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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ntline : Private Warriors

프론트라인의 또 하나의 수작 다큐멘터리다.

이 작품은 군대의 민영화에 대해 다루고 있다. 즉 공공서비스의 마지막 보루로 남아있는 군대가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 민간의 효율과 창의라는 이름하에 어떻게 민영화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이익을 얻는 이들은 누구인가를 고발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부시 행정부는 말 그대로 자본가의 정부라 할 수 있다. 행정부 수반 면면이 미국의 거대기업의 임원이나 사장을 지낸 인물들이며 그들의 중심축에는 핼리버튼의 CEO를 지낸 부통령 딕체니가 있다. 전투기능을 제외한 군이 행하는 업무를 민간에게 넘기는 방침이 확정되고 나서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은 각국 – 특히 미국의 – 군사기업의 거대시장이 되어가고 있는 형국이다. 그리고 최대의 수혜자는 딕체니의 본거지 핼리버튼이다. 이 기업은 모회사 및 자회사 등을 통하여 굵직굵직한 프로젝트를 수주하여 사상최대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또한 이들을 둘러싼 부정과 부패의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어쨌든 군사기업으로서는 이라크 전의 단기간의 해결은 결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다. 이라크가 진흙탕이 될수록 그들의 이익은 증대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이들 군사기업에 의해 고용되어 유사전투기능을 수행하다 억울하게 숨져간 미국인들을 조명하여 전쟁의 참상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이들이 어떻게 현실을 외면하고 왜곡하고 있는가를 뜻있는 이들의 증언을 통해 고발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전 세계의 군사기업의 실태와 부작용에 대해서 알게끔 했고 이에 영향 받은 국내 공중파 방송들도 앞 다투어 비슷한 포맷으로 군민영화 실태를 고발하였다. 2005년 방영.

사족으로…

군사기업은 막대한 이익을 올리고 그들을 지원한 정치가는 뒷돈을 챙길 텐데 정작 나머지 행정부 자체는 어떤 이익이 있을까? 정답은 미군의 사망자 숫자를 조작하여 국내 반전 여론을 무마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군사기업의 고용인들의 죽음은 산업재해 일뿐 군인으로서의 영예로운(?) 죽음으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Frontline: Ghosts of Rwanda

Frontline logo.png
Frontline logo” by PBS.org. Licensed under Wikipedia.

“르완다 분쟁은 소수파로서 지배층을 형성해 온 투치족과 다수파 피지배계층인 후투족간의 정권 쟁탈을 둘러싼 갈등이다. 양 부족은 외모 및 문화관습상 뚜렷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투치족은 15세기 나일강 유역에서 남하한 호전적인 유목민 출신으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온순한 성향을 보유한 후투족을 지배하여 왔다. 양 부족은 외모 및 문화관습에 뚜렷한 차이점으로 갖고 있다. 벨기에의 식민통치를 거쳐 소수 투치족에 의한 다수 후투족의 지배는 고착화되었다. 1962년까지 르완다를 위임통치한 벨기에는 소수부족인 투치족(14%)을 우대하여 지속적으로 지배계급으로의 위치를 공고히 하였고, 다수부족인 후투족(85%)을 통치시켰다.

1962년 7월 독립후(초대 대통령 G. Kayibanda)에도 투치족은 후투족을 강압 통치해 오면서 1963년 12월 후투족에 의해 약 2만명의 투치족이 희생당한 학살사건을 계기로 양대 부족간의 갈등이 심화 되어왔다. 1973년에는 후투족(J. Habyarimana 소장)이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인수, ’75년에 <국가발전혁명운동당, MRND>를 설립하여 일당독재 정부를 구축하였다. Habyarimana는 MRND 주도에 의해 ’78, ’83, ’88년에 일당독재 체제하에서 대통령으로 선임되어 소수 투치족을 억압해 왔다. ‘90.6월 하비야리만다 대통령은 다당제 민주주의 실천의도를 선언하였으나, 10월부터 난민화된 투치족은 RPF(르완다 애국전선)을 조직하고, 주변국인 우간다, 탄자니아를 거점으로 정부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함에 따라 내전이 본격적으로 발발하기 시작하였다.

