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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y To Dancing?

지난 호 까지 힙합 문화와 음악에 관해 알아 보았다. “1990년대는 힙합과 테크노만 있을 뿐이다.” 라는 다소 과격한 말이 있을 정도로 1990년대부터 현재 까지 힙합과 테크노는 전세계적인 붐을 타고 우리의 주변에 산재해있다. 하지만 국내의 테크노라 하는 음악들은 말 그대로 돈벌이에 급급하여 심하게 왜곡 되고, 음악자체를 조롱한 ‘댄스가요’ 일 뿐 의식과 사상이 존재하는 ‘댄스뮤직’이 절대 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댄스 뮤직 자체를 저급한 음악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마저 생겨 나게 되는데 미국의 아티스트인 모비(Moby)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나를 테크노 뮤지션 혹은 댄스 DJ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20년 동안 음악을 해왔다. 나는 전형적인 뮤지션이었다. 재즈, 스피드 메탈, 하드코어, 펑크, 현란한 뉴웨이브까지 연주 해 봤다. 사실 사람들은 댄스 뮤지션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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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by 1” by Uncensored InterviewFlickr.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하지만 일렉트로닉 뮤지션들은 조작 매뉴얼이 전화 번호부 만큼이나 두꺼운 그런 장비 40~50개의 시스템을 알아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다른 종류의 음악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내가 이런 음악을 좋아 하는 건 일렉트로닉 악기들은 불평을 하지도, 담배를 피우지도 않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돈을 줄 필요도 없다.

음악을 판단 하는 나의 유일한 기준은, 음악이 주관적인 수준에서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오, 헤비메탈, 그건 멋진 음악임에 틀림없어’ 식의 좋고 나쁨을 판단 하는 건 난센스다. 확실히 각각의 음악은 각각의 사람들에 의해 평가될 필요가 있다.” 모비의 말은 댄스 뮤직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기껏해야 왜곡된 ‘댄스 가요’ 나부랭이나 듣고 테크노를 비하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무지함을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락(Rock)의 소멸 이후 대두 되었던 또 하나의 대안인 진짜 테크노 음악(Techno Music)에 관해 논해보자. 이 글이 애초에 대중적인 락(Rock) 음악에 기초하여 락음악 팬들이 다른 장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일종의 ‘흐름’을 보자는 것이였기에 테크노 음악에 대한 관점도 락음악에서 부터 시작 하도록 한다. 테크노는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는 시기가 단지 힙합 붐이 일어 났을 시기와 비슷했을 뿐 실은 그보다 훨씬 오래된 전통을 자랑하고 있는 것을 머릿속에 기억 하도록 하자.
지난 호 중 필자가 “락음악의 마지막 계략은 엉뚱하게도 힙합과 일렉트로니카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라고 말한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과연 테크노/일렉트로니카 계열에선 과연 누가 락을 죽였을까? 자, 이제 테크노 속으로 뛰어들기 전 우리는 락음악의 막바지 호투에 잠깐 발을 담궜다 빼야할것이다.

Anti-Rock

테크노의 기원은 물론 지금부터 이야기 하려는 ‘락의 부정’ 보다는 훨씬 먼저 행해졌던 일이다. 하지만 필자는 먼저 락을 부정하려고 했던 락 뮤지션들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이미 1970년대 초반부터 데이비드 보위, 브라이언 페리(Bryan Ferry), 루리드(Lou Reed) 등은 글램 락(Glam Rock) 이라는 장르로 락의 부정을 표면적으로 들어낸 대표로 꼽히고 있다. 특히 데이비드 보위 같은 경우는 끊임없는 변신(음악적, 외형적 이미지 모두)으로 디스코를 거쳐 브라이언 이노 와 함께 엠비언트에까지 손을 뻗는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했다.

이들은 1960년대 락스타들이 보여주었던 것과 는 달리 비대하고 과도한 자신의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의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외모와 음악은 그들의 뇌세포에 까지 깊숙이 침투 한 것일까? 과도한 나르시즘은 과도한 쇼맨쉽(?)으로 표출되었고 그들의 그러한 ‘행태’는 도전이나 개혁 이라기보단 ‘도피’로 비추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 결과 그들의 음악은 군중에게서까지도 너무 빨리 ‘도피’ 해버리게 된다. 하지만 보위는 끊임없는 변신으로 글램 록이 사장길에 접어들 무렵인 1975년 Young America을 발표, 아방가르드 디스코(avant-garde disco)를 선보이며 그 난관을 멋지게 빠져나가게 된다.

그 후 1978년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의 성공으로 디스코(Disco)의 황금기에 접어들게 되고(락 팬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았을 테지만….) 현재까지도 여러 장르들과의 훌륭한 융화력으로 더욱 많은 서브 장르를 창출해내는 결과를 낳는다. 그 후 1980년대로 넘어와 뉴웨이브, 나아가 신스팝과 뉴로맨틱스가 있을 것이다.

뉴웨이브의 전조가 퍼브락 이라면 뉴로맨틱스의 전조는 신스팝 일 것이다. 우선 퍼브락에서 출발하여 뉴웨이브를 이끈 인물로 가장 눈에 띄는 존재는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였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 된다. 리버풀 출신의 그는 버디 홀리와 비틀즈, 홀리스(The Hollies) 등에 심취해 10대를 보내며 마침내 1975년 그의 첫 앨범인 My Aim Is True를 발매, 세상에 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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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vis Costello 1978” by Jean-Luc Ourlin – http://www.flickr.com/photos/jlacpo/4646227/.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이 앨범은 평론가들 사이에서 데뷔앨범으론 드물게 호평을 얻으며 그의 활동에 활력을 불어 넣게 된다. 이후에 그는 1979년 ‘Armed Force’, 1980년 ‘Get Happy’ 등의 음반으로 1980년대 중반 락이 다시 ‘모던 락’ 이라는 이름으로 되살아 나는데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 가운데 하나로서 인정 받게 된다.

코스텔로와 더불어 뉴웨이브의 주역으로는 프리텐더스(The Pretenders) 와 잼(The Jam)을 들 수 있을 것 이다. 프리텐더스는 코스텔로와 는 달리 자신들의 음악을 펑크록과 결합시키려는 시도를 펼쳤고 맨체스터 출신의 버즈콕스(The Buzzcocks)와 함께 펑크 팝(Punk Pop)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잼은 리듬앤블루스, 소울, 포크 등을 모드(Mode)의 테두리 안에서 다양하게 구사하는 식의 음악을 선보여 인정 받았다.

