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 Shop Boys 런던 공연 후기

2007년 5월 28일

당초 Pet Shop Boys 의 공연은 런던의 Hammersmith Apollo 공연장에서 저녁 7시에 시작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시간에 친구와 함께 차이나타운에 있는 Misato 라는 일본음식점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어쭙잖은 몇 번의 공연관람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이 공연도 역시 8시쯤에나 시작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공연장에 도착한 시간은 8시 10분 전이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공연은 이미 시작되었다.

Neil Tenant 옹께서는 예의 반듯한 연미복 차림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Chris Lowe 옹 역시 언제나 쓰고 있던 야구 모자를 쓴 채 신디사이저를 다루고 있었다. 일행과 나는 이미 겹겹이 쌓인 사람들 틈 사이를 비집고 앞으로 향했다. 워낙에 80년대 음악팬들 사이에서는 구매력이 있는 아티스트인데다 영국에서의 5년만의 공연이라는 것 덕분인지 꽤 큰 규모의 공연장이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 하지만 어느 리뷰에서도 언급했듯이 연령층은 아무래도 중년층에 더 가까워보였다.

무엇보다도 특이한 것은 – 사실 자연스러운 것이겠지만 – 관객의 절반은 게이나 레즈비언 등 이른바 동성애자들로 짐작되는 이들이었다는 점이다. Neil Tenant 스스로가 커밍아웃한 게이이고 그들의 음악 역시 대놓고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일렉트로닉 뮤직에 디스코를 감미하여 그 누구보다도 게이코드에 충실한 음악을 선보여 왔기 때문에 게이피플들이 이 애완동물가게소년들에게 보이는 각별한 애정은 이상할 것이 없었다.

Pet Shop Boys 의 공연 자체도 어찌 보면 게이코드에 맞춰져 있었다. 무대의 그래픽은 Gilbert And George 의 작품을 연상시켰고, 두 ‘소년’이 무대에서 그리 잘 움직이지 않는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채용된 댄서들의 춤은 이를 데 없이 게이스러웠다. 특히 댄서들이 – 한 댄서의 이름은 Naked Holiday 였다 – 황금빛의 카우보이 복장을 한 채 선보인 스퀘어댄스와 동구권 군인복장을 한 채 선보인 꽈배기 춤은 그 하이라이트였다. 거기에다 춤 솜씨 없는 Neil 아저씨께서 손수 통아저씨 춤까지 선보여 일행과 나는 통쾌하게 웃지 않을 수 없었다.(신은 Neil 옹의 춤 솜씨 대신 작곡실력과 노래 솜씨를 주신 것 같다)

이제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울’ 것이 없었다. 라이브이긴 하나 연주는 이미 프로그래밍된 것이었기 때문에 한 치의 오차도 없는데다 – 즉흥연주나 현장감을 중시하는 이들에게는 재미없을 것이지만 – Neil Tenant 의 보컬 역시 (대단한 실력이라고 해야겠지만) 스튜디오 앨범의 목소리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 청명한 코맹맹이 보컬이 앨범에서 듣던 바와 다름이 없으니 공연의 현장감은 두 위대한 ‘소년’들께서 내 눈앞에서 공연을 하고 계심을 보고서야 존재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기껏해야 쏘울풀한 보컬을 강조하기 위해 채용된 흑인여성 보컬의 애드립만이 현장감을 느끼게 해줄 뿐이었다.

여하튼 Rent, Being Boring, Always On My Mind, It’s A Sin, Home And Dry, Minimal, Suburbia, Opportunity 등 과거와 현재로 이어지는 그들의 히트곡이 연달아 연주될 때마다 플로어는 뜨겁게 달아올랐고 – 곳곳에서 게이들이 멋진 춤 솜씨를 선보였고 심지어 애정행각까지(!) – 새삼‘히트곡 정말 많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들이 가장 일심동체가 된 곡은 역시 게이들의 찬가라 할 수 있는 Go West 였다. Neil 옹의 지시 아래 관객들은 일사분란하게 Go West 를 외치며 서쪽으로 가자는 손동작을 했다. 그런데 신나는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어쩐지 쓸쓸하고 아련한 기운이 느껴졌다.

다음 날 Financial Times, Times2 등 몇몇 영국언론에서 발표된 그들의 공연에 관한 리뷰는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하기야 감히 누가 이 두 거물을 비판할 것인가? 공연을 해주심이 감지덕지한 것이지.

관련기사
http://www.ft.com/cms/s/7fca9f94-0df5-11dc-8219-000b5df10621.html http://www.digitalspy.co.uk/music/a58765/pet-shop-boys–hammersmith-apollo-may-27.html

연주 리스트
We are the Pet shop boys
Left to my own devices
I’m with Stupid
Suburbia
Can you forgive Her
Rent
Minimal
Opportunities
Shopping
Heart
Home and Dry
Se a vide e
Dreaming of the Queen
Flamboyant
Numb
Paninaro
Integral
Always on my Mind
Domino Dancing
West End Girls
Where the streets have no name
Sodom and Gomorrah show
It’s a sin
So Hard
Go West
Being Boring

일본의 뉴웨이브(New Wave)씬 – 글:이종현

안녕하세요. 세 번째 시간을 맞이하는 ‘J’s Musis’의 이종현 입니다. 지난 2주간 밴드붐과 일본의 여성 싱어송라이터에 대해 얘기를 해봤는데요, 오늘은 뉴 웨이브 편을 2주에 걸쳐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원래 다음주 예정이었던 ‘비주얼 락’ 편은 3월 경에 횟수를 늘려서 다뤄드리기로 할께요.

