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보관물: punk

Talking Heads / Talking Heads : 77 (1977)

Talking Heads 77.jpg
Talking Heads 77” by Sire Records – Original album.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Rolling Stone Magazine, 1977년 11월 3일 리뷰

Talking Heads의 놀랄만한 데뷔앨범

Talking Heads는 Patti Smith, the Ramones, 그리고 Television과 함께 CBGB를 이끄는 빅4 중 가장 신출내기이다. 그들의 데뷔는 절대적인 승리다. 공손하고도 낮게 깔린 음성의 음악과 공무원, 부모, 그리고 학교를 칭송하는 가사는 마치 세 명의 젊은 공화당원들 같아 보인다. Talking Heads는 펑크가 아니다. 그보다는 그들은 팝뮤직의 위대한 아이비리그적인 희망이다. 난 이처럼 생명력있고 상상력이 가득찬 앨범을 들어본 적이 없다. David Byrne의 음악은 세련미 넘치며, 매우 다양하고, 듣기에 재밌다.

그는 충동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곳이 없는 것처럼 도전적인,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옆길로 새면서 활발하고 팔팔했던 60년대의 후기 비틀즈적인 음악을 추구하고 있다. 이들은 Jonathan Richman 등의 초기 비평에서 미니멀리즘으로 분류된 밴드이다. Talking Heads는 정말로 그들 사운드의 경제성에 있어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순진한 Richman이 위험스러울만큼 까다롭게 굴었던 그 곳에 Talking Heads의 음악은 논센쓰가 없다는 점이다. Byrne의 키타 패턴, Jerry의 겸손한 키보드, Matina의 억제된 베이스, 그리고 Chris의 효과적이고 엄격한 드럼은 에너지를 터뜨리는 팽팽한 진지함을 전달하고 있다.

다른 그들의 노래처럼 ‘The Book I Read’는 흥분감으로 부풀어져 있고 억제력을 능가하는 팽창의 느낌이 있다. ‘Pulled Up’은 청각의 본성을 난폭하게 들뜨게 하는 진정한 챔피온이다. 보컬에 있어서, Byrne의 정력적인 개성은 창살안에서 포효하는 갇힌 호랑이처럼 한치도 틀림없는 음악적 틀을 진동시킨다.(그는 즉흥적이고 날카로운 ‘나쁜’ 음성으로 물에 빠진 사람이 호흡하려 애쓰는 것처럼 고음역을 움켜잡고 있다.) 사랑, 결단, 그리고 자아에 대한 욕망의 논리학과 상실감을 탐구하면서 그는 감정을 파악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형이상학자처럼 이음새를 더듬고 있다. 상대적으로 가사를 아끼고 있기 때문에 Byrne의 자라나고 있는 페르소나는 절대로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Psycho Killer’가 정력으로 고동치는 반면 ‘No Compassion’은 기분 나쁜 Lou Reed의 참을성 없음을 주장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직설적이고, 상쾌하고, 경쾌한 Talking Heads와 추상적이고, 억눌리지 않고, 불같은 Television은 각각 쉼없이 움직이는 70년대의 Beatles와 Rolling Stones라 할 수 있다. 이 앨범은 위대한 앨범일 뿐만 아니라 이 10년을 정의하는 앨범 중 하나이다.

나의 감상기

Talking Heads:77은 사실 내가 감상한 그들의 작품 중 비교적 늦게 접한 작품이다. 이 앨범에 수록되어 있는 곡들 중 상당수는 불법인쇄로 만들어진 The Name Of This Band is Talking Heads에서 이미 접했던 곡들이다. 이미 라이브 버전으로 익숙해져 있는 노래들을 스튜디오 버전으로 들었을 때의 느낌은 흥미롭게도 라이브 버전에서 느끼던 그대로의 생동감이었다. 간단한 악기 편성은 오히려 스튜디오 버전같지 않다는 느낌을 주었고 마치 음표를 무시하고 노래하는 듯한 David Byrne의 꺾기 창법이 그러한 현장감을 더해주었다. 비록 사람들이 이 앨범을 Punk장르로 분류하기는 했지만 이미 그들은 평범한 Punk의 본류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앞서 말했던 David의 꺾기 창법, 상상이 불가능할 정도로 이리 저리 튀는 멜로디(특히 Pulled Up에서의 하늘로 솟아 오르는 듯한 멜로디는 기가 막히다), 훵키한 키타리프(특히 New Feeling 에서), 리듬파트의 강조 등은 Ramones나 Jam류의 스트레이트 펑크 음악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

앨범 수록곡

  • Uh-Oh, Love Comes To Town
  • New Feeling
  • Tentative Decisions
  • Happy Day
  • Who Is It ?
  • No Compassion
  • The Book I Read
  • Don’t Worry About The Government
  • First Week/Last Week…Carefree
  • Psycho Killer
  • Pulled Up

밴드의 첫싱글 ‘Love Goes To Building On Fire’ 은 이 데뷔앨범에 수록되지 않았다.