신디사이저로 대표되는 새로운 ‘전자악기(혹은 전자음악)’는 주류팝을 반대했던 펑크를 밀어 내면서 기존 대중의 관심과 지지를 자양분으로, 후에 주목 받게 될 뉴로맨틱스의 터전을 마련하게 된다. 평론가 피터 윅(Peter Wicke)은 1980년대 대중음악계를 ‘합성물의 시대’ 라고 명명 했을 만큼 일정하게 스타일을 분류하기 어려운 스타일들이 많이 대두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신스팝과 뉴로맨틱스다. 듀란 듀란(Duran Duran), 컬쳐 클럽(Culture Club)과 같이 락 밴드의 구성을 보일 때는 뉴로맨틱스라는 명칭으로, 디페시 모드 (Depeche Mode), 휴먼 리그 (Human Leag – ue), 울트라 복스 (Ultra vox)와 같이 신디사이저와 보컬 형식을 보이는 밴드들에게는 신스팝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미미한 차이 였다.

신스팝은 독일의 크라프트베르크 (Kraftwerk)의 영향을받되 그들과는 달리 가공되지 않은 전자음에 노골적으로 ‘팝적’ 선율을 접목 시킨 형식의 단조롭고 거북함 없는 곡을 양산하게 되는데 이는 또한 디스코에서 강한 영향을 받은것 이라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음악은 정작 음악적인 감각 보다는 전자기술에 집착한 나머지 밋밋한 음악을 ‘양산’ 하게 되었다는 비판을 듣게 된다.

한편 1970년대 말 영국 클럽씬에서는 신스팝과 글램록에 심취한 이들이 데이비드 보위를 기념하는 행사인 ‘A Club For Heroes’ 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게 되는데 이 행사는 주변 클럽으로 확산되게 된다. 이 같은 상황을 기반으로 뉴로맨틱스의 첫번째 선두주자에 속하는 스팬도 발레(Spandau Ballet)는 뉴로맨틱스 스타일을 물위에 올려놓은 최초의 밴드라는 찬사를 받으며 뉴로맨틱스 최초의 히트 싱글인 ‘To cut a long story short’를 1980년 영국 싱글 차트 5위에 올려놓는 쾌거를 이룬다.

이들의 이러한 성공에 많은 밴드들이 그 뒤를 잇게 되며 울트라 복스, 휴먼리그 등도 히트 싱글을 발표하게 된다. 이들이 단순 신시사이져음색에 팝적인 선율의 도입으로 군중에 관심을 끌었다면 또 다른 한편에선 레게 와 디스코 스카를 도입해 좀더 쉬운 음악을 선보인 밴드들도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는 펑카폴리탄(Funkaplitan)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뉴로맨틱스가 흑인 음악과 라틴음악을 어떻게 팝적으로 분해 하고 요약해서 수용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그 무렵 ‘A Club For Heroes’ 행사의 주도자 였던 보이조지(Boy George)는 펑크 밴드 출신의 드러머 존 모스(Jon Moss)등과 뜻을 합쳐 컬쳐 클럽을 결성하게 된다. 그들은 양성적 섹슈얼리티와 다국적 음악스타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되는데, 그들의 그러한 성공은 1960년대의 티니바퍼(Teenybopper)의 주역인 소녀들의 열광적인 지지와 때맞춘 MTV 출현 덕분이었다. 그들 (컬쳐 클럽을 위시해 듀란 듀란, 왬(Wham), 프랭키 고우즈 투 할리우드(Frankie goes to Hollywood))은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영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우상으로 부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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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kie Goes to Hollywood in London cropped” by Jane McCormick Smith – Jane McCormick Smith.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이상 뉴웨이브-신스팝-뉴로맨틱스까지의 행보를 간략히 짚어 보았다. 락 팬들은 어쩌면 필자가 여기까지 늘어놓은 이야기들을 ‘역겹게’ 읽었을지도 모르나 위에 나열한 밴드(음악)들의 진화와 테크노 음악과의 연장선을 부정하기 어려운 상황이기에 그들에 대한 설명을 피할 수 없었던 점을 충분히 감안 했으리라 생각한다. (사실 락 음악 팬들은 데쓰(Death Metal) 과 펑크 이후 곧바로 인더스트리얼로 뛰어 넘었을 테지만…) 뉴로맨틱스 신예들의 선전에도 불구 하고 언더그라운드씬에서는 새로운 대안을 위한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그 대표 주자로 단연 인더스트리얼(Industrial)과 앰비언트(Ambient)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앰비언트가 좀더 진보적인 전자음악에 대한 갈증을 푸는 역할을 했다면 인더스트리얼은 락음악 팬들을 전자 음악쪽에 관심을 기울이게 한 장본인임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Pretty, Hate Machine

인더스트리얼을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린 인물로는 1990년대 정도까지 거슬러 올라와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나 미니스트리(Ministry)등의 밴드들이 팝차트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면서 전세계적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인간의 소음에 대한 동경은 더욱 오래 전부터 시도 되어왔다.

명망 있는 클래식 음악가인 루이 루솔로(Lui Russo – lo)는 1913년에 이미 인토나루모레(intonarumore)라는 ‘기계’를 연주에 도입 했으며 에릭 사티(Erick Satie)는 1920년대 이미 권총과 타자기를 자신의 음악에 적극 수용하는 예를 보여주었다. 그 이후에도 프랑스의 작곡가인 에드가 바레즈(Edgar Varese)는 1933년 퍼커션 만으로 이루어진 이오니자숑(Ionisation)을 발표했다. 특히 그는 소음을 포함한 어떠한 소리로도 음악을 만들수 있는 권리 를 주장 하면서 소음을 음악적영역에 포함시키는데 적극적이었다.

이와 같은 실험은 1960년대 이후 대중음악의 영역에도 활발히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예전의 클래식 음악가들과 다른점은 대중적인 ‘매체’를 적극 ‘이용’하여 자신들의 영역을 확보해 나갔다는 것이다. 이제 다시 1976년대 영국으로 돌아와 인더스트리얼의 시조 라는 칭호를 얻은 스로빙 그리슬(Throbbing Gristle)에 우리는 주목한다. 그룹의 리더인 제네시스 피오리지(Genesis P-Orridge)는 1976년 스로빙 그리슬을 결성하기 이전부터 전위 예술에 몸담던 인물인데 그는 1969년 Coum트랜스미션이라는 아방가르드 예술단체를 결성하여 충격적인 퍼포먼스를 해오던 인물이다.