전셰계적으로 펑크와 디스코가 큰 인기를 모으던 70년대 후반이 거하고 이념, 사상과는 별개의 보다 진보적이고 세련된 음악으로 등장했던 것이 바로 뉴 웨이브죠. MTV로 대표되는 영상 세대를 주요 타겟으로 시작됐던 뉴 웨이브는 포스트 펑크를 비롯, 많은 80년대 음악의 기초가 되기도 했으며 테크노, 얼터너티브 탄생에 큰 역할을 하게 됐습니다.

일본의 경우 뉴 웨이브는 거의 영미권과 비슷한 시기인 70년대 말에 시작돼 80년대 중반이후 테크노로 대표되는 전자음악과 비주얼 록으로 그 스타일이 나눠지게 됩니다. 한마디로 일본의 뉴웨이브는 테크노나 비주얼 록의 전향없이 80년대 초반 스타일을 꿋꿋하게 지켜가는 뉴 웨이브 밴드들이 적지 않게 있으며 이 중에는 해외 진출에도 성공한 케이스가 꽤 많기도 하죠. 나이스 뮤직이 일본 시장은 물론 해외 진출에까지 이름을 떨치기도 했습니다.

뉴 웨이브 씬을 굳이 언급해야하는 이유는 90년대 일본 대중음악을 뒤흔드는 수많은 실력자들이 과거 뉴 웨이브 바람을 타고 등장했던 수많은 밴드의 일원이었기 때문이죠. 문화진보를 요구했던 뉴 웨이브 전사들은 10수년이 지난 현재의 주체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YMO < Be a Superman > 일본 뉴 웨이브의 시작은 70년대 중반 이후 전설적인 두 팀이 등장하면서 부터입니다. 바로 YMO라고 불리는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와 플라스틱스가 바로 그들이죠. 뉴 웨이브의 시작이자 상업주의 전자음악의 시작으로 알려지는 이들은 멤버 개개인이 뛰어난 역량을 지니고 있었으며 음악뿐만이 아니라 일본 열도의 문화 전반을 움직이는 주체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3인조로 구성됐던 YMO는 일본 보다 영국에서 먼저 화제를 모았던 특이한 팀이예요. 60년대 사카보토 큐 이후 전무했던 일본 뮤지션의 해외 진출이라는 염원을 쉽게 달성해 준 장본인임과 동시에 해외 뮤지션을 일본에 불러들이는 공로를 갖고 있는 팀이 바로 YMO입니다.

YMO after playing a 2008 concert in London. From left to right: Ryuichi Sakamoto, Yukihiro Takahashi, Haruomi Hosono
By YMO2008.jpg: The_Junes of Flickr.comderivative work: Solid State Survivor (talk) – YMO2008.jpg, CC BY 2.0, Link

밴드 해체 이후 사카모토 류이치는 영화 음악과 현대 음악의 일인자로 세계 시작에 진출했을 뿐 아니라 로버트 프립, 데이빗 실비앙 등과 작업을 하기도 했으며, 패션 디자이너 출신인 다카하시 유키히로는 패션몰 경영과 함께 솔로 작업을 계속 했습니다. 또한 음악적인 부분의 핵이었던 호소노 하루미는 일본 앰비언트 뮤직의 제왕으로 군림하며 아이돌 출신 여가수 모리타카 치사토를 부인으로 얻기도 했죠.

YMO 못지 않는 수퍼 멤버 진용을 갖추고 있던 플라스틱스는 해외 활동보다는 내수용 밴드로 각광을 받았었죠. 5인조로 시작된 플라스틱스는 대학생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밴드 해체 후 사토 치카와 나카니시 도시오는 멜론이라는 팀을 결성해 플라스틱스의 맥을 이어 갔습니다.

한편 밴드의 간판이었던 사쿠마 마사히데는 프로듀서로 변신해 주디 앤 매리, 글레이, 구로유메 등의 앨범에 참여하며 90년대 가장 성공한 프로듀서로 평가받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음악과 그래픽 디자이너를 겸하는 종합 예술인 다지바나 하지메는 로우 파워스라는 밴드를 결성해 명상 음악에서부터 펑크에 이르는 다양한 음악을 구사하고 있죠.

뉴 웨이브 음악이 주류 음악과 결탁하면서 더 이상의 뉴 웨이브로의 구실을 못하고 있을 즈음 인디 씬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뉴 웨이브들이 대거 등장했습니다. 이념적으로는 펑크를, 사운드 기법적으로는 모던함을 추구한 이들은 비교적 전자 음악의 성향은 강하지 않았지만 아이돌 스타 발굴에 혈안이 되어 있던 대중 음악 씬에 자극제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었죠. 일풍당(一風堂), ZELDA(젤다), 우초텐(有頂天), 래핑노즈, 로사 룩셈부르그 등이 활동했습니다. 이들은 메이크업을 동반한 퍼포먼스성 공연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80년대 말부터 대학가를 주변으로 새로이 인기를 얻는 음악들이 발굴되고 있었어요. 그런 분위기를 통해 발굴된 팀이 오카무라 야스유키, 카스테라, 소프트 발레, 디렉스(De-Lax), 매스커린 드라이브, 뉴에스트 모델 등이 있습니다. 싱어송 라이터이자 건반 연주자인 오카무라 야스유키는 발라드를 구사하는 가수로 지식인의 사랑을 얻는 독특한 케이스의 뮤지션입니다.

