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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ce,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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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ng ThePolice 2007” by Lionel Urman – Lionel Urman via email.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팝/록에 레게(Reggae)를 가미, 펑키(punky)한 사운드로 최고의 트리오로서 호평받는 그룹이 바로 폴리스(Police)다.Stewart Copeland와 Sting (b. Gordon Sumner)은 1977년 폴리스를 결성하였다. 밴드를 결성하기전 CIA 에이전트의 아들이었던 스튜어트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영국으로 이주하기 전 그는 프로그레시브락 밴드 Curved Air와 잠시 함께하기도 했었다. 스팅은 교사생활을 하는 한편 째즈락 밴드 등에서 연주를 하기도 했다. 두 뮤지션은 한 로컬째즈클럽에서 만나서 키타리스트 Henry Padovani와 함께 프로그레시브 밴드를 조직하기로 했다. 처음 몇달동안 그룹은 런던의 펍에서 연주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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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y Summers Marseille 2008” by JosuéJacob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1977년 후반 그룹은 그들의 첫싱글 Fall Out을 발매하였고 인디씬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패도바니는 첫싱글 Fall Out의 발매이후 앤디섬머즈(Andy Summers)로 교체되었다. 섬머즈는 이전에 애니멀즈의 두번째 라인업에서 활동하기도 한 실력파였다.1978년 봄, 폴리스는 A&M과 계약을 맺고 Roxanne를 발표했지만 챠트 진입에는 실패하였다. 그룹은 데뷔앨범도 없이 미국 공연을 강행했다. 빌린 차를 타고다니며 빌린 악기로 연주를 강행한 그룹의 첫앨범 Outlandos D’Amour이 1978년 가을 발매되었고 슬금 슬금 영국챠트와 미국챠트에 등장했다. 79년 재발매된 Roxanne는 영국챠트 12위까지 올랐다.이어진 앨범 Reggatta de Blanc에서는 싱글 Message in a Bottle이 영국챠트에서 4주간 1위에 머무는 대히트를 기록하였다. 이로 인해 그룹은 영국과 유럽에서 확실한 스타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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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wart Copeland Marseille 2008” by JosuéJacob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그들은 이어 서구 아티스트의 공연을 흔하게 접할 수 없는 태국, 인도, 멕시코, 그리스, 이집트 등을 돌며 그들의 음악을 전파하였다. 1980년 가을 발매된 Zenyatta Mondatta를 통해 폴리스는 북미 지역에서 확실한 기반을 다졌다. 이 앨범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탑10 진입에 성공하였고 영국에서는 4주 동안 1위에 올랐다. 앨범에 수록된 De Do Do Do, De Da Da Da라는 재밌는 제목의 싱글이 히트하였고 1981년 그들은 프로듀서 Hugh Padgham과 함께 네번째 앨범을 제작하기 위해 스튜디오로 돌아왔다. Ghost in the Machine은 1981년 가을 발매되었다. 이 역시 영미 챠트의 1위를 기록하였고 Every Little Thing She Does is Magic이 크게 히트하였다.1980년과 1981년의 눈부신 활동 덕택에 그들은 브릿어워드에서 최우수 영국 그룹에 선정되었고 세 개의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그룹은 1982년에 휴식기를 가졌다. 각각의 멤버들은 이 시기에 각각의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스팅은 Spread a Little Happiness라는 싱글을 발매하여 영국에서 히트하였고 코폴랜드는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영화 Rumble Fish의 영화음악을 맡았다. 섬머즈는 인스트루멘탈 앨범을 녹음하였다.1983년 폴리스는 그들 최고의 걸작 Synchronicity와 함께 돌아왔다. 이 앨범에는 미국챠트 1위에 8주간이 머문 최고의 히트곡 Every Breath You Take와 연속된 히트곡 King of Pain, Wrapped Around Your Finger 등이 수록되어 있었다. 이 앨범은 영국과 미국에서 멀티플래티넘을 기록하는 엄청난 히트를 쳤다. 폴리스는 여세를 몰아 공연에 돌입하였다. 공연이 끝나고 그룹은 안식일을 선언했다.그러나 이 “안식일”동안에멤버들간의 불화가 이어졌다. 그들은 한동안 함께 일하고자 하는 의욕이 없었다.

