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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크(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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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mones by ian dickson 1977” by Ian Dickson – http://pinterest.com/source/newyorkology.com/. Licensed under Attribution via Wikimedia Commons.

일반적으로 펑크라고 하는 용어는 반사회적으로 행동하는 십대나 어린아이에게 적용된다. 또한 이용어는 1950년대 테디스(Teddies)의 최신 변형과 1960년대 모즈(Mod)족, 1970연대의 런던에서 볼 수 있던 특별한 의상 스타일을 묘사하는데 쓰이곤 했다.

미국에서는 비트닉스(비트족)나 히피가 어느 정도 유사한 용어로 쓰였다. 펑크는 이들과 어느 정도 달랐다. 왜냐하면 펑크는 법 외에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타입의 공통된 요소는 이것들이 반인습적이며 반제도적이었다는 것이다.

펑크는 의심할 것도 없이 1970년대 중반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앨비스 프레슬리의 의상 스타일이나 특히 그의 헤어 스타일에는 펑크적인 면이 있었다. 또한 1960년대에는 롤링 스톤스, 후, 프랭크 자파 등등 많은 본보기적인 펑크 뮤지션이 있었다. 이 용어가 음악적으로 적용되기 이전에는 강한 발언과 이상스러운 행동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펑크의 일원으로 낙인 찍혔다. 지미 헨드릭스는 파괴적이며 때때로 무대위에서 기타를 때려 부수고는 했기 때문에 펑크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뮤지션들은 초기 펑커들이었다.즉 이들은 단순히 그들의 공연을 위한 하나의 행위로 행했을 뿐 펑크에 전적으로 몰두하지는 않았다.

펑크는 세 번째의 록 혁명이었다. 최초로 록큰롤의 형성이 있었다. 두 번째로는 비틀즈가 1964년에 혁명을 단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펑크 운동은 1976년에 시작되었으며, 펑크 물결은 음악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문화적으로까지 확대되었다. 그것은 반 정부적이었고 반 사회적이었으며 기존 질서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반대하였다. 그것은 파괴적이었고, 염세적이었으며, 인생에 대한 황량한 소망을 드러냈다. 펑크는 또한 대부분이 실직 상태에 있던 영국 젊은이들을 대변했다.

음악적으로 펑크는 록에 대한 권태, 특히 미국 록에 대한 반발이었다. 초기 펑크 밴드들은 디스코, 아트 록, 재즈 록 같은 1970년대에 록이 만들어낸 모든 것 즉, 록의 상업화에 명백히 반대하였다. 간단히 말하면 펑커들은 록큰롤을 1950년대식 스타일로 되돌리고 싶어했으며, 정확하게 현실을 전달하는 가사를 담은 노래를 부르고 싶어했다. 본질적으로 펑크 철학은 허무주의나 반예술주의이다. 어떤 면에서 펑크 밴드들은 ‘일회용’에 불과한 것이었다.

펑커들은 단지 녹음하기 위해서 그룹을 결성하고는 했다.실지로 그들은 그리 많이 연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테크닉은 그들이 추구하는 요점의 일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치에 관심이 많았고, 매우 뚜렷한 메시지를 갖고 있었으며, 그들의 연주 스타일이 그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들은 정교한 레코딩을 원하지 않았다.펑크는 대중매체를 거부하고 그들 자신의 언더그라운드 매체를 창출해 내었던 것이다. 펑크 밴드들은 독자적인 레코드 레이블과 싸구려 악기를 이용했고, 자동차 차고에서 녹음하는 형식인 가리지(Garage)레코딩을 탄생시켰다.

출처 : http://popsong.netian.com/

Ready To Dancing?

지난 호 까지 힙합 문화와 음악에 관해 알아 보았다. “1990년대는 힙합과 테크노만 있을 뿐이다.” 라는 다소 과격한 말이 있을 정도로 1990년대부터 현재 까지 힙합과 테크노는 전세계적인 붐을 타고 우리의 주변에 산재해있다. 하지만 국내의 테크노라 하는 음악들은 말 그대로 돈벌이에 급급하여 심하게 왜곡 되고, 음악자체를 조롱한 ‘댄스가요’ 일 뿐 의식과 사상이 존재하는 ‘댄스뮤직’이 절대 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댄스 뮤직 자체를 저급한 음악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마저 생겨 나게 되는데 미국의 아티스트인 모비(Moby)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나를 테크노 뮤지션 혹은 댄스 DJ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20년 동안 음악을 해왔다. 나는 전형적인 뮤지션이었다. 재즈, 스피드 메탈, 하드코어, 펑크, 현란한 뉴웨이브까지 연주 해 봤다. 사실 사람들은 댄스 뮤지션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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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by 1” by Uncensored InterviewFlickr.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하지만 일렉트로닉 뮤지션들은 조작 매뉴얼이 전화 번호부 만큼이나 두꺼운 그런 장비 40~50개의 시스템을 알아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다른 종류의 음악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내가 이런 음악을 좋아 하는 건 일렉트로닉 악기들은 불평을 하지도, 담배를 피우지도 않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돈을 줄 필요도 없다.

