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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ret Agent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스파이물 3부작(39Steps, Sabotage) 중 하나로 간주되는 작품.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적국의 스파이 색출과 제거의 임무를 맡은 세 명의 스파이가 스위스로 파견된다. 하지만 현지 역락책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적국의 스파이로 의심되는 이를 사고를 위장하여 살해했지만 그는 무고한 사람으로 밝혀진다. 이에 따라 자기들 내부적으로 갈등이 커진다. 한편 진짜 스파이는 연합국의 적국인 터어키의 콘스탄티노플 행 열차에 몸을 싣고 이들은 그를 쫓아 열차에 오른다. 눈에 띌만한 액션이나 미스터리 없이 스파이물답지 않은 다소 긴장감 없는 작품이어서 히치콕의 작품 중에서도 그리 높게 평가받지 못하는 작품이다. 살인에 대한 서로의 입장차이로 인해 스파이들 간에 갈등이 생긴다는 설정은 나름 이채롭지만 그리 큰 설득력이 없다. 다만 이러한 설정 때문에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스파이물을 가장하였으되 실은 반(反)스파이물로 간주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The Lady Vanishes

이 영화는 제목이 잘 지어진 사례로 뽑힐 만하다. ‘숙녀가 사라지다’라는 신문의 사건사고 헤드라인과 같은 제목은 극 초반부터 도대체 등장인물 중 어느 여인이 실종될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제목 하나로 극 초반의 서스펜스를 유지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히치콕의 영화는 애매하거나 상징적이기 보다는 ‘밧줄’, ‘새’, ‘이창’, ‘기차의 이방인’ 등 직선적이고 영화의 핵심이 되는 제목을 선호한다.

각설하고 기차 안에서의 실종사건의 미스터리와 로맨틱코미디가 적절히 가미된 이 코믹스릴러는 히치콕의 영국 체류기간의 말미를 장식한 작품 중 하나로 헐리웃의 시선을 끌 정도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예비신부 Iris Henderson (Margaret Lockwood)은 약혼자를 만나기 위해 기차에 올라탄다. 이 과정에서 친절한 중년의 여성 Miss Froy (Dame May Whitty)를 만나는데 잠깐 잠이 든 사이 Miss Froy 가 사라지고 없었다. Iris 는 그녀를 찾아 헤매지만 기차 안의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본적조차 없다고 부인한다. 귀신이 곡할 노릇인데 우연히 호텔에서 다투었던 젊은 음악가 Gilbert (Michael Redgrave)가 그녀를 돕고 나선다.

중심이 되는 미스터리나 스크루볼코미디와 함께 히치콕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총격장면도 볼거리다. 자신의 일이 아니면 끼어들길 꺼리는 영국인의 무뚝뚝함과 이기심이 신랄하게 비난받는 설정도 흥미롭다.

Island Of Lost Souls

남태평양을 항해하던 Lady Vain 이 난파되었을 때 유일한 생존자는 Edward Parker 였다. 어느 화물선의 선원들에게 구조된 그를 정체모를 의사 Montgomery 가 돌봐주었다. 건강을 되찾은 그는 사소한 시비가 붙은 주정뱅이 선장 Davies 의 불의의 습격 탓에 어떤 섬으로 향하던 Montgomery 일행과 합류하게 된다. 그 배에는 또 다른 정체모를 과학자 Moreau 박사가 타고 있었다.

Apia 라는 섬에 도착한 Edward 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그 곳의 주민들은 하나같이 털북숭이에 정상이 아닌 듯 보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 뒤 Edward 는 그 주민들은 Moreau 박사가 동물들의 변형을 통해 재창조된 동물-인간들임을 알게 된다. 한편 Moreau 박사는 아름다운 여인 Lota 를 Edward 에게 소개시켜주고 둘이 성관계를 맺기를 바라는데 사실 Lota 역시 표범을 인간으로 둔갑시킨 여인으로 Moreau 박사는 둘 사이에 새로운 종의 인간형이 태어나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Edward 의 약혼녀 Ruth 는 그를 찾아 섬으로 찾아왔고 Moreau 박사의 음모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걸출한 공상과학 소설가 H.G. Wells 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30년대 파라마운트가 제작한 공포영화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음습한 분위기의 정글 세팅, 캐릭터들의 날선 대립구도, 자연으로부터의 복수라는 상당히 현대적인(?) 주제 등을 담고 있어 컬트 무비라기보다는 잘 만들어진 메이저스튜디오 작품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하지만 정작 원작자 Wells 는 이 작품을 싫어했다는데 그의 원작의도가 이 영화에서는 성적타부의 과도한 강조 등으로 퇴색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 한다. 실제로 표범 여인 Lota 는 Wells 의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다분히 흥행적 요소가 고려된 캐릭터이다.

