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뮤지션

Frankie Goes To Hollywood

당시 팝피세대(팝을 듣던 어린거뜰)였던 우덜언 이를 통해 듀랜듀랜과 컬쳐클럽, 탐슨트윈스, 카자구구, 휴먼리그, 유리드미스 등등 이른 바 뉴웨이브 밴드들을 알게 되고, 이들의 힛곡을 흥얼거리며, 이들의 브로마이드를 방벽에 붙이기를 좋아했는데.. 보수적 제도권에 의해 철저하게 우덜에게 소외되고 외면당하고 가리워진 밴드가 있었어. 그들이 바로 공중파에선 전주도 들을 수 없었던 명작 [릴렉스(Relax)]를 부른‘후랭키 헐리웃가다(Frankie Goes To Hollywood)’야.(딴지일보의 Frankie Goes To Hollywood 소개 中에서)

전문보기

Private Lives

만약 공룡을 여러 시대로 나눌 수 있다면 뉴웨이브 밴드들도 그러하다. Private Lives 가 존재했던 시기는 확실히 뉴로맨틱스가 R&B와 모타운 사운드로부터 영감을 얻기 시작했던 80년대 중반에 해당하였다. Tears for Fears, Howard Jones, the Human League 와 같은 영국 아티스트들이 신디사이저에 기반을 둔 그들의 음악에 블루아이드쏘울의 요소들을 도입하는가 하면 Nik Kershaw, Paul Young, the Style Council 같은 이들은 아예 블루아이드쏘울을 전면적으로 차용하였다.

Private Lives 는 80년대 후반 Johnny Hates Jazz, Living in a Box 등과 같은 소피스티팝의 선구자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그룹은 거의 잊혀진 그룹이 되었다. 보컬 John Adams 와 키타를 맡은 Morris Michael 이 핵심적인 두 멤버로 자리잡았던 이 밴드는 댄스리듬과 쏘울풀한 감성에 기반을 둔 뉴웨이브 그루브를 바탕으로 사랑과 상실감에 관한 이야기를 노래했다. Fiction Factory의 Kevin Patterson 처럼 Adams 도 깊고 독특한 유럽 스타일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이 목소리는 그룹의 최고 히트곡 “Living in a World (Turned Upside Down)” – 난잡한 애정관계로 인해 괴로워 하고 마침내 자살을 생각하는 한 소녀에 관한 이 노래는 이 밴드가 노래하고자 하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 에서 가장 빛을 발하였다. “Living in a World” 는 전국적인 히트곡은 아니었지만 아름답고 슬픈 신디사이저 멜로디와 Adams 의 호소력있는 보컬로 말미암아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라디오 애청곡이 되었다.

1984년 밴드는 그들의 유일한 LP Prejudice & Pride 를 EMI 를 통해 내놓았다. 이 앨범에는 싱어 Kiki Dee 와 Kajagoogoo 의 베이시스트 Nick Beggs 등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상업적으로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고 그룹은 1986년 해체되었다. Adams 는 Tom Robinson 의 “Nothing Like the Real Thing” 을 프로듀스했다. 앨범의 희귀성과 뛰어난 음악성으로 말미암아 Prejudice & Pride 은 뉴웨이브의 열광적인 지지자들 사이에서 마치 클래식 자동차와 같은 콜렉터스아이템이 되었다.

Private Lives 가 뉴웨이브 뮤직씬에 미친 영향을 정확히 가늠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필리핀이나 일본에서의 그들에 대한 컬트적인 추종은 계속되고 있다.

디스코그래피

1984 Prejudice & Pride EMI

Track Listing

1 River to a Sea
2 No Chance You’ll Pay
3 Living in a World Adams
4 Stop
5 God Only Knows
6 Break the Chains
7 Don’t Wanna Cry (Any More)
8 Win (You’ve Got To)
9 Break the Whole Thing Down
10 Prejudice and Pride

뮤직비디오 보기
기타 싱글 디스코그래피 보기

Chris Frantz에게서 듣는 Talking Heads의 초기시절

Q : 로드아일랜드디자인스쿨에서 당신은(Chris Frantz) 어떻게 David Byrne 과 The Artistics를 조직하게 되었나요? 그리고 그 밴드는 Talking Heads와 비교할 때 어땠나요?

