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e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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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rvana-Bleach” by May be found at the following website: http://www.endless-nameless.com/pictures/render/10/10.jpeg. Licensed under Wikipedia.

1989년 6월 15일 Nirvana의 데뷔 앨범 “Bleach”가 발매되었다. Jack Endino가 프로듀사한 이 앨범은 1988년 12월에서 1989년 1월 사이에 시애틀에 있는 레시프로칼 레코딩(Reciprocal Recording)에서 녹음됐다. 밴드는 이 앨범을 스튜디오 타임으로 36시간 만에 녹음했고 비용은 단지 606.17달러가 소요됐다. 이 돈은 앨범에서 연주는 하지 않은 Jason Everman이 댄 돈이었다. 그는 Nirvana의 데모를 듣고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룹의 세컨드 기타리스트로 잠시 참여하기도 했었다. Everman은 앨범 슬리브에 기타리스트로 등재되어 있지만 실제로 레코드 연주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시애틀의 소규모 인디락 레이블인 Sub Pop 레코드사에서 발매된 앨범은 평론가들의 호평을 얻었지만 첫 발매 당시 판매량은 불과 4만장 정도였다. 하지만 밴드의 두 번째 앨범 “Nevermind”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되자 이 앨범도 다시 조명을 받아 Geffen 레코드사가 재발매했고 판매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Bleach”는 최종적으로 1992년 빌보드 탑200 차트 89위까지 올랐다. 80년대에 발매되었지만 아직 그런지를 받아들이기에는 팝적인 시대였던 것 같다.

Track Listing
Vinyl
1.”Blew” – 2:55
2.”Floyd the Barber” – 2:18
3.”About a Girl” – 2:48
4.”School” – 2:42
5.”Love Buzz” (Robbie van Leeuwen) – 3:35
6.”Paper Cuts” – 4:06
7.”Negative Creep” – 2:56
8.”Scoff” – 4:10
9.”Swap Meet” – 3:03
10.”Mr. Moustache” – 3:24
11.”Sifting” – 5:22
Cassette and CD bonus track
12.”Big Cheese” (Cobain, Krist Novoselic) – 3:42 (originally the B-side of the “Love Buzz” single)
CD only bonus track
13.”Downer” – 1:43

Duran Duran – Duran Duran(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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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cover art can be obtained from EMI., Fair use, Link

1981년 6월 15일 Duran Duran의 데뷔 앨범 “Duran Duran”이 발매되었다. Colin Thurston이 프로듀서를 맡은 이 앨범은 런던에 있는 애비로드 스튜디오 등 여러 곳에서 1980년 12월에 녹음됐다. 영국 버밍햄 출신의 밴드는 당시 영국을 휩쓸고 있던 뉴로맨틱 운동의 선두주자였다. 밴드는 이 앨범에 수록될 곡들을 1980년 AIR 스튜디오에서 만들었다. 그 당시 아래층에서는 그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밴드 Japan이 Gentlemen Take Polaroids 앨범을 녹음 중이었다. David Bowie, The Sex Pistols, Chic 등에게서 음악적 수혜를 받은 Duran Duran은 이러한 다양한 장르를 자신들만의 독특한 음악으로 승화시키고자 하였다. 이 앨범은 “Planet Earth” (#12 UK), “Careless Memories” (#37 UK), “Girls On Film” (#5 UK)1 등을 포함한 세 개의 싱글이 연속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영국 내에서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였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그들의 두 번째 앨범 “Rio”가 인기를 얻으면서 이 앨범이 1983년 4월 25일 재발매될 때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오리지널 미국 발매분에서는 “Planet Earth”의 오리지널 싱글 버전이 익스텐디드 나잇 버전(Night Version)으로 대체된다. 또한 영국 발매분에 수록되었던 “To The Shore”가 제외되었다. 1983년의 미국 재발매분은 “Planet Earth”의 짧은 버전이 복구되고, 새 싱글 “Is There Something I Should Know?”(#1 UK, #4 US Pop) 등이 포함되고, 새로 디자인한 커버 아트로 재포장되는 등의 수정을 거쳤다. “Duran Duran”은 영국 앨범 차트 3위에 올랐고, 미국 재발매분은 빌보드 탑200 차트에는 10위에 올랐다.