1993년 8월 UN과 아프리카단결기구(OAU)의 중재로 약 2년에 걸친 내전 종식과 과도연립정부를 구성하는 아루샤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양 부족간에 구성된 잠정정부가 성립되었다. 1993년 10월 UN은 동협정의 이행 감시를 위해 2,500명의 평화유지군(UNAMIR)를 파견하였다. 1994년 1월 과도정부의 구성과 관련 아루샤 협정상 총리직에 투치족을 임명하도록 약속하였으나, 후투족 출신의 하비야리마나 대통령이 같은 후투족인 트와기라뭉구를 총리에 선임하자 RPF측은 과도내각 참여를 거부하여 정국의 불안은 지속되었다.“

미국의 공영방송의 Frontline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제작한 이 다큐멘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강대국의 ‘제멋대로 국경 긋기’의 피해자인 아프리카 대륙의 모순이 한데 응축되어 분출되어온 현장 르완다의 참상이 어떻게 발발했으며 그 가해자인 강대국의 외면 속에 어떻게 집단학살로 발전해나갔는지에 대한 담담한 회고이다.

카메라는 당시 이 사태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던 인물들을 찾아 그들의 증언을 녹취하였다. 매들린올브라이트의 증언, 코피아난의 증언, 당시 파견된 UN군 사령관, 미국인을 르완다에서 소개할 당시 이를 거부하고 르완다에 남아 피난민을 구출한 미국인의 증언, 그리고 참상의 치외법권 지역이라 할 수 있는 호텔을 근거지로 삼아 수많은 피난민을 구출한 UN군 장교의 에피소드 등이 소개되고 있다.

다큐멘터리는 몇몇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 부족 간의 학살, 그리고 미국의 외면 등을 집중 조명한다. 특히 다큐멘터리는 용감하게도 미국의 공영방송 PBS의 다큐멘터리임에도 자국 정부의 학살에 대한 외면을 피해확산의 주범으로 지목한다. 자국의 이익이 걸린 곳에는 불법적으로라도 개입하면서 이익이 관철되지 않는 곳에는 개입을 하지 않는 미행정부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에릭홉스봄에 의하면 20세기는 인류의 역사 중 가장 잔혹하고 몰인정한 학살의 세기였다. 전쟁 중에 그만큼 민간인이 학살당한 사례가 이전에는 없었으며 이러한 사실은 첨단기술로 무장한 군사력과 자국의 이익이 발맞추어 철저히 진실을 은폐하는 언론에 의해 정당화되었던 ‘야만의 세기’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Frontline 의 이러한 용기있는 작품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한줄기 실낱같은 희망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The Thing (From Another World)

몇몇 에스에프나 공포영화는 흔히 그 사회의 계층 간의 갈등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조지로메로의 ‘죽음의 날’ 이나 웨스크레이븐의 ‘공포의 계단’, 그리고 로버트와이즈의 ‘The DayThe Earth Stood Still’과 같은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The Big Sleep 의 감독 크리스찬나이비 Christian Nyby 가 1951년 선보인 The Thing 역시 외계인의 출몰로 인해 갈등하는 각 계층의 모습을 통해 지적쾌락을 선사하는 영화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직업군은 ‘죽음의 날’과 비슷하다. 이 영화는 좀비의 지구정복으로 인해 고립된 생존자들 중 과학자, 군인, 민간인 등의 갈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 작품에서 군인은 생존자들의 권력을 쥐고 흔들려는 또 다른 적(敵)으로 묘사된다. 반면 The Thing 에서는 현존하는 분명한 위협인 가공할 괴력의 외계인을 상대로 냉정을 지키며 인간을 보호하려는 무리로 묘사된다. 반면 과학자 부류는 위험에는 아랑곳없이 외계생물체에 대한 과학적 탐구욕 때문에 사태를 호도하는 부류로 묘사된다.

