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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s Me Deadly

장뤽 고다르나 프랑수아 트뤼포 같은 누벨바그 감독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바 있는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의 1955년작. 느와르 필름의 최전성기에 만들어진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미키 스필레인 원작의 인기 탐정 마이크 해머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미스테리한 미녀의 죽음, 구사일생한 터프가이 탐정,그 터프가이를 배신하는 또다른 미스테리의 여인,그리고 그의 섹시한 여비서 등 거칠고 을씨년스러운 하드보일드 스릴러의 공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안티히어로에 팜므파탈이 동시에 등장하니 뭐 더 할말이 없다). 정신병원에서 탈출하였다는 크리스티나라는 여인을 태워준 탐정 마이크 해머는 그녀를 뒤따르던 악당들에게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고 난후 ‘나를 기억해 달라’는 크리스티나의 마지막 말을 힌트삼아 사건을 역추적 한다. 이 와중에 정체모를 악당들은 그를 을러대고 주위 사람들은 하나둘씩 죽어간다. 서로 죽고 죽이는 와중에 욕심 많은 여인의 호기심이 빚은 비극이 끔찍하면서도 자못 희극적이다.

p.s. 1) 이 영화의 일어제목은 어이없게도 『키스로 죽여줘キッスで殺せ!』 라고 한다.
2) 한편 한 영화사가에 따르면 미국개봉 판과 유럽개봉 판의 마지막 장면이 다르다고 한다.

Shadows And Fog

어느 사람에게어떤 영화를 싫어하냐고 했더니 ‘어두운 영화가 싫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슬픈 줄거리의 영화인줄 알았더니 그냥 화면이 어두운 영화를 두고 하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그는 이 영화를 절대 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안개 자욱한 밤거리에서 벌어진 하루 동안의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는 영화니깐 말이다. 시종일관 주의를 기울여보지 않으면 등장인물이 안보일 정도로 화면이 어둡다.

이유도 모른 채 동네 사람들에 의해 잠이 깬 클라인만(우디 알렌)은 동네 사람들이 계획한 연쇄살인범 체포 작전에 울며 겨자 먹기로 가담하지만 정작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는 알지도 못한다. 한편 동네 어귀의 서커스단에서는 칼을 집어 삼키는 여인 아이미(미아 패로우)가 그의 남편과 싸우고 집을 뛰쳐나와 버린다. 이후 등장인물들은 이런 저런 에피소드로 서로 얽히고설키는 관계가 된다.

마틴 스코세스 감독의 1985년작 After Hours, 토드 브라우닝의 Freaks, 그리고 칼리갈리 박사의 밀실이 한데 합쳐져 카프카의 소설에나 나옴직한 무대 세트에 옮겨 각색된 듯 한 작품으로 예의 우디 알렌의 신경쇠약적인 유머 – 칼을 삼켰을때 딸꾹질을 하면 어떻게 되느냐는 식의 – 와 셀 수 없을 정도의 카메오가 눈요기 거리(일 수도 있고 오히려 보다 지칠 수도 있)다.