그들의 음악 활동은 펑크가 가졌던 부정 및 해체 그 이상의 강도와 충격을 가지고 왔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쓰였던 기본 악기인 기타, 베이스, 드럼 조차도 거부 하려는 의도를 다분히 내 비췄고, 기존의 곡 진행 방식 마저 모두 무시해 버렸다. 일 예로 멤버간의 포지션 설정을 “너는 기타를 한번도 쳐보지 않았으니 기타를 치고, 난 드럼에 재능이 있지만 베이스를 연주 하지.” 라는식 으로 결정 했고, 멤버중의 하나가 기타가 너무 무겁다고 하자 아예 기타의 보디를 반으로 잘라서 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들의 이러한 음악적 관점에 변조된 이펙터와 신시사이저, 샘플러 등은 그들에게 안성맞춤인 ‘도구’ 였다. 또한 이들은 공연장에서 자신들의 전신이었던 Coum트랜스미션에서 보여주었던 과격한 공연을 보여주어 리더인 피오리지는 정신병자였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피오리지는 Coum트랜스미션의 활동 당시 자신의 피를 주사기로 뽑아 재 투여 하는 등 과격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들과 같은 목표를 공유한 아티스트을 양성하고 유대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1976년 인더스트리얼 레코드 레이블을 설립하게 되는데 소속된 밴드들 가운데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었던 밴드가 바로 카바레 볼테르(Cabaret Voltaire)였다.

카바레 볼테르는 리처드 H. 커크(Richard H, Kirk), 스티븐 맬 맬린더(Stephen ‘Mal’ Mallinder), 크리스 왓슨(Chris Watson) 이상 3명을 주축으로 결성된 밴드인데 이들은 이미 1973년경부터 신시사이저와 테이프 기기들을 이용한 실험에 몰두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후에 오늘날 머신 리듬(Machine Rhythm)이라 불리는 인더스트리얼의 트레이드마크를 발전시킨 장본이라는 영예를 안게 된다. 그 외에도 이들의 실험은 후에 여러 인더스트리얼 아티스트들에게 사운드 표본을 제시하게 된다. 허나 인더스트리얼 레코드 레이블(IR)에서는 이들의 초기 작업만을 발매 했으며 정식 데뷔앨범은 1978년 러프 트레이드(Rough Trade) 레이블에서 발매되게 된다.

스로빙 그리슬 이나 카바레 볼테르의 선전에 힘입어 1970년대 말에는 인더스트리얼은 IR 레코드에만 국한 되지 않은 더욱 넓은 활동무대를 구축하게 된다. 또한 위에서 말했듯이 그들의 영향력은 음악 만큼이나 파격적으로 영화, 패션, 건축 등 많은 분야게 적용되었다. 신체를 뚫고 불로 낙인을 만드는 이르나 리벳 헤드의 패션 스타일과 연쇄 살인범을 추모하고 약물이나 섹스, 정신질환 등을 주요 소재로 삼는 트랜스그레시브 소설(Transgressive Fiction) 등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하지만 스로빙그리슬이 해체되는 연도인 1981년도를 기점으로 초기 인더스트리얼 유파는 막을 내리게 된다.

여기까지 테크노 전조에 대한 신스팝과 뉴웨이브, 뉴로맨틱스 그리고 초기 인더스트리얼 유파에 대해 알아 보았다. 다음 편에는 1990년대 들어와 다시 부활하게 되는 ‘변형된’ 인더스트리얼과 테크노에 관해 좀더 깊이 들어가 보자.  

http://www.iautosound.co.kr/200202/auto0502.html 
 

Techno

★ 테크노의 역사

테크노는 말 그대로 기술(技術)이란 의미의 ‘Technology’ 에서 따온 단어이다. 20세기의 대표적인 발명품인 컴퓨터의 탄생은 음악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는데 바로 신디사이저라는 첨단 악기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테크노 음악도 이와 발맞추어 탄생하게 되었다. 1960년대 후반 영국의 록시 뮤직 (Roxy Music), 브라이언 이노 (Brian Eno), 독일의 탠저린 드림 (Tangerin Dream), 크라프트베르크 (Kraftwerk) 등 유럽 지역의 진보 성향 뮤지션들은 신디사이저를 도입해 더욱 실험적인 음악을 발표했는데 이들이 만들어낸 전위적이면서 신비주의적인 일렉트로닉 사운드는 뒤에 등장하는 테크노 음악의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초기 테크노 음악은 70년대 후반 디스코, 펑크라는 신조류의 영향을 대거 수용한 형태로 변모하게 된다. 테크노 팝이라고도 불리우던 이 당시 테크노 음악은 팝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사운드로 전과는 달리 대중적인 인기 또한 얻을수 있었다. 버글즈 (Burgles), 게리 뉴만 (Gary Numan), 울트라복스 (Ultravox), 휴먼 리그 (Human League) 등이 당시 주목받던 뮤지션들이다. 한층 발전된 신디사이저를 이용해 예전의 실험적인 사운드에서 탈피하여 뉴웨이브 (New Wave), 뉴 로맨틱 (New Romantic), 댄스, 팝 사운드를 차용한 신스 팝 (Synth Pop)은 80년대 초반 대중 음악계의 주류로 새롭게 부각되었다. 현재까지 최고의 신스 팝 밴드로 인기 정상을 누리고 있는 디페쉬 모드 (Depeche Mode), 역시 디페쉬 모드를 거친 빈스 클락 (Vince Clark)이 결성했던 야주 (Yazoo, 훗날 이레이저 Erasure로 발전됨), 유리스믹스 (Eurythmics), 하워드 존스 (Howard Jones)등의 음악은 당시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레이저, 프랭키 고즈 투 헐리웃 (Frankie Goes To Hollywood), 팻 샵 보이즈 (Pet Shop Boys), 아트 오브 노이즈 (Art Of Noise)등 영국 신스 팝 계열의 뮤지션들이 더욱 맹위를 떨치는 가운데 80년대 중반에 와서 테크노는 다양한 세분화를 이루게된다. 샘플링 머쉰같은 전자 악기들이 보편화되면서 새로운 음악적 실험이 이뤄지는데 대표적인 댄스 뮤직인 하우스 (House), 기계적인 인더스트리얼 (Industrial) 경향의 음악은 이 시기에 와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테크노라고 부르는 것들은 거의 90년대에 등장한 테크노 음악을 일컫는다. 현재의 테크노는 엠비언트 (Ambient), 애시드 재즈 (Acid Jazz), 트랜스 (Trance), 드럼 앤 베이스 (Drum and Bass), 하드코어 테크노 (Hardcore Techno), 트립 합 (Trip-Hop) 등 마치 세포 분열을 연상케 할만큼 수많은 하위 장르로 파생되고 있다.

