/Live Mercury
1979 Mercury Poisoning Arista
1979 Squeezing out Sparks Arista
1980 The Up Escalator Razor & Tie
1982 Another Grey Area Razor & Tie
1983 The Real Macaw Razor & Tie
1985 Steady Nerves Elektra
1988 The Mona Lisa’s Sister Buddha
1989 Live! Alone in America RCA
1990 Human Soul Diablo
1991 Struck by Lightning Diablo
1992 Burning Questions Diablo
1993 Live Alone! Discovering Japan Gadfly
1995 Old Grey Whistle Test Series [live] Alex
1995 12 Haunted Episodes Razor & Tie
1995 Live on the Test Windsong
1996 Live from New York, NY Razor & Tie
1996 Acid Bubblegum Razor & Tie
1997 The Last Rock N Roll Tour [live] Razor & Tie
2001 That’s When You Know Polygram

링크

grahamparker.net

Modern Lovers

모든 사람의 선입견을 깨버리며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났던 컬트 아이콘 Jonathan Richman은 ’70년대 인디펜던트락씬에서 가장 명석하고 순응을 거부했던 아티스트이다. 대부분의 팬들은 There’s Something About Mary라는 영화에서 등장했던 그의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Richman의 경력은 Boston출신의 펑크락밴드 Modern Lovers에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Velvet Underground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Modern Lovers는 미국에서의 New Wave 운동의 시조격인 밴드이다. 그러나 처음 그들이 활동을 시작할 즈음만 하더라도 콧대높은 ’70년대 락계는 그들의 평범하지 않은 음악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있지 않았다.

New England 지방에 국한된 지역적인 인기세를 몰아 Modern Lovers는 몇개의 데모를 제작하였고 이후 California로 가서 John Cale과 작업을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작업을 마치기도 전에 음악적 견해차이로 인해 Richman이 그룹을 떠나게되었다. 그룹의 음악방향이 도회적인 락싸운드에 기반하도록 이끈 Richman은 그룹을 떠난뒤로 Calypso에 기반한 버뮤다 출신 밴드와의 작업에 몰두하게 된다. 베이스를 치던 Ernie Brooks는 Boston의 또다른 밴드 Real Kids에 합류하였고 드러머 David Robinson은 The Cars에 합류하였다. 키보드를 담당했던 Jerry Harrison은 곧 Rhode Island출신의 Talking Heads의 창단멤버로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New Wave 운동에 동참하게 되었다. 오리지날 밴드가 해체된 2년후인 1975년 그들의 데모트랙으로 채워진 첫앨범이 발매되어 비평가의 찬사를 얻게 되었다.

1977년에 발매된 Richman의 솔로앨범은 상업적으로나 음악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미국내 소규모의 클럽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했다.

Lineup (the Modern Lovers):

Ernie Brooks (bass), Jerry Harrison (keyboards), Jonathan Richman (guitar, vocals), David Robinson (drums). John Felice (guitar)은 스튜디오앨범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룹은 1973년 해체되었다가 1976년 Richman, Robinson, Greg “Curly” Keranen” (bass), Leroy Radcliffe (guitar)으로 재편성되었다. Robinson은 1978년 The Cars에 참여하며 그룹을 탈퇴했다.

Styles : New Wave, American Punk, Proto-Punk, Punk, Rock & Roll

디스코그래피
1975 Modern Lovers Rhino
1998 Live at the Long Branch & More Last Call

링크
Joe Havard’s Fan Page
Wilson & Alroy’s Record Reviews
Album Reviews of The Original Modern Lovers
Jonathan Richman Related Resources

Jam,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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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jam” by Neil Twink Tinning, – www.thejamunseen.com.
importer de [1]. Licensed under CC BY 2.5 via Wikimedia Commons.

펑크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는 잼(Jam)은 당대의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 클래쉬(Clash), 버즈콕스(Buzzcocks)와 더불어 브리티쉬 펑크록에 큰 영향을 끼치며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에 걸쳐 큰 성공을 거두었던 그룹이다. 73년, 학교 동창인 폴 웰러(Paul Weller, vocals/guitar), 브루스 폭스턴(Bruce Foxton, bass/vocals), 릭 버클러(Rick Buckler, drums)에 의해 영국 브리티쉬 팝의 한 장르인 모드(Mod)에서 영향을 받은 록 트리오 잼은 결성된다.

