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보관물: Johnny Marr

Here’s Johnny Marr

The Smiths had to break up because the pressure on me was intolerable.

By the time of our third album, The Queen Is Dead, my drinking had spiralled out of control and it was making me seriously ill. Basically I was using alcohol to lessen the unbearable strain I was under.

Read more

조니 마, 80년대를 회상하다

2007년 8월호 모조 매거진의 부록으로 제공되었던 소책자 80 From The Eighties의 발문을 조니 마가 작성하였다.

80 From The Eighties

Interviewed by Lois Wilson

[발문]

 80년대가 시작하던 그때는 매우 흥미로운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열일곱이었고 맨체스터 도심부의 옷가게에서 일하며 존슨즈에서 팔법한 런던 킹스로드 로커빌리 스타일의 옷을 팔고 있었죠. 그리고 함께 밴드를 할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클럽 씬은 정신 없었어요: 히어로즈라는 게이 클럽이 있었는데 굉장히 특이한 곳이었어요. 그리고 하시엔다가 있었죠. 매우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명백히 말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알려진 대로의 하시엔다웃통을 벗고 손을 흔들어 대던 사람들의는 좀 더 나중의 모습으로, 1987년에서 88년 정도일 겁니다. 1981년에서 82년의 그곳은 예닐곱 명의 사람들과 함께 신인 밴드들의 공연을 볼 수 있던 훌륭한 장소였습니다. 사람들은 정말 뛰어난 80년대 밴드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곤해요. 건 클럽, 버스데이 파티, 서튼 레이쇼, 씨어터 오브 헤이츠, 킬링 조크를 그곳에서 보았습니다. 소위 포스트 펑크라 알려진 것들이죠. 포스트 펑크는 새로운 음악의 어휘집에서 가장 중요한 최초의 단어였습니다. 나에게, 그리고 내 세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펑크 록은 오래된 음악의 어휘집에서 가장 중요한 최후의 단어였죠, 그것은 갓 등장한 펍 록이었어요. 그 뒤에 찾아온 것은 미니멀하고, 깔끔하고, 생기 넘치며, 간결한 미학의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초기 기타 사운드를 설명해 주는 것이죠, 콜린 뉴먼과 에드윈 콜린스의 기타 소리도 마찬가지 구요.

 존 필과 그의 프로듀서 존 워터스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필의 라디오 쇼는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나누는 게시판과 같았습니다.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이었고 엄청난 사람들이 모여들던 곳이었거든요. 그래서 던디의 음악가와 브라이튼의 학생이 만나거나 같은 시간에 음악을 들을 수 있었죠. 온 나라가 이 괴팍하고 열정적이며 전복적이고 힘을 가졌으나 타협하지 않는 뻔뻔스러운 인물에 의해 결집되었습니다. 그리고 밴드 자신들에게는 필의 라디오 쇼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어요;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키고 표출시킬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저주 받아 마땅한 것들도 있었습니다토니 해들리 패거리나 사이먼 르 본 패거리들 말입니다. 금요일 밤의 TV를 장악하던 레벨 42, 리빙 인 어 박스, 튜브에 등장한 티어스 포 피어스도요. 정치적으로는 많은 것들이 일반인들의 통제영역을 벗어났다는 압도적인 감각이 존재했습니다. 광부들의 파업은 마가릿 대처의 폭압적 권력표출과 토리당이 60년대부터 내세우던 모든 가치들이 낳은 결과입니다. 연대는 미디어에 의해 사라졌습니다. 미세스 대처는 광부들에게 경제적 전략을 약속하지 않았고 동정 없는 잔혹함으로 그것을 집행했습니다. 도덕성이란 존재하지 않았고, 거대한 무력감만이 있었습니다.

 1986년 이후, 만약 인디 씬이 극심한 빈사상태에 이르러있었다면, 음반은 물을 줘서 만들었을 것이고 꽃은 스피커로부터 피어났겠죠. 하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변화가 필요함을 느꼈고, 댄스음악은 그래픽 디자인, 기술적 측면, 약물, 의상, 포괄적 감각에 있어서 또 다른 정신을 형성했습니다. 우리들, 스미스는 주류로부터 추방당했다고 생각하며 적을 둘 곳을 찾아 다녔습니다. 반대로 엑스터시 친화적인 밴드는 모든 이들을 받아들였고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좋아했어요.