★ 대표적인 90년대 테크노 뮤지션

불협화음, 전위적인 구성, 파괴적인 기계음 등, 세기말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프로디지 (Prodigy)는 단연 90년대가 낳은 최고의 테크노 밴드이다. (1997년, 테크노 뮤지션으로는 최초로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을 차지) 프로디지와 함께 영국 테크노의 3인방으로 군림하는 케미컬 브러더즈 (Chemical Brothers)와 형제 듀오 오비탈 (Orbital), 이외에도 영화 ‘트레인스포팅’에 삽입된 ‘Born Slippy’로 유명해진 언더월드 (Underworld), 테크노의 불모지였던 미국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모비 (Moby, 영화 ‘007 네버다이’에 참여) 프랑스의 대프트 펑크 (Daft Funk), 에어 (Air), 독일의 아타리 틴에이지 라이엇, 트립-합을 정착시킨 영국의 혼성듀오 포티쉐드 (Portishead) 등은 90년대 테크노 음악의 붐을 주도한 대표적인 뮤지션들이다.

★ 국내의 경우

정통 테크노 음악이라고 부를 만한 시도를 국내에선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해 달파란 (시나위, H2O를 거친 베이시스트 강기영의 예명)이 발표한 독집 음반 ‘휘파람 별’ 이나 조동익의 영화음악 모음집 ‘Movie’에 수록된 ‘일탈’, ‘현기증’ 등 일부곡 정도랄까 ? 흔히 일반인들이 테크노라고 생각하는 음악들은 대개 댄스 음악에 테크노적인 요소를 양념처럼 첨가한 것 뿐이다. 멜로디가 강조된 음악을 선호하는 국내 정서와 이와는 반대인 90년대 테크노 음악과의 간격은 생각보다 크다.

이제 테크노는 세기말을 맞이하는 1999년, 중요한 문화 현상중 하나로 자리매김을 했다. 비인간적이고 기계적이라는 비판에도 아랑곳 없이 테크노의 인기는 당분간 지속될 듯 보인다. 하지만 테크노의 미래가 지금처럼 밝을지는 예측하기 힘들다. 다양한 음악적인 실험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앞서 등장했다 소멸한 여러 장르의 음악들 처럼 테크노 음악도 같은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뮤지션들도 기억하겠지만.

신스팝(synth pop)의 역사

□ 신디사이저(synthesizer)

이미 1870년대에 몇몇 사람들은 전기적으로 생산되는 음악에 대한 실험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1950년이 되어서야 보다 진지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예를 들어 독일 퀼른에 오직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만 세워진 스튜디오가 있었다. 최초의 신디사이저는 1955년 미국 RCA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초기의 신디사이저는 매우 비싸고 다루기 어려웠다. 1960년대에 진정으로 유용한 신디사이저가 만들어졌다. Don Buchla 와 Bob Moog 가 만든 것들이 그 예이다. Bog Moog 는 신스팝 뮤지션들에 의해 많이 사용된 미니무그(MiniMoog)나 그 밖의 작품과 같은 신디사이저 제작자로 가장 전설적인 인물이다. 1970년대에 신디사이저의 생산은 대규모로 성장하였다.

최초의 신디사이저는 아날로그였다. 모든 사운드는 신디사이저의 버튼이나 바(bar)와 같은 움직이는 컨트롤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서로, 그리고 컴퓨터와 연결되는 디지털 신디사이저가 만들어졌다. 이것들은 MIDI 라고 불리는 인터페이스를 이용했다. MIDI 는 음질이나 박자 등에 관한 정보를 보낸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의 사운드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그저 사운드를 표현하는 숫자들을 보낸다. MIDI 는 이제 대부분의 퍼스널컴퓨터에 있다. 현대 신디사이저를 위한 가장 일상적인 사운드 소스는 샘플링이다. 예로 진짜 사운드의 디지털 녹음. 대부분 그것은 평범한 음악 악기나 아날로그 신디사이저에서 추출된다. 때로는 상이한 기술이 섞이기도 한다.

□ 신스팝(synthpop)

1960년대 말 이미 유명한 뮤지션들은 신디사이저를 사용했다. 예를 들어 Beach Boys 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음악을 많이 바꾸지는 않았다. 1968년 최초의 신디사이저로만 연주된 레코드가 발매되었는데 Wendy Carlos 의 “Switched On Bach” 가 그것이다. 그것은 Moog 신디사이저로 바흐를 연주한 음악이었다. 독일에서는 Organisation 과 같은 실험적인 밴드가 1968년 조직되었다. 그들은 1970년 Kraftwerk 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이 당시 그들은 불협화음이지만 혁신적인 신디사이저 음악을 연주했다. 그들은 1970년대 초반 독일에서 세 개의 앨범을 내놓았다. 그들의 음악은 좀 더 리드미컬해지고 보다 이해하기 쉽게 변해갔다. 1974년 그들은 국제무대의 데뷔작인 “Autobahn”을 내놓았는데 이것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앨범은 신디사이저와 음향효과가 결합된 20분 길이의 카드라이브였다. 그들은 계속해서 이런 종류의 음악을 만들었고 이후 일곱 개의 앨범을 내놓는다. 그들은 신스팝의 스타일을 정형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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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Michel Jarre 2008” by Jean michel jarre from flickr user littleO2.jpg: Daniele Dalledonne
derivative work: HekeruiJean michel jarre from flickr user littleO2.jpg.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1968년 프랑스의 Jean-Michel Jarre 가 역시 일렉트로닉 음악을 시작했다. 예로 그는 오페라를 신디사이저와 결합하였고 이것이 1972년 주목을 받았다. 그의 첫 앨범 “Oxygene”은 1976년 발매되었다. 그는 클래식과 실험음악에 영향 받아 연주음악을 만들었다. 그의 대부분의 앨범은 통상적인 신스팝과 같은 튠을 사용하지 않는다. 1981년 그는 중국에서 공연을 가진 최초의 서방 음악가가 되었다. 1984년 앨범 ”Zoolook”을 녹음했다. 이 앨범에서는 전 세계 30가지 언어가 샘플링으로 사용되었다. 1986년 그는 우주에서 연주되는 음악을 최초로 녹음하려고 시도한다. 우주비행사이자 색스폰 연주자인 Ron McNair 가 우주선 챌린저를 타고가 우주에서 그와 함께 연주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사고가 발생했다. 챌린저가 출발 후에 바로 폭발해버렸고 그의 녹음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Jarre 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백만의 관중 앞에서 장대한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열 장 이상의 앨범을 녹음했다. 이밖에 신디사이저를 초기에 많이 다룬 뮤지션으로 Brian Eno, Mike Oldfield, Pink Floyd, Tangerine Dream, Vangelis 등이 있다.