77년 폴리더 레코드사(Polydor Records)와 계약을 맺고 클래쉬의 오프팅 밴드로 순회공연에 나서게 된 잼은 곧이어 ‘In the City’로 싱글 데뷔한다. 초기 후(Who)의 음악과 너무 유사하다는 비평에도 불구하고 UK 톱 차트 40위를 점하게 된 이들은 이어 ‘All Around the World’로 UK 20위에 진입했고, ‘News of the World’, 킹크스(Kinks)의 리메이크 곡 ‘David Watts’로 지속적인 인기몰이에 나섰다.

78년 ‘Down In the Tube Station At Midnight’라는 반 인종주의에 관련된 드라마틱한 곡을 발표한데 이어 [All Mod Cons]로 찬사를 받은 그룹은 컨셉 앨범인 [Setting Sons](79)를 발표, ‘Eton Rifles’를 UK 톱 텐의 자리에 올렸다. 곧이어 ‘Going Underground’를 UK 넘버원의 자리에 올리며 화려하게 80년대의 포문을 열며 그룹의 팬층을 공고히 한 잼은 ‘Start’, ‘Town Called Malice’로 UK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이미 77년 전미 순회공연에서 크게 실패했던 전적을 가진 이들의 영국 내에서의 지엽적인 인기는 미국 시장을 점유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82년 ‘The Bitterest Pill (I Ever Had To Swallow)’를 차트 2위로 끌어올리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는 가운데, 폴은 돌연 그룹의 해체를 선언하고 새로운 밴드인 스타일 카운실(Style Council)을 결성한다.

그룹의 싱글들이 여전히 히트하고 있고 최정상의 자리에 있는 상황에서 이런 돌연한 발표는 팬들에게는 크나큰 충격이었지만, 이들의 마지막 싱글인 ‘Beat Surrender’가 차트 1위를 차지한 것을 끝으로 그룹은 잼으로서의 굵고 짧았던 음악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후 새 그룹을 결성했던 폴은 솔로로 데뷔하게 되고, 릭과 브루스는 타임 유케이(Time U.K.)에서 함께 활동하다가 후에 브루스만이 스티프 리틀 핑거즈(Stiff Little Fingers)에서 음악활동을 하게 되고 릭은 음악계를 떠난다.

잼이 해체된 후 소속사인 폴리더는 이들의 싱글 13장을 재발매했고, 이 곡들은 모두 UK 톱 차트 100위 안에 진입해 팬들의 변함없는 사랑을 확인시켜주었다. 한때 폴이 인세관련 법정 소송으로 다른 멤버들로부터 고소를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해 그룹의 명예가 실추되긴 했지만, 3분 짜리 전통 브리티쉬 기타 팝을 구사하며 8, 90년대 음악인들에게 펑크의 청사진을 제시한 잼의 음악적 영향력은 여전한 것으로 남아있다.

디스코그래피
1977 In the City (Polydor)
1977 This Is the Modern World [US] (Polydor)
1978 All Mod Cons (Polydor)
1979 Setting Sons (Polydor)
1980 Sound Affects (Polydor)
1982 The Gift (Polydor)
1982 Dig the New Breed [live] (Polydor)
1990 Peel Sessions [live] (Dutch East)
1990 This Is the Modern World [UK] (Polydor)

Idol, Billy

빌리 아이돌은 1955년 11월 30일 영국의 스탠모에서 William Michael Albert Broad라는 본명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갖가지 악기 연주에 능한 조부모의 음악적 영향을 자연스럽게 받으면서 음악에 빠져 들었다. 10세때 할아버지가 사다 주신 키타를 익히기 시작했고, 서섹스 대학에 다니던 1976년 8월, 멜로디메이커지에 그룹 모집 광고를 내어 베이시스트 Tony James를 만났다. 토니와 함께 Chelsea라는 그룹을 결성해 두달동안 활약했으나 이내 첼시를 해체하고 보컬리스트 Gene October와 키타리스트 Bob Berwood Andrews를 가입시켜 Generation X라는 이름의 펑크그룹을 결성했다. 이들은 곧 크리살리스와 계약을 맺고 일련의 앨범을 내어 Wild Youth, Your Generation, Ready Steady Go 등의 히트곡을 생산해냈다. 1982년 2월 빌리 아이돌은 그룹의 마지막 앨범 Kiss Me Dearly가 실패하자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 솔로로 독립했다. 이어 그는 키타리스트 Steve Stevens, 베이시스트 Phil Feit, 드러머 Steve Missal을 끌어들여 자신의 백밴드를 조직하여 기반을 다지기 3년, 84년에 솔로 데뷔 앨범 Billy Idol을 발표하면서 박차를 가했다. 그의 음악스타일은 댄쓰뮤직의 속도감과 중량감을 적절히 결합하여 뉴뮤직과 헤비메틀을 접목시킨 스타일로 팬들의 호응을 얻기에 충분했다.

