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윈 콜린스 인터뷰 <상>

이 인터뷰는 영국의 음악평론가 사이먼 레이놀즈의 포스트 펑크 인터뷰 모음집 [Totally Wired]에 수록된 것이다. 책이 출간된지 얼마 되지 않았고 형식이 잡지가 아닌 책이라는 점 때문에 원문을 첨부하지 못하는 것을 양해바란다. 책은 아마존 등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인터뷰는 상/하로 나뉘어 포스팅 될 예정이다.

정확한 인터뷰 시기는 표기되어 있지 않다. 솔로 행보에 대한 질문이 많이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80년대 중후반에 수행된 인터뷰가 아닐까 한다.

에드윈 콜린스는 스코티시 트위 팝 씬의 가장 중요한 아이콘으로, 흔히 쟁글팝을 발명했다고 평가받는다. 자신의 밴드인 오렌지 주스가 해체된 이후에는 지속적인 솔로 활동을 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2005년에 두번의 심한 뇌졸중을 앓았다. 가족과 동료의 도움으로 2007년 복귀에 성공하였다.

이탤릭체로 표기된 것은 사이먼 레이놀즈의 질문이다.

당신은 이제 프로듀서 활동을 하고 있고 당신 소유의 스튜디오를 가지고 있지요. 그 때문에 음악의 신비로움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되었나요? 어떤 사운드를 어떻게 만드는지, 그걸 전문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 순수하게 음악감상을 하는데 방해물로 작용합니까?

그렇습니다. 음악가와 프로듀서는 모두 특별한 방식으로 음악을 듣습니다: 흩어져있는 사운드를 집어내지요. 베이스라인을 듣고요. 우울한 일이에요. 순수한 감상을 할 수 없게 되었거든요. 술에 취하거나, 배경음악을 들을 때에나, 음반을 한 덩어리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이상은 음반을 분석하기 시작해요. 하지만 포스트카드 (주: 오렌지 주스의 첫 레이블이자 글라스고 인디 씬의 주요 레이블)에 소속되어 있던 무렵부터 업질러진 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드러머였던 (주: 에드윈 콜린스의 밴드 오렌지 주스의 드러머) 스티븐 달리가 기자가 된 사실이 전혀 놀랍지가 않아요. 그는 우리들 중 가장 분석적인 사람이었거든요.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죠, ‘우-, 여기 이 소리가 정말 마음에 드는데, 다른 음반의 이 소리를 추출해다 그걸 섞을 수도 있고 말야.’ 샘플링이란 게 존재하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오렌지 주스 초기 싱글을 만들 무렵의 일이었죠.

오렌지 주스는 마치 포스트-펑크에 대한 반작용 같습니다 – 조이 디비전의 음울함과 분노, 또는 포스트-펑크의 계몽성에 반하는 것 말입니다. 당신은 사랑과 낭만으로의 회귀를 행했어요. 갱 오브 포나 스크리티 폴리티 같은 전임자들과는 다른 화법을 구사했죠. 그건 보다 편안하고 위트 넘치고 부드러운 사운드였어요.

