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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mega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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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Omega-Man-Poster” by allposters. Licensed under Wikipedia.

소련과 중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그 사이에 낀(?) 미국이 엉뚱하게 세균병기의 공격을 받게 된다. 미국을 비롯한 지구는 오염되고 사람들은 호흡마비 등의 증상을 보이며 죽어간다. 인류의 멸망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Robert Neville 박사(Charlton Heston)는 자신이 개발하여 아직 실험단계에 있던 백신을 맞고 살아나지만 살아남은 어떤 이들은 심하게 오염되어 낮에는 잠을 자고 어둠을 틈타 활거 하는 변종인간, 일종의 뱀파이어가 되고 만다. 이들 무리의 우두머리 Matthias (Anthony Zerbe)는 인류가 도구의 사용으로 멸망을 초래하였음을 지적하며 반달리즘적인 파괴행위를 일삼는다. 한편으로 Neville을 그러한 타락한 문명의 상징으로 지목하며 그를 없애려 한다. 낮에는 거리를 활보하다 밤에 자신만의 은둔처로 숨어버리는 Neville 의 외로운 삶은 우연히 만난 정상적인 여인 Lisa과 그 친구들을 통해 구원받는다. 하지만 Matthias 일행의 집요한 폭력행위는 근절되지 않고 오히려 Lisa 일행까지 위협을 당한다. The Quiet Earth(1985) 와 Dawn Of The Dead(1978) 를 교묘히 섞어놓은 듯한 – 그런데 실제로는 본 작품이 가장 먼저 만들어져(1971년) 그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후계작이라 할 수도 있겠다 ― 독특한 분위기 SF 인 이 작품은 인류가 냉전과 핵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던 시점에 제작되었다는 시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영화 초반 텅빈 LA 거리는 ‘혹성탈출’에서의 망가진 자유의 여신상 만큼이나 – 이미 한차례 인류멸망의 좌절을 ‘혹성탈출(1968)’에서 경험한 바 있는 Charlton Heston 의 기용은 적절한 캐스팅이라 할 수 있다 – 충격적이었고 이 후 이 씬은 The Quiet Earth, 28Days Later 등에서 답습된다. 현재 Will Smith 를 내세워 영화의 원작 제목인 I Am Legend 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가 개봉예정이라 한다.

Shadows And Fog

어느 사람에게어떤 영화를 싫어하냐고 했더니 ‘어두운 영화가 싫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슬픈 줄거리의 영화인줄 알았더니 그냥 화면이 어두운 영화를 두고 하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그는 이 영화를 절대 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안개 자욱한 밤거리에서 벌어진 하루 동안의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는 영화니깐 말이다. 시종일관 주의를 기울여보지 않으면 등장인물이 안보일 정도로 화면이 어둡다.

이유도 모른 채 동네 사람들에 의해 잠이 깬 클라인만(우디 알렌)은 동네 사람들이 계획한 연쇄살인범 체포 작전에 울며 겨자 먹기로 가담하지만 정작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는 알지도 못한다. 한편 동네 어귀의 서커스단에서는 칼을 집어 삼키는 여인 아이미(미아 패로우)가 그의 남편과 싸우고 집을 뛰쳐나와 버린다. 이후 등장인물들은 이런 저런 에피소드로 서로 얽히고설키는 관계가 된다.

마틴 스코세스 감독의 1985년작 After Hours, 토드 브라우닝의 Freaks, 그리고 칼리갈리 박사의 밀실이 한데 합쳐져 카프카의 소설에나 나옴직한 무대 세트에 옮겨 각색된 듯 한 작품으로 예의 우디 알렌의 신경쇠약적인 유머 – 칼을 삼켰을때 딸꾹질을 하면 어떻게 되느냐는 식의 – 와 셀 수 없을 정도의 카메오가 눈요기 거리(일 수도 있고 오히려 보다 지칠 수도 있)다.

Dawn Of The Dead

영화는 마치 국가연주 없는 국가대항전처럼 시작된다. 이미 좀비는 세상을 점령하고 있고 그 사실은 배우들도 알고 관객들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영화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감독 조지 로메로가 이 작품을 그가 10년 전에 만든 걸작 Night of the Living Dead 의 연장선상에 있는 일종의 2편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테판과 방송 일을 하는 여자 친구 프란세스, 그리고 경찰인 피터와 로저는 좀비들을 피해 더 안전한 곳으로 가기 위해 헬리콥터를 타고 북상한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차고 넘치는 좀비들로 인해 – 좀비들이 흔해짐에 따라 이제 어떤 사람들은 좀비들을 사냥감 또는 여흥거리로마저 생각하게 된다 – 여행길은 험난하다. 그 와중에 어느 대형쇼핑센터에서 휴식을 취하던 그들은 쇼핑센터를 탈취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좀비들을 소탕하고 쇼핑센터를 그들의 것으로 만들어 마치 The Quiet Earth 의 주인공처럼 물질적 풍요를 마음껏 누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내 악당들이 그들의 존재를 눈치 채고 쇼핑센터를 털 계획을 짠다.

