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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코믹스)

“오랜 냉전의 끝에 지구가 얼어붙는다. 어리석은 인류가 기후 무기를 이용해 지구를 영하 85도의 얼음 행성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살아남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영원히 지구 위를 돌 수 있도록 만들어진 1001량의 초호화판 설국 열차에 탑승하는 것이다. 황금칸으로부터 꼬리칸까지 모든 객차는 계급에 따라 나누어져 있으며, 채소와 육류를 기를 수 있는 자급자족 차량까지 구비되어 있다. 설국열차는 지구의 축소판이다. 모든 것은 권력층의 독재에 의해 관리되며, 꼬리칸의 일반인들은 더러운 환경에서 고통받으며 죽어가고, 황금칸은 자포자기의 퇴폐와 향락에 휩싸여 타락해간다. 장 마르크 로셰트의 유려한 그림체를 오래도록 음미할 수 있는 <설국열차>는 모두 세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국판 1권은 <설국열차>, 한국판 2권은 <설국열차: 측량사>와 <설국열차: 횡단>을 모두 담고 있다.”

대략적인 책 소개이다.

열차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예술작품이 의외로 꽤 된다. 열차탈취를 소재로 한 20년대 블록버스터 영화인 버스터키튼 주연의 ‘The General’, 아서힐 감독의 ‘Silver Streak’, 웨스앤더슨 감독의 ‘The Darjeeling Limited(2007)’,  고전이 된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 그리고 휴고프라트의 걸작만화 코르트말테제 시리즈의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이르기까지……

열차는 다양한 상징으로 활용된다. 액션영화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공간에서부터, 고향으로 떠나 타지로 가는 인간의 고독감과 두려움의 상징, 흘러가는 삶에 대한 은유, 그리고 남근의 형태를 가진데서 착안된 권력상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은유와 상징으로 활용된다.

이러한 다양한 활용 용례에서 공통적으로 끄집어 낼 수 있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열차는 ‘달리고 있다는 것’ 이다. 달리지 않는 열차는 흥미가 없다. 그저 좁고 답답한 기계일 뿐이다. 달리는 기차는 그 속도감과 한정된 공간이 주는 긴장감으로 인해 인간의 희로애락의 감정이 극대화되는 적절한 장치이기 때문에 예술가들로부터 사랑받는 공간이 된 것이다.

‘설국열차’에서의 열차는 제 스스로 달린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기계 스스로 무한궤도를 질주한다. 멸망한 지구를 돌고 있는 이 열차에 몸을 의지하고 있는 인간들. 어찌 보면 더 이상의 희망도 없는데 꼬리 칸의 사람들뿐 아니라 황금 칸의 사람들까지도 무슨 이유로 살고 있나 싶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은 이 지구 역시 차갑고 생명체 없는 우주에서 무한궤도로 돌고 있는 또 하나의 설국열차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우리의 삶도 그들의 삶만큼이나 부질없고 희망 없는 것 일수도 있다. 어쩌면 – 상당히 믿을 만 할 정도로 – 작가가 의도한 설국열차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그 자체일 것이다.

‘설국열차’에서는 계급간의 갈등을 꼬리 칸을 떼어내 버림으로써 해결한다. 상당히 편리한 해결방식이다. 현실의 지배계급도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을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다만 현실은 더욱 복잡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 현실에서의 피지배계급은 작품에서처럼 열차 꼬리에 매달려 죽을 날만 기다리는 기생계급이 아니라 지배계급을 위해 노동하는 생산자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설국열차는 꼬리 칸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열차이다.

하지만 이런 단순화나 무리한 은유가 원작의 품격을 해칠 만큼의 단점은 아니다. 모든 예술작품에서의 추상화와 단순화, 그리고 일반화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지나친 단순화로 인한 단점은 특유의 장치설정에서 비롯되는 극적 긴장감으로 무난히 상쇄된다.

아무튼 특유의 유럽적 감성으로 무장한 이 독특한 작품에 대한민국의 봉준호 감독이 눈독을 들이고서는 영화화하려 하고 있고 2010년 쯤이면 그 결과물을 볼 수 있다니 자못 기대가 된다.

The Paradine C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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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dine Case poster” by http://www.movieposterdb.com/poster/c99fe1c8. Licensed under Wikipedia.