Match Point

내가 우디 알렌에게 기대하는 두 가지 것, 즉 냉소적 유머와 뉴욕이 이 영화에는 없다. 그리고 영국식 악센트와 비극적인 사랑이 그 빈 공간을 채우고 있다. 나는 이 영화를 이틀에 걸쳐 감상했다. 전반부는 흔해 빠진 삼각관계의 연애담이다. 성공을 갈망하는 야심찬 젊은이, 그의 매력에 반한 부잣집 아가씨, 바람둥이인 그녀의 오빠, 그리고 야심찬 젊은이의 뜨거운 눈길을 견뎌야 하는 미국에서 온 금발의 ‘그녀의 오빠’의 애인. 후반부를 봐야 하는 이틀째 이대로 영화가 계속 상투적으로 간다면 우디 알렌의 영화라 할지라도 끝까지 참고 봐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면서 영화를 감상하였다. 결국 예상대로 빗나간 사랑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마침내 부잣집 아가씨 클로이와의 결혼하여 성공의 사다리를 타게 된 야심찬 젊은이 크리스는 사랑(love)과 욕망(lust)은 다른 것이라며 이미 남이 되어버린 ‘그녀의 오빠의 전(前)애인’ 노라 라이스와 육체적 유희에 빠져든다. 제어할 수 없는 심성의 소유자인 노라(그녀의 오빠의 애인)[스칼렛 요한슨]의 독기어린 이혼요구에 크리스는 드디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려는 생각을 하게된다. 결말은 이야기해줄 수 없지만 만약 내 예상대로 결말이 나지 않았더라면 대단히 실망스러웠을 뻔했다. 역시 우디 알렌만이 보여줄 수 있는 ‘냉소’가 있어야 ‘우디 알렌 표 영화’라는 스탬프를 찍을 수 있을터이니 말이다. 테니스공과 반지, 그리고 마약중독자의 커넥션이 이어지는 순간. 그러나 반드시 지적해야 할 한 장면. 그가 나 빗속을 뛰쳐나간 노라와 이를 뒤쫓아 간 크리스가 보리밭에서 격정에 휩싸여 섹스를 하는 그 장면이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둘 다 진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락한 장소도 아닌 비오는 보리밭에서 비에 축축이 젖었을 그 청바지를 정성과 시간을 들여 벗고도 여전히 정욕이 남아 있을 만큼 그렇게 그 둘이 뜨거웠을까 하는 의문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人狼(인랑;Jin-R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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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Roh-The-Wolf-Brigade” by May be found at the following website: http://www.movieposterdb.com/poster/567d14c5. Licensed under Wikipedia.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의 감독 오시이 마로루가 기획하고 각본을 쓰고 ‘아키라’, ‘공각기동대’의 캐릭터를 담당한 오키우라 히로유키가 감독한 1998년 작. 감독의 첫 연출작으로 포르투갈 판타스포르토 영화제, 캐나다 판타지아 영화제에서 “최우수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하는 등 화려한 수상경력을 가지고 있다. 영화는 전후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혼란한 일본사회에서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자치경, 수도경, 공안부라는 일종의 가상의 공안/첩보 조직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암투를 통해 조직논리와 인간성의 상실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공각기동대나 아키라를 연상시키는 리얼리즘적인 터치와 입체적인 시점 등을 통해 애니메이션이라기보다는 그림으로 표현된 극영화인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며 이러한 표현형식은 자못 심각한 작품의 주제와 잘 매치된다. 또한 ‘빨간 두건 소녀’의 동화를 다중적인 메타포로 활용하여 자칫 빤해 보이는 조직 내 암투의 단선구조를 보완하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한계로는 인간병기로 규정 지워진 특기대의 후세가 가지는 심적 갈등에 대한 묘사가 심도 깊지 못한 반면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할애해 체력안배에 실패했다는 느낌이고, 보다 근본적으로 그러한 주제는 굳이 일본의 전후 혼란상에 빗대지 않더라도 로보캅 등 허다한 SF 를 통해 이미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은 주제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Dawn Of The Dead

영화는 마치 국가연주 없는 국가대항전처럼 시작된다. 이미 좀비는 세상을 점령하고 있고 그 사실은 배우들도 알고 관객들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영화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감독 조지 로메로가 이 작품을 그가 10년 전에 만든 걸작 Night of the Living Dead 의 연장선상에 있는 일종의 2편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테판과 방송 일을 하는 여자 친구 프란세스, 그리고 경찰인 피터와 로저는 좀비들을 피해 더 안전한 곳으로 가기 위해 헬리콥터를 타고 북상한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차고 넘치는 좀비들로 인해 – 좀비들이 흔해짐에 따라 이제 어떤 사람들은 좀비들을 사냥감 또는 여흥거리로마저 생각하게 된다 – 여행길은 험난하다. 그 와중에 어느 대형쇼핑센터에서 휴식을 취하던 그들은 쇼핑센터를 탈취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좀비들을 소탕하고 쇼핑센터를 그들의 것으로 만들어 마치 The Quiet Earth 의 주인공처럼 물질적 풍요를 마음껏 누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내 악당들이 그들의 존재를 눈치 채고 쇼핑센터를 털 계획을 짠다.

