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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aam Bombay!

혹자는 아기의 귀여운 몸동작이 어른들로 하여금 보호본능을 자극시켜 자신이 생존하기 위한 일종의 생존전략이라고들 말한다. 지나치게 냉소적인 말이지만 나름대로는 일리가 있는 말이다. 도대체 그 귀여움이라도 없었더라면 성가시고 귀찮기 만한 양육을 뭐 하러 자기 돈 들여가면서 떠안을 것인가? 그리고 사회는 이러한 양육을 부모로서의 신성한 의무로 이데올로기화시킨다. 안 그러면 이 사회의 존속은 불가능 할 테니까.

사회 절대다수의 가정이 이렇듯 자신의 피붙이에 대한 기본적인 부양의무를 어떻게 해서든 이행하려 노력하지만 때로는 자의이든 타의이든 양육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가정으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은 집단 수용시설에 들어가거나 거리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Mira Nair 의 1988년작 Salaam Bombay! 는 바로 이러한 거리의 아이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 영화이다.

어머니로부터 버림받고 몸을 의지하던 서커스단으로부터도 버림받은 크리슈나는 자연스럽게 인도의 대도시 봄베이의 거리를 거처로 삼는다. 창녀촌 주변의 노점상의 차를 배달하는 한편으로 이런 저런 육체노동으로 푼돈을 꼬박 꼬박 모으는 크리슈나의 꿈은 돈을 모아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가 500루피를 모으기 전에는 집에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을 하며 그를 떠났고 크리슈나는 이 말을 500루피를 모으면 어머니가 다시 그를 받아줄 것이라는 약속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한 가지 희망 때문에 온갖 악의 유혹이 넘쳐나는 거리에서 꿋꿋이 살아가지만 그런 연약한 소년을 경찰은 부랑아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집단 수용시설에 가둬버린다. 천신만고 끝에 수용시설을 탈출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수용시설 안보다 더 잔혹하다.

볼리우드라 불릴 만큼 현실과 동떨어진 당의정과 같은 환각적인 영화를 양산해내는 인도의 영화계에서 보기 드물게 리얼리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영화이면서 감정의 과잉으로 흐르지 않는 절제의 미덕을 보여주고 있다. 루이스 브뉘엘의 1950년 작 Los Olvidados 과 여러 면에서 비교될만한 수작이다. 인도의 영국의 합작 영화

Frontline: Ghosts of Rwanda

Frontline logo.png
Frontline logo” by PBS.org. Licensed under Wikipedia.

“르완다 분쟁은 소수파로서 지배층을 형성해 온 투치족과 다수파 피지배계층인 후투족간의 정권 쟁탈을 둘러싼 갈등이다. 양 부족은 외모 및 문화관습상 뚜렷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투치족은 15세기 나일강 유역에서 남하한 호전적인 유목민 출신으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온순한 성향을 보유한 후투족을 지배하여 왔다. 양 부족은 외모 및 문화관습에 뚜렷한 차이점으로 갖고 있다. 벨기에의 식민통치를 거쳐 소수 투치족에 의한 다수 후투족의 지배는 고착화되었다. 1962년까지 르완다를 위임통치한 벨기에는 소수부족인 투치족(14%)을 우대하여 지속적으로 지배계급으로의 위치를 공고히 하였고, 다수부족인 후투족(85%)을 통치시켰다.

1962년 7월 독립후(초대 대통령 G. Kayibanda)에도 투치족은 후투족을 강압 통치해 오면서 1963년 12월 후투족에 의해 약 2만명의 투치족이 희생당한 학살사건을 계기로 양대 부족간의 갈등이 심화 되어왔다. 1973년에는 후투족(J. Habyarimana 소장)이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인수, ’75년에 <국가발전혁명운동당, MRND>를 설립하여 일당독재 정부를 구축하였다. Habyarimana는 MRND 주도에 의해 ’78, ’83, ’88년에 일당독재 체제하에서 대통령으로 선임되어 소수 투치족을 억압해 왔다. ‘90.6월 하비야리만다 대통령은 다당제 민주주의 실천의도를 선언하였으나, 10월부터 난민화된 투치족은 RPF(르완다 애국전선)을 조직하고, 주변국인 우간다, 탄자니아를 거점으로 정부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함에 따라 내전이 본격적으로 발발하기 시작하였다.

