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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뮤지션이 말하는 너바나

Nirvana around 1992.jpg
Nirvana around 1992” by P.B. Rage from USA – More Kurt — too rad.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Thurston Moore (of Sonic Youth)

가장 인상에 남았던 너바나에 대한 경험은, 아마 처음으로 그들을 봤을 때였을 것이다. 그땐 5인조 밴드였으며 채드라는 소년이 드러머였다. 동해안에서의 첫 라이브였는데, 아직 SUB POP에서 싱글 한장밖에 발매하지 않았던 무렵이라서 별로 유명하지 않았고, 그래서 별
기대도 하지 않았었다. 흔히 보는 개리지(Garage) 밴드구나 하고…. 그런데, 정말 대단했다(웃음). 멋있고, 깔끔하고, 겉모습만 봐도 충격적이었다. 커트는 키가 작았고, 크리스는 엄청난 거구였고…. 세컨 기타리스트는 헤비메탈같은 사운드를 플레이했고. 아무튼 놀라웠다. 공연 막바지에는 기타를 빙빙 돌리거나 드럼세트를 때려부수기도 해서 깜작 놀랐다(웃음). 재밌고 거친 친구들이었다. 나중에 멤버들에게 『이렇게 기자재가 다 부서졌는데, 앞으로 투어를 어떻게 할 작정이냐?』하고 물었더니, 커트가 『음, 고쳐서 다시 쓰죠 뭐』하더라(웃음). 그리고 91년에 유럽투어를 했는데, 그때도 그들과 함께 순회했다. 그당시엔 그들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장발의 기타리스트는 해고되고, 새로운 드러머 데이브 그롤도 가입했다. 그래서 예전처럼 멋진 밴드가 되진 못하겠구나 하고 걱정되기도
했었는데, 투어 첫날밤 아일랜드에서의 공연에서 그들이 첫번째 연주하는 곡을 보고나서는, 그 걱정이 쓸데없는 기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전보다 10배정도는 멋있어졌던 것이다. 당시 그곡은 곧 나올 “NEVERMIND”에 수록된 노래였다. 그리고 그들은 대형 공연장에서 플레이하는 유명밴드가 되어갔다. 너바나는 어쨌든 솔직하고 거짓말을 못하는 진짜 밴드였다. 그래서 그들을 좋아했던 것이다. 그들은 당시 미국 젊은이들의 문화에서 누구도 표현하려 하지 않았던 부분을 표현했기때문이다. 당시엔 Guns N’ Roses같은 그룹이 큰 인기였는데(웃음), 그중에서 너바나는 리얼리티의 진수를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Guns N’ Roses들은 락계에서 잊혀져가는 존재가 되었다. 너바나가 이룬 가장 큰 업적은, 레코드 회사들이 획일적으로 만들어내는 락스타들의 넌센스적 구조를 일축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의미에서의 “얼터너티브”였다.

Elivs Costello

커트는 어쨌든 대단한 송라이터였고, 훌륭한 싱어이기도 했다. 그들의 힘은, 손길이 닿을 것 같으면서도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마음의 장벽을 부수고 손을 내미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노래와 가사를 수단삼아, 자신들에게조차 미지의 세계였던 눈앞의 정신세계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래서 그만큼 강력했던 것이다.

Ian Brown (of Stone Roses)

어쨌거나 커트의 노래는 훌륭했다. 존 레논 이래 최고의 보컬리스트가 아니었겠는가. 너바나와 STONE ROSES는 같은 Geffen레코드사 소속이었는데, 그가 사망한지 3일 뒤에 사무실에 갔더니 사람들이 모두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정도로 사랑받았던 사람이 왜그렇게 고독감을 품고 살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내가 정말 화나는 이유는, 그런 어린 딸을 남겨두고 자살해버린 일이다. 진짜 그녀석을 한대 후려갈겨주고 싶을 정도다.