하지만 스스로가 소설가로서 훗날 걸작 SF 영화 When Worlds Collide 의 원작자이기도 한 Philip Wylie 의 시나리오는 이러한 결점을 상쇄해주는 양질의 것이었다. 야성과 성적은유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킹콩과 닮았고 미친 과학자라는 설정에서 프랑켄슈타인을 연상시키는 이 영화는 그 뒤 두 번 메이저스튜디오에서 리메이크되었지만 그 두 작품은 원작만큼의 작품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p.s. 1)Moreau 박사가 그의 야심을 Edward에게 드러내는 장면에서 상당히 귀여운 표정을 짓는데 어이없다기보다는 의외로 신선하다.
p.s. 2) 동물-인간들의 리더격으로 나오는 배우는 바로 드라큐라 역으로 유명한 Bela Lugoci이다. 그의 전직은 사실 사회주의 혁명가로 헝가리 사회주의 혁명 실패후 미국으로 넘어와 호구지책으로 공포영화의 배우가 되었다.

The Four Feathers

A.E.W Mason 이라는 소설가의 원작을 바탕으로 1939년 Zoltan Korda 에 의해 만들어진 이 영화는 원작을 영화화한 네 번째 사례이자, 유성영화로는 첫 번째 만들어진 사례이다. 이후로도 TV 시리즈로 한번, 극장개봉작으로 또 한 번 영화화되었으니 총 여섯 번이나 영화화되었다. 비록 A.E.W Mason 이 헤밍웨이에 필적하는 훌륭한 소설가는 아니었으나 자신의 소설이 여섯 번이나 영화화되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원작의 어떠한 매력요소가 이토록 영상작가들의 관심을 끄는 것일까? 그것은 영국의 제3세계에 대한 식민지 활동이 극에 달하는 1800년대 말에 대해 영국인들 – 또는 서구인들 – 이 느끼는 강한 향수와 연관이 되어 있을 것이다. 즉, 이 시기는 서구열강의 지도자로서의 영국이라는 위치, 이를 대변하는 영국인들의 강한 자긍심, 식민지 아프리카의 광대한 평야에서 뿜어져 나오는 역동감 등 모험을 소재로 하는 소설이나 영상이 추구하여야 할 매력요소가 이 시기에 골고루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기병대 장교이기도 했던 감독 Zoltan Korda 는 수단의 수도 카르툼을 둘러싸고 영국군과 마흐디(Mahdi는 구원자 또는 영웅을 의미하며 실제 이름은 무함마드 아흐마드)가 이끄는 반란군(?) 간에 벌어졌던 실제전투을 실제 전투 장소에서 실제 전투에 참가했던 양쪽의 병사까지 일부 써가면서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스펙터클한 전투장면을 연출하여 관객들을 열광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촬영기법은 이후 수많은 전쟁영화에서 답습되었다.

그렇다면 영화 제목인 <네 개의 깃털>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깃털은 겁쟁이를 상징한다. 주인공 Harry Faversham 은 영국군 장교로 수단으로의 파견을 얼마 두지 않은 시점에 불쑥 군을 떠나고 만다. 남은 친구 셋은 그를 겁쟁이로 간주하고 그에게 깃털 세 개를 보낸다. 남은 하나는 그의 약혼녀의 불신을 상징한다(1939년 작에는 약혼녀가 그에게 깃털을 주지 않았지만 2002년 작에서는 직접 준다). 바로 이 대목이 영화가 드라마의 형식으로써 가져야 할 기본갈등을 이루고 있다.