디스코그래피

1982 Billy Idol (Chrysalis)
1983 Rebel Yell (Chrysalis)
1986 Whiplash Smile (Chrysalis)
1986 Vital Idol (Chrysalis)
1990 Charmed Life (Chrysalis)
1993 Cyberpunk (Chrysalis)
1993 L.A. Woman (Capitol)
1993 White Wedding [live] (Chrysalis)

Hagen, Nina

Nina Hagen의 이력은 좀 색다르다. 1955년 동베를린에서 태어난 그녀는 그곳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락싱어로 활동하는 등 음악경력을 쌓고 있었다. 그 후 1976년 그녀는 반체제 시인이었던 계부 Wold Biermann과 함께 서독으로 이주했다. 망명한 그녀는 런던에서 펑크계열의 곡을 녹음하였고 서독으로 돌아와서 Nina Hagen Band를 조직하고 CBS 레코드사와 계약하였다. 1978년 데뷔앨범 Nina Hagen Band를 내놓은 밴드는 곧 특유의 날카롭고 기괴스러운 댄쓰뮤직으로 명성을 떨쳤다. Hagen의 미국 데뷔는 독일에서의 작업에서 골라낸 4곡으로 구성된 EP였다. 그녀는 곧 뉴욕으로 옮겨 1982년 영어로 된 첫 LP Nunsexmonkrock 를 발표하였다. 이듬해 Giorgio Moroder가 프로듀스한 Fearless를 발표하였는데 이 앨범은 챠트에 잠시 머물렀다. 그리고 “New York New York”이 댄쓰클럽에서 히트하였다. 그러나 Hagen은 Nina Hagen in Ekstacy (1985)를 내놓은 후 CBS와 결별하였다. 1988년 그녀는 Punk Wedding이란 EP를 내놓아 그녀의 결혼을 자축하였다. 1989년 그녀는 독일시장으로 복귀하였다.

디스코그래피
1979 Nina Hagen Band Baktabak
1980 Unbehagen CBS
1982 Nunsexmonkrock CBS
1982 Nunsexmonkrock/Nina Hagen Band Columbia
1983 Angstlos CBS
1983 Fearless Columbia
1985 In Ekstasy Baktabak
1987 Love Baktabak
1989 X Love Columbia
1989 Nina Hagen Mercury
1991 Street Polydor
1994 Revolution Ballroom European
1995 freuD euch RCA
1996 BeeHappy RCA
2000 Return of the Mother BMG
2000 Sweet Lord Concept Album 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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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icial Homepage
New York New York(300k mpeg audio file)

Gang Of Four

Gang Of Four는 영국 Leeds에서 1977년 결성되었다. 멤버는 Andy Gill, Jon King, Hogo Burnham으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Leeds 대학의 졸업생이었다. 그리고 Dave Allen이 베이스 플레이어 모집광고를 보고 찾아와 본격적인 진용을 갖추게 되었다. 1978년 그들의 첫싱글을 내고 그들은 EMI와 계약을 맺고 1979년 Entertainment! 를 발표하였다.

이들의 두번째 싱글 At Home He’s A Tourist는 는 영국 챠트에 올랐으나 가사에서 rubbers란 단어(Condom을 지칭하는 은어로 추측됨:역자주)를 제외시키는 것을 거부해서 챠트에서 삭제되고 말았다. 그들의 음악적 자존심은 지켜졌으나 좀더 많은 가능성에서는 차단당하고 만 이들은 컬트밴드로 남게 될 운명에 처해졌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는 싱글챠트에서 볼 수 없었다.(hooray!!)

두번째 앨범 Solid Gold는 1981년에 발매되었다. 그러나 이 후 Dave Allen이 그룹을 떠나 Shriekback를 조직하였고 그 자리는 Sara Lee가 메꿨다. 세번째 앨범 Songs Of The Free가 1982년 발표되었으나 이 시점에서 그들의 날카로운 음악적 재질은 많이 무뎌져 있었다. Hugo Burnham이 이 앨범 후에 밴드를 떠났다. 네번째 앨범 Hard(1983)는 Andy Gill이 Linndrum을 직접 프로그래밍했다. 라이브에서는 Steve Goulding이 그룹이 해체한 1984년까지 드럼을 맡았다.