Roddy Frame (of Aztec Camera)

그들이 영국의 심야 음악방송에 출연했을 때가 생각난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기자재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렸던 일이 인상적이었다(웃음). 그 후, 그들의 음악을 주의깊게 듣게 되었고,『괜찮은데!』하며 반하고 말았다. 그들이, 자신들이 일으켰던 현상에 탐닉하지 않았던 점에 상당한 호감을 가졌었다.

Moby

“NEVERMIND”가 마이클 잭슨을 밀어내고 1위가 됐을 때는, 정말 말도 아니었다. 세계가 바뀌었다는 걸 느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너바나가 나오기 전에 인기있던 그룹은 머틀리 크루, 밴 헤일런같은 장발 스타일의 밴드뿐이었다. 나머지는 팝계의 밀리 바닐리
정도였고. 그누구도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그렇게 성공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던 와중에 너바나의 인기는 급상승했다.’허스커 듀’나 ‘픽시즈’같은 그룹들은 전혀 팔리지 않았음에도, 너바나가 정상으로 뛰어오르는 바람에, 음악계가 하룻밤새 바뀌었다는 생각까지 들었었다.


Badly Drawn Boy

“NEVERMIND”는 대단한 앨범이다. 너바나를 듣기 전에는 PIXIES를 좋아했던지라, PIXIES쪽이 너바나보다도 중요한 밴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커트가 사망하고 나서부터, 역시 그의 존재가 전설로써 거대화되어 버렸다. 그러고보면 데이브 그롤도 멋진 친구다. FOO FIGHTERS에서 훌륭한 작품을 계속 만들고 있으니까. 유명한 밴드에 있었던 경력을 등에 업고, 그 후에도 멋진 작품을 계속해서 쏟아내고 있다. 커트가 인생의 고비를 넘을 수 없었던 것은 슬픈 일이지만, 너바나가 만들었던 레코드는 모든 세대의 사운드트랙이 됐지 않은가? 그것이 가능했던 밴드는 별로 많지 않다.

Noel Gallagher

커트 코베인은 엄청난 송라이터였다. 만약 그가 살아있다면, 제 2의 존 레논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가 음악에 대해 말했던 것, 음악업계에 대해 말했던 것은, 그 어떤 것이든 100% 다 들어맞았다. 실제로 그를 만나지 못했던
것은 정말 유감이다. 그래도 그와 나는 같은 왼손잡이였고(기타는 오른손잡이), 나와 마찬가지로 푸른 눈이었으며, 나와 같은 날에
태어났다. 그래서 커트 코베인은, 왠지 나와 무척 가까운 사이같이 느껴졌다. 어떤 점이 그들의 가장 큰 매력인지는 확실히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노래가 아닐까. 아니면 커트 자신일지도. 나는 그가 충분히 존 레논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Liam Gallagher

커트가 사망하고나서야 조금 흥미가 있던 정도였다. 뭐 상관없지 않은가? MTV 언플러그드를 봤는데, 그게 처음으로 그들의 음악을
제대로 들었던 때였다. 알고는 있었지만, 빌어먹을 긴머리를 하고서 시끄러운 소릴 내뱉고, 구질구질한 옷을 입은 녀석들이라니. 난 비틀즈가 더 좋다. MTV에서 어쿠스틱 기타로 연주하는 것을 보고, 나름대로 멋있다고는 생각했다. 몇몇 곡은 그냥저냥 들을만 하다고 생각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Anthony Kiedis (RHCP)

“Californication 에는, 우리가 커트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부분도 있다. 그녀석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녀석은 여러가지 면에서, 나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중요한 의미를 가진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그런 느낌으로 이곡을 쓰면서 커트를 생각했었다. 천국에 갔는지 안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석이 어느곳에 있던지간에 그곳에서 행복하게 지내길 바랬고, 만약 어딘가 다른 별에 산다면, 그별에서 만든 음악을 들려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우리들은 운좋게도 너바나와 함께 투어를 하곤 했으니까…. 그땐 정말 대단했다. 그리고 커트가 『In Utero』를 썼을 무렵 살고 있던 헐리우드 거리가, 그녀석에게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으리라고도 생각했었다.