영화에서도 설명되지만 좀비는 부두교에서 등장하는 죽었으나 저승으로 가지 못한 시체를 일컫는 말이다. 저주받은 죽음이라는 종교적 의미와 헐리웃과 만나 신종괴물로 둔갑하지만 그들은 다른 괴물들과 달리 굼뜨고 개념이 없는 그저 살아있는 시체일 뿐이다. 그런 그들로 세상이 가득차면 세상은 희망이 남아있을까? 이것이 살아남은 피터가 던지는 질문인데 그는 결국 희망 쪽을 택한다.

2004년 리메이크되었다.

King Kong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통해 컬트영화 전문 감독에서 일약 헐리웃 블록버스터의 거두로 떠오른 피터 잭슨이 고른 차기작은 1933년 만들어진 킹콩의 리메이크였다. 피터 잭슨이 왜 이 작품을 골랐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길이 없지만 아마도 어린 시절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이 스펙터클 무비를 만들 재력과 명성이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성공을 통해 이루어진 시점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킹콩의 오리지널 작품은 헐리웃 영화사에서 가장 독특한 캐릭터 중 하나인 거대한 고릴라를 내세워 영화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획득하였고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영화이다. 그렇지만 원래 온순하고 평화로운 종인 고릴라에 대한 어쩔 수 없는 – 다른 생명에 대한 애정을 그렸다는 점에서 선한 면모를 그리고는 있지만 결국은 괴수 영화의 주인공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되는 폭력성을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 편견을 필름에 담았기 때문에 무지한 대중은 한동안 고릴라를 난폭한 짐승으로 오인하였고 이로 인해 동물애호가들의 비판을 감수해야했다.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피터 잭슨이 이러한 동물에 대한 ‘정치적 올바름’ 이 대중문화에 어떻게 반영되는가가 비판적 영화관객들의 핫이슈가 된 시점에서 어떻게 킹콩을 묘사할 것인가 하는데 대한 호기심이 있었던 편이다. 결과적으로 봐서는 감독은 일단 일부 세세한 묘사를 제외하고는 원작을 충실히 재현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던 듯싶다. 오히려 그는 관객들의 동물에 대한 ‘정치적 올바름’ 이 온순한 유인원으로서의 고릴라와 난폭한 괴수로서의 ‘고릴라를 닮은’ 거대한 유인원을 구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듯싶다.(어쨌든 섬세한 컴퓨터그래픽 덕으로 킹콩의 보다 인간적인(?) 면모는 오리지널보다 두드러질 수 있었다)

영화 자체로 파고 들어가면 이 영화의 플롯 자체는 ‘미녀와 야수’에 괴수 영화를 짬뽕한 영화이다. 애초부터 맺어질 수 없었던 이상한 커플의 사랑이야기가 주조를 이루는 가운데 한 나락에 빠진 영화제작자의 욕망과 주위 인물들의 모험담이 결합되어 소위 ‘사랑과 야망, 그리고 모험’ 이 총망라된 버라이어티쇼로 재현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스케일의 영화는 당연하게도 1930년대보다는 21세기의 최첨단 영화제작 환경에서 보다 박진감 넘치게 재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예술적 상상력은 반드시 상상력의 빈 공간을 오감의 만족을 극대화시킴으로써 극대화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영화라는 매체가 없던 시절에도 사람들은 글로 표현된 매체만으로도 희열과 쾌락을 느낄 수 있는 상상력을 지니고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최첨단 기술을 통해 영화화되었다고 해서 원작에서 느끼는 희열을 반드시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요컨대 원작과 리메이크 중 어느 작품이 더 맘에 드는지는 순전히 개인의 몫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한혜숙의 구미호가 좋은지 고소영의 구미호가 좋은지가 개인의 몫인 것과 마찬가지다.