1947년 데이빗오셀즈닉과 알프레드히치콕이 함께 손잡고 만든 법정스릴러물이다. 스릴러적인 반전보다는 남편 살해 혐의를 뒤집어 쓴 미모의 미망인, 이 미망인을 사랑하게 된 그녀의 변호사, 이를 알아채고 갈등하는 변호사의 아내, 그리고 미망인이 사랑하는 남편의 비서라는 사각구도의 심리적 갈등을 법정물이라는 소재를 통해 풀어내고 있는드라마적 성격이 강한작품이다.이런 탓인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예산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흥행성적은 저조했다고 한다. 법정이라는 공간 내에서 펼쳐지는 팽팽한 갈등의 탁월한 시각화가 눈요깃거리다. 자신의 영화에 카메오로 등장하는 것이 취미인 알프레드히치콕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The Postman Always Rings Twice

1946년 동명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 뜨내기 건달, 학대받는 아내, 둘의 공모, 이를 모르는 그리스인 남편, 느와르가 갖추어야할 기본문법을 착실히 갖춰놓고 진행되는 이 영화는 성행위의 적나라한 묘사로 인해 개봉당시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이런 구설수 때문에 국내에서는 ‘우편 배달원은 벨을 두 번 울린다’라는 개봉제목을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라고 바꾸는 해프닝도 있었다(대체 우편 배달원과 포스트맨의 차이가 뭐람).  하지만 영화는 노골적인 성애영화라거나 – 물론 웬만한 성애영화보다도 성적묘사가 탁월하다 – 전통적인 느와르하고는 약간 다른 노선을 걷는다. 영화는 둘의 범죄행위가 과연 죽음으로 단죄 받을 만큼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 살짝 의문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범죄의 요소만 빼고 본다면 서로 다른 성격의 상처받은 두 사람이 만나서 사랑에 빠지게 되는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적 성격도 강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극의 진행은 이 건달과 남편 살해범이라는 두 커플이 해피엔딩을 맺을지도 모르는 희망을 관객에게 넌지시 암시한다. 그러나 영화 말미에서 일어나는 어이없는 사고는 ‘마치 인간은 미워하지 못해도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라고 관객을 희롱하는 것만 같다. 잭니콜슨의 애절한 눈물연기가 인상적인 라스트신이었다.

Le Notti di Cabiria(Nights of Cabiria)

어린 시절 ‘길(La Strada)’이라는 이탈리아 영화에서 본 젤소미나는 너무 여리고 너무 불쌍했다. 무지막지한 차력사에게 질질 끌려 다니면서 커다란 눈으로 이리저리 눈치를 보던 그 여인의 슬픈 최후는 어린 내 마음에도 안타까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슬프기는 하지만 드러내놓고 신파조였던 이 영화의 감독은 ‘로마 무방비 도시’에서 시나리오를 담당한 명감독 Federico Fellini 이고 불쌍한 젤소미나는 그가 단골로 찾던 여배우 Giulietta Masina 였다. ‘길’이 만들어진 3년 후 이 둘은 다시 한 번 뭉쳐 또 다시 하류층 여인의 밑바닥 인생을 보여주고 있다. 4만 리라 때문에 애인한테 강으로 떠밀려 죽음의 위기를 겪은 Cabiria. 대차고 성격 활발한 여인이지만 그녀의 직업은 창녀. 밤거리에는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여러 사건이 벌어진다. 유명배우가 그녀를 집으로 초대했다가 화장실에서 잠재우는가 하면 자선사업가는 굴속에 사는 빈민들을 돕는다. 우연히 들른 극장에서 최면술에 걸렸다가 이를 계기로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로버트 드 니로를 닮은 이 남자는 그녀에게 적극적인 애정공세를 펼친다. 에피소드가 산만하게 펼쳐져 있으면서도 전체적인 윤곽을 뚜렷이 유지하고 있어 보는 내내 어리둥절하거나 하진 않다. Giulietta Masina 의 천연덕스러운 연기와 맘보 리듬이 흥겨운 영화다.