Tim Wheeler (Ash)

1992년에 너바나가 벨파스트에 왔을 때 라이브를 본 적이 있다. 그것이 내인생을 커다랗게 바꾼 계기였다. 사실 그전에도 난 헤비메탈을 좋아했었는데, 너바나의 “NEVERMIND”를 듣고, 그때까지와는 다른 음악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 라이브가 끝난 후, 나는 커트와 코트니, 데이브 그롤에게 사인을 받았다! 근데 그걸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에게 줘버렸다(웃음). 그리곤 얼마 후 헤어졌지만(웃음). 사인을 받은 후, 거기 있던 한 젊은이가 입고 있던 스웨터를 본 코트니가 『커트, 저 스웨터 너무 멋있지 않아요? 우리한테 팔라고 하죠!』라고 말한 뒤 그남자에게 30파운드(약 6만원)를 주고 사는 장면을 바로 곁에서 봤다. 그게바로 저 유명한 적과 흑의 줄무늬 스웨터였다!

Beck

나는 너바나의 팬이었다. 그들이 성공하기 전부터였지만. 우리들사이에서는 좀더 메탈에 가까운 밴드로 인식되어 있었다고는 해도, 그당시 횡행했던 Guns N’ Roses스타일과는 다른, 좀더 예전의 Black Sabbath나 Cheap Trick 등과도 통하는 헤비한 메탈이었다. 게다가, 보다 더 예술지향주의였고…. 이른바 ‘아티스트’다운 면을 지니고 있었다. 단순하고 마초적인 락과는 근본적으로 틀린, 다른 종류의 좀더 비뚤어진 취향을 갖고 있었다. 우리들은 모두 그러한 매력에 푹 빠지게 된 것이리라. 그러던 어느날,『NEVERMIND』가 발매됐는데…. 거의 팝앨범같은 결과가 되어버렸고, 처음과는 너무나도 달랐기때문에 우리들은 약간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 결과조차도 받아들였고, 그리고 그들이 기폭제가 되어 돌파구를 열어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들이 이룬 업적은 어찌 그리도 참신했는지 다시금 돌이켜보게 만든다.
우리들 세대는 철이 들 무렵부터 이미 몇년 동안이나 음악이나 영화, 그밖의 모든 팝 문화를 이것저것 모두 떠안게 되었고, 어거지로 그것들을 그대로 주입당했다. 우리들은 그게 너무나도 싫어서 견딜 수 없었다. 우리들이 생각했던 것이나 세상에 대해 느꼈던 것들은, 당시 팝 문화에는 무엇하나 반영되어 있지 않았다고 생각되어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때에 너바나가 나와서 처음으로 우리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음악을 연주했고, 폭발시켰다. 그랬더니 갑자기 세상이 방향을 전환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아! 역시 아이들도 성장하고 있었구나.”라고. 우리들에게도 사생활이 있고, 나름대로의 자기표현 방법이 있다는 것을 그시대 어른들은 처음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DJ Shadow

대학교 2학년 무렵, 처음으로 “Smells Like Teen Spirit”의 비디오를 봤을 때 『와, 죽여준다』하고 놀랐었는데, Urban Radio라는 락이나 흑인음악 계열밖에 틀지 않았던 라디오 방송국이 그곡을 틀어주었다. 그런 현상을 만든 것 자체가 놀라웠다. 지금도 그런 풍조가 일어나면 좋을텐데. 너바나의 매력은 퍼블릭 에너미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노래불렀던 것을 정말로 믿고 있었다는 점에 있었다. 정말 그랬다. 그래서 커트가 죽었을 땐 무척 슬펐으며, 학교도 가지 않고 하루종일 MTV같은데서 뉴스를 봤던 추억이 있다.


