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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잃어버린 얼굴(The Bourne Identity,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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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dlum – The Bourne Identity Coverart” by From Amazon.. Licensed under Fair use via Wikipedia.

Robert Ludlum이 1980년 발표한 스파이 스릴러로 원제는 그 유명한 The Bourne Identity다. Jason Bourne이라는 기억을 잃은 채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사나이의 모험과 사랑을 그린 작품으로 이후 The Bourne Supremacy(1986년), The Bourne Ultimatum(1990년)까지 총 3부작의 서막을 알리는 작품이다.

비록 2002년 동명의 영화가 개봉되기는 했지만 이 영화는 사실 원작에서 ‘기억상실증에 걸린 전직 킬러’라는 설정만을 따왔을 뿐 이야기는 상당부분 원작과 다르다. 이렇듯 원작과 영화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첫째, 복잡한 내러티브의 원작을 한정된 상영시간의 영화에 담을 수 없는 점. 둘째, 냉정시대를 배경으로 한 원작을 2002년이라는 시간적 배경으로 옮기기에는 관객들의 정서가 많이 달라졌다는 점. 셋째, 위 둘의 이유와 연장선상에서 Carlos라는 Bourne의 천적을 영화에서는 제외시킬 필요가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원작에서 등장하는 Carlos는 Carlos Jackal이라 알려진 실존인물 Ilich Ramirez Sanchez을 염두에 둔 캐릭터다. 이 작품에서 Bourne은 냉전시대 악명 높은 극좌 테러리스트였던 그와 라이벌로 등장한다. 그리고 영화에서 암살작전의 암호명이었던 트레이드스톤은 바로 Carlos의 검거작전의 암호명이다. 이러한 구도로 인해 원작은 선악의 경계가 모호했던 영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선악의 구도를 명확히 하고 있다. 또 하나 차이가 나는 캐릭터는 바로 Marie의 존재감이다. 영화에서 수동적이고 어찌 보면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던 Marie는 원작에서 적극적으로 Bourne의 정체성을 찾아주려는 똑똑한 경제학 박사로 등장한다. 그녀의 본업이 국제금융투기집단의 횡포를 막으려는 캐나다 정부요원이라는 설정도 흥미롭다.

요컨대 짧은 상영시간의 영화에 담을 수 없었던 많은 디테일들이 소설에는 담겨져 있으므로 영화를 재밌게 본 분이라면 충분히 그 재미를 즐길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국내에서는 고려원에서 1992년 1부를 발표한 이래 3부까지 총 여섯 권이 발간되었다. 다만 절판되어서 번역본으로 읽으시려면 헌 책방을 뒤지시는 방법밖에는 없을 듯 하다.

* 번역본 표지에 등장하는 Richard Chamberlain의 모습은 1988년 옮겨진 TV시리즈의 한 장면이다.

참고사이트
http://en.wikipedia.org/wiki/The_Bourne_Identity_%28novel%29
http://blog.naver.com/hidehiro/100006575946
http://pennyway.net/264

아키라, AKIRA(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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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o-Tokyo Akira” by https://github.com/prideout/effects-salad. Licensed under Wikipedia.

원작자 오토모가츠히로가 작품의 독립성을 위하여 별도의 위원회(일명 “아키라 위원회”)까지 구성하여 제작한 이 영화는 원작의 인기에 못 미치는 일본의 흥행성적에도 불구하고 서구에서는 저패니메이션이라는 신천지를 소개한 컬트 영상이 되어 일본으로 금의환향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장장 12권에 달하는 장편만화 원작을 120여 분에 담아낸 탓에 영화는 마치 만화속의 인물들에게 “시간이 없으니 어서들 부지런히 연기해주세요”라고 몰아붙이는 느낌이다. 요즘같아서는 당연히 ‘반지의 전쟁’처럼 3부작 쯤으로 늘였겠지.

아키라라는 상상초월의 절대존재와 비슷한 과정을 통해 탄생한 초능력자들의 대결을 중심으로 카네다와 K 의 모험과 로맨스가 3차 대전이후 재건된 네오도쿄에서 펼쳐진다. 냉정하다 할 정도로 사실적이고 웅장한 화면 – 네오도쿄의 건물들은 만화에서보다 영화에서 더 미래주의적으로 그려져 있다 – 이 이전의 저패니메이션과 차별화되어 내용에 걸맞는 형식미를 뽐내고 있는 이 작품에서 아쉬운 점은 앞서 말했듯이 짧은 러닝타임 – 원작에 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 으로 인해 사건의 설명이 부족하고 이로 인해 각 캐릭터간의 갈등과 대립이 생뚱맞은 측면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데츠오와 다른 초능력자들 간의 대립의 이유, 카네다가 데츠오를 죽이려는 이유, 부패한 정치인 네즈와 혁명가 류가 함께 일한 이유 등이 영화에서는 모호하고 – 나같이 머리나쁜 사람은 원작 만화를 읽어야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한 – 결정적으로 원작에서 19호로 불리며 극의 큰 축을 담당했던 신흥종교의 교주는 어이없게도 사이비 교리를 외치다가 데츠오가 파괴한 다리에 떨어져 죽는 식의 엑스트라로 전락하고 만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러한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키라는 저패니메이션을 뛰어넘어 사이버펑크라는 SF의 하위장르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걸작임에는 틀림없다. 원작자의 과학문명에 대한 비관적 입장이 형상화된 도시는 하나의 거대한 디스토피아였고 이는 당시 몇몇 걸출한 SF 등과 함께 훗날의 SF 의 경향을 주도하는 데에 한 몫 담당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작품은 문명비판의 메시지와 함께 추축국이었던 일본의 패배와 전후 고속성장에서 나타나는 국민의 피로감을 나타낸 작품이기도 하다. 좌익이 되었건 우익이 되었건 일본의 전후세대는 빠르게 변화하는 문명 속에서 가치관의 혼란과 정부에 대한 불신을 느꼈고 그러한 혼란은 좌우익 모두에게 무정부주의, 염세주의적 가치관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러한 열망을 네오도쿄의 폭파와 미지의 생명 탄생이라는 사건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The China Syndrome(차이나신드롬)