음악을 판단 하는 나의 유일한 기준은, 음악이 주관적인 수준에서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오, 헤비메탈, 그건 멋진 음악임에 틀림없어’ 식의 좋고 나쁨을 판단 하는 건 난센스다. 확실히 각각의 음악은 각각의 사람들에 의해 평가될 필요가 있다.” 모비의 말은 댄스 뮤직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기껏해야 왜곡된 ‘댄스 가요’ 나부랭이나 듣고 테크노를 비하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무지함을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락(Rock)의 소멸 이후 대두 되었던 또 하나의 대안인 진짜 테크노 음악(Techno Music)에 관해 논해보자. 이 글이 애초에 대중적인 락(Rock) 음악에 기초하여 락음악 팬들이 다른 장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일종의 ‘흐름’을 보자는 것이였기에 테크노 음악에 대한 관점도 락음악에서 부터 시작 하도록 한다. 테크노는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는 시기가 단지 힙합 붐이 일어 났을 시기와 비슷했을 뿐 실은 그보다 훨씬 오래된 전통을 자랑하고 있는 것을 머릿속에 기억 하도록 하자.
지난 호 중 필자가 “락음악의 마지막 계략은 엉뚱하게도 힙합과 일렉트로니카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라고 말한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과연 테크노/일렉트로니카 계열에선 과연 누가 락을 죽였을까? 자, 이제 테크노 속으로 뛰어들기 전 우리는 락음악의 막바지 호투에 잠깐 발을 담궜다 빼야할것이다.

Anti-Rock

테크노의 기원은 물론 지금부터 이야기 하려는 ‘락의 부정’ 보다는 훨씬 먼저 행해졌던 일이다. 하지만 필자는 먼저 락을 부정하려고 했던 락 뮤지션들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이미 1970년대 초반부터 데이비드 보위, 브라이언 페리(Bryan Ferry), 루리드(Lou Reed) 등은 글램 락(Glam Rock) 이라는 장르로 락의 부정을 표면적으로 들어낸 대표로 꼽히고 있다. 특히 데이비드 보위 같은 경우는 끊임없는 변신(음악적, 외형적 이미지 모두)으로 디스코를 거쳐 브라이언 이노 와 함께 엠비언트에까지 손을 뻗는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했다.

이들은 1960년대 락스타들이 보여주었던 것과 는 달리 비대하고 과도한 자신의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의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외모와 음악은 그들의 뇌세포에 까지 깊숙이 침투 한 것일까? 과도한 나르시즘은 과도한 쇼맨쉽(?)으로 표출되었고 그들의 그러한 ‘행태’는 도전이나 개혁 이라기보단 ‘도피’로 비추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 결과 그들의 음악은 군중에게서까지도 너무 빨리 ‘도피’ 해버리게 된다. 하지만 보위는 끊임없는 변신으로 글램 록이 사장길에 접어들 무렵인 1975년 Young America을 발표, 아방가르드 디스코(avant-garde disco)를 선보이며 그 난관을 멋지게 빠져나가게 된다.

그 후 1978년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의 성공으로 디스코(Disco)의 황금기에 접어들게 되고(락 팬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았을 테지만….) 현재까지도 여러 장르들과의 훌륭한 융화력으로 더욱 많은 서브 장르를 창출해내는 결과를 낳는다. 그 후 1980년대로 넘어와 뉴웨이브, 나아가 신스팝과 뉴로맨틱스가 있을 것이다.

뉴웨이브의 전조가 퍼브락 이라면 뉴로맨틱스의 전조는 신스팝 일 것이다. 우선 퍼브락에서 출발하여 뉴웨이브를 이끈 인물로 가장 눈에 띄는 존재는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였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 된다. 리버풀 출신의 그는 버디 홀리와 비틀즈, 홀리스(The Hollies) 등에 심취해 10대를 보내며 마침내 1975년 그의 첫 앨범인 My Aim Is True를 발매, 세상에 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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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vis Costello 1978” by Jean-Luc Ourlin – http://www.flickr.com/photos/jlacpo/4646227/.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이 앨범은 평론가들 사이에서 데뷔앨범으론 드물게 호평을 얻으며 그의 활동에 활력을 불어 넣게 된다. 이후에 그는 1979년 ‘Armed Force’, 1980년 ‘Get Happy’ 등의 음반으로 1980년대 중반 락이 다시 ‘모던 락’ 이라는 이름으로 되살아 나는데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 가운데 하나로서 인정 받게 된다.

코스텔로와 더불어 뉴웨이브의 주역으로는 프리텐더스(The Pretenders) 와 잼(The Jam)을 들 수 있을 것 이다. 프리텐더스는 코스텔로와 는 달리 자신들의 음악을 펑크록과 결합시키려는 시도를 펼쳤고 맨체스터 출신의 버즈콕스(The Buzzcocks)와 함께 펑크 팝(Punk Pop)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잼은 리듬앤블루스, 소울, 포크 등을 모드(Mode)의 테두리 안에서 다양하게 구사하는 식의 음악을 선보여 인정 받았다.

신디사이저로 대표되는 새로운 ‘전자악기(혹은 전자음악)’는 주류팝을 반대했던 펑크를 밀어 내면서 기존 대중의 관심과 지지를 자양분으로, 후에 주목 받게 될 뉴로맨틱스의 터전을 마련하게 된다. 평론가 피터 윅(Peter Wicke)은 1980년대 대중음악계를 ‘합성물의 시대’ 라고 명명 했을 만큼 일정하게 스타일을 분류하기 어려운 스타일들이 많이 대두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신스팝과 뉴로맨틱스다. 듀란 듀란(Duran Duran), 컬쳐 클럽(Culture Club)과 같이 락 밴드의 구성을 보일 때는 뉴로맨틱스라는 명칭으로, 디페시 모드 (Depeche Mode), 휴먼 리그 (Human Leag – ue), 울트라 복스 (Ultra vox)와 같이 신디사이저와 보컬 형식을 보이는 밴드들에게는 신스팝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미미한 차이 였다.