 그리고 80년대가 나에게 부를 가져다 주었을까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해 확답을 줄 수 있는 다른 누군가도 있겠지요

조니가 가장 좋아하는 80년대 싱글 곡

1. The Beat Save It For Later [Go-Feet, 1980]

2. Talking Heads Burning Down The House [Sire, 1983]

3. The The Heartland [Epic/Some Bizare, 1986]

4. S’ExpressMantra For A State Of Mind [Rhythm Hing, 1989]

5. Psychedelic Furs Dumb Waiters [CBS, 1981]

 

[Afterword]

 The beginning of the 80s was a very exciting time. I was 17, working in a clothes shop in Manchester’s city centre, selling a take on the London King’s Road rockabilly style, the kind of clothes sold in Johnson’s, and I was looking for people to form a group with. The club Scene was busy: there was a gay club calld Heroes, which was seminal , then the Hacienda. That became a really key place, obviously, but what it’s known for – people with no shirts on with their hand in the air – came later, in 1987-88. In 1981-82 it was a great place to see the bands of the day with just seven other people. People forget that there were really good ’80s bands. I saw The Gun Club there, The Birthday Party, A Certain Ratio, Theatre Of Hate, Killing Joke. What’s now known as post punk, it was the letter A in the new lexicon. To me, and a lot of people of my generation, punk rock was the letter Z in the old lexicon, just warmed-up pub rock. What came afterwards was a reductive, clean, fresh, lean new aesthetic and that pretty much describes my early guitar sound and the guitar sound of Colin Newman and Edwyn Collins.

 John Peel and his producer John Walters were very important. Peel’s radio show was like a bulletin for ideas for like-minded people. Because this was pre-internet it was a centralised hot spot, so a Dundee musicain and a Brighton student would be tuning in and listening at the same time. The whole nation was being brought together by this quirky, passionate, subversive character who was in a position of power but was bold enough not to compromise. And for bands themselves it was vital; it allowed us to formalise new ideas and get them out there.
But there was much to rail against, too – the Tony Hadleys and Simon Le Bons. Level 42, Living In A Box, Tear For Fears on The Tube, dominating Friday night TV. Politically there was a prevailing sense of things getting beyond the control of ordinary people. The miners’ strike summed up the crushing power of Margaret Thatcher and everything the Tories had stood since the ’60s. Solidarity was destroyed with the cooperation of the media. Mrs Thatcher wasn’t just implementing an economic strategy on the miners, but enforcing it with an absolute brutal lack of compassion. There was a terrible lack of innocence involved, and that created a massive sense of helplessness.

After 1986, if the indie scene had got any feyer the records would have been made out of liquid and petals would have flown out of the speakers. Things needed to change and dance informed a different mentality in graphic design, technology, drugs, clothes, sense of inclusion. The Smiths, we were looking for a home, feeling excluded from the mainstream, and the bands who were chomping E, they were the opposite, they embraced and were embraced by everyone.

And did the ’80s make me a millionaire? Probably, but someone else got their fingers on it…

Johnny’s Fave ’80s Singles
1. The Beat Save It For Later [Go-Feet, 1980]
2. Talking Heads Burning Down The House [Sire, 1983]
3. The The Heartland [Epic/Some Bizare, 1986]
4. S’Express Mantra For A State Of Mind [Rhythm Hing, 1989]
5. Psychedelic Furs Dumb Waiters [CBS, 1981]

 

Smiths, The

SmithsPromoPhoto TQID 1985.jpg
SmithsPromoPhoto TQID 1985” by Scanned promotional photograph. Licensed under Fair use via Wikipedia.

스미쓰는 82년 봄 맨체스터 출신의 두 남자, 모리세이(본명 Steven Patrick Morrissey)와 자니 마(본명 John Maher)에 의해 결성되었다. 그해 여름 데모 작업을 위해 드러머인 사이먼 볼스탠크로프트(Simon Wolstencroft)와 녹음을 했지만 그는 스미쓰의 일원이 되기를 거부했다. 후에 사이먼은 폴(The Fall)에 들어갔고, 결국 스미쓰에 합류한 마이크 조이스(Mlke Joyce)와 함께 맨체스터 리츠에서 데뷔 공연을 가졌다. 베이스가 없던 스미쓰는 82년 말 스미쓰의 평생 동반자인 앤디 러크(Andy Rourke)를 만났는데 그는 자니와 함께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스미쓰의 첫 싱글 ‘Hand In Glove’는 차트에 오르지 못했지만 83년의 두 번째 싱글 ‘This Charming Man’은 영국 차트 30위에 오르는 실력을 과시했다. 곧장 미국 투어에 오른 네 명은 새로운 싱글 ‘What Difference Does It Make?’를 발표하고 12위에까지 올랐다. 모리세이는 자주 성(性)의 개념을 무너뜨리는 가사를 썼는데, 그의 동료 자니의 기타 사운드는 이런 모리세이의 든든한 지지자 역할을 하였다. 한편 1집의 엔딩곡인 ‘Little Children’은 60년대에 일어났던 끔찍한 살인사건의 피해자인 어린 아이들에게 바치는 레퀴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를 비난했고 스미쓰는 언론의 표적이 되어 곤혹을 치뤄야만 했다. 다행히 피해자 측의 모리세이에 대한 변론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이후 스미쓰와 모리세이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에피소드로 남았다.