스팅은 째즈에 기반을 둔 솔로활동에 착수하였고 1985년 Dream of the Blue Turtles를 발매하였다. 그 앨범은 국제적인 히트를 기록하였고 이로 인해 그는 더더욱 밴드활동으로의 복귀에 대해 회의감이 들기 시작하였다. 코폴랜드는 1985년 월드비트를 추구하는 The Rhythmatist를 발매하고 영화음악과 TV주제가 등을 작곡했다. 그는 나중에 팝록밴드 Animal Logic을 조직하였다. 섬머즈는 아트락과 째즈퓨전 등 실험적인 음악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이따금씩 Fripp과 John Etheridge와 함께 음악활동을 진행하였다.이후 80년대 후반과 90년대에 걸쳐 우리는 이 재기발랄한 세명의 멤버가 함께 모여 만든 음악을 접할 수 없었다. 80년대를 압축적으로 살아간 폴리스는 멤버 각각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이 화학적으로 훌륭하게 녹아들어간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그레시브 밴드에서부터 시작된 그들의 음악이 시대적 조류와 함께 펑크락으로 분류되었다는 재밌는 사실때문에 이들은 단순히 펑크락으로 분류하기에는 다소 무리한 측면이 있다. 음악사조상으로 팝과 락, 그리고 레게를 가장 훌륭하게 접목시킨 이들의 음악에는 펑크의 표상으로 불리우는 젊은이의 분노와 저항 이상의 그 무엇이 있었으며(펑크가 음악적으로 열등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스팅을 비롯한 각각의 멤버들이 오늘날 훌륭한 솔로활동을 펼치고 있는 사실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디스코그래피
1978 Outlandos d’Amour A&M
1979 Reggatta de Blanc A&M
1980 Zenyatta Mondatta A&M
1981 Ghost in the Machine A&M
1983 Synchronicity A&M
1995 Live A&M

링크
stingchronicity.co.uk
stingetc.com
Police/Sting Links
Sting의 영화활동

Polecats

The Polecats은 80년대 초반 영국의 “라카빌리 리바이벌” 운동에 참여했던 그룹이다. 애초 그룹의 이름은 The Cult Heroes였는데 이름이 너무 Punk적인 탓에 일거리를 구할 수 없자 Polecats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복장에서 머리모양, 그리고 화장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인 라카빌리 스타일로 무장한 이들은 영국에서 탑40안에 몇 개의 싱글을 올려놓은 후 1981년 데뷔 앨범 “Polecats Are Go!”를 발표하였다. 이 앨범은 소폭의 히트에 그쳤지만 이어지는 미니앨범 “Make a Circuit with Me”가 큰 인기를 누리게 된다. 1984년 발표된 세 번째 앨범 “Cult Heroes”은 초기 시절의 데모 버전을 모은 앨범이다. 그러던 중에 리더인 Martin “Boz” Boorer는 돌연 Morrissey와 함께 작업하기 위해 그룹을 해체해버렸다. 그러나 1989년 Polecats은 재결합했고 라이브앨범과 새로운 스튜디오 앨범 “The Polecats Won’t Die”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앨범을 발표하였다. Tim Polecat은 LA로 근거지를 옮겨 Slim Jim(Stray Cats)과 Lucky 13이라는 밴드에서 함께 연주했다.

Line-up:
Martin ‘Boz’ Boorer – Vocals, Lead Guitar, Sax, Piano
Tim ‘Polecat’ Worman – Vocals, Guitar
Chris Hawkes/Neil Rooney – Drums
Phil Bloomberg – Slap Bass

디스코그래피
1981 Pole Cats Are Go [Mercury]
1983 Make A Circuit With Me [Mercury]
1984 Cult Heroes [Nervous]
1989 The Polecats Won’t Die! [Vinyl Japan]
1989 Live and Rockin’ [Link]
1999 Pink Noise [Rock It]
1999 Not Nervous! [Nvr]

링크
그룹소개
Boz Boorer Website
Tim Polecat Homepage
Yahoo! Polecats Club

Pixies,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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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ies in Kansas City, October 1, 2004” by Stephanie D.Pixies in Kansas City, October 1, 2004.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6년동안 팩시스의 존재는 인디 씬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다. 보스톤에서부터 세계적 헤더라이너까지 의미 심장한 가사와 격럴한 기타웍으로 뭉친 픽시스는 인디 씬에서 최고의 록밴드로 평가하는 그룹중의 하나가 되었다.