신스팝은 독일의 크라프트베르크 (Kraftwerk)의 영향을받되 그들과는 달리 가공되지 않은 전자음에 노골적으로 ‘팝적’ 선율을 접목 시킨 형식의 단조롭고 거북함 없는 곡을 양산하게 되는데 이는 또한 디스코에서 강한 영향을 받은것 이라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음악은 정작 음악적인 감각 보다는 전자기술에 집착한 나머지 밋밋한 음악을 ‘양산’ 하게 되었다는 비판을 듣게 된다.

한편 1970년대 말 영국 클럽씬에서는 신스팝과 글램록에 심취한 이들이 데이비드 보위를 기념하는 행사인 ‘A Club For Heroes’ 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게 되는데 이 행사는 주변 클럽으로 확산되게 된다. 이 같은 상황을 기반으로 뉴로맨틱스의 첫번째 선두주자에 속하는 스팬도 발레(Spandau Ballet)는 뉴로맨틱스 스타일을 물위에 올려놓은 최초의 밴드라는 찬사를 받으며 뉴로맨틱스 최초의 히트 싱글인 ‘To cut a long story short’를 1980년 영국 싱글 차트 5위에 올려놓는 쾌거를 이룬다.

이들의 이러한 성공에 많은 밴드들이 그 뒤를 잇게 되며 울트라 복스, 휴먼리그 등도 히트 싱글을 발표하게 된다. 이들이 단순 신시사이져음색에 팝적인 선율의 도입으로 군중에 관심을 끌었다면 또 다른 한편에선 레게 와 디스코 스카를 도입해 좀더 쉬운 음악을 선보인 밴드들도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는 펑카폴리탄(Funkaplitan)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뉴로맨틱스가 흑인 음악과 라틴음악을 어떻게 팝적으로 분해 하고 요약해서 수용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그 무렵 ‘A Club For Heroes’ 행사의 주도자 였던 보이조지(Boy George)는 펑크 밴드 출신의 드러머 존 모스(Jon Moss)등과 뜻을 합쳐 컬쳐 클럽을 결성하게 된다. 그들은 양성적 섹슈얼리티와 다국적 음악스타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되는데, 그들의 그러한 성공은 1960년대의 티니바퍼(Teenybopper)의 주역인 소녀들의 열광적인 지지와 때맞춘 MTV 출현 덕분이었다. 그들 (컬쳐 클럽을 위시해 듀란 듀란, 왬(Wham), 프랭키 고우즈 투 할리우드(Frankie goes to Hollywood))은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영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우상으로 부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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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kie Goes to Hollywood in London cropped” by Jane McCormick Smith – Jane McCormick Smith.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이상 뉴웨이브-신스팝-뉴로맨틱스까지의 행보를 간략히 짚어 보았다. 락 팬들은 어쩌면 필자가 여기까지 늘어놓은 이야기들을 ‘역겹게’ 읽었을지도 모르나 위에 나열한 밴드(음악)들의 진화와 테크노 음악과의 연장선을 부정하기 어려운 상황이기에 그들에 대한 설명을 피할 수 없었던 점을 충분히 감안 했으리라 생각한다. (사실 락 음악 팬들은 데쓰(Death Metal) 과 펑크 이후 곧바로 인더스트리얼로 뛰어 넘었을 테지만…) 뉴로맨틱스 신예들의 선전에도 불구 하고 언더그라운드씬에서는 새로운 대안을 위한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그 대표 주자로 단연 인더스트리얼(Industrial)과 앰비언트(Ambient)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앰비언트가 좀더 진보적인 전자음악에 대한 갈증을 푸는 역할을 했다면 인더스트리얼은 락음악 팬들을 전자 음악쪽에 관심을 기울이게 한 장본인임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Pretty, Hate Machine

인더스트리얼을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린 인물로는 1990년대 정도까지 거슬러 올라와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나 미니스트리(Ministry)등의 밴드들이 팝차트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면서 전세계적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인간의 소음에 대한 동경은 더욱 오래 전부터 시도 되어왔다.

명망 있는 클래식 음악가인 루이 루솔로(Lui Russo – lo)는 1913년에 이미 인토나루모레(intonarumore)라는 ‘기계’를 연주에 도입 했으며 에릭 사티(Erick Satie)는 1920년대 이미 권총과 타자기를 자신의 음악에 적극 수용하는 예를 보여주었다. 그 이후에도 프랑스의 작곡가인 에드가 바레즈(Edgar Varese)는 1933년 퍼커션 만으로 이루어진 이오니자숑(Ionisation)을 발표했다. 특히 그는 소음을 포함한 어떠한 소리로도 음악을 만들수 있는 권리 를 주장 하면서 소음을 음악적영역에 포함시키는데 적극적이었다.