스미쓰는 미국의 R.E.M이나 벡(Beck)처럼 대학가의 유명한 컬트 밴드가 되어가고 있었다. 86년 메이저 레이블인 EMI로 이적한 후 영국 투어를 하던 중, 자니가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의 공백을 크래이그 개넌(Craig Gannon)이 대신하였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법적인 문제로까지 불거지게 되었다. 브릭스톤 아카데미에서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스미쓰의 영국 공연은 더 이상 실현되지 않았다. 자니는 더 이상 스미쓰에 남아있고 싶어하지 않았다. 음악적인 방향이 달랐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에게는 휴식기간이 필요했다. 이들의 미래는 너무나 불투명했으며, 결국엔 87년 8월 공식적으로 해산을 선언했다. 이전에 마지막으로 발표된 앨범은 [Strangeways, Here We Come]으로 같은 해 나왔고, 이듬해 [Rank]가 발표되면서 스미쓰의 잔존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멤버들은 각자 세션맨으로서 분주하게 활동했고, 모리세이 또한 화려한 싱글 데뷔를 하였다.

자니는 프리텐더스(Pretenders)와 더더(The The)에서 기타맨으로 활약하다가 버나드와 함께 시작한 일렉트로닉에서 다시 한번 부활을 꿈꾸었다. 그는 과외활동으로 브라이언 페리, 토킹 헤즈, 빌리 브래이그, 커스티 맥콜, 팻샵 보이즈, 스텍스, 그리고 반데라스에 이르는 다양한 뮤지션들과 함께 작업하며 경력을 쌓아갔다.

에필로그

필자가 스미쓰를 처음 접한 것은 영화 Pretty in Pink의 싸운드트랙에서였다. 이 OST에 삽입된 Please please please let me get what I want라는 긴 이름의 이 노래는 그들의 서정적인 음악적 감성을 잘 표현해주는 곡으로 눈밭에서 반코트를 입은채 서있는 그들의 흑백사진과 오버랩되면서 오랫동안 여운을 남겨주는 곡이었다. 모리쎄이의 시적인 가사와 자니마의 발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애절한 키타 사운드는 이들 음악의 핵심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고딕락의 우울한 자화상과 이언커티스(Joy Division)의 표정이 묻어나는 듯한 그들의 음악적 천재성으로 인해 한동안 영국 음악계에 등장하는 신진밴드들은 이들과 비교되지 않으면 안되는 일종의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했다.

이제 모리쎄이는 예전의 샤프한 모습에서 적당히 살집이 잡힌 늙수구레한 아저씨의 모습으로 변한채 미국에서 하드코어 밴드를 이끌고 있고 자니마는 뉴오더의 버나드섬너와 함께 일렉트로닉으로 활동하여 인기를 얻었으며 현재는 자신의 밴드를 이끌고 있다 한다.

다른글(출처 : http://www.intermuz.com/theRocker/noiz_box/NOISE5.asp)

70년대 말 펑크의 소진과 함께 뉴 웨이브 팝이 영국 대중음악계를 휩쓸 무렵, 주류 팝 시장은 신시사이저가 주도하는 전자 음악의 홍수로 80년대 팝 음악시장의 모습을 갖춰나간다.울트라복스, 휴먼 리그같은 밴드들이 표방한 신스 팝은 이윽고 듀란 듀란, 컬처 클럽, 왬 등의 아이돌 스타들에 의한 세련된 포장으로 변신한다. MTV의 등장은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의 전환을 가져왔고, 주류 팝 시장에선 음악성보다는 외모와 무대 매너로만 음악인의 자질을 판가름하는 경향이 점차 농후해 졌다.

여기서 소개할 80년대 맨체스터 사운드는 바로 이런 당시 영국 주류 팝 시장의 소모적이고도 치열한 ‘음악 팔리기’에 대해 저항하며 맨체스터라는 영국 북부의 공업 소도시를 거점으로 활동한 인디 밴드들의 음악 스타일을 통칭해서 말한다. 영국 내에서 보면 한갓 지방도시에 불과한 이 지역을 거점으로 바로 본격적인 영국 얼터너티브 록 씬의 맹아가 형성되었다.

맨체스터 내의 밴드들은 그들만의 ‘지역성’을 통해 자신들만의 독특한 음악 색깔을 지니려고 했고 80년대 영국 얼터너티브의 발화점으로서 바로 이 맨체스터를 꼽는데는 별 이견이 없을 듯 하다. 80년대 당시 활동하던 맨체스터 출신 밴드들 중 가장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했던 밴드들론 스미스, 뉴 오더, 제임스 등이 있었고, 이들의 직계 영향 하에 등장한 ‘매드 체스터(일명 미친 맨체스터들)군단-스톤 로지스.해피 먼데이스, 인스파이럴 카펫, 살란탄 UK-들은 바로 위에 언급한 세 밴드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90년대 등장한 오아시스, 블러, 스웨이드, 펄프와 같은 쟁쟁한 브릿팝 그룹들 역시 바로 이 맨체스터 사운드에서 직,간접으로 그 음악적 영향을 흡수했다 볼 수 있다.