Gods And Monsters

초기 공포영화의 걸작으로 꼽히는 프랑켄슈타인, 투명인간 등을 감독했던 James Whale 의 말년에 초점을 맞춘 일종의 전기 영화.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하였고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사랑하는 연인이 죽은 채 철망에 걸린 상황을 트라우마로 간직한 이 노감독은 몸이 쇠약해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색을 밝히고 15년을 함께 해온 신앙심 깊은 가정부를 이를 끔찍하게 혐오한다. 그 와중에 근육질의 정원사가 새로 고용되고 James 는 그에게 또다시 눈독을 들인다.  스스로 게이인 Ian McKellen 이 참 맛깔스럽게 James Whale 을 연기하고 있다. 엄청난 마초주의자이면서도 한편으로 동성애자를 이해해가는 정원사 역으로 딱 어울리게 둔탁하게 생긴 Brendan Fraser 가 맡고 있다. 노년의 성, 그것도 동성애가 담겨져 있다는 점에서 흔하지 않은 소재이긴 한데 비슷한 소재로는 일본영화 ‘메종드히미코’가 있다.

The General

각종 소품의 활용에 있어 천재적인 솜씨를 지닌 Buster Keaton 이 기차를 가지고 화려한 마법을 펼친 1927년 산 작품이다. 1924년 또 하나의 걸작 The Navigator에서 배를 활용하여 극적효과를 극대화시킨 경험을 가지고 있는 Buster Keaton 은 남북전쟁 당시 실제로 있었던 한 사건을 소재로 하여 이 초유의 액션 영화를 창조하였다.

기관차 General 의 기관사인 Johnny Gray(Buster Keaton)는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군대에 지원하려 하지만 기관사로서의 역할이 더욱 쓸모 있다는 징병기관의 판단에 따라 지원을 거부당한다. 거부사유를 모르는 Johnny 는 이 사실로 인해 애인 Annabelle Lee 에게 조차 겁쟁이로 비난받는다. 어느 날 Johnny는 Annabelle까지 탄 기차를 몰고 가는데 북군 첩자들이 이 기차를 Annabelle 을 인질로 삼은 채 탈취한다. Johnny 는 홀로 그들을 추격하고 여러 아찔한 상황을 맞으며 마침내 남군 지역으로 기차를 가져오고 북군의 습격계획까지 알리는 등 공을 세운다. 당연히 오해가 풀린 애인과의 입맞춤으로 해피엔딩.

Buster Keaton 은 Charlie Chaplin 과 비교할 때 정치적 올바름이랄지 페이소스랄지 하는 보다 심오한 부분에서는 뒤쳐질지 몰라도 그것이 그의 천재성을 폄하시키지는 못한다. 당시로서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기가 막힌스턴트 – 모든 스턴트는 그가 직접 하였다 – 와스펙터클한 장면의과감한 도입 등- 열차가 다리로 떨어지는 장면은 실제 열차로 찍었는데 무성영화 시절 최고의 제작비가 들었다 한다 – 최고의 퀄리티를 뽑아낸 그의 노력과 이를 뒷받침한영화적 상상력은 이후 수많은 영화인들의 교과서가 되었기 때문이다(그의 절대 팬인 성룡을 비롯하여).

Music And Lyrics

이런 저런 코드들이 혼합되고 재탕되어 하나의 새로운 작품으로 태어난 모자이크 같은 영화다. 타이틀곡 Pop Goes My Heart 는 제목이 Men Without Hats 가 부른 80년대의 히트곡 Pop Goes The World 가 생각나게 하고, 퇴물스타가 다시 빛을 발한다는 설정은 방화 ‘라디오스타’를 연상시키고, 80년대 노스탤지어와 드류 배리모어의 결합은 Wedding Singer 를 떠오르게 한다.