스크리티 폴리티와는 캠든에서 함께 지내곤 했죠. 당시 그린은 (주: 스크리티 폴리티의 프론트맨인 그린 가트사이드) 흑인음악에 대해선 초짜였어요. 나에게 이런 실없는 물음을 던지곤 했죠, ‘해밀튼 보해넌이 누구야?’ 이게 1980년 후반의 일이었어요, 오렌지 주스의 첫 앨범이 나오기 전이요. 나중에 그린은 힙합에 완전히 빠져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의 흑인 음악은 버진 레코즈에서 많이 나왔습니다, 캔터베리 씬 같은 거요, 로버트 와이어트나 햇필드 앤 더 노스 말입니다. 그들은 목가적인 히피 스타일이었죠. 우리는 같은 프로듀서와 일을 했어요, 아담 키드론이라는 사람이었죠. 스크리티는 좋은 친구들이었지만, 그린이 엔엠이의 이언 펜먼과 인터뷰한 것은 거드름쟁이들의 싸움에 다름 아니었어요. 정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했죠! 그들은 데리다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구조주의, 기호학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멍청한 짓이에요. 그게 유용한 논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음악과도 관련이 없었다고 생각해요. 나는 그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 있었습니다. 나는 대학에 가지 않았는데요, 그건 의식적인 결정이었죠. 예술학교에 가긴 했는데, 그것조차도 대학은 아니었습니다; 디자인 학교였죠. 그곳에서 그린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났어요. 진보적 음악에 대한 자신의 호의를 최대한 드러내는 이들이요. 그리고 그건 일면 경쟁적이기도 했죠. 그린은 매우 경쟁적인 인텔리 친구입니다. 오렌지 주스의 기타리스트인, 제임스 커크는 대단히 말이 없는 친구지만, 독학파이고 그린이 언급하는 이야기를 모두 이해했어요. 하지만 그는 그냥 말을 아끼는 쪽을 택했어요. 스티븐 달리는 그보다는 말이 많았죠. 그래서 그린은 꽤나 생색을 내며 스티븐을 ‘오렌지 주스의 가장 똘똘한 멤버’라고 불렀습니다. 제 관점에서는, 이론과 기호학은 곡을 쓰는 데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어요; 좋은 문학작품만은 유용했습니다 – 플롯 구성, 인물, 사람들이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 같은 거요. 문학 평론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요; 시간 낭비입니다. 스크리티들의 아지트에서 뭉개며 제가 처음 접한 게 있는데요, 지금은 소위 ‘정치적 공정함’이라고 일컬어지는 그것입니다. 그들이 얘기하는 걸 들으며 나는 쟤들이 미쳤구나 생각했어요. ‘삽입 섹스를 하는 게 쿨한가?’ 이런 얘기를 했다구요!

하지만 오렌지 주스는 남성의 여성성이나, 非남성우월주의에 천착하지 않았던가요. ‘Simply Thrilled Honey’에서, 적극적으로 성을 구애하는 이는 여성이고 당신은 예민한 낭만주의자이죠,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잠자리도 같이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요. 오렌지 주스와 포스트카드는 나름의 성 정치학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요 –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천착하는 성 정치학이긴 했지만요. 당시의 글라스고에서는 그걸 이해하기가 더욱 쉬웠을 겁니다. 우리 부모님이 헤어지신 뒤에, 나는 이모와 이모부와 함께 살았는데요, 그들은 얼마 안 가, 나와 내 여동생에게 학을 떼었죠. 여동생은 그때 13살이었고 저는 15살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주말에는 이 우아한 남부 글라스고의 교외 생활에 우리를 끼워 맞췄습니다. 축구 경기라도 있는 토요일엔 정면충돌을 피할 수 없었죠. 70년대는 공격적인 시대였어요. 그래서 오렌지 주스의 이미지는 우리의 스코티시 동료에 반대하고, 특색 없는 펑크밴드에 반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오렌지 주스는 모두 글라스고의 상류층 교외지역인 비어스덴 출신인 거죠?

그렇습니다, 주택 단지가 있는 변두리 지역에 살긴 했지만요. 그게 내가 중간 계급 출신이긴 하지만, 내 어머니는 미술 학도였고, 아버지는 미술 교사였던 이유입니다.

대다수의 주요한 스코티시 포스트-펑크 밴드가 중간계급 출신이었다고 보아도 괜찮은 겁니까?

심플 마인즈는 전적으로 노동계급 출신이었죠. 하지만 조셉 케이는 상류계급 출신이었습니다.

거기에 당신의 가정환경은 문화적으로 풍족했고 약간은 자유분방한 편이었지요?

어떤 면에서는요. 나의 할아버지는 존 오그로츠에서 50마일 가량 남쪽에 있는 헬름스데일이라는 작은 마을 출신이었습니다. 그분은 16살에 글라스고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고향을 떠났고 스코틀랜드의 역대 최연소 교육부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종합적 교육 방식을 스코틀랜드 교육계에 도입시켰어요. 할머니는 나에게 러시아 문학과 스페인 문학을 접하게 해 주었구요. 그분은 인텔리지요, 그린과는 다른 부류긴 하지만요. 아흔 한살이시지만 지금도 얼마든지 그분과 현재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요. 그분은 저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게 당신이 록의 문학적 영역에 발을 디딘 이유입니까? 보위나 루 리드 같은 부류로요.