A : 차에 치이는 여자에 관한 학생영화를 만들면서 사운드트랙을 필요로 했던 Mark Kehoe라는 친구를 통해 David을 알게 되었죠. 그가 David와 내게 그 일을 맡겼어요. 우린 그 일을 썩 잘했고 그에게 밴드를 만들면 어떻겠냐고 물었죠. 그는 동의했고 우리는 다른 RISD 애들과 함께 The Artistics를 조직했죠. The Artistics에서 우리는 음악을 함께 만들었고, 몇몇 곡은 Talking Heads 연주목록이 되었어요.

Q : 그럼 그게 어떻게 Talking Heads로 발전했고 Modern Lovers 의 기타리스트였던 Jerry Harrison이 어떻게 그림 속에 들어왔죠?

A : Tina 와 나는 RISD를 졸업하고 그 해 9월 뉴욕으로 옮겼죠. David 는 벌써 와있었고요. 난 그에게 나와 함께 새 밴드를 조직할 생각이 없냐고 물었고 그는 이에 응했어요. 그래서 난 Tina가 우리와 비슷한 심미안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밴드에 합류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연주를 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들 때까지 일 년여를 함께 연습하고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그다음에 CBGB의 Hilly Kristal에게 오디션을 받으러갔죠. 그는 “음. 며칠 후에 너희들을 the Ramones 앞에 세울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트리오로 한 일 년 함께 한 후에, 키보드와 기타를 연주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합류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Tina와 내가 The Local이라는 Mickey Ruskin의 빠 들 중 한 군데에 있었는데, The Modern Lovers의 베이시스트 Ernie Brooks를 우연히 마주쳤어요. 난 Ernie의 삼촌이 내 아버지의 동업자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내 소개를 했고 Ernie는 나에게 Jerry에게 우리와 키보드 및 기타를 연주해주는 문제에 관해 전화할 것을 권했습니다. 그래서 난 그렇게 했죠. 그리고 Jerry가 솜씨가 더 나아지라는 것을 확신하는데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그가 적임자라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Q : 어떤 것이 Talking Heads의 중요한 과도기였다고 생각하시나요?

A : 계약을 안 한 밴드들의 CBGB 페스티발에 관한 The Village Voice의 기사에서 우리 사진이 첫 페이지에 오른 때가 큰 도약기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순간은 우리가 1977년 5월 The Ramones와 함께 유럽 및 영국으로 투어를 갔을 때죠.

Q : 1977년의 데뷔앨범 이후 어떻게 프로듀서 Brian Eno와 만났고 밴드가 더 나아가는데 어떠한 영향을 받았나요?

A : Brian은 첫 영국 공연인 런던 공연에 왔었고, 우리 음악을 프로듀스하고 싶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어요. 우리는 이미 그의 팬이었습니다. 생각하고 자시고도 없었죠.

Q : 80년대 초반부터 밴드는 아프리카의 리듬, 디스코-펑키, 그리고 다양한 표현들을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왜 the Stop Making Sense 영화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낸다고 생각하십니까?

A : 사실은 우리는 학창 시절부터 아프리칸, 더브레게(Dub reggae), 디스코 등을 들었었어요. 우리 스타일로 삼는 것에 시간이 걸렸을 뿐이고, 우리가 그렇게 했을 때는 우리 스타일이 된 거죠. 아프리카나 자메이카 밴드에게만 어울리는 것은 아니에요. Stop Making Sense는 길 위에서 우리의 재주와 모두가 관련된 뛰어난 작업들을 연마하느라 보낸 몇 년의 결과에요. 나 역시 여전히 좋아하는 필름입니다.