로맨틱코미디에서 소재의 재탕은 그리 욕먹을만한 꺼리가 아니다. 요는 로맨틱코미디의 성공 포인트는 어떻게 관객들을 가슴 졸이게 하고 마침내는 새로운 연인의 탄생에 자연스럽게 박수를 치게끔 만드는 것인가 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충분히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 할 수 있다. 어느새 로맨틱코미디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휴 그랜트와 드류 배리모어의 결합만으로도 이야기꺼리가 충분한 마당에 80년대 퇴물스타의 화려한 복귀라는 설정은 극적긴장감을 더욱 극대화시켜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심심풀이로 실제로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현실은 그렇게 만만치 않다. 극중에서 80년대 가수들끼리 권투시합을 벌이게 해 팝계로의 복귀를 도와준다는 발상은 실제로 영국에서 80년대 가수들의 앨범발매를 상품으로 걸고 방영했다는 리얼리티쇼를 연상시키지만 그 경쟁에 참여한 이들이 새 앨범을 내고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는 소식은 들어보지 못했다. ABC를 비롯하여 많은 80년대 밴드들이 여전히 Here N Now 라는 타이틀을 걸고 영국 순회공연을 갖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80년대 노스탤지어의 자극 이상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자신의 노래를 계속 부를 수 있고 그 노래에 흥겨워하는 관객이 있다면 커다란 상업적 성공은 부차적인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실제로 그런 광경을 1년 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목격했다. Obsession 이라는 히트곡으로 한때 차트를 점령했던 Animotion 이라는 밴드의 공연을 본 적이 있는데 멤버들이 직접 악기들을 나르면서도 소수의 관객을 위해 열정적으로 노래하던 그들의 모습에서는 충분히 음악인으로서의 충만감을 엿볼 수 있었다. 물론 상업적 성공이 따라준다면 금상첨화겠지만 당시의 Animotion 의 멤버들에게는 그 장소와 그 시간 이상으로 소중한 것은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옆으로 새고 말았지만 같은 이치로 휴 그랜트라는 배우를 바라본다면 그는 그 나름대로의 현재의 연기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것 같다. Maurice 라는 야릇하면서도 지적인 영화를 통해 팬들의 인지도를 얻었지만 이후 로맨틱코미디로 노선을 선회한 이 명문대 출신 영국 배우는 좀 더 진지한 작가영화의 배역을 맡기지 않더라도, 또는 극단적으로 차기 007이 되지 않더라도 한번 씩 웃고 말 것 같다. 관객들이 좋아하면 그만이야 하면서 말이다.

Wonder Bo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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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 boys ver4” by Impawards.com. Licensed under Wikipedia.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떠오르는 작품이 하나 있었다. 바로 J.D. Salinger 의 The Catcher In The Rye. 철없는 문학교수 Grady Tripp (Michael Douglas) 의 좌충우돌 행보에서는 Holder Caulfield 의 치기어린 행동이 묻어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문득 문득 ‘작문에 제법 소질을 보이던 Holden 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대신 작가의 길을 걸었더라면 Grady 처럼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나 홀로 해보았다. 제법 근사했다. 비록 뛰어난 작품을 한 권 냈고 교수도 되었지만 Grady 는 – 나이 든 Holden 은 – 여전히 수시로 대마초를 펴댈 만큼 – 그리고 자신이 아끼는 제자 James Leer(Tobey Maguire)에게도 권할 만큼 – 반사회적이고 냉소적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극의 에피소드 들 역시 하나 하나 쪼개보면 절망적이면서도 결국 실낱같은 그 어느 희망으로 수렴해가는 구조를 지녔다는 점에서도 두 작품이 유사성을 띠고 있다. 물론 원작자 Michael Chabon 이 들으면 기분나빠하겠지만 – 그가 이글을 볼 리도 없지만 – 적어도 내게 있어 이 영화(또는 원작 소설)는 The Catcher In The Rye 에 대한 오마쥬 내지는 패러디로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또 한편으로 이 영화는 Steve Martin 주연의 Planes, Trains and Automobiles 를 연상시킨다. Grady 는 앞서의 영화에서 Steve Martin 이 그러했던 것처럼 짧은 시간에 온갖 수난을 다 당한다. 아내는 집을 떠나고, 정부(情婦)는 임신했지만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개한테 물리고, 제자는 그 개를 죽이는가 하면 마릴린 몬로의 재킷을 훔친다. 비록 이 작품이 보다 지적인 분위기가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일종의 ‘주인공 재난 영화’의 계보에 넣어도 큰 무리가 없지 않나 싶다.

결국은 모든 것을 잃어도 행복한 가족을 얻었다는 헐리웃 공식을 추가시킨 것도 비슷한 점이다(개인적으로는 더 망가뜨렸으면 어땠을까 싶지만). 혹자는 21세기 최초의 걸작이라고도 평했다는데 적어도 21세기에 보기 흔하지 않은 매력적인 작품인 것만은 분명하다. 실력파 배우들의 나름 귀여운 연기를 이끌어낸 커티스 핸슨의 역량도 맘에 들고 사운드트랙도 사랑스럽다.