Elvis Costello / My Aim Is True

MyAim isTrue.jpg
MyAim isTrue” by The cover art can be obtained from Stiff / Columbia / Demon/Rykodisc / Rhino / Hip-O.. Licensed under Wikipedia.

이 인텔리겐차 펑크 로커에 대한 국내에서의 지명도는 처절할 정도로 미약하다. `엘비스`의 이름에 `우디 앨런`의 외양을 한 코미디언 쯤으로 치부하는 사람들 조차 있을 정도이니 할말이 있을리 없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엘비스 코스텔로는`70년대를 출발하여 80년대를 거쳐 90년대 중반을 넘긴 현재까지도 활동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는 (허울만이 아닌)존경스런 고장 뮤지션이며 지칠줄 모르는 로커이다. 이 앨범은 `77년 발표된 그의 `역사적` 인 첫 번째 앨범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문화적이고 위트가 넘치는 그의 문장들은 평크 록의 수준을 한 단계 성숙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동시에 그 자신의 입지를 펑크 록의 한계로부터 끌어 올리는 역할을 하였다. 이 라스트에 그의 앨범이 세장이나 포진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박 은 석)

XTC

XTC bandphoto.jpg
XTC bandphoto” by Jean-Luc Ourlin – http://www.flickr.com/photos/jlacpo/5034883/.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매력적인 멜로디와 생명력이 깃든 포스트 펑크 (post punk)를 선사했던 XTC는 Talking Heads와 함께 “생각하는 사람들의 밴드”로 묶일수도 있었지만 두 그룹의 스타일은 비교할 수 없었다. 그룹은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에 영국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다. 멤버들은 대부분 영국 Swindon 지방의 노동자 계층으로 성장했는데 그곳에서는 목두들 정규교육을 팽개치고 팝 음악으로 경력을 쌓으려는 시도를 좋아했다.

Andy Patridge는 말타의 Mediterranean 섬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때 가족은 영국으로 이주했고 15살까지는 학교에 있었다. 그후 신문사에서 “Teaboy”로 일했고 일했고 그후에는 지방 기술대학에서 예술수업을 받았으며 남는 시간에는 집에서 혼자 기타를 배웠다. 거의 같은 시기에 Patridge와 같은 블럭에 살고있던 Colin Moulding은 우유배달 조합원, 일일노무자, 그리고 지방자치회에서 일하는 틈틈이 베이스 기타를 배우고 있었다. 드러머는 Terry Chambers로 정해졌는데 그는 15살때 독한 사과주를 너무 많이 마신 사건 때문에 학교를 뛰쳐 나왔다. 그 나이또래 아이들처럼 건설자재 상인이나 서판인쇄공 등의 여러가지 직업을 거쳐 일하면서도 음악적 성공에 대한 꿈을 갖고 있었다.

1976년 셋이 모여 XTC를 결성하기 이전에는 Star Park, The Helinum Kids, Skyscraper 그리고 Snakes 같은 다른 밴드에서 때로는 함께 때로는 떨어져서 연주를 했다. 그룹의 키보드 연주자로 Barry Andrews를 합류해 4인조로 활동했다. 1977년초, 그들은 Swindon 지역에서 지지기반 세력을 확보했다. 이러한 반응과 지방 비평가들이 쓴 호의적인 평론, 즉 열악한 10대 고용원들의 환경을 유머와 신랄한 비평을 조화시킨 밴드에 대한 칭찬에 힘입어 Patridge와 그의 친구들은 당시 펑크의 기세가 가득했던 영국으로 진출해야 될 때라고 느꼈다.

1977년 중반, Virgin Records와 계약을 맺고 10월에 데뷰싱글 “3 DEP”를 발표했고 이어서 79년에는 영국에서 Top 20 안에 든 “Making Plans For Nogel”을 비롯해 5곡의 싱글을 더 발표했다. 78년, Virgin Records는 밴드의 첫 앨범이자 2장의 영국식 앨범 White Music과 를 발매했고 둘 다 영국순위 Top 30을 기록했다.

