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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훅의 80년대

2007년 8월호 모조 부록에 실렸던 피터 훅과의 짧은 인터뷰.

Interviewed by Pat Gilbert

나의 80년대피터 훅

약물, , 맨체스터의 천재적 펑크 디스코정말이지 대단한 10년이었다니까!

당신은 리스트에 두 번 올랐습니다, 조이 디비전의 Closer와 뉴 오더의 Low-Life로요. 그들이 그렇게 출중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만족시키는 것들을 만들었어요. 우리는 예술적 자유를 전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었죠. Blue Monday 10분짜리 곡이었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걸 싱글로 내놨죠; Love Will Tear Us Apart는 앨범에 [Closer] 수록되지도 않은 곡이었습니다. 다른 밴드들은 회사가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었어요. 그리고 우리는 팩토리와 5050으로 수익을 나눴습니다. 덕분에 앨범을 만장 판 정도로도 1년은 먹고 살 수 있었어요수지 앤 더 밴시스는 아마 십만장은 팔아야 했을 겁니다.

라이브 에이드로부터 제의를 받은 적 있나요?

아뇨. 나는 밥 겔도프가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제의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꽤나 모욕적이었죠. 그걸 거절한 사람이 있다는 소린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80년대 최고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Blue Monday] 1983년 톱 오브 더 팝스에 출연했을 때였죠. 우리 세대에겐 거기에 출연하는 것이 최고로 여기지곤 했어요.

최악의 순간은요?

이언 커티스의 자살입니다. 이언은 1980 5월에 죽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80년대를 그 사건과 함께 시작한 거나 다름없어요. 그런 재앙적인 출발이 어디있겠습니까, 안 그래요?

가장 정신나간 순간은 언제였죠?

그건 너무 많군요우리는 미국에 빨리 진출한 편이었죠. 거긴 사람을 다루는 법을 압니다. 클럽 앞에서 우리가 뉴 오더라고 하면 사람들이 특별한 방으로 끌고 들어가서 약이고 술이고 할 거 없이 잔뜩 앵겨줬죠. 영국에서라면 귓방망이를 흠씬 맞았을 겁니다. 미국에서 우린 쾌락을 찾았고 정신나간 세계에 입성했어요. 그리고 애시드 하우스와 함께 80년대가 종언을 고했죠… 80년대는 정말이지 빌어먹게 좋았습니다.

어떤 음악을 듣곤 했나요?

바우 와우 와우, 헤이지 팬테이지, 맬컴 맥라렌의 모든 작품들. 애덤 앤트는 엄청난 아이콘이었고 마르코 피로니는 끝내주는 기타리스트였죠. 씨어터 오브 헤이트, 데쓰 컬트, 플레이 데드와 같은 80년대의 골수 고딕적 면모도 좋았습니다. 미국에서 디제잉을 많이 했는데 그들은 죄다 80년대에 빠져있어요. 그 시기의 곡이라면 뭐든지 열광하더군요.

80년대가 당신에게 부를 가져다줬습니까?

그렇죠, 헌데 하시엔다에 대해선 좀 할 말이 있습니다. 그걸 6번이나 말아먹었거든요. 결국 하시엔다와 팩토리에 6백에서 9백만 정도의 돈을 쏟아 부었죠

My ’80s- Peter Hook

 Drugs, Booze, genius Manc punk disco – worra decade!

You’re in the list twice, for Joy Division’s Closer and New Order’s Low-Life. What made those groups so special?

We did stuff to make us happy. We were allowed complete artistic freedom. Blue Monday was 10 minites long, but we put it as a single; Love Will Tear Us Apart wasn’t on the album [Closer]. Everyone else was doing what they were told. Also, we had a 50/50 split with Factory so we could live for a year by selling 10,000 albums- Siouxsie & The Banshees would have had to sell 100,000.

Were you approached to Live Aid?

No. I take it Bob Geldof didn’t like us. You felt quite affronted that you weren’t asked. I’ve never heard anyone say they turned it down.

High point of the decade?

Appearing on Top Of The Pops in 1983 [with Blue Monday]. Doing that progranne was a dream for my generation.

Low point?

The suicide of Ian Curtis. Ian died in May 1980, so the ’80s were all up for us after that. It couldn’t have started out more fucking disastrously, could it?

Craziest moment?

There were so many… we got to America quite quickly, and they knew how to treat you over there. If we were outside a nightclub, when we said we were New Order they’d drag you in, put you in a special room and fill you full of drugs and alcohol. In England all you’d get was a thick ear. In Amercia we discovered hedonism and entered that whole mad world, then to finish the decade with acid house… the ’80s was fucking great for us.

What were you listening to?