1981년 오리지널의 트랙리스트
1. “Girls on Film” 3:32
2. “Planet Earth” 4:03
3. “Anyone Out There” 4:02
4. “To the Shore” 3:51
5. “Careless Memories” 3:55
6. “Night Boat” 5:24
7. “Sound of Thunder” 4:07
8. “Friends of Mine” 5:43
9. “Tel Aviv” 5:20

  1. 이 싱글의 뮤직비디오는 MTV가 출범한지 2주 후에 Godley & Creme의 손에 의해 제작되었다. 반나의 여인들이 등장하는 야한 버전과 엄격하게 재편집된 “대낮 버전” 등 두 개의 버전이 있는데, “대낮 버전”은 MTV가 애용했고 야한 버전은 플레이보이 채널이 애용했다.

Das Mo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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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aftwerk The Model single cover” by http://www.discogs.com/image/R-46275-1169052722.jpeg. Licensed under Wikipedia.

“Das Model”(영어로는 “The Model”)은 독일 그룹 Kraftwerk가 1978년 녹음한 노래다. Ralf Hütter와 Karl Bartos가 작곡하고 Emil Schult가 가사를 만든 이 곡은 Kraftwerk의 앨범 Die Mensch-Maschine(영어로는 The Man-Machine)에 수록되었던 곡이다. 이 곡은 독일에서 7인치 싱글(B면에는 “Neonlicht”)로 발매되었었다. 영어로 부른 곡은 1981년 7월 “Computer Love” 싱글 B면에 수록되었다. 그런데 라디오 DJ들이 이 B면 곡을 틀어대기 시작하자, EMI는 밴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The Model”을 A면으로 하는 싱글을 1981년 12월 재발매했다. 1982년 이 노래는 영국 싱글 차트 1위에 올랐고 탑75에 21주간 머물렀다.

뮤직비디오

New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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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pecheModeNewLife7” by The cover art can be obtained from Mute Records.. Licensed under Fair use via Wikipedia.

“New Life”는 Depeche Mode의 두 번째 싱글로 1981년 6월 13일 발매되었다. 이 곡은 두 가지 버전이 있는데 7인치 버전은 후에 1981년 10월 발매된 앨범 Speak &Spell의 영국 발매 버전에 수록되었다. 그리고 앨범 버전과 다른 12인치 리믹스가 있는데 이 곡은 나중에 Speak &Spell의 미국 발매 버전에 수록되었다. 밴드는 이 노래로 BBC의 Top of the Pops에 데뷔했고, 그 결과 1981년 6월 25일 영국 싱글 차트 11위에 오르면서 Depeche Mode의 출세작이 되었다. 2009년에 제작된 BBC의 영국 신쓰팝에 대한 다큐멘터리 Synth Britannia는 2부 Construction Time Again 첫 머리에 이 곡을 소개하며 1980년대를 여는 대표적인 신쓰팝 넘버로 간주한다.

Top of the Pops 공연장면 보기

Synth Britannia

브리태니아(The Britania) 시리즈는 BBC Four가 2005년부터 시작한 다큐멘터리다. 이 다큐멘터리는 영국에서의 음악 장르의 진화나 이러한 대중음악 문화의 다양한 모습을 다룬다. 가끔씩 다른 나라의 음악이나 코믹북과 같은 다른 대중문화를 다루기도 한다. 이 시리즈 중에 Synth Britannia가 2009년 10월 16일 방영됐다. 이 에피소드는 신디싸이저를 기본으로 하는 영국 일렉트로닉 음악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1부 “Alienated Synthesists”는 1970년대의 Prog Rock이나 영화 Clockwork Orange 사운드트랙에서의 신디싸이저 사용에서 시작하여 크라우트락과 펑크락에 영향을 받은 영국의 노동계급 젊은이들이 사용할 수 있는 적절한 신쓰 키보드의 발전, 그리고 J.G. Ballad와 같은 작가의 디스토피아 Sci-Fi의 등장, 그리고 Mute 레코드사의 형성과 이어지는 신쓰팝의 성공 등을 다루고 있다.

2부 “Construction Time Again”은 1980년대 초 씬스팝이 실험적인 포스트펑크에서 주류 팝시장으로 접어다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무명밴드가 재조명을 받고 차가운 신디싸이저에 따뜻하고 쏘울풀한 보컬로 무장하거나, Mellotron이나 E-mu Emulator 등과 같은 샘플러로 무장한 신진 밴드가 등장하는 과정을 다룬다. 그들은 Depeche Mode, The Human League, Heaven 17, Cabaret Voltaire, Soft Cell, Yazoo, OMD, Eurythmics, Ultravox, Kraftwerk, Pet Shop Boys and New Order 등이다.