캘리포니아에서 비틀매니아인 ‘CHARLES MICHEAL KITRIDGE’ 즉,’BLACK FRANCIS’가 태어났다. 그의 아버진 술집 주인이었고 우울한 학교시절을 보낸다. 그래서 캘리포니아의 바닷가는 그의 음악세계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그는 기타, 베이스, 피아노, 드럼을 배우기 시작했고 후엔 보컬영역까지 넘나 들었다.

비틀즈와 도어즈에 심취해있던 프란시스가 ‘MASSACHUSETTS’ 대학에서 필리핀계 룸메이트인 ‘JOEY SANTIAGO’ 를 만나게 되고 그로부터 70년대 펑크사운드와 ‘DAVID BOWIE’, ‘IGGY POP’ 을 소개 받게 된다. 그와 있는 동안 음악과 기타에 몰두하게 되나 산티아고와 헤어진후 방탕한 생활에 빠지게 된다.

1986년 5월 보스톤으로 돌아온 그는 밴드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프란시스는 다시 산티아고와 만나 짖굿은 작은 요정이란 뜻의 ‘PIXIES’ 란 이름으로 밴드를 만들고 신문에 ‘HUSKER DU’, ‘PETER,PAUL AND MARY’ 와 같은 음악성향이 비슷한 베이스스트를 구한다는 광고를 내게 된다. 그리고 그 광고를 보고 온 ‘KIM DEAL’은 메사추세츠의 ‘IZ WIZARD’ 와 ‘RIFF RAFF’에 있던 드러머인 ‘DAVID LOVERINGIL’ 을 대리고와 같이 픽시스에 함류하게 된다. 그래서 1986년 러버링길 아버지의 허름한 창고에서 부터 픽시스의 사운드는 시작된다.

얼마후 그들은 8곡이 담긴 데모테잎을 만들어 ‘ROXBURY’ 의 ‘FORT APACHE’ 스튜디오에 있던 매니져겸 프로듀서인 ‘GARY SMITH’에게 그것을 보냈고 데모를 들은 스미스는 흡족해 하며 첫 번째 미니 앨범을 제작케 했다. 1987년 3월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 데모테잎을 영국 인디레이블 ‘4AD’ 제작자인 ‘IVO-RUSSELL에게 보내게 되고 그는 곧 그들의 데뷰EP앨범 ‘COME ON PILGRIM’을 영국과 유럽시장에 내놓게 된다. 총 7곡의 짧은 곡들로 구성된 이 앨범은 프란시스의 악마적(?)인 외침속에 부드러운 멜로디로 곡들이 짜여져 있으며 종교적 색채와 성과 로큰롤이라는 대립되는 주제를 표현하고자 했다.

두번째 앨범은 이보의 제안으로 프로듀서인 ‘STEVE ALBINI’가 참가하게 되고 픽시스의 사운드를 확립시켜 내놓은 그들의 최고 앨범 surfer ROSA가 14일 동안의 녹음으로 1988년에 나오게 된다. 타이틀 곡인 ‘GIGANTIC’을 필두로 픽시스를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리는 작픔이 되었다. 기계적으로 처리된 목소리, 거친 기타리프. 어울리지 않은 듯 하지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곡들. surfer ROSA는 음악적으로 상업적으로 모두 성공하게 되었고 영국 인디차트 정상을 차지하는 영광과 유수 잡지에서 최고의 밴드로 대우받게 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1988년 4월에 ‘LONDON’S MEAN FIDDLER’를 시작하여 튜어를 떠나게 된다. 이 공연 이후 그들의 팬들은 늘어 났고 여기서 킴딜은 후에 ‘BREEDERS’ 의 베이시스가 될 ‘JOSEPHINE WIGGS’ 을 만난다. 밴드로서는 프로듀서’GIL NORTON’ 과 알게 된다. 그리고 보스톤 스튜디오에서 임시 가제인 whore 로 그들의 세번째 앨범을 녹음하게 된다. 픽시스의 음악적 끼가 함축된 앨범 doolittle이란 타이틀로 1989년에 발매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픽시스하면 doolittle을 떠올린다. 15곡이 담긴 이 앨범은 누구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당당히 첫 베스트원을 차지했다. ‘DEBASER’ 는 나무랄때 없는 픽시스의 No1노래이며 곡 자체의 가사와 멜로디는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세번째 앨범의 활동을 마감하게 될때 킴딜은 1989년 12월말에 ‘LONDON’S MEAN FIDDLER’에서 서포트 밴드로 나온 ‘THROWING MUSES’ 의 키타리스트 ‘TANYA DONNELLY’, 또 서포트 밴드로 출연한 ‘PERFECT DISASTER’ 의 베이시스트 ‘JOSEPHINE WIGGS’, 하드코어 밴드 ‘SLINT’ 출신의 19살 무명의 드러머인 ‘BRIT WALFORD’ 와 프로젝트 그룹 ‘BREEDERS’ – 게이들이 사용하는 이성애란 뜻의 슬랭어 – 를 결성한다. 알바니가 다시 프로듀서를 맏아서 13곡을 녹음했고 pod란 제목으로 발매된다. 그리고 런던에서 비공식적 공연을 시작으로 브리더즈의 활동은 시작된다. 브리더즈은 픽시스와 쓰로잉 뮤지스를 섞어 놓은 것 같다는 평을 듣게 된다.

