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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뮤지션이 말하는 너바나

Nirvana around 1992.jpg
Nirvana around 1992” by P.B. Rage from USA – More Kurt — too rad.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Thurston Moore (of Sonic Youth)

가장 인상에 남았던 너바나에 대한 경험은, 아마 처음으로 그들을 봤을 때였을 것이다. 그땐 5인조 밴드였으며 채드라는 소년이 드러머였다. 동해안에서의 첫 라이브였는데, 아직 SUB POP에서 싱글 한장밖에 발매하지 않았던 무렵이라서 별로 유명하지 않았고, 그래서 별
기대도 하지 않았었다. 흔히 보는 개리지(Garage) 밴드구나 하고…. 그런데, 정말 대단했다(웃음). 멋있고, 깔끔하고, 겉모습만 봐도 충격적이었다. 커트는 키가 작았고, 크리스는 엄청난 거구였고…. 세컨 기타리스트는 헤비메탈같은 사운드를 플레이했고. 아무튼 놀라웠다. 공연 막바지에는 기타를 빙빙 돌리거나 드럼세트를 때려부수기도 해서 깜작 놀랐다(웃음). 재밌고 거친 친구들이었다. 나중에 멤버들에게 『이렇게 기자재가 다 부서졌는데, 앞으로 투어를 어떻게 할 작정이냐?』하고 물었더니, 커트가 『음, 고쳐서 다시 쓰죠 뭐』하더라(웃음). 그리고 91년에 유럽투어를 했는데, 그때도 그들과 함께 순회했다. 그당시엔 그들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장발의 기타리스트는 해고되고, 새로운 드러머 데이브 그롤도 가입했다. 그래서 예전처럼 멋진 밴드가 되진 못하겠구나 하고 걱정되기도
했었는데, 투어 첫날밤 아일랜드에서의 공연에서 그들이 첫번째 연주하는 곡을 보고나서는, 그 걱정이 쓸데없는 기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전보다 10배정도는 멋있어졌던 것이다. 당시 그곡은 곧 나올 “NEVERMIND”에 수록된 노래였다. 그리고 그들은 대형 공연장에서 플레이하는 유명밴드가 되어갔다. 너바나는 어쨌든 솔직하고 거짓말을 못하는 진짜 밴드였다. 그래서 그들을 좋아했던 것이다. 그들은 당시 미국 젊은이들의 문화에서 누구도 표현하려 하지 않았던 부분을 표현했기때문이다. 당시엔 Guns N’ Roses같은 그룹이 큰 인기였는데(웃음), 그중에서 너바나는 리얼리티의 진수를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Guns N’ Roses들은 락계에서 잊혀져가는 존재가 되었다. 너바나가 이룬 가장 큰 업적은, 레코드 회사들이 획일적으로 만들어내는 락스타들의 넌센스적 구조를 일축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의미에서의 “얼터너티브”였다.

Elivs Costello

커트는 어쨌든 대단한 송라이터였고, 훌륭한 싱어이기도 했다. 그들의 힘은, 손길이 닿을 것 같으면서도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마음의 장벽을 부수고 손을 내미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노래와 가사를 수단삼아, 자신들에게조차 미지의 세계였던 눈앞의 정신세계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래서 그만큼 강력했던 것이다.

Ian Brown (of Stone Roses)

어쨌거나 커트의 노래는 훌륭했다. 존 레논 이래 최고의 보컬리스트가 아니었겠는가. 너바나와 STONE ROSES는 같은 Geffen레코드사 소속이었는데, 그가 사망한지 3일 뒤에 사무실에 갔더니 사람들이 모두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정도로 사랑받았던 사람이 왜그렇게 고독감을 품고 살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내가 정말 화나는 이유는, 그런 어린 딸을 남겨두고 자살해버린 일이다. 진짜 그녀석을 한대 후려갈겨주고 싶을 정도다.

Roddy Frame (of Aztec Camera)

그들이 영국의 심야 음악방송에 출연했을 때가 생각난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기자재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렸던 일이 인상적이었다(웃음). 그 후, 그들의 음악을 주의깊게 듣게 되었고,『괜찮은데!』하며 반하고 말았다. 그들이, 자신들이 일으켰던 현상에 탐닉하지 않았던 점에 상당한 호감을 가졌었다.