비디오 보기
IMDB의 다큐멘터리 소개

여운 – 사랑이 떠나버리고


이미지 출처

여운은 경성대학교 음악서클 선후배인 남자 둘(안현진, 고상우) 여자 하나(박순화)로 구성된 이 혼성 트리오로 1987년 강변가요제에 “홀로된 사랑”(안현진 작사/작곡)이란 경쾌한 노래로 은상을 받으며 데뷔했다. 당시 대상은 문희경의 “그리움은 빗물처럼”이 받았다. 하지만 더 인기 있었던 곡은 여운의 “홀로된 사랑”과 동상을 수상한 티삼스의 “매일 매일 기다려”였다. “홀로된 사랑”은 1988년 KBS 가요탑10에서 4월 둘째 주와 5월 첫째 주에 걸쳐 1위를 기록했다. “사랑이 떠나버리고”(장경수 작사/이제우 작곡)는 “홀로된 사랑”의 인기를 등에 업고 후속곡으로 발표한 발라드곡이다. 하지만 이 곡을 마지막으로 그들의 활동은 눈에 띄지 않았다.

노래듣기

사회주의 혁명, 아방가르드, 그리고 전자음악

1919년에 러시아의 음향 기술자 레온 테레민 Leon Theremin(본명 Lev Sergeivich Termen) 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전기적인 음률의 고저가 연주되는 테레민 theremin(또는 thereminvox, aetherphone 으로 불리기도 함)이라는 흥미로운 악기를 발명한다. 이 악기는 연주자가 악기에 손을 대지 않고도 연주하는 악기로서 연주자의 손이 금속봉에 얼마나 근접하는 가에 따라 음의 고저와 음량이 조절되었다. 테레민의 연주소리는 다소 기괴스러워서 104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공상과학영화나 공포영화의 사운드트랙에 곧잘 사용되었다.(예로 들자면 Spellbound, The Lost Weekend, Ed Wood, Mars Attacks!, The Day the Earth Stood St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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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 Termen playing – cropped” by Bettmann, Corbis – http://tygodnik.onet.pl/35,0,57107,sowiecki_faust,artykul.html (polish).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테레민을 연주하고 있는 레온 테레민

이 악기는 흥미롭게도 소비에트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과 그에 따른 단기적인 아방가르드 예술의 융성과 관련이 깊다. 아방가르드 예술은 그 태생과 발전 자체가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급진성을 띠었으며 현실사회 전반에 대한 상당한 혐오감을 내포하고 있었다. 소비에트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볼셰비키는 후진적인 러시아 사회에서의 선각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소수의 직업적 혁명가의 엄격한 집단을 표방하였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와 상당히 유사한 형태의 집단이었다 할 수 있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진실을 파악하고 있었으며, 이점이야말로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경멸할 수 있는 권리를 스스로에게 부여해줬다.”[마크 애론슨, 도발 아방가르드의 문화사]

그리고 혁명이 성공하자 새로운 지배계급이 된 볼셰비키는 아방가르드의 예술 활동을 적극적으로 장려한다. 소비에트는 예술이 인민들을 사상, 감정, 분위기로 물들게 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여겼고 아방가르드 예술을 일종의 사회주의 선전선동의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술은 아지프로 agitprop 라 불리며 실질적이고 창조적인 약진을 해나갔다. 적어도 스탈린이 정권을 잡기 이전까지는…..

El Lissitzky, Lenin Tribune, 1920. State Tretyakov Gallery, Moscow
엘 리시츠키 El Lissitzky 가 레닌을 위해 제작한 연단으로 구성주의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

여하튼 이 당시의 예술분위기는 모든 장르에서 전통적인 문법장르가 해체되는 시기였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들 모두가 해체되고 재창조되어 이해 불가한 우스꽝스러운 소리조차 음악으로 포장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창조물이 바로 기계를 통한 실용적 작업이 소리와 결합된 레온 테레민의 작품 테레민이었다.

레온 테레민은 1895년 페테스브르그에서 태어났다. 귀족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어렸을 적부터 과학에 소질을 보이며 남들과 다른 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소비에트 혁명 후 그의 인텔리겐챠적인 지위가 문제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의 과학적 재능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혁명정부를 위해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어느 정도 자유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테레민은 여러 연구를 하던 중 인체의 온도변화를 음향으로 전환하는데 착안하여 테레민을 만들게 되었다.