철학적인 노랫말이 돋보였던 카스테라는 기존 음계를 파괴하는 실험을 꾸준히 펼쳐 유니콘과 더불어 대학가의 큰 사랑을 받았던 학생 밴드였는데요, 리더였던 토모프스키는 밴드 해체 후 현재 솔로로 활동을 하고 있죠. 비주얼 매니아들에게까지 크게 어필했던 소프트 발레는 드페쉬 모드를 모델로 활동했던 뉴 로맨틱 계의 팀이죠. 보컬리스트였던 엔도 류이치가 최근 솔로 활동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80년대 비주얼 록/테크노에 파장을 남겼던 뉴 웨이브는 90년대 이후 컬리지 록/얼터너티브/노던 롤이라는 의미로 변신하며 매니아들을 중심으로 아직까지 살아 숨쉬고 있죠. 이중 여성 보컬을 앞세운 데이트 오브 버스, 딥 인더 풀, 살롱 뮤직 등은 일본 시장은 물론 해외 진출에까지 이름을 알린 바가 있습니다.

2주에 걸쳐 70년대부터 90년대에 걸친 일본의 뉴웨이브 음악들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아쉬움이 남지만 못다한 얘기는 다음 기회에 계속 이어드리도록 하구요, 2월의 ‘J’s Music’ 예고를 해드릴께요. 이제 보다 깊숙히 일본 음악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하는데요, 2월엔 3주동안 일본의 힙합 음악에 대해 특집으로 알아볼 예정입니다. 일본 힙합의 역사, 대표적인 힙합 뮤지션, 일본이 낳은 대표적인 힙합 DJ까지. 그리고 3월에는 여러분들이 기다리시는 비주얼 락에 대해 역사와 음악의 특징, 어떤 뮤지션들이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죠. J’s Music 앞으로도 많은 사랑과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일본의 뉴웨이브 편 2부를 모두 마칠께요. 지금까지 이종현이었습니다.

http://www.mbc.co.kr/NETOP/9901/jsmusic/jsmusic3.html

Glam Rock

영화 Velvet Goldmine으로 인하여 어느새 친숙한 장르가 되어버린 글램락은, 70년대 영국에서 일어난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다. 글램락의 대표적인 특징은 기발한 의상과 기본적이고 단순한 Rock n’ Roll 리듬을 바탕으로 한 음악이다. 60년대 말에서 70년 대 초는 록음악 과도기의 절정이었다. 록음악이 음악적 허약기를 거쳐 회복하는 시기였다. 그 발전은 음악의 발전이 으례히 그러하듯, 기존의 음악에 대항하는 위반과 도발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즈음의 하드록 밴드나 프로그레시브 밴드의 음악에 식상해진 일부 사람들은, 록음악이 최고였고, 한껏 차려입는 것이 멋지다고 생각되었던, 50년대 말 60년대 초의 음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한계를 인식하여 뿌리를 찾으려는 시도였지만 동시에 뿌리 자체를 풍자하는 움직임이기도 하였다.

록은 연극적인 것이 되었으며, David Bowie는 그러한 경향을 좀더 가다듬고 기술적으로 완성시켰다. 기본으로 돌아가고, 화려하게 치장하자,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바로 글램락이다. 글램락 탄생의 주역은 글램락의 왕자라고 불리는 Marc Bolan이라고 할 수 있다. 1970년, 어쿠스틱 음악을 하던 Tyrannosaurus Rex (Marc Bolan, Micky Finn) 는 이름을 T-Rex로 바꾸고, 보다 기계적인 음이 들어간 음악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크게 히트를 쳐 글램락 시기를 열어가기 시작하였다. Velvet Goldmine은 David Bowie를 모델로 하였지만, 실제로 글램락을 얘기할 때는 그보다는 Marc Bolan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에는 견해 차이가 있다. 어느 쪽에서는 David Bowie와 Lou reed를 글램락의 중심 인물로 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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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Bowie Early” by Rik Walton – http://www.flickr.com/photos/rikwalton/2259388449/ http://www.rikwalton.com.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David Bowie는 1969년 Space Oddity로 히트를 쳤지만, 72년 그는 Ziggy Stardust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의 밴드 The Spiders From Mars (Mick Ronson (G), Trevor Bolder (B), Mick Woodmansey (D)) 와 함께 활동을 시작하였다. Mott The Hoople은 그때까지의 앨범 3장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해 밴드를 해체할 분위기에 있었지만, David Bowie가 그들에게 써준 곡 ‘All the Young Dudes’의 성공으로 복귀하였다. Roxy Music(Bryan Ferry, Phil Manzanera, Brian Eno, Andy Mackay, Paul Tompson, Graham Simpson)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Bryan Ferry는 얼마 동안은 이런 겉치레를 거부하였으나 Roxy Music과 함께하면서부터 화려한 옷과 분장의 쾌락을 재발견하였다. Slade와 Sweet도 사랑 받은 글램락 밴드였다. 특히 Slade는 그 짧은 괴상한 앞머리로 그 당시 뭇 소녀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미국에서 Alice Cooper가 그의 밴드와 함께 이 흐름에 합류하였다. 이들 글램락 밴드들(특히 Sweet)은 기상천외한 무대의상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였고, 무대 위에서 공공연한 동성애적 행위를 하였는데 그들 중 실제로 동성애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다 ‘쇼’의 일부였던 것이다. 1973년은 말 그대로 글램락의 전성기였다. Gary Glitter, T-Rex, Slade 등은 ‘Do you wanna touch me’. ’20th century boy’ 등 잇달아 히트곡을 발표하였고, Bowie도 ‘Life on Mars’라는 히트곡을 낸다. 글램락은 영국을 휩쓸었지만, 모두에게 환영 받은 건 아니었다. Marc Bolan과 Slade는 물론이고, 그 굉장한 David Bowie조차도, ‘진짜 음악 팬’이라는 무리들에게 비웃음을 받았다. 그들은 화려한 머리모양과 복장을 경멸했기 때문이었다. 헤진 청바지가 그들의 복장이었다. Bowie가 복권(?)한 것은 펑크 밴드들이 그를 추앙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1974년을 시작으로 글램락은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Gary Glitter는 은퇴를 선언하였고, Slade는 발라드를 내기 시작했다. Marc Bolan은 솔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David Bowie는 ‘Diamond Dogs’ 를 냈는데, 그의 글램락 캐리어는 1972년의 앨범 ‘Ziggy Stardust’ (혹은 Aladin Sane) 에서 절정을 이루어 이미 쇠퇴하고 있었다. 그리고 1975년, 글램락은 실질적으로 끝이 났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이 시기의 글램락은 몇 년 후에 크게 일어나는 punk와 뉴 웨이브 음악의 바탕을 이룬다. 미국 펑크 음악의 시초는 Velvet Underground나 Stooges를 치지만, T-Rex나 Alice Cooper의 음악에서도 펑크 분위기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cf.)글램락이 크게 인기를 끌자, 그 아류도 족족 생겨났다. Elton John도 그 아류 중 한명이었는데, 말하자면 글램락의 화려함과 기상천외함, 음악적 특징 가운데 ‘기상천외함’에서만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기에 그가 발표한, 글램락 분위기를 살짝 풍기려다 아주 마는 ‘Rocket Man’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어쩔 수 없는 졸작이다.

