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뮤지션

Jackson, J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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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e-Jackson3” by David Gans – http://www.flickr.com/photos/dgans/1471908742/in/faves-24788065@N02/.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1955년 8월 11일 영국 Burton-upon-Trent 출생
스타일 College Rock, Pop/Rock, New Wave

뉴웨이브 뮤직의 기수로 불리는 Elvis Costello와 Graham Parker 등과 함께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Joe Jackson은 1979년 등장하여 주목할만한 활동을 펼치면서 “뉴웨이브의 Duke Ellington”이라는 찬사를 받은 바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전부터 레게, 빅밴드 시설의 스윙풍의 재즈와 각 나라의 토속적이고 이색적인 음악을 섭렵, 폭넓은 음악적 재능을 닦았다. 매튼온트렌트에서 태어나 포츠마우스에서 자란 그는 11세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 몇년 뒤에는 피아노를 독학으로 익혔다. 이때부터 곡을 쓰기 시작, 영국의 왕립음악원에서 정통 작곡 공부를 했고 졸업 후에는 Arms & Legs라는 그룹을 조직하여 활동하는 한편, 데뷔앨범 Look Sharp를 발표했다. 이때가 1978년 초, 반응이 좋자 David Kershenbaum의 주선으로 A&M 사와 계약을 체결하였다. 첫싱글 Is She Really Going Out With Him?이 톱20 히트를 냈고 자신의 밴드를 조직하여 공연에 들어갔다.

이후 1980년 초엔 2집 I’m The Man을, 그 해말엔 3집 Beat Crazy를 발표하고 밴드를 해산했다. 그리고는 스윙콤보 밴드를 이끌고 4집 Jumpin’ Jive를 1981년 6월에, 1년후인 1982년 6월엔 5집 Night And Day를 발표하여 Real Man과 그래미 후보에 오른 Steppin’ Out을 히트시켰다. 그후 그는 1983년의 영화 Mike’s Murder의 사운드트랙을 맡아 기량을 과시했고 1984년에는 6집 Body And Soul을 발표하여 You Can’t Get What You Want를 크게 히트시켰다.

디스코그래피
1979 Look Sharp! A&M
1979 I’m the Man A&M
1980 Beat Crazy A&M
1981 Jumpin’ Jive A&M
1982 Night and Day A&M
1983 Mike’s Murder Soundtrack A&M
1984 Body & Soul A&M
1986 Big World A&M
1987 Will Power A&M
1988 Tucker A&M
1988 Live…1980-1986 A&M
1989 Blaze of Glory A&M
1991 Laughter & Lust Virgin
1994 Night Music Virgin
1997 Heaven & Hell Sony Classical
1999 Symphony 1 Sony Classical
2000 Summer In The City: Live In New York Sony Classical
2000 Night and Day II Sony Classical
2001 Look Sharp! [Bonus Tracks] A&M
2001 I’m the Man [Bonus Track] A&M

링크
Official Site
The Joe Jackson Archive

Love shows that God has a sense of humor – Stranger Than Fiction 가사 중에서

Curiosity Killed The C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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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ktc-ben1” by Andwhatsnext, aka Nancy J Price – http://andwhatsnext.com/bands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Ben Volpeliere-Pierrot: vocals
Julian Godfrey Brookhouse: guitar
Nicholas Bernard Throp: bass
Michael Drummond: drums
Toby Anderson: keyboards

Curiosity Killed the Cat은 Migi와 Nick이 1983년 결성한 Twilight Children라는 포스트펑크밴드에서 발전한 밴드이다. 그들은 Ben, Ju, Toby가 가입하고 나서야 자신들만의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Toby Anderson은 그룹의 키보디스트이자 송라이터로 함께 하긴 했지만 공식적으로는 밴드의 멤버였던 적이 없다. 그는 1986년 그룹을 떠날때까지 ‘다섯번째 고양이’로 불리워 졌다. Toby는 비록 아직 그룹이 본격 활동을 하기 전에 떠나긴 했지만 앨범 Keep You Distance에 담긴 모든 곡을(Curiosity Killed the Cat을 제외하고는) 공동작곡하였다. Toby의 ‘다섯번째 고양이’의 역할은 Mike McEvoy가 맡게 되었다. Mike는 Getahead 앨범을 공동 작곡하였다. 그는 또한 Hang on in there baby의 키보드를 담당하기도 했다.

그들은 Eric Clapton의 도움으로 스튜디오에서 몇곡을 녹음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들이 녹음한 몇몇 곡을 들은 Peter Rosengard는 노래에 반해 그들의 매니저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리고 밴드의 이름을 Curiosity Killed the Cat으로 바꿨다.1984년 겨울 런던에 있는 Embassy Club에서 데뷔공연을 시작으로 여러 클럽에서 공연하기 시작한 그들은 마침내 1985년 Mecury와 계약을 체결하였다. 앨범 작업은 프로듀서의 교체 등으로 인해 다소 지연되었다.

Misfit는 1986년 8월 발매되었다. 반응은 형편없었다. 곧 그들은 Alison Moyet의 영국 순회 공연에 동참하였다. 몇번의 TV 출연후 두번째 싱글 Down to Earth를 발매했는데 마침내 영국 챠트에 오르게 되었다. 이 싱글은 1987년 2월에 3위까지 오르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유럽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어서 Paul O’Duffy가 프로듀스한 Ordinary Day가 발매되었고 영국 챠트 11위까지 진출하였다. 데뷔 앨범 Keep Your Distance가 1987년 발매되었는데 5월에 영국챠트 1위에 올라 탑10에 13주간이나 머무는 큰 히트를 기록하였다. 다시 발매된 Misfit는 챠트 7위에 까지 진출하였다.