Kimberly Wells (Jane Fonda)는 비록 가벼운 흥미위주의 뉴스를 다루는 일을 맡고 있지만 좀 더 심각한 주제를 손대고 싶어 하는 야심찬 방송기자다. 어느 날 그녀는 카메라맨 Richard Adams (Michael Douglas)와 함께 지역의 핵발전소에 대해 홍보성 프로그램을 찍기 위해 찾아갔다가 우연히 뭔가 불길한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그것은 가벼운 지진으로 인해 원자로가 녹아내리는 가장 끔찍한 사고인 ‘멜트다운(melt down)’ – 소위 China Syndrome 이라 부르는 – 직전까지 이르렀다가 엔지니어 Jack Godell (Jack Lemmon)에 의해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Richard 는 이 상황을 몰래 필름에 담아와 방송하려하지만 경영진은 발전소 운영회사와의 마찰을 우려하여 방송을 보류한다. Kimberly 와 Richard 는 핵전문가의 도움으로 뭔가 불길한 일이 진행됨을 알게 되고 Jack 역시 발전소에 기본적으로 결함이 있음을 알게 된다. Jack 은 상부에 이를 보고하고 원자로를 멈추려 하지만 회사는 이윤의 감소를 우려하여 이를 만류한다. 분노한 Jack 이 증거를 Kimberly 에게 넘기려 했지만 회사는 이를 막으려 하고 마침내 Jack 은 발전소의 지휘실을 점거하고  kimberly 와의 인터뷰를 통해 진실을 폭로하려 한다. 그 순간 회사가 부른 기동타격대가 Jack 을 살해하여 또 한 번 진실을 은폐한다.

핵에 대한 대중의 우려가 극에 달하던 70년대 말 이 영화는 은유나 비유가 아닌 직설화법으로 핵의 위험성, 민영화의 위험성, 방송의 공공적 역할, 그리고 내부고발의 합당성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복합적이고 입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는 실제로 엔지니어이기도 했던 작가 Mike Gray 가 실제 발생했던 유사사고를 바탕으로 한 사실감 넘치는 시나리오와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던 Michael Douglas 와 진보적 연예인으로 알려진 Jane Fonda 의 열성이 결합된 결과이다. 이러한 결과 Jack 이 추적자들에 쫓겨 발전소로 도망오고 마침내 지휘실을 점거하여 인터뷰하는 그 과정을 따라간 몇 분은 웬만한 스릴러를 능가하는 긴박감을 유지하고 있다. 메시지를 설파하는 매체이면서도 긴장감과 극적쾌감을 주는 수작이다. 또한 실제로 영화가 개봉된 이후 몇 주 후 펜실베니아 주에서 유사한 사고가 발생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The Parallax View

정치적 음모론을 기반으로 한 정치 스릴러의 귀재인 Alan J. Pakula 가 그의 전성기였던 1974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케네디의 암살사건에서 영감을 받았음이 분명한 이 작품은 호쾌하게 펼쳐지는 화면 안에서 거대한 악의 세력과 삼류신문기자 조 프래디의 대결이 긴장감 있게 펼쳐진다. 시애틀의 전망대인 스페이스니들에서 유망한 정치가가 총격에 쓰러진다. 다른 이가 그를 쏘았음이 분명하지만 엉뚱한 친구가 저격범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비명횡사한다. 조사위원회는 아무런 배경도 없는 단독범행이라고 발표하지만 당시 사건현장에 있던 목격자들이 하나둘씩 의문사 한다. 마침내 음모집단의 존재를 눈치 챈 조 프래디는 현장탐방에 나서고 우연히 Parallax Corporation 이라는 이상한 회사의 존재를 알게 된다. 감독은 관객에게 스릴러 특유의 묘미인 반전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를 통해 정치적 음모집단이 어느새 우리 곁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와 있는지, 그럼으로써 얼마나 자주 우리를 기만하는지를 각성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감독의 주장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주제를 각인시키고자 하느 그의 형식실험은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