주요 아티스트

Marc Bolan
David Bowie
Gary Glitter
The New York Dolls
Roxy Music
Slade
Sweet
T. Rex

주요 앨범들

David Bowie: Rise & Fall of Ziggy Stardust [1972]
The New York Dolls: New York Dolls [1973]
David Bowie: Hunky Dory [1972]
Mott the Hoople: All the Young Dudes [Columbia] [1972]
Eno: Here Come the Warm Jets [1974]
David Bowie: Changesbowie [1990]
Iggy & The Stooges: Raw Power [1973]

뉴로맨틱스(New Romantics)

뉴로맨틱스는 펑크 무브먼트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영국에서 등장한 개념이다. 다양한 시기의 여러 음악적 성향의 아티스트들이 뉴로맨틱스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는데 궁극적으로 특정 싸운드나 스타일이라기 보다는 한 시대를 표현하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펑크가 영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부각시키며 반사회적인 성향을 띄었던 반면 뉴로맨틱스는 자극과 화려한 의상, 그리고 쾌락을 찬미하였다. 이 세대의 주된 선전도구는 비데오였고 두드러진 두발(A Flock of Seagulls ), 하늘거리는 셔츠(Duran Duran, Spandau Ballet), 마스카라를 한 남자들, 키타를 대체한 신써싸이저 들은 이들의 표상이 되었다. 이 경향의 지렛대 역할을 한 이는 1980년에 Classix Nouveaux, Blancmange, Depeche Mode, Soft Cell와 같은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담은 괴짜 컴필레이션을 발표한 Steven Pearse였다. Blitz와 같이 런던에 위치한 클럽에서 일군의 뉴로맨틱 밴드들이 활동하였고 이들의 이정표는 ‘미래주의적’인 음악이었다. 셔필드에서 활동하였던 휴먼리그는 뉴로맨틱의 주요한 특징을 규정지워주는 신써싸이저의 활용의 모범을 보였고 Adam And The Ants는 펑크의 연장선상에서 뉴로맨틱스로 나아갔으며, 컬쳐클럽은 언더그라운드를 벗어나 챠트에서 빅히트를 기록함에 따라 메인스트림으로 나아갔다. 데이빗 보위가 뉴로맨티즘의 선구자라면 Japan은 동양에 대한 신비주의로 무장한 뉴로맨티즘의 행동부대였다. 그리고 가장 커다란 성공을 거둔 뉴로맨틱 밴드라면 말할 것도 없이 듀랜듀랜과 스팬도발레였다.

* http://www.pure80spop.co.uk/romantics.htm 를 번역

New Romantics의 기원

댄쓰뮤직이 미국에서 점차 인기를 잃어가고 있을 즈음 영국의 클럽에선 패션과 예술이 조화된 새로운 음악이 선보이기 시작했다. DJ Steve Strange와 Rusty Egan은 Billy’s라는 디스코클럽에서 ‘David Bowie 중심의 프라이데이 나잇쇼’를 선보이면서 공동작업을 시작했다. 그들은 데이빗보위와 락시뮤직의 음악을 틀어댔고 성향이 약간 틀리긴 하지만 Kraftwerk도 틀곤 했다. 그들의 그룹 Visage는 보다 많은 음악을 클럽에서 선보이기 위한 스튜디오 실험밴드였다. 이들은 후에 Covent Garden에 있는 the Blitz club으로 자리를 옮겼다.

언론에서는 Steve Strange를 New Romantics와 동일시하였다. 예술학교 학생과 패션학교 학생들이 그의 주위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의 패션은 정성스럽게 분장한 얼굴에서부터 buckskin(노르스름하고 부드러우면서 질긴 사슴[양] 가죽. : 역자주) 바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오래지 않아 이러한 경향이 음악계 전반에 유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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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dau Ballet in Concert, Liverpool Echo Arena” by Andrew Hurley – originally posted to Flickr as Spandau Ballet in Concert, Liverpool Echo Arena.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The Blitz club에서는 Spandau Ballet가 활동하고 있었다. Spandau Ballet는 1979년 가을 New Romantics의 음악적 중심에 서고자 하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결성되었다. ‘펑크에 대한하는 뉴로맨틱스(The New Romantics rebelled against Punk)’는 이 시대의 언더그라운드 클럽을 점령하였다. 펑크와는 대조적으로 New Romantics는 정중하였으며, 패션에 매우 신경을 썼다. Spandau Ballet의 음악은 씬써싸이저에 기초를 둔 댄쓰팝었으며 그들의 수려한 외모는 그들이 영국과 미국에서 스매싱히트를 기록하는데 일조하였다. To Cut a Long Story Short와 Freeze 는 미국 댄쓰챠트에서 히트를 쳤다. 역설적이게도 이들의 최고의 히트곡은 낮게 읊조리는 쏘울넘버 True 였다.