1921년 어느 날 레온 테레민이 자신이 발명한 새로운 악기를 레닌에게 시연해 보인다. 이 악기는 현도, 건반도, 마우스피스도 없는 악기였다. 음은 전기 장치가 부착된 상자에서 만들어졌다. 연주자는 상자에 부착된 안테나와 금속봉 사이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공기를 연주한다. 이 악기는 전혀 새롭고도 으스스한 음을 만들어내었다. 레닌은 이 연주에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악기연주법을 배우기까지 했다고 한다.(레닌은 후진적인 농업사회였던 러시아가 사회주의 강국으로 거듭나는 길은 하루빨리 공업사회로 전환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기계에 대한 그와 집권세력의 집착은 매우 강했다. 그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Socialism equals Soviet power plus electrification.” )

이후 소비에트의 현대성을 상징하는 선전도구로서 새로운 악기를 유럽에 선전하러 돌아다니던 테레민은 1927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이 신기한 악기를 대중에게 선보였다. 많은 이들이 테레민에 관심을 보였는데 앨버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도 매우 흥미있어 하며 그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한다. 이듬해 그는 테레민의 특허권을 얻은 후 악기 제작권을 RCA에 팔았다. RCA는 이 악기의 연주가 “휘파람 부는 것처럼” 쉽다는 슬로건 하에 악기 판매에 나섰는데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악기연주가 휘파람 불듯이 쉽지도 않았을 뿐더러 1929년 미국에는 대공황이라는 미증유의 사태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악기는 미키마우스 클럽에서 시연되기도 했었고 앞서 말했듯이 공상과학영화와 공포영화의 사운드트랙에 이용되었다. 이 악기의 가장 뛰어난 연주자는 전직 바이올리니스트였던 클라라 록모어 Clara Rockmore 였다. 레온 테레민은 아름다운 외모의 그녀에게 구애하였으나 그녀는 변호사 존 록모어 John Rockmore 와 결혼한다.

Clara Rockmore (1911-1998) at her Theremin.jpg
By missing name – https://www.wnyc.org/story/inventor-and-virtuoso-leon-theremin-and-clara-rockmore-listening-room/, Public Domain, Link
Clara Rockmore

이후 테레민은 소수이긴 하지만 대중음악에도 사용된다. The Beatles나 The Rolling Stones 와 같은 몇몇 대중음악가가 이 악기의 소리를 사용하였다. 대표적인 곡이 비치보이스의 명곡 Good Vibrations 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이러한 컬트적인 현상과 별개로 현대 대중음악에 보다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업이 신서사이저를 발명한 로버트 무그 Robert Moog 에게 영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로버트 무그는 1950년대 혁신적인 신서사이저라 할 수 있는 미니무그 minimoog 를 발명하여 현대 전자음악(Kraftwerk, Gary Numan, Pink Floyd 등의 선구자적인 음악가들이 시도하여 인기를 얻었던 전자음악은 80년대 Synth Pop, New Romantics 등의 장르를 통해 전성기를 맞는다. 이후 이들 장르의 인기는 이전 같지 않지만 오늘 날 대중음악에서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이다. 그는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테레민에 매혹되어 직접 제작하여 팔기까지 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미니무그는 많은 면에서 테레민이 지향하는 바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우리시대의 신서사이저 음악은 테레민의 은혜를 받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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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moog” by Krash – photo taken by Krash.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로버트 무그가 제작한 미니무그

1938년 그는 돌연 미국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많은 이들은 소련의 스파이들이 그의 뉴욕 아파트에서 그를 납치하여 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후에 나온 그의 전기에서는 그가 빚 때문에 미국을 떠났고(RCA에 테레민의 권리를 넘긴 레온 테레민의 다음 프로젝트는 텔레비전의 발명이었다고 한다. 이를 위해 회사를 설립하고 많은 돈을 끌어 모았으나  그 프로젝트는 실패하였고 테레민은 빚더미에 앉았다고 한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소련에 호송되었다고 전하고 있다.(또는 그가 미국에서 명성을 얻었을때조차 지속적으로 소련 스파이들과 접선을 유지했고 이 당시 자발적으로 소련으로 돌아갔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그는 그곳에서 혁신적인 도청장치인 The Bug의 작업에 참여하였고 이일로 인해 당시 소련사회의 최고 영예인 스탈린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후에 소련에서 음악학교에서 음악 강의를 맡기도 했으나 현대음악은 해로운 것이라는 비난에 직면하여 이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는 1991년이 되어서야 미국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고 1993년 숨을 거두었다. 1994년 그의 업적을 기린 Theremin: An Electronic Odyssey 라는 다큐멘타리가 발표되었다.