그들은 Just Seventeen이나 Smash Hits같은 잡지에 등장하며 틴아이돌로 부상한다. 그러나 네번째 싱글 Free가 발매될 즈음에는 쇠퇴의 기미가 뚜렸해진다. 그 곡은 겨우 챠트 56위까지에만 오르는 초라한 성적을 거두었다. 한동안 모습을 감췄던 이들은 1989년 싱글 Name and Number(챠트 14위까지 오름)를 가지고 재등장하였다. 그러나 Nick이 이미 밴드를 떠났고 이름도 Curiosity로 줄여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그해에 두번째 앨범 Getahead를 발매하였다. 이어 발매된 싱글 First Place는 챠트에 오르지조차 않았다.

레이블을 RCA로 바꾸고 난 90년대 초반 그들은 Hang on in there baby(Johnny Bristol의 곡을 커버)라는 히트곡과 함께 깜짝 부활을 하였다. 이 곡은 1992년 4월 영국챠트 3위까지 오르는 빅히트를 기록하였다. 같은해 8월 I need you lovin이 발매되어 47위까지 올랐다. Gimme the Sunshine(Leo’s Sunship의 커버곡)은 1993년 10월 챠트 73위까지 올랐다.

디스코그래피
KEEP YOUR DISTANCE 1986 Mercury Records
MISFIT/DOWN TO EARTH/FREE/KNOW WHAT YOU KNOW/ CURIOSITY KILLED THE CAT/ORDINARY DAY/ MILE HIGH/RED LIGHTS/SHALLOW MEMORY/ [JAPAN BONUS] MISFIT (EXT.V.)/DOWN TO EARTH (EXT.V.)/ ORDINARY DAY (EXTRAORDINARY MIX)/ MILE HIGH (MILE LONG MIX)
GETAHEAD 1989 Mercury Records
NAME AND NUMBER/DO YOUR BELIEVIN’/CASCADE/ FIRST PLACE/WE JUST GOTTA DO IT (FOR US)/ GO GO AHEAD/TREES DON’T GROW ON MONEY/ TREAT YOU SO WELL/WHO ARE YOU/SECURITY LADY/ SOMETHING NEW, SOMETHING BLUE/KEEP ON TRYIN’/

BACK TO FRONT 1994 (Japanese Import) RCA

VERY BEST OF CURIOSITY KILLED THE CAT 1996 (Compilation)
DOWN TO EARTH/NAME AND NUMBER/FREE/MISFIT/ FIRST PLACE/GO GO AHEAD/KEEP ON TRYIN’/ BALL AND CHAIN/CASCADE/CURIOSITY KILLED THE CAT/ TREAT YOU SO WELL/WHO ARE YOU/BULLET/ MILE HIGH/WE JUST GOTTA DO IT (FOR US)/ SOMETHING NEW, SOMETHING BLUE/ SHALLOW MEMORY/ORDINARY DAY/

링크
Wikipedia

U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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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2 Gelsenkirchen August 3rd 2009” by SteBo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20년간의 활동기간 동안 비평적인 면과 상업인 면 양쪽에서 성공을 거둔 몇 안되는 밴드 중의 하나인 U2는 예술적과 상업적이라는 음악산업의 양 면에서 그들의 활동기간 동안 성공적인 행보를 계속해왔다.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의 밴드의 초기 시절부터 현재까지 U2는 여타 다른 락밴드들이 벗어날 수 없었던 전통적인 한계로부터 자유를 부루짖어 왔으며 또한 자유로웠다. 독창적인 사운드에 진솔한 가사와 사회도전적인 메시지를 섞은 음악을 들려 줌으로써 U2는 비평가들은 물론 다른 동료 락 밴드로부터 존경을 얻어왔으며 전세계적으로 광적인 그들의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

U2는 1976년 14세의 Larry Mullen, Jr.(Drum)가 자신이 다니던 학교인 Dublin’s Mount Temple School의 게시판에 새로운 밴드의 멤버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내면서 시작 되었다. Mullen(drum), Adam Clayton(Bass), Paul Hewson(“Bono”, vocals), Dave evans(“The Edge”, guitar), Dick(Dave의 형, guitar) 이렇게 5명은 한데 뭉쳐 “Feedback”이라는 그룹을 결성하게 된다. 하지만 연습도 제대로 시작하기전 Dick은 다른 밴드에 가입하게 위해 밴드를 떠난다. “Feedback”은 밴드의 이름을 “The Hype”라 바꾸고 주말과 방과 후 연습을 시작하게 되고 진실한 우정과 조화를 이뤄간다. 연습을 시작한지 18개월 후 밴드에게 있어서 커다란 전환점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1978년 3월 한 contest에 참가하게 되는데 거기서 그들은 입상을 하게 되고 CBS 레코드사의 Jackie Hayden을 만나게 된다. “The Hype”의 연주에 깊은 인상을 받은 Hayden은 그들에게 데모 앨범을 내자는 제의를 하게 된다. contest가 끝난지 얼마되지 않아서 “The Hype”는 밴드명을 U2바꾸고 그들의 매니저로 Paul McGuinness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들은 학교 밖으로 그들의 활동영역을 넓혀가게 되고 가능한한 더블린 주위에서 많은 연주를 하며 지역 팬들을 확보하기 시작한다.