African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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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pyright 1952 <a href=”https://en.wikipedia.org/wiki/United_Artists” class=”extiw” title=”w:United Artists”>United Artists Corp.</a>” – Scan via <a rel=”nofollow” class=”external text” href=”https://movieposters.ha.com/itm/adventure/the-african-queen-united-artists-1952-one-sheet-27-x-41-/a/7181-86062.s”>Heritage Auctions</a>. Cropped from original image., Public Domain, Link

생각해보니 물에서의 모험을 다룬 영화만 해도 하나의 계보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Mutiny On The Bounty’, ‘Dead Calm’ 등 바다에서의 모험을 다룬 영화도 꽤 되거니와 이 작품을 비롯하여 ‘Deliverance’, ‘아귀레, 신의 분노’, ‘River Wild’, ‘Cafe Fear’ 강가에서의 모험을 소재로 한 영화도 나름대로 적잖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은 물이 영화제작에 주는 여러 가지 장점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은 일단 공간을 한정시킴으로써 극의 밀도를 높이는데 일조한다. 한정된 공간에 놓인 인간들은 하나의 사건에 좀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이는 극의 긴장감을 높인다. 이 작품에서는 광산노동자 Charlie Allnut(Humphrey Bogart)과 선교사의 여동생 Rose Sayer(Katharine Hepburn)이라는 두 어울리지 않는 신분이 빚어지는 갈등과 애정이 낡은 통통배라는 한정된 공간으로 말미암아 증폭된다. 또한 물은 평화와 공포라는 이중적인 감정을 제공한다. 드넓고 조용한 물줄기는 평화스러우면서도 등장인물들에게 휴식을 제공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급해지는 물살은 거대한 자연의 폭력성과 이에 수반되는 등장인물들의 갈등을 암시한다. 결국 이 두 가지 감정이 교차되면서 결말은 흔히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닫는데 이 작품의 경우에는 결국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신분상의 차이를 뛰어넘은 사랑으로 귀결된다.

1914년 독일 점령지역인 동아프리카에서 오빠와 함께 선교를 하고 있던 Rose 가 1차 대전에 휘말리면서 Charlie 와 함께 겪게 되는 모험담을 다룬 영화로 명장 John Huston 이 C.S. Forester 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로맨스와 모험, 그리고 애국주의가 적당히 뒤섞인 대중관객의 취향에 딱 좋은 작품이다.제국주의 강대국들의 덧없는 싸움으로 인해 피폐해지는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반성이나 애정 따위는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Humphrey Bogart 는 이 작품으로 그 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Roxanne

영혼의 아름다움과 육체의 아름다움 중 어느 것이 더욱 소중한 것인가 하는 질문은 참 진부하지만 연애를 할 때 항상 곱씹곤 하는 질문이다. 영육 분리와 이 중 영혼에 더욱 높은 가치를 두는 가치관은 중세 기독교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 거의 맞을 듯? – 결국 이러한 가치관이 오늘날까지 면면히 내려와 일종의 상식으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유명연예인들 흔히 인터뷰에서 ‘외모보다는 마음씨를 본다’ 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는 나중에 의사나 재벌3세와 결혼하곤 하니 말이다.

Edmond Rostand의 Cyrano de Bergerac 을 현대화하여 만든 Roxanne 가 바로 이러한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다. 외모만 근사한 소방대원 Chris와 길쭉한 코 탓에 열등감에 시달리지만 재치 있고 사려 깊은 소방대장 C. D. Bates(Steve Martin)는 둘 다 재색을 겸비한 Roxanne Kowalski (Darryl Hannah)를 좋아한다. 그러나 Roxanne 의 눈에는 Chris 가 먼저 필이 꽂혔고 무식한 Chris 는 C.D. 의 도움으로 그녀와 데이트를 즐긴다.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챈 Roxanne 은 결국 둘의 음모를 알아내고 C.D. 와 크게 말다툼을 벌인다.

결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Steve Martin 의 최전성기에 최고의 역량을 발휘하여 만든 작품이 아닌가 싶다. 특히 맥주홀에서 모욕을 당한 C.D. 가 특유의 입담으로 상황을 모면하는 장면에서의 Steve Martin 의 입담은 가히 달인의 경지가 아니었던가 싶다. 원작을 현대화하여 시나리오로 담아낸 이도 바로 그이다. 이후 그는 작가로서의 길을 걷고자 했고 그 데뷔작이 바로 얼마 전에 소개한 Shopgirl 이었다. Darryl Hannah 는 이 작품과 Splash 등을 통해 80년대 섹스심볼로 부각되었다.

비슷한 영화로 프랑스에서 1990년 원작에 충실하게 만들어진 ‘시라노’와 여성판 시라노 ‘개와 고양이에 관한 진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