Bow Wow Wow, Haysi Fantayzee, all that stuff that felt it had come from Malcolm Mclaren. I thought Adam Ant was a great character and Marco Pirroni was a fantastic guitarist. Theatre Of Hate, Death Cult, Play Dead – the serious goth side of it was good. I DJ in America a lot and they’re fucking obsessed with the ’80s. Play anything from that time and they go mental.

Did the decade make you millionaire?

Yeah, but thanks to the Hacienda I lost it – six times over. We worked out that we lost between six and nine million on that club and Factory…

 

조니 마, 80년대를 회상하다

2007년 8월호 모조 매거진의 부록으로 제공되었던 소책자 80 From The Eighties의 발문을 조니 마가 작성하였다.

80 From The Eighties

Interviewed by Lois Wilson

[발문]

 80년대가 시작하던 그때는 매우 흥미로운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열일곱이었고 맨체스터 도심부의 옷가게에서 일하며 존슨즈에서 팔법한 런던 킹스로드 로커빌리 스타일의 옷을 팔고 있었죠. 그리고 함께 밴드를 할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클럽 씬은 정신 없었어요: 히어로즈라는 게이 클럽이 있었는데 굉장히 특이한 곳이었어요. 그리고 하시엔다가 있었죠. 매우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명백히 말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알려진 대로의 하시엔다웃통을 벗고 손을 흔들어 대던 사람들의는 좀 더 나중의 모습으로, 1987년에서 88년 정도일 겁니다. 1981년에서 82년의 그곳은 예닐곱 명의 사람들과 함께 신인 밴드들의 공연을 볼 수 있던 훌륭한 장소였습니다. 사람들은 정말 뛰어난 80년대 밴드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곤해요. 건 클럽, 버스데이 파티, 서튼 레이쇼, 씨어터 오브 헤이츠, 킬링 조크를 그곳에서 보았습니다. 소위 포스트 펑크라 알려진 것들이죠. 포스트 펑크는 새로운 음악의 어휘집에서 가장 중요한 최초의 단어였습니다. 나에게, 그리고 내 세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펑크 록은 오래된 음악의 어휘집에서 가장 중요한 최후의 단어였죠, 그것은 갓 등장한 펍 록이었어요. 그 뒤에 찾아온 것은 미니멀하고, 깔끔하고, 생기 넘치며, 간결한 미학의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초기 기타 사운드를 설명해 주는 것이죠, 콜린 뉴먼과 에드윈 콜린스의 기타 소리도 마찬가지 구요.

 존 필과 그의 프로듀서 존 워터스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필의 라디오 쇼는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나누는 게시판과 같았습니다.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이었고 엄청난 사람들이 모여들던 곳이었거든요. 그래서 던디의 음악가와 브라이튼의 학생이 만나거나 같은 시간에 음악을 들을 수 있었죠. 온 나라가 이 괴팍하고 열정적이며 전복적이고 힘을 가졌으나 타협하지 않는 뻔뻔스러운 인물에 의해 결집되었습니다. 그리고 밴드 자신들에게는 필의 라디오 쇼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어요;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키고 표출시킬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저주 받아 마땅한 것들도 있었습니다토니 해들리 패거리나 사이먼 르 본 패거리들 말입니다. 금요일 밤의 TV를 장악하던 레벨 42, 리빙 인 어 박스, 튜브에 등장한 티어스 포 피어스도요. 정치적으로는 많은 것들이 일반인들의 통제영역을 벗어났다는 압도적인 감각이 존재했습니다. 광부들의 파업은 마가릿 대처의 폭압적 권력표출과 토리당이 60년대부터 내세우던 모든 가치들이 낳은 결과입니다. 연대는 미디어에 의해 사라졌습니다. 미세스 대처는 광부들에게 경제적 전략을 약속하지 않았고 동정 없는 잔혹함으로 그것을 집행했습니다. 도덕성이란 존재하지 않았고, 거대한 무력감만이 있었습니다.

 1986년 이후, 만약 인디 씬이 극심한 빈사상태에 이르러있었다면, 음반은 물을 줘서 만들었을 것이고 꽃은 스피커로부터 피어났겠죠. 하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변화가 필요함을 느꼈고, 댄스음악은 그래픽 디자인, 기술적 측면, 약물, 의상, 포괄적 감각에 있어서 또 다른 정신을 형성했습니다. 우리들, 스미스는 주류로부터 추방당했다고 생각하며 적을 둘 곳을 찾아 다녔습니다. 반대로 엑스터시 친화적인 밴드는 모든 이들을 받아들였고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좋아했어요.