1979년 9월 U2는 계속된 연주 활동을 기반으로 그들의 첫 싱글 “U2:3″를 발표한다. 이 싱글은 아일랜드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한다. 이 인기에 힘입어 U2는 그해 12월 영국 공연을 감행하고 팬과 비평가의 주목을 끌기 위해 애쓰지만 유료 관객 9명이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남기게 되고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아일랜드로 돌아온다. 다시 아일랜드에서 좀더 큰 규모의 공연을 계속하며 1980년 두 번째 싱글 “A day with out me”가 성공을 거둔 뒤 U2의 가능성에 매력을 느낀 “Island Records”와 1980년 3월 계약을 체결하고 세계 시장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한다. 그리고 그해 10월 그들의 대망의 첫 앨범[Boy]가 발매된다. 이 앨범은 영국과 아일랜드 양국의 음악지에서 ‘신선하고 새로운 음악’이라는 열광적인 평을 얻어낸다. 이 앨범의 가사는 그 당시 다른 락 밴드들이 기피하던 믿음, 삶, 죽음, 정신적인 면등을 다뤘다.

앨범 발표 후 이들은 영국과 아일랜드를 벗어나 유럽과 미국에 투어를 나서게 되고 이로인해 전 세계적으로 그들의 음악의 추종자들을 만들어 나간다. ‘bubblegum pop’ 밴드들이 만연하던 80년대 초 음악씬에서 U2의 출현은 하나의 혁신이었으며 그들 또한 그들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81년 1월 U2는 그들의 2번째 앨범 [October]를 발표한다. 이 앨범은 발매 1주후 영국차트 11위에 등극한다. 이 앨범은 약간의 기독교적 색채를 가진 앨범이었고 “With a shout”, “Gloria”같은 곡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아담을 제외한 나머지 세 멤버는 크리스찬이었고 이들 셋은 더블린에서 “Shalom”이라는 종교단체에 가입하게 된다. 이 단체의 활동에서 세 멤버들은 락적인 삶의 방식과 종교적인 믿음 사이에서 의문을 갖게 되고 이로인해 아담과 약간의 문제가 생기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이 둘을 조화시키고 그들 자신들의 개인적인 믿음을 희생시키지 않고 음악을 계속해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이 시기의 밴드내의 혼란은 [October]저조한 판매 실적으로 나타났고 크게 주목받은 싱글 없이 U2라는 이름을 더욱 널리 알리는데는 실패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도 잠시 1983년 U2의 본격적인 세계시장 진출을 알리는 신호탄인 세 번째 앨범 [War]가 발매된다. 이 앨범은 그 당시 만연하던 버블검 사운드에 대한 전면적으로 반기를 든 음악을 들려주었으며 가사와 음악 또한 더욱 진보적이었다. 이 앨범은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했으며 이 앨범에서 처음으로 보노는 “Sunday, Bloody Sunday”라는 노래에서 북아일랜드에 대해 노래했으며 “폴란드 자유노조 대표 바웬사”에게 바친 다는 부제가 붙은 이 앨범의 첫 싱글 “New year’s day”는 영국 차트 10위에 도달하고 미국 차트 50위 권에 육박하는 등 자타가 공인하는 그들의 첫 히트 싱글이 되었다. 또한 이 노래의 비디오 클립은 미국 MTV에서 자주 방영되어 밴드를 소개하고 새로운 팬을 확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또한 앨범의 홍보를 위한 투어도 활발히 진행하였다. 이 투어 중 ‘Red rocks amphitheatre’에서의 모습을 담아 [Under a blood red sky]라는 그 들의 첫 라이브 앨범을 발표한다. 이 앨범은 영국 차트 1위에 등극하고 84년 1월에는 플래티넘을 획득한다.

위의 두 앨범의 성공으로 U2는 “롤링스톤지”로부터 “올해의 밴드”라는 칭호를 받게되고 “Island Records”와의 재계약에서 좀더 창조적인 권한과 금전적인 보수를 얻어내게 된다. 이러한 성공을 한껏 느끼고 있을때 U2는 음악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되고 그를 위해 새로운 프로듀서로 그 유명한 “Roxy Music”출신의 Brian Eno와 Daniel Lanois를 영입하고 그들의 네 번째 스튜디오 앨범을 준비한다.

1984년 10월 네 번째 앨범 [The unforgettable fire]가 발매된다. 이 앨범은 U2를 관록의 밴드로 세상에 소개한다. 전작의 도전적인 자세는 Martin luther king, Jr.을 위한 “Pride(in the name of love)”와 약물에 빠져 고생하고 있는 보노의 친구에 대해서 노래한 “Bad”에서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 앨범은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하고 싱글 “Pride”는 UK Top 5에 U.S. Top 50에 등극했다. 다른 싱글 “The unfotgettable fire”는 영국 차트 8위에 오르게 된다. 이때 롤링스톤지는 U2에게 “80년대의 밴드”라는 칭호를 부여했고 “세계 락 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가는 유일한 밴드일 것이다”라고 평했다. 4년여 동안의 투어 뒷편으로 그들의 앨범과 싱글들은 계속된 판매량 증가로 그들을 80년대 중반의 국제적인 스타로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성적에 힘입어 “The live aid”와 “Conspiracy of hope”같은 모금운동에도 참여하게 된다.

대망의 1987년이 되어서 그들의 최고의 앨범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5번째 앨범 [The Joshua tree]가 발표된다. 이 앨범은 미국과 영국 앨범차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한다. “With or without you”와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가 미국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고 이 중 “With or…..”는 영국에서도 1위를 차지한다. 이때 U2는 Beatles, The who에 이어 락밴드로는 세 번째로 TIME지 커버를 장식하게 되며 Time에서는 U2를 공연이 항상 매진이며 표를 구하기 힘들다 하여 “Rock’s hottest ticket”이라고 표현했다. 또한 이 앨범으로 Grammy Award에서 “Album of the year”와 “Best rock performance” 두 개 부문을 수상하게 된다. 실로 U2는 명실상부한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밴드가 된 것이다.