영화에서도 설명되지만 좀비는 부두교에서 등장하는 죽었으나 저승으로 가지 못한 시체를 일컫는 말이다. 저주받은 죽음이라는 종교적 의미와 헐리웃과 만나 신종괴물로 둔갑하지만 그들은 다른 괴물들과 달리 굼뜨고 개념이 없는 그저 살아있는 시체일 뿐이다. 그런 그들로 세상이 가득차면 세상은 희망이 남아있을까? 이것이 살아남은 피터가 던지는 질문인데 그는 결국 희망 쪽을 택한다.

2004년 리메이크되었다.

King Kong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통해 컬트영화 전문 감독에서 일약 헐리웃 블록버스터의 거두로 떠오른 피터 잭슨이 고른 차기작은 1933년 만들어진 킹콩의 리메이크였다. 피터 잭슨이 왜 이 작품을 골랐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길이 없지만 아마도 어린 시절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이 스펙터클 무비를 만들 재력과 명성이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성공을 통해 이루어진 시점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킹콩의 오리지널 작품은 헐리웃 영화사에서 가장 독특한 캐릭터 중 하나인 거대한 고릴라를 내세워 영화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획득하였고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영화이다. 그렇지만 원래 온순하고 평화로운 종인 고릴라에 대한 어쩔 수 없는 – 다른 생명에 대한 애정을 그렸다는 점에서 선한 면모를 그리고는 있지만 결국은 괴수 영화의 주인공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되는 폭력성을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 편견을 필름에 담았기 때문에 무지한 대중은 한동안 고릴라를 난폭한 짐승으로 오인하였고 이로 인해 동물애호가들의 비판을 감수해야했다.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피터 잭슨이 이러한 동물에 대한 ‘정치적 올바름’ 이 대중문화에 어떻게 반영되는가가 비판적 영화관객들의 핫이슈가 된 시점에서 어떻게 킹콩을 묘사할 것인가 하는데 대한 호기심이 있었던 편이다. 결과적으로 봐서는 감독은 일단 일부 세세한 묘사를 제외하고는 원작을 충실히 재현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던 듯싶다. 오히려 그는 관객들의 동물에 대한 ‘정치적 올바름’ 이 온순한 유인원으로서의 고릴라와 난폭한 괴수로서의 ‘고릴라를 닮은’ 거대한 유인원을 구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듯싶다.(어쨌든 섬세한 컴퓨터그래픽 덕으로 킹콩의 보다 인간적인(?) 면모는 오리지널보다 두드러질 수 있었다)

영화 자체로 파고 들어가면 이 영화의 플롯 자체는 ‘미녀와 야수’에 괴수 영화를 짬뽕한 영화이다. 애초부터 맺어질 수 없었던 이상한 커플의 사랑이야기가 주조를 이루는 가운데 한 나락에 빠진 영화제작자의 욕망과 주위 인물들의 모험담이 결합되어 소위 ‘사랑과 야망, 그리고 모험’ 이 총망라된 버라이어티쇼로 재현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스케일의 영화는 당연하게도 1930년대보다는 21세기의 최첨단 영화제작 환경에서 보다 박진감 넘치게 재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예술적 상상력은 반드시 상상력의 빈 공간을 오감의 만족을 극대화시킴으로써 극대화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영화라는 매체가 없던 시절에도 사람들은 글로 표현된 매체만으로도 희열과 쾌락을 느낄 수 있는 상상력을 지니고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최첨단 기술을 통해 영화화되었다고 해서 원작에서 느끼는 희열을 반드시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요컨대 원작과 리메이크 중 어느 작품이 더 맘에 드는지는 순전히 개인의 몫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한혜숙의 구미호가 좋은지 고소영의 구미호가 좋은지가 개인의 몫인 것과 마찬가지다.

사실은 첨 글을 쓸 때 킹콩에서 감지할 수 있는 폭력적 자본주의에 대한 메타포에 대해 이야기할까 했으나 이런 유의 영화이야기는 이미 뻔한지라 생략.