1990년에 그들은 Andy Gill과 Jon King, 그리고 파트타임의 연주자들로 재결성되었다. 재결성된 밴드의 첫싱글은 인디라벨인 Scarlett에서 발매된 Money Talks였다. 그리고 앨범 Mall이 1991년 폴라로이드에서 발매되었다. 싸운드는 이전 싸운드와 비교해서 보다 일렉트로닉해졌다. 나중에 그들은 그 앨범에 별로 만족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들의 음악적 성향은 펑크와 파워팝 계열로 정치적으로는 좌익적인 성향을 띄어 클래쉬와 함께 대표적인 좌익 펑크 밴드로 꼽히기도 하였다. 데뷔앨범 Entertainment!는 생기넘치는 멜로디 펑크의 고전으로 펑크락이 단순히 때리고 부시는 해프닝성 음악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시각교정을 위해서 꼭 한번 들어봐야 할 필청음반이다.

디스코그래피
Mall 1991
The Peel Sessions Album 1990
A Brief History Of The Twentieth Century 1990
At The Palace 1984
Hard 1983
Songs Of The Free 1982
Solid Gold 1981
Entertainment!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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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ling Stone 관련 기사

Devo

디보(Devo)는 72년 결성된 가장 혁신적이고 성공적인 뉴 웨이브 밴드 중의 하나이다. 제리 케세일(Jerry Casale), 마크 마더스보(Mark Mothersbaugh), 밥 케세일(Bob Casale), 밥 마더스보(Bob Mothersbaugh), 그리고 앨런 마이어스(Alan Myers)의 라인업으로 결성된 이들은, 인류는 진보 대신 계속적으로 퇴보해 왔다는 생각으로 de-evolution의 개념에서 그룹명을 따왔다고 한다. 전위적인 개척자였던 브라이언 이노(Brian Eno)의 후원 아래 78년 데뷔 앨범 [Q: Are We Not Men? A: We Are Devo!]를 발매하였다. 비디오, 복장 등의 시각적 효과에도 상당한 신경을 쓴 이들은 이내 고정 팬들을 확보하였다. [Duty Now for The Future] 앨범으로 또다시 팬들의 인상에 강하게 각인된 이들은 히트작 `Whip It’을 수록한 [Freedom of Choice](80) 앨범으로 메인스트림에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성공은 그리 길지 않아 좀더 어둡고 심각한 사운드를 들려준 다음 앨범 [New Traditionalists](81)는 팬들의 반응을 이끌어 내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Oh, No! It’s Devo] 앨범에서 아이디어가 고갈되었음을 보여준 이들은 이후 실망스러운 작품들을 내놓다가 90년대 초 활동을 중단하였다. changgo.com

디스코그래피
Q:Are We Not Men? A: We Are Devo! 1978/07/
uty Now For The Future 1979/07/
Freedom Of Choice 1980/07/
New Traditionalists 1981/
Oh, No! It’S Devo 1982/
Shout 1984/
E-Z Listening Disc 1987/
Total Devo 1988/
Now It Can Be Told (Devo At The Palace 12/9/88) 1989/
Smooth Noodle Maps 199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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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페이지
DEVO FAQ
Fan Page

Costello, Elvis

Elvis Costello 1978.jpg
Elvis Costello 1978” by Jean-Luc Ourlin – http://www.flickr.com/photos/jlacpo/4646227/.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엘비스 코스텔로는 가수 겸 작곡로서 소위 New Wave라고 하고 하는 새로운 경향을 주창한 영국의 아티스트들 중에서 평론적인 측면에서든지 상업적인 측면에서든지 최고의 성공을 거둔 록계의 거장이다. 그의 연주에서 그는 힐문하듯 하는가 하면 초연한 듯한 자세를 취함으로써 불가사의한 모습을 보여주는 코스텔로는 과다한 제작 과정을 거친 디스코풍의 음악과는 완전히 대조적이며, 신선한 맛을 풍기는 신랄한 곡들을 작곡하여 그의 독절적이고도 격분한 자세를 반영하고 있다.