밴드는 이 앨범들을 영국에서 시작해 일본, 호주, 뉴질랜드, 베네주엘라, 유럽대륙 드리고 종국에는 미국에까지 이어지는 거의 쉴틈없이 진행된 순회공연으로 홍보했다. 밴드가 미국에서 데뷔하게 된것은 1978년 새해전야에 Talking Heads가 참가하는 프로그램에서였다. 청중들의 반응은 79년 초에는 몇배로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을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또 레코드사에서는 그해말에 게획한 훨씬 야망있는 순회공연과 때를 맞춰 밴드의 미국시장 첫 앨범인 Drums And Wires가 나왔다. 그런일들이 있기전에 밴드는 Andrews가 탈퇴를 결심하자 재결성을 위해 잠시 Swindon에 돌아가야 했다. 그의 자리는 예전에 밴드와 함께 키보드를 연주했던 적이 있는 Dave Gregory가 넘겨받았다. 그의 전력은 Dean Gabber와 그의 Gabberdines에서 기타리스트와 키보디스트로 활동한 것을 꼽을수 있다.

새로운 결성도 여전히 영국 비평가들에게는 칭찬을 얻었다. New Musical Express에 기고한 Paul Morley는 “재치와 우아하고 다각적인 음악을 만드는… 그들의 음악은 새로운 형용사를 요구한다.” 라며 박차를 가하고 있는 밴드를 격려했다. Melody Maker의 John Orme는 Drums & Wire를 복합성, 대조, 풍부함 그리고 유머까지 XTC는 껍질을 부수고 새로운 땅을 개척했다.”라며 일컬으며 인상적인 작품이라고 했다. Patridge는 레코드사 약력에 이렇게 썼다. “난 환각의 시간에 대한 음악에 심취했고 그것을 마법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R&B에 마술을 섞은 종류의—이것이 진짜 우리가 하는 일이다… 난 사람들이 ‘오! 맙소사! 저게 뭐야?’라고 생각하는 음악을 좋아한다. XTC는 언제나 사람들이 ‘맙소사’ 라고 말하게 하고 그 모든것이 타당한 이유라고 본다.” 미국에서 가졌던 실황공연에 힘입어 앨범 Drums And Wires 는 밴드를 알고 있는 상당수의 미국 팬들을 확보했다. 뒤이은 걸작 Black Sea는 50위까지 올라갔다.

1981년 말이 되자 라이브를 계속 할 수 없는 몇가지 징조들이 밴드 멤버들 사이에 나타난다. Patridge의 경우에는 모든 종류의 군중들을 선천적으로 강하게 혐오하는 증세를 고치려고 애썼다. 밴드의 새앨범 English Settlement는 영국과 미국에서 동시 발매 됐는데 고향인 영국에서는 반응이 좋았으나 Black Sea가 얻었던 호응을 얻지 못했고, 아마도 그 이유를 공연홍보의 부족으로 여기는 듯했다. 1982년말, Terry Chambers는 활도의 빈곤함에 불만을 품고 호주의 새로운 목장을 찾아 그룹을 떠났다. 나머지 멤버들은 3인조로 활동할 것을 결정했다. 83년에 그들은 또다른 스튜디오 앨범을 제작하는데 어쿠스틱 연주가 강조된 것이었다. Murmur는 미국의 새로운 레이블인 Geffen Records에서 발매됐다. 앨범은 영국과 미국차트에 오르는데 그다지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았고 팬들 가운데에는 이전의 앨범에 비해 부드러눙 톤에 당혹해 할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1984년 밴드는 새로운 스튜디오 앨범을 편집하기 위해 햇병아리 시절의 Hard-Blues를 다시 추구하기 시작했다. Patridge는 “우리의 새앨범과 더불어 저도 심기일전하고 싶었어요. 음악은 훨씬 흥겨운 기분이 들겁니다. Murmer의 가사는 저희집 뒤뜰크기에 대한 아주 작은 목표를 담고 있어요. 새앨범 The Big Express는 우리에게 다시 세상을 둘러보게 한 더욱 Hard한 앨벙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앨범은 1984년 10월 미국의 Geffen에서 발매 되었는데 이것은 흥미는 있었지만 골수팬들을 빼고는 구매자들의 구미를 다시 돋구진 못했다. (1985년 <25 O’Clock>은 영국에서만 발매되었다.) Geffen의 간부들은 밴드의 중요성을 레리블처럼 다수의 록팬들에게 인식시켜야 한다는 확신을 표명하고 1986년에 새로운 앨범 Skylarking을 발매했다. 영국밖에서 그룹의 문제점들이 크게 부각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Patridge는 항상 낙천주의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는 Kristine McKenna(Los Angeles Times, 1982년 4월 4일자)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팝음악은 즐거움과 대학살로 가득합니다. 마이크를 구부리고 셔츠를 잘라 블라우스로 만들어 입죠. 우린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특별히 잘 생기지 않거나 셔츠를 잘라 만든 블라우스 타입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다른 목표가 잇었기 때문입니다. 음악이 문명을 바꿀수는 없지만 희망을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마 내가 고지식해서 그렇게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이 제가 바라는 일입니다.”