Tetsuo: The Iron Man

인간의 몸에 기계, 혹은 철을 결합시킨다는 일종의 기계인간의 이야기는 공상과학영화에서 자주 다루어지는 흥미로운 주제이다. 그 결합이 단순히 인간성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은 채 육체적 능력만을 향상시키는 ‘600만불의 사나이’와 같은 존재도 있는가하면 기계인간이 되기 이전의 기억으로 인해 존재론적 고민에 시달리는 ‘로보캅’과 같은 존재도 있다. 저예산 컬트로 알려진鐵男(Tetsuo)은 굳이 따지자면 후자의 영화와 같은 부류의 기계문명에 대한 디스토피아적인 시각을 지닌 작품이다. 스토리를 요약하거나 서술하는게 별로 의미없는 영화이지만 하여튼 어느 날 갑자기 몸에서 “비대칭적인” 고철이 자라나는(?) 한 샐러리맨이 겪게 되는 기이한 경험을 통해 나름대로 기계문명의 우울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SF 애니메적인 상상력과 변태적인 성적환상, 뮤직비디오 스타일의 편집, 인더스트리얼 계열의 음악의 적절한 사용 등 태생적으로 컬트가 될 자양분이 충분하였고 당연하다는듯이 컬트가 되었다.

A Nightmare on Elm Street

Fred Krueger (Robert Englund)라는 공포영화 사상 가장 유명한 캐릭터를 탄생시킨 웨스크레이븐의 1984년작. 부모들에 의해 불타죽은 이가 그들의 아이들의 꿈에 나타나 복수를 시도한다는, 즉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가 존재한다는 가정을 통해 일종의 초현실주의적인 시도를 하고 있다. 의례 그렇듯이 이 영화에서도 무고하게 희생당하는 십대들이 등장하지만 주인공 소녀는 쉽게 당하지만은 않는다.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잠자기를 거부하며 두려워하다가 이내 프레디의 존재를 현실로 끌어내기 위해 모험을 감행하는 여전사의 모습이다.(그에 반해 자니뎁이 연기한 그녀의 남자친구는 어수룩하게 당해버리고 만다) 앞서도 말했듯이 프레디는 이후 가장 유명한 공포영화 캐릭터로 자리 잡아 여러 편의 후편에 출연하게 된다. 심지어 ‘13일의 금요일’에서의 또 다른 유명한 공포영화 캐릭터인 제이슨과 한판 대결을 벌인다는 Freddy Vs. Jason 이라는 어이없는 영화도 만들어졌다.

Phantasm

사실 공포영화는 모순되게도 보수적인 영화장르다. 스크림에서 웨스크레이븐이 친절하게 설명한 바와 같이 공포영화에는 몇몇 암묵적으로 정해진 공식이 있는데 많은 부분 사회가 용인하지 못하는 부도덕함에 대한 징벌적인 성격이 강하다. 물론 도덕적인 징벌이 뭐 나쁘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영미권 스타일의 추리소설이나 추리영화의 보수성만큼은 아니더라도) 주로 기존체제의 부르주아 도덕률을 답습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어떻게 보자면 공포영화에서 일상적으로 등장하는 폭력묘사에 대한 도덕적 인과관계의 서술을 통해 관객이 극에 몰입하게 하는 동시에, 폭력묘사에 대한 사회적 비난을 감수하기 위한 미봉책일수도 있다.

이 영화 Phantasm 은 그러한 공포영화의 보수성을 답습하지 않는다. 웨스크레이븐의 ‘공포의 계단’과 같이 진보적인 시각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억지스러운 인과관계를 꾸미기 위한 상황설정에는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그보다는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처럼 폭력 그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는데 몰두한다. 그런데 너무 재미만 좆다보니(?) 이런 저런 잡탕소재가 섞여서 극의 몰입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악당이 오컬트 쪽으로 나가다가 갑자기 외계인으로 둔갑되는데 특별한 설명도 없어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대단히 창조적인 악당(?)이 등장하는데 한순간에 어이없이 당하기도 한다. 그런 허술함이 이 영화를 컬트로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Don Coscarelli 가 불과 23살의 나이에 시나리오, 감독, 프로듀서 등을 도맡아 하였다.

Forbidden Pl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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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biddenplanetposter” by Copyrighted by Loew’s International. Artists(s) not known. – http://wrongsideoftheart.com/wp-content/gallery/posters-f/forbidden_planet_poster_01.jpg.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어릴 적 이 영화를 ‘주말의 명화’에서 보고 느낀 충격은 ‘혹성탈출’의 마지막 장면만큼이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행성에서 멸망한 고도문명이 궁극적으로 창조해낸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은 이전의 다른 영화에서 느낄 수 없었던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나이가 들어 다시 본 느낌역시 어릴 적 그 느낌을 좆고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 착안하여 구상된 스토리라인은 이미 “문명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란 무엇일까” 라는 철학적 물음에 도달하고 있었다. 고도의 문명 속에서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를 추구했던 멸망한 인종 크렉 Krel. 그들이 무었을 위해 문명을 건설했고 어떠한 것에 의해 멸망을 자초해갔는가는 고도의 문명을 컨트롤할 수 있는 정신적 성숙함이 수반되지 않고서는 문명을 지탱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다. 영화를 보고나서 언뜻 그들의 어리석음이 이해가 되지 않지만 한때 핵무기 경쟁을 통해 온 세상을 핵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었고 지금도 가장 문명화된 언어로 가장 야만적인 전쟁을 정당화하고 있는 세련된(?) 문명인들의 이중적인 행태를 보고 있자면, 어쩌면 이 영화는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주문을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1956년 당시 최고의 특수효과를 사용하여 만들어진 이 영화는 이후 스타트랙 등 여러 공상과학영화에 간과할 수 없는 영향력을 미쳤다. 특히 루비라는 로봇 캐릭터는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는 고전적인 디자인.