이 글에선 맨체스터 사운드를 대표하는 중요한 두 거목 스미스와 뉴 오더를 소개한다. 이들 그룹은 각각 ‘기타-팝’과 ‘신스 팝’이라는 음악 스타일을 통해 영국 내의 ‘인디 팝’ 운동의 선두를 담당한 밴드들이다. 이 두 밴드는 펑크와 90년대 브릿 팝을 연결 시키는 중요한 가교로서 거론되곤 한다. 앞으로 두 편으로 나눠서 진행 될 본 내용에서 먼저 ‘스미스’에 대해 알아본다.

The Smiths – 그들의 음악에 대해서…

스미스의 음악을 ‘기타 팝’이라고들 한다. 이는 당시 영국 내 대중 음악 상황과 연관되어서 붙어진 명칭인데, 당시 영국 팝 음악 시장을 주도하고 있던 스타일은 신시사이저와 시퀸서가 만들어 내는 전자음 위주의 음악이었다. 스미스의 음악은 당시 이런 주류 음악 산업의 배경 대한 신선한 대안을 드러내고 있었다.
팀의 핵인 보컬 모리시와 기타리스트 자니 마는 밴드의 지향점을 규정한다.

팀에서 작사와 보컬을 맡고 있는 모리시[본명 스티븐 패트릭 모리시(Morrissey);1959-]는 천부적인 언어 능력을 소유한 음악인 이전의 문학도이다. 그의 정신적인 우상이기도 한 제임스 딘을 닮은 창백한 이미지는 입 안에서 구르는 듯한 맬랑꼴리한 느낌의 보컬과 결합하여 기존 록 음악의 ‘샤우트’한 거친 록 음악 특유의 마초쉽과는 거리가 멀었다. 모리시의 공연을 보면서 ‘록 스타’라는 이미지는 오간데 없고 ‘동네 이웃의 친한 오빠’라는 친근한 이미지로서 다가온다. 그저 길을 지나치다가 쉽게 마주치는 그런 수줍은 청년 말이다.

그의 노래는 멜로디가 있다. 다시 말해 모리시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된다. 모리시의 보컬은 결코 넘치거나 나서지 않는다. 답답할 정도로 제한된 음정 폭(3도에서 길어야 5도)에서 보컬을 구사한다.

그의 보컬은 스미스의 음악 전체에서도 일관된 성격을 유지한다. 그는 명백한 ‘팝’주의자이다. 그의 음악적 자양분은 멀리는 50년대 버디 할리가 보여준 록커빌리의 이미지에서 60년대 크루닝 창법을 통한 스탠더드 팝, 걸 그룹, 그리고 70년대 쇼킹한 스테이지 매너를 과시한 뉴욕 돌스와 데이빗 보위의 글램, 그리고 섹스 피스톨스의 폭력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모리시의 가사 속엔 사춘기 소년의 ‘어찌할 줄 몰라 망설이는’듯한 수줍음(추억의 책갈피 마냥)과, 제임스 딘의 ‘이유 없는 반항’ 마냥 독설 어린 객끼, 여기에 문학도다운 탁월한 언어 감각이 오밀조밀하게 거미줄처럼 짜여 있다. 흔히 들을 수 있는 팝 음악의 ‘남녀 상열지사’류의 가사도 모리시에겐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론 처절할 정도로 비수를 품은 폭력성은 그의 또 다른 면모이다. 그는 한 때 펑크 매니아라고 자처할 정도로 어린 사춘기 시절 펑크 음악에 매료됐었다. 뉴욕 CBGB 출신 뉴욕 돌스의 팬 클럽 회장까지 역임한 그는 어느 누구보다 펑크의 출현을 반겼었다. 밴드 내에선 그렇게도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노래를 부르던 그이지만 한편으론 ‘섹스 피스톨’이 보여준 ‘파괴의 본능’이 그의 가사 속에 녹아 있다.

기타와 작곡을 맡고있는 자니 마[본명: 조니 마어(Johnny Marr) ; 1963- ]는 밴드내의 음악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의 기타 소리는 록 음악 특유의 디스토션 사운드와는 거리가 먼 크린 톤의, 맑게 울리는 기타 소리이다. 손가락으로 기타 줄을 하나하나 튕겨가며내는 소리는 울리는 소리다. 그의 연주는 한음 한음이 또렷하다. 필요 없는 음의 낭비란 찾아 볼 수 없고 정갈하고 깔끔하다. 일렉기타 또는 어쿠스틱 기타를 번갈아 가며 사용하는 그의 기타소리를 두고 평론가들은 ‘쟁글쟁글(기타의 소리를 두고 표현하는 말)한 기타 소리가 나는 기타 팝’이라고들 한다.