Punk 77.com

디스코그래피
White Music (1978)
Go2 (1978)
Drums And Wires (1979)
Black Sea (1980)
English Settlement (1982)
Mummer (1983)
The Big Express (1984)
Skylarking (1986)
Oranges And Lemons (1989)
Nosuch (1992)

링크
팬페이지
Weiv의 Skylarking Review
Lyrics
Italian Fan Page

Wire

Wire sept 2013.jpg
Wire sept 2013” by Fergus Kellyhttp://www.flickr.com/photos/55867717@N00/10017094715/.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1977년의 데뷔앨범 Pink Flag으로 이미 거장밴드로 등극한 Wire는 동시대의 펑크밴드들이 흉내내기 어려운 독특한 면을 가지고 있었다. 이 앨범에는 인스트리얼과 미니멀리즘적인 분위기를 강렬히 풍기는 Lowdown에서 초기 락앤롤의 명랑함이 담겨져 있는 파워팝 넘버 Mannequin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악적 지형을 40분이라는 짧은 플레이시간에 담아내는 뛰어난 음악적 역량을 선보였다. 이어진 Chairs Missing과 154은 전작만큼의 성과를 얻어내진 못하였지만 그들은 그룹의 음악적 역량을 꾸준히 확장시키고 세련되게 만들어갔다. 그룹의 컬트팬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는 와중인 1979년 Wire는 그들의 아이디어가 고갈되었다며 돌연 해체를 선언한다. 다양한 솔로 프로젝트로 여러 해를 보낸 밴드 멤버들은 1986년 재결성하여 다음 몇년동안 일련의 실험적인 팝레코드 시리즈를 내놓는다. 1987년 The Ideal Copy는 이전 작품과 다르게 신쓰팝적인 요소와 디지털 텍스춰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사운드적으로는 인상적인 기타리프와 그루브한 리듬파트가 New Order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하다. 비평은 호의적이었지만 이전만큼 열광적이진 않았다. 이때쯤 그들을 향한 컬트적인 호응은 점차 사그라들었고 Gotobed가 1991년 그룹을 떠났다. 남은 멤버들은 그룹의 이름에서 e를 뺀 Wir란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조용히 세간의 관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돌연 2001년 그들은 다시 스튜디오에 나타났고 2002년 6개의 트랙이 담긴 앨범 Read & Burn 01을 내놓았다.

1995년 Elastica는 그들의 힛싱글 Connection에 Wire의 곡 Three Girl Rhumba를 샘플링하기도 하였다.

멤버 : Art students Colin Newman (guitar, vocal), Bruce Gilbert (guitar), Graham Lewis (bass, vocal), and Robert Gotobed (b. Mark Field; drums)

디스코그래피
1977 Pink Flag [Restless]
1978 Chairs Missing [Restless]
1979 154 [Restless]
1981 Document and Eyewitness [live] [Mute]
1987 The Ideal Copy [Mute]
1988 A Bell Is a Cup…Until it Is Struck [Mute]
1989 It’s Beginning To & Back Again [Enigma]
1990 Manscape [Restless]
1991 The First Letter [Mute]
2002 Read and Burn, Vol. 1
2002 Read & Burn 01 [Pink Flag]

링크
Official Site
Wireviews
Pink Flag 전곡 가사

Talking Heads

Talking Heads band3.jpg
By <a rel=”nofollow” class=”external text” href=”https://www.flickr.com/photos/52489759@N00″>Jean-Luc</a> – originally posted to <a href=”//commons.wikimedia.org/wiki/Flickr” class=”mw-redirect” title=”Flickr”>Flickr</a> as <a rel=”nofollow” class=”external text” href=”https://www.flickr.com/photos/52489759@N00/12084638″>Talking Heads</a>, CC BY-SA 2.0, Link

David Byrne, Chris Frantz 와 Tina Weymouth는 70년대 중반 Rhode Island 디자인 스쿨에 다녔다.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카나다와 발티모어에서 자란 Byrne은 Revelateion이라는 이름의 스쿨밴드에서 그의 음악경력을 시작하였다. Byrne의 다음 모험은 좀더 진지한 것이었는데 아코디언 연주자인 Marc Kehoe와 함께 그는 발티모어와 샌프랜시스코의 아트스쿨과 레스토랑에서 Bizadi라는 밴드를 조직했다. Byrne은 Rhodes Island에서 Chris Frantz라는 드러머를 만나서 Artistics라는 밴드를 조직했다. 그들은 커버버젼을 주력했으나 Byrne은 그 와중에서 ‘Psycho Killer’, ‘I’m Not In Love’, ‘Warning Sign’ 같은 나중에 Talking Heads 시절 써먹은 노래를 만들었다. 그룹의 열렬한 팬 중에 한명은 바로 Tina Weymouth 였는데 후에 Frantz와 결혼하였다.