Visage는 곧 New Romantic의 supergroup 대접을 받았다. 그들은 Ultravox의 멤버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영국과 미국에서 Tar라는 곡들을 통해 인기를 얻었다. 많은 수퍼그룹이 그렇듯이 그들은 계속되는 내분속에 결국 1983년에 해체하고 만다.

New Romantic movement는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1984년을 끝으로 영향력은 급격히 감소했다. 그러나 패션이 음악만큼이나 중요했던 런던뮤직씬에서 탄생한 Depeche Mode와 Duran Duran 가 새로운 상속자가 되었다.

New Wave의 태동

“New Wave”란 무엇인가? 분명이 뉴웨이브는 (대략 1979년부터 시작된) 저널리스트, 레코드사, 디스크쟈키 등이 더이상 그것을 펑크라고 부르기 원하지 않았던 포스트펑크(Post-Punk) 시대의 음악이다. 펑크가 확실히 성공작이긴 했지만 아직도 한 밴드를 “펑크”로 묘사하는 것은 상업적으로는 자살행위였다. 왜냐? 그것은 주로 펑크락이 추방된 아웃싸이더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펑크는 보다 전통적인 락과 팝 청중들에게 조악함, 급진적, 외곬수라는 표현과 동격이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New Wave”라는 단어는(1950년대 후반 프랑스의 아방가르드 영화에 대한 묘사에 처음 쓰였던) 진보적이고, 이질적이긴 했지만 반드시 위협적이지는 않은 밴드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또한 이들은 소위 상업적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도 않았다.

미국에서 펑크/뉴웨이브 이분법은 펑크락이 한 단어로 인식되기 시작하고부터 시작되었다. 뉴욕의 바우어리(Bowery)거리의 CBGB에서 Ramones, Richard Hell, 그리고 The Voidoids는 “펑크”였다. 그러나 Blondie와 Talking Heads는 “뉴웨이브”였다. 또한 이제 막 싹을 틔우는 언더그라운드 뮤직씬에서는 The Cars, The Motels, Go Go’s, Pere Ubu, Jonathan Richman, B-52s, R.E.M, Devo, X, Blasters, Residents 등이 뉴웨이브라 불리우며 기량을 뽐내고 있었다. 그들은 펑크락에서 음악적 영향을 받았지만 보다 “덜 사회적(Anti-social)”이고 보다 “상업적(Marketable)”이었다. 이는 곧 종래에는 결국 거의 모든 밴드들이 펑크보다는 뉴웨이브에서 보다 큰 상업적 가능성을 염두에 둔 메이저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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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athan-richman” by Tekcran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같은 카테고리에 싸그리 몰아넣기는 했어도 Motels의 창백하고, 유아론적이고, 라디오 친화적인 음악과 지적이고, 괴짜스타일이고(Bizzare), 도전적인 Pere Ubu의 아트펑크(Art-Punk)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또한 “뉴웨이브”로 포장된 몇몇 퍼포머들은 사실 펑크락의 시대 이전에도 활동하고 있었다.(예를 들어 Richman and the Residents) 또는 몇몇은 상업적으로 전혀 어필하지 않는 요상한 밴드들이었다.(예를 들어 뉴욕의 “No Wave” 씬) 분명한 것은 장르의 규정기제로서의 뉴웨이브는 많은 배경들을 아우르려고 시도하였고, 결과적으로 거의 그 역할이 무의미해졌다. 파워팝(Power-Pop)밴드들도 뉴웨이브였고, 아트펑크(Art-Punk)도 뉴웨이브였고, Blasters와 같은 루트락(Roots-Rock) 수정주의자들도 뉴웨이브였고, B-52s같은 대중 취향의 댄스락도 뉴웨이브였다. 이런 민주적이고 스타일의 자유방임주의는 익싸이팅하긴 하지만 동시에 혼란스러웠다. 그저 좋은 락음악을 원하는 락팬들에게는 거의 의미없는 짓이었다.

바다 건너 영국에서는 펑크의 침공, 펍록(Pub Rock)의 “반(反)팝스타(Anti-pop-star)”적인 자세, 그리고 몇몇 최상급의 싱어/송라이터들이 한데 결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Elvis Costello, Graham Parker, 그리고 Nick Lowe는 풍자와 독설로 가득찬 락을 창조해냈다. 그리고 대부분은 70년대 초반의 미국 싱어/송라이터들이 지니고 있었던 나르시즘적이고 자기집착적인 자세로부터 자유로웠다. 노동계급의 증오를 여전히 지닌채 영국 뉴웨이브는 미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거의 모든 음악을 품어 안았다. 스코틀랜드의 B-52s라 할 수 있는 스피디한 트래쉬팝(Trash-Pop) Rezillos, 어둡고 침침한 Joy Division(Ian Curtis의 죽음 이후 댄스락 New Order로 변신한), 노이즈락(Noise-Rock) Pop Group, 계산적이고 멜로딕한 팝펑크 Mekons와 Gang Of Four, 페미니스트 레게-훵크(Reggae-Funk)의 Slits(펑크와 뉴웨이브 시대를 동시에 아울렀던), 싸이키회고적인(Retro-Psychedelia) Cure, 그리고 이후의 Happy Mondays, Inspiral Carpets, Smiths 가 뉴웨이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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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Mondays June 30 2006” by Stig Nygaardhttp://flickr.com/photos/stignygaard/338529623/.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그리고 별 쓸모없는 음악을 만들어 냈던 네오모드(Neo-Mod) 운동과 같이, 영국 뉴웨이브와 관련된 소극적인 복구 운동의 움직임도 있었다. 그리고 단명(短命)하긴 했지만, Specials, Selecter, Madness와 같은 위대한 밴드들을 배출해낸 스카 리바이벌도 있었다.