사실은 첨 글을 쓸 때 킹콩에서 감지할 수 있는 폭력적 자본주의에 대한 메타포에 대해 이야기할까 했으나 이런 유의 영화이야기는 이미 뻔한지라 생략.

Salaam Bombay!

혹자는 아기의 귀여운 몸동작이 어른들로 하여금 보호본능을 자극시켜 자신이 생존하기 위한 일종의 생존전략이라고들 말한다. 지나치게 냉소적인 말이지만 나름대로는 일리가 있는 말이다. 도대체 그 귀여움이라도 없었더라면 성가시고 귀찮기 만한 양육을 뭐 하러 자기 돈 들여가면서 떠안을 것인가? 그리고 사회는 이러한 양육을 부모로서의 신성한 의무로 이데올로기화시킨다. 안 그러면 이 사회의 존속은 불가능 할 테니까.

사회 절대다수의 가정이 이렇듯 자신의 피붙이에 대한 기본적인 부양의무를 어떻게 해서든 이행하려 노력하지만 때로는 자의이든 타의이든 양육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가정으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은 집단 수용시설에 들어가거나 거리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Mira Nair 의 1988년작 Salaam Bombay! 는 바로 이러한 거리의 아이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 영화이다.

어머니로부터 버림받고 몸을 의지하던 서커스단으로부터도 버림받은 크리슈나는 자연스럽게 인도의 대도시 봄베이의 거리를 거처로 삼는다. 창녀촌 주변의 노점상의 차를 배달하는 한편으로 이런 저런 육체노동으로 푼돈을 꼬박 꼬박 모으는 크리슈나의 꿈은 돈을 모아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가 500루피를 모으기 전에는 집에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을 하며 그를 떠났고 크리슈나는 이 말을 500루피를 모으면 어머니가 다시 그를 받아줄 것이라는 약속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한 가지 희망 때문에 온갖 악의 유혹이 넘쳐나는 거리에서 꿋꿋이 살아가지만 그런 연약한 소년을 경찰은 부랑아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집단 수용시설에 가둬버린다. 천신만고 끝에 수용시설을 탈출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수용시설 안보다 더 잔혹하다.

볼리우드라 불릴 만큼 현실과 동떨어진 당의정과 같은 환각적인 영화를 양산해내는 인도의 영화계에서 보기 드물게 리얼리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영화이면서 감정의 과잉으로 흐르지 않는 절제의 미덕을 보여주고 있다. 루이스 브뉘엘의 1950년 작 Los Olvidados 과 여러 면에서 비교될만한 수작이다. 인도의 영국의 합작 영화

Tokyo Fist

거대한 도시의 빌딩숲 안에서 바퀴벌레처럼 생존을 위해 쳇바퀴 인생을 사는 보험 세일즈맨은 항상 지쳐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자 친구와 관계를 가진지가 언제인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왜 사는지 모르는’ 인생인 쯔다는 우연히 후배(어떤 후배인지 모르겠다) 코지마를 만나면서 궤도를 이탈하기 시작한다. 권투선수인 코지마는 다짜고짜 집으로 찾아와 여자 친구 히주루를 넘본다. 이후 쯔다의 질투는 그의 가슴 속에 사라졌던 야성으로 변하고 애초에 완력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던 코지마에게 신나게 얻어터진다. 히주루는 난데없이 피어싱에 몰두하기 시작하더니 아예 거처를 코지마네로 옮겨버린다. 쯔다는 복수를 위해 코지마가 소속되어 있는 권투도장에 가서 권투를 시작한다. 복수심인지 질투심인지 변태성욕인지 모를 격렬한 감정들이 혼재된 채 등장인물들의 감정으로 표출되고 이러한 감정이 때로는 만용으로 때로는 소심함으로 때로는 비겁함으로 표현된다. 필터링된 화면이 아니었다면 폭력성에 있어 몇 배나 강도가 증가되었을 법 할 만큼 하드코어한 폭력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히주루의 피어싱과 금속이물질에 대한 집착은 마치 The Iron Man 을 연상시킨다.