Tom Waits

나도 너바나를 좋아했다. 『Bleach』에 수록된 노래들이, 어느 10대 소녀의 방 창문으로 쾅쾅 흘러나왔던 것이 기억난다. 그녀가 머리를 흔들면서 춤추고 있던 모습을 창문너머로 볼 수 있었다. 자살한 것은 유감이었다. 사람이 그런 극한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죽지않고 계속 활동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런데 커트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잖은가? 그가 남긴 최고의 유산이 그의 딸이길 바란다. 자식이야말로 평생 남는 것이고, 가장 소중한 것이기도 하다. 레코드는…. 어차피 레코드일 뿐이니까(웃음).

What does “Never Mind” mean now?  : Nirvana의 Never Mind발매 20주년을 기념하는 Spin의 특집 페이지

80년대 뉴웨이브에 관한 Moby와의 인터뷰

조류에 거슬러 헤엄쳐 올라가는…. 여러분들은 아마 그의 메가히트곡 Play로 그를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Moby는 이미 ’80년대 말부터 Acid House의 붐에 편승하여 그의 싱글을 내놓았던 전력이 오랜 아티스트이다. 음악 전문가들은 그를 하나의 아티스트로 만들어낸 New Wave에 대해 재고하고 있다.

 

VH1: 당신은 어떤 밴드가 뉴웨이브로 분류된다고 생각하시나요?

Moby: 그당시에 New Wave와 Punk사이에 엄격한 이분법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참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네요. Black Flag, Bad Brains, Dead Kennedys는 펑크밴드였습니다. New Order, Depeche Mode, Duran Duran, Flock of Seagulls는 New Wave 밴드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Flock of Seagulls, Missing Persons, 또는 the Go-Go’s 등이 생각나네요. New wave는 클래식락과 같은 사운드가 아니면서도 씬써싸이저가 개입된 음악을 추구하는 짧은 머리를 한 아티스트들이 만들어내는 음악을 의미했었죠.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경솔한 정의지요.

 

VH1: 그런 아티스트들이 어떻게 광범위한 팬층을 형성할 수 있었나요?

Moby: 그건 접근용이성과 멜로디에 관련된 흔히들 하는 질문이지요. The Dead Kennedys는 위대한 노래들을 만들어냈어요. 그러나 펑크는 자세, 에너지, 공격성과 더 많은 관련이 있었지요. 뉴웨이브는 언제나 “귀에 쏙 들어오는(Catchy)” 특징을 가지고 있었어요. 당신이 정말 뛰어난 멜로디에 드럼머쉰과 씬써싸이저를 입히면 새로운 싸운드가 태어나죠. 그러나 결국 요는 사람들이 좋아하고 쉽게 다가설 수 있는 훅(Hook : Catchy, Groove 등과 함께 우리말로 표현하기 참 어려운 단어중 하나)이었지요.

 

VH1: 그 당시엔 정말 키타보다 씬써싸이저를 많이들 채용하였나요?

Moby: ’80년대 중반에 키타 연주자와 씬써싸이저 연주자, 그리고 드러머와 드럼머쉰을 조작하는 사람들간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죠. 그 당시 음반가게에 가면 아마도 당신은 드러머의 장점과 드럼머쉰의 장점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을거에요. 그렇지만 그 전쟁에서 죽은 사람은 없었죠. 그러나 사람들은 정말 심각했어요.

 

VH1: 전형적인 뉴웨이브 아티스트의 패션은 어떠했죠?

Moby: 헤어젤 또는 헤어스프레이, 얇은 안경, Doc Maartens(Dr. Martens라는 브랜드를 의미하는듯함:역자주), 뽀족한 부츠, Converse(유명한 미국의 스포츠화:역자주), 달라붙는 검은 바지 또는 블랙진 정도가 뉴웨이브 아티스트들의 필수품목이었죠. 1981년 The Specials르 봤던 기억이 나네요. 사람들의 절반은 핑크와 블랙의 컴비네이션을 입고 있었어요. 그때 전 14살이나 15살이었는데 “와우~ 정말 근사하군.”하고 생각했었죠.