Artistics가 1974년 중반 해체된 이후 셋은 그들 스스로 밴드를 조직할 것을 고려하였다. Weymouth 는 베이스를 배웠고 이 세명의 졸업생은 New York 의 Lower East Side로 본거지를 옮겼다. 그곳에서 그들은 다른 예술학교 졸업생들처럼 창고에서 기숙하는 길을 걸었다. 트리오는 1975년 초반 진지하게 연습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주요 연습곡은 Byrne의 오리지날곡들과 버블검 사운드, 그리고 60년대 펑크락의 커버버젼이었다. 그 해 5월 그들이 연주하곤 했던 음악에 관한 선입견이 없을 만한 그런 이름, Talking Heads란 이름을 찾아냈다.

6월에 그들은 CBGB에서 Ramones 공연의 전 공연으로 데뷔공연을 가졌다. New York 은 그 당시 한 시절의 음악적인 폭발력의 한 중앙에 있었다. Patti Smith, Tom Velaine, Richard Hell이 이끄는 Television, 그리고 Ramones와 같은 아티스트들은 Brill Building의 사망 이후 미국락계의 메인스트림으로 나서고 있었고, 이러한 분위기는 Talking Heads에게는 매우 유익한 토양이 되었다. 트리오는 1976년 Beserkeley 레코드사를 위해 ‘Psycho Killer’, ‘First Week, Last Week/Carefree’, 그리고 ‘Artists Only’가 담긴 최초의 데모테잎을 만들었다. 이 데모테잎은 ‘1,2,3 red light’의 라이브 버전과 함께 80년 브트랙 EP에 실려있다. 이 테잎은 그들이 그들의 첫 앨범을 만든 시기에는 사라진 단순하고 일렉트릭한 매력이 살아있는 음악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중에 1976년 여름 데모 세션이 이어진다.

그리고 11월에는 Ramones와 Flamin’ Groovies같은 이들의 고향인 Sire와 계약을 체결했다. 12월에 그들은 New York에서 처음 발매된 그들의 첫싱글 ‘Love Goes To Building On Fire’/’New Feeling’을 녹음했다. 이 두 트랙은 ‘New Feeling’의 경우 그들의 데뷔앨범에 다시 삽입되었고 A면의 경우 Sire의 히트작 ‘New Wave’에 포함되긴 했지만 Talking Heads의 정식앨범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첫 싱글의 앨범재킷은 영국판의 경우 흔하지만 미국판의 경우 수집품목이 될만큼 귀하다. 그 싱글이 발매될 때 Talking Heads는 Jonathan Richman 이 빠졌던 오리지날 Modern Lovers 의 키타리스트였던 Jerry Harrison을 영입 4인조가 되어 있었다. 1976년 몇 번의 공연 후 그는 밴드에 합류하기로 동의했다. 이들은 유럽에서의 일련의 공연 이후 그들의 첫 LP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그룹은 4월에 바하마에서 그들의 두번째 LP More Songs About Buildings And Food를 녹음하기 위해 1978년 초반 유럽에서 돌아왔다.

디스코그래피
1977 TALKING HEADS 77 review
1978 MORE SONGS ABOUT BUILDING AND FOOD review
1979 FEAR OF MUSIC review
1979 LIVE ON TOUR 1979 review
1980 REMAIN IN LIGHT review
1982 THE NAME OF THIS BAND IS TALKING HEADS review
1983 SPEAKING IN TONGUES review
1984 STOP MAKING SENSE review
1985 LITTLE CREATURES review
1986 TRUE STORIES review
1988 NAKED review
1991 THE BEST OF: ONCE IN A LIFETIME review
1991 POPULAR FAVORITES: SAND IN THE VASELINE review
1999 12 x 12 review
1999 STOP MAKING SENSE 99 review

링크
Talking Heads Korea : New Feeling
The Name Of This Site is Talking-Heads

Siouxsie & the Banshees

Siouxsie and the banshees 79.jpg
Siouxsie and the banshees 79” by Polydor. Licensed under Wikipedia.

FORMED: 1976, London, England
DISBANDED: 1996

Siouxsie & the Banshees는 런던 펑크커뮤니티에서 뱉어낸 일련의 펑크밴드들중 가장 오래 살아남은 밴드 중 하나이다. 70년대와 80년대를 걸쳐 그들의 신경질적이고 원초적인 초기 싸운드는 스타일리쉬하고 세련된 음악으로 발전하였다.