펑크시대 이전에, 난 프로그레시브 음악이나 컨셉 앨범 등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제플린처럼 너무 시끄러운 음악도 안 좋아했구요. 글램 록은 록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팝이기도 했습니다. 전 디스코 클럽이나 소울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는 것도 좋아했어요. 그런 음악에 대한 끔찍한 엘리트주의적 속물근성이 언제고 존재해왔습니다. 록이 보다 지적인 음악이란 생각이죠. 훵크와 소울이 쿨한 음악으로 여겨지던 80년대 초반에 조차, 게리 캠프 (주: 스팬도 발레의 기타리스트, 송라이터)는 이런 애길 했습니다, ‘음악적으로는 소울과 훵크를 취했고 거기에 지적인 가사를 덧붙였죠.’ 하지만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는 ‘Instinction’ 같은 멍청한 곡을 썼잖아요. 그리고 톰 벨에게 곡을 써 준, 린다 크리드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이런 가사를 썼습니다, ‘그는 작은 보조기구를 신고서 훵키하게 걸었어.’ 그 어떤 장르에서도 그런 가사를 쓰는 이는 없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화이트 라이엇 투어가 벌어졌을 때, 클래시가 아닌 서브웨이 섹트가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건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빅 고다드나 서브웨이 섹트가 당신에게 영향을 끼친 까닭은 무엇이었습니까?

기타리스트인 롭 시몬스는 펜더 머스탱을 사용했습니다. 고음부는 완전히 조여져 있었고 음정은 하나도 맞지가 않았죠. 당시에 그들의 음악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연주한 곡 중 하나인 ‘Parallel Lines’를 듣고 스윗의 ‘Fox on the Run’을 떠올렸어요. 그 곡은 제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이유는 이거예요, 서브웨이 섹트는 음악적으로 우리와 비슷한 수준이었다는 거죠.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 같은 밴드는 1976년에 펑크가 나오는 것을 보고 악기를 잡은 거잖아요. 이건 심플 마인즈처럼 연주능력이 훨씬 월등하고, 오랫동안 연주를 해 온 밴드와는 다른 속성을 갖는 것이었죠. 찰리 버칠은 오랫동안 기타를 연주해 왔지만, 나는 76년에야 기타를 잡았어요.

서브웨이 섹트는 야심찬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큰롤에 관한 모든 것에 반대한다’는 입장 말입니다: 로큰롤이 그 자신의 역사가 되어 사람들을 짓누른다. 젊은이들에겐 따분하기 짝이 없는 것이고, 명민한 이들이라면 그것에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했는데요,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저 웃음만 납니다. 이젠 빅과 아는 사이가 되었지만, 그땐 몰랐으니 그가 지금보다 더 괴팍하게 보였죠. 그는 후기 서브웨이 섹터에 스윙 음악을 도입했는데 이건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왝 클럽을 둘러싸고 ‘록음악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던 거야.’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죠. 그전의 서브웨이 섹트는 노던 소울의 영향을 받았었는데 이 시기의 음악은 한번도 녹음된 적이 없었습니다. 훌륭했던 필 세션을 제외하고는요. 그보다 더 전 단계의 서브웨이 섹트 음악은 텔레비전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고 이 또한 녹음된 적 없긴 마찬가지입니다. 그에겐 언제나 아이디어가 넘쳐났어요. 어떠한 정치성에 대한 합의가 있었고, 음악적으로는 최근 들어 모조나 언컷과 같은 잡지가 널리 알린 좋은 음악에 대한 합의가 있었습니다. 그건 코스텔로가 훌륭한 펑크 시인이라는 점이었어요. 물론 코스텔로의 가사는 빅의 가사에 비할 바가 못됩니다만은. 그다지 재기 발랄한 가사는 못 되죠.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회자되는 것이 1978년의 몇 달 동안, 서브웨이 섹트가 특별한 라인 업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 시기의 그들은 세계 최고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기의 라인 업으로 스튜디오 작업을 하지 않았고 덕분에 남아있는 자료가 없죠.

난 그 시기에 그들이 한 공연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포스트카드의 알란 혼은 보았죠. 그와 스티븐 달리가 런던에서 서브웨이 섹트의 부틀렉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거기에 ‘Holiday Hymn’이란 곡이 실려있었어요. 그 곡은 서브웨이 섹트가 한 번도 녹음 한 적 없는 곡이죠. 하지만 오렌지 주스가 그 곡을 커버했습니다.