그해 10월 U2는 그들이 정상에 서기 까지 그들에게 영향을 준 미국 뮤지션들에 대한 트리뷰트성의 앨범이자 6번째 앨범 [Rattle and hum]을 발표한다. 이 앨범 역시 영, 미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다. 비비킹과의 연주, 밥 딜런과의 가사 공동 작업, 비틀즈의 커버곡 수록, 빌리할리데이에 관한 노래등등…이 앨범은 동명의 기록 영화에 사운드 트랙이다. 이 앨범에 대한 활동 후 밴드 멤버들은 잠시 휴식기를 가진다. 그리고 1990년 말에 새로운 앨범 작업을 위해 베를린에 모인다.

1991년 11월 그들은 어찌보면 상당히 모험적이고 인더스트리얼 계열의 기타 사운드와 피드백,일렉트로닉 댄스 비트를 가미한 7번째 앨범 [Achung Baby]를 발표한다. 하지만 이때까지 팬들과 비평가들은 과거의 그들의 음악에 대한 추억보다는 새로운 변화를 반기는 입장이었다. “그들의 새로운 행보, 지칠 줄 모른는 실험정신, 발빠른 시대 음악 변화의 수용”이라는 멋진 미사여구로 말이다. 이 앨범 발표 후 가진 ‘Zoo tv’ 투어에서 그들은 엄청난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러한 볼거리와 아직은 그들의 음악이 ‘좋다’라는 평을 받는 시기였기 때문에 투어는 성황리에 끝나게 되었다. 2백 50만이라는 관객 수와 함께…. 그들의 8번째 앨범 [Zooropa]는 1993년 3월 더블린에서 레코딩 되었다. 이 앨범에서 에지는 프로듀서라는 직함을 달게 되고 “Numb”에서는 리드보컬을 맡게 된다. 앨범 발매에 따른 투어 후 U2는 “Batman forever”등의 사운드 트랙 작업에 참여했고 Passenger라는 프로젝트 밴드를 그들의 프로듀서 Brian Eno와 결성하여 [Original soundtrack 1]을 발표한다. 하지만 이 앨범은 비평적은 물론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U2는 1996년 초 새로운 앨범 작업에 들어간다. 그들은 이 앨범에서 Prodigy나 Chemical brothers 풍의 일렉트릭 사운드를 수용하고 싶어했고 정말 그렇게 했다. 앨범 발매전 인터넷에 공개된 그들의 새 노래는 가히 충격이었다. 팬들사이에서는 “U2가 댄스 음반을 만든다”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그 새노래는 바로 “Discotheque”였다. [POP]이 1997년 3월 발매되었을 때 일렉트릭 댄스의 영향은 소문처럼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충격 때문인지 이 앨범은 처음에는 차트상에서 성적이 괜찮았으나 전작들에 비해 너무나 빠르게 차트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그들은 엄청나게 발전된 볼거리로 포장된 “POP mart”투어를 행하고 아직 그들은 건재하다는 모습을 보여준다. 투어 후 그들은 북 아일랜드로 관심을 돌리고 활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98년 9월 그들의 베스트 앨범 [U2: The best of 1980-1990]을 발표한다. 1999년 초 그들은 Brian Eno와 Daniel Lanois를 프로듀서로 두고 새 앨범 작업에 들어간다. 그리고 2000년 초 U2는 보노가 각본에 참여하고 Mel gibson, Milla Jovovich등이 출연하고 그들의 절친한 친구인 Wim Wenders 감독이 연출하는 영화”The Million Dollar Hotel”의 사운드 트랙에 참여하여 “Stateless,” “The First Time”, “The Ground Beneath Her Feet”세곡의 노래를 들려준다.

디스코그래피
1980 Boy (Island)
1981 October (Island)
1983 War (Island)
1983 Under a Blood Red Sky [live] (Island)
1984 The Unforgettable Fire (Island)
1985 Wide Awake in America [live] (Island)
1987 The Joshua Tree (Island)
1988 Rattle & Hum (Island)
1991 Achtung Baby (Island)
1993 Zooropa (Island)
1997 Pop (Island)
2000 All That You Can’t Leave Behind (Interscope)
2000 All That You Can’t Leave Behind (Universal)
2000 Hasta la Vista, Baby: Live From Mexico City (U2 Limited )
2004 How to Dismantle an Atomic Bomb (Interscope)

링크
U2 Community
Rock On The Net

최근소식
U2가 그들의 통산 12번째 앨범을 발표할 계획을 밝혔다. No Line on the Horizon이라는 제목의 이 앨범은 북미에서 2009년 3월 3일 발매될 것이라 한다. Brian Eno, Daniel Lanois, Steve Lillywhite가 프러덕션을 돕는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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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dy Flip

Candy Flip은 Happy Mondays와 Stone Roses와 함께 레이브신, 매드체스터가 맹위를 떨치던 1990년대 맨체스터에서 밴드생활을 시작하였다. 비록 음악적 평가에서는 이들 밴드들에 미치지 못했지만 매드체스터 특유의 몽롱한 사운드를 고스란히 이어받아 이를 고급스러운 신디사이저 등 새로운 악기편성으로 재창조해내어 팬들의 지지를 얻었다. 특히 이들은 The Beatles 의 Strawberry Fields Forever를 클럽 버전으로 리메이크하여 영국 차트 3위에 오르고 영화 I Am Sam 의 사운드트랙에도 쓰이는 등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었을까? 그들의 오리지널 싱글 들은 Strawberry의 인기를 능가하지 못했다. Simon & Garfunkel의 Scarborough Fair를 리메이크했지만 그건 그냥 하나의 소품에 불과하였고 나머지 싱글들이 큰 인기를 얻었던 Stone Roses와 선명하게 비교되는 장면이다. 어쨌든 이들은 1991년 Madstock…The Further Adventures of Fish Rides a Bicycle 라는 긴 이름의 그들의 유일한 앨범을 내놓는다. 그리고 1992년 그룹은 해체하고 레이브신에서 사라졌다. 여기 소개하는 곡 Ask Why 는 그들 앨범에서 열 번째 트랙으로 라틴풍의 키타 연주와 부드러운 보컬이 잘 조화된 곡이다.