1993년 8월 UN과 아프리카단결기구(OAU)의 중재로 약 2년에 걸친 내전 종식과 과도연립정부를 구성하는 아루샤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양 부족간에 구성된 잠정정부가 성립되었다. 1993년 10월 UN은 동협정의 이행 감시를 위해 2,500명의 평화유지군(UNAMIR)를 파견하였다. 1994년 1월 과도정부의 구성과 관련 아루샤 협정상 총리직에 투치족을 임명하도록 약속하였으나, 후투족 출신의 하비야리마나 대통령이 같은 후투족인 트와기라뭉구를 총리에 선임하자 RPF측은 과도내각 참여를 거부하여 정국의 불안은 지속되었다.“

미국의 공영방송의 Frontline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제작한 이 다큐멘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강대국의 ‘제멋대로 국경 긋기’의 피해자인 아프리카 대륙의 모순이 한데 응축되어 분출되어온 현장 르완다의 참상이 어떻게 발발했으며 그 가해자인 강대국의 외면 속에 어떻게 집단학살로 발전해나갔는지에 대한 담담한 회고이다.

카메라는 당시 이 사태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던 인물들을 찾아 그들의 증언을 녹취하였다. 매들린올브라이트의 증언, 코피아난의 증언, 당시 파견된 UN군 사령관, 미국인을 르완다에서 소개할 당시 이를 거부하고 르완다에 남아 피난민을 구출한 미국인의 증언, 그리고 참상의 치외법권 지역이라 할 수 있는 호텔을 근거지로 삼아 수많은 피난민을 구출한 UN군 장교의 에피소드 등이 소개되고 있다.

다큐멘터리는 몇몇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 부족 간의 학살, 그리고 미국의 외면 등을 집중 조명한다. 특히 다큐멘터리는 용감하게도 미국의 공영방송 PBS의 다큐멘터리임에도 자국 정부의 학살에 대한 외면을 피해확산의 주범으로 지목한다. 자국의 이익이 걸린 곳에는 불법적으로라도 개입하면서 이익이 관철되지 않는 곳에는 개입을 하지 않는 미행정부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에릭홉스봄에 의하면 20세기는 인류의 역사 중 가장 잔혹하고 몰인정한 학살의 세기였다. 전쟁 중에 그만큼 민간인이 학살당한 사례가 이전에는 없었으며 이러한 사실은 첨단기술로 무장한 군사력과 자국의 이익이 발맞추어 철저히 진실을 은폐하는 언론에 의해 정당화되었던 ‘야만의 세기’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Frontline 의 이러한 용기있는 작품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한줄기 실낱같은 희망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Match Factory Girl

아키카우리마스키(Aki Kaurismäki)의 유머감각은 그의 고향 핀란드의 날씨만큼이나 냉소적이다. 성냥공장에서 일하며 빈둥거리며 세월을 죽이는 그의 부모를 공양하는 불쌍한 소녀가장도 욕정은 있다는 것이 이 영화의 주된 줄거리다. 예쁜 옷을 부모 몰래 사서 술집에 가서 남자들의 접근을 기다리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연민보다는 차라리 유치함을 느낀다. 그렇지만 아무리 신분이 천하다 하여, 외모가 보잘 것 없다하여 그의 이성에 대한 낭만적 사랑의 열망이 폄하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꼬부랑 노인에게도 성욕은 당연한 권리이듯이). 그럼에도 그에게 접근하여 하루를 보낸 남자는 그를 하룻밤 여흥으로 치부해버리고 상황은 점점 꼬여간다. 대사가 하도 띄엄띄엄 있어서 적막감이 흐르는 영화다. 핀란드/스웨덴 공동작업으로 1989년 작.

[펌:아도니스]웰컴 투 사라예보

웰컴 투 사라예보 (Welcome To Sarajevo, Michael Winterbottom, 1997)

개인적으로 지금 영국에서 가장 주목하는 감독은 뭐니뭐니해도 마이클 윈터바텀입니다. ‘쥬드’에 한 방 먹어서 한 해 동안 얼얼하게 만들었으니까요. 바늘 한 뜸 들어가지 않을 정도의 완벽할 것 같은 컷 구사 능력에 잔뜩 매료됐었지요. 대체 이 감독이 누군가 싶어 그때부터 찾고 다녔어요. 안타깝게도 영국 영화제가 열릴 동안 뭔가 다른 일이 있어서 ‘더 클레임’밖에는 보지 못했습니다. 더 안타깝게도 영국 배우의 자존심 피터 뮬란과 제가 좋아하는 밀라 요보비치 양이 나왔음에도 그 영화는 제 기대를 만족시키주지 못했었습니다.

이미 비디오를 출시되었다는 ‘광끼’랑 ‘버터플라이 키스’를 찾고 다니느라 수유리 일대를 뒤졌지만 허사. 그는 지금 돈이 생기면 제가 사야 봐야 할 DVD 1순위. 아트 하우스에 경도된 국내 씨네마텍 경향에도 불만입니다. 윈터바텀, 아키 카우리스마끼, 예지 스콜리모우스키 등 현실 발언들을 한 감독들도 좀 불러들였으면 좋겠단 바램입니다.