p.s. 지난번 The Day The Earth Stood Still 의 포스터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포스터에 로봇이 아리따운 여인을 안고 있는 장면을 포스터로 썼다. 물론 로봇 루비는 극중에서는 여인을 안지 않았다.(혹시 휴식시간 중에는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역시 흥행을 고려한 제작사의 눈속임이리라.
p.s. 2 이 영화의 남자주인공은 ‘총알 탄 사나이’ 시리즈의 Leslie Nielsen 이다. 형편없이 망가지던 그 영화를 보면 ‘금단의 혹성’에서의 모습이 쉽게 연상되지 않겠지만 분명 그는 그 작품에서 신중하고 핸섬한 사령관으로 나온다. 물론 우스꽝스러운 표정도 짓지 않는다.

The Cabinet of Dr. Caligari

무성영화 시대의 작품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 중 하나. 연쇄살인, 몽유병, 정신병원 등 섬뜩한 소재가 기묘하게 엮여 기괴한 장식의 무대장치 위에서 펼쳐지는 이 작품은 오늘날 각종 스릴러와 범죄영화들이 답습하고 있는 갖가지 소재들을 선구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천재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표현주의는 이후 독일영화의 표현양식에 큰 축으로 자리 잡게 된다.

The Thing (From Another World)

몇몇 에스에프나 공포영화는 흔히 그 사회의 계층 간의 갈등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조지로메로의 ‘죽음의 날’ 이나 웨스크레이븐의 ‘공포의 계단’, 그리고 로버트와이즈의 ‘The DayThe Earth Stood Still’과 같은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The Big Sleep 의 감독 크리스찬나이비 Christian Nyby 가 1951년 선보인 The Thing 역시 외계인의 출몰로 인해 갈등하는 각 계층의 모습을 통해 지적쾌락을 선사하는 영화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직업군은 ‘죽음의 날’과 비슷하다. 이 영화는 좀비의 지구정복으로 인해 고립된 생존자들 중 과학자, 군인, 민간인 등의 갈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 작품에서 군인은 생존자들의 권력을 쥐고 흔들려는 또 다른 적(敵)으로 묘사된다. 반면 The Thing 에서는 현존하는 분명한 위협인 가공할 괴력의 외계인을 상대로 냉정을 지키며 인간을 보호하려는 무리로 묘사된다. 반면 과학자 부류는 위험에는 아랑곳없이 외계생물체에 대한 과학적 탐구욕 때문에 사태를 호도하는 부류로 묘사된다.

어느 사회나 존재하는 혁신과 보수의 갈등에서 누구에게 상대적 도덕성을 부여하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사태해결 방안이 어느 관점에서 옳으냐에 대한 주관적 서술방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에서 감독은 군인을 택했다. 그들은 호기심에 의해 동기부여가 되는 직업이 아니며 대화가 통하지 않는 ‘나쁜’ 괴물 외계인에게는 군인들의 보수성이 더 유효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만약 외계인이 보다 우호적이었다면 명백히 군인들의 보수성이나 공격성은 호의적이지 않게 묘사되었을 것이다. 동시대 영화인 The Day The Earth Stood Still 이 바로 그 정반대의 경우에 해당하는데 지구에 평화의 경고 메시지를 전하러 온 Klaatu 를 적대적으로 공격한 것은 바로 군인이었다. 또한 정치인들은 그의 경고를 무시하였다. 이에 반해 과학자들은 Klaatu 의 지적능력에 공감하여 그의 경고메시지를 받아들인다. 결국 어느 사회나 위험을 받아들이느냐, 위험을 배척하느냐 하는 문제는 흑백논리로 명쾌하게 구분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군인이 과학자보다 올바른 판단을 하는 무리로 묘사되었다 하여 이 영화를 보수적이거나 반(反)진보적인 영화로 치부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을 것이다. 외계인이 ‘악(惡)’한 캐릭터라는 기본상수를 깔고 들어갔으니 만큼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나아가자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하다. 적어도 그 군사적 대응이 인디펜던스데이만큼 유치하지는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