The Iron Man 의 감독인 신야 츠카모토의 1995년작.

Rock School Vs School Of Rock

비슷한 제목의 이 두 영화는 전자가 실화에 기반을 둔 다큐멘터리라면 후자는 한바탕 웃자고 만든 코미디라는 사실을 빼놓고는 참 닮아 있다. 둘 다 십대 청소년들에게 락음악을 가르치는 선생(또는 가짜 선생)에 관한 이야기다. 먼저 Rock School 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중심인물은 필라델피아에서 9살부터 17살까지의 아이들에게 락음악을 가르치는 Paul Green School of Rock Music 의 설립자 Paul Green 에 관한 이야기다. 전통적인 학습법을 무시한 그의 무정부주의적인, 또는 펑크적인 가르침은 거침이 없고 격식도 없다. F**K 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다니는 이 거침없는 사내는 아이들을 쓰다듬고, 소리 지르고, 껴안아주는 부모이자 선생이자 친구의 역할을 자청한다. 마침내 실력을 갖추게 된 아이들은 Frank Zappa 의 팬들이 모여 꾸미는 Zappanale 에 출연하기 위해 독일로 향하고 공연을 성공리에 마친다. 음악을 통해 아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찾아준 한 사나이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한편 School Of Rock에서 스승을 자처한 사나이는 좀 더 비열한 목적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스테이지에서 오버하는데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타리스트 Dewey Finn(Jack Black)이 자신이 만든 밴드에서 쫓겨나고 친구의 이름을 빌어 대리교사로 출근한 곳은 그 지역 제일의 명문 초등학교. 학생들의 연주 실력을 몰래 훔쳐본 듀이는 아이들을 끌어 모아 밴드 콘테스트에 나가서 상금을 착복할 꿈을 꾸게 된다. 아이들에게는 학교의 비밀 프로젝트라고 속인 채 말이다. 결국 그의 이중생활은 폭로되지만 아이들은 콘테스트에 나가기 위해 학교를 탈출하게 된다. 결말은 뻔하지만 여기서 말하지는 않겠다. 스포일러 천국이 되기는 싫으니까. 여하튼 잭블랙의 능청스러운 코믹연기와 실제 밴드 생활을 통해 다듬어진 탄탄한 음악 실력이 잘 조화을 이루어 웃음과 즐거움을 안겨주는 수작 코미디이다. 두 영화 모두 락음악을 줄기에 놓고 진행되는 영화라 프랭크자파, 모던러버스 등 평소 잘 찾아듣지 않던 음악들이 선보여 청각적으로반갑고즐겁다.

Family Plot

만일 당신에게 일면식도 없는 백만장자 친척이 유산을 물려주겠다며 당신을 찾아 나섰다면 어떤 기분일까? 또는 어떻게 대응할 터인가? 영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엉터리 주술사가 백만장자의 속사정을 알고 상속자를 찾아주면 거금의 수수료를 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그 상속자를 찾아 나섰는데 그는 공교롭게도 ‘악의 화신’에 가까운 범죄자.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주술사와 그의 애인은 그를 찾아 나섰다가 곤욕을 치른다. 세상 바르게 살라는 메시지. 히치콕의 작품치고는 그 분위기가 충분히 음모스럽지 못한 탓인지 올무비의 평가는 그리 후하지 않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