자니 마의 기타는 지저분하고 거친 록의 본연의 느낌과 거리가 있다. 크린 톤의 기타 음은 기존 밴드 내에서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쟁쟁한 기타리스트의 이미지와는 확연히 다른, 단지 모리시의 보컬을 든든히 받쳐주는 반주자의 역할에 가깝다. 리듬 웍이 강조되는 그의 기타 연주는 롤링 스톤의 키스 리처드에 비견될 수 있다. 베이스 주자인 엔디 루어크와 드러머 마이크 조이스의 연주 역시 파묻혀 버리지 않고 정확하고 또렷이 들린다. 과거 아트 록 그룹 록시 뮤직이나 재즈 록 밴드 스틸리 댄의 음악에서 느끼는 스튜디오 작업의 정확함과 치밀성이 스미스의 음악에도 살아있다. 각각의 소리가 조화롭게, 그러면서도 어느 하나 무시됨 없이 명료하게 들려온다.

이런 자니 마가 제시한 스미스의 음악 방향은 모리시의 음악관과 판이하다. 자니 마의 연주에 밀도를 둔 치밀한 스튜디오 작업을 선호하는 반면 모리시는 ‘엘리트’ 적이며 권위적인 록의 기존 이미지’를 증오하는, ‘팝’ 순수주의자이다. 스미스만의 독특한 색깔이란 바로 이들 모리시와 자니 마가 보여준 ‘앤티 록’과 ‘앤티 팝’간의 묘한 긴장관계의 존재일 것이다. 그들이 보여준, 결코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이런 밴드 내의 국면은 분명 본격적인 영국 얼터너티브 씬의 출발을 알리는 심상치 않은 징조였다.

The Smiths – Discography

그들의 활동은 1982년부터 1987년까지 만5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다. 자니 마와 모리시의 묘한 대립관계는 인디 음악계가 배출한 훌륭한 성과였을지 몰라도, 팀의 지속에는 확실히 걸림돌로 작용했다. 이들은 활동한 기간동안 4장의 정규 앨범과 3장의 베스트, 미발표 모음곡 집을 내놓는다. 그리고 몇몇의 앨범에 미수록된 싱글들을 활동 기간 내내 발표한다.

그들이 발표한 곡들은 영국 내에서 싱글 차트의 중상위권을 유지하면서 자국 내의 고정 팬을 확보할 정도의 반응을 보여줬던 스미스였지만 이들의 음악은 미국에서는 미미한 반응을 가져왔다. 아마도 그들의 음악에서 표방하는 “영국적인 상황”의 강조는 미국인들에겐 낮설고 어렵게 받아졌으리라 생각된다. 더군다나 그들이 표방한 ‘팝’이라는 음악 번지수는 미국 인디 씬이나 미국 내 인디 음악을 틀어주던 거개의 대학 교내 방송국에서 결코 반길만한 것이 못 되었다. 더군다나 미국 문화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들어내는 모리시의 가사는 미국인들에게 그다지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리라 본다.

The Smith – (1984)

메이저 급 음반사의 도움 없이 ‘러프 트레이드’ 라는 인디 레이블을 통해 나온 그들의 데뷔 음반은 브리티시 얼터너티브의 출현을 예고했다. 앨범이 나올 당시 영국 주류 음악 씬이 신시사이저로 치장된 기계 음이었던 반면에 이들의 음악은 지극히 소박하고 투명했다. 물론 스트링이나 피아노가 가세된 ‘틴 팬 앨리’ 류의 팝 음악이 아닌 과거 초기의 비틀즈나 롤링 스톤즈가 그랬듯이 ‘밴드 편성의 팝’이었다. 롤링 스톤지와의 인터뷰에서 자니 마는 ‘우리가 이런 음악을 시도하기 전에는 아무도 이런 식의 기타 반주에 멜랑꼴리한 팝 음악을 연주하는 밴드들은 없었다’고 얘기한다.

82년 클럽 라이브 무대를 통해 데뷔한 이들은 83년 러프 트레이드를 통해 첫 싱글 “Hand in Glove”를 내놓으면서 영국 음반 시장에 공식적으로 데뷔한다. 가사 내용 중 ‘호모 섹슈얼리티를 나타냈다는 점이 논란이 된 이 곡으로 바야흐로 언더그라운드 씬의 ‘스미스 열풍’을 예감케 한다. 소녀 취향의 팝 넘버인 그들의 두 번째 싱글 “This Charming man”은 영국 팝차트 25위까지 진출한다. 모리시의 창백하고 풋풋한 이미지는 소녀 팬들의 모성애를 자극했다. 그러나 아동 학대 내용을 다룬 “Reel around fountain”과 무어인(북 아프리카 아랍인과 베르베르족의 혼혈 인종)의 손에 살해 당한 아이를 보고 절규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린 “Suffer little Children”에서 보듯 그들의 음악이 표현 대상은 핑크빛 사랑 타령을 넘어 추악하고 암울한 사회 현실마저 적나라하게 투영시킨다. 커다란 뿔태 안경을 끼고 보청기를 낀 채 수선화를 뒷 주머니에 꽂고(스미스 시절 모리시의 전형적인 무대 매너)무대에 등장하는 모리시가 우스꽝스럽지 몰라도 그의 가사에서 보이는 세상에 대한 시선은 냉정하다.