수많은 멤버교체에도 불구하고 리더쉽은 Siouxsie Sioux(본명 Susan Dallion, 1958년 5월 27일생)에 의해 유지되었다. 최초의 라인업은 Sex Pistols의 팬들의 악명높은 그룹중 하나인 the Bromley Contingent에 속해있었다. 펑크무브먼트에 감동받은 Dallion은 이름을 Siouxsie로 바꾸고 1976년 9월 The Banshees를 조직한다. 멤버는 베이스에 Steve Severin, 키타 Marco Perroni, 드러머 John Simon Ritchie(AKA Sid Vicious)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그해말 런던의 100 Club에서 열린 The Legendary Punk Festival에서 데뷔공연을 갖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Vicious가 Sex Pistols로, Perroni는 Adam and the Ants로 옮겨버리고 말았다. 타의에 의해 듀오가 된 둘은 John McKay와 Kenny Morris를 각각 키타와 드럼에 보강하여 활동을 계속하였다. 1978년 데뷔싱글 Hong Kong Garden은 영국 챠트 탑텐에 올랐다. 으스스한 분위기가 대종을 이루는 데뷔앨범 The Scream도 그해말 출시되었다. 1979년에는 그들의 두번째 앨범 Join Hands를 위한 이틀간의 공연을 앞두고 갑작스레 McKay와 Morris가 팀을 이탈하였고 빈 라인업을 채우기 위해 Robert Smith(The Cure)와 Budgie(Big in Japan)가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Smith는 곧 The Cure로 돌아갔지만 Budgie는 The Banshees에 끝까지 남게 되었다.

1980년 Magazine의 전 키타리스트였던 John McGeoch와 함께 스튜디오로 돌아온 그들은 Kaleidoscope를 내놓았다. 이 앨범에서는 Happy House가 영국챠트를 강타하였고 앨범 역시 5위안에 드는 순항을 하였다. 이듬해 네번째 앨범 Juju와 싱글모음집 Once Upon A Time을 내놓은 이들은 The Creatures라는 싸이드 프로젝트를 진행시킨다. A Kiss in the Dreamhouse를 내놓은 1982년 돌연 McGeoch의 건강이 악화되었고 Smith가 잠시 그룹의 예정된 공연을 땜빵(!)하기 위해 그룹에 합류하였다. 1983년 런던의 Royal Albert Hall에서 열린 그들의 공연들이 Nocturne이란 이름의 라이브 앨범으로 발매되기도 하였고 Severin과 Smith는 The Glove라는 프로젝트밴드를 조직하여 Blue Sunshine이라는 LP를 내놓기도 하였다.

McGeoch는 건강이 회복된 후에도 밴드에 복귀하지 않았기 때문에 The Banshees는 Clock DVA라는 밴드에서 활동하던 John Carruthers를 영입하였다. 1986년에 내놓은 Tinderbox로 Siouxsie and the Banshees는 마침내 미국의 앨범챠트에 진입하게 된다. 이는 앨범 수록곡인 Cities in Dust의 빅히트에 힘입은바 크다. 커버버젼으로 채워진 앨범 Through the Looking Glass를 내놓은 후 이번에는 Carruthers가 그룹을 떠난다.(정말 뜨내기 밴드로군) 빈 자리는 Specimen이라는 밴드 출신의 Jon Klein이 채워졌고 키보드 Martin McCarrick이 보충되어 테크노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Peek-A-Boo를 전면에 내세운 Peep Show를 1988년 발표했다.

1991년 – 이해에 Sioux가 Budgie와 결혼했다. – The Banshees는 최초의 Lollapalooza 투어에서 공연하였다. 같은해 Superstition이 발매되었는데 그들의 앨범중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앨범이 되었으며 수록곡 Kiss Them for Me역시 큰 히트를 기록하였다. 1992년 Twice Upon A Time이후 1995년 The Rapture를 발매하기까지 그룹은 긴 휴식에 들어갔다. 1996년 그들의 히어로였던 Sex Pistols가 재조직되는 등 복고풍 열기속에서 그들은 그룹을 해산했다. Siouxie와 Budgie는 The Creatures를 주된 활동무대로 삼았고 Severin은 영화 Visions of Ecstasy의 삽입곡을 작곡하였다.

디스코그래피
1978 The Scream [Geffen]
1979 Join Hands [Geffen]
1980 Kaleidoscope [Geffen]
1981 Juju [Geffen]
1982 Kiss in the Dream House [Geffen]
1983 Nocturne [Geffen]
1984 Hyaena [Geffen]
1986 Tinderbox [Geffen]
1987 Through the Looking Glass [Geffen]
1988 Peep Show [Geffen]
1991 Superstition [Geffen]
1991 Peel Sessions [Dutch East]
1995 Rapture [Geffen]

링크
Siouxsie & the Banshees Home Page
Fan Page

Shelley, Pete

전설적인 펑크 밴드 the Buzzcocks의 리더였던 Pete Shelley는 실제로는 the Buzzcocks를 결성하기 2년전인 1974년에 첫 솔로앨범을 녹음했었다. 1979년 발표된 Sky Yen은 그가 이전에 몸담았던 그룹의 신랄한 키타팝과는 사뭇 다르게 일렉트로닉 음악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1981년 그룹이 해체된 이후 Shelley는 본격적으로 솔로경력을 쌓아나갔다. 1981년 발표된 Homosapien과 이듬해 발매된 XL1은 댄스뮤직 풍의 신스팝에 키타사운드가 많이 보강된 음악을 선보였다. 3년후 그의 마지막 솔로앨범 Heaven and the Sea를 내놓았으나 청중들을 사로잡는데는 실패했다. Shelley는 이후 Zip이라는 밴드에 잠시 몸담았다가 Zip의 해체이후 1988년 재결성된 the Buzzcocks에 가담한다.