오늘날, 한때 뉴웨이브라 불렸던 것들이 이제는 얼터너티브라 불리운다. 아이러니칼하게도 70년대 후반 비상업적이라고 치부되었던 펑크의 버저(Buzzsaw) 키타 싸운드는 90년대에 Green Day나 Offspring과 같은 메가히트 밴드들을 탄생시켰다.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는데 “어떻게 그토록 다양한 부류의 음악을 연주하는 밴드들을 한 카테고리에 싸그리 몰아넣을 수가 있을까?”가 그것이다. 대답은 위대한 뉴웨이브 밴드는 무엇으로 불리든지 과거에도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멋진 음악들이 뉴웨이브로부터 영향받았고 이로 인해 뉴웨이브는 현대 락히스토리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추천음반>>

Pere Ubu, The Modern Dance
X, Los Angeles/Wild Gift
B-52s, The B-52s
Devo, Q:Are We Not Men? A:We Are Devo!
Residents, Meet The Residents
Talking Heads, Popular Favorites : 1984-1992 Sand In The Vaseline
The Modern Lovers, Modern Lovers
Blondie, Best Of Blondie
Rezillos, Can’t Stand The Rezillos : The Almost Complete Rezillos
The Smiths, The Singles
Elvis Costello, My Aim Is True
XTC, Waxworks-Some Singles 1977-1982
Joy Division, Unknown Pleasure
The Cure, Standing On A Beach:The Singles
The Slits, Cut
The Blasters, Blasters Collection
New Order, Movement

AllMusic 참조

Synth 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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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travox 04111981 01 600” by Helge Øverås – Own work. Licensed under CC BY 3.0 via Wikimedia Commons.

신스 팝(Synth-Pop)은 뉴웨이브(New Wave)의 서브 장르이며 그 감성과 시각적 개념인 뉴로맨틱스(New Romantics)와 혼용된다. 뉴웨이브는 포스트-펑크(Post Punk)등을 포괄하는 상당히 광범위한 개념이며 뉴웨이브=신스 팝을 동일시하는 것은 오류이다. 80년대 초반 영국의 록시뮤직(Roxy Music)이나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 등의 영향이 극명한 게리 뉴만(Gary Numan), 울트라복스(Ultravox), 휴먼 리그(Human League), 디페쉬 모드(Depeche Mode) 등이 독일 크라우트-록(Kraut-Rock)의 일렉트로닉 이노베이션을 적극 수용하여 신스 팝을 개척한다. 초기 신스-팝은 오히려 차갑고 강박적이었으나(←Gothics) 최초로 신스-팝에 댄스비트를 노골적으로 차용하여 릴랙스하게 이완시킨 것은 듀란듀란(Duran Duran)이었다. 듀란듀란은 곧 스타로 등극했고 당연히 ‘트렌드’ ‘스타’를 복제하는 많은 밴드들이 존재하며 신스-팝은 전성기를 구가한다. 그러나 휴먼 리그, 유리스믹스(Eurythmics), 하워드 존스(Howard Jones)등을 제외하고는 단발적인 원-히트(One Hit)밴 드로 곧 소멸했으며 1984년부터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한다. 신스팝은 최초로 신디사이저가 메인스트림 팝 음악의 주요악기로 등극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그러나 역시 신스 팝은 전자 음악이라기보다는 팝에 침투한 전자 바이러스 정도로 진단할 수 있다.

Artist
Gary Numan, Ultravox, Human League, Depeche Mode, Erasure 등

몇몇 앨범들

  • Nik Kershaw: Anthology
  • Heaven 17: Best of Heaven 17: Higher & Higher
  • Thompson Twins: Master Hits: Thompson Twins
  • Orchestral Manoeuvres in the Dark: Singles
  • Joseph Victor Sieger: Self-Portrait
  • a-ha: Hunting High and Low
  • New Order: Best of New Order

AllMusic 참조

New Wave와 뮤직비디오

음악과 영상의 조우

19세기말에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서 영화라는 것이 탄생되었다. 그리고 시기적 전후관계는 확실하지 않지만, 거의 동시대에 애디슨에 의해서 축음기가 발명되었다. 물론 초기의 영화는 소리를 삽입하는 기술에까지는 미치지 못한 무성 영화의 형태를 가졌었고, 부가적 설명은 상영과 동시에 리얼타임으로 들어가는 변사의 대사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영상과 사운드의 결합이 당연히 사운드 트랙은 팝음악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하게 되었다.

팝/록음악과 영화와의 첫 번째 조우는 1955년의 ‘블랙 보드 정글(Blackboard Jungle)’에서 부터이다. 이 영화의 테마가 바로 최초의 록큰롤이라고 알려진 ‘Rock Around The Clock’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록큰롤의 황금기였든 50∼6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즉 ‘사운드 오브 뮤직’이나 웨스트 트랙(그 자체로도 하나의 독립된 장르를 형성하는)에 이르기까지 음악과 영상은 서로 맞물려서 성장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애초에 음악이란 것이 청각적 감성을 자극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시점에서부터 음악을 영상과 떼어놓고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러한 사실의 이면에는 아마도 뮤직 비디오라는 매개물이 큰 작용을 하지 않았나 싶다.