오렌지 주스를 구상할 때 당신은 이미 서브웨이 섹트의 쨍그렁대는 예민한 사운드에 노출된 상태였어요. 그래서 빽빽하고 헤비한 사운드의 펑크에선 찾기 힘든 날 것의 사운드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그레치 기타가 그 생각을 구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말고 그레치를 사용하던 이들은 스트레이 캣츠였어요. 그들은 에디 코치런이 사용하던 희귀한 50년대산 그레치를 사용하고 있었죠. 나는 컨트리 젠틀맨을 구하려고 했습니다. 그건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Live 1969 게이트폴드 커버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서 루 리드가 컨트리 젠틀맨을 들고 있거든요. 난 그 앨범의 사운드를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그레치는 펜더의 맑은 사운드와 깁슨의 꺼끌꺼끌한 사운드를 모두 가지고 있죠. 또한 스타일과도 연관이 있었고, 또 브랜드 기타치곤 가격이 싼 편이었죠. 다른 이들이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도 있었구요. 또한 그 기타를 사용한다면 누군가는 벨벳과의 연관성을 눈치챌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스티븐은 이걸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우리 음악에 60년대의 감수성을 불어넣기 위해서 그레치를 사용하였습니다. 펑크의 열정과 템포를 유지하는 동시에 Live 1969에서 영향을 받은 리듬 기타 사운드를 거기다 섞는 거죠… 그리고 나일 로저스도요.

그래서 더욱 음역대가 높은 음악이 된 겁니까? 번쩍번쩍대는 사운드 말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번쩍거리는’ 음악은 로저 맥긴 같은 사운드예요. 그런 사운드를 추구한적도 있긴 합니다. 12현 기타를 사용한 ‘Simply Thrilled Honey’가 그 예지요. 벨벳 외에도 버즈와 버팔로 스프링필드에게서도 우리의 음악의 중추를 형성한 사운드에 대한 영감을 얻었죠. 예쁘장한 멜로디를 만들 땐 기타가 거치적거릴 때도 있어요. 파워 팝 무브먼트의 일원이었던 플리저스라는 그룹이 있었는데 이들은 마치 패브 포 (주: 비틀즈)처럼 차려 입곤 했습니다. 우린 그렇게까지 잡다하게 스타일을 뒤섞고 싶진 않았어요. 우리의 태도가 60년대로부터 영향을 받은 건 맞지만 그만큼 펑크에서도 영향을 받았거든요. 그 밖에도 디스코의 영향도 있었구요. 컨트리 앤 웨스턴의 영향도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선 알란 혼이 책임이 있죠. 알란은 모든 장르의 음악을 좋아했어요. 펑크 이전 시기의 지그재그 (주: 영국의 음악잡지)도 읽었구요. 그래서 서부 해안의 록 – 버팔로 스프링필드, 퀵실버 메신저 서비스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었죠. 알란은 백과사전식의 지식을 보유한 사람이에요.

당신과 알란은 한 때 좋은 친구였습니다.

여전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만, 요즘엔 연락을 주고 받진 않아요. 나보다는 내 아내인 그레이스가 그와 더 돈독한 관계였죠. 하지만 그는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오렌지 주스의 형성과정에 큰 영향을 끼쳤지요.

포스트카드에 있던 모든 밴드가 그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그의 취향을 받아들인 건 아니지만요. 내가 구상하고 제시한 것은 벨벳과 루 리드 그리고 글램 록이었죠. 보위를 정말 좋아했어요. 빅 포라는 잡지에서 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보위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재키라는 잡지도 사곤 했어요. 엔엠이도 가끔 보았지만 정말 가끔이었죠. 스티븐 달리는 록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엔엠이의 취향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렌지 주스의 다른 멤버들은 절대 디스코 클럽에 가지 않았지만 나는 달랐어요. 교회의 청년부 디스코 클럽부터 시작해서 셔플스라는 곳을 다녔죠. 1976년 무렵에, 스트레이트한 바지나 비달 사순 스타일의 앞머리 같은 초기 소울보이 스타일을 하고 디스코 클럽에 가면, 사람들이 싸움을 걸려고 했을 겁니다. 단지 스트레이트한 바지를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흠씬 두들겨 패려고 드는 거에요. 디스코 클럽에 있던 사람들은 흰색 반팔 셔츠와 얇은 타이를 하고 있었어요, 다들 풋내가 났죠. 셔플스에 있던 많은 이들이 동유럽 산 플라스틱 샌들을 신고 있었어요. 내가 오렌지 주스 활동을 하며 샌들을 신었던 건 그런 디스코 의상에 대한 되갚음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당신은 너구리 털 모자를 쓰곤 했죠, 그렇지 않습니까?