Meat is murder – (1985)

모리시의 ‘채식주의’선언의 계기가 된 음반. 만인의 화제로 떠오른 그들의 두 번째 앨범은 전작 앨범의 노선을 그대로 유지한다. 성과면에선 전작에 비해선 다소 뒤떨어졌다. “That joke isn’t funny anymore”가 싱글 커트 됨.

The Queen is Dead – (1986)

그들의 대표적인 명반으로 꼽히는 수작. ‘여왕은 죽었다’라고 하는 앨범 타이틀에서 느끼듯이 전작들에 비해서 거칠게 몰아치는 첫 트랙부터 본 앨범의 진가를 기대하게끔 한다. 영국 왕실의 부패를 꼬집으며, 왕실의 실상을 모리시의 탁월한 글쓰기 실력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아마도 “The queen is dead” 만큼 자니 마와 모리시의 특성의 뚜렷이 대비를 지닌 곡도 없을 것이다. 강한 백 비트에 실릴 우렁찬 기타 리프는 단순한 코드 진행과 반복되는 패턴으로 지속되지만 어느 스미스 싱글보다도 강렬하다. 단연 자니 마의 기타 연주는 본 곡에서 가히 압권이다. 앨범 시작을 강한 파워로 몰아 부친 이 곡을 통해서 스미스의 음악적 뿌리가 펑크에 있음을 다시금 증명한다.

스미스의 특기인 전형적인 팝 역시 “I know it’s over”에서 들려주는 멜랑콜리한 보컬은 여전하다. 스트링 편곡이 선명한 본 앨범의 첫 싱글 커트 곡인 “There is a light never go out”와 “The boy with the thorn in his side”는 모리시가 표방하는 “영국의 특수성”으로 비쳐진다. 그는 그의 가사를 통해 영국의 인종문제, 계급, 사회 부조리를 그만의 위트와 수사법으로 표현하고 있다.”Queen”이라는 명사의 쓰임에서 보듯이 그의 노래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영국 사회이다.

그의 가사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 이런 그의 글 쓰기에서 나타나는 상황적 고려의 필요성 때문일 것이다. 자니 마의 기타 연주는 이전보다도 훨씬 다채롭다. 어쿠스틱과 일렉트릭 기타를 번갈아 가며 만들어내는 사운드가 돋보이는 “Bigmouth Strikes Again”를 비롯 50년대 록커빌리 사운드의 숨결이 느껴지는 “Vicar in a Tutu”에서도 자니 마의 기타 연주는 유난히 돋보인다. “There is a light never go out”와 “The boy with the thorn in his side”에서 보여준 세련된 편곡 솜씨는 ‘스미스’의 음악이 ‘과연 기타 팝’임을 여실 없이 증명한다.

스미스의 모든 것을 유감없이 드러낸 본작은 그들의 1집,2집 앨범을 들은 스미스 팬이었다면 ‘정말로 이젠 모든 것을 거침없이 드러냈다”라는 표현이 어울릴만한 확실한 그들의 음악 색깔을 규정한다.

“Strangeway-Here We come” – (1987)

본 앨범을 내기 바로 직전 스미스는 갑작스런 해산을 선언한다. 이미 전작 “The Queen is dead”를 제작할 당시부터 자니 마와 모리시와의 밴드 내 분열은 표면화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둘 간의 음악 성향 차이로 인해 팀 해산을 맞는다. 모리시는 자니 마의 외도( 그는 당시 록시 뮤직에 있던 브라이언 페리나 밀리 브래그와 음악적 교류를 나눴다)가 못 마땅했고, 자니 마 역시 모리시의 60년대 팝 음악에 심취한 태도가 못 마땅했었다. 둘 사이의 음악적 견해차는 결국 본 앨봄 발매를 몇 주 앞두고 자니 마의 밴드를 떠나겠다는 선언으로 이어진다. 모리시는 주저 없이 팀을 해산하고 솔로 활동에 나서게 된다. “I started Something I couldn’t finish”와 “Last night I dreamt that someday loved me”가 싱글로 커트 됨.

Single Collection

Hateful of hollow (Single B-side collection)
The world Won’t listen (single collection-UK version)
Louder than Bombs (single collection -US version)

이외에도 정규 앨범엔 포함되어 있지 않으나 싱글로 발표되어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Panic”은 미국 문화로 범벅된 영국의 상황을 인종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을 각오를 갖고 만든 곡이다. “DJ를 교수형에”라는 독설 찬 그의 항변은 그가 미국 문화에 대해 가지고 있는 반감의 정도를 말해준다. “Heaven knows I’m Miserable now”는 영국 내의 사회문제인 실업을 모리시의 위트 어린 가사로 표현해냈다.