이와 같은 실험은 1960년대 이후 대중음악의 영역에도 활발히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예전의 클래식 음악가들과 다른점은 대중적인 ‘매체’를 적극 ‘이용’하여 자신들의 영역을 확보해 나갔다는 것이다. 이제 다시 1976년대 영국으로 돌아와 인더스트리얼의 시조 라는 칭호를 얻은 스로빙 그리슬(Throbbing Gristle)에 우리는 주목한다. 그룹의 리더인 제네시스 피오리지(Genesis P-Orridge)는 1976년 스로빙 그리슬을 결성하기 이전부터 전위 예술에 몸담던 인물인데 그는 1969년 Coum트랜스미션이라는 아방가르드 예술단체를 결성하여 충격적인 퍼포먼스를 해오던 인물이다.

그들의 음악 활동은 펑크가 가졌던 부정 및 해체 그 이상의 강도와 충격을 가지고 왔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쓰였던 기본 악기인 기타, 베이스, 드럼 조차도 거부 하려는 의도를 다분히 내 비췄고, 기존의 곡 진행 방식 마저 모두 무시해 버렸다. 일 예로 멤버간의 포지션 설정을 “너는 기타를 한번도 쳐보지 않았으니 기타를 치고, 난 드럼에 재능이 있지만 베이스를 연주 하지.” 라는식 으로 결정 했고, 멤버중의 하나가 기타가 너무 무겁다고 하자 아예 기타의 보디를 반으로 잘라서 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들의 이러한 음악적 관점에 변조된 이펙터와 신시사이저, 샘플러 등은 그들에게 안성맞춤인 ‘도구’ 였다. 또한 이들은 공연장에서 자신들의 전신이었던 Coum트랜스미션에서 보여주었던 과격한 공연을 보여주어 리더인 피오리지는 정신병자였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피오리지는 Coum트랜스미션의 활동 당시 자신의 피를 주사기로 뽑아 재 투여 하는 등 과격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들과 같은 목표를 공유한 아티스트을 양성하고 유대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1976년 인더스트리얼 레코드 레이블을 설립하게 되는데 소속된 밴드들 가운데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었던 밴드가 바로 카바레 볼테르(Cabaret Voltaire)였다.

카바레 볼테르는 리처드 H. 커크(Richard H, Kirk), 스티븐 맬 맬린더(Stephen ‘Mal’ Mallinder), 크리스 왓슨(Chris Watson) 이상 3명을 주축으로 결성된 밴드인데 이들은 이미 1973년경부터 신시사이저와 테이프 기기들을 이용한 실험에 몰두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후에 오늘날 머신 리듬(Machine Rhythm)이라 불리는 인더스트리얼의 트레이드마크를 발전시킨 장본이라는 영예를 안게 된다. 그 외에도 이들의 실험은 후에 여러 인더스트리얼 아티스트들에게 사운드 표본을 제시하게 된다. 허나 인더스트리얼 레코드 레이블(IR)에서는 이들의 초기 작업만을 발매 했으며 정식 데뷔앨범은 1978년 러프 트레이드(Rough Trade) 레이블에서 발매되게 된다.

스로빙 그리슬 이나 카바레 볼테르의 선전에 힘입어 1970년대 말에는 인더스트리얼은 IR 레코드에만 국한 되지 않은 더욱 넓은 활동무대를 구축하게 된다. 또한 위에서 말했듯이 그들의 영향력은 음악 만큼이나 파격적으로 영화, 패션, 건축 등 많은 분야게 적용되었다. 신체를 뚫고 불로 낙인을 만드는 이르나 리벳 헤드의 패션 스타일과 연쇄 살인범을 추모하고 약물이나 섹스, 정신질환 등을 주요 소재로 삼는 트랜스그레시브 소설(Transgressive Fiction) 등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하지만 스로빙그리슬이 해체되는 연도인 1981년도를 기점으로 초기 인더스트리얼 유파는 막을 내리게 된다.

여기까지 테크노 전조에 대한 신스팝과 뉴웨이브, 뉴로맨틱스 그리고 초기 인더스트리얼 유파에 대해 알아 보았다. 다음 편에는 1990년대 들어와 다시 부활하게 되는 ‘변형된’ 인더스트리얼과 테크노에 관해 좀더 깊이 들어가 보자.  

http://www.iautosound.co.kr/200202/auto0502.html 
 

XTC / English Settl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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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TC English Settlement” by The cover art can be obtained from Virgin Records.. Licensed under Wikipedia.

이 앨범을 구입한 계기 역시 순전히 웬지 신비로워보이는 앨범커버때문이었다. 이제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청계천 음반상가에서 A Flock Of Seagulls와 XTC사이에서 고민하던 필자는 결국 순전히 커버하나때문에 당시로서는 거금인 5,000원을 주고 원판(국내 라이센쓰가 아닌 수입음반)을 구입하였다. 어찌 보면 말이 힘차게 달리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의 커버 도안은 영국 우핑턴이라는 지방의 언덕 경사면에 그려져 있는 초대형 유적의 형상을 그대로 본딴 것이다. 하늘에서나 봐야 그 윤곽이 잡히는 이 불가사의한 형상은 풀리지 않는 고고학 수수께끼 중 하나인데 철기시대에 고대 켈트족이 남긴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렇듯 English Settlement(영국인 거주지)는 앨범 이름과 커버에서부터 다른 펑크밴드와는 달라도 뭔가 다른 XTC의 컬러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이에 발맞추어 앨범에 담겨져 있는 곡들 역시 팝스타일도 아닌, 그렇다고 펑크나 락스타일도 아닌 그들만의 또다른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듯 하다. 이 앨범은 전작 Black Sea의 밝고 리드미칼한 스타일과는 달리 보다 복잡한 악기편성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특히나 스트링 키타의 효과적 사용은 앨범의 전체적인 색조를 습하고 신비롭게 만들고 있다. 물론 Senses Working Overtime과 같은 팝스타일의 곡도 매력적이지만 전체적인 곡구성은 보다 때로는 우울하고, 때로는 강박적이고, 때로는 장난기가 서려있는 등 다양한 싸운드의 실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다양한 음악적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이 XTC표임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는 점은 여전히 재치있고 위트있는 그들만의 독특함이 노래 곳곳에 배여있다는 것이다. 추천 싱글은 Runaways, Melt The Guns, Snowman(sticky)