그리고 킴딜은 다시 LA에서 픽시스의 네번째 앨범을 녹음하기위해 밴드와 다시 합류한다. ‘MASTER CONTROL’ 스튜디오에서 bossanova 가 제작되고 서퍼 사운드와 SF적 내용이 앨범에 담겨진 이 앨범은 픽시스가 적절한 평과 댄스는 그만두라는 등의 상반된 평을 듣게 된다. 주목할 만한 것은 ‘ANA’ 는 드물게 어쿠스틱 버전으로 만들어 져다는 것이다. 픽시스는 후에 몇 개의 커버곡들을 만들었는데 이 곡들은 평론가들로 부터 외면당하기도 했다. 픽시스의 행로가 예상된 투어 ‘LODON’S BRIXTON ACADEMY’ 에서 킴딜은 우리의 마지막 공연이 될 것이라는 말을 함으로써 픽시스를 얼마동안 보지 못 할 것이란 의미를 내던진다. 그리고 프란시스는 ‘LONDON’S BORDERLINE’ 에서 개인 공연을 갖게되고 이것은 프란시스와 킴딜의 관계가 좋지 않음을 알수 있게 해 주었다.

1991년 ‘OZZIE OSBOURNE’ 이 녹음 한적이 있는 LA의 ‘MASTER CONTROL’ 스튜디오에서 5번째 앨범 trompe LE MONDE를 녹음한다. 15곡이 담겨있는 이 앨범은 픽시스가 뭔가 잘 못 되었음을 알게 해준 앨범이었으나 ‘PLANET OF SOUND’ 와 ‘U-MASS’ 는 그나마 픽시스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오래지않아 프란시스는 라디오에서 픽시스해산을 알림으로 픽시스의 역사를 접게 했다.

(from Clubnono)

디스코그래피
1987 Come on Pilgrim [EP] 4AD/Elektra
1988 Surfer Rosa 4AD/Elektra
1989 Doolittle 4AD/Elektra
1990 Bossanova 4AD/Elektra
1991 Trompe le Monde 4AD/Elektra

링크
PixiesWeb
Pixies 4AD
팬페이지

Phoen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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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enix mg 5643” by RamaOwn work. Licensed under CC-BY-SA-2.0-fr via Wikimedia Commons.

프랑스 출신의 Phoenix 는 그들이 듣고 자란 80년대의 일렉트로 음악을 자양분 삼아 현재진행형의 새로운 일렉트로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다.

Thomas Mars (보컬), Deck D’Arcy (베이스), Christian Mazzalai (키타) 는 파리 외곽의 Mars 의 집 창고에서 음악적 열정을 키운 말 그대로의 개리지 밴드(garage band)였다. 이 와중에 Mazzalai 의 형 Branco 가 밴드에 가세하였다. 그룹은 빠를 돌아다니며 술취한 관중 앞에서 Hank Williams 와 Prince 의 노래 등을 불렀다.

밴드가 Phoenix 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지 2년 후 자신들만의 레이블 Ghettoblaster 에서 500 장의 싱글을 찍었다. A 면에는 펑크락 스타일의 곡이었고 다른 면에는 클라우트락 스타일이었다. 이후 파리에 근거를 둔 Source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었다. 이즈음 Phoenix 는 Air 와 친해졌는데 영국 TV에 출연할 때에는 백밴드인양 행세하기도 했다.