대다수의 것들을 육해군 상점에서 구했습니다. 너구리 털 모자도 그 중 하나에요. 단추가 달린 셔츠나 체크무늬 셔츠도 많이 입었죠. 런던에 위치한 플립 같은 가게에서 그런 것들을 팔았거든요. 난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의 스타일을 좋아했어요. 펫 사운즈의 커버 사진에서도 영감을 얻었습니다. 모드 스타일의 단추 달린 스웨이드 재킷 말입니다. 러빙 스푼풀이 입던 줄무니 셔츠도 차용했지요.

그러니까 그룹의 이미지를 여기 저기에서 가져다 붙인 거네요. 포스트 모던의 방식으로요. 마치 당신들의 음악과 같은 양상을 띠는 것 같습니다만?

그렇지는 않아요. 그 정도로 스타일을 의식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아’ 뭐 이런 식이었습니다. 알란은 한 때 펫 사운즈의 커버에 완전 빠져있었어요. 그에 대한 내 생각은 이랬습니다, ‘이게 좋은 표지인 건 맞는데 음악은 그런 패션과는 좀 거리를 둘 필요가 있지.’

조셉 케이의 맬컴 로스는 자신들이 상당히 신 청교도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깔끔한 모드 스타일에 – 약도 안 하고 술도 별로 안 마시는 그런 거요. 오렌지 주스는 어땠습니까?

술은 거의 마시지 않았습니다. 약도 안 했어요. 내가 술에 맛들이기 시작한 건 스물 두 살이 되던 무렵이었죠. 그리고 난 친목을 위해 술을 마시는 부류예요. 어머니는 두 잔 이상 못 드세요 – 그게 한계죠. 아버지는 이혼하시기 전 까진 술을 안 드셨어요. 술과 친한 환경이 아니었죠.

오렌지 주스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요소 중의 하나가 이런 파릇파릇한 얼굴의 천진난만함과 감성입니다. 로큰롤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이죠.

스티븐 달리에게 큰 영향을 까친 것은 줄리 버칠과 토니 파슨스의 책 The Boy Looked At Johnny였죠. 독특하고 비틀린 도덕성을 설파하는 책이었습니다: 스피드 (주: 각성제의 일종)는 괜찮지만, 마리화나는 안 돼. 데이브 맥컬로프와 한 오렌지 주스 초기 인터뷰에서, 맥컬로프는 포스트카드를 둘러싼 모든 것은 마크 E. 스미스 (주: 맨체스터의 포스트 펑크 밴드 The Fall의 프론트맨)가 신 청교도라 칭한 바로 그것과 같다고 했어요. 스미스가 비판적인 어조로 말했던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어요. 직설적인 가사가 아니라 알쏭달쏭하거든요. 하지만 엔엠이 독자 투고란을 보면 그게 마치 우리와 관련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맨체스터 씬의 일원이었던 틸러 보이즈와도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었구요. 그들의 팔랑대는 앞머리 때문이죠. 오렌지 주스가 글라스고보다는 맨체스터에서 인기가 있었던 게 이와 관련이 있을까 궁금했어요.

3 thoughts on “에드윈 콜린스 인터뷰 <상>

  1. sticky

    “소위 ‘정치적 공정함’이라고 일컬어지는 그것입니다. 그들이 얘기하는 걸 들으며 나는 쟤들이 미쳤구나 생각했어요”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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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chattenjager

      에드윈이 PC함에 집착하는(?) 이들을 놀려먹는 게 참 재미있어요ㅎㅎ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최소한 포스트 펑크의 진보적 형식미학을 추구하는 사람이고 그런면에서는 다들 같은 부류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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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Pingback: 80s Net » 에드윈 콜린스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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