1. Runaways (Moulding) – 4:34
2. Ball and Chain (Moulding) – 4:32
3. Senses Working Overtime (Partridge/Pattridge) – 4:50
4. Jason and the Argonauts (Partridge/Pattridge) – 6:07
5. No Thugs in Our House (Partridge/Pattridge) – 5:09
6. Yacht Dance (Partridge/Pattridge) – 3:57
7. All of a Sudden (It’s Too Late) (Partridge/Pattridge) – 5:21
8. Melt the Guns (Partridge/Pattridge) – 6:34
9. Leisure (Partridge/Pattridge) – 5:02
10. It’s Nearly Africa (Partridge/Pattridge) – 3:55
11. Knuckle Down (Partridge/Pattridge) – 4:28
12. Fly on the Wall (Moulding) – 3:19
13. Down in the Cockpit (Partridge/Pattridge) – 5:27
14. English Roundabout (Moulding) – 3:59
15. Snowman (Partridge/Pattridge) – 5:03

Jam, The / The Gift

1990년대초 국내에서 유행하던 댄스그룹이름…?…….노 아닙니다.

70년대말 영국 런던 소호지역등지에서 발생한 어쿠스틱 락의 한 지류…..털털하지만 과격한 미의 감각에다 기본적으로 잘 짜여진 락의 기본 … 결코 노쇠하지 않는 새로운 락의 모습에 영국의 젊은이들은 또다시 열광했습니다.

90년대…Alternative Rock이란 새로운 사생아(?)의 이름으로 재탄생을 했건만 그 순수성이란 이니셜은 The Jam의 열정을 따르지 못하고 있다는 저의 선입견.

제가 중학교때인 80년대 초반 시내구석 소위 bootleg `빽판’ 700원에 구입하여 그 초라한 액면가를 수십배 상위하도록 애지중지하던 그들 The Jam의 앨범들….생선장수 출신의 드러머, 가게 점원 출신의 기타리스트등 소박한 꿈의 소유자 3인이 창출해내었던 Mode Rock의 그 신선하고 스산한(?) 충격은 아직도 저를 전율케 하는군요.

그들의 4번째 앨범 The Gift……미국에서는 상업적으로 철저히 소외되었지만, 3인조의 소규모 캄보(기타, 베이스 ,드럼)가 이뤄내었던 음악적 성취도와 상업적 센세이션-비록 영국과 유럽 일부에서 국한되지만- 은 앨범 전 곡이 싱어이자 기타리스트인 천재 Paul Weller-최근 청소년 추행과 관련된 스캔들로 고통을 겪었지만 -에 의해서 잘 정제된 9곡의 `락의 선언’으로 우리에게 선보였어요.

Happy Together, The Gift 에선 투박한 락의 생명력이, Town Called Malice 에선 한 약 40년이 벌써 지난듯한, 모타운 R&B 의 리듬이 락의 포장으로 새롭게 정제되며, Trans Global Express, Circus에서는 투박하지만 생동감있는 Brass Horn Section이 락의 미각에 새 맛을 띄웁니다. 게다가 Carnation 에선 락 발라드의 초절한 우아함마저 느껴집니다. 아~~~~~Weller 그 기막힌 천재의 재능이란 정말…..!!!

영국 차트에서 본 앨범과 싱글 Town Called Malice가 공히 히트차트 1위를 달성, 2개의 앨범을 추가 발매한 후, Paul Weller는 그의 3인조그룹만으로는 넘치는 음악적 이상을 도달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전격 그룹 해산을 선언하며 jazz 냄새가 더욱 강한 어쿠스틱 2인조밴드 Style Council 그리고 아방가르드풍의 Paul Weller Movement등을 조직하며 정말 음악적인 그의 한계가 무의미함을 보여주고 있어요.

어떻게 이런 기막힌 존재가 국내에서도 너무나도 소외되는건 아니었는지…몇 년전 영국 BBC 방송에서 일하다 국내에 영어강사로 온 한 20대중반 아가씨에게 Weller에 대한 나의 열정을 이야기하자, 동감이상의 흥분으로 나의 코멘트에 귀를 기울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군요.

The Jam 의 1982년 앨범 The Gift………저의 사춘기에 또다른 추억으로 남아있는 정말 소중한 앨범입니다….