현대 대중음악, 즉 팝 음악은 텔레비전이라는 매체 없이는 이토록 크게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MTV는 뮤직비디오의 발전에 시너지 효과를 가져다 준 매우 영향적 매체였다고 할 수 있다. 81년 5월에 조사한 통계에 의하면 당시 빌보드 Hot 100챠트에 오른 100곡의 노래 가운데에서 비디오 클립이 제작된 노래는 23곡뿐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해인 1982년에는 30곡이 제작되었고, 83년에는 챠트에 오른 100곡 가운데서 59곡이 비디오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86년에는 82곡이 만들어져 있었고, 요즘에는 대체적으로 100곡이 거의 다 비디오로 제작된다.

뮤직 비디오의 선구자들과 걸작

비디오 1979년에서 80년대 초까지 런던에서는 뮤직비디오의 새로운 개척자들이 속속 등장한다. 호주 출신의 러셀 멀케이는 버글스의 대표작 ‘Video Killed the Radio Star’를 만들었고(’79), 데이빗 머렛은 붐타운 랫츠의 ‘I don’t like mondays’를 역시 79년에 만들었다. 그리고 브라이언 글랜드라는 영화감독은 그룹 M의 ‘Pop Music’을 80년대에 만들었다. 같은 해, 뮤지션 출신의 고들리 앤 크림은 듀란듀란의 ‘Girl on Film’을 만들게 되었다. 스티브 바론은 잼의 ‘Strange Town’을 78년에 연출했다. 그는 나중에 아하의 ‘Take on Me’를 제작해서 실력을 인정받고, 선풍적인 인기를 얻는 연출가가 된다. 오늘날 뮤직 비디오는 연출계의 대부들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들은 런던에서 주로 뉴웨이브계 아티스트들의 뮤직 비디오를 만들었다. 뮤직 비디오가 프로모션용 필름으로 시작해서 하나의 예술로 승화되기까지는 위와 같은 초기 뮤직 비디오 감독들의 노력이 컸고, 또한 24시간 뮤직 비디오 방송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민 MTV의 모태가 되었다는 사실은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1983년에 들어서면서 대작 비디오 클립들이 차례로 제작되어지는데 무려 10만 달러를 들여서 제작된 마이클 잭슨의 ‘Beat It’, 빌리 조엘의 ‘Pressure’, 폴리스의 ‘Every Breath You Take’등, 이들이 모두 당시의 걸작 뮤직 비디오들이었다. 그 해 화제를 불러일으킨 작품은 14분 짜리 대작 뮤직 비디오 ‘Thriller’였다. 영화 “블루스 브라더스(Blues Brothers)”의 존 랜디스 감독의 작품이었다. 그 후 영화 감독에 의한 비디오 클립이 수없이 나오게 된다. 윌리암 프레디킹에 의한 로라 브레니건의 ‘Self Control’, 스탠리 큐브릭이 연출한 라이오넬 리치의 ‘Dancing On A Ceiling’, 흥행수입 1억 달러를 벌어들인 영화 “Flash Dance”는 뮤직 비디오 기법으로 제작이 된 영화로서 화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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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jthriller” by Poolparty. Licensed under Wikipedia.

이러한 뮤직 비디오 제작이 주는 또 다른 가치는 비디오 촬영 및 제작 사업의 활성화로, 젊으나 film maker들이 적은 예산으로 자신의 창의성을 발휘, 하나의 등용문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앞에서 거론했던 russell Mulcahy 등이 당시 회고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Buggles, Ultravox, Rod Stewart, Kim Carnes, Bonnie Tyler) 이들은 거의가 20대로 TV, Movie와 함께 자라나 세대, 즉 ‘TV Babies’였다. 비디오의 내용들은 매우 stylishgkrh 시각적으론 adventurous했으며 점차 도발적이고, sexual 하게 발전하기 시작했다.(Olinia Newton John의 ‘Physical’-Brian Grant)

1982년 가을에는 그 sexy함이 최고조에 달하여 심지어 Transsexuals and The Bath’같은 프로그램이 나올 정도였다. 이후 주목할 만한 가수가 나오게 되는데 바로 Duran Duran이었다. 그들이야말로 뮤직 비디오를 가장 빠르게, 가장 계산적으로 잘 이용한 가수로 알려졌는데, Rolling Stone지는 “They may be first rock band to ride in on a video wave”라고 쓸 정도였다.

뮤직 비디오 부문을 거론함에 있어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인물이 있다면 그는 바로 Michael Jackson일 것이다. 그야말로 Visual Performer, 진짜 뮤직 비디오의 이상에 딱 맞는 흑인 가수였고, 이 분야를 예술적으로 한 차원 승화시킨 인물일 것이다. 앞서 거론한 ‘Thriller’는 총 제작비 110만 달러, 길리는 14분인 대작으로 모든 춤과 댄서들도 훌륭했지만, 특히, 분장과 특수 효과가 돋보였던 작품이었다. 앨범판매 1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른 앨범 같으면 잊혀질 즈음에 ‘Thriller’는 매주 60만장씩 팔려 나갔다고 한다.

이후 1990년을 지나면서 마돈나가 눈에 띄게 되는데, 그녀가 가졌던 팝계의 위상이 높고 화려했던 만큼, 뮤직 비디오 상에서도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킨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넘나들었었다. 그 예로 ‘Vogue’비디오에서 실은 가슴이 다 비치는 옷을 입었지만 교묘하게 젖꼭지만 가려, 방송상의 누드 규정을 피해갔고, ‘Justify My Love’에서는 나뭇잎 무늬 같은 것이 한 겹 씌워진 흑백 화면 속에서 성적 절정, 변태 성욕을 조금씩 느끼게 끔 만든 경우를 들 수 있다.