어느 사회나 존재하는 혁신과 보수의 갈등에서 누구에게 상대적 도덕성을 부여하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사태해결 방안이 어느 관점에서 옳으냐에 대한 주관적 서술방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에서 감독은 군인을 택했다. 그들은 호기심에 의해 동기부여가 되는 직업이 아니며 대화가 통하지 않는 ‘나쁜’ 괴물 외계인에게는 군인들의 보수성이 더 유효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만약 외계인이 보다 우호적이었다면 명백히 군인들의 보수성이나 공격성은 호의적이지 않게 묘사되었을 것이다. 동시대 영화인 The Day The Earth Stood Still 이 바로 그 정반대의 경우에 해당하는데 지구에 평화의 경고 메시지를 전하러 온 Klaatu 를 적대적으로 공격한 것은 바로 군인이었다. 또한 정치인들은 그의 경고를 무시하였다. 이에 반해 과학자들은 Klaatu 의 지적능력에 공감하여 그의 경고메시지를 받아들인다. 결국 어느 사회나 위험을 받아들이느냐, 위험을 배척하느냐 하는 문제는 흑백논리로 명쾌하게 구분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군인이 과학자보다 올바른 판단을 하는 무리로 묘사되었다 하여 이 영화를 보수적이거나 반(反)진보적인 영화로 치부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을 것이다. 외계인이 ‘악(惡)’한 캐릭터라는 기본상수를 깔고 들어갔으니 만큼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나아가자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하다. 적어도 그 군사적 대응이 인디펜던스데이만큼 유치하지는 않으니까.

Dogfight(샌프란시코에서의 하룻밤, 1991)

Dogfight(개싸움)은 비행기 공중전을 가리키는 속어라고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탑건류의 전쟁액션물? 아니다. 이 영화에서 개싸움은 또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혈기왕성한 군인들이 가장 못생긴 파트너를 데려오는 이에게 판돈을 몰아주는 이색파티의 명칭이 그것이다. 내일이면 베트남이라는 전쟁터로 떠나는 에디 버들레스(리버 피닉스 분)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친구들과 함께 개싸움 파티를 위해 뿔뿔이 흩어져 추녀들을 찾아 헤맨다. 그래서 엮은 여자가 로즈피니(릴리타일러). 결국 파티의 진실을 알게 된 로즈는 화를 내며 파티를 떠나고 에디는 그런 그녀에게 사과하러 그녀의 집을 찾아가서 마지막 밤을 함께 시내를 배회한다. 올 여름 샌프란시스코를 다녀온 터라 얼마 전의 두 번째 감상할 때에는 보다 더 시내의 풍경에 애정(?)을 가지고 봤던 작품. 이성에 대한 내면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는 결론은 만족스럽지만 전쟁에 대한 알듯말듯한 모호한 자세는 약간 삑사리. 리버피닉스여 편히 쉬소서.

네이버 영화소개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0706

28 Days Later

좀비 영화는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B급 공포영화 감독들은 틈만 나면 무덤에서 잘 쉬고 있는 엄한 좀비를 깨워 – 주로 여름에 – 사람들을 고함지르게 했다. 주목할 만한 좀비 영화로는 역시 조지로메로의 일련의 좀비시리즈, 데이빗크로낸버그의 스캐너스, 그리고 존랜디스가 감독한 마이클잭슨의 스릴러 등이 있다.

이렇듯 흔해빠진 소재를 재기발랄한 대니보일이 손댄 까닭은? 그래도 재밌으니까. 예전에 전설의 고향이 아무리 욕을 먹어도 여름만 되면 구미호 이야기를 재탕하듯이 좀비는 언제 흔들어 깨워도 깨워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얼굴은 짓이겨져 썩은 것들이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꼴은 소름끼치기도 하고, 지저분하기도 하고, 한편 우습기도 하고…. 요컨대 구미가 당기는 캐릭터다.