Songs/Tracks
1. Happy Together (Weller) – 2:51
2. Ghosts (Weller) – 2:11
3. Precious (Weller) – 4:13
4. Just Who Is the 5 O’Clock Hero? (Weller) – 2:15
5. Trans-Global Express (Weller) – 3:59
6. Running on the Spot (Weller) – 3:06
7. Circus (Foxton) – 2:11
8. The Planner’s Dream Goes Wrong (Weller) – 2:19
9. Carnation (Weller) – 3:28
10. Town Called Malice (Weller) – 2:55
11. The Gift (Weller) – 3:08

written by suntae

Talking Heads / Remain In Light

토킹 헤즈의 네 번째 앨범 「Remain In Light」의 위대함은 항상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리더 데이빗 번의 호기심과 창의력에 있다. 항상 지적인 밴드로 불리우는데 싫증난 번의 아이디어로 탄생한 이 앨범은 아프리카의 토속 리듬과 여러 부족들의 전설에 바탕을 둔 아프리카적 정서에 대한 경의의 표시이다. 이처럼 독창적인 사운드를 만들어내는데 기여한 또 하나의 인물은 이 앨범의 프로듀서이며 토킹 헤즈의 초창기부터 번과 호흡을 맞춰 온 브라이언 이노이다. 그는 작곡과 편곡, 기타를 제외한 대부분의 악기 연주에서 특유의 음악적 역량을 과시하고 있다. 「Remain In Light」의 전체적 사운드는 아프리카 전통 음악에 근거해 멜로디에 의한 코드 체인지에 의존치 않고 대담한 반복 리듬을 고집하고 있다. 이렇게 탄생된 사운드는 대단히 펑키(Funky)하고 댄스적이다. 대부분의 실험적 음반이 상업적 성공과 연결되지 않는데 반해 이 앨범은 빌보드 팝 앨범 차트 19위까지 진입하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은 히트곡 을 비롯, 수록곡 대부분의 가사는 상당히 철학적이다. 한 마디로 「Remain In Light」은 ‘제3세계 음악’의 중요성을 크게 일깨워준 기념비적 앨범이다. 폴 사이먼의 「Graceland」나 스팅의 「The Dream Of The Blue Turtles」등이 모두 이 앨범에 큰빚을 지고 있다.(이무영)

The Clash / London Cal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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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ClashLondonCallingalbumcover” by The cover art can be obtained from Epic Records.. Licensed under Wikipedia.

런던 펑크 씬이 배출한 최고의 걸작 앨범으로 ’79년말에 발표되어 ’70년대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한 작품이다. 그리고 순수한 의미에서의 펑크 밴드 클래쉬의 마지막 작품이다. 이 앨범 이전의 클래쉬는 과격한 가사와 에너지 넘치는 사운드를 구사하기는 했지만 아직 음악적으로 발전 단계에 있었고, 이 이후의 클래쉬는 덥(Dub)과 레게에의 집착이 심해진 만큼 평크로서의 에너지가 소진되었다. 말하자면 가장 위대한 펑크 밴드가 음악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피크에 있었을때의 위대한 작품이다. 타이틀 트랙인 명곡 〈London Calling〉에서부터 시작해서 이후 곡이 진행됨에 따라 레게, 록, R&B, 재즈, 로커빌리 등이 절묘하게 배합된 곡들이 계속 이어진다. 가사는 역시 클래쉬의 전매 특허인 정치적인 이슈들을 토해낸다. 대도시의 환경문제(London Calling), 스페인 내전 관련(Spanish Bombs), 빈부 격차(Brand New Cadillac, Lost In The Supermarket)등 당시 피끓는 젊은이들이었던 이들로서는 참을 수 없는 문제들을 그러나 데뷔 당시보다는 객관적이고 설득력있게 주장하고 있다. 당시 오랜 노동당 집권을 종식하고 새로 들어선 마가렛 대처 보수당 정권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이들의 소임을 충실히 이행해내고 있다. 사운드 적인 면에서는 이들의 공격 대상이었던 전 세대 로커들의 거창함과 복잡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경쾌하면서 심플함으로 일관하고 있다. 무모하기만 했던 섹스 피스톨스와 달리 전략, 전술의 개념이 확실한 클래쉬의 영민함이 번득인다. 앨범의 재킷은 기타를 무대에 내리 치고 있는 사진으로 되어 있어 역시 다분히 의도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다. 아직도 이들에 대해 팬들이 갖고 있는 향수는 대단해서 항상 재결성 희망 밴드 부문에서 1위를 하고 있다. 〈London Calling〉은 ’90년에 롤링스톤지가 선정한 ’80년대 최고 앨범 중 당당히 1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리더인 조 스트러머는 이 앨범이 ’79년 12월에 발표되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정원석)

Gang of Four / Entertainment!

“… 내가 처음 Entertainment!를 들었던 때가 기억난다. 면도날로 자른듯한 리듬을 들으며, 비만혐오증에 걸린 흰색 돼지 앨범커버 – 인디안과 악수를 하고 있는 백인의 모습을 비하해서 표현한듯 함 – 를 보면서, 격렬하게 춤을 췄다. 그 앨범은 Rock Music을 바라보는 나의 방식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고 난 베이스플레이어로의 여정에 올랐다. … ” [Red Hot Chili Peppers의 Flea]

“Entertainment!는 내 인생을 뒤바꿔놓았다. Kurt Cobain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Gang of Four가 Seattle에 왔을때 난 그들을 보기 위해 Idaho의 Boise에서 하루종일 차를 몰아 달려왔다.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 사람들은 뭔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는데 바로 강렬한 원초적 힘(Pure Energy)에 관한 것이었다. … ” [TAD의 Tade Doyle]

“Entertainment!는 이전의 모든 것들을 갈갈이 찢어놓았다. 난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훔쳤다. …” [R.E.M의 Micael Stipe]

이와 같은 여러 아티스트들의 고해성사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Entertainment!는 많은 장르와 수많은 밴드들에게 긍정적으로든 또는 그렇지 않은 방향이든 심대한 영향을 미친 앨범이다. 오락(Entertainment)이라는 실로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있는 제목을 단 이 앨범은 Gang of Four의 최고걸작일뿐 아니라 음악사에 있어서도 그 영향권은 Fugazi, Rage Against Machine과 같은 익히 짐작할 수 있는 밴드들에서부터 Rap, Metal, Indie Rock의 많은 밴드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이들은 이 앨범에서 환상적인 훵키 리듬, 신랄함, 강렬한 키타 플레이, 그리고 주절거리는듯하면서 부르짖는 보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요소들을 답습하였다.