요컨대 테레민의 개발, 발전, 그리고 이어지는 전자음악의 발달의 이면에는 사회주의 혁명, 아방가르드, 기계문명에 대한 낙관주의와 같은 20세기 초 인류문명사의 발전이라는 역사적 맥락이 놓여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참 후에 대중음악계는 지나친 악기의 기계화, 내지는 전자기기화에 싫증을 낸 이들이 소위 플러그를 뺐다는 의미의 unpluged 공연을 한동안 유행시키기도 했다.

테레민 연주 듣기

참고할만한 사이트들

Born in the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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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uceBorn1984” by The cover art can be obtained from Columbia.. Licensed under Wikipedia.

1984년 6월 4일 Bruce Springsteen의 일곱 번째 스튜디오 앨범 “Born In The USA”가 발매되었다. Jon Landau, Chuck Plotkin, Bruce Springsteen, 그리고 Steve Van Zandt가 프로듀스한 이 앨범은 1982년 1월부터 1984년 3월에 걸쳐 뉴욕에 있는 파워스테이션과 힛팩토리(The Hit Factory)에서 녹음되었다. 1982년 발표된 Springsteen의 이전 앨범 “Nebraska”는 평론가의 찬사를 얻었지만 상업적으로는 썩 훌륭한 결과는 아니었다. 이 때문에 Springsteen은 새 앨범을 준비하면서 음악적 수준을 유지하면서도 좀 더 많은 청취자 층을 확보해야하는 도전에 직면하였다.

1981년 영화감독 Paul Schrader는 Bruce Springsteen에게 자신의 영화 Born in the U.S.A.를 위해 노래를 만들어줄 것을 제안했다.1 Springsteen은 대본을 대충 보고 영화 제목으로 된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는 이 노래를 여섯 번째 스튜디오 앨범 “Nebraska”를 만들 당시 벌써 완성했고 당초에는 그 앨범에 수록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앨범의 다른 곡들의 우울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다는 이유로 수록곡에서 제외됐다. 비슷한 이유로 이미 완성된 “Cover Me”와 “I’m on Fire” 같은 곡들이 앨범에서 제외됐다. 그리고 그 작업들이 모여 “Born In The USA”가 탄생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앨범의 수록곡은 이전의 앨범의 수록곡에 비해 더 밝아졌다. 신디싸이저를 통한 어레인지먼트와 팝 친화적인 멜로디가 보강되었다. 가사는 미국인의 꿈을 좇는 보통 미국인의 일상생활에서의 삶을 그리고 있다. 결과는 비평과 흥행 모두에서 성공적이었다. 이 앨범에서는 “Dancing In The Dark” (#2 Pop), “Glory Days” (#5 Pop), “Born In The USA”(#9 Pop) 등을 포함하여 무려 일곱 개의 탑10 싱글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는 Michael Jackson의 Thriller 그리고 Janet Jackson의 Rhythm Nation 1814와 동일한 기록이다. Bruce Springsteen and the E Street Band는 1984년 6월 29일부터 1985년 10월 2일까지 전 세계 순회공연에 나섰다.

유명한 앨범 커버에는 성조기의 줄무늬 벽을 배경으로 Springsteen이 청바지를 입고 뒤춤에 빨간 캡을 쑤셔 넣고 있는 뒷모습이 실려 있다. 이 빨간 야구 모자는 원래 Springsteen의 친구 Lance Larson의 아버지의 것이었다고 한다. Larson은 아버지의 죽음 후에 그 모자를 Springsteen에게 주었고 Springsteen은 친구의 선친을 기리기 위해 이 앨범 사진을 찍을 때 그 모자를 사용했다. 청바지 차림의 몸매 좋은 Springsteen의 이러한 이미지는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불가피하게 당시의 시대적 조류, 즉 로널드 레이건과 람보로 대표되는 애국주의적 이미지와 겹치게 되었다. “백인 노동자 영웅”

84주간 탑10에 머문 이 앨범은 미국에서만 1천5백만 장 가량 팔려 그해에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고 Springsteen은 이 앨범을 통해 생애 최초로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베스트 락보컬 퍼포먼스’ 상을 수상했다. The Village Voice는 비평가를 대상으로 하는 연례 설문조사를 통해 “Born In The USA”를 ‘그해의 베스트 앨범’으로 선정하였다. 롤링스톤은 이 앨범을 ‘The 500 greatest albums of all time’에서 85위에 올렸다. Slant 매거진은 2012년 이 앨범을 ‘Best album of the 1980s’에서 35위에 선정하였다.