1970년대 말 특히 영국에서 신디사이저를 주된 악기로 쓰는 아티스트들이 많이 나타났다. 예를 들어 Gary Numan, Ultravox, OMD, Human League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Kraftwerk 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1980년대 초반 Depeche Mode 가 결성되었다. 그들은 Vince Clarke 이 밴드를 떠나 Yazoo(미국에서는 Yaz라 불림)를 결성하고 후에 Erasure 를 결성한기 전까지는 1981년의 그들의 힛싱글 “Just Can’t Get Enough” 과 같은 행복하고 천진난만한 신스팝을 선보였다. 이후에는 보다 멜랑콜릭해지고 어두워졌다. 다른 영국 밴드가 1981년 레코드를 내놓았는데 Duran Duran, Eurythmics, Tears For Fears, Thompson Twins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신스팝의 일종을 선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악기도 사용했다. 캐나다에서 Rational Youth 나 스웨덴의 Adolphson-Falk 가 이와 같은 밴드들이었다. 1984년 Howard Jones, Nik Kershaw, 그리고 독일 밴드 Alphaville 과 같은 신스팝 아티스트들이 나타났다. 1980년대의 다른 신스팝 밴드로는 A-ha, Bronski Beat, New Order, Soft Cell, Visage, Yello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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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talking” by CHR!S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1984년 유로디스코라 불리는 팝음악이 새로운 형태로 등장한다. 특히 Scotch와 같은 이탈리아 밴드와 Modern Talking 과 같은 독일 밴드가 많았다. 유로디스코는 신디사이저에 기반을 두었기에 신스팝과 구분하기가 어렵다. Pet Shop Boys 의 음악도 유로디스코로 불렸다. 1986년 신스팝의 기반이 약화되었고 이후 오직 신디사이저에 상당 정도 의지하여 만들어진 음악만 신스팝이라 불렸다. 신디사이저는 계속해서 팝음악의 주요한 악기로 자리잡았다. 유로디스코가 영국에 와서 Stock/Aitken/Waterman라는 팀이 만들어졌다. 그들은 Kylie Minogue, Rick Astley, Bananarama, Dead Or Alive 와 같은 많은 아티스트를 위해 레코드를 프로듀스했다.  1987년 하우스 뮤직이 영국에 선을 보였다. 이 음악은 본래 시카고에서 출생하였다.(예로 Frankie Knuckles) 하우스는 신디사이저에 기반하여 모노톤과 음향효과가 가미된 댄스음악이었다.

1991년 테크노 음악이 벨지움과 네델란드에 선을 보였다. 이 장르는 본래 1980년대 중반 이후 연주되기 시작한(예로 Derrick May) 디트로이트가 출생지이다. 테크노 역시 신디사이저에 기반을 둔 댄스음악이지만 하우스보다 무겁고 어둡다. 독일에는 U96과 같은 아티스트가 있었다. 1992년 유로디스코가 독일로 돌아온다. 스타일은 좀 더 터프하게 변했다. 독일과 이탈리아 프로듀서가 생산한 전형적인 유로디스코 밴드는 흑인 래퍼와 여성 싱어였다. 음악은 신디사이저 멜로디와 래핑, 그리고 심플한 코러스로 구성되었다. 유로디스코는 이제 가끔 ‘댄스’로만 불리울 뿐이었다.

Page, S.P.O.C.K, Sista Mannen Pa Jorden, This Fish Needs A Bike 가 유명한 스웨덴 신스팝 밴드다. Elegant Machinery, Daily Planet, Daybehavior, Encounter, Saft 등이 기타 신스팝 밴드이다. 보다 새로운 스타일의 신스팝 밴드는 미국의 Anything Box, 영국의 Mesh, 독일의 And One 등이 있다. Electronic, Saint Etienne, Kim Wilde 가 신스팝에 가까운 영국 아티스트이다. Melody Club, Kamera, Bobby 등은 신스팝에 가까운 신세대 스웨덴 아티스트이다.

http://www.synt.nu/history/

Synth 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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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travox 04111981 01 600” by Helge Øverås – Own work. Licensed under CC BY 3.0 via Wikimedia Commons.

신스 팝(Synth-Pop)은 뉴웨이브(New Wave)의 서브 장르이며 그 감성과 시각적 개념인 뉴로맨틱스(New Romantics)와 혼용된다. 뉴웨이브는 포스트-펑크(Post Punk)등을 포괄하는 상당히 광범위한 개념이며 뉴웨이브=신스 팝을 동일시하는 것은 오류이다. 80년대 초반 영국의 록시뮤직(Roxy Music)이나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 등의 영향이 극명한 게리 뉴만(Gary Numan), 울트라복스(Ultravox), 휴먼 리그(Human League), 디페쉬 모드(Depeche Mode) 등이 독일 크라우트-록(Kraut-Rock)의 일렉트로닉 이노베이션을 적극 수용하여 신스 팝을 개척한다. 초기 신스-팝은 오히려 차갑고 강박적이었으나(←Gothics) 최초로 신스-팝에 댄스비트를 노골적으로 차용하여 릴랙스하게 이완시킨 것은 듀란듀란(Duran Duran)이었다. 듀란듀란은 곧 스타로 등극했고 당연히 ‘트렌드’ ‘스타’를 복제하는 많은 밴드들이 존재하며 신스-팝은 전성기를 구가한다. 그러나 휴먼 리그, 유리스믹스(Eurythmics), 하워드 존스(Howard Jones)등을 제외하고는 단발적인 원-히트(One Hit)밴 드로 곧 소멸했으며 1984년부터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한다. 신스팝은 최초로 신디사이저가 메인스트림 팝 음악의 주요악기로 등극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그러나 역시 신스 팝은 전자 음악이라기보다는 팝에 침투한 전자 바이러스 정도로 진단할 수 있다.

Artist
Gary Numan, Ultravox, Human League, Depeche Mode, Erasure 등

몇몇 앨범들

  • Nik Kershaw: Anthology
  • Heaven 17: Best of Heaven 17: Higher & Higher
  • Thompson Twins: Master Hits: Thompson Twins
  • Orchestral Manoeuvres in the Dark: Singles
  • Joseph Victor Sieger: Self-Portrait
  • a-ha: Hunting High and Low
  • New Order: Best of New Order

AllMusic 참조

ABC / The Lexicon of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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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Lexicon” by The cover art can be obtained from the record label.. Licensed under Wikipedia.