디스코그래피
1979 Sky Yen Groovy
1980 Sky Yen Groovy
1981 Homosapien Grapevine
1983 XL 1 Grapevine
1986 Heaven & the Sea Mercury
1997 Homosapien [Razor & Tie] Razor & Tie

링크
Buzzcocks.com
Fan Page

Ramones, The

Ramones 1983 b.jpg
Ramones 1983 b” by en:User:Mrhyak – Uploaded as en:Image:1983 b.JPG on March 3 2007..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Formed : 1974 in New York, NY
Disbanded : 1996
Members : Joey Ramone, Dee Dee Ramone, Johnny Ramone, Marky Ramone, Tommy Ramone, Richie Ramone, C.J. Ramone

싱어 Joey Ramone이 불과 49세의 나이로 얼마전 세상을 떠났다. 이 자리에서 소위 DIY(Do-it-yourself) Punk Music의 선구자였던 고인의 명복을 빈다. The Ramones는 딱 알맞은 시기에 활동을 시작한 펑크뮤직의 선구자였다. 1970년대말 락씬은 극소수의 몇몇 밴드들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다. 그들의 음악은 갈수록 현학적/기교적이 되어 갔고 대다수의 무식한(?!) 락팬들에게는 이해불가한 상황이었다. New York에서는 이러한 분위기를 비웃는 새로운 조류가 생성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운동은 Television, Patti Smith, Talking Heads, 그리고 The Ramones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그들은 글래모러스한 옷차림이나 미끈하게 빠진 기성품스타일의 곡, 거창한 스태디엄쇼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소위 Rock Music의 근원(ROOTS) –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필자주) – 로 회귀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강렬한 싸운드의 Garage Band 스타일의 바로 그 Rock으로…. The Ramones는 바로 그러한 방향에 가장 충실한 싸운드를 들려주었던 밴드 중 하나이다. 그들의 음악은 통속적이었고 가사는 마약중독자와 같은 시시껄렁한 것들이었다. 어쩌다 가끔 쓰리코드를 벗어날 때도 있었고 길이는 3분을 넘지 않았다.(밴드 멤버들은 사실은 아주 긴 노랜데 빨리 연주해서 그렇다고 둘러댔다.) “I Wanna Be Sedated,” “Sheena Is A Punk Rocker,” “Beat on the Brat,” “The KKK Took My Baby Away” 와 같은 노래들이 잘 알려져 있지만 팝챠트에 등장한 적은 거의 없다. 탑40에 오른 노래는 한 곡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수많은 락커들이 그들을 언급하고 존경을 표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의 순수함(?)에 있다. 음악에 매몰되지 않고 음악으로부터도 소외되지 않았던 그들의 참다운 음악 사랑은 앨범 한장을 만들기 위해 투자된 돈으로는 계산되지 않는 그 무었이기 때문이다.

디스코그래피
1976 Ramones Sire
1977 The Leave Home Sire
1977 Rocket to Russia Sire
1978 Road to Ruin Sire
1979 It’s Alive Sire
1980 End of the Century Sire
1981 Pleasant Dreams Sire
1981 Rock ‘N’ Roll High School Sire
1983 Subterranean Jungle Sire
1985 Too Tough to Die Warner
1986 Animal Boy Sire
1987 Halfway to Sanity Sire
1989 Brain Drain Sire
1990 Pet Semetary Sire
1991 Loco Live Sire
1992 Mondo Bizarro Radioactive
1993 Acid Eaters Radioactive
1994 It’s Alive [Import] European
1995 Adios Amigos Radioactive
1996 Greatest Hits Live Radioactive
1997 We’re Outta Here! [live] Radioactive
1997 Ramones [Expanded Edition] Rhino
1997 Road To Ruin [Expanded] Rhino
1997 Leave Home [Expanded] Rhino
1997 Rocket To Russia [Expanded] Rhino

링크
The Official Site

Raincoats, The

 라인업 : Palmolive(d), Ana Da Silva(g), Gina Birch(b), Vicky Aspinall(g & violin)

The Raincoats는 ’70년대 말 Punk Rock의 폭발적인 인기를 주도했던 실험적인 밴드중 하나이다. 그들은 키타 주도의 Folk-rock의 미니멀리즘적인 접근을 통해 독자적이고 거친 싸운드를 들려주었다. 또한 이들은 특유의 페미니스트적 자세로 인해 열띤 지지를 얻었는데 가사 나용은 주로 남녀관계에 관한 여성의 정체성에 관한 공격적인 내용이었고 심지어는 강간을 소재로 삼기도 했다.