-자스보이- ( jassboy@hanmail.net )

[지나가다] [불평]ah you jassboy -whatever you are- so much to answer for… This sounds half-baked, or half-hearted at its best! 그리고 정정: 무어인이 아니라 60년대 맨체스터에서 있었던 엽기 연쇄살인사건인 무어스 머더(Moors Murder)를 말하는 것. 무어(스)는 그 지방 외곽의 황량한 들판을 지칭. -11월10일-
[lupin] 예전 로저 샤툭이 샤드백작-후작인가? 가 무어스 살인사건과 테디번디 살인사건의 원인 제공자라 했는데 그무어스가 그 무어스군요.. -11월10일-
[lupin] 윗글 쓰신분 =자스보이님딴엔 정성껏 동아 대 백과사전 찿아가며 쓰신 무어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지나가다님의 글을 읽고 다시보니 참 쓸쓸 하네요.. -11월10일-
[lupin] 스미스의 패닉은 들을때마다 딴나라당 선거 유세에 쓰이면 딱이겠다는 생각이…hang the dj,hang the dj -11월10일-
[moz] Hang the blessed DJ~ 한때 제 시그내춰로 쓰기도 했던 문구였습니다. 아~ 토요일 날도 좋은데 저녁때 웬 생일파리에 딸려나가야 하는군요. 고양이 산책이나 시켜야 겠다. -11월10일-
[moz] 선거캠페인쏭 말이 나와서 생각난건데 한때 부쉬녀석(애비부쉬)이 선거캠페인쏭으로 토킹헤즈의 Dont worry about the government를 썼다는군요. 이에 토킹헤즈 측은 it’s bullshit이라고 짤막하게 논평하였답니다. -11월10일-

디스코그래피
1984 The Smiths Sire
1985 Meat Is Murder Sire
1986 The Queen Is Dead Sire
1987 Strangeways Here We Come Sire
1988 Rank [live]

링크
Fan Page
다음의 스미쓰 카페
morrissey-solo.com/
Johnny Marr의 공식싸이트
elmoz의 팬페이지
haine의 팬페이지
SmithyteriaCOOL!!
Johnny Marr 키타탭
Johnny Marr와의 인터뷰

Morrissey

Viva Hate Re Release.jpg
By Source, Fair use, Link

얼터너티브락씬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중 한명인 Morrissey는 The Smiths 의 카리스마넘치는 싱어이자 작사가로, 그리고 그에 부응하는 솔로활동으로 유명하다. 80년대 가장 비중있는 영국밴드였던 The Smiths에서 Morrissey는 그만의 독특한 읊조리는 창법(crooning)과 시적이고 재기넘치는 가사로 The Smiths 만의 개성을 창조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The Smiths 가 해체되고 난후 Morrissey 는 자신만의 솔로프로젝트를 시작하였는데 흥미롭게도 정작 The Smiths 가 존속한 기간 동안 거의 인기를 얻지 못했던 미국에서의 인기가 본고장 영국에서의 인기를 능가하였다.

본명이 Stephen Patrick Morrissey 인 Morrissey 는 1959년 영국의 맨체스터에서 태어났다. 다소 수줍은 성격의 어린 Morrissey는 어려서부터 음악과 영화에 몰입하였고 타고난 글솜씨로 New York Dolls 팬진에 글을 썼다.(그는 영국 팬클럽 회장이었다) 그는 또한 주간 멜로디메이커에 많은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70년대 그는 짧은 기간 the Nosebleeds 라는 밴드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1982년 Johnny Marr 를 만나서 같이 곡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 파트너쉽은 때때로 영국 팝신에서 가장 뛰어난 듀오로 불리기도 한다. 1983년 데뷔싱글 “Hand In Glove” 를 내놓으면서 시작된 The Smiths 의 활동은 잘 알다시피 하나의 살아있는 전설로 남게된다. 어쨌든 이 시기부터 인터뷰에서의 돌출발언, 성적 정체성의 모호함(그는 포켓에 꽃을 꽂은 채 하늘거리는 셔츠를 입고 무대공연을 갖는 것을 즐겼다) 등은 그만의 독특한 페르소나로 부각되었다.

1988년 즈음 발매된 그의 첫 솔로싱글들인 “Suedehead”와 ”Everyday is Like Sunday”는 영국에서 큰 인기를 얻었고 첫 앨범 Viva Hate 는 상업적으로나 음악적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90년에 일종의 컴필레이션인 Bond Drag 이 발매되었다. 1991년 Kill Uncle 이 발매될 즈음 매드체스터는 그 열정을 소진시켜 갈 즈음이었고 평론가들은 이제 그가 더 이상 Marr 와 함께 하던 시절의 천재성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이 와중에 매니저나 전 멤버들과의 불화, 다소 민족주의적인 그의 노래들은 영국에서의 그의 이미지를 망치는데 한몫 하였다. 하지만 Mick Ronson 과 함께 만든 1992년작 Your Arsenal 의 성공은 상황을 반전시켰다. Alain Whyte, Boz Boorer 와 같은 훌륭한 백업들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이 앨범은 마치 과격해진 The Smiths 의 부활을 연상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한편 이 시기 그의 미국공연 티켓은 불티나게 팔려나가 LA 의 헐리우드 볼에서의 공연티켓은 The Beatles 의 기록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의 성공으로 인한 자신감 덕택에 1994년 작 Vauxhall And I 에서는 싱글 “The More You Ignore Me, the Closer I Get” 가 그의 생애 처음으로 미국 싱글 차트 50위 안에 진입하는 성공을 거두기까지 했다. 1995년 컴필레이션 The World Of Morrissey 가 출시되었는데 이 앨범은 그가 The Smiths 시절 이후부터 함께 해오던 레이블 Sire 를 떠나 RCA로 옮겨 처음 내놓은 앨범이었다. 같은 해 Southpaw Grammar 를 내놓았고 1997년 Island 로 레이블을 옮겨 Maladjusted 를 내놓았다.