Moby

“NEVERMIND”가 마이클 잭슨을 밀어내고 1위가 됐을 때는, 정말 말도 아니었다. 세계가 바뀌었다는 걸 느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너바나가 나오기 전에 인기있던 그룹은 머틀리 크루, 밴 헤일런같은 장발 스타일의 밴드뿐이었다. 나머지는 팝계의 밀리 바닐리
정도였고. 그누구도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그렇게 성공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던 와중에 너바나의 인기는 급상승했다.’허스커 듀’나 ‘픽시즈’같은 그룹들은 전혀 팔리지 않았음에도, 너바나가 정상으로 뛰어오르는 바람에, 음악계가 하룻밤새 바뀌었다는 생각까지 들었었다.


Badly Drawn Boy

“NEVERMIND”는 대단한 앨범이다. 너바나를 듣기 전에는 PIXIES를 좋아했던지라, PIXIES쪽이 너바나보다도 중요한 밴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커트가 사망하고 나서부터, 역시 그의 존재가 전설로써 거대화되어 버렸다. 그러고보면 데이브 그롤도 멋진 친구다. FOO FIGHTERS에서 훌륭한 작품을 계속 만들고 있으니까. 유명한 밴드에 있었던 경력을 등에 업고, 그 후에도 멋진 작품을 계속해서 쏟아내고 있다. 커트가 인생의 고비를 넘을 수 없었던 것은 슬픈 일이지만, 너바나가 만들었던 레코드는 모든 세대의 사운드트랙이 됐지 않은가? 그것이 가능했던 밴드는 별로 많지 않다.

Noel Gallagher

커트 코베인은 엄청난 송라이터였다. 만약 그가 살아있다면, 제 2의 존 레논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가 음악에 대해 말했던 것, 음악업계에 대해 말했던 것은, 그 어떤 것이든 100% 다 들어맞았다. 실제로 그를 만나지 못했던
것은 정말 유감이다. 그래도 그와 나는 같은 왼손잡이였고(기타는 오른손잡이), 나와 마찬가지로 푸른 눈이었으며, 나와 같은 날에
태어났다. 그래서 커트 코베인은, 왠지 나와 무척 가까운 사이같이 느껴졌다. 어떤 점이 그들의 가장 큰 매력인지는 확실히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노래가 아닐까. 아니면 커트 자신일지도. 나는 그가 충분히 존 레논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Liam Gallagher

커트가 사망하고나서야 조금 흥미가 있던 정도였다. 뭐 상관없지 않은가? MTV 언플러그드를 봤는데, 그게 처음으로 그들의 음악을
제대로 들었던 때였다. 알고는 있었지만, 빌어먹을 긴머리를 하고서 시끄러운 소릴 내뱉고, 구질구질한 옷을 입은 녀석들이라니. 난 비틀즈가 더 좋다. MTV에서 어쿠스틱 기타로 연주하는 것을 보고, 나름대로 멋있다고는 생각했다. 몇몇 곡은 그냥저냥 들을만 하다고 생각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Anthony Kiedis (RHCP)

“Californication 에는, 우리가 커트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부분도 있다. 그녀석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녀석은 여러가지 면에서, 나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중요한 의미를 가진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그런 느낌으로 이곡을 쓰면서 커트를 생각했었다. 천국에 갔는지 안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석이 어느곳에 있던지간에 그곳에서 행복하게 지내길 바랬고, 만약 어딘가 다른 별에 산다면, 그별에서 만든 음악을 들려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우리들은 운좋게도 너바나와 함께 투어를 하곤 했으니까…. 그땐 정말 대단했다. 그리고 커트가 『In Utero』를 썼을 무렵 살고 있던 헐리우드 거리가, 그녀석에게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으리라고도 생각했었다.