디스코그래피
1990 Strawberry Fields
1991 Madstock…The Further Adventures of Fish Rides a Bicycle

링크
아티스트 정보

Crowded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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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owded-house1” by Andwhatsnext, aka Nancy J Price – http://andwhatsnext.com/bands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1972년 Brian Timothy Finn, Phil Judd, Mike Chunn, Miles Golding, Mike Howard는 New Zealand에서 Split Enz를 조직했다. Finn과 Judd의 주도아래 그들은 서서히 인기를 얻어갔다. 이들의 음악에 매료된 Roxy Music의 Phil Manaznera는 그들을 London으로 데려가서 녹음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룹이 지속된 12년 동안 그들은 몇몇 히트곡을 보유하게 되었고 원래의 라인업은 대폭 교체되었다. 교체멤버 중에는 후에 Crowded House의 주축멤버가 된 드러머 Paul Hester와 Neil Finn(Tim Finn의 형제)이 포함되어 있었다. 1985년 Neil Finn과 드러머 Paul Hester는 베이시스트 Nick Seymour와 함께 새로운 그룹 Crowded House를 조직했다. 이듬해 그들은 셀프타이틀 앨범을 내놓았다. 이앨범에서는 Something So Strong과 Don’t Dream It’s Over가 크게 히트했고 마침내 1987년 2월 이 앨범은 미국차트 탑40에 진입하여 마침내 12위까지 진입하였다.

* 놀랍게도 Split Enz의 바이오그래피 Stranger Than Fiction 전권을 스캔해놓은 페이지가 있다~

디스코그래피
1986 Crowded House Capitol
1988 Temple of Low Men Capitol
1991 Woodface Capitol
1993 Together Alone EMI-Capitol
1998 Woodface [UK Bonus CD] EMI

Pet Shop Boys 소개글 하나

“난 PSB를 좋아해”
“그래? 그 사람들 게이 아닌가?” (그리고는 수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상대편)

현대사회의 유행이나 흐름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특히 연예산업은 ‘변화’가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으면 대중들이 외면하기 때문이다. 몇십년간 음악활동을 하면서 꾸준히 음악성을 인정받고 있는 아티스트들도 마찬가지이다.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변화하려고 노력한다. 현 팝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대에 맞는, 그리고 아티스트의 특성을 살린 그러한 음악적 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이러한 변화가 요구되는 가운데서도 PSB는 1980년대 초반부터 신디사이저를 이용한 디스코/테크노 사운드를 주무기로 치열한 팝시장의 경쟁에 나서서 큰 성공을 거두며 현재까지도 단 한번의 음악적 외도 없이 그 음악만을 고집해오고 있다. 그 결과로 현재 Synth Pop계에서 PSB의 존재는 매우 독보적이다.

그들이 86년 두 번째 싱글 ‘West End Girls’를 들고 나와서 미국 차트 1위를 차지하던 때 필자는 갓 중학교 1학년이었다. 그 당시 유일하게 빌보드 차트를 소개해주던 ‘2시의 데이트’의 애청자였던 나는 그들의 노래를 듣고는 단번에 반해버렸다. 잔잔한, 어찌 들으면 힘없이 중얼거리는 듯한 보컬, 그러한 보컬을 탄탄히 받쳐주는 영국식 테크노 사운드. 당시 미국 팝을 주로 듣던 나로서는 새로운 경험이었지만 곧 듀란듀란, 컬쳐클럽등 영국의 뉴웨이브 사운드에 마음을 뺏긴 나는 더 이상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1994년, 미국에 잠시 머물면서, 틈만 나면 레코드가게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어느 날 우연히 플라스틱마저 온통 주황색으로된, 매우 눈에 띄는 시디케이스를 진열대에서 발견하고는 무심코 집어들고 그것이 바로 펫샵보이즈의 그 당시 최신앨범인 였다. 그 앨범에서 가장 유명했던 싱글 ‘Go West’의 사운드가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손에 들었던 앨범을 내려놓을까 하다가 특이한 케이스를 보고 구입을 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은 광(狂)적인 팬이 되어 있다니 참 아이러니 하다. 아무튼 우연히 그렇게 집어든 시디에 온통 정신을 빼앗겼고, 그제야 펫샵보이즈의 이전 앨범들에게도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디스코/테크노만을 꾸준히 추구해온 그들의 음악세계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음을 깨달았다.