Side one
1. “Born in the U.S.A.” 4:39
2. “Cover Me” 3:27
3. “Darlington County” 4:48
4. “Working on the Highway” 3:11
5. “Downbound Train” 3:35
6. “I’m on Fire” 2:37
Side two
1. “No Surrender” 4:00
2. “Bobby Jean” 3:46
3. “I’m Goin’ Down” 3:29
4. “Glory Days” 4:15
5. “Dancing in the Dark” 4:00
6. “My Hometown” 4:34

  1. 이 영화는 결국 1987년 Michael J. Fox 주연으로 Light of Day라는 이름으로 극장에 개봉되었다.

Just Got Paid

1988년 5월 28일 Johnny Kemp의 “Just Got Paid”가 빌보드 R&B 싱글 차트 1위에 올라 2주간 머문다. 핫100 차트에는 1988년 8월 13일 10위에 올랐다. 노래를 부른 Johnny Kemp와 동료 Teddy Riley, Gene Griffin 등이 함께 만든 이 노래는 바하마 출신의 이 R&B 싱어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히트곡이 되었다. Kemp는 자신의 동료인 Keith Sweat가 데뷔 앨범에서 프로듀서 Teddy Riley와 함께 일한 것을 계기로 자신의 앨범에도 Riley와 함께 일한다. 원래 이 곡은 Sweat의 앨범에 수록할 예정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Sweat이 앨범에 넣을 의사가 없음을 확인하고 Kemp가 자신의 앨범에 실었다. Kemp의 데뷔 앨범 “Secrets Of Flying”의 첫 싱글로 발매된 후 R&B 라디오에서 큰 인기를 누렸고 1989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그해의 R&B 싱글”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1 ‘N Sync 는 그들의 앨범 No Strings Attached에서 이곡을 리메이크했는데 우연히도 이 앨범의 프로듀서 역시 Teddy Riley였다.

뮤직비디오

  1. 하지만 이상은 Anita Baker의 “Giving You the Best That I Got” 에게 돌아갔다.

I Want Your S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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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be found at the following website: http://www.georgemichael.com, Fair use, Link

1987년 6월 3일 BBC는 Wham!의 프론트맨이었던 George Michael이 새로 내놓은 “I Want Your Sex”를 TV와 라디오에서 이틀 동안 방송하지 않았다. Michael의 솔로 데뷔 앨범 “Faith”의 첫 싱글로 발표된 이 곡은 Eddie Murphy의 코미디 “Beverly Hills Cop II”의 사운드트랙에도 사용됐다. BBC는 방송금지 사유로 음악과 비디오가 “너무 성적으로 도발적”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그리고 메시지는 일부일처제를 담고 있음에도1 실제로는 난혼(亂婚)을 조장하고 있다고 믿었다. 미국에서도 당시 AIDS 등에 대한 공포가 널리 퍼져있는 시대조류에 맞게 상당수의 방송국이 비슷한 이유로 방송을 거부했다. MTV는 Michael에게 그들의 낮방송에 틀 수 있도록 뮤직비디오를 편집해달라고 요청했다.2 CBS레코드사 역시 라디오 방송국에 “sex”라 외치는 부분을 “love”로 바꾼 버전을 제공했다. 이러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레코드는 영미 양국 차트에서 1위에 올랐다. “I Want Your Sex”는 영국 싱글 차트 3위, 빌보드 핫100 차트 2위에 올랐다.3 RIAA는 이 곡에 대해 플래티넘을 인증했다.

뮤직비디오

  1. 13분 10초에 달하는 익스텐디드 믹스의 제목은 Monogamy Mix다
  2. 뮤직비디오에는 당시 Michael의 여자친구였던 메이컵 아티스트 Kathy Jeung이 출연했다
  3. 당시 1위곡은 U2의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