출처

Power Station

요즘 이들의 음악이 좋다. Robert Palmer의 기름진 목소리, 락적 요소가 많이 가미된 연주, 리드미컬한 드러밍. 공연을 보거나 합주를 하면 정말 재밌을 것 같은 곡들을 만들었던 그룹이다. 다시 재결합해서 한국에 공연을 올 수 있을까? 설마~

The Power Station in 1985. Top left: Robert Palmer; top right: John Taylor; bottom left: Tony Thompson; bottom right: Andy Taylor
By Unknown – Pelo #243, Public Domain, Link

수퍼그룹 Power Station은 Duran Duran의 John Taylor와 Andy Taylor, Chic의 드러머였던 Tony Thompson, 그리고 싱어 Robert Palmer로 구성되었다. 처음에 그것은 John의 아이디어였다. John은 그룹을 조직하기 전부터 Robert Palmer의 친구였고 그의 음악 스타일을 마음에 들어했다. 그의 당초 Power Station에 대한 오리지날 컨셉은 한 앨범에 여러 명의 싱어들이 노래하는 일종의 객원싱어 개념이었지만 단기간내 그런 프로젝트가 성사될지는 미지수였다.

한편 그 당시 John은 연인인 Bebe Buel이 T. Rex의 Bang a Gong (Get It On)을 리메이크했으면 하고 바랬다. 그래서 그들은 그 곡을 훵키버전으로 만들기 위해 Tony Thompson과 합류하였다. 그러나 John과 Bebe가 연인관계가 깨져버려 이는 무산되었다. 한편 John과 Andy는 이미 Some Like It Hot과 Murderess의 데모작업을 진행하였는데 Some Communication이라는 곡의 싱어로 Robert Palmer가 초대되었다. 마침내 Bernie Edwards는 전앨범에 Robert Palmer가 싱어로 참여할것을 제의했다.

1985년 2월 Power Station은 Saturday Night Live에서 데뷔무대를 가졌다. 3월말 Some Like It Hot이 영국챠트에 등장해 14위까지 올랐다. 그리고 미국에선 6위까지 올랐다. 앨범은 4월에 영미 챠트에 첫등장하였다. 그리고 이어 6월에는 Bang a Gong (Get It On)을 히트시켰다. 세번째 싱글은 Murderess였다.

애초 Power Station은 공연을 하지 않을 심산이었다. 그러나 연이은 상업적 성공으로 인해 공연에 대한 유혹은 너무 커져갔다. 그러나 Palmer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공연 10일째 되던 날 공연단을 떠났다. 공연투어의 싱어는 Silverhead란 그룹의 싱어였던 Michael Des Barres로 대체되었다. 그 당시 John은 이 프로젝트가 그리 맘에 들지 않았다. 당초 Duran Duran 의 Alter Ego의 개념으로 출발한 그룹이 너무 커져버렸기 때문이다.

가을에 그룹의 마지막 싱글인 Communication이 발매되었다. 미국에서는 Top 40에 들었지만 영국에서는 75위까지 오르는데 그쳤다. 전작의 성공에 비해서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공연도 차츰 시들어졌고 마침내 그룹은 그 종착점에 도달하였다. John Taylor는 Duran Duran으로 돌아갔지만 Andy Taylor는 솔로 활동을 위해 Duran Duran에 합류하지 않고 Sex Pistols의 기타리스트였던 Steve Jones와 공동작업에 들어갔다.

디스코그래피
1985 The Power Station 33 1/3 Capitol
1985 The Power Station Capitol
1996 Living in Fear Chrysalis

링크
Fan Page

Gangway

Gangway 는 1982년 코펜하겐에서 결성된 뉴웨이브 밴드다. 이 당시까지 밴드의 실질적인 리더인 Henrik Balling 은 코펜하겐 중심부의 한 대형 백화점인 Illum에서 따분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Allan Jensen 을 만났는데 그는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고 Gangway의 싱어가 되었다. 밴드의 세 번째 멤버인 드러머 Jan Christensen 은 음악잡지의 멤버 모집 광고를 보고 밴드를 찾아왔다.