출처불명

뉴 웨이브(New Wave)

1970년대 뉴웨이브 음악이 처음 나왔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많은 음악 형태를 뉴 웨이브라고 불리어졌다. 그러므로 뉴 웨이브나 혹은 브리티쉬 스카라고 불리는 대표적 몇몇 그룹을 논하는 것이 이부분의 목적이다.

뉴웨이브 스타일은 대충 1983년 한해에 걸쳐 그 전성기를 맞이했다.  뉴웨이브는 새로운 음악을 말하는데, 이것은 14세기 당시의 아스 노바와 같은 것이다.(아스 노바는 13세기의 음악을 언급하던 아스 안티쿨라(Ars Antiqllua)에 반대하여 나온 음악을 말한다.) 비록 뉴웨이브가 메시지 면에서 현대적이고 그 메시지에 실험적인 면을 담고 있는 음악으로 제한되기도 하지만 뉴 웨이브는 때로 단순히 현대의 음악을 지칭하기도 한다. 뉴 웨이브는 때때로 프로그레시브 혹은 아트 록으로 분류하는 음악을 언급하는데 사용되기도 했다.

뉴 웨이브는 많은 다른 음악적 스타일을 묘사했지만, 일반적으로 어떤 특별한 음악을 통해서 삶 자체를 분명히 보여주는 삶의 철학이었다. 뉴 웨이브는 단순하고 복잡하며, 구조에 있어서는 오래되고 새로운 그리고 느낌에 있어서는 긍정적이면서 또한 부정적인 두가지의 다른 모습을 갖춘 음악을 내포했다.

만일 뉴 웨이브가 보다 구식의 오래된 특징을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면, 그 구식의 특징들이 1980년대의 현대적 스튜디오와 기술환경 안에서 재 창조되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비록 뉴웨이브가 어느 면에서는 반복적이며 또한 펑크적인 면도 갖고 있지만 그것은 오래된 음악이나 펑크보다 더 다양하며 더 복잡하다. 뉴 웨이브는 스스로를 다른 스타일과 구별짓는 추상적인 특징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뉴웨이브즘은 하나의 음악 스타일, 현대 혹은 미래 사회에 대한 삶의 철학보다도 더 넓은 것으로 여겨졌다.

출처 : http://popsong.netian.com

New Romantics 와 패션

1980년대의 뉴로맨티시즘은 무엇인가?

뉴로맨티시즘(New Romanticism)은 1980년대 초기 런던의 나이트클럽에서 제조된 사조이다. 펑크(Punk)의 반(反)패션의 무정부주의적인 어법과 달리 몸단장에 보다 관심을 가졌던 창조적인 군상들로 이루어진 이 그룹 내에서의 활동가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추구하곤 했다.

뉴로맨틱스는 사실적인 혹은 공상적인 테마와 헐리우드의 화려함을 차용하여 자신들의 외모를 꾸몄다. 현란하고, 칼라풀하고, 드라마틱한 외모를 위해 역사적 시기와 연관된 주름장식과 관능적인 옷감을 사용하였다. 펑크족과 대비되어 이들은 매력적이고, 사치스럽고, 아름답고, 나르시즘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하였다.

클럽

런던의 나이트클럽은 주요 행사를 주로 금요일이나 토요일 밤에 열던 포맷을 바꾸기 시작했다. 소호의 클럽 “Gossips”는 화요일에 ”Bowie 의 밤“을 기획하기 시작했고 틈새시장의 기호에 맞춘 스페셜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폭넓진 않지만 소수가 열광하는 취향이 마련되었다.

이전의 펑크 활동가들이 점차 의상에 있어 “화려함(glamour)” 과 “로맨스(romance)”를 취하였고 클럽은 그들이 뽐낼 장소를 제공했다. 이러한 행사가 Blitz 와 St. Moritz 와 같은 클럽에서 주로 행해졌는데 이것이 로맨틱 무브먼트의 시작으로 인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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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am and the Ants 1981” by http://coolinthe80s.com/music/adam-and-the-ants/. Licensed under Wikipedia.

Adam and the Ants의 대표적인 New Romantics 패션

뉴로맨틱 의상의 디자이너들

로맨틱 의상의 초기 디자이너들은 Vivienne Westwood, Colin Swift, Stevie Stewart, David Holah 등을 꼽을 수 있다. Westwood 는 잔뜩 멋부린 영국의 섭정기 (영국: 1811-20; 프랑스: 1715-23)의 디자인에서 아이디어를 얻었고 나중에 자신만의 패션으로 승화시켰다. 그녀는 특히 Adam and The Ants 를 위해 많은 디자인을 창조했다.

뉴로맨틱 팝그룹들

언론매체를 통해 그러한 복장이 빠르게 주류 패션에 전파되어갔다. 그리고 Adam And The Ants, Spandau Ballet, Duran Duran, Visage 와 같은 그룹이 차트 정상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David Bowie, Bryan Ferry, Boy George 등은 모두 그 시대의 영향력있는 싱어들이었다.

모험가 스타일의 해적 룩

전형적인 로맨틱 스타일은 해적 스타일이었다. 잔뜩 주름 잡힌 소매의 해적 셔츠는 값비싼 직물로 제조되었다. 연극적인 느낌이 무늬가 들어간 옷감으로 만든 벨벳재킷은 인기를 얻어 많은 재킷에 카피되었다. 뉴로맨틱의 외모는 개인적이었으며 통일성을 지향하는 펑크와는 달랐다. 뉴로맨틱스는 헐리우드의 1930년대와 1950년대의 판타지를 추구했다(그러한 의미에서 New 라는 단어가 붙었다).

시장 효과

글래모는 1980년의 형식이 되었고 의상은 정제되어가면서 패션가에 속속 등장했다. 그리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http://www.fashion-era.com/new_romantics1.htm 에서 발췌, 번역 및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