보컬을 담당하는 1954년생의 Neil Tennant는 역사를 공부한 사학도이고, 키보드를 연주하는 Christopher Lowe는 1959년생으로서 건축을 공부했다고 한다. 그들은 81년도에 팀을 결성했고 1983년 프로듀서 Bobby Orlando를 만나 첫 녹음을 하는데 그때 녹음한 곡이 ‘One more chance’와 ‘Opportunities’ 그리고 ‘West end girls’였다. 이들의 음악은 곧 런던을 중심으로한 영국의 클럽과 디스코에서 많은 팬들을 확보하게 되고 1985년에 그들은 EMI와 계약, 첫 싱글 ‘Opportunities’ (Let’s make lots of money)를 발표하게 되나 마이너 히트에 그치고 만다. 그 다음해 다시 발표한 싱글 ‘West end girls’로 영국을 비롯한 유럽, 그리고 마침내는 미국마저 정복하게 된다. 1986년 봄에 발표된 그들의 첫 앨범 에서의 음악적 방향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Synth pop(신디사이저를 위주로한 테크노팝)이 바로 그것이다. 그후 1987년 국내에도 잘 알려진 싱글 ‘It?s a sin’을 필두로한 앨범 , 그리고 1988년의 앨범 에서의 싱글 ‘It?s alright’, ‘Always on my mind’, ‘Domino dancing’ 등 역시 데뷔 당시의 음악적 성향을 그대로 간직한 앨범들이었다. 펫샵보이즈의 천재성이 가장 잘 드러난 앨범은 아마도 1990년 발표한 앨범 가 아닌가 싶다.

게이로 커밍아웃하다.

이 앨범에서는 히트싱글인 ‘Being boring’과 ‘So hard’에서 나타난 우수에 찬 테크노 사운드가 압권이다. 흥겨운 테크노사운드 외에도 그 뒤에 숨겨진 어두운 색깔 역시 간과 할 수 없는 그들의 인기 요인이다. 이러한 암울하고 우수에 서린 사운드에는 분명히 원인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필자 나름대로 열심히 그들의 자료를 모아보았다. 그러던 가운데 충격적인 소식 하나가 눈에 띄었다. 바로 닐 테넌트와 크리스 로우가 대중 앞에 자신들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당당히 발표한 것이다. 어떤 아티스트가 음악을 만들 때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것이 내면의 표출이 아닐까한다. 본의든 아니든 그 아티스트의 음악에는 그 아티스트의 생각과 자아가 담겨있는 것이다. 그들의 사회 비판적인 가사와 우울한 테크노사운드, 동성애를 노래한 사랑 노래등은 Gay문화가 잘 발달한 영국사회에서도 어쩔 수 없이 외면당하고 비판당해야 하는 동성애자로서,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1991년 그들은 이제까지의 활동을 결산하는 의미의 히트곡 모음집인 를 발표했다. 그들이 게이임을 떳떳이 밝힌 후에 그들은 앨범 의 발표로 이제까지 음악적 방향의 큰 전환을 꾀한다.

이제까지의 그들의 어두운 일면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밝고 긍정적인 사운드를 들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 비판에 초점을 두었던 그들의 메시지는 좀더 과감하게 자신들의 삶과 사랑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미국 게이 밴드의 대명사인 Village People(YMCA로 유명한)의 ‘Go west’를 리바이벌한 곡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서 West는 San Francisco를 의미한다는 의견이 지배적) 앨범 는 또 한번 세계적으로 Pet Shop Boys 열풍을 일으켰고 히트곡 ‘Go west’, ‘I wouldn’t normally do this kind of thing’, ‘Can you forgive her’ 등은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한 뮤직비디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수작들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1995년에는 그 동안 발표한 싱글의 b-side에 수록해왔던, 그들의 천재성이 번득이는 다소 실험적인 테크노로 구성된 2장짜리 앨범 로 비평가들에게 인정을 받으며 한편 팬들에게는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후 세계 순회공연, 데이빗 보위 등과의 음악활동 등의 재충전의 기간을 마치고 1996년에 최근 앨범인 을 발표, 서정적인 멜로디가 돋보이는 ‘Before’와 밝은 분위기의 ‘Se a vida e’가 히트를 기록했다.

PSB에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라이브 공연이다. PSB는 기타,드럼, 베이스, 키보드, 보컬로 이루어진 전통적인 밴드가 아니고 99% 프로그래밍과 반복에 의지한 Synth Pop밴드이기 때문에 무대에는 항상 덩그러니 키보드 하나가 놓여져 있을 뿐이다.

PSB가 라이브를?

첫 세계공연이었던 ‘Performance’에서 PSB는 이 빈 공간을 뮤지컬을 연상시키는 실험적인 내용의 ‘연극’으로 채웠다.

이들의 이러한 시도는 ‘PSB가 라이브를?’ 이라며 비관적으로 바라보았던 비평가들 사이에서 큰 호평을 받았고 뮤지션들의 라이브가 반드시 큰 볼륨의 음악과 흥분한 팬들로 이루어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것이었다. 대부분의 게이 뮤지션들이 앨범자체에는 그다지 그들의 성향을 드러내지 않지만 팬들과 직접 호흡하는 공연에서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보여주기 마련이다. 앨범 Very발표 후 가진 세계공연 ‘Discovery’는 ‘Performance’와는 달리 전용 콘서트 구장에서 벌인 대규모의 공연이었다. 10여명의 남녀댄서들이 거의 나체로 등장하여 동성애를 연상시키는 춤동작을 선보이는 등 이 공연에서 PSB는 매우 게이적인 성향을 보여준다. Bilingual발표 이후 런던의 Savoy극장에서 작은 규모로 가졌던 공연 ‘somewhere’에서도 남성흑인 댄서 한 명이 등장하는데 예외 없이 여성으로 분장했다가 남성으로 분장했다가 하면서 무대를 꾸며나간다.