1982년 12월 한 학교에서 데뷔 공연을 가졌다. 이당시 밴드명은 Unforced Error 였다. 그러나 Allan 이 크리스마스 시즌에 라디오에서 Julie Andrews 가 “gangway, gangway” 라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는 밴드명을 바꿔버렸다.이들의 초기 사운드는 The Cure 나 Echo & The Bunnymen의 영향을 받아 다소 어둡고 묵직하였다.

1983년 Gangway 는 덴마크 전역에서 다른 음악인들과 함께 순회공연을 가졌다. 이해 12월 밴드는 Hookfarm 스튜디오에서 “Half a year went by”의 마스터테잎을 녹음에 착수했다. 1984년 데뷔앨범 “THE TWIST”가 발매되었고 비평가의 호평을 받았다. 이 앨범은 영어로 된 덴마크 뮤지션의 앨범으로는 최초로 덴마크에서 1만 장 이상이 판매되었다.

1986년 2월 “SITTING IN THE PARK”를 – 놀랍게도 이 앨범은 단 3주 만에 녹음되었다. – 발매했는데 이 앨범에서 그들은 이전 앨범에서 보다 더욱 섬세한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다. 앨범에는 그들의 클래식 “My Girl and Me”와 New Musical Express 가 “Single of the week”로 선정한 “Once Bitten, Twice Shy” 등이 수록되어 있다.

1987년 “SITTING IN THE PARK (AGAIN!)” 이 발매되었는데 다소 복잡한 사연이 있었다. 이전까지 그들의 앨범을 내놓았던 Irmgardz 와의 불화로 인해 밴드는 PolyGram International 과 새로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그들은 영미권에 출사표를 내기위해 “SITTING IN THE PARK” 를 내놓고자 했으나 Irmgardz 는 그들에게 마스터테잎을 내놓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영국인 프로듀서 David Motion 와 함께 기존의 곡들에 좀 더 많은 색을 입힌 앨범을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SITTING IN THE PARK (AGAIN!)” 이다.

같은 해 폴리그램의 자회사인 London Records 를 통해 “My Girl and Me” 의 새로운 버전이 싱글로 발매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시기 회사에서는 Salt’n’Pepa 나 Glenn Medeiros 같은 이들의 히트곡으로 한껏 고양되어 있었기에 그들의 곡에 대한 마케팅은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태에 화가 난 폴리그램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밴드는 그만 영미권으로의 진출에 대한 열정이 식고 말았다. 1988년 7월 “Sitting in the Park (Again!)” 이 덴마크에서 발매되었다. 영국에서는 발매되지 않았다.

해외진출이 실패한 뒤 밴드는 매너리즘과 다툼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룹에서 늘상 있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폴리그램에 Michael Kastrupsen 란 친구가 등장한다. Gangway 의 음악을 아주 맘에 들어한 이 사나이는 1990년 밴드와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고 Henrik Balling 이 그동안 쓴 곡들을 녹음하게끔 한다. 마침내 1991년 그들은 “THE QUIET BOY ATE THE WHOLE CAKE” 를 내놓는다. 평론가 Per Juul Carlsen 은 이 앨범에 대해 “밴드의 음악이 너무 좋기에 결코 패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자신감과 열정에 차있는 음악”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상업적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실력으로는 영미권의 어느 밴드보다도 뛰어났던 이 덴마크 밴드는 그렇게 자신들의 재능을 상업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1980년대를 지내며 90년대까지 꾸준히 활동하다가 1998년 해체하였다. 한편 이들은 2006년 10월 코펜하겐에서 150명의 청중을 위해 깜짝 재결합 공연을
갖기도 했다.