Bryan Ferry와 David Bowie를 섞은 음악에 팝스타일을 첨가한듯한 ABC의 성공적인 데뷔앨범 The Lexicon Of Love는 Lexicon Magazine이 선정한 80년대 명반 100선에서 1위에 오를 정도로 Synth-Pop 팬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앨범이다. 느와르풍의 연극을 공연하고 있는 무대장면을 연출한 앨범커버에서 연상되듯이 – 앨범의 뒷커버에는 다른 멤버들이 스태프 분장을 한채 대기하고 있는 장면이 프린트되어 있다. – 앨범의 전체적인 노래풍은 매우 드라마틱하고 웅장하다. 특히나 이러한 곡의 전체적인 기조를 유지하기 위해서 런던 심포니와의 협연을 통해 오케스트라 연주를 도입하였는데 이는 Synth-Pop 음악이 자칫 빠지기 쉬운 무미건조함과 단순함에서 벗어나 곡들을 매우 풍부하고 윤기있게 만들어준데 일조하였다. 이러한 앨범의 뛰어난 완성도는 Martin Fry를 비롯한 밴드멤버들의 뛰어난 역량과 더불어 Buggles출신의 Trevor Horn의 뛰어난 프로듀싱도 한몫하였다. 이 앨범에서 싱글컷된 곡은 Look Of Love, Pt 1과 Poison Arrow이지만 나머지 곡들의 완성도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sticky)

1. Show Me (ABC) – 4:01
2. Poison Arrow (ABC) – 3:22
3. Many Happy Returns (ABC) – 3:57
4. Tears Are Not Enough (ABC) – 3:28
5. Valentine’s Day (ABC) – 3:40
6. Look of Love, Pt. 1 – 3:27
7. Date Stamp (ABC) – 3:51
8. All of My Heart (ABC) – 5:12
9. 4 Ever 2 Gether (ABC/Dudley) – 5:29
10. Look of Love, Pt. 2 (ABC) – :58

O.M.D / Architecture & Morality

CATALOGUE DID 12
FORMAT LP
LABEL DINDISC
RELEASE DATE 08/11/81
SLEEVE DESIGN PETER SAVILLE & BRETT WICKENS. ARCHITECTURAL
PHOTOGRAPHY BY ROBIN RODDEY
RECORDED THE GRAMOPHONE SUITE, LIVERPOOL & THE MANOR
PRODUCER RICHARD MANWARING & OMD

O.M.D는 그들의 세번째 앨범인 Architecture & Morality에서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였다. 결과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성공적이었다. 앨범은 독일의 전자음악에 대한 영국의 응답처럼 느껴진다. 이 앨범은 또한 음울하면서도 유쾌하다. 심플하고 단속적인 전자음악 뒤로 곡마다 적절히 삽입된 각종 음향효과와 백보컬은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곡의 구성을 매우 풍부하게 해주고 있다.

Architecture And Morality는 영국에서는 챠트3위, 벨기에와 네델란드에서 챠트 1위까지 오른 O.M.D의 세번째 작품이다. The New Stone Age는 키타를 도입하여 사람들이 O.M.D로부터 기대했던 그들의 스타일에서 다소 벗어난 것이었다. Souvenir가 앨범에서 첫싱글컷되었고 뒤이어 Joan Of Arc가 싱글로 발매되었다.

“우리는 Manor Studio에서 3일만에 모든 곡을 썼어요. 앨범을 Architecture And Morality라고 부르기로 했죠. 그리고는 우리가 생각하는 “건축적인 것(Sealand의 중반부에서는 마치 공사장의 작업장 소음과 같은 음향효과도 삽입되어 있다. 이런 것을 건축적인 것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 필자주)”과 “도덕적인 것”을 테잎안에 몽땅 집어넣었지요. 3일동안 우리는 그 모든 소음속에서 뭔가가 뽑아져 나올때까지 사운드를 첨가하고 추출해냈죠.” O.M.D(1981)

밴드는 이 앨범을 위해서 Georgia라는 노래를 썼었다. 그러나 결과가 신통치 않다고 생각한 그들은 그 노래를 앨범에서 제외시켜버렸다. 그러나 곧 그들은 새 곡을 쓰고는 Georgia라고 이름붙여버렀다. 이 곡은 앨범 전체를 통해 가장 팝적인 곡으로 이후 So In Love 등에서 그들이 선보였던 “춤추지 않고는 못배길” 경쾌함을 창출하는 단초가 되었다. 오리지날 Georgia는 1988sus Dreaming의 B싸이드에 Gravity Never Failed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었다.

이제 막 메인스트림에서 싹을 틔우기 시작했던 Synth-Pop의 교과서적인 이 앨범은 그러나 후배 아티스트들에게 크게 영향을 주지는 못한 듯 하다. 이후의 음악들은 좀더 댄써블하고 경쾌한 쪽의 음악이 주류를 이루어 오히려 이 앨범을 프로그레시브하게 느껴지게 할 정도이다.

Japan / Tin D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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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tindrum” by May be found at the following website: http://image.allmusic.com/00/amg/cov200/drf300/f352/f35296ch3u3.jpg. Licensed under Wikipedia.

혹자는 이 앨범에서부터 비로소 Bowie나 Roxy Music의 스타일의 답습에서 벗어났다고 평함으로써 이전 앨범을 폄하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 소리조차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면 이 앨범이 그룹 Japan의 최고앨범임이라는 칭찬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오리엔탈적인 영향이 강한 이 앨범은 일본풍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중국풍에 가깝다. 앨범커버에서부터 이러한 색채가 강렬한데 David Sylvian이 젓가락으로 밥을 먹고 있는 방의 벽에는 마오쪄뚱의 사진이 걸려있다.(군부독재 시절 필자가 산 빽판에는 마오의 사진이 지워져 있다. 오호 통재라~) Cantonese Boy, Visions of China같은 곡명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캐취할 수 있다. 음악적인 면에 있어서도 씬써싸이저의 텍스춰나 퍼커션 연주는 동양적인 풍취를 강하게 풍기려 의도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Sylvian의 보컬은 락스타적이라기 보다는 또 하나의 악기와 같은 기능을 부여하고 있다. 이 앨범에서는 Ghosts가 히트하긴 하였지만 나머지 곡들도 뛰어난 완성도를 지녀 소장용으로 손색이 없다. 추천 싱글은 Visions of China, Cantonese Boy

1. The Art of Parties (Sylvian) – 4:09
2. Talking Drum (Sylvian) – 3:34
3. Ghosts (Sylvian) – 4:33
4. Canton (Jansen/Sylvian) – 5:30
5. Still Life in Mobile Homes (Sylvian) – 5:32
6. Visions of China (Jansen/Sylvian) – 3:37
7. Sons of Pioneers (Karn/Sylvian) – 7:07
8. Cantonese Boy (Sylvian) – 3:44

Human League / D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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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re-cover” by Album cover artwork (c) Virgin Records (UK) 1981. Licensed under Wikipedia.