“락앤롤의 기본 주제는 남자와 여자간에 어떠한 일이 벌어지느냐 하는 것이에요”

라고 그들은 사자후를 토하며 락앤롤에서 전형화된 여성의 이미지를 타파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The Raincoats는 또한 최초로 멤버 전원이 여성으로 구성된 포스트 펑크밴드였는데 이는 ’70년대 말이나 ’80년대 초에도 그리 흔한 형태가 아니었다. 데뷔앨범을 내고 얼마지 않아 Palmolive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인도로 떠났다. 빈 자리는 Ingrid Weiss로 교체되었다. 일련의 몇장의 앨범을 통해 그들은 고향 영국에서 컬트팬들을 거느렸고 미국에서 소수의 청중을 얻었다. 그들은 활동을 시작한지 약 10년후인 1984년 해체하였다.

그리고 Alternative Rock 씬에서 우연한 기회에 재조명을 받게 되었다. 사연인즉슨 Nirvana의 앨범에서 Kurt Cobain이 그들을 언급하였고 Geffen은 The Raincoats의 저작권을 사들여 ’93년과 ’94년에 그들의 앨범을 재발매하게 된것이 그 계기였다. 밴드는 재결성되어 영국에서의 Nirvana의 공연에 동행하였다. ’94년 미국 순회 공연에 돌입하기전 그들은 Sonic Youth의 Steve Shelley가 프로듀스한 Looking in the Shadows는 발매하였다.

디스코그래피

1979 Fairytale in the Supermarket Rough Trade

1980 The Raincoats DGC
1981 Odyshape DGC
1983 Kitchen Tapes [live] ROIR
1984 Moving DGC
1996 Looking in the Shadows DGC

링크
Palmolive Fan Page
iMusic 관련 페이지

Pretenders, The

Pretenders Dec 81.JPG
Pretenders Dec 81” by OhconfuciusOwn work. Licensed under CC BY 3.0 via Wikimedia Commons.

미국 태생의 여성락아티스트, 크리시 하인드(Chrissie Hynde : 심플마인즈 짐커의 아내)가 이끄는 4인조 뉴웨이브 그룹 프리텐더즈의 탄생은 1979년에 이루어졌다. 수준높은 평론과 날카로운 비평으로 유명한 영국 팝계의 유력지 NME(New MusicalExpress)에서 음악평론을 쓴 바 있는 크리시 하인드는 1952년생으로 어릴 때부터 영국을 동경하여 1973년 고향인 아크론을 떠나 영국으로 건너갔다. 생계 유지를 위해 가게 점원으로 일하던 그녀는 우연히 NME지의 기고가 닉크 켄트를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하게 된다. 그의 추천으로 NME지에 글을 쓰게된 크리시는 날카로운 비평으로 인정받게 되고 오래지 않아 그녀 사진이 직접 음악을 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녀는 독자적인 레코드 회사를 설립해 운영하던 데이브 힐의 눈에 띄어 그의 후원 아래 멤버들을 모아 1979년 프리텐더즈를 조직하였다. 그 해 말 이들은 싱글 Stop Your Sobbing과 Brass In Pocket을 발표하였다. 막 인기를 얻기 시작하던 이들에게 시련이 닥쳐오는데 80년 6월 키타를 담당했던 James Scott이 갑자기 사망하더니 81년에는 그룹을 탈퇴했던 Peter Pardon역시 세상을 등지고 만다. 이러한 와중에 크리시는 딸을 출산하였고 싱글로 발표한 Back On The Chain Gang이 미국 챠트 5위까지 랭크되는 히트곡이 되었다. 이들 음악의 특징인 전형적인 뉴웨이브 싸운드에 60년대 말의 순수했던 락과 리듬앤블루스를 적절히 가미시킨 로맨틱한 싸운드를 구사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크리시 하인드의 청량감있는 보컬과 깔끔한 연주가 이러한 그들의 싸운드를 잘 뒷받침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디스코그래피
1980 Pretenders (Sire)
1981 Pretenders II (Sire)
1984 Learning to Crawl (Sire)
1986 Get Close (Sire)
198 The Pretenders Live (Warner)
1990 Packed! (Sire)
1994 Last of the Independents (Sire)
1995 The Isle of View [live] (Warner)
1999 Viva el Amor (Warner)

링크
팬페이지
Archives Co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