두 달 만에 녹음을 마친 그룹의 데뷔앨범 United 는 2000년에 발매되었다. 앨범은 전체적으로 뛰어난 멜로디라인이 돋보이는 곡들로 채워져 있으며 마치 80년대 음악을 하우스 스타일로 재현한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Mars 의 따뜻하면서도 드라이한 보컬은 언뜻 자미로콰이를 연상시키면서도 결국에는 자신만의 독특한 캐릭터를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그들의 싱글 Too Young – 이 곡은 Sofia Coppola 감독의 영화 Lost In Translation 의 사운드트랙에 담기기도 했다 – 에서 잘 드러나는데 자미로콰이를 연상시키는 도입부에서 종반으로 치달을수록 곡은 80년대의 팝/락 스타일로 변해간다. 또한 Funky Square Dance 에서는 컨트리 음악으로 시작된 곡이 점차 나아갈수록 노이지한 락음악으로 근사하게 넘어간다. 이러한 언뜻 이질적으로 보이는 요소들의 오묘한 화학적 결합이야말로 “Phoenix 가 발을 딛고 있는 프랑스에서 일렉트로 음악하기” 의 독특한 풍토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 앨범에는 또한 프랑스의 일렉트로 음악 동지들이 많이 출연해주었는데 이 중에는 Thomas Bangalter (Daft Punk), Phillipe Zdar (Cassius) 등이 있다.

2004년에는 신보 Alphabetical 를 내놓았다. 4년 만에 신보를 내놓은 그들의 활동을 예의주시하도록 하자.

디스코그래피

2000 United Astralwerks
2004 Alphabetical Source
2006 It’s Never Been Like That
2009 Wolfgang Amadeus Phoenix
2013 Bankru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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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icial Site
VH1 소개
Bio & Album Review

Parker, Gra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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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ham Parker” by Robman94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Graham Parker는 ’70년대 초반 영국의 펍록(Pub-Rock)씬에서 활동한 싱어쏭라이터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아티스트 중 하나이다. Van Morrison과 Rolling Stones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Parker는 락앤롤과 포크락에 냉소과 분노가 섞인 자신만의 열정과 뒤섞어 새로운 휴전스타일을 창조해냈다. 그의 앨범들은 펍록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러한 여러가지 매력적인 그만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고 스타가 되려 노력하지 않았고 이어서 등장한 Elvis Costello의 존재에 의해 그의 존재가 가리워졌다. 여러 이상한 직업을 전전했던 Parker는 진지하게 음악적 경력을 쌓기로 결심하고 여러 펍록 밴드에서 연주활동을 시작하였다. 1975년 그는 데모테잎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자신을 시장에 내다팔기로 결심했다.

1975년 새로운 인디라벨인 Stiff의 공동설립자인 Dave Robinson은 Parker의 데모테잎을 듣고는 이 쏭라이터에게 The Rumor라는 백밴드를 조직하도록 격려했다. Robinson은 곧 키타리스트 Brinsley Schwarz, 키보디스트 Bob Andrews, 키타리스트 Martin Belmont, 드러머 Steve Goulding,베이시스트 Andrew Bodnar 등 펍록씬에서 활동하던 몇몇 스타들을 불러모았다. DJ Charlie Gillett의 도움으로 1975년말 Mecury와 레코드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새로이 조직된 밴드는 Nick Lowe의 프로듀스로 데뷔앨범 제작에 들어갔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앨범 Howlin’ Wind는 평단의 찬사를 얻었다. 두번째 앨범 Heat Treatment의 이어진 찬사에도 불구하고 Parker는 Mecury에 불만이 쌓여갔다. 그는 회사가 그의 앨범의 홍보를 게을리 했다고 여겼다. 세번째 앨범 Stick To Me는 결국 앨범발매 예정일 전에 결함이 있는 것으로 밝혀져 다시 녹음해야만 했다. 그러나 여전히 Parker는 그와 비슷한 음악적 뿌리를 가지고 있는 Elvis Costello에 의해 그의 존재가 가리워 지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마침내 Parker는 Mecury와의 계약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1978년 여름 라이브 더블앨범을 발매했다. 그리고는 이어진 Mecury와의 분쟁후에 Arista와 계약을 체결하였다. 계약후 처음 발매한 앨범은 그의 전 소속사를 드러내놓고 욕한 Mecury Poisoning이라는 제목의 앨범이었다.