현재 PSB가 진행중인 프로젝트중 게이 커뮤니티에 의미 있는 것이라면 1950년대 당시 찰리 채플린에 견주될 정도로 연극과 음악, 영화 등에 있어서 두각을 보인 만능 엔터테이너였던 영국의 Noel Coward 추모앨범 <20th century blues>(이 앨범은 Noel Coward가 만든 곡들을 엘튼존, 폴 메카트니, PSB등의 거물급 뮤지션들이 다시 녹음한 앨범이다)의 기획을 Neil Tennant가 맡았다는 것이다. Noel Coward는 당시 시대가 시대인 만큼 대중에 공개되길 꺼려했지만 그 자신은 게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여 년이 넘는 활동기간동안 꾸준히 자신들의 음악만을 고집해온 Pet Shop Boys. 그래서 그런지 그들의 85년 데뷔앨범이나 최근의 앨범이나 사운드나 구성 면에서는 아무런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이다. 가히 시대를 초월한 그들의 음악세계에 존경심을 감출 수 없다. PSB는 모르긴 몰라도 게이 커뮤니티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밴드가 아닐까 생각한다. David Bowie나 Elton John과 같은 거물급도 있지만 사실 그들은 ‘일반을 가장한 이반’의 이미지가 강하다. 노래 내용도 평범한 일반들의 것이고 그들의 생활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소문도 그들 주위에 허다했다. 하지만 PSB는 가십으로 유명한 런던연예계에서 성실한 게이뮤지션으로서 자신들의 삶과 사랑을 노래하면서 범 세계적인 인기를 얻으며 현재도 쉬지 않고 창작활동을 하는 거의 유일한 밴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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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Bloody Valent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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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linda Butcher” by Graham RacherFlickr.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My Bloody Valentine은 Velvet Underground, Sonic Youth, The Jesus & Mary Chain 등이 그래왔듯이 팝적인 곡쓰기의 컨텍스트내에서 “소음”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재정의하였다. 기타리스트 Kevin Shields가 주도했던 My Bloody Valentine은 80년대 중반 몇장의 EP를 발매하였고 1988년에는 한 시대를 정의내릴 수 있는 Isn’t Anything을 발표하였다. 이 앨범에는 Cocteau Twins류의 경쾌한 멜로디와 강렬하고 시끄러운 디스토션이 한데 섞여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비록 그들이 록앤롤의 전통적인 관습을 거부하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반(反)락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니다. 그대신 그들은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향한 강렬한 물결에 몸을 실어 락의 새로운 조류의 창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독특한 싸운드를 창조해냈다.

그들은 스튜디오 작업에 열중한 스타일이긴 하지만 또한 독특한 라이브로도 유명하였다. 그들은 공연 내내 거의 움직이지 않았고 관객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러한 그들의 독특한 무대 매너는 영국의 음악잡지들에 의해 “슈게이징(shoegazing)”이라 불리워졌다. 곧이어 일단의 슈게이저들이 등장하였는데 Ride, Lush, The Boo Radleys, Chapterhouse, Slowdive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곧 맨쳐스터씬과 함께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 영국의 인디락씬을 지배하였다. 슈게이징은 1991년에 피크에 올라섰다. 이 해에 My Bloody Valentine은 Loveless를 발표하였다. Isn’t Anything 에 이은 또 한번의 평론가들의 찬사와 적잖이 쌓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튜디오에만 틀어박혔다. 앨범 판매는 레이블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소속사인 Creation은 그들을 버리고 그 대신 Oasis를 선택하였다. My Bloody Valentine은 Island와 계약을 체결하고 1993년 한 자선앨범 컴필레이션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후… 멤버들은 뿔뿔이 흩어져 저마다 나름의 커리어를 쌓아나가고 있지만 아직까지 새로운 앨범은 나올 기미가 없다.

Members
Kevin Shields (guitar/vocals/sampler)
Bilinda Butcher (vocals/guitar)
Debbie Googe (bass)
Colm O’Ciosoig (drums/sampler)

Also:
Dave Conway (vocals)
Tina (keyboards)

디스코그래피

This is Your Bloody Valentine (1985)
Geek EP (1985)
The New Record By EP (1986)
You Made Me Realise EP (1988)
Feed Me with Your Kiss (1988)
Isn’t Anything (1988)
Ecstasy and Wine (1989)
Glider EP (1990)
Tremolo EP (1991)
Loveless (1991)

링크

Fan Page
Fan Page

이들이 최근 재결합할 것이고 새 앨범을 내놓을 것이라는 소문도 들리고 있다. 정말 그러하다면 최근 몇 년 동안의 80년대 밴드들의 재결합 붐 중에서도 가장 반가운 소식이 아닐까 싶다.(2008년 6월 현재) 재결합하고 내한공연까지 가짐(2014년 6월 현재)

Kissing the Pink

Kissing the Pink는 1980년 런던에서 결성되었다. 1983년 첫 앨범 Naked(우연히도 Talking Heads의 마지막 앨범의 이름과 같네요)를 발표했고 MTV는 그들의 뮤직비디오 Maybe This Day를 즐겨 틀었다. 이 곡은 색스폰 솔로가 잘 어울리는 다소 어두운 색조의 뉴웨이브/훵크 넘버다. 3년 뒤 이들은 다시 방송을 타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그들 스스로를 KTP라고 불렀다. 이번에 내놓은 앨범은 Certain Things Are Likely 다. 첫 싱글 One Step은 마이너 클럽에서 연주되었다. 1987년 이 곡의 Club Mix가 빌보드 댄스/클럽 차트에 올랐다. 이 잠깐의 성공 후에 그들은 다시 이름을 Kissing the Pink로 바꿨다. 하지만 인기는 점점 사그러져 갔다. 그 와중에 1993년 새 앨범을 발표하였지만 소속사 Sony로부터 버림받는다.