Tim Wheeler (Ash)

1992년에 너바나가 벨파스트에 왔을 때 라이브를 본 적이 있다. 그것이 내인생을 커다랗게 바꾼 계기였다. 사실 그전에도 난 헤비메탈을 좋아했었는데, 너바나의 “NEVERMIND”를 듣고, 그때까지와는 다른 음악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 라이브가 끝난 후, 나는 커트와 코트니, 데이브 그롤에게 사인을 받았다! 근데 그걸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에게 줘버렸다(웃음). 그리곤 얼마 후 헤어졌지만(웃음). 사인을 받은 후, 거기 있던 한 젊은이가 입고 있던 스웨터를 본 코트니가 『커트, 저 스웨터 너무 멋있지 않아요? 우리한테 팔라고 하죠!』라고 말한 뒤 그남자에게 30파운드(약 6만원)를 주고 사는 장면을 바로 곁에서 봤다. 그게바로 저 유명한 적과 흑의 줄무늬 스웨터였다!

Beck

나는 너바나의 팬이었다. 그들이 성공하기 전부터였지만. 우리들사이에서는 좀더 메탈에 가까운 밴드로 인식되어 있었다고는 해도, 그당시 횡행했던 Guns N’ Roses스타일과는 다른, 좀더 예전의 Black Sabbath나 Cheap Trick 등과도 통하는 헤비한 메탈이었다. 게다가, 보다 더 예술지향주의였고…. 이른바 ‘아티스트’다운 면을 지니고 있었다. 단순하고 마초적인 락과는 근본적으로 틀린, 다른 종류의 좀더 비뚤어진 취향을 갖고 있었다. 우리들은 모두 그러한 매력에 푹 빠지게 된 것이리라. 그러던 어느날,『NEVERMIND』가 발매됐는데…. 거의 팝앨범같은 결과가 되어버렸고, 처음과는 너무나도 달랐기때문에 우리들은 약간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 결과조차도 받아들였고, 그리고 그들이 기폭제가 되어 돌파구를 열어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들이 이룬 업적은 어찌 그리도 참신했는지 다시금 돌이켜보게 만든다.
우리들 세대는 철이 들 무렵부터 이미 몇년 동안이나 음악이나 영화, 그밖의 모든 팝 문화를 이것저것 모두 떠안게 되었고, 어거지로 그것들을 그대로 주입당했다. 우리들은 그게 너무나도 싫어서 견딜 수 없었다. 우리들이 생각했던 것이나 세상에 대해 느꼈던 것들은, 당시 팝 문화에는 무엇하나 반영되어 있지 않았다고 생각되어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때에 너바나가 나와서 처음으로 우리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음악을 연주했고, 폭발시켰다. 그랬더니 갑자기 세상이 방향을 전환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아! 역시 아이들도 성장하고 있었구나.”라고. 우리들에게도 사생활이 있고, 나름대로의 자기표현 방법이 있다는 것을 그시대 어른들은 처음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DJ Shadow

대학교 2학년 무렵, 처음으로 “Smells Like Teen Spirit”의 비디오를 봤을 때 『와, 죽여준다』하고 놀랐었는데, Urban Radio라는 락이나 흑인음악 계열밖에 틀지 않았던 라디오 방송국이 그곡을 틀어주었다. 그런 현상을 만든 것 자체가 놀라웠다. 지금도 그런 풍조가 일어나면 좋을텐데. 너바나의 매력은 퍼블릭 에너미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노래불렀던 것을 정말로 믿고 있었다는 점에 있었다. 정말 그랬다. 그래서 커트가 죽었을 땐 무척 슬펐으며, 학교도 가지 않고 하루종일 MTV같은데서 뉴스를 봤던 추억이 있다.


Tom Waits

나도 너바나를 좋아했다. 『Bleach』에 수록된 노래들이, 어느 10대 소녀의 방 창문으로 쾅쾅 흘러나왔던 것이 기억난다. 그녀가 머리를 흔들면서 춤추고 있던 모습을 창문너머로 볼 수 있었다. 자살한 것은 유감이었다. 사람이 그런 극한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죽지않고 계속 활동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런데 커트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잖은가? 그가 남긴 최고의 유산이 그의 딸이길 바란다. 자식이야말로 평생 남는 것이고, 가장 소중한 것이기도 하다. 레코드는…. 어차피 레코드일 뿐이니까(웃음).

What does “Never Mind” mean now?  : Nirvana의 Never Mind발매 20주년을 기념하는 Spin의 특집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