이어진 앨범 Squeezing Out Sparks – Nick Lowe가 어떤 형태로든지 앨범제작에 관여하지 않은 첫앨범 – 는 또다시 평론의 극찬을 받았다. 싱글 Local Girls역시 래디오에서 크게 히트하였다. 이 앨범은 미국 챠트 40위안에 들었고 2백만 카피 이상이 팔리는 등 그의 가장 앨범중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앨범이 되었다. Parker가 드디어 메이저로 입성하는 듯 했지만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어진 앨범 The Up Escalator은 팔리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Parker는 The Rumor를 해체하기로 맘먹었다. 1982년 Another Grey Area에서 그는 Jack Douglas를 프로듀서로 고용하고 세션뮤지션들을 활용했다. 엇갈린 비평을 얻은 이 앨범은 간신히 챠트 51위까지 올라갔다. 이어진 앨범들도 비슷한 처지였다.

Parker는 The Shot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백밴드와 함께 Elektra 레코드사로 옮겼다. 그리고 Wake Up(Next To You)가 탑40에 올랐는데 이 곡이 그의 유일한 챠트 히트곡이다. 앨범 역시 챠트에 Squeezing Out Sparks가 머물러 있던 만큼 머물러 있었다. 이번에는 Elektra와 트러블이 생겼고 그는 재빨리 Atlantic으로 옮겼지만 여기서 그는 싱글 한장도 내놓지 못하고 만다. Parker는 결국 1988년까지 또다른 앨범을 내놓지 못했다. 그가 RCA와 계약을 체결하고서야 The Mona Lisa’s Sister를 내놓을 수 있었다. 그 앨범에서는 Get Started(Start a Fire)가 대학가를 중심으로 유행하였다. 그의 시대가 다시 오는 듯 하였으나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이어진 앨범들은 호의적인 평에도 불구하고 챠트의 끝자락만 붙잡고 늘어졌다. 결국 그는 소위 컬트라는 수식어가 노상 따라다니게 될 판이었다. 1992년 Capitol로 소속사를 바꾼 그는 Burning Questions를 내놓았고 이 역시 무시당했다.

90년대에도 Parker는 인디라벨에서 꾸준히 앨범활동을 펼쳐나갔다.

Punk77의 Garam Parker소개

디스코그래피

1976 Howlin Wind Mercury
1976 Heat Treatment Mercury
1977 Pink Parker Mercury
1977 Stick to Me Mercury
1978 The Parkerilla/Live Mercury
1979 Mercury Poisoning Arista
1979 Squeezing out Sparks Arista
1980 The Up Escalator Razor & Tie
1982 Another Grey Area Razor & Tie
1983 The Real Macaw Razor & Tie
1985 Steady Nerves Elektra
1988 The Mona Lisa’s Sister Buddha
1989 Live! Alone in America RCA
1990 Human Soul Diablo
1991 Struck by Lightning Diablo
1992 Burning Questions Diablo
1993 Live Alone! Discovering Japan Gadfly
1995 Old Grey Whistle Test Series [live] Alex
1995 12 Haunted Episodes Razor & Tie
1995 Live on the Test Windsong
1996 Live from New York, NY Razor & Tie
1996 Acid Bubblegum Razor & Tie
1997 The Last Rock N Roll Tour [live] Razor & Tie
2001 That’s When You Know Polygram

링크

grahamparker.net

Page, Tommy

1969년에 미국 뉴저지 주에서 태어난 토미 페이지(본명 Thomas Alden Page)는 뉴저지에서 1970년 5월 24일 출생했다. 증조모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한때 국내에서 주목을 받았고, 한국에도 방문하여 I’ll be Your Everything 으로 좋은 반응을 이끌어 냈다. 핸섬하고 깔끔한 외모와 국내 취향에 잘 어울리는 노래들로 사랑 받으면서 한때 인기몰이를 하다가 지금은 자취도 알 수 없이 사라져 버렸다. 히트곡으로는 A Shoulder To Cry On, I’ll Be Your Everything 등이 있다.

디스코그래피
1988 Tommy Page Sire
1989 Paintings in My Mind Sire
1991 From the Heart Sire
1992 A Friend to Rely On Sire
1992 Republic of Idols Warner Japan
1992 Time Pony Canyon
1992 Loving You Pony Cany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