39년 작을 보면 Faversham 은 어릴 적부터 시를 읽기 즐겨하던 소년이었다. 그러나 군인집안 출신으로 아버지의 강권에 따라 억지로 군에 입대했을 뿐이다. 수단파견의 시점에 공교롭게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는 미련 없이 군을 관두고 만다. 반면 2002년 작에서는 집안의 강요는 동일한 설정이되 Faversham 의 아버지도 사망하지 않았고 다만 주인공은 약혼녀와의 결혼, 그리고 정말 수단파견이 겁이 나서 군을 그만두는 설정이다. 결과적으로 설득력 측면에서는 39년 작이 보다 설득력이 있고 2002년 작은 이후의 어설픈 드라마 전개의 원죄로 작용한다.

영화가 계속 이어지려면 주인공은 어떤 식으로든 겁쟁이라는 비난에 반응하여야 한다. (사실 이 부분이 원작의 가장 어설픈 설정일 수도 있는데) Faversham 은 비난을 무시하는 대신 한 맺힌 깃털 세 개를 들고 수단으로 무작정 떠난다. 그리고는 전쟁 중에 눈이 먼 그의 친구 John 과 감옥에 수감된 나머지 친구들을 구하고 결국에는 카르툼 요새를 수복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린다. 참 의아한 게 결국 친구들이 그런 곤경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그가 수단으로 갔어야 할 의의가 있었던가 하는 것이다. 가다보니 친구들이 위험에 빠지고 그래서 영웅이 된 빈약한 개연성의 설정이다. 특히 2002년 작에는 Faversham 을 돕는 원주민이 등장하는데 그를 돕는 이유가 다만 신의 뜻이라고 말해 관객을 의아하게 만든다.

이상에서 간단히 알아본 극의 줄거리에서 볼 수 있듯이 원작을 포함한 이 영화들은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철저히 지배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주인공은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1930년 작) 에 등장하는 국수주의 부르주아들처럼 조국을 위해 몸 바치라는 허세에 반감을 가지지만 그렇다고 그 영화의 주인공처럼 반전(反戰)적 주장을 펼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깃털 세 개의 치욕을 씻기 위해 군인들보다 더 뛰어난 활약으로 제국주의 영국의 명예(?)를 수호한다.

에르제의 유명한 만화 캐릭터 땡땡이 콩고에서 그랬듯이 그들은 열등민족에 대한 보호자적 지배를 당연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점이 이 영화가 지니는 명백한 한계이다. 때문에 언제까지 제국주의적 관점을 당연시할 수 없었던 2002년 작은 어설프게도 John 의 연설을 통해 Faversham 의 행동이 조국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우정을 위해 그러했노라고 변명을 한다. 어쩌면 여전히 이슬람을 적으로 몰아세워 난도질을 하는 다이하드 유의 액션물보다는 나을지 몰라도 심연에 자리 잡고 있는 Power of One 과 같은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백인 선지자의 역할은 놓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과연 이 작품이 또다시 영화화될 적에는 또 어떠한 핑계거리를 만들어낼 것인가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

1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은 끝 모를 지루하고 무의미한 전쟁터의 상징이었다. 20세기 초 발발한 1차 세계대전은 이전의 전쟁과 달리 무기의 발달과 참전국의 확대로 인해 대량학살이 동반되었던 그 이전의 어느 전쟁보다도 참혹한 전쟁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서부전선은 밀고 밀리는 와중에 무의미한 죽음이 난무하던 곳이었다. 후대의 어느 역사가에 따르면 이러한 참혹한 전쟁에 대한 공포심으로 말미암아 연합국이 나치 독일의 준동에 수동적으로 대응하였고, 심지어 그들을 어느 정도 용인하려 – 동맹국을 내주고서라도 – 하였다는 주장까지 있을 정도다.

레마르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반전영화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이 작품은 1차 세계대전을 연합국 참전군인의 눈이 아닌 독일 참전군인의 눈으로 관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주의 할만하다. 대개의 전쟁영화는 승리자의 눈으로 바라보기에 – 또한 당연히도 그 배급자도 역시 승전국인 영미권이 주이기에 – 웬만한 웰메이드 전쟁영화조차도 선악이분법의 구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독일의 평범한 시민이자 학생이었다가 참전한 이들의 눈으로 전쟁을 바라본다는 설정이 우선 이 작품이 전쟁에 대한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반석이 되고 있다.