이후 한동안 공연에 치중하던 Morrissey 는 2004년 You Are The Quarry 를 비롯하여 라이브 앨범 등을 내놓았고 2006년 Tony Visconti 가 프로듀스한 Ringleader of the Tormentors 를 내놓으면서 여전히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주고 있다.

디스코그래피

1988 Viva Hate Sire
1991 Kill Uncle Sire
1992 Your Arsenal Sire
1993 Beethoven Was Deaf [live] EMI
1994 Vauxhall and I Sire
1995 Southpaw Grammar Reprise
1997 Maladjusted Mercury
2004 You Are the Quarry Attack/Sanctuary
2005 Live at Earls Court Attack/Sanctuary
2006 Ringleader of the Tormentors Attack/Sanctuary
2009 Years of Refusal
2014 World Peace Is None of Your Business
2017 Low in High School
2019 California Son
2020 I Am Not a Dog on a Chain
2021 Bonfire of Teenagers

링크

Official Site
Fan Site
그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보기
Morrissey 서울 공연 후기

Electronic

Electronic band.png
Electronic band” by Johnny_Marr.jpg: shokophoto
Bernard-sumner-berkeley-1987.png: Andwhatsnext
derivative work: JD554 (talk) – Johnny_Marr.jpg
Bernard-sumner-berkeley-1987.png.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사실 현지인들(?)조차 이 다소 이질적인 만남에 대해 의아스럽게 생각하였다. Burnard Sumner가 몸담고 있던 New Order는 Dance Pop의 선두주자로 주로 댄쓰플로워를 달구고 있던 밴드였고 Johnny Marr가 키타를 담당하고 있던 The Smiths는 자폐적이고(?) 지적인 팬층을 주로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브릿팝이란 광범위한 테두리안에서 동질감을 느끼고 있던 그들은 서로의 장점을 취한 고감도의 음악을 생산해내어 이 수퍼밴드의 멤버들간의 이질성을 염려하고 있던 사람들의 의구심을 말끔히 씻어내었다.

이 듀오는 1989년 “Getting Away with It”이라는 싱글을 발표하였다. 보컬은 Pet Shop Boys의 뛰어난 싱어 Neil Tenant가 함께 해주었다. 이 싱글은 영국에서 탑텐을 기록하였으나 Electronic의 멤버들은 다시 자기만의 활동영역으로 복귀하였다. Sumner와 Tenant는 자신들의 그룹으로 돌아갔고 Marr는 The The, Billy Bragg 등과 작업을 하였다.

1991년 4월 그들은 다시 “Get the Message”라는 두번째 싱글을 가지고 돌아왔다. 6월에는 달리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그들의 데뷔앨범이 발매되었다. 앨범에 수록되지 않은 싱글 “Disappointed”가 이듬해 발매되었고 Sumner는 다시 New Order의 통산 여섯번째 앨범 Republic의 작업을 위해 팀에 복귀한다. Marr는 The The와 The Pretenders의 싸이드맨으로 활동을 재개하였다.

듀오는 또다시 레코드 작업을 위해 뭉쳤는데 이번에는 Kraftwerk의 멤버였던 Koch Label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하여 1996년 7월 Raise the Pressure가 탄생하였다. 4년후 Electronic은 그들의 세번째 앨범 Twisted Tenderness를 발표하였다. 이 후 또다시 Sumner는 New Order의 신작을 위해 팀에 복귀하였고 Marr는 Healers란 밴드를 조직하여 활동중이다. 한편 재밌는 사실은 Synth-pop의 불모지인 우리나라에 한때 그들의 노래가 의외의 인기를 얻은 적이 있었는데 이는 한 커피 CF에서 그들의 싱글 Reality(Richard Sanderson의 곡과 동명이곡)의 인트로가 쓰였기 때문이다. 고급스러운 씬디싸이저의 연주로 시작되는 이 곡때문에 그들은 국내에서 잠깐 아주 잠깐 주목을 받을 뻔 했었다.

디스코그래피
1991 Electronic [Warner]
1996 Raise the Pressure [Warner]
1999 Twisted Tenderness [Parlophone]

링크
Fan Page
Viv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