디스코그래피

  • The Twist (1984)
  • Sitting in the Park (1986)
  • Sitting in the Park Again (1988)
  • The Quiet Boy Ate the Whole Cake (1991)
  • Happy Ever After (1992)
  • Optimism (1994)
  • That’s Life (1996)
  • Compendium (1998)

링크

Miles Fisher, 아침에 발견한 멋진 보물

아침부터 한 기발한 아티스트의 멋진 비디오를 보고 즐거워했는데, 배우이자 음악가인 Miles Fisher(1983년생)가 그 주인공이다. 그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위키피디어를 참고하시고 … 여기 그가 만든 기막힌 뮤직비디오를 먼저 감상하시길. Talking Heads의 This Must Be The Place(Naive Melody)가 Christian Bale의 American Psycho와 만나면 어떤 결과를 낳을까? 보시는 바와 같이 멋진 리메이크와 잔인한 해학이 만나며 기막힌 화학적 융합이 이루어졌다. 얼굴도 Christian Bale과 얼핏 닮아 그의 동생이라 해도 믿을 듯. 또 한편의 뮤직비디오는 80년대 팝과 당시의 코미디를 제대로 재현한, 이름도 노골적인 New Romance. 이 작품 역시 레트로와 영화적 구성, 그리고 잔인한 해학이 잘 어우러진 멋진 작품이다. 그의 홈페이지에서 음악도 무료로 다운로드받을 수 있으니 꼭 들르시도록.

뮤직비디오 보기

Icehouse

클래식을 배운 송라이터인 Iva Davies가 70년대에 Flowers라는 이름을 결성한 호주밴드에서 기원한다. Roxy Music 과 David Bowie에서 영향받은 이 밴드는 1980년 처음 ‘Can’t Help Myself’라는 히트곡을 낸다. 이듬해 같은 이름의 다른 미국 밴드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밴드 이름을 데뷔앨범의 제목이었던 Icehouse로 바꾼다. Iva Davies는 솔로 활동에 주력하기 위해 1982년 밴드를 해산했다가 라인업을 재정비하여 재결성한다. 1988년 그룹의 최고 히트곡인 ‘Electric Blue’가 미국 차트에 오른다.

소개하는 비디오는 The Kingdom은 Roxy Music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흔적이 남아있다. 흥미롭게도 역시 Roxy Music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또 하나의 80년대 밴드 Roaring Boys의 Heart of Stone과 분위기가 매우 흡사하다.

뮤직비디오

Tom Tom Club

Tina weymouth tom tom club.png
Tina weymouth tom tom club” by dmax3270; David T. McFarlane, Jr. – http://www.flickr.com/photos/mclink/1440807172/.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Tom Tom Club은 뉴욕 펑크씬의 선두주자 Talking Heads의 멤버 Chris Frantz(드럼), Tina Weymouth(베이스) 부부의 싸이드프로젝트 밴드이다. 그룹의 시작은 Frantz 부부가 휴가를 즐겼던 바하마에서 Monty Brown과 Stephen Stanley를 만나면서부터였다. 넷은 David Byrne과 Talking Heads가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스타일의 뮤직을 만들기 위해 뭉쳤다. 로맨틱하고 댄써블한 팝뮤직 스타일을 지향했던 이들은 1981년 데뷔앨범 Tom Tom Club이 골드앨범을 차지했고 이 앨범의 히트싱글 Genius Of Love는 이는 Talking Heads가 이전에도 이후에도 달성하지 못한 상업적인 성공 사례였다. 그들은 그러나 Talking Heads 활동을 계속해나가면서 Tom Tom Club을 지속시켜 나갔다. 심지어 Talking Heads의 명작 Stop Making Sense의 게스트로써 선보이기도 했다. Talking Heads가 1991년 해산하자 Tom Tom Club이 그들의 주된 활동무대가 되었다.