군인들의 시가행진, 시민들의 환호, 참전을 부추기는 애국교수의 열변, 크게 감화되어 입대를 결심하는 학생들의 열기가 극 초반 숨 가쁘게 진행되며 극은 중반으로 돌입한다. 애국주의에 감화되어 도착한 전쟁터는 이념이 설 자리가 없는 삶과 죽음이라는 단순함이 자리 잡고 있는 생지옥이었다. 전우들이 하나둘씩 죽어가며 호승심은 공포로 바뀌어 가지만, 시간이 지나자 어느새 친구의 죽음으로 친구가 갖고 있던 신발이 내 차지가 되고, 전우의 죽음이 더 많은 식량배급으로 이어진다는 것에 만족하는 이성마비의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결국 살아남은 이들에게 유일한 위안거리는 잠깐의 휴식과 전우들뿐이다. 잠깐의 휴가동안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머릿속으로만 전쟁을 하는 국수주의자들은 멋대로 승리를 예견한다. 결국 역설적이게도 군인들의 휴식처는 전쟁터가 되고만 것이다.

선구자적으로 사용한 크레인샷을 통해 비참한 전쟁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 주인공이 애국교수가 혼쭐이 날만큼 전쟁의 참혹함을 학생들에게 설명해주는 장면, 그리고 나비를 좇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 등이 이 영화의 명장면이다.

Freaks

실제로 서커스 단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감독 Tod Browning이 잡지에 개제되었던 Todd Robbins 의 Spurs 라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서커스 단원들을 소재로 한 공포영화. 세상을 그들을 ‘기형인간(Freaks)’들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구경거리로 삼는다.(어쩌면 그렇기에 그들이 그나마 돈을 벌고 사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조롱거리로 삼는다.(심지어 직장동료라 할 수 있는 같은 서커스 극단의 사람들까지도) 그래도 그들 역시 인간이기에 희로애락을 느끼며 살아간다. 이 영화는 공포영화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이런 ‘서로 다름’에 대한 “보통”사람들의 편견을 비판한다. 그리고 그 결말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을 편견 없이 대하는 이들은 오직 서커스 단원인 프로소 – 감독 자신이 투영된 것이 아닐까 추측되는 – 와 비너스뿐이다. 나머지 사람들을 그들을 조롱하거나 심지어 이용하려 한다. 영화는 이러한 추한 인간들 중에서도 가장 악질인, 그러나 외모만은 아름다운 클레오파트라가 어떻게 타락해 가는가를 보여준다. 막판에 그를 따라가는 Freaks 들의 분노에 찬 모습은 이 영화의 백미다.

영화리뷰 : http://www.brightlightsfilm.com/32/freaks.html

His Girl Friday

잘 나가던 기자 Hildy Johnson 이 어느 날 전남편이자 전 직장 Morning Post 의 사장인 Walter Burns(Cary Grant)에게 내일이면 새 약혼자 Bruce Baldwin 과 결혼하여 도시를 떠난다고 통보하러 간다. 야비하고 야심만만한 월터는 그런 그녀를 그냥 보내지 않고 무슨 수든지 써서라도 신문사에 남겨놓으려고 한다. 때마침 정신이상자 Earl Williams 의 살인사건으로 인한 사형이 개시되려 하는 판이고 월터는 이 사건의 부당함을 알기에 그를 집행유예 시키려고 맘먹고 있지만 선거를 앞두고 있는 민주당 출신의 주지사는 유색인종의 표를 의식해 – 우연히도 얼은 흑인경찰을 살해했다 – 그를 사형시키려 한다. 힐디의 호기심을 교묘히 자극하여 마지막 기사를 위해 기자실에 올려 보낸 월터는 새 신랑 브루스를 야비한 술수로 감옥에 처넣어버린다. 그 와중에 얼은 탈옥하여 기자실로 숨어들고 이를 발견한 힐디는 특종을 잡으려는 욕심에 신랑의 존재도 까맣게 까먹고 일에 집중하게 된다.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 저널리즘의 하이에나적인 습성 –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 대의민주주의의 교묘한 패러독스 등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면서도 스크루볼 코미디의 정석을 차근차근 밟아가는 감독의 공력이 보통 솜씨가 아니다. 케리그란트의 과장된 코믹연기도 다른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볼거리. The Thing, The Big Sleep, Scarface 등을 만든 거장 하워드혹스의 1940년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