“Maybe This Day” peaked at #87 on the Billboard Hot 100.
“Certain Things Are Likely” peaked at #97 on the Billboard Hot 100 and at #1 on the Hot Dance Music/Club Play Chart.

Secession

Secession 은 1983년부터 1987년까지 활동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신스팝 밴드이다. 이들은 Peter J. Thomson, Carole L. Branston, Charlie D. Kelly, J.L. Seenan 으로 구성되었다. Human League 의 무미건조한 신스팝 음악이 조금 더 어두운 쪽으로 진화한듯한 인상을 주는 이들의 음악은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열성적인 팬들의 환호를 받았고 Touch, The Magician 등이 인기를 끌었다.(개인적인 애청곡은 Michael)

싱어 Peter J. Thomson 은 1990년대 후반에 사망하였다. 이들은 그들의 짧은 활동기간 동안 Beggars Banquet과 Siren Records의 두 군데의 레이블에서 활동하였다. 아쉽게도 이들의 유일한 정규앨범은 1987년에 발매된 A Dark Enchantment 한 장 뿐이다. 이 앨범의 CD는 극히 희귀하여 온라인에서 100달러가 넘는 값에 거래되고 있다.

디스코그래피
Singles
1983 – “Betrayal” / 1984 – “Fire I / 1984 – “Touch” [Beggars Banquet] / 1986 – “Michael” / 1987 – “The Magician” [Siren] / 1987 – “Promise” / 1987 – “Radioland” / 1987 – “Sneakyville” [Siren]

Album
1987 – A Dark Enchantment

1. Eventide 2:22 2. Promise 4:09 3. Love Lies Bleeding 4:35 4. Sneakyville 3:44 5. Winifred 3:44 6. The Box That Holds A Secret 5:24 7. Ocean Blue 5:03 8. Radioland 4:33 9. The Magician 4:23 10. Love Lies Bleeding (Reprise) 1:02 11. The Wolf 4:18 12. Eventide (Theme From A Dark Enchantment) 2:00 13. All The Animals Come Out At Night 4:07 14. Michael 4:08 15. Havoc 3:47 16. Promise Dub 5:19

링크
My Space Fan Page Cool!
그들의 음반 구입하기
A Dark Enchantment 리뷰
싱글 The Magician 감상

Blow Monkeys, The

영국의 4인조 The Blow Monkeys 는 Dr. Robert(본명 Bruce Robert Howard, 1961.5.2일 생) 이 주도하여 Tony Kiley(드럼), Mick Anger(베이스), Neville Henry(색서폰) 이 함께한 그룹이다. 어린 시절을 호주에서 보내며 펑크 밴드를 전전하던 Dr. Robert 는 1981년 영국으로 돌아와 The Blow Monkeys 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이른바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관악연주와 뉴로맨틱스적인 감성이 두드러지는 음악스타일인 Sophisti-Pop 계열의 음악을 선보였다.

1986년 이들은 AIDS 를 주제로 한 곡 Digging Your Scene 으로 영국과 미국의 팝차트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영국에서 그들의 가장 큰 히트곡은 It doesn`t have to be this way 으로 차트 5위까지 올랐다. 미국에서 이들은 영화 Dirty Dancing 의 사운드트랙 삽입곡인 You Don’t Own Me 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고급스러운 관악연주와 Dr. Robert 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매력인 이 곡은 원래 Lesley Gore 가 부른 곡이었으나 The Blow Monkeys 가 현대적인 감각으로 새롭게 재구성하여 인기를 얻은 곡이다.

Dr. Robert 는 1989년 Kim Mazelle 와 듀엣으로 Wait 를 불러 영국 팝차트 10위 안에 들었고 이후 1996년 솔로앨범을 내놓았다.

이름의 유래

– 그런데 블로 몽키즈란 그룹 이름은 어디서 유래된 것입니까?
런던으로 돌아오기 몇년전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생활했는데 원주민 가운데 한 부족의 이름이 영어로 번역하면 바로 블로몽키즈란 의미입니다. 바로 거기서 취한것입니다.

– 그룹은 어떻게 해서 만들었습니까?
1981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돌아와 작곡을 계속하는 동안에 클럽에서 네빌 헨리를 만났고 그 후에 나머지 2명도 뜻을 같이하는 동지같은 느낌을 받아 어렵지 않게 모이게 되었어요. 그래서 9개월간의 리허설 기간을 거쳐 클럽에 출연하게 되었고 곧바로 레코딩 계약도 맺는 등 모든것이 순조롭게 전개되었지요.

– 그럼 밴드의 맴버를 소개해 주시겠어요?
믹 앵커는 베이스. 런던에서 태어나 개성적인 모자와 구레나룻이 특징이죠. 좀 묘한 사람이에요 드럼의 앤토니 킬리는 전에 재즈를 했던 경험도 있어 우리들 중에서도 가장 음에 까다라운 사나이에요. 색소폰의 네빌 헨리는 전형적인 스코틀랜드 사람으로 굉장히 조용하죠.

#### 1986년 10월호 음악세계…

유사한 스타일의 뮤지션들
Icehouse, Go West, The Style Council, Terry Hall, Talk Talk, Ultravox, ABC, Spandau Ballet, Wham!, Johnny Hates Jazz

디스코그래피
1984 Limping for a Generation RCA
1986 Animal Magic RCA
1987 She Was Only a Grocer’s Daughter RCA
1989 Whoops! There Goes the Neighborhood RCA [U.K.]
1990 Springtime for the World RCA [U.K.]
1992 Spring Alex

관련링크
TourPress
The Official Web Site for Dr Robe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