그래서 결국 관건은 좀비영화의 한계를 어떻게 뛰어넘는가 하는 것인데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대니보일은 그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은 것으로 판단된다.

스토리는 말할 것도 없이 좀비에 의해 세상은 점령당했고 그들에게 대항하는 소수의 인간들이 서로에게 연락을 취하면서 모이려고 한다. 수많은 난관을 뚫고 도착한 그 곳에는 좀비보다 무서운 인간(!)들이 버티고 있다는…. 무시무시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상황은 조지로메로의 Day of The Dead 와 흡사하다. 하지만 나름의 오리지날리티도 있다. 현재 후속작 28 Weeks Later 가 2007년 개봉예정이라 한다.

M.A.S.H

도널드서덜랜드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반골 스타일이다. 영화에서 그의 별명은 Hawkeye, 즉 매의 눈이다. 그의 외모상의 특징을 잘 말해주는 한편으로 그의 영화이력에서의 캐릭터를 잘 표현해주는 단어가 아닌가 싶다. 이 영화에서도 그가 아니면 누가 Hawkeye 역을 맡았을까 할 정도로 딱이다. 때는 한국전쟁, 공간은 바로 그 전쟁터 한국. 주요참전국인 미국의 야전병원(M.A.S.H : Mobile Army Surgical Hospital)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룬 이 영화는 뒤에 TV시리즈로도 큰 인기를 얻은 코미디다. 한국전쟁을 소재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한국이라는 보다 크게는 아시아라는 제3세계의 모습을 희화화하거나 고증이 부정확했다는 점에서 – 이 영화에서도 거리에서 베트남식의 복장을 하고 다니는 이들이 자주 눈에 띈다. 하지만 Remo 처럼 아예 한민족의 무술을 배워 수퍼히어로가 된다는 액션영화에서의 어설픈 한국에 대한 묘사보다는 낫다. – 해당 지역의 영화팬에게는 별로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지만 혁명적이거나 반전의 메시지는 담지 않았더라도 체제 안에서의 전쟁에 대한 조롱, 자유주의적이거나 나아가서는 가치전복적인 뉘앙스 때문에 온전히 이 영화의 가치를 부정할 수는 없는 영화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때로는 방종으로 보일만큼의 장교들의 반항적 문화, 근본주의적 기독교에 대한 조롱 등 정치적 메시지가 어느 정도 삽입되어 있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로버트알트만이 특별히 이 영화를 통해 급진적인 정치성향을 표현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음에 틀림없다. 그저 시대와 공간이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같은 해 나온 마이크니콜스의 Catch 22 보다는 격이 떨어진다.

The Wild Bunch

샘페킨파의 “수정주의”적인 웨스턴 와일드번치는 어쩌면 자본가나 총잡이나 다 한통속으로 협잡질을 주무기로 돈을 벌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면 오히려 정통극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철도회사의 돈을 가로채려는 강도 일당과 그들을 막기 위해 회사가 고용한 그들의 전 동료간의 추격전이 이 영화의 고갱이를 차지하고 있다. 서로 물고 물리는 추격전에서 일승일패를 거듭하다가 결국 강도 일당은 강도가 가져서는 안 되는 우정과 인간성이라는 덕목으로 말미암아 그런 덕목은 애초에 갖고 있지도 않던 멕시코의 반란군 장군 일당과의 끝을 보는 총격전으로 몰살당하고 만다. 주인공들의 덧없는 죽음이라는 측면에서 “보니와 클라이드”를 닮았고 철도회사와의 갈등이라는 측면에서는 맬부룩스의 코미디 “불타는 말안장”과 비교해봐도 좋을 것이다.