더 많은 정보

디스코그래피
1981 Tom Tom Club [Sire]
1983 Close to the Bone [Sire]
1988 Boom Boom Chi Boom Boom [Red Eye]
1991 Dark Sneak Love Action [Sire]
2000 The Good, The Bad and the Funky [Rykodisc]
2001 Good Bad Funky [Festival]
2010 Genius of Live
2012 Downtown Rockers

Thieves Like Us

오랜만에 아마존에서 CD 몇 장을 주문했다.

Passion Pit – Chunk of Change
Thieves Like Us – Play Music
Neon Indian – Psychic Chasms

이들 중에서 특히 주목하고 있는 밴드는 Thieves Like Us. 밴드 명에서 확 냄새나는 것은 New Order 필의 밴드가 아니냐 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밴드 명이 New Order 의 히트곡 중 하나와 같기 때문이다.(실제로 Radiohead는 밴드명을 그들이 존경하는 Talking Heads의 히트곡 제목에서 따왔다) AllMusic을 찾아보니 역시 짐작대로  New Order 의 곡에서 밴드명을 따온 것 같다. 노래 역시 New Order와 매우 흡사한 분위기다. 일렉트로닉에 기반을 둔 리드미칼한 멜로디, 약간은 떨리는 듯한 여린 보컬 – 얼핏 일렉트로닉한 Belle & Sebastian 이란 느낌도 난다 – 이 영락없이 어린 New Order의 분위기다. 그들의 곡 중 개인적으로 가장 맘에 드는 곡은 Drugs in My Body인데 예의 New Order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한편으로 후렴구가 Wire의 Eardrum Buzz의 일부분과 유사하긴 한데 한번 비교해보시길.

디스코그래피
2008 Play Music Shelflife
2010 Again & Again Shelflife

Drugs in My Body
Wire – Eardrum Buzz
홈페이지

English Beat, The

스카리바이벌 그룹 중 가장 선도적이고 주요한 그룹이라 할 수 있는 버밍햄 출신의 The English Beat는 1978년 결성되었다.(처음에 이들의 이름은 The Beat였으나 미국에서 같은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또다른 밴드때문에 이름을 바꿔야 했다.) 다인종으로 구성된 이 밴드는 기타를 맡은 Dave Wakeling과 래퍼 Ranking Roger가 번갈아가면서 보컬을 맡으면서 그들만의 독특한 사운드를 창조해갔다. 이들의 첫 히트싱글은 Smokey Robinson의 곡을 리메이크한 “Tears of a Clown”(예전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시트콤 ‘순풍산부인과‘의 인트로로 쓰이기도 했던 행진곡풍의 곡) 1980년 밴드는 Go-Feet라는 자신들만의 레이블을 만들어 데뷔 앨범 I Just Can’t Stop It을 내놓았다. 이 앨범에서는 “Mirror In The Bathroom”이 인기를 얻었다. 이들의 초기 히트곡 중에는 당시 영국 총리였던 대처를 비난한 “Stand Down Margaret”이 있었는데 이 곡에서 특징지울 수 있듯이 그들의 정치적 입장은 상당히 급진적이었고 공연 역시 그러했다. 1981년에 발표된 2집 Wha’ppen에서는 음악적으로 템포가 좀더 느려지고 보다 전통적인 레게 사운드에 중심을 두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음악적 선회는 전작의 상업적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보다 팝적인 음악을 추구했던 1982년의 3집 Special Beat Service는 미국팬들의 환호를 얻었는데 특히 “Save It for Later”와 같은 곡이 지속적으로 MTV의 전파를 탄데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밴드는 그 해 해산을 결정하였다. Wakeling과 Ranking은 General Public을 결성하였고 다른 멤버들인 Andy Cox와 David Steele은 Fine Young Cannibals를 조직하였다.

디스코그래피
1980 I Just Can’t Stop It [Sire]
1981 Wha’ppen? [Sire]
1982 Special Beat Service [Sire]
1991 The Beat Goes On [IRS]

링크
Fan S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