마이클 윈터바텀은 다소 노쇄해 보이는 듯한 켄 로치를 대신할 차세대 영국 좌파 감독으로서 손색이 없다는 평가입니다. 이미 ‘웰컴 투 사라예보’와 아프가니스탄 난민에 대한 영화 ‘인 디스 월드’로 그 진가를 발휘하기도 했지요. 가장 최근에 만든 영화는 ‘코드 46’인데, 팀 로빈슨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에는 쏙 들어오지 않더군요.

제가 그의 영화들 중에 가장 보고 싶어하는 영화는 ‘광끼’, ‘버터플라이 키스’, ‘원더랜드’와 같은 초기작들과 ‘인 디스 월드’입니다. 대체 ‘인 디스 월드’는 국내에 들어오기나 한답니까? 나중에 DVD 구입할 때 이 양반 리스트를 몽땅 구입하고 싶어요. 현재 ‘24 Hour Party People‘은 구해놨는데 못 보고 있습니다.

보스니아 내전에 관한 이야기여서 미루다 미루다 이제서야 본 ‘웰컴 투 사라예보’는 제 게으름을 난도질하는 통증이 있는 영화군요. 보스니아 내전 현장에 들어가 살아 있는 영상을 만든 그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사라예보 소녀를 영국으로 데려온 어느 기자의 눈을 통해, 제노사이드의 어떤 흔적도 없다며 20세기 최대의 인종청소 전쟁을 방관했던 서유럽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실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다큐와 픽션이 뒤섞여져 있는데, 너무 처참해서 눈을 돌리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전세계 비극의 현장을 돌며 디지털 카메라를 들이대는 분들을 보면 한없이 왜소해지는 기분이 듭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푼수없이 또 울게 되더군요. 사라예보 산 꼭대기에서 공연이 펼쳐집니다. ‘사라예보를 구하자’라는 플랭카드가 붙여 있고, 혼자 남자가 첼로를 켜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알비노니의 ‘현과 오르간을 위한 아다지오’. 며칠 전 타계한 수잔 손택도 문뜩 생각나더군요. 평화를 바라며 전쟁 중인 사라예보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했던 그녀가 당시 남긴 말은 ‘실제의 포탄 소리는 텔레비젼에서 듣는 것보다 크다.’

2005-01-02

http://www.jinbonuri.com/bbs/zboard.php?id=haeuso&page=1&sn1=&divpage=5&sn=on&ss=off&sc=off&keyword=아도니스&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2644

Onibus 174

2000년 6월 브라질의 리오데자네이로에서는 충격적인 인질극이 벌어진다. 대낮에 다운타운을 지나가던 시내버스에 약에 취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 젊은이가 승객들을 대상으로 인질극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수많은 사람들과 방송카메라가 몰려들었고 인질극은 전국에 생중계되는 초유의 사태로 발전했다. 바로 이 인질극의 시작부터 비극적인 종말까지 감독은 인질범 산드로의 개인사적인 비극에서부터 사회구조적인 모순 등을 다양한 각도로 조명한다. 인질, 당시 경찰, 산드로의 가족, 거리의 친구들 등 관련인물들의 심층취재를 통해서 주관적 연민이나 편견을 배제한 채 인질극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결국 그는 사회로부터 폭력을 배웠고 사회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휘두른 주먹에 맞은 이는 정작 맞아야 할 그 누군가가 아니라 함께 주먹을 휘둘렀어야 할 또다른 희생자였을 뿐이다. 인질극 생중계라는 흔치 않은 소재의 다큐멘타리

Soy Cuba

Soy Cuba(“나는 쿠바다”라는 뜻)는 네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영화이다. 쿠바혁명 이후 쿠바 혁명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은 착취당하고 있던 쿠바를 대표하는 전형들이었다.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젊은 여인, 하루아침에 땅에서 쫓겨 난 농민, 혁명을 위해 헌신하는 학생 등 갖가지 삶의 군상이 비춰지지만 이들은 하나같이 제3세계 식민지라는 구조적 질곡에 몸부림치는 소시민들이다. 결국 이 영화는 혁명의 결과를 묘사하진 않지만 학생투사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몰려든 군중이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든 농민들의 모습에서 결과의 단초를 말해주고 있다. 정치적 이유에서가 아니더라도 그 형식의 탁월함이나 마술 같은 영상 자체로도 걸작의 반열에 올려놓을 만하지만 미국에서는 오랜 기간 상영금지 목록에 올라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