 그리고 80년대가 나에게 부를 가져다 주었을까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해 확답을 줄 수 있는 다른 누군가도 있겠지요

조니가 가장 좋아하는 80년대 싱글 곡

1. The Beat Save It For Later [Go-Feet, 1980]

2. Talking Heads Burning Down The House [Sire, 1983]

3. The The Heartland [Epic/Some Bizare, 1986]

4. S’ExpressMantra For A State Of Mind [Rhythm Hing, 1989]

5. Psychedelic Furs Dumb Waiters [CBS, 1981]

 

[Afterword]

 The beginning of the 80s was a very exciting time. I was 17, working in a clothes shop in Manchester’s city centre, selling a take on the London King’s Road rockabilly style, the kind of clothes sold in Johnson’s, and I was looking for people to form a group with. The club Scene was busy: there was a gay club calld Heroes, which was seminal , then the Hacienda. That became a really key place, obviously, but what it’s known for – people with no shirts on with their hand in the air – came later, in 1987-88. In 1981-82 it was a great place to see the bands of the day with just seven other people. People forget that there were really good ’80s bands. I saw The Gun Club there, The Birthday Party, A Certain Ratio, Theatre Of Hate, Killing Joke. What’s now known as post punk, it was the letter A in the new lexicon. To me, and a lot of people of my generation, punk rock was the letter Z in the old lexicon, just warmed-up pub rock. What came afterwards was a reductive, clean, fresh, lean new aesthetic and that pretty much describes my early guitar sound and the guitar sound of Colin Newman and Edwyn Collins.

 John Peel and his producer John Walters were very important. Peel’s radio show was like a bulletin for ideas for like-minded people. Because this was pre-internet it was a centralised hot spot, so a Dundee musicain and a Brighton student would be tuning in and listening at the same time. The whole nation was being brought together by this quirky, passionate, subversive character who was in a position of power but was bold enough not to compromise. And for bands themselves it was vital; it allowed us to formalise new ideas and get them out there.
But there was much to rail against, too – the Tony Hadleys and Simon Le Bons. Level 42, Living In A Box, Tear For Fears on The Tube, dominating Friday night TV. Politically there was a prevailing sense of things getting beyond the control of ordinary people. The miners’ strike summed up the crushing power of Margaret Thatcher and everything the Tories had stood since the ’60s. Solidarity was destroyed with the cooperation of the media. Mrs Thatcher wasn’t just implementing an economic strategy on the miners, but enforcing it with an absolute brutal lack of compassion. There was a terrible lack of innocence involved, and that created a massive sense of helplessness.

After 1986, if the indie scene had got any feyer the records would have been made out of liquid and petals would have flown out of the speakers. Things needed to change and dance informed a different mentality in graphic design, technology, drugs, clothes, sense of inclusion. The Smiths, we were looking for a home, feeling excluded from the mainstream, and the bands who were chomping E, they were the opposite, they embraced and were embraced by everyone.

And did the ’80s make me a millionaire? Probably, but someone else got their fingers on it…

Johnny’s Fave ’80s Singles
1. The Beat Save It For Later [Go-Feet, 1980]
2. Talking Heads Burning Down The House [Sire, 1983]
3. The The Heartland [Epic/Some Bizare, 1986]
4. S’Express Mantra For A State Of Mind [Rhythm Hing, 1989]
5. Psychedelic Furs Dumb Waiters [CBS, 1981]

 

The Wedding Singer

물론 아담샌들러와 드류배리모어라는 두 걸출한 스타가 출연하기는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80년대”라는 시대의 문화코드이다. 80년대는 이 영화의 국내포스터 카피처럼 “인터넷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80년대 팝문화’만의 독특한 분위기로 전 세계가 행동통일을 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프레디크루거의 야수성에 치를 떨었고, 레이건이 신보수주의를 주창했으며, 라이브에이드를 모두가 함께 지켜보았던 이 시절에 대한 향수를 담은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다.

결혼식 축가가수에 불과한 로비하트(아담샌들러)는 며칠 후에 있을 결혼식에 잔뜩 기대에 부풀어있었지만 약혼녀는 로비가 장래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식장에 나타나질 않는다. 폐인이 되다시피 한 그를 다정히 감싸준 것은 역시 결혼을 앞둔 줄리아설리반(드류배리모어)이었다. 바쁜 그녀의 약혼자를 대신해 결혼준비를 도와주던 로비는 어느새 줄리아에게 연정을 느끼게 되고 영화의 큰 줄기는 어떻게 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해피엔딩으로 결말을 맺는가 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역시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영화 전편에 흐르는 80년대 팝문화 코드가 주요한 볼거리다. 보이조지피트번즈를 합쳐놓은 듯한 여장싱어, 마이클잭슨이나 마돈나를 흉내 낸 극중 배우들의 의상, 프레디크루거 가면을 쓰고 노는 로비의 조카 등 그 시절의 과장되고 풍요로운 분위기가 영화 전편에 묘사되고 있고 그 시절을 서양 팝문화에 빠져 살았던 이들에게는 너무나 반가운 추억거리를 선사하고 있다.

연인과의 사랑이 싫증난 사람들이 보기에 딱 좋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