 

VH1: 그당시 팝차트에 머물던 곡들과 얼터너티브락은 어떤 차이가 있었죠?

Moby: ’80년대의 팝차트는 Prince, Michael Jackson, 헤어밴드들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죠. 나중에 얼터너티브락은 Mission of Burma, R.E.M., the Pixies, 그리고 나중에 Jane’s Addiction 등에 의해 등장했어요. ’80년대 헤비메틀은 폭발적이었죠. 드럼은 무슨 폭발음같았어요. 씬써싸이저는 모든 것을 장식적으로 만들었죠. R.E.M.을 듣고 있자면 그건 보다 절제되고 기본적인 맛이 났어요. 키타는 키타 소리가 났었고 드럼은 드럼소리가 났죠. 마치 발가벗겨 진것처럼 말이죠. 1985년에 Husker Du나 R.E.M.은 무명 셔츠와 진을 입고 있었어요. 반면 The Time은 수트를 차려입고 헤어스타일은 무척이나 화려했었죠. 그들 모두가 과도기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반면에 하나의 교재였죠.

 

VH1: ’80년대 말 당신은 익사이팅한 시대를 살았다고 생각했었습니까?

Moby: 난 어쩌면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았다는 느낌입니다. 난 코네티컷에서는 14살짜리 펑크락커였고 뉴욕에서는 25살짜리 하우스 뮤직 열광자였으니까요. 많은 것들이 변화했죠. Charles Dickens를 인용하자면 정말 최고의 시대이자 최악의 시대였습니다.

 

VH1: ’80년대 어떤 유산을 남겼나요?

Moby: 그 시대에 많은 장르들이 탄생했죠. 그러나 그들은 길거리에 내팽겨쳐졌습니다. New Order같은 밴드를 보면 한편으로 New Wave 밴드였고 다른 한편으로 디스코 그룹이었습니다. 또다른 한편으로는 팝그룹이죠. 사람들이 디스코텍에 가서 음악을 듣고 그 노래가 차트에 올라가는 식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음악은 실험적입니다. 다행히 그 유산들은 여전히 남아있어요. 사람들이 음악을 듣는 방식, 그리고 어떤 장르인지 개의치 않고 이 음악이 맘에 드는지 안드는지 자문하는 방식 등이라 할 수 있죠.