80년대 개막과 함께 동시에 들어선 영국의 대처, 미국의 레이건 보수정권시대의 팝음악은 70년대 음악과 커다란 차이가 나타났다. 때는 커피든 오디오든 버튼만 누르면 되는 전자산업의 만능시대였으며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중요시되는 시대였다. 이른바 릴렉트로닉 전성기였고 비디오 시대였다. 대중음악도 따라서 외적 형태 (일렉트로닉)나 가수의 외모가 노랫말과 음악성보다 우선시되었다. 80년대 초반 전자음악(electronic music)의 유행을 몰고온 것은 영국 그룹들이었다. 거기에 바로 전세대의 펑크(뉴웨이브까지 포함)가 갖는 분노의 메시지는 자취를 감추었고 핑크빛 낭만의 소리로 질퍽했다. 그것이 대처리즘의 보수적 사회분위기에 휩쓸린 당시 영국 청년들의 대체적인 정서였다. 이무렵 뉴로맨틱 운동의 선두주자들은 듀란듀란(Duran Duran), 스팬도 발레(Spandau Ballet), 소프트 셀(Soft Cell), 디페쉬 모드(Depeche Mode) 등이었고 데이비드 보위도 잠시 후 그 물결에 가세했다. 그러나 미국 정복에 가장 먼저 성공하여 뉴로맨틱 팝의 길을 닦은 주인공은 휴먼리그(Human League)라는 그룹이었다.

필 오우키(Phill Oakey)가 이근 6인조 영국 셰필드 출신의 이 그룹은 일렉트로닉팝 시대의 본질적 특성을 함축했다. 우선 그들은 재래식 악기을 모두 치워버렸다. 그룹엔 드러머, 베이스주자, 기타리스트가 없었고 가수를 빼고는 신시사이저 연주자들뿐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전통적인 키보드 신시사이저 대신 롤랜드 마이크로 콤포저 시퀀서를 앉혀 드럼 연주를 컴퓨터로 찍어 만들어냈다 드럼비트가 칼로 잰듯 정확하게 맞아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컴퓨터 음악’이 드디어 선을 보이게 된 것이었다. 필립 오우키는 82년 “뮤지션”지에 “우린 아마추어들이지만 개의치 않는다. 드러머를 고용하지 않고도 리듬을 만들어낼 기술이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자신들 스스로 프로음악인이 아니라고 공언하면서도 그들은 82년 미국 데뷔앨범 <<데어>>(Dare)로 “비틀즈처럼 넘버원 레코드를 갖고 싶어했던”꿈을 실현했다. “롤링스톤”지는 89년 “<<데어>>는 80년대 수준에서 록을 침투하고 있던 일렉트로닉의 공습을 위한 길을 깔아놓았다”고 정리했다. 싱글 <나를 원치 않나요>(Don’t you want me)는 가분히 전미 싱글차트 정상을 점령. 미국시장이 적극적으로 신시사이저 팝을 수용하려들고 있음을 반증했다.

얼핏 신시하이저하면 떠오르는 몰인간성과 차가움을 극복하고, ‘멜로디와 리듬만 좋다면 신시사이저도 통한다’는 사실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다. 미국 청취자들은 당시 <나를 원치않나요>를 들으면서 컨투리 음악으로 착각할 만큼 정겨움을 느꼈다. 사실 그들의 지향점도 ‘팝화된 신시사이저 사운드의 완성’이었다. 휴먼리그는 77년 결성되어 일렉트릭 사운드의 선구자 크라프트베르크의 뒤를 쫓았으나, 80년대 들어 거기에 팝적 색채를 덧칠하게 되었다. <<데어>>앨범의 프로듀서인 마틴 러센트(Martin Rushent)는 “나는 크라프트베르크가 아닌 모든 사람이 접근할수 있는 것, 이른바 팝적인 일렉트로닉 앨범을 만들고자 했다.”고 밝혔다. 재미있는 것은 휴먼리그가 자신들을 섹스 피스톨즈와 연계시켰다는 점, 그들은 섹스 피스톨즈가 그랬듯이 연주를 잘하는 것보다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연주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금까지의 로큰롤 과정을 두고 보더라도 음악인으로서의 자질보다는 마음가짐이 우선이라는 것이었다.

휴먼리그의 이같은 자세는 자신들의 대중적 사운드에는 걸맞지 않았지만 뜻밖의 진지한 입장 개진이었기에 눈길을 끌었다. 그런 만큼, 노래도 의식의 무풍지대가 아닌 날카로운 사회적 시각이 도사리고 있었다. <초>(Seconds)는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에 관한 노래였고 <군중의 소리>(Sound of crowd)는 병든 사회가 빚어낸 편집증을 다루었다. <하느냐 죽느냐>(Do or die) 또한 침묵의 종식에 대한 요구였으며 만만하게 인식된 <나를 원하지 않나요>도 실은 망각풍조가 팽배된 현실에 대한 일침이었다.

“내가 널 만났을 때 넌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었지. 내가 널 데려와 가꾸어 돌려놓았지. 그래서 새사람을 만든거야. 5년이 지난 지금 넌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있지. 성공이 네겐 너무 용이했지. 그러나 이렇게 서게해준 사람이 나라는 걸 잊지마. 난 너를 옛날로 되돌릴 수 있어.”

<나를 원하지 않나요> 평범하지 않은 직설적 표현은 그들을 단연 뉴로맨틱 운동그룹진영 가운데 돋보이도록 해 주었다. 휴먼 리그는 음악하는 입장과 노랫말로 자신들이 백퍼센트 대중성 지향그룹만은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했다. 그러나 그들의 ‘신시사이저 만능주의’와 ‘컴퓨터음악 시도’는 음악인으로서의 기본적 자질과 관련해 비판의 도마위에 오리기도 했다.그것은 음악을 편리하게 만드는 것이지 음악의 전부여서는 곤란했다. 이 점에서 그들에겐 결코 롱런할 수 없는 그룹이라는 숙명이 드리워져 있는 셈이었다. 그들의 본질은 당연히 많은 반발을 초래할 수 밖에 없었다. 신시사이저와 컴퓨터로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이 ‘휴먼’, 즉 인간이라고 그룹명을 내건 점부터 비위가 거슬린 사라들을 위시하여 표출된 반발이었다.(임진모)

Duran Duran / Duran Du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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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ran1st” by May be found at the following website: http://www.duranduran.com. Licensed under Wikipedia.