엘비스 코스텔로의 경력도 그 초기에는 역시 보잘 것 없는 것이었으며, 확실한 것은 본명이 Declan Patric MacManas이며 리버풀에서 자라났다는 것뿐이다. 아마도 그는 어린 나이에 키타와 작곡을 시작하였을 것이고, 수개월이 아니면 수년 후에 레코드 제작 계약을 맺었을 것이다. 코스텔로는 1976년에 설립된 한 조그만 영국 레코드사인 스티프사에 데모테잎을 보낸 첫번재 아티스트였다. 그의 첫 앨범은 타구역인 마린카운티에 거점을 둔 클로버 밴드와 녹음을 하였으며, 1977년 5월에 영국에서 발매되었다.

그 해 가을에 코스텔로는 어트랙션스라는 펑크 그룹과 함께 첫 영국 순회 공연을 마쳤는데, 그 그룹은 드러머 피터 토마스와 베이스 부르스 토마스, 그리고 키보드 주자 스티브 나이브로 구성되어 있었다.

1977년 스티프 레코드사의 설립 동업자들이 분열되자 코스텔로는 곧 콜럼비아 레코드사로 이적하였고 거기서 샌프란시스코의 올드 왈도프에서 가질 그의 미국 데뷔 공연을 앞두고 My Aim Is True라는 그의 첫 앨범을 발매하였다. 닉 로우에 의해서 제작된 그 앨범은 ‘뉴웨이브’ 앨범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의 챠트에서 히트하였는데 거기에는 Less Than Zero, Waiting For The End Of The World, 그리고 그 앨범에는 걸맞지 않는 사랑의 발라드인 Alison이 포함되어 있다. 이 발라드는 1978년에 린다 론스태드의 앨범 Living In The USA에도 수록되었다.

단 하나의 히트 싱글도 없는 코스텔로는 1977년 말과 1978년 초에 미국 순회 공연을 감행하였는데, 그 결과 언더그라운드에서 그를 따르는 추종 세력이 생기게 되었다. 그의 불가사의한 명성은 어트랙션스와 함께 녹음하였고 닉 로우가 제작한 앨범 This Year’s Model로써 더욱 더 강화되었는다.

이 후 3년만에 발표한 세번째 앨범 Armed Forces은 그의 앨범들 중에서 가장 잘 팔렸으며 또 그의 첫번째 골드 수상 앨범이 되었다. 무려 20곡이 담겨 있었던 Get Happy앨범이 나온 바로 직후에 Taking Liberties가 나왔는데 거기에는 B면에 영국과 미국의 싱글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전에 발매되지 않았던 Girls Talk와 린다 론스테드가 녹음한 Talking In The Dark, 그리고 컨트리 스타인 조지 존스가 녹음한 Stranger In The House 등의 곡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Watch Your Step이 타티틀곡으로 되어 있는 Trust앨범을 낸 후에 엘비스 코스텔로는 Almost Blue에서 컨트리 스타일의 성향을 보였는데 비정통파 컨트리곡인 Tonight The Bottle Let Me Down같은 곡들이 실려 있다. 이후 꾸준히 정력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째즈 등 다양한 음악세계를 편력하고 있으며 국내에는 영화 삽입곡 She로 늙은 발라드 가수로 알려져 있다.

디스코그래피
1977 My Aim Is True
1978 This Year’s Model
1978 Live at El Mocambo
1979 Armed Forces
1980 Taking Liberties
1980 Get Happy!!
1981 Trust Rykodisc
1981 Almost Blue: Elvis Introduces His Favorite…
1982 Imperial Bedroom
1983 Punch the Clock
1984 Goodbye Cruel World
1986 King of America
1986 Blood & Chocolate
1989 Spike
1991 Mighty Like a Rose
1993 The Juliet Letters
1994 G.B.H.
1994 Brutal Youth
1995 Kojak Variety
1995 Deep Dead Blue, Live at Meltdown
1996 Jake’s Progress (Original Music from the…
1996 All This Useless Beauty
1997 Terror & Magnificence
1998 Painted from Memory [US]
1999 The Sweetest Punch: The Songs of Costello…
1999 Painted from Memory [UK Bonus CD]
2000 Painted from Memory [Import Bonus Tracks]
2001 King of America [UK Bonus Disc]
2002 Blood & Chocolate [Expanded]
2002 Brutal Youth [Expanded]
2002 This Year’s Model [Expanded]
2002 When I Was Cruel
2002 When I Was Cruel [UK Bonus Track]
2002 Armed Forces [Expanded]
2002 Imperial Bedroom [Expanded]
2002 Mighty Like a Rose [Expanded]
2002 When I Was Cruel [Bonus 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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