Techno

★ 테크노의 역사

테크노는 말 그대로 기술(技術)이란 의미의 ‘Technology’ 에서 따온 단어이다. 20세기의 대표적인 발명품인 컴퓨터의 탄생은 음악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는데 바로 신디사이저라는 첨단 악기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테크노 음악도 이와 발맞추어 탄생하게 되었다. 1960년대 후반 영국의 록시 뮤직 (Roxy Music), 브라이언 이노 (Brian Eno), 독일의 탠저린 드림 (Tangerin Dream), 크라프트베르크 (Kraftwerk) 등 유럽 지역의 진보 성향 뮤지션들은 신디사이저를 도입해 더욱 실험적인 음악을 발표했는데 이들이 만들어낸 전위적이면서 신비주의적인 일렉트로닉 사운드는 뒤에 등장하는 테크노 음악의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초기 테크노 음악은 70년대 후반 디스코, 펑크라는 신조류의 영향을 대거 수용한 형태로 변모하게 된다. 테크노 팝이라고도 불리우던 이 당시 테크노 음악은 팝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사운드로 전과는 달리 대중적인 인기 또한 얻을수 있었다. 버글즈 (Burgles), 게리 뉴만 (Gary Numan), 울트라복스 (Ultravox), 휴먼 리그 (Human League) 등이 당시 주목받던 뮤지션들이다. 한층 발전된 신디사이저를 이용해 예전의 실험적인 사운드에서 탈피하여 뉴웨이브 (New Wave), 뉴 로맨틱 (New Romantic), 댄스, 팝 사운드를 차용한 신스 팝 (Synth Pop)은 80년대 초반 대중 음악계의 주류로 새롭게 부각되었다. 현재까지 최고의 신스 팝 밴드로 인기 정상을 누리고 있는 디페쉬 모드 (Depeche Mode), 역시 디페쉬 모드를 거친 빈스 클락 (Vince Clark)이 결성했던 야주 (Yazoo, 훗날 이레이저 Erasure로 발전됨), 유리스믹스 (Eurythmics), 하워드 존스 (Howard Jones)등의 음악은 당시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레이저, 프랭키 고즈 투 헐리웃 (Frankie Goes To Hollywood), 팻 샵 보이즈 (Pet Shop Boys), 아트 오브 노이즈 (Art Of Noise)등 영국 신스 팝 계열의 뮤지션들이 더욱 맹위를 떨치는 가운데 80년대 중반에 와서 테크노는 다양한 세분화를 이루게된다. 샘플링 머쉰같은 전자 악기들이 보편화되면서 새로운 음악적 실험이 이뤄지는데 대표적인 댄스 뮤직인 하우스 (House), 기계적인 인더스트리얼 (Industrial) 경향의 음악은 이 시기에 와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테크노라고 부르는 것들은 거의 90년대에 등장한 테크노 음악을 일컫는다. 현재의 테크노는 엠비언트 (Ambient), 애시드 재즈 (Acid Jazz), 트랜스 (Trance), 드럼 앤 베이스 (Drum and Bass), 하드코어 테크노 (Hardcore Techno), 트립 합 (Trip-Hop) 등 마치 세포 분열을 연상케 할만큼 수많은 하위 장르로 파생되고 있다.

★ 대표적인 90년대 테크노 뮤지션

불협화음, 전위적인 구성, 파괴적인 기계음 등, 세기말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프로디지 (Prodigy)는 단연 90년대가 낳은 최고의 테크노 밴드이다. (1997년, 테크노 뮤지션으로는 최초로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을 차지) 프로디지와 함께 영국 테크노의 3인방으로 군림하는 케미컬 브러더즈 (Chemical Brothers)와 형제 듀오 오비탈 (Orbital), 이외에도 영화 ‘트레인스포팅’에 삽입된 ‘Born Slippy’로 유명해진 언더월드 (Underworld), 테크노의 불모지였던 미국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모비 (Moby, 영화 ‘007 네버다이’에 참여) 프랑스의 대프트 펑크 (Daft Funk), 에어 (Air), 독일의 아타리 틴에이지 라이엇, 트립-합을 정착시킨 영국의 혼성듀오 포티쉐드 (Portishead) 등은 90년대 테크노 음악의 붐을 주도한 대표적인 뮤지션들이다.

★ 국내의 경우

정통 테크노 음악이라고 부를 만한 시도를 국내에선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해 달파란 (시나위, H2O를 거친 베이시스트 강기영의 예명)이 발표한 독집 음반 ‘휘파람 별’ 이나 조동익의 영화음악 모음집 ‘Movie’에 수록된 ‘일탈’, ‘현기증’ 등 일부곡 정도랄까 ? 흔히 일반인들이 테크노라고 생각하는 음악들은 대개 댄스 음악에 테크노적인 요소를 양념처럼 첨가한 것 뿐이다. 멜로디가 강조된 음악을 선호하는 국내 정서와 이와는 반대인 90년대 테크노 음악과의 간격은 생각보다 크다.

이제 테크노는 세기말을 맞이하는 1999년, 중요한 문화 현상중 하나로 자리매김을 했다. 비인간적이고 기계적이라는 비판에도 아랑곳 없이 테크노의 인기는 당분간 지속될 듯 보인다. 하지만 테크노의 미래가 지금처럼 밝을지는 예측하기 힘들다. 다양한 음악적인 실험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앞서 등장했다 소멸한 여러 장르의 음악들 처럼 테크노 음악도 같은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뮤지션들도 기억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