가사에 있어서도 이 앨범은 그 시대 많은 여타 앨범과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밴드는 “Not Great Men”에서 혁명주의자의 역사를 선동하고 있다. “Damaged Goods” (“You said you’re cheap but you’re too much”)에서는 성(性)의 정치학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sticky)

** In 1995, Entertainment! was reissued on Warner subsidiary Infinite Zero/American, with the Yellow EP appended.

1. Ether (Gang Of Four) – 3:51
2. Natural’s Not in It (Gang Of Four) – 3:06
3. Not Great Men (Gang Of Four) – 3:05
4. Damaged Goods (Gang Of Four) – 3:27
5. Return the Gift (Gang Of Four) – 3:05
6. Guns Before Butter (Gang Of Four) – 3:47
7. I Found That Essence Rare (Gang Of Four) – 3:13
8. Glass (Gang Of Four) – 2:28
9. Contract (Gang Of Four) – 2:39
10. At Home He’s a Tourist (Gang Of Four) – 3:30
11. 5.45 (Gang Of Four) – 3:43
12. Anthrax (Gang Of Four) – 4:24
13. Outside the Trains Don’t Run on Time (Gang Of Four) – 3:27
14. He’d Send in the Army (Gang Of Four) – 3:40
15. It’s Her Factory (Gang Of Four) – 3:08
16. Armalite Rifle (Gang of Four) – 2:48

Elvis Costello / Armed For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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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vis costello armed forces 1” by The cover art can be obtained from the record label.. Licensed under Wikipedia.

너도 나도 죽기살기로 으르렁 거려야만 했던 ’70년대 말의 영국 록 음악 씬. 못사는 친구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펑크 밴드들이 클럽가를 수놓는 가운데 고시생 이미지의 한 인물이 기타를 들고 홀연히 등장했고 그는 통열한 비판과 자기주관을 앞세우며 일순간에 펑크 륵의 스타로 떠올 랐다. 당시 매스컴과 평론가는 갖가지 미사여구로 그를 떠받쳤지만 상업적인 성공은 그와 거리가 멀었고, 20년이 지난 현재까지 그에 대한 찬사와 인기는 언제나 반비례할 뿐이다. 엘비스 코스텔로. 그는 영원한 비주류의 이름이다. 좋은 음반의 기준이 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많이 팔려서, 독설을 담고 있어서, 그것도 아니면 당시 사회상을 대변해서. 엘비스 코스텔로의 3번째 앨범인 「Armed Forces」는 펑크 로커답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오히려 각광을 닫게 된 케이스다. 펑크, 뉴 웨이브 시대가 낳은 죄고의 싱어송라이터 엘비스 코스텔로는 3집을 통해 익숙한 코드 진행과 설득력있는 멜로디를 구사하며 사회의 독소라는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음악적인 변신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소위 ‘코끼리 앨범’으로 알려진 본작에는 그의 최강의 넘버들로 평가되는 , Oliver’s Army 시작으로 ’80년대 신경향을 예언한 . 평화의 예찬과 전쟁의 경고를 동시에 담은 등 다양한 주제를 선도이고 있다. 단편적인 시각의 펑크 로커에서 질 높아진 문제 제기를 끄집어내는 문화 혁명자로 성숙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초기 4장의 작품 중 가장 낮은 평가에 머물렀던 본작은 재 발매를 통해 엘비스 코스텔로 최상의 아이템으로 둔갑하게 된다 (라이브를 포함한 8곡의 진귀한 보너스 트랙 수록).(이 종현)

Talking Heads / More Songs About Buildings And F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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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kingHeadsMoreSongsAboutBuildingsandFood“. Via Wikipedia.

Talking Heads는 1978년 3월에 바하마에 있는 Compass Point 스튜디오에서 그들의 두번째 앨범을 녹음했다. 그들의 뿌리와 영혼이 맨허튼에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장소는 일탈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Roxy Music의 키보드를 담당했고 discreet music의 개척자인 Brian Eno의 공동 프로듀서의 활약은 밴드의 싸운드를 희석시키기 보다는 보다 날카롭게 했다.그룹의 데뷔앨범에서의 색다른 주제를 비꼰 타이틀인’More Songs About Buildings And Food’은 Al Green의 ‘Take Me To The River’의 커버버젼을 담는 등 상업적인 타협을 시도했다. 이는 그룹의 어렴풋한 R&B에 대한 취향을 드러낸 완벽한 은유였고 이 곡은 미국에서 26위에 오르는 히트싱글이 되었다.

