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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don Cal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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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ClashLondonCallingalbumcover” by The cover art can be obtained from Epic Records.. Licensed under Wikipedia.

BBC의 2차 대전 당시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방송의 호출 신호에서 이름을 딴 The Clash의 세 번째 앨범 London Calling을 녹음할 당시 밴드는 빚에 쪼들리고 관리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들 주위에는 경기침체로 인한 실업, 인종적 갈등, 약물 남용 등으로 고통 받는 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Joe Strummer의 이야기다. “우리는 투쟁 중이라고 생각했어요. 경사지나 뭐 그런 것에서 막 미끄러져 내려가는, 손톱으로 움켜쥐고 있는. 그리고 거기엔 우릴 도울 사람이 아무도 없었죠.” 음악은 마치 밴드가 전쟁터로 행진해나가는 듯하다. 기타를 친다기보다는 두드린다는 느낌에 가까웠고 베이스 역시 전투적이었다. 앨범 제목과 같은 타이틀 송은 묵시록적이고 반사회적인 분위기를 한껏 풍겼고, 보컬을 맡은 Strummer는 여러 재난에 대해 노래하는데 특히 “nuclear error”는 1979년 펜실베니아 스리마일섬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원자력 사고를 의미한다. Strummer는 마지막 가사로 “I never felt so much a-like …”를 읊조리고 노래는 모르스 부호가 울리며 끝난다. Don Letts이 감독한 비디오에서 밴드는 비에 젖은 테임스 강위의 보트에서 노래를 부른다. 롤링스톤誌는 이 노래를 ‘가장 위대한 500곡’ 중에서 14위 곡으로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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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비디오

The Clash / London Cal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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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ClashLondonCallingalbumcover” by The cover art can be obtained from Epic Records.. Licensed under Wikipedia.

런던 펑크 씬이 배출한 최고의 걸작 앨범으로 ’79년말에 발표되어 ’70년대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한 작품이다. 그리고 순수한 의미에서의 펑크 밴드 클래쉬의 마지막 작품이다. 이 앨범 이전의 클래쉬는 과격한 가사와 에너지 넘치는 사운드를 구사하기는 했지만 아직 음악적으로 발전 단계에 있었고, 이 이후의 클래쉬는 덥(Dub)과 레게에의 집착이 심해진 만큼 평크로서의 에너지가 소진되었다. 말하자면 가장 위대한 펑크 밴드가 음악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피크에 있었을때의 위대한 작품이다. 타이틀 트랙인 명곡 〈London Calling〉에서부터 시작해서 이후 곡이 진행됨에 따라 레게, 록, R&B, 재즈, 로커빌리 등이 절묘하게 배합된 곡들이 계속 이어진다. 가사는 역시 클래쉬의 전매 특허인 정치적인 이슈들을 토해낸다. 대도시의 환경문제(London Calling), 스페인 내전 관련(Spanish Bombs), 빈부 격차(Brand New Cadillac, Lost In The Supermarket)등 당시 피끓는 젊은이들이었던 이들로서는 참을 수 없는 문제들을 그러나 데뷔 당시보다는 객관적이고 설득력있게 주장하고 있다. 당시 오랜 노동당 집권을 종식하고 새로 들어선 마가렛 대처 보수당 정권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이들의 소임을 충실히 이행해내고 있다. 사운드 적인 면에서는 이들의 공격 대상이었던 전 세대 로커들의 거창함과 복잡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경쾌하면서 심플함으로 일관하고 있다. 무모하기만 했던 섹스 피스톨스와 달리 전략, 전술의 개념이 확실한 클래쉬의 영민함이 번득인다. 앨범의 재킷은 기타를 무대에 내리 치고 있는 사진으로 되어 있어 역시 다분히 의도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다. 아직도 이들에 대해 팬들이 갖고 있는 향수는 대단해서 항상 재결성 희망 밴드 부문에서 1위를 하고 있다. 〈London Calling〉은 ’90년에 롤링스톤지가 선정한 ’80년대 최고 앨범 중 당당히 1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리더인 조 스트러머는 이 앨범이 ’79년 12월에 발표되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정원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