필자가 듀란듀란을 처음 접하게 된것은 한 라디오 프로의 신인소개 코너에서 였다. 아마도 영국 등지에서 새로 부상하는 뉴로맨틱스에 대한 외신 성격으로 방송되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하는데 아무튼 그 프로를 통해서 그들의 싱글 Friends of Mine을 접하고는 실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선하다.여하튼 듀란듀란의 등장은 필자뿐 아니라 당시 전세계 모든 틴에이져들에게 충격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1차 충격은 그들의 환상적인 미모로부터 온다. “어쩌자고 이렇게 잘 생긴거야.”라는 탄식이 절로 나올 정도로 잘생긴 이 다섯 젊은이들을 통해서 소녀들은 달콤한 로맨스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소년들은 자신의 여드름오른 못난 얼굴에 대한 한없는 열등감을 심어주었다. 2차 충격은 말할것도 없거니와 그들의 독특한 음악 스타일에서 온다. 물론 평자들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던 “외모만 앞세운 그룹”이라는 꼬리표가 한동안 그들을 따라다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음악 스타일을 추구하는 팬들에게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본 앨범 Duran Duran은 이렇듯 데뷔 초기부터 끊임없는 화제를 몰고다녔던 그들의 메이저 데뷔앨범이다. 첫싱글 Girls on Film에서부터 분명히 드러나는 이들의 음악적 특징은 한마디로 Funky Synth-Pop이라 할 수 있다. 드럼머쉰에서 느껴지는 무미건조함이 아닌 살아있는 인간이 친 Funky한 리듬라인은 여타 Synth-Pop 밴드와 그들을 구분지어주는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이었다. 이러한 면에서 그룹의 핀업보이 John Taylor의 역할은 작곡을 담당했던 Nick Rhodes만큼 주요했으나 오랜 기간동안 이러한 음악적 역할에 대한 논의는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간과되어 왔었다.

이후 Planet Earth로 이어지는 앨범의 전체적인 이미지는 아직은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귀에 쏙쏙 들어오는 멜로디라인과 Funky한 리듬라인에 얹혀진 뜻모를(?) 가사(Duran Duran은 사랑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그들이 부른 유일한 사랑노래는 아마도 I don’t want your love) 등으로 버무러진 틴에이저 David Bowie다. 듀란듀란 팬이나 데이빗 보위 팬 양쪽에서 욕먹을 소리일지 모르겠으나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니 크게 노여워 하지 마시길….각설하고 어설프나마 Synth-Pop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였던 이들의 음악적인 도박은 실패가 아니었음이 이후 이들의 음악적 행로에서 뚜렷이 증명되었고 이제 이 앨범은 재발견되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진지한 음악적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는 작품이 되었다.(sticky)

* 5번 트랙 Is There Something I Should Know? 는 원래 영국에서 Please Please Tell Me Now란 제목으로 영국에서 싱글발매되어 인기를 얻었던 곡으로 영국발매에서는 제외되었으나 미국발매시 추가된 트랙이다.

1. Girls on Film (Duran Duran) – 3:33
2. Planet Earth (Duran Duran) – 4:02
3. Anyone Out There (Duran Duran) – 4:03
4. Careless Memories (Duran Duran) – 3:55
5. Is There Something I Should Know? (Duran Duran) – 4:09
6. Night Boat (Duran Duran) – 5:25
7. Sound of Thunder (Duran Duran) – 4:06
8. Friends of Mine (Duran Duran) – 5:44
9. Tel Aviv (Duran Duran) – 5:17

Visage / Vis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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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age cover” by The cover art can be obtained from Polydor Records.. Licensed under Wikipedia.

짧은 활동기간 이었지만 Visage는 초기 New Romantic 운동 – 아무래도 음악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감싸고 있는 스타일이나 패션에 좀더 방점을 두고 있는 의미에서 – 의 전형을 제시한 그룹으로 알려져 있다. Visage의 프론트맨 Steve Strange는 화려한 메이컵으로 초현실주의적이고 미래주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여 글램록으로부터 이어져 온 비주얼락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켰고 이는 Duran Duran, Culture Club 등 후배 아티스트들의 패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물론 이 때문에 New Romantic 은 외모에나 신경 쓰는, 음악적으로는 별 가치가 없는 장르라는 편견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Kraftwerk 의 건조한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Bowie의 패션 이미지가 화려하게 결합된 Visage의 데뷔 앨범 Visage는 Post Punk 시대와 화려하고 보다 팝친화적인 Synth-pop 시대의 가교 역할을 자처한 앨범이다. 당초 Steve Strange는 Punk가 남성적 마초이즘과 야만성에 물들어 있다고 생각하고 이에 대한 반감으로 음악활동을 시작하긴 했지만 여전히 그들의 음악은 Post Punk와 Goth Rock 의 음습하고 냉소적인 분위기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못했다. 다른 한편으로 수록곡들은 전체적으로 댄스플로어를 의식하고 쓰여진 Dance Rock적인 성격이 강한데 이는 Steve 자신이 광적인 Clubber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앨범의 분위기는 드라마틱하고 어두운 한편으로 유머러스하기도 하다. 이러한 모습은 일종의 금연 캠페인송인 Tar의 장난스러운 분위기와 러시아의 전통적인 멜로디를 나름대로 재해석한 Moon Over Moscow의 유치하지만 코믹한 연주에서 엿볼 수 있다. ‘Visage의 음악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고 있는 Mind of Toy와 Visa-age는 건방져 보이는 보컬과 건조한 연주가 매력적인 수작들이다. 그러나 역시 가장 귀에 띄는 곡은 앨범의 최대 히트곡인 Fade To Gray 인데 몽환적인 키보드 연주의 겹침과 프랑스어 백보컬, 스산한 가사 등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매력적인 곡이다.(sticky)

Tracklisting
1. Visage (Visage) – 3:53
2. Blocks on Blocks (Visage) – 4:00
3. The Dancer (Egan/Ure) – 3:40
4. Tar (Visage) – 3:32
5. Fade to Grey (Currie/Payne/Ure) – 4:02
6. Malpaso Man (Visage) – 4:14
7. Mind of a Toy (Visage) – 4:28
8. Moon Over Moscow (Visage) – 4:00
9. Visa-Age (Visage) – 4:20
10. The Steps (Visage) – 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