유럽에서는 덜 성공적이었다. 이중포장으로 발매되었음에도 불구하고(‘Love Goes To Building On Fire’/’Psycho Killer’과 함께) 그룹의 역사에 대한 Peter Frame의 패밀리트리가 들어있는 재킷으로 포장되었다. 한편 미국 싱글은 ‘River’의 부분적으로 약간 편집된 버전이 실려있다. 이 앨범은 데뷔 앨범의 사운드를 한층 강화한(Jerry Harrison의 존재를 느끼게 하는)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다.

Byrne의 노래는 여전히 타협을 거부한다. 그러나 Eno의 프로듀스가 이전보다 한층 풍부한 감정을 전달하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베일을 벗어 던진 더이상 신선할 것이 없는 뉴웨이브 아티스트들로부터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앨범 부클릿에서 발췌 More songs about buildings and food은 1978년 여름에 발매되었다. 앨범의 타이틀이 시사하는바와 같이 이 앨범은 팝뮤직내에서 일반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 다양한 주제 – 아방가르드에서부터(‘Artists Only’) 지극히 미국적인 노래(‘The Big Country’), 그리고 홈비데오를 만들기 위한 것(‘Found A Job’)에 이르기까지 – 에 관한 그룹의 탐구정신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Talking Heads의 10곡의 오리지날이외에도 그룹의 첫 탑40 히트곡인 Al Green의 ‘Take Me To The River’의 리메이크도 수록했다. 이 앨범은 Brian Eno(이후 4년 동안 함께 한)의 프로듀스와 그룹의 첫 공동작업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커버 이야기 앞 커버는 David Byrne의 컨셉으로 만들어진 Talking Heads의 사진 모자이크 작업이다. 이 커버는 폴라로이드로 찍은 529의 클로즈업 사진으로 만들어졌다. 뒷 커버에는 미국의 전도를 담고 있는데, 이 작업역시 569개의 사진을 이용한 모자이크 작업이다.

나의 감상기

이 앨범은 그들의 데뷔앨범에 비해 보다 사운드가 풍부해진 느낌을 준다. 이는 (신시싸이즈드) 퍼커션, 신시싸이저, 피아노 등 더욱 풍부해진 악기 편성이나 Brian Eno의 프로듀스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악기 편성은 특히 Artists Only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표현하는데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마이크에서 한참 떨어져서 노래부른 듯한 David의 보컬 효과는 이러한 효과를 배가시키고 있다.

이전의 앨범에 비해 또 하나 특징적인 점은 연주 부분이 보다 길게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 역시 Eno의 작업의 산물이리라 추측되는데 Artists Only와 Stay Hungry에서 이러한 경향이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연주는 전혀 지루한 감을 주지 않은 채 끝까지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그들의 뛰어난 점일 것이다. 가사는 여전히 흥미로운 단편소설을 읽는 듯한 비쥬얼한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다.

앨범 수록곡


  • Thank You For Sending Me An Angel
  • With Our Love
  • The Good Thing
  • Warning Sign
  • The Girls Want To Be With The Girls
  • Found A Job
  • Artists Only
  • I’m Not In Love
  • Stay Hungry
  • Take Me To The River
  • The Big Country

Television / Marquee Moon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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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quee moon album cover” by The cover art can be obtained from Elektra Records.. Licensed under Wikipedia.

뉴욕의 펑크 록계에는 라몬스와 같은 전형적인 3 코드 펑크와 함께 아트 스쿨(Art-School)이라 불리는 좀 더 실험적인 스타일의 밴드들이 공존했다. 이중 대표적인 그룹으로 토킹 헤즈와 텔레비전을 들 수 있다. 텔레비전은 전설적 펑크 록 클럽 CBGB가 배출한 최초의 스타 그룹으로서 록 역사상에서도 드물게 보이는 독창적인 음악을 선보였던 팀으로, 단명했던 것이 무척 아쉬운 밴드다. 이들은 펑크 록이 갖고 있는 특유의 스피드감이나 파괴 충동을 표출하기 보다는 그것보다 한 차원 놓은 수준의 예술적 감흥을 던져준다. 지적인(Intelligent) 테러리스트라고나 할까? 이들 음악의 핵심은 톰 벌레인과 리처드 로이드, 2명의 기타리스트에 의한 도취적인 듀얼 기타 사운드에 있다. 마치 서서히 약물에 의해 취해 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기타 사운드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다. 그 위를 흐르는 초현실적 가사의 보컬은 그만큼 히스테리컬하다. 요약하자면 텔레비전의 음악은 에로틱하고 퇴폐적이며 동시에 폭력적이다. 이들은 ’60년대의 사이키델릭·드럭 컬쳐의 계승자이며 음악적으로 도어스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직접적 영향하에 놓여 있다. 이와 같은 그들의 모습이 가장 극명하게 표출된 작품이 바로 이 앨범이다. 「Marquee Moon」은 결코 상업적으로 성공한 앨범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그랬던 것처럼 이후의 수많은 모던 록 밴드들(특히 기타 위주의)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뉴욕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면 벨벳 언더그라운드-텔레비전-소닉 유스의 흐름을 떠올리게 된다. 텔레비전은 이후 한 장의 앨범을 더 발표하고 해산한다. 그리고 각자의 길을 걷다가 ’90년대 초 잠깐 재결성 됐으나 역시 앨범 한 장으로 끝나게 된다. 톰 벌레인과 리처드 로이드(매튜 스위트의 기타리스트로 활약했었다)는 계속 활동하고 있지만 텔레비전 시대만큼의 작품